77화
‘아, 백무경 이 새끼 진짜.’
목덜미가 얼얼하고 뻐근했다. 하윤은 고개를 까딱이며 불편함을 해소해 보려고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그러니 욕을 그칠 수가 없었다.
무경은 물리적인 방법으로 하윤이 의식을 잃게 한 다음 넥타이로 눈을 가렸다. 눈을 가린 넥타이를 임의로 수정할 수 없도록 팔은 몸 뒤로 하여 수갑을 채웠다.
하윤은 자신이 이들에게 도움을 주러 가는 것인지 아니면 범죄자로서 연행되어 가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혹시 자신이 죄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저지른 일이 있던가 생각하다가 마침 몇 가지 떠오르는 게 있어 입술만 깨물었다.
눈이 가려지고 손이 묶이자 백무경과 박건영이 좌우에서 하윤을 부축했다. 이끄는 대로만 얌전히 따라오면 어려울 게 없다는 데 공무원만 아니었으면 주먹이 나갔을 것이다. 물론 손이 묶여 있지 않다는 전제도 필요하겠지만.
“조금만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자!”
“이미 늦었어.”
“아니!”
“아니면 공중에 들려서 갈래?”
무경의 말에 하윤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하지도 못할 거면서.’
그러나 통하든 말든 무경이 자신에게 힘을 쓴다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았다. 그게 뭐라고.
“아이고, 불편하시겠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 전에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진짜 다 왔습니다. 다 왔어. 바로 저 앞입니다.”
“그런데 진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어쩔 수가 없네요. 아휴, 그게 통했으면 피차 편하게 갔을 건데. 그냥 시동어 한 번 외치면 되니까 다음에 올 때도 따로 걸 필요도 없고.”
다신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하윤은 박건영의 말에 속으로 이를 갈았다.
게다가 박건영이 흘린 말 또한 그냥 넘기기 힘들었다. 시동어 한 번 외치면 다음에도 또 쓸 수 있다는 말은 능력의 여파가 언제까지 갈는지 가늠키 어렵게 했다. 그가 살아 있는 한 하윤은 시동어 한 번에 시야가 차단될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텔레포터들은 공간인지 능력이 뛰어나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거든요. 능력을 잃어도 그런 감각들은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한 꾸준하게 가거든.”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능력이 돌아온 지금은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주변이 훤히 느껴졌다. 다만 정확한 위치를 짚기 위해 지도 보듯 넓은 범위를 훑고 있어 몸을 움직이는 게 원활하지 않았다.
‘자꾸만 위치를 보지 말라니까 괜히 하고 싶잖아.’
“게다가 하윤 씨는 아무래도 이쪽에 소속되지 않았잖아요?”
박건영은 은근슬쩍 차 안에서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썩은 동앗줄 같은 게.’
어느새 건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윤은 괜히 발을 헛디딘 척 박건영을 몸으로 밀었다. 박건영은 ‘아이쿠!’ 소리를 내며 휘청였으나, 넘어지진 않았다. 무경이 능력을 써 잡아 준 탓이었다.
“감사합니다. 백 소령님.”
“앞에 계단이니 주의하십시오.”
“들으셨죠? 하윤 씨, 계단이니 발 앞 조심하십시오. 또 헛디디지 마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순순히 대답했으나 무경은 하윤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뭐가 또 거슬렸는지 알 수 없었다. 알지 못하니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하윤은 무경에게 뭐라고 하는 대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에 들어와서는 잠시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이 다가와 몸수색과 소지품 검사를 했다. 하윤은 문득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사진을 걱정했지만, 능력자를 쓴 건지, 아니면 기계를 쓴 건지 가방을 쏟아 내용물을 직접 보지는 않았다.
간단함의 탈을 쓴 복잡한 검색을 마치고 하윤과 무경, 그리고 박건영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는 지상이 아니라 지하로 향했는데, 꽤 오랫동안 움직였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막 걸음을 내디뎠을 때, 하윤은 아주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오래 묵은 카펫 냄새.
‘거기.’
무경의 집 신발장 안에 연결된 문. 그리고 그 문을 열면 들어갈 수 있는 서이주의 서재.
슬쩍 발을 끌자 바닥 촉감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이제 김희원 씨를 만나 볼 건데, 김희원 씨가 있는 곳은 좀 특별한 곳이에요. 관리도 엄격하게 되고 있고.”
“어떻게 특별한 곳인지는 몰라도 관리가 엄격하게 되고 있다는 건 잘 알겠네요.”
하윤의 대꾸에 박건영은 가볍게 웃었다.
“어떤 메커니즘으로 구현된 건지는 잘 몰라도 여기에 들어온 텔레포터들은 능력을 못 쓴대요.”
질문을 사전에 차단한 박건영의 말에 하윤은 어깨만 으쓱였다. 그게 되겠냐라는 말이 목 끝에서 간질거렸다.
“김하윤 씨. 혹시 뭐 느껴지는 거라도 있으세요?”
“뭐가요?”
“텔레포터들은 힘을 못 쓰는 곳이라잖아요. 뭔가 답답함을 느끼거나 불쾌감을 느끼거나 그럴까봐서요.”
“그런 건 없는데요.”
“그럼 다행이고요. 아, 아닐 수도 있나?”
목소리는 안타까워했지만, 능력이 있었으면 불편했을 테니 능력이 없어 괜찮은 게 다행은 아니겠거니 하는 말이었다.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지금은 박건영의 말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김희원을 만나는 순간이 이제 곧이었다.
긴 복도를 지나 어느 방에 들어오자 무경은 하윤의 눈을 가린 넥타이와 수갑을 풀어 주었다. 오는 내내 말수가 없던 무경은 이번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하윤을 피하듯 서너 걸음 떨어져 두꺼운 유리 벽 너머를 바라볼 뿐이었다.
면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했다. 그나마 설명해 줄 만한 사람인 박건영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받은 파일을 열고 뭔가를 기록하느라 바빴다.
‘기다리는 수밖에.’
기대 때문인지, 아니면 불안 때문인지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하윤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삼면이 흰 벽이었고 한 면은 두꺼운 유리로 되어 있었다. 유리 너머에는 컨테이너를 세 개쯤 합친 것 같은 크기의 건물이 있었다.
‘아마도 저기에 있는 모양이지?’
하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던 다른 것들이 보였다.
수많은 문.
방 안은 물론이고 유리 벽 너머의 건물이 있는 공간까지 수많은 문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문이 많다고 할 수 있나?’
문은 건물을 샐 틈 없이 둘러싸고 있었으나, 그중 [문]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문은 없었다. 문과 문이 얽혀 제대로 열릴 만한 문이 없었다. 살짝 맞물리는 곳에 조금이나마 열릴 것 같은 문이 있기는 했으나 명패를 봐선 탈출다운 탈출은 하지 못하리라.
‘텔레포터들이 힘을 못 쓰는 곳.’
하윤은 박건영의 설명을 떠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문을 만들어 볼까 싶었지만, 사각 없이 자리한 감시 카메라 때문에 그만두었다. [문]을 여닫는 것이 일반적인 초능력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괜한 빌미를 줄 필요는 없었다.
이곳엔 일반인보다 초능력자가 많은 곳이었다. 문을 여닫는 것인 줄은 몰라도 하윤이 능력을 쓸 줄 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다시 오긴 싫지만 보고 싶기는 한데.’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하윤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시죠?”
“긴장돼서요.”
“하윤 씨가요? 조금 전엔 그런 기색 없으시더니.”
박건영이 능글맞게 웃으며 의자를 끌어오더니 하윤의 앞에 앉았다.
“하실 일은 다 끝나셨나요?”
“뭐, 아직 시작도 안 했죠. 원래 일이란 건 준비하는 거랑 뒷정리가 제일 품이 많이 드는 법이잖아요? 거기다 본 작업은 제가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누가 하시는데요?”
“하윤 씨가 이제 해야죠.”
“…….”
박건영은 밉살맞게 씩 웃었다. 하윤은 그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일반 소시민으로서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 말았다.
미운 놈 보기 싫어 하윤은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보다가 문의 형태를 보고 입을 열었다.
“혹시 선생님이 이곳 개발에 참여하신 건가요?”
“오, 어떻게 아셨죠?”
“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선생님 느낌이 났거든.”
문과 문이 얽힌 모습이 꼭 자신이 서이주를 두고 온 그곳에 들어갈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니라면 단순한 자의식 과잉이었겠지만.
“그런 게 보이나? 난 별 특색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넓은 공간에 조잡한 건물 하나 가운데 둔 것 하며. 거기다 먼저 왔던 아들은 별말도 없었고.”
박건영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무경을 턱짓했다. 하윤은 무경을 힐긋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선생님이 부동산 둘러보실 때 자주 따라다녔거든요. 그래서 선생님 건물 취향에 관해선 내가 잘 알지. 저 아들내미는 이런 쪽으론 영 관심이 없어서 하나도 모를걸?”
“어느 부분에서 그런데?”
내내 조용하던 무경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보면 딱 느낌이 오는 그런 거? 이런 건 설명하라고 하면 못 해.”
너희 눈엔 보이지 않을 테니까. 하윤은 뒷말을 삼키며 입꼬리를 올렸다. 무경은 무어라 더 말하려는 듯이 입을 달싹였으나 때마침 준비가 다 되었다는 알림 전화가 왔다. 무경은 다시 입을 다문 채로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컨테이너 집에서 손이 묶인 남자가 두 명의 안전요원의 사이에서 힘없이 걸어왔다. 하윤은 문득 이 자리를 달아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자, 김희원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어 발끝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버텼다.
상황에 관한 인지보다 인내하는 것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마침내 김희원을 어떠한 가림막도 없이 마주했을 때, 하윤은 머릿속이 헤집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역하고, 꺼림칙하고, 신경이 한껏 예민해졌다. 마치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존재를 마주한 것처럼.
“…….”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김희원을 죽이고 싶었다.
‘안 돼.’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오히려 내내 그리웠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고 기뻐해야 했다. 하윤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은 아니리라.
“희원아.”
하윤은 희원을 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희원을 데리고 오던 안전요원이 하윤을 경계하며 고갯짓했다. 하윤은 도움을 청하듯 박건영을 돌아보았다.
“우리나라 정서상 암만 친구 사이라고 해도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오는데 자리에 앉아서 고개만 까딱이는 것도 그렇잖습니까. 이 친구가 일반이기도 하니 거리 유지만 하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박건영의 변호에도 안전요원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눈치가 보인 하윤은 작게 신음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