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기분 탓이겠지만 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바다의 짭조름한 냄새가 났다. 하윤은 호객하는 사람을 피해 미리 검색한 대로 버스를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한 위치로 제대로 갈 수 있을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저를 보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경계하는 것도 불안에 한몫했다.
한 시간가량 더 버스를 타고 이동한 뒤, 하윤은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펜션도 드문드문 있고 농지도 있는데 어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휘휘 둘러보는데 농민 한 명을 발견했다. 밭일하느라 내내 몸을 숙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윤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짐작 가는 장소는 사람도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라 제법 걸어야 했다. 근처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해가 노래지고 있었다.
마음은 급한데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올라오는 데 걸렸던 시간을 생각하면 곧 내려가는 게 맞았다. 가뜩이나 익숙하지 않은 길인데 해까지 저물면 조난되기 딱 좋았으니까.
‘어찌 된 게 다 똑같아 보이냐.’
길이 다 똑같이 보였다. 특별히 다른 식물이 돋아난 곳도 없었다.
“……?”
하윤은 걸음을 멈췄다. 하늘을 한번 보고 좌나 우도 한번 살폈다.
‘감이 정말 많이 죽었네.’
천천히 숨을 내쉰 하윤은 지팡이 대용으로 쓰고 있던 나뭇가지로 바닥을 헤집기 시작했다. 낙엽과 흙을 이리저리 흩었더니 산에 난 것 같지 않은 사각 반듯한 돌이 보였다.
하윤은 서이주가 지인을 불러 집에 그것을 설치하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사각 네모난 돌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중심으로 사각에 두어야 했다. 하윤은 자신이 발견한 사각 반듯한 돌이 어디를 중심으로 두고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러자 하윤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근처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낭떠러지를 향해 돌아갔다. 하윤은 낭떠러지의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 안으로 쑥 손을 밀어 넣자 흙과 다른 감촉이 느껴졌다.
‘멍석.’
생각보다 안에 공간이 있는 것 같았다. 하윤은 처음 손을 밀어 넣었던 것과 달리 조심스레 벽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구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어 신중히 처리해야 했다.
마침내 저 하나 들어갈 만한 입구를 파고 그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휴대전화로 불을 밝히자 나른 현대적인 공간이 드러났다.
산장같이 몸을 덥힐 수 있는 난로부터 침낭, 모포, 비상식량이 있었고 무속인들이 쓸 법한 경면주사나 색지, 붓이나 정체 모를 나무 구슬들도 있었다.
환풍 장치가 되어 있는지 공기나 습도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찾고자 하는 건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윤은 앓는 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선 바닥이 조금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윤은 바닥을 긁으며 틈새를 확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바닥 일부를 들어냈다.
‘아니, 이게 숨긴 거냐고.’
예민한 사람이면 들어오자마자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윤은 숨긴 것이라기엔 애매한 위장에 쯧쯧 소리를 냈다.
바닥 밑에는 어디서 본 적 있는 무늬가 세공된 나무 상자가 있었는데, 무지막지하게 파묻혀 있는 것과 달리 상태가 좋았다. 상자 틈에는 부적으로 밀봉해 놓았는데 커터 칼로 슥 그어도 별일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상자를 열자 타조 알같이 생긴 하얀 타임캡슐이 나왔다.
대강 생긴 외관과 달리 타임캡슐을 열기 위해선 지문과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내 지문은 못 여는 거 아닌가?’
하윤은 자신의 지문을 찍은 뒤, 서이주 부부의 결혼기념일로 조합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
몇 차례 실패하겠다는 예상과 달리 잠금장치가 단번에 열렸다. 하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캡슐을 열었다.
안에는 네 개의 봉투가 들어 있었다. 겉면에 이름이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물건을 받은 뒤 백진하가 정리하여 포장한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포장 못 하지.’
하윤은 네 개의 꾸러미를 꺼내 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가슴이 콩콩 뛰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너무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윤은 주변에 있던 램프를 꺼내 불을 밝혔다.
하윤은 늘어놓은 봉투 중 서이주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에 붙은 씰을 뜯고 접혀 있던 부분을 펼치자 흘려 쓴 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10년 못 기다렸지?]
“…….”
이어 봉투를 열자 안쪽에 다른 말이 또 쓰여 있었다.
[으이그. 좀 참지.]
하윤은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우스운데 코가 맵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입을 꾹 다물고서 새어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서이주의 봉투 안에는 안경 케이스만 한 목함 하나와 열쇠가 함께 들어 있었다. 하윤은 먼저 열쇠를 집어 들었다. 똑같은 열쇠 두 개가 한 고리에 걸려 있었다. 열쇠 머리에는 익숙한 숫자 나열이 쓰인 견출지가 붙어 있었다.
견출지가 뜯어질까 봐 투명 테이프로 둘러 두었는데, 주름이 쭈글쭈글하게 잡힌 꼴을 보아하니 서이주의 솜씨가 분명했다.
‘신발장 안에 있는 숫자야.’
열쇠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문] 안에 뭔가를 숨겨 둔 모양이었다. 하윤은 열쇠를 든 손을 꼭 말아 쥐었다. 오늘 있었던 현상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면 이젠 표식을 보고 어디로 연결된 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것도 찾을 수 있어.’
물론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하윤은 이어 목함을 집어 들었다. 타임캡슐이 담겨 있던 상자와 같은 무늬가 있었다.
‘이 무늬를 언제 본 적이 있었는데.’
예전 집에서 본 것인지 아니면 길 지나다가 다른 가게에서 봤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낯이 익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안경 케이스만 한 목함이 그랬다.
‘어떻게 보면 향함(香函) 같기도 하고.’
달칵.
목함을 열자 익숙한 안경과 작은 쪽지가 나왔다.
‘안경 케이스 같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안경이 들어 있네.’
[나머지는 안에. 그리고 필요할까 봐 여분의 안경을 남겨 둔다. 조심해서 잘 써.]
“……안에?”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윤은 쪽지를 뒤집어도 보고 램프 불빛에도 비춰 보았다. 혹시 특수 시약을 발라 글을 남겨 두었을까 싶어 냄새도 맡았다. 그러나 달리 느껴지는 건 없었다.
‘열쇠와 관련 있는 걸까. 아니면 따로인 걸까.’
하윤은 재차 봉투를 살폈다. 그러나 따로 더 남은 게 없었다.
‘이상해.’
이해 못 할 말도 이상하고, 서이주 본인이나 남편 백진하가 아닌 백무경과 저에게 남긴 듯한 메시지도 이상했다.
‘꼭 우리 둘만 남아서 열어 볼 것처럼. 그것도 십 년을 다 못 채우고 열 것처럼.’
서이주의 짓궂은 성격을 생각하면 원래 그러려니 싶기도 했다. 아니면 김득철과 관련 없이 본래 본인들의 직업적 특성을 고려해 마련해 놓은 대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겪은 일들이 있어 마냥 간과하기 어려웠다.
하윤은 이어 백진하의 봉투를 열었다. 백진하의 봉투는 서이주의 봉투나 백무경의 봉투보다는 홀쭉했으나 무게는 훨씬 무거웠다.
‘모양으로 봐선 사진인 것 같은데.’
백진하의 봉투엔 사진 뭉치로 보이는 두툼한 봉투와 세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수신인은 서이주와 하윤, 그리고 무경이었다. 하윤은 편지를 옆에 둔 채 사진 뭉치를 집어 들었다. 사진은 백진하답게 한지로 각 맞춰 포장되어 있었다.
한지를 고정해 둔 씰엔 백진하가 남겨 둔 짧은 메모가 남아 있었다.
[사진은 서이주 몰래 볼 것.]
도대체 무엇이길래 서이주 몰래 보라고 했던 걸까. 조심스레 씰을 뜯어 포장을 벗기자마자, 서이주가 반쯤 눈을 뜨고서 잠든 사진이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이런 사진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하윤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무경이처럼 탐색까진 하지 못하지만 서이주도 감이 날카로운 편이었다. 백진하는 이 사진을 어떻게 찍었을까.
‘바로 들켰을 건데.’
서이주는 자신이 이상하게 나온 사진은 발견하는 즉시 지워 버렸다. 필름 카메라로 찍었을 땐 직접 사진관에 찾아가서 자신이 못 나온 사진을 아예 없애 버리기도 했다.
‘나나 무경이 사진은 이상한 것도 엄청 많은데.’
하지만 서이주가 싫어했던 사진도 백진하는 마냥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사진 뒷면에 자신이 왜 이 사진을 가졌는지에 관한 이유와 사진을 찍은 날짜와 장소, 간단한 상황 설명을 적어 두었다.
예전부터 간직했던 사진들이었는지 뒷면이 노랗게 변색 된 것들도 제법 있었다. 서두를 적은 풍경 사진 하나, 서이주의 단독사진이 몇 장 지난 뒤부터 무경과 하윤의 사진이 나오기 시작했다. 앨범에 있는 못 나온 사진은 갖다 댈 바가 아니었다.
두어 살은 되었을까. 아기 무경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럽게 와앙 울고 있었다. 활짝 벌린 입안에 쌀알 같은 이가 몇 개 보였다. 코도 축축하고, 눈도 축축하고. 아래는 백진하를 촉촉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보행기에 앉은 하윤은 활짝 웃고 있었고, 거울에 비친 서이주도 카메라를 들고서 활짝 웃고 있었다.
무경의 머리를 빠는 하윤도 있었고, 파란 여름 원피스를 입은 무경이 서이주의 손에 달랑 들려 억지로 서 있는 사진도 있었다.
[멋지게 보이고만 싶었을 우리 왕자님 미안해.]
하윤은 사진 뒤에 짧게 적힌 글을 보고 피식 웃었다.
또 서이주의 화장대 밑에 이불을 잔뜩 깔고 점프 놀이를 하는 하윤과 무경, 그걸 보고 달려가 잔상으로 남은 서이주의 모습이 찍힌 사진도 있었고 적목현상 때문에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듯 찍힌 서이주의 사진도 있었다.
“하하.”
계속해서 사진을 넘겨 보던 하윤은 어떤 사진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내내 웃고 있었지만, 짜랑짜랑 소리 날 정도로 웃어재꼈다.
모래사장에서 모래찜질 중인 백진하의 사진이었다. 조각 같은 가슴 근육 위에 대강 만든 모래구 두 개가 올라가 있었고, 그 사이를 해초로 연결해 놓았다. 하체는 무경과 하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만드는 중이었는데, 대강 드러난 모습을 보아 인어를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백진하는 파라솔 그늘에 얼굴을 두고, 평온하게 자고 있었다.
[고사리같은 손으로 찜질해 준다길래 마음이 짠했었는데…….]
사진을 보다보니 자지러지게 웃던 서이주가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논 기억은 없고 뚜껑 달린 탄산음료랑 컵라면 먹겠다고 울었던 건 기억나는데.’
바쁜 시간 쪼개 건강 차를 우리고 건강 도시락을 쌌더니 그건 안 먹고 라면을 먹겠다고 엉엉 우는 게 얼마나 우스웠을까. 하윤은 잡곡과 단백질을 사랑했던 서이주 부부를 떠올리며 콧등을 찡그렸다.
게다가 자신이 하려는 건 무조건 같이하려 했던 무경의 공격이 이어졌을 테니 배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잊고 있던 추억이 하나 둘 떠올랐다. 하윤은 이 순간이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두툼하던 사진 뭉치도 어느새 끝이 보였다. 하윤과 무경의 초등학교 졸업식날 화장이 지워질까 봐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던 서이주의 사진을 넘기자 처음 보았던 사진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좋을 때, 평안할 때.”
얼굴을 실컷 찡그리고 붉히며 울고 있더라도 그때가 좋았고, 평안했다.
‘아, 이때 나는 행복했었구나.’
하윤은 울고 싶지 않아 억지로 울음을 내리 눌렀다. 울음이 얼마나 사납게 할퀴어 대는지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은 하윤은 남은 편지를 살폈다. 차마 서이주나 무경에게 쓴 편지는 뜯어볼 수 없었다.
이건 제 몫이 아니었다. 하윤은 혹 자신이 잊을까 봐 편지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몇 번이고 제대로 챙겼는지, 구겨지지 않을지 살펴본 다음에야 제 몫의 편지를 펼쳤다.
내내 참은 게 무색하게 하윤이에게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아저씨, 아저씨 죄송해요. 죄송해요, 진짜.”
백진하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김득철은 죽은 백진하의 시신을 이용해 무경과 하윤을 공격했었다. 하윤은 김득철이 백진하의 목을 비틀던 순간도, 백진하가 죽은 몸으로 자신의 팔을 움켜쥐던 것도, 그리고 자신이 그를 동강 냈던 순간도 모조리 다 생생하게 떠올랐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날과 관련해서는 어느 것 하나 잊은 게 없다.
그날 이후,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하윤은 ‘그날’ 있었던 일을 수백 수천 번을 복기했다. 복기를 할 때마다 차곡차곡 쌓아 온 후회가 한순간에 밀려들었다. 그때 밖으로 나가지 말걸. 아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말든 서이주와 백진하 모두 데리고 달아날걸.
자신이 연 문으로 백진하와 서이주를 옮기고, 서이주가 연 문으로 백무경을 옮길걸. 지하실에서 벗어나 위로 나왔을 때, 미궁 때문에 문이 없어진 통로로 무경을 피신시키고 따라갈걸.
아니, 적어도 무경이만 혼자 두지 말걸.
‘내가 잘 했었어야 했는데. 내가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의 내가 아닌, 그때의 나는 할 수 있었을 건데.
하윤은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보며 고개를 젖혔다. 이제는 용서조차 빌 수 없었다. 결국, 하윤은 편지를 읽지 못했다. 아직은 볼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제 편지도 마저 가방에 넣은 다음, 하윤은 마지막으로 무경의 봉투를 집어 들었다.
자신이 넣은 건 이미 알고 있던 거라 별로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경의 봉투도 볼 자신이 없었다. 하윤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봉투의 입구를 열었다. 이래저래 많이 챙겼으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무경의 봉투 안에는 반지 상자 하나랑 회색 편지 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다.
‘……달랑 한 장?’
세 장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하윤은 편지 봉투를 앞뒤로 돌려보았다. 따로 이름을 써놓은 건 없었다.
“뭐야 이거.”
봉투를 열자 특수용지로 만들어진 카드가 보였다. 봉투에서 조금 더 빼내자 간단한 꽃문양과 그 밑에 나란히 쓰인 이름 두 개가 보였다.
[백 무 경 · 김 하 윤]
[결혼합니다.]
“뭐야 이 새끼.”
온몸을 옭아매던 슬픔도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모습을 감췄다. 하윤은 코를 훌쩍이며 청첩장을 펼쳤다.
얼핏 보면 여느 청첩장과 비슷해 보였으나, 읽어보면 이게 청첩장인지 협박장인지 모호하게 느껴졌다. 대충 하윤과의 사이를 사회적으로 공표 및 공증받으려 하니 참석해서 하윤이 발뺌하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옆면에는 결혼식 장소가 아닌 신혼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왜, 할 거면 결혼식장도 날짜도 다 정해 놓지.”
하윤은 주소 밑에 (증여받을 예정)이라는 글을 보며 코웃음 쳤다. 서이주가 살아 있었다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했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하윤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저랑 결혼한다고.’
하윤은 이어 청첩장의 뒷면을 확인했다. 뭔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예전에 배운 대로 할 뿐인 습관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예상했다는 양 글이 남겨져 있었다.
[하윤아, 스물일곱 살쯤엔 나랑 결혼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이 새끼, 열일곱이 발랑 까져 가지곤.”
하윤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아직 얼굴에 남아 있던 눈물을 모조리 걷어 낸 다음 반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민무늬 반지 두 개가 있었는데, 안쪽엔 각각 무경과 하윤의 이니셜이 한 자씩 박혀 있었다.
“…….”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K가 박힌 반지가 맨눈으로 보기에도 작았다. 새끼손가락에나 들어가는 게 고작일 것 같았다.
‘내 손 그렇게 안 작다니까.’
백무경은 제 덩치 큰 걸 생각하지 않고 하윤이 작고 가냘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있는 반지였다.
“……백무경 너 진짜 아는 게 뭐냐. 반지 치수 하나 모르고.”
하윤은 무경을 욕하며 B가 새겨진 반지를 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이 반지는 조금 컸다. 대신 중지에 끼우자 그럭저럭 마디에 걸렸다.
“진짜 하나도 몰라.”
하윤은 제 손에 끼운 반지를 바라보며 웅크리고 있던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래, 이거라면 할 수 있지. 버틸 만하지.’
멋도 없고, 보증서도 없는 반지였지만 스물일곱이 되는 해까지는 버틸 힘을 줄 것 같았다. 하윤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들은 버티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