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30화 (30/162)

30화

이젠 해가 완전히 저물어 날이 컴컴했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하윤이 숨은 곳까지는 들지 않았다. 하윤은 조심스럽게 쓰레기봉투를 옆으로 돌렸다. 고양이가 뜯어 놨다는 말 그대로 봉투는 반쯤 뜯어져 있었고 벌레의 흔적이 봉투 안과 밖에 고루 남아 있었다.

건드리기 끔찍했다.

닥치는 대로 쓸어 넣었는지 쓰레기의 종류가 다양했다. 옷도 있었고 벽지 조각도 있었으며, 먹다만 생라면이나 머리카락이 잔뜩 묻은 테이프 뭉치도 들어가 있었다. 이렇다 할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포기할까 망설이던 하륜은 자세를 바꾸다가 봉투 안쪽에 명함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명함을 끄집어내자 덩달아 포스트잇 조각들이 딸려 나왔다. 모양을 보아하니 명함을 맨 밑에 두고 그 위에 포스트잇을 사방으로 덕지덕지 붙인 것 같았다.

‘명함이랑 포스트잇 방향이 다른데.’

하윤은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포스트잇과 명함들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끄집어냈던 쓰레기들을 대강 수습한 뒤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가 시간이 생각보다 늦어졌다는 것에 가슴이 덜컥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걸음을 돌리기 전, 노끈으로 묶어 둔 책더미가 신경 쓰였다. 바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책 더미 속 가장 빼기 쉽고, 얇은 책을 빼냈다. 훑어볼 만한 것인지 골라볼 여유는 없었다. 주민의 말대로 고양이가 음식물 쓰레기통을 건드렸고, 음식물 쓰레기통은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했다.

통 굴러가는 소리에 나온 주민이 바락 소리 질렀다. 놀란 하윤은 올라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냅다 달아났다.

덕분에 버스가 지나다니는 도로로 나오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서늘해진 날씨가 무색하게 땀을 뻘뻘 흘려야만 했다. 아는 길로 가는 버스에 가까스로 올라타고 난 뒤에야 하윤은 자신이 들고 온 책자가 어떤 내용인지 제대로 확인 할 수 있었다.

“…….”

그리고 놀랍게도, 낯선 책이 아니었다.

서이주가 다니던 미궁 관측 연구소에서 몇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사보였으니까.

다만 아주 오래되었는지 종이가 노랗게 바래 있었다. 하윤은 사보를 뒤적여 발간 연도를 확인했다.

‘구 년 전.’

하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명함을 꺼냈다.

미궁 관측연구소

주임 김 응

하윤은 마른침을 꼴깍였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직 그것만 알 수 있었다.

안 쓰던 근육을 쓰면 근육통을 앓듯 안 쓰던 머리를 쓰니 머리가 아팠다. 하윤은 제게 찾아온 두통이 어처구니없어 홀로 웃었다. 예전에 서이주에게 자신이 연구 같은 걸 할 머리가 아니라고 말하긴 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간 앓아눕겠다. 눕겠어.’

하윤은 이마를 꾹꾹 누르며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김희원의 집을 찾아갔었으나 그 집은 화재로 소실되어 도로가 된지 오래였다. 주민에게 물어 어떤 동네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고 무작정 그리로 찾아가 긴 비탈길을 올라가기만 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사람 죽은 집을 발견했고, 그 사람의 아들이 최근에 실종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죽은 사람이 김희원의 아버지고, 그 아들이 김희원일까.’

일단은 같은 김씨였다. 하지만 하필 김씨였다. 김씨를 탓할 생각은 없지만, 대한민국에 김씨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였다. 김득철도 김씨, 김희원, 김응도 김씨, 김하윤도 김씨.

‘죽은 사람 이름이 김응은 맞는걸까. 보통 자기 명함을 벽에 붙여 놓나? 다른 사람 게 아닐까?’

하윤은 자신이 가져온 포스트잇과 명함을 다시 들췄다. 명함은 뒤집힌 채 벽에 붙어 있었다. 테이프 자국이 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덮듯 포스트잇이 있었다.

‘명함을 포스트잇처럼 쓴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위에 남은 게 없는데.’

명함은 앞뒤 어디에도 메모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포스트잇에는 여러 숫자가 적혀 있었다. 겹쳐진 위에 메모한 것도 있어 숫자가 끊긴 것도 있었다. 또 다 적지 않고 일부만 적힌 숫자도 있었다.

하윤은 그중 가장 반듯하게 쓰인 숫자와 글자를 읽었다.

‘풍운 불고기 31#8-5-283-9475김.’

전화번호를 쓴 것 같지만 이것은 문의 위치를 구분하기 위한 일종의 좌표였다. 무경이 지금 사는 집의 신발장 안쪽에 적혀 있는 것처럼.

‘만약 진짜 죽은 그 사람이 김응이고, 그 아들이 김희원이라면.’

그렇다면 뭘까? 하윤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경이나 다른 똑똑한 사람이었다면 뭔가 파바박 떠오를 텐데 자신은 그런 것이 없었다. 그냥 머리를 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쥐나듯 얼얼한데,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단순하게. 그러니까, 일단. 그러면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뭘까. 뭐냐고, 김하윤.’

하윤은 포스트잇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로 알 수 있는 건 김응은 문지기였다는 거고.’

경기도, 구리시, 283번지, 9475번째로 등록된 김씨가 만든 샛길은 풍운 불고기로 나온다. 이러한 표기법은 미궁 관측 연구소의 [길] 등록명부에서 쓰였다. 길 등록명부는 미궁 관측연구소에 보관되어 있으며 연구소의 연구원들만 열람 및 기록할 수 있다.

나라에 등록된 문지기들이 공식적으로 기록한 샛길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등록되지 않은 샛길이 더 많을 것이다. 하윤만 하더라도 이미 수백 개의 샛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하윤의 경우가 특별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론 한 명당 만들 수 있는 길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렇게 친다면 등록된 샛길의 수가 많았다. 연구소에 문지기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문지기들은 많지 않다고 했었는데.’

그 많지 않은 수가 얼마일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윤은 그저 서이주로부터 연구소에 이러이러한 기록 대장이 있다는 사실만 들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대장을 본다면 숫자라도 가늠할 수 있겠는데.’

능력이 있을 때는 학교를 졸업하기만 하면 바로 알겠거니 했을 일이지만, 일반인이 된 하윤으로서는 이제 요원해진 일이었다.

‘학교만 갈 수 있었어도 알 수 있을 사실을 몰라서 지금 이렇게 빌빌거리고 있는데.’

그때 문득 김득철에게서 빼앗았던 팔찌가 생각났다. 팔찌를 장식하던 수많은 곡옥들도.

‘김응.’

김응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봤는지 생각났다.

미궁의 문을 닫으려고 팔찌를 썼을 때, 팔찌를 장식하던 곡옥이 깨어지며 곡옥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읽을 수 있는 이름이 있었고, 읽지 못하는 외국어로 된 이름도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김응이 있었다. 하윤은 기억을 더듬으며 그날 팔찌를 꼈던 왼쪽 손목을 쥐었다. 이상하게 손목 안이 저렸다.

‘그런데 곡옥은…….’

“갓 죽었을 때만 꺼낼 수 있던 게 아닌가?”

하윤은 스스로 말하고도 제 말이 낯설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걸 어디서 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언제 들었는지는 몰라도 서이주에게 들었던 건 분명했다. 문지기들에 관해선 그녀 외의 사람에게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럼 김응이 죽은 게 한참 더 전이라는 소린데.’

미궁이 열렸던 날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곡옥을 빼내기 위해 김응을 죽였다고 치자. 하지만 김응은 마당 구석에서 죽었다고 했다. 주민은 악취와 벌레 때문에 날이 서늘해졌는데도 문을 못 열었다고 했다.

‘밀폐된 공간도 아니고 바깥에서 죽었어. 동네에선 고양이들이 기승이었고.’

잘 썩고 벌레도 잘 꼬일 만한 장소 아닌가. 그렇다면 김응이 죽은 시기는 좀 더 최근이어야 했다.

‘갖고 온 책도 젖은 적이 없어. 이 동네 기상기록을 보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윤은 팔짱을 끼고 신음을 흘렸다. 뭔가 생각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앉아 있던 하윤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이렇게까지 이 일을 파고들 필요가 있을까? 자신은 그저 좀 더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려고 할 뿐인데.

‘그럴 뿐인데 팔자에도 없는 추리를 하고 앉았네. 해 봤자 무슨 도움이 된다고.’

“…….”

쓸모없는 행동인 줄 알면서도 또 가만있기 힘들었다. 하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동생 방으로 들어갔다. 안 쓰는 공책과 풀과 테이프, 그리고 가위를 찾아 다시 거실로 나왔다. 다시 긴 한숨을 내쉰 하윤은 노트에 포스트잇과 명함 등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적었다. 정리되지 않은 질문들과 답들을 그저 조금 바른 글씨로 적었을 뿐인데도 뭔갈 하는 것 같았다.

“참 나.”

스스로가 어처구니없는 것과 별개로 하윤은 찾아갔던 김희원의 동네의 기상정보를 적고, 예상하는 사망일을 추측해서 적었다. 또 김응에 관한 의문점도 함께 적었다.

‘김응이 죽은 건 최근인데, 김득철이 만든 팔찌엔 김응의 곡옥이 있었다. 하지만 김응은 부인이 죽고 난 뒤 상실감으로 능력을 소실하여 연구소에서도 해고됐어. 사망 시점을 따지지 않는다고 해도 능력을 잃은 상태에서 곡옥을 빼낼 수 있나?’

능력을 잃은 게 아니라 그냥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문 여는 데 트라우마가 생길 일은 뭐람.’

문을 열다가 문에 걸리기라도 한 걸까.

‘어?’

하윤은 무릎을 세우고 몸을 웅크렸다.

‘만약 김응이 죽은 게 최근이 아니라면?’

과거에 있었던 화재에서 부인 외에 시체 한구가 더 나왔었다. 그때 나온 다른 시신이 김응이었다면? 수사 결과야 김득철을 지지하는 세력에서 조작하면 그만 아닌가.

‘능력자가 피운 불 때문에 집은 일반 소방시설로는 끌 수 없었다.’

하윤은 서이주의 집을 불태우던 에스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서이주의 집을 불태우며 자신과 무경을 찾아다녔다. 쓸모 있는 인형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또, 아저씨를 죽여서 인형으로 만들었어.’

김득철이 만든 백진하는 생전의 능력을 일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응은 문지기였다.

‘문지기에게서 빼낸 곡옥으로 다른 문지기에게 문을 열게 할 경우, 그 문지기는 문을 넘지 못하고 문에 끼이거나 잘려나갔다고 했어. 비슷한 경우로 김득철이 김응과 똑같은 인형을 만들었다 한들 문을 넘지는 못했을 거야.’

하윤은 자신이 적은 것들을 다시 앞장부터 뒤적이기 시작했다.

‘가설을 정리하자면 김득철은 김응을 노렸었고, 그를 죽여 곡옥을 취한 다음 인형을 내세워 최근까지 그가 살아 있게 가장했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렇게 보일 대상이 있었던 건 아닐까.’

서이주는 죽기 전 김득철을 얕봤었다고 했었다. 그는 생각보다 일을 크게 벌이고 있었고, 서이주는 그것을 미처 몰랐었다고 했다.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일 중에 김응의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선생님, 그리고 또 누구한테 보이면 좋을까. 무경이나 내게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김희원에게도 그랬지 않을까.

‘김희원, 김희원.’

하윤은 주먹으로 이마를 통통 두들겼다. 김희원에 관한 기억이 적었다. 그저 이름만 오며 가며 들어서 익숙할 뿐이었다.

“……오며 가며.”

하윤은 중얼거리며 손끝 거스러미를 물어뜯었다.

문득 정기오에 관해서 묻던 서이주의 말이 생각났다.

[어쨌든 너도 본 적 있을 거야. 아니, 느낀 적 있을 거야. 문에서.]

하윤은 정기오의 이름을 문에서 이름을 보고, 그 존재를 느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어렴풋하게나마 지읒이 들어간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오며 가며 김희원의 이름을 보고 그의 존재를 느낀 적이 있다.’

같은 반이 아니라, 문에서.

하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질러 버린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김희원도 문지기일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으로선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으니까 어디까지나 이건 가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하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 가족들이 돌아올 시간이 아니라 집엔 저 혼자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는 혼자 있을 수 있어 좋았는데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겁이 덜컥 찾아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황급히 겉옷을 꺼내 입고 키 카드를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노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확실한 거 아니잖아. 확실한 거 아니야. 그냥 내가 때려 맞춘 거라구. 틀릴 수도 있어. 그 집에서 죽은 게 김응의 인형이 아닐 수도 있고, 아예 김희원네가 아닐 수도 있고. 그리고.’

“……그게 맞다 한들 뭘 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쓸데없는 짓이었다. 자신이 추리한 것을 가지고 경찰을 찾아갈 것인가, 아니면 학교에 가서 교사에게 이를 것인가. 저는 이제 능력이 없는 일반인에 지나지 않았다. 일을 어떻게 벌여야 할지, 어떻게 감당할지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딴 건 왜 만들어선.”

하윤은 공책을 집어 던졌다. 날아간 공책은 TV 선반을 맞고 튕겨 나왔다. 그러고는 내내 활짝 벌리고 있던 장을 다시 벌렸다.

“…….”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를 포스트잇의 숫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윤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짜증을 터트렸다. 눈시울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열지도 못할 게, 어딘지 확신할 수도 없을 게 자꾸만 위치를 짐작하고 있었다.

‘해서 대체 뭐 하냐고. 저기가 어딘지 알 것 같으면 대체 네가 뭘 하냐고!’

그냥 죽은 김응이나 실종된 김희원의 이동 가능한 반경만 알겠지. 덧붙여 은신처에 남아 있던 흔적으로 서이주의 반경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몰랐다.

“……씨발.”

하지만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무엇이 되겠는가.

‘좀 더 그럴싸한 거짓말을 할 수 있겠지. 원래 목적했던 대로.’

한 번 더 나직이 욕설을 중얼거린 하윤은 공책을 집어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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