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하……!”
의식이 있을 때 최대한 주거지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급히 차의 시동을 켰다.
똑똑똑.
분명 소리가 멀어져 바깥소리들이 이상하게 들리는 중이었는데, 창문 두드리는 작은 소리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반응하듯, 왼쪽 머리털이 삐쭉 섰다. 무경은 그리로 고개를 돌리고선 작게 숨을 들이켰다.
“……!”
김하윤이 고개를 숙인 채 차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선팅이 되어 있어 어두운 밤중에, 그것도 가로등과 먼 곳에 주차된 차 안을 보기 힘들 텐데도. 김하윤은 정확히 무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경아.]
“…….”
창에 가로막힌 김하윤의 목소리가 약간 둔하게 들렸다.
[나야. 김하윤. 창문 좀 열어 봐.]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무경은 문을 열라는 김하윤의 말이 서럽게 느껴졌다. 자신이 잠긴 문을 열지 않았으면서 김하윤이 괜한 늑장을 부리는 것 같았다.
‘……도망치라고 해야.’
김하윤이 암만 밉다고 해도 그는 일반인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 자신으로부터 최대한 물러나게 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알리게 해야 했다. 그러나 무경은 이미 안전 수칙을 따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스스로 운전해서 최대한 멀어지려 했던 생각이 무색하게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때 차 문 잠금이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더니 김하윤이 차 문을 열었다. 김하윤은 조수석에 가방을 던진 후 무경의 안전띠를 풀었다. 바깥 차가운 바람과 함께 김하윤의 체취와 존재감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얼굴 하얗게 질린 것 좀 봐. 움직일 수 있겠어?”
무경이 대답하지 못하고 굳어 있자 김하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뒷좌석 문을 미리 열어 두고는 무경을 안아 들었다. 꽤 익숙한 일인 것처럼 요령이 들어가 있었다.
김하윤은 무경을 뒷좌석에 눕힌 다음 자신의 코트를 벗어 무경에게 덮었다. 그런 다음 운전석에 앉아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일단 여긴 밀집 지역이라서 좀 빠져나가야 할 것 같거든. 그게 아니라도 이렇게 주차해 놓으면 다른 차들 못 지나가니까.”
김하윤은 다소 불쾌해도 오늘만 참으라고 말하더니 제법 능숙하게 운전해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무경은 잘 보이지도 않는 김하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눈을 감았다. 밖으로 쏟아질 것만 같던 힘이 조금 전보단 잦아들었다.
아프고 어지러운 것은 매한가지이나 누웠기 때문일까. 운전석에 엎드려 있던 것보다는 조금 나은 것도 같았다.
무경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김하윤이 덮어 놓고 간 코트를 그러쥐었다. 다소 오래 입어 마찰이 있는 곳에는 보풀과 헤진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만큼 김하윤의 체취가 짙게 묻어 있었다.
제 차에서 김하윤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생각과 달리 곤두섰던 신경이 누그러들고 있었다. 망망대해 속에 빠진 것 같았던 조금 전과 달리, 지금은 얕은 물에 잠긴 기분이었다.
‘단순히 약효가 이제 도는 걸지도.’
난데없는 김하윤의 등장이 폭주의 맥을 끊고 약효가 들 시간을 벌어 준 것일지도 몰랐다. 김하윤은 달갑지 않더라도 폭주를 면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물에 잠긴 것처럼 울렁이던 것은 잦아들었지만, 누운 채로 도로 가로등 불빛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속이 좋지 않았다. 무경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김하윤은 크게 꼼지락거리지 않았지만, 그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을 정도의 소리를 냈다.
운전대를 스치는 살 소리, 간간이 바스락거리는 옷자락 소리, 길에 잘못 들어섰는지 헉하던 숨소리 등.
신경이 쓰이지만, 또 마냥 거슬리진 않았다. 무경은 때때로 눈을 뜨며 하윤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문은 어떻게 따고 들어온 건지, 언제 운전을 배웠는지, 지금 김하윤의 왼손 반지는 어떤지 등의 조금 신경 쓰이고 많이 쓸모없는 그런 것들.
자동차는 끝없이 달리기만 할 것 같더니, 어느 순간에 멈추었다. 잠시 뒤 주차를 마친 김하윤은 안전띠를 풀며 무경에게 물었다.
“늦게 물어서 미안한데, 혹시 근처에서 작전 중은 아니었지?”
질문하기 대단히 이른 시점이었다. 무경이 대답 대신 눈만 끔뻑이자 김하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기야 그랬으면 네가 가던 중에 차 돌리라고 했겠지.”
“…….”
“몸 상태는 좀 어때?”
김하윤은 무경을 향해 손을 불쑥 내밀었다. 무경이 저항하기도 전에 이마를 짚고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문득 손이 이렇게 편하게 닿을 거리가 아닌데 싶었으나, 그저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불과했다.
“열이 조금 있는데, 약은 먹었어?”
“……신경 쓰지 마. 알아서 할 테니까.”
다소 쌀쌀맞게 쏘아붙였으나 김하윤은 무경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곤 글로브박스를 열어 작은 생수를 찾아내더니 직접 뚜껑을 따서 내밀었다.
“땀 많이 흘렸잖아.”
무경이 마지못해 생수를 받아 들자 김하윤은 차 문을 열었다.
“어디 가?”
“등에 땀 나서. 땀 좀 식히게.”
김하윤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영업용 차량은 끌어 봤어도 외제차는 처음 끌어 봤다는 둥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아예 차 밖으로 나가 버렸다. 금방 돌아오리라 생각한 것과 달리 김하윤은 제법 시간이 지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무경은 하윤의 코트를 끌어 올려 머리를 덮었다. 약효가 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얕은 물가에 누운 것처럼 몸을 살랑이던 기운들이 다시금 그를 집어삼킬 듯 흔들었다. 밑도 끝도 없는 불안이 무경을 채근했다. 자꾸만 뭔가를 찾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몸 같지 않았다. 술에 취한 것처럼, 고기를 넣은 포대 자루같이 둔하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 눈은 또 얼마나 무거운지, 한번 감았더니 다시 뜨기 어려웠다. 무경은 자신이 폭주했나 의심했으나, 그렇다기엔 아직 정신이 있었다.
‘이게 대체.’
약을 한꺼번에 마구잡이로 먹은 부작용일까? 무경은 일단 밖으로 나가 속을 게워 내자고 생각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팔을 어찌어찌 차 문에 붙여 놓고 막 열려는 순간, 바깥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휴, 키 안 들고 가서 혹시 잠긴 줄 알고 식겁했네.”
김하윤이었다.
“…….”
“넌 또 왜 이러고 있어?”
김하윤은 무경이 덮어쓰고 있던 코트를 벗겨 주었으나, 무경은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떠 김하윤을 보려고 했으나 눈꺼풀만 덜덜 떨릴 뿐 눈을 뜰 수 없었다. 고로 눈앞의 김하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표정을 알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무경은 하윤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손끝에 닿는 김하윤을 조심스레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진정하라고 피해 줬는데 잘 안 됐나 보네.”
얼굴을 제대로 짚었는지 김하윤이 말할 때마다 움직임이 느껴졌다.
“무경아, 잠시만. 안으로 좀 들어가자.”
김하윤은 무경을 가볍게 밀었다. 그러자 무경은 말 잘 듣는 개처럼 뒤로 바짝 물러났다. 차 안으로 들어온 김하윤은 차 문을 잠그고 블랙박스의 전원을 껐다. 작은 소음들이 알려 주는 일들에 무경이 귀 기울일 무렵, 김하윤의 손이 무경의 눈가에 닿았다.
“흠.”
김하윤은 가볍게 소리 낸 뒤 무경의 눈꺼풀을 까뒤집었다.
“평소랑 비슷한데 왜 이렇게 거슬리지.”
순간 무경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속이 찔리든 말든 몸은 여전히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김하윤을 와락 끌어안았다.
놀란 무경과 달리 김하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듯 굴었다.
“오늘 만났나 보네.”
드디어. 김하윤은 한숨같이 중얼거렸다.
“…….”
“그게 아니면 작전도 아닌데 우리 동네까지 올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
하윤은 계속해서 말을 이으며 무경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머리칼 깊숙이 들어온 손가락이 머리칼을 올올 골라내는 감각에 무경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지금 이런 걸 보면 많이 놀란 모양이고.”
왜 놀랐을까. 준비를 잘 해 왔을 텐데.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린 하윤은 잠시 뒤척이며 보다 편한 자세를 잡았다. 무경은 몸은 하윤이 자신에게서 떨어질까 싶어 그 잠깐의 사이도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처음이라서 그래. 자꾸 보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무경은 하윤의 재킷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김하윤을 조금 전보다 가깝게 만지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목덜미에 닿은 제 머리카락이 가려운지 김하윤은 어깨를 움츠렸지만, 이번에도 밀어내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지. 그치?”
김하윤은 무경의 손길에 밀려 올라간 재킷을 정리하다가 아예 단추를 풀었다. 재킷 사이가 벌어지자마자 무경은 몸을 뒤척이며 김하윤의 품을 바짝 파고들었다.
재킷이 사라지자 김하윤의 온기가 더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바짝 마른 스펀지에 물을 부은 것 같았다. 불안이 사그라들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과 감정이 피어올랐다. 낯을 들썩이던 무경은 김하윤의 등을 쓸어내리다가 이내 김하윤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목덜미를 훑어내리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자 코끝에 말랑거리는 귓불이 닿았다.
혀를 내밀어 귓불의 위치를 가늠한 뒤 그대로 다가가 입술로 머금었다. 입술 사이에 넣고 잘근거리다가 살짝 빨자 김하윤이 고개를 저어 피했다.
몇 번 더 시도했으나 그럴 때마다 김하윤은 안 된다고 고개를 돌렸다. 약이 오른 무경은 이번엔 김하윤의 뺨을 지분거렸다. 그나마 살이 도톰한 광대에 입술을 눌렀다가, 그 아래 살 없는 곳에도 지분거렸다.
그러다가 조심스레 김하윤의 입술 부근을 지분거렸다. 은근슬쩍 입술 가까이 다가가자 곧장 눈치챈 김하윤이 고개를 돌렸다.
“입술은 하지 마. 싫어.”
김하윤의 거절에도 무경은 미련을 떨쳐 내지 못했다. 정확히는 무경의 정신이 아닌, 몸이 그랬다. 무경의 몸은 하윤의 비위를 맞추려는 양 그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 낯설기 그지없는 행위가 이상하게 낯익게 느껴졌다.
그때 김하윤의 손이 그의 머리 뒤를 받치더니 몸이 뒤로 넘어갔다. 김하윤은 무경의 몸 위를 타고 오르더니 다리를 이용해 그의 손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무경과 이마를 맞댔다.
곧 닿을 듯이 가까웠다. 숨을 쉴 때마다 코끝이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무경은 이 단순한 동작에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 동작의 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경의 몸은 한껏 기대한 나머지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기다림 끝에 김하윤이 이마를 떼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무경의 예상과 달리 김하윤의 입술을 무경의 입술 바로 옆에, 그것도 아주 잠깐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무경아, 이제 깰 시간이야.”
유달리 그 말이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무경은 더는 자신이 물결에 휘말린 듯 울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이제 막 주차한 것인지 기어를 바꾸는 김하윤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