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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74화 (74/162)

74화

무경이 말한 조만간은 사흘 뒤였다. 고작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봉오리만 삐죽삐죽 내밀고 있던 나무들이 그 새 탐스러운 꽃을 틔웠다. 희거나 분홍색을 띠는 꽃잎들이 바람 불 때마다 하나둘 팔랑팔랑 날아들었다.

“후…….”

하윤은 바람결을 타고 날아온 꽃잎이 저를 스치고 지나갈 때쯤에야 머금고 있던 연기를 내뿜었다. 그런 다음 어설프게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담배를 까딱였다.

남들이 답답할 때마다 피우길래 피우면 뭐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피운다고 답답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뾰족한 수가 생각나는 것도 아니었다.

‘하기야. 그랬다면 전 국민이 다 피웠겠지만.’

처음 사 본 담배 한 갑이 아직 반절은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하윤은 더 피울 생각이 없어 그대로 꺼 버렸다. 하윤은 습관처럼 안경을 올리려다가 제 뺨만 문질렀다.

‘아, 안경 안 꼈지.’

문득 예전 쓰던 안경에 관해 서이주가 남긴 당부가 생각났다. 하윤의 눈이 사람 꾀기 좋으니 안경을 쓰고 다니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하윤은 이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안경을 벗고 있으면 사람을 꾀기는커녕 시비가 잘 걸렸다.

예전에 최성한이 그랬고, 그 이전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다른 놈들. 그리고 아주 간혹 여자들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초등학생 시절에만 잠깐 그랬고 중학생 때부터는 여자들에겐 시비가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거의 남잔가.’

그리고 최근엔 박 대리가 시비를 걸었다.

‘아, 박 대리 그 새끼.’

요즘 따라 박 대리가 유독 하윤의 신경을 긁어 댔다. 바쁜 중에 사직해서 업무를 덤터기 씌워서라고 하지만 또 따지고 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 회사에서 퇴직하는 사람이 저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후임자도 곧 정해지는 마당에. 하윤이 생각하기로는 그냥 박 대리의 심사가 꼬인 것이었다.

그는 최근에 그렇게 유난을 떨던 애인과 헤어지고는 세상 무너진 것 같이 살았다. 결근과 조퇴를 밥 먹듯이 반복했다. 잘리지 않은 것은 그간 그가 해 놓은 정치질이 얼마나 끈끈한 끈이 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또 얼마 안 있으니 여기저기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윤에게도 소개해 줄 사람이 없냐며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 회사 실적보다 더 어려운 게 상사 소개팅 수확이라고. 그냥 해 주기도 싫어서 말았더니 선을 넘나들다 못해 고무줄뛰기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서지 않아도 소개해 주겠다는 사람이 많았던 하윤을 질투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오늘 박 대리는 기어코 선을 훌쩍 넘었다. 오늘도 소개팅 이야기를 꺼내다가 대놓고 무시하는 하윤의 태도에 꼭지가 돌았는지 갑자기 멱살을 잡았다. 민간인이라 손을 쓰지 않으려고 했더니 그게 오히려 만만해 보였는지 주먹을 휘둘렀다.

그 순간 수십 개의 문이 박 대리를 향해 입을 벌렸으나 문을 볼 줄 모르는 그가 무엇을 알랴. 그저 하윤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깜빡였을 뿐이었다. 민간인을 죽일 뻔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렌즈를 꼈음에도 눈 색이 혹 바뀌었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싸워서 기분이 상했다는 핑계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눈 색도 확인하고 놀란 가슴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때쯤에 무경의 연락이 왔다.

김희원을 만나 줄 수 있겠느냐는 내용의 연락이었다. 김희원은 현재 특수한 장소에서 보호 및 감시하고 있어 하윤이 직접 가서 만나야 하는 모양이었다.

‘어디다 가둬 뒀을까.’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만큼 김희원을, 문지기를 가뒀다는 공간에 흥미가 갔다. 물론 간다고 해서 알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특수한 장소다 보니 민간인인 그에겐 공개되지 않을 테니까.

‘괜히 갔다가 이상한 거에 걸리면 안 되는데. 두뇌를 까 본다든가 그런.’

그에 비하면 눈 가린 채 이동하는 건 차라리 온건했다. 하윤은 우려를 담아 갔다 와도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없는 것인지 물었다. 무경은 조금 느린 답장으로 괜찮다는 말을 보냈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하윤은 이내 무경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슬슬 조급해지는 중이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언제쯤 가능하겠느냐는 무경의 메시지에 하윤은 간단하게 답장했다.

[오늘.]

기세 좋게 오늘 당장 보자고 했으나 막상 약속 장소로 나오자 그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윤은 벤치에 앉아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몸을 웅크렸다. 진단서도 끊을 겸 연락을 끊자마자 조퇴했더니 시간이 조금 남았다.

해가 길어진 탓에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에서야 주홍색 노을이 졌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한가롭게 구경하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학생일 때 조퇴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괜히 찝찝하네.’

자리를 박차고 나오느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로 덮어 두고만 왔던 일이 생각났다.

‘아, 그거 입력 잘못한 것 같은데. 전화 줘야 할 곳도 있고 전화 올 곳도 있고.’

하윤은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괜찮은지 묻는 메시지들이 몇 개 들어와 있었다. 박 대리를 욕하는 것도 있고 저더러 좀 참으라는 내용도 있었다. 하윤은 걱정 끼쳐 죄송하다는 말을 적었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가까스로 문구를 정해 보내고 났을 때, 익숙한 차가 다가왔다.

“……어.”

창문이 내려가고 마찬가지로 익숙한 얼굴이 밖으로 불쑥 나왔다.

“타.”

인사 하나 없이 무경은 하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하윤은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가 이내 서둘러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냥 머리 한 번만 훑었을 뿐인데 언제 올라왔던지 꽃잎 몇 개가 후두두 떨어졌다.

무경은 하윤이 차에 올라타 안전띠를 매자마자 차를 출발시켰다.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으나 저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하윤은 가방을 꼭 안은 채 앞만 바라보았다.

주황 노을빛이 정면으로 들어와 눈을 뜨기 힘들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을 때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무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핸들을 툭툭 쳤다.

‘아, 퇴근 시간.’

아직 본격적인 퇴근 시간까지는 아님에도 도로엔 차들이 그득했다. 이 모습을 보고 답답해하지 않을 직장인이 누가 있으랴. 그리고 그건 무경에게도 해당하는 말인 듯했다. 하기야 암만 염동력으로 난다 긴다고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날아가긴 그렇지 않은가.

그랬다간 아마 유튜브 같은 곳에 영상으로 박제될 것이다.

하윤은 별안간 웃음 참기 챌린지를 하는 사람같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날아다니는 무경의 모습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왜?”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티가 난 모양이었다. 무경은 하윤을 흘겨보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그냥 뭐.”

“너도 교통체증을 겪는구나 싶어서. 그냥 날아가면 안 되나?”

“그랬다가 영상 찍혀서 이상한 사이트에 박제되기라도 하면 골 아파져.”

“크흠.”

무경은 왜 그러냐는 뜻을 담아 하윤을 바라보았으나 하윤은 입을 꼭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혹여 무경과 눈이 마주칠까 봐 아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버스 정류장에 정차한 버스가 시커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때마침 무경도 학생들을 봤는지 비슷한 주제로 입을 열었다.

“나는 저만할 때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아무것도 생각 안 나?”

“…….”

“내가 많이 말해 줬었잖아.”

“아무것도 모르겠어. 떠오르는 게 있다고 해도 그게 진짜 꿈인지, 아니면 네가 지어낸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건지. 아니면 진짜 내 기억인지.”

“나한테 말해 주면 되잖아. 그럼 내가 진짜인지 아닌지 말해 줄 수 있는데.”

하윤은 십 년 전 기억을 막 잃은 무경을 앞에 뒀을 때를 떠올렸다. 그땐 무경이 화로 가득 차 있어 더 거친 말과 손짓, 발짓도 오갔었다.

‘그때 이 정도만 되었더라면.’

그랬다면 자신은 조금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몰랐다. 차분히 무경을 설득한다든가. 그랬으면 희원을 이용한 거짓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엎지른 물을 보러 가는 중이었고.

“내가 기억해 내서 가르쳐 줘야 할 텐데.”

눈부시던 주홍 노을이 신호 몇 번 받는 사이 자취를 감추고 파란 저녁이 오고 있었다. 하윤은 창문에 조금 전보다 선명하게 비친 무경을 바라보았다. 뭔가가 자꾸 거슬리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 내지 못했다.

“내가 이대로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해서, 걔도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하윤은 가볍게 웃었다. 아무것도 믿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절 희원이한테 데려가는 무경이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냥 둘 다 기억 못 하는 거지.”

“…….”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어. 한쪽만 기억하면 너무 외롭잖아. 힘들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래, 이건 그냥 내 생각이야.”

“…….”

“난 그냥, 드디어 만났는데 기억 찾는 것에만 몰두해서 좋은 시절을 다 놓칠까 봐 그러지. 이미 많이 보내 버렸잖아.”

“…….”

“그냥 대충 걔가 걔고 내가 나고. 그 정도로만 하고 행복하게 살면 안 되는 건가?”

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윤은 무경의 굳은 표정을 보며 자그맣게 덧붙였다.

“이것도 그냥 내 생각. 하기야 그게 되면 지금 날 데려갈 필욘 없겠다. 그렇지?”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참다못한 하윤은 라디오를 켜며 물었다.

“라디오 틀어도 돼?”

무경이 대답하기도 전에 라디오 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교통 정보를 들으며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복잡한 머릿속과 달리 차는 어느새 꽉 막히던 곳을 벗어나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을 바라보다가 하윤은 어느새 잠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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