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그러다가 사이드브레이크를 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무경은 참관인 한 명이 더 올 것이며 그가 온 뒤에는 보안상 눈을 가린 채 이동할 것이니 놀라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휴대전화는 내가 미리 꺼 뒀어.”
“언제?”
“아까.”
그런 대답을 원한 게 아닌데. 하윤은 자다 일어나 뻑뻑한 눈가를 비비려 손을 들었다. 그러나 손을 눈가에 대기 전에 무경에게 가로막혔다.
“그런데 뺨은 왜 그래? 누구한테 맞았어?”
“그냥 시비가 좀 걸려서.”
“그래서 누구?”
“있어, 그런 사람.”
“있으니까 맞았겠지.”
“아, 넌 몰라도 돼.”
“네 일인데 내가 왜 몰라도 돼?”
“…….”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걸 수도 있잖아.”
말문이 턱 막혔다가 수작 운운하는 소리에 김이 샜다. 하윤은 미소만 띤 채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참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차 근처로 다가왔다.
“넌 여기에 있어.”
무경은 밖에 나가 그가 내민 서류와 신분증을 확인한 다음 경례를 나눴다. 그런 뒤에야 참관인은 무경의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는 차에 타자마자 하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어떻게 오늘 시간이 되셨네요! 반갑습니다. 박건영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하윤입니다.”
“실물로 뵙는 게 훨씬 미남이시네요. 그런 소리 많이 들으시죠?”
서글서글한 웃음과 달리 묘한 인사였다. 그냥 외모를 칭찬하는 것인가 생각하기엔 미처 다 숨기지 못한 눈빛이 매서웠다. 하윤은 아직 차에 들어오지 않은 채 바깥에 서 있는 무경을 힐긋 바라보았다.
‘아, 역시 오늘 오는 게 아니었나.’
“나름 사진발 잘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아니면 어릴 때 사진을 보셨던가요?”
“아니요. 그거랑 좀 다른 느낌인데. 아, 뭘까.”
뭐지? 뭘까? 박건영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그러다가 조수석으로 몸을 훅 내밀며 마저 말했다.
“안경이 없어서 그런가.”
박건영의 말에 하윤은 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 봐라.’
박건영의 눈이 수상쩍게 반질거렸다. 그리고 하윤은 이렇게 반질거리는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대체로 어떤 능력자인지 알고 있었다.
‘정신 조작계.’
눈이 마음의 창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하윤의 선생, 서이주는 그것이 뇌와 관련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신계 능력인지라 가장 직접적인 눈으로 표출이 되고, 또 남의 뇌에 침범하기 때문에 가장 능력치 인출이 선명하게 되는 눈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되는 말이고 딱히 이해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일반인들은 정신 조작계 에스퍼를 만나는 일이 드물었고, 정신 조작계 에스퍼는 정부에서 나름 철저히 관리되고 있으니까.
‘따지고 보면 나도 일반인인데.’
일반인인 김하윤은 정신계 에스퍼를 만나는 일이 드물어야 했겠으나 에스퍼 김하윤은 아니었다. 조각인 무경과 함께 어렸을 적부터 정신계 에스퍼를 만나는 일이 잦았다. 합의로 금제를 걸었고 또…….
‘선생님.’
하윤은 서이주를 떠올리다가 다시 박건영이라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하윤을 계속 응시했다. 하윤은 그와 잠시 눈을 마주하다가 웃으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왜 웃으시죠?”
“그냥요.”
“그냥?”
“예. 그냥.”
“무슨 의민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만 물어도 될 법한데 박건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고저 없이, 일정한 리듬감을 주는 말소리. 그리고 약간의 침묵.
“…….”
“김하윤 씨?”
“혹시 못 들었어요? 무경이랑 저, 어릴 때 머리 만져서 금제 걸고 그랬는데. 그래서 주워들은 것도 많고 본 것도 많은데.”
하윤은 자신의 머리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인식하고 있으면 잘 안 걸리잖아요. 피차 피곤하게 그러지 맙시다.”
“하하, 참.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제가 정신계 에스퍼이기는 한데, 처음 만난 사람을 그것도 일반인 상대로 능력 쓰고 그러진 않습니다. 그랬다간 처벌을 받기도 하고.”
“…….”
“아무래도 예민하신 분들은 제 눈빛이나 말투에 오해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능력이 능력이다 보니 눈에 좀 티가 나나 봅니다. 말투야 뭐, 거의 직업병이죠. 직업병.”
아무 의도 없었노라 변명한 박건영은 변명하듯 또다시 하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능력을 쓸 때나 쓰지 않을 때나 비슷하지 않냐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하윤은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계 능력자를 홀로 두고 무경이 밖에 나가 있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의심스러운 정황이었으니까.
“정말인데.”
“…….”
“하지만 뭔갈 묻고 싶었던 건 사실이라, 그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네가 부정 안 하면 뭐 할 건데. 뻔뻔한 새끼.’
하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계열은 다르지만 뺀질거리는 게 박 대리를 떠올리게 했다. 같은 성씨라 더 그럴지도 몰랐다. 묻고 싶지 않았으나 물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게 뭡니까.”
“서이주에 관한 거.”
“…….”
“정확히는 십 년 전, 참사가 일어났던 그날 밤에 그녀가 뭔갈 남기지 않았는지. 물건이라든지 말이라든지.”
“그건 예전에 다 말했었는데.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나요? 아니면 그 기록을 보지 못하시는 분이 신가? 그럼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그 정도로 권한이 없는 사람이라면 말하고 싶지 않다. 하윤의 뜻을 알아차린 것인지 박건영은 씩 웃으며 건치를 드러냈다.
“웃지만 마시고요. 벌써 십 년 전 일 아닙니까. 이젠 기억도 잘 안 나요. 충격적이었던 장면만 드문드문 기억날 뿐.”
“그야 그렇겠죠.”
“…….”
“그럼 질문을 바꿔 봅시다. 그날에 국한 시키지 말고 십칠여 년간 서이주의 곁에서 보고 배운 것. 그것들은 기억합니까?”
“글쎄요.”
“대답에 자신이 없으시군요.”
“어쩔 수 있나요. 능력을 잃은 것도 십 년은 됐잖습니까.”
“보통은 더 선명하게 기억하던데.”
“……?”
“나름 엘리트였잖습니까? 김하윤 씨.”
일순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하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박건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박건영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저도 이래저래 많이 주워들었거든요. 당시 서이주가 보통 거물이 아니었잖습니까? 거기다 훌륭한 자녀분도 낳으셨고.”
박건영이 창밖을 향해 눈짓했다. 제법 멀찍이 떨어졌는지 그를 따라 힐긋 바라보는 것으론 무경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귀한 인연도 찾으셨고. 그래서 제가 아는 분께 연락이 왔던 거고.”
귀한 인연. 하윤은 박건영의 말을 속으로 곱씹다가 블랙박스의 전원을 껐다. 아마도 박건영은 무경과 하윤이 금제를 걸 때 도움을 주었던 초능력자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친인척 관계든, 아니면…….
‘적인가, 아군인가.’
박건영은 적이라기엔 아직 태도가 모호하고 아군이라기엔 그가 굳이 자신의 아군이 될 이유가 없다.
“어쨌든 엘리트들은 능력 쓰는 거 오지게 안 잊어먹어요. 잊으래도 못 잊을걸? 왜냐면 자기가 있었던 위치로 돌아가야 하거든.”
“글쎄요. 제 경우엔 돌아가기 늦은 것 같은데.”
“그거야 모르죠. 엘리트 코스에서 보면 조금 늦을지 몰라도 일반인 사이에선 아니니까. 김하윤 씨가 스물일곱인가, 여덟인가?”
“…….”
“게다가 서이주가 선생이었잖습니까? 원래 다 그렇게 말해요. 어렸을 때부터 양질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게 당연한 거니까 특별한 줄 모르거든. 근데 비교하면 티가 나요. 즉, 김하윤 씨가 다 잊으셨다고 해도 다른 이들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러니까 벌써 단념하지 말자고요.”
누구와 비교할 참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대상이 누군지는 분명했다.
김희원과 김하윤. 단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했던 말이 있어서 송구스럽긴 한데,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김하윤 씨에게 협조를 구할 참이었거든요. 아직 안 썼으니까 앞에 했던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요?”
박건영은 자신의 머리를 손끝으로 짚었다. 아닌 척했지만, 결국엔 정신을 만질 셈이었나 보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말하기 편하게 너무 경계심을 갖지 않게 하려는 건데. 김하윤 씨 가드가 워낙 높아서 쉽지 않네요.”
“무경이랑 이야기가 다 된 겁니까?”
하기야 백무경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자리를 피해 준 것 자체가 그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일 테니까. 박건영은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일이 일이다 보니 협조를 해 주시더군요.”
“눈만 가린다고 알고 있는 건 아닌지?”
“뭐, 일단 눈을 가리는 건 맞으니까요.”
“……그렇게까지 해서 묻고 싶은 게 대체 뭡니까?”
“그런 거짓말은 왜 한 겁니까?”
“……?”
“당신이 백 소령을 속였잖아. 백 소령의 조각이 김희원이라고.”
“…….”
“아주 가관이던데.”
박건영은 품을 뒤지더니 증명사진 하나를 하윤에게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