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하윤은 총 열네 개의 표식을 발견했다. 대문 옆 창고에서 두 개, 장독대가 끝나는 작은 창고에서 하나, 화장실로 가는 길에서 두 개, 신발장 좌측 벽 수납장에서 하나, 큰방에서 세 개, 주방에서 두 개, 작은방에서 두 개, 마당에 하나, 그리고 대문 틈에 하나.
하지만 모든 표식이 다 온전히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 벽지에 걸쳐져 있었는지 끝이 잘린 것도 있었고, 기록한 펜이 뚱뚱해 무슨 글씬지 알아보기 힘든 것도 있었으며, 지우려고 했는지 칼로 긁은 것도 있었다.
이것저것 다 빼고 온전히 남은 것은 여덟 개였는데, 표식을 보고 이 집에서 확인 가능한 문은 네 개였다.
가장 처음에 발견한 수납장에서 하나, 다락 계단에서 발견한 것 하나, 마당에서 하나, 그리고 대문에서 하나.
그리고 그 문 중 어느 것 하나 하윤이 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거기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내가 김희원의 집을 찾아낸 건 문과 관련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으나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문에 관해 자신이 없지는 않았는데.’
이론적인 부분이 오랜 세월 연구를 거듭한 서이주만큼은 아니더라도 하윤은 자신이 그래도 문에 관해서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다. 이 땅에서 그보다 자유자재로 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막상 이런 일이 닥치자 아는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야 어찌 되었든 김희원의 집은 수상쩍은 점이 많았다. 그냥 볼 때엔 그저 오래된 집이라 특이한 양식이라고 생각할지 몰랐다.
그러나 집 안 곳곳에 남은 흔적과 그간 서이주와 집을 보러 다닌 경험을 토대로 생각건대, 이 집은 안전가옥에 가까웠다.
묘하게 높은 창고는 집 창문이 바로 보이지 않게 가렸고, 집 안 곳곳엔 표식이 있었다. 집을 청소한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이전에는 더 많은 표식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지금 당장 볼 수 있는 문 외에 샛길도 더러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또 안전가옥이라고 하기엔 좀 걸리는데.’
하윤은 이전에 김희원의 예전 집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에서 김응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김득철이 김응의 인형을 만들어 바꿨고, 그 이후 바꿔치기 된 김응이 김희원과 이곳으로 이사해 살아왔다고.
‘인형이 굳이 김희원과 안전가옥으로 올 필요가 있나? 그것도 일반적인 안전가옥이 아닌, 문지기들에게 필요한 공간을.’
김득철에 의해 만들어진 김응은 문을 열 수 있었을 리 없다. 그렇다면 김희원을 위해서였을까?
‘하지만 그것도 김희원이 문을 열 수 있어야 소용이 있는 거지.’
문지기라고 해서 모든 문을 다 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난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김희원. 김희원. 김희원. 하윤은 김희원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가 얼마만큼의 힘을 갖고 있었는지 알 길은 없었으나, 서이주보다는 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윤의 추측에 불과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엔 하윤이 가진 정보는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윤은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마당을 살폈다. 김응이 죽은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분명 경찰이 다녀갔다고 했는데 표시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있었는데 지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문을 열어도 바로 보이진 않는 쪽.’
하윤은 마당과 장독대의 경계를 바라보았다. 단이 높아지는 틈새에 이끼가 끼어 있었는데, 어느 한 부분에만 다 떨어지고 없었다. 청소의 흔적일 것이다. 하윤은 그 자리에 서서 안경이 흘러내리도록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분명히 이 부근에 있었는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자 안경 틈새로 언뜻언뜻 문이 보였다.
‘개봉역 승강장.’
부평으로 가는 쪽인지, 시청 쪽으로 가는 쪽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직접 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김응은 왜 여기 섰던 거지.’
문과 가깝기는 하지만 바로 문 앞은 아니었다.
‘문이 여기 있는 줄은 알았지만 안 보였나?’
“……!”
그때, 하윤은 머리털이 삐죽 서는 기분이 들었다. 급히 창고 옆으로 몸을 숨기자, 고양이 두 마리가 냅다 달려와 담장을 뛰더니 아래로 내려가 뒤엉키며 앙칼진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놀란 하윤은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하윤은 불안한 눈빛으로 김희원의 집을 훑어보았다. 더 자세히 볼 수도 있겠으나 어째 이제 더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 동네도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하윤은 지문이 남지 않도록 소매로 손끝을 감싼 다음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주민과 마주치진 않았다. 하지만 무사히 동네를 무사히 빠져나온 뒤에도 선득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윤은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몇 번이고 버스를 갈아탔다.
동네에 도착한 뒤에도 집으로 가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선득한 감각이 사라지고,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하윤은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모두 돌아온 걸 확인한 후에야 가까스로 경계를 풀었다.
긴장이 풀리자 몸에도 힘이 빠졌다. 하지만 그때부터 무서움이 밀려들었다. 혹시 자신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윤은 소파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하윤은 눈물을 대강 닦아 내며 소리 죽여 울음을 삼켰다. 무경이 보고 싶었다.
원래도 무경의 집에 가려던 예정이 있었기에 더욱 그가 보고 싶었다. 괜찮은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낮에 보낸 메시지에 답장이 왔는지 몇 번이고 휴대전화를 켰다가 끄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답장은 없었고, 읽었다는 표시도 없었다.
‘나쁜 새끼. 내가 연락 씹을 때는 난리 쳤으면서.’
그때는 어차피 한집에 살고 같은 방을 썼었다. 연락이 안 되더라도 집에 돌아오면 보는 사이였지 않은가. 곱씹을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그게 또 서러워서 눈물방울을 흘리다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다.
그 때문일까. 하윤은 그날 악몽을 꿨다. 꿈에서 김희원도 나왔고 무경도 나왔으며, 얼굴도 알지 못하는 김응도 나왔다. 그리고 셋은 일제히 하윤에게 말했다.
[왜 날 구하지 않았어?]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하윤은 셋에게 싹싹 빌었다. 미안하다고 사과와 함께 엉엉 울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또 겁이 나기도 했다. 자기 때문에 그들이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깬 뒤에 곱씹었을 땐 허점투성이였으나, 꿈속에서만큼은 그렇게 끔찍할 수가 없었다. 결국, 잠에서 깬 뒤 하윤은 양옆으로 흐르는 눈물에 숨만 헐떡였다.
하윤의 애간장이 끓든 말든 무경과의 연락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메시지는 하루나 이틀이 지난 뒤에 확인했고, 전화는 차단했는지 아예 받지 않았다. 걱정도 되고 화도 났으나 찾아가지는 못했다. 대신 좀 더 시간을 두고 주변을 살폈다.
더군다나 하윤도 시간을 내기 어려워졌다. 내년에 일반고에 재입학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이미 배운 내용인데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았다. 테스트를 받으러 갔던 학원의 원장은 요즘 아이들은 중2 때 이미 고교과정을 선행학습으로 마친 경우가 많다고 겁을 주었다.
걱정스러워하는 부모님을 보자 또 게으르게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거짓말하기 위한 준비 작업까지 더하자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짬을 낸 건 무경이 남긴 부재중 통화 때문이었다.
실수로 누른 것 같았지만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데다가 무경의 집에서 할 것도 있었다. 학원에 가기 전 두어 시간 비는 때에 무경의 집을 찾았다. 현관에 도착하자 마침 배달원이 밖으로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하윤은 층수 버튼을 누르고 잠시 생각을 골랐다. 설레서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조금 무서워 배가 조여드는 느낌도 들었다.
하윤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초조하게 발뒤꿈치를 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나가듯 나갔다. 하지만 바쁜 걸음으로 간 것이 무색하게 집 앞에 도착해서는 석상같이 몸을 굳혔다.
‘집에 있을까?’
있다면 열어 줄까, 말까. 하윤은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자신을 재촉하듯 숨을 크게 들이켜며 가슴을 부풀리다가 마침내 초인종을 눌렀다.
망설였던 것과 달리 아무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윤은 이번엔 문을 똑똑 두드리며 최대한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관리실입니다. 민원 때문에요!”
문에 바짝 귀를 붙여 봤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윤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초인종을 눌렀다.
‘학교에서 아직 안 돌아온 건가.’
그럴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무경이 있는 날을 기다렸다가 다시 오는 게 맞으리라.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안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윤은 초조함에 발을 구르다가 이런 자신이 어처구니없어 앓는 소리를 냈다.
‘문제 되면 어쩌려고.’
하지만 들어가고 싶었다. 이 집 안 비밀번호가 너무 뻔한 것도 한몫했다. 그냥 열고 들어가려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 돌아오기 전에 확인하고 얼른 나가면 되잖아. 어차피 비번은 선생님 결혼기념일 아니면 우리 생일일 건데.’
물론 정직하게 날짜를 쓰진 않고 몇 가지 패턴으로 순서를 바꿨다. 앞에 달을, 중간엔 연도를, 마지막에는 날짜를 섞거나 그 반대로 하거나 등.
이전이라면 결혼기념일을 눌러 봤겠으나 지금은 무경이 혼자 살고 있었다. 저 편한 대로 바꿨을 가능성이 컸다.
‘지금은 기억이 다 섞여서 기억 못 할 수도 있지만.’
하윤은 시험 삼아 가장 편한 비밀번호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