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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69화 (69/162)

69화

면회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두꺼운 유리 벽을 두고 이루어졌다. 음성 전달은 각자 앞에 놓인 마이크로만 가능했는데, 당연하게도 모든 음성은 수집될 예정이었다.

무경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김희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저도 수많은 공식적인 절차를 걸쳤어야 했으니 김희원도 그러했으리라.

인고의 시간 끝에, 건너편 문이 열리며 김희원이 나타났다. 까만 머리끝만 봤을 뿐인데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거센 환희가 밀려들었다.

‘아,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무경은 환한 미소와 함께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머리끝만 보이던 김희원의 모습이 이제는 전부 다 보였다.

“…….”

김희원과 눈을 마주한 순간, 무경의 가슴이 덜컥였다. 주체할 수 없던 환희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만 할 거야.]

문득 망상인지 기억인지 불분명한 한때의 편린이 떠올랐다. 무경은 희원을 보며 입술만 달싹였다. 확실히 김희원은 무경의 눈에 익은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약간 긴 까만 머리칼, 누가 자주 쓰고 다니던 안경에, 예전에 누가 자주 입던 차림새. 거기다 언뜻 보면 어린 김하윤 같기도 했다. 무경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보면 알 수 있다는 게 이런 의미인가.’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그리던 김희원인데, 그토록 애틋하게 그를 그렸는데 정작 그를 보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래선 안 됐다. 무경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무거운 죄책감을 느꼈다.

무경은 짐짓 태연함을 가장하며 가벼운 미소 지었다. 그런 다음 인사와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기억이 온전치 않기 때문일까. 김희원 또한 무경을 굉장히 낯설어했다. 일견 거북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허락된 시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일까. 준비한 질문의 반절도 꺼내지 못했는데 이미 시간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무경은 질문을 마무리하고 인사를 건네려다가 급히 말을 바꿨다.

“혹시, 김하윤을 기억해?”

“……김, 하윤?”

어물거리며 기억나지 않는다,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던 김희원이 드물게 동요했다. 김희원은 계속해서 김하윤의 이름을 되뇌었다. 김하윤, 김하윤. 주문같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무경은 거북함을 느꼈다.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스치는 사이, 김희원은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돌아가고 있었다.

무경은 김희원이 들어왔던 문 너머로 사라지자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 배를 띄운 것처럼 온몸과 마음이 술렁였다. 그리고 조금, 아니 매우 갑갑했다.

무경은 희원과의 면회를 마친 뒤, 해당 내용을 정리하여 상사에게 보고했다. 무경의 상사 전기철 준장은 이번에 조직된 피노키오 대책 위원회에서 위원장 꿰찬 인사였다.

적당히 제 할 몫을 해내 위아래 두루 신뢰가 있고, 물진급이라고 할 만한 에스퍼들 사이에서도 진급 운도 좋았다. 십 년 전 그날 제 윗선이 줄줄이 죽어 나간 탓이었다. 그리고 그 윗선엔 백진하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기철은 아직 자리에 앉은 지 오래되지 않은 탓인지 다른 놈들만큼 썩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깨끗한 건 아니었다. 그저 참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나?”

“글쎄요.”

“백 소령답지 않게 답이 영 시원찮은데?”

전기철은 애당초 무경의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닌지 보고서와 첨부한 자료를 연신 뒤적거렸다.

“세뇌라……. 하기야 십수 년을 잡아 두는데 안 해 둘 수도 없지. 씨도 빼야 하는데 괜히 때렸다가 죽으면 안 되잖아. 내가 김득철이라도 그랬을 거야. 왜,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남자들은 특히 안 서잖아. 그러다 아예 안 좋아질 수도 있고.”

전기철은 생각하다가 우스웠는지 킬킬 웃기 시작했다.

“세뇌가 걸린 건 확실하고, 기억도 조금 만진 것 같은 것도 확실하고. 그런데 우리가 지금 손댈 수 없는 것도 확실하고.”

김희원을 수사하던 과정에서 드러난 정보였다. 위원회로 소속이 바뀐 정신계 에스퍼들이 김희원의 치료에 투입되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김희원의 정신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을 했었다.

“이건 뭐 시한폭탄이랑 다를 게 뭔지. 그 와중에 또 안 열 수도 없어요.”

전기철은 골치가 아프다며 앓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김희원은 당분간 지금과 같은 상태를 유지할 거야. 치료도 계속할 거고. 그러는 동안 자네가 좀 수고해 줘야겠어. 맡은 일만 해도 바쁘겠지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텔레포터에 관한 정보가 부족해. 자네 모친만 있었어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

“나는 서 소장이 자료를 밖으로 빼돌리지 않았을 것 같아. 그 양반 머리가 얼마나 좋았는데. 이렇게 될 줄도 예상하고 남이 빼돌리지 못하게 숨겨 뒀을걸? 내가 아는 서 소장은 그래.”

전기철은 이어 서 소장이 텔레포터와 관련해 무경에게 남긴 자료나 말이 없었는지 물었다.

“저 또한 아는 게 있었다면 진작 이야길 꺼냈을 겁니다. 답답한 건 저도 마찬가지이니까요.”

“그럼 김하윤은? 혹시 아는 게 없나?”

“…….”

“왜, 그 친구가 서 소장을 마지막으로 봤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그 장소 데려가서 서 소장 사망 인정받은 거로 알고 있는데.”

“그건 예전에 센터에서 확인한 것 아닙니까?”

무경의 대답에 기철은 말없이 피식 웃었다. 아마 이것 또한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필요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김하윤을 끌고 왔을 인사들이었으니까. 그저 자신이 하윤의 이름을 거론했으니 한번 떠보는 것이리라.

“……센터는 그 친구를 도와주려 한 거야.”

무경은 김하윤이 재활 치료랍시고 다니던 센터에서 뭘 했는지 알고 있었다. 정말 능력을 잃었는지, 무경처럼 기억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혹은 서이주와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려고도 했다. 그야말로 생명에 큰 지장이 가지 않는 것만 빼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 와중에 센터는 의심을 피하는 방편으로 본인부담금을 부담시켰다. 물론 그 돈은 김하윤이 쓸모 있었다면 게워 내서라도 돌려줬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김하윤이 정말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능력이 사라졌고 그들이 필요한 자료도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꽤 높은 본인부담금은 김하윤이 필요 없어진 센터에 그럴싸한 핑곗거리가 되어 주었다. 가계 부담을 걱정한 김하윤이 치료를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그만 가 보게. 내가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군.”

무경은 진철에게 경례 후 몸을 돌렸다.

방을 빠져나와 온전히 홀로 남자 무경은 그제야 내내 눌러 놓았던 한숨을 쏟아 냈다. 김희원을 만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혼란도 잊어버린 기억도. 그러나 아무것도 해결되는 게 없었다. 도리어 더 복잡하게만 느껴졌다.

첫술에 배부를 리 없었노라고 자신을 달래 보지만 성난 마음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무경은 울음같이 숨을 헐떡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자꾸만 김하윤이 보낸 메시지가 생각났다.

[희원이는 찾았어? 이제 만났어? 만났으면 어땠어?]

무경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냈다. 땀이 흥건히 묻어 나왔다.

‘김하윤.’

무경은 오늘 만났던 김희원을 떠올렸다. 낯익던 그가 입고 쓰고 있던 것들, 머리 모양과 모른다고 말할 때의 표정. 본래 그를 알고 있어 익숙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김하윤에게 있었다.

십 년 전에 처음 마주했던 김하윤이 딱 그랬으니까.

“…….”

[희원이는 찾았어? 이제 만났어? 만났으면 어땠어?]

‘어땠냐고?’

무경은 재차 하윤이 보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감히 어땠냐고?’

미처 갈무리하지 못하고 뱉어 낸 숨에 열기가 실렸다. 이를 사려 문 무경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김하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십 년 전에 그 모습으로 제 앞을 얼쩡거렸는지 알 수 없었다. 김하윤을 만나야 했다.

당장 김하윤을 만나서, 그래서 보자마자 알 거라고 지껄인 것이냐고 물어야 했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 몰랐다. 무경은 김하윤의 자취방 건물 근처에 주차를 한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쓸어내리자 식은땀이 흥건히 묻어 나왔다.

“……씨발.”

가슴과 머릿속이 두근거리다 못해 쿵쾅거리더니 이내 끔찍한 두통이 밀려들었다. 내내 무시하고 있었으나 폭주의 전조였다. 무경은 운전대에 머리를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기억인지 망상인지 불분명한 무언가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는 누군가를 잡고 애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 나 잘 참고 있잖아.]

애원의 대상이 저를 밀어내고 다른 사람을 가까이 한 탓이었다. 저가 다가가지도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 속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굴 수 없었다. 서러움에 가슴이 크게 들썩여도 자신이 참지 않으면 ‘그 애’가 싫어하니까.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만 할 거야.]

이어 떠오른 말에 물에 잠긴 듯 시야와 모든 것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를 빼앗기지 않을 거야. 그게 누구더라도. 절대로.]

무경은 서둘러 글로브박스를 열었다. 안정제와 진통제를 찾아 닥치는 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씹어 삼켜 쓸 텐데도 쓴맛이 나지 않았다.

오는 내내 히터를 틀어 뒀음에도 지독한 한기를 느끼고, 한기를 느낌에도 땀을 뻘뻘 흘렸다. 송골송골 솟다 못해 턱에 고인 땀이 떨어졌을 때, 그리고 그 땀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봤을 때.

이번 폭주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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