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33화 (33/162)

33화

띠-리-리릭-.

“…….”

하윤은 너무나 쉽게 열린 문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열긴 했지만 너무 쉬운 번호라 털리면 어쩌나 싶었다. 하윤은 안으로 들어선 뒤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잠금장치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하윤은 뜨악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경이 없는 줄 알았으나 신발이 있었다. 하윤은 다시 나갈까 고민했다. 그러나 무경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혹시 자나?’

잠시 고민한 하윤은 신발 한쪽만 벗은 채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방 문이 열려 있었다. 무경은 낮에 잘 자지 않을뿐더러 기척에 예민했다. 낮에 잘 정도로 피곤하다면 문을 열고 자진 않았을 것이다.

‘아닌가? 더 예민하게 느끼려고 문을 열고 잤다거나.’

그러나 하윤은 곧장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암만 그렇다고 한들 이정도 소리를 냈는데 그 백무경이 타인의 방문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뭔가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윤은 남은 신발을 마저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섰을 때, 하윤은 자신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거실 한가운데, 정신을 잃은 무경이 공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씨.”

하윤은 가방을 내던지듯 내려놓은 뒤 무경에게 다가갔다. 무경 외에도 거실의 잡다한 용품들이 공중에 떠있었다. 여기서 대처를 잘못했다간 거실이 엉망이 될 게 뻔했다. 하윤은 일단 소파에서 어정쩡하게 멀어져 있는 무경을, 마찬가지로 공중에 떠 있는 소파 위로 오도록 살짝 밀었다. 머리가 떨어질 수 있는 곳에는 쿠션을 놓았다.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었다.

하윤은 공중에 떠 있는 가구들을 힘주어 아래로 내렸다.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염동력에 영향을 받아 떠 있는 물체들은 강하게 힘을 주어 끌어내리면 일시적으로 염동력이 풀렸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또 떠오를 테지만, 하윤은 그 전에 사태를 수습할 생각이었다.

떨어져도 괜찮은 것들이나 소도구들은 무시하고 탁자와 소파, 장식장, 유리 장식 등은 바닥에 내렸다. TV는 벽걸이로 벽에 고정되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뒤 하윤은 공중에 떠 있는 무경을 최대한 부드럽게 밀었다. 혹 충격을 주었다간 무경이 놀래 능력을 쓸 수도 있었다. 예전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하윤은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무경을 경계했다.

고작 해야 거실에서 안방까지 옮긴 것일 뿐인데 땀이 쭉 났다. 하윤은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하윤은 무경의 몸 위에 손을 올렸다. 살짝 아래로 내려 보며 저항이 얼마큼인지 확인했다. 생각보다 힘을 더 줘야 할 것 같았다. 하윤은 무경을 누른 손에 힘을 주었다. 공중에 떠 있던 무경의 몸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더니 다시 위로 올라왔다.

“후우.”

입바람으로 앞머리칼을 불어 올린 하윤은 무경의 몸 위에 반쯤 엎드렸다. 체중을 실어 내리 누르자 그제야 아래로 내려갔다. 침대에 눕힐 때쯤엔 완전히 몸 위에 올라타 무경의 사지를 잡아 눌렸어야 했다.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날 가만 안 뒀을 거야.’

하윤은 한 번 더 힘주어 무경을 누른 다음 침대 밑에 손을 뻗었다. 예전 집 침대에는 무경을 묶을 수 있는 벨트가 있었는데, 이곳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여기에 묶을 만한 게 있던가. 그래도 노끈 정도는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내 노끈으로 사지를 묶은 무경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무단 침입해서 뭐든 안 될 것 같긴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몇 대 맞는 건 각오해야 할 것 같았다. 하윤은 무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윤이 짓누르고 있었으나, 무경은 짓눌린 채로도 몸을 웅크리려 했다.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하윤은 무경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하윤은 침대 옆에 있는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협탁 서랍에는 예상대로 간단하게 구비된 구급함이 들어 있었다. 하윤은 구급함에서 체온계를 꺼내 무경의 체온을 쟀다.

‘체온은 정상인데.’

“왜, 어디가 아픈데?”

하윤은 손으로 무경의 이마를 훔쳐 주며 속삭이듯 물었다.

열은 없었지만,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보니 운 흔적이 있었다.

“뭘 울고 그러냐. 사람 마음 이상해지게.”

다시 손을 뻗을 때쯤엔 눈 앞머리에서 눈물이 반짝였다. 울음을 참듯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으나 가슴팍이 바쁘게 오르내렸다.

“야아. 왜 울어. 응?”

하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학교에 연락해야 하나.’

미성년 에스퍼들의 관리는 전적으로 학교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일반 학교를 모방하고 있지만, 교육부가 아닌 학교 자체가 국방부 소속인 초인특수관리청의 관리하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락하면 무조건 격리시킬 텐데. 그러면 지금 이 상황에서 좀 번거로워질 테고.’

무경이 이런 증상을 보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져 있을 때 종종 수면 중 무의식적으로 능력을 사용하곤 했다.

특히나 육체적인 피로와 정서적인 불안이 겹쳤을 땐 정신을 잃고는 했다. 서이주는 이런 무경의 상태에 관해 그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약하기 때문에 많은 능력을 쓸 수 있으나, 그만큼 무너질 가능성이 크며 폭주에 취약하다고.

그 말을 들을 당시엔 그저 우습기만 했다.

무경의 불안은 대부분 하윤이 문제였다. 무경은 어렸을 때부터 하윤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무경은 백씨였고 하윤은 김씨였다. 암만 백씨 집안에서 먹고 잔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김씨이므로 일 년 중 일정 기간은 집에 돌아갔다. 하윤이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윤이 집에 가면 무경은 그때부터 자지러지게 울었다.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자신이 부릴 수 있는 패악이란 패악은 다 부렸다.

그러곤 하윤이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굴었다. 물론 평소보다 더 붙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건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다. 머리가 좀 더 큰 뒤로는 그런 일은 없었다.

무경 또한 하윤이 암만 연락을 무시하고 학교에서 말을 안 하더라도 결국엔 제 곁에 있을 줄 알기 때문이었다. 화가 나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내가 옆에 없다고 해서 병날 거 없는데.’

지금 백무경에게 하윤은 귀찮기만 한 존재에 불과했다. 아니, 귀찮기만 하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그럼 이제 내가 아니라 김희원인가.’

김희원의 부재에 괴로워하는 걸까. 하윤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곱씹다가 무경의 뺨을 문질렀다. 원래도 볼에 살이 없었는데 살이 더 말라 버렸다.

“으이그, 바보야.”

내가 여기 있는 줄도 모르지. 하윤은 작게 속삭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끔찍하긴 하겠지만 무경을 노끈으로 묶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는 순간 무경에게 붙잡혀 다시 침대에 꼬꾸라졌다.

“악!”

아차 하는 순간에 무경의 몸이 하윤을 옭아맸다. 다급한 손길이 다소 우악스레 하윤을 끌어당겼다.

“…….”

이렇게 맞닿은 적이 언제였던가. 하윤은 말없이 무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깬 건지, 만 건지 알 수 없어 마주 안을 수가 없었다. 하윤은 주먹을 쥔 채 잠시 고민하다가 무경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말라 버석해진 무경의 입술이 하윤의 목덜미와 뺨 언저리를 긁어 댔다. 뭔가를 찾듯 더듬거리던 입술이 마침내 하윤의 입술과 맞닿았다. 무경의 입술이 닿자마자 하윤은 입술을 벌렸다. 그 틈새로 무경의 혀가 파고들었다.

짙은 입맞춤이 이어졌으나 성적인 무언가라고 하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무경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입맞춤을 이어 나가며 하윤의 몸을 더듬고 움켜쥐었다. 더 많이 쥐려는 듯 몇 번이고 손가락을 펼쳤다가 그러쥐기를 반복했다.

무경의 숨이 점차 가빠지기 시작했다. 하윤은 입술을 뗀 채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괜찮아. 무경아,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어디 안 갔어.”

무경의 입에서 쇳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분한 듯 씩씩거리다가, 갑자기 꺽꺽거렸다. 답답한지 발을 버둥거리고 몸을 비틀더니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다. 사실 운다는 말보단 악을 쓴다는 말에 가까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무경은 하윤을 놓지 않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몸이 아팠으나 하윤은 무경을 밀어내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밀어낸다 한들 소용이 없을뿐더러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익숙한 백무경이 여기 있었다. 하윤은 무경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슬프거나 화가 난 것이 아님에도 그냥 눈물이 났다. 하윤은 무경에게 하는 것인지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모호한 말을 중얼거렸다.

“괜찮아. 어디 안 갔어. 여기 있었어. 계속 옆에 있었어.”

몰랐지? 장난스레 말을 덧붙인 하윤은 무경의 등을 도닥였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탓에 익숙하고 그리운 향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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