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아줌마, 저 하영이예요. 문 열어 주세요. 문이요, 문.]
“…….”
[저 찾으셨잖아요.]
백진하는 인터폰으로 보이는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양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는 얼굴인가요?”
무경의 물음에 백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태강의 손녀.”
문태강. 익숙한 이름에 하윤은 숨을 헉 들이켰다. 얼마 전 서이주가 문태강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났다. 문태강의 자녀는 외국에 거주 중이라, 그의 장례를 서이주 부부가 치렀다던 말.
문태강의 자녀는 외국에 있는데, 손녀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그것도 비가 내리꽂듯 쏟아지는 새벽 네 시에. 하지만 하윤은 문태강의 손녀에게 정신을 팔 수 없었다. 거슬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선생님……!”
하윤은 서이주를 불렀다. 서이주가 고개 돌리는 순간에 맞춰 입을 열었다.
“이 소리 안 들리세요?”
서이주는 하윤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하윤이 벨소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어떤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문 부서지는 소리요. 아주 큰 게 다가와요.”
하윤의 말에 서이주와 백진하가 서로를 마주했다. 서이주는 급히 연구소와 연락을 취했다. 그사이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캉캉! 작은 손으로 두들기듯 소리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돌연 소리가 바뀌기 시작했다.
쿵쿵. 조금 전보단 둔탁하고 작은 소리였으나 불안을 동반했다. 인터폰에서 문을 두드릴 때마다 문하영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마가 곤죽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웃고 있었다.
[아줌마, 문, 문 열어 주세요. 여실 수, 이, 있잖아요.]
그 표정밖에 지을 수 없는 것처럼.
[아줌마, 아줌마! 문 열어 주세요! 하영이 죽어요! 저 죽어요!]
문하영은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몸을 앞뒤로 움직였다. 격하게 움직이던 얼굴이 뚜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꺾였다.
[아. 이미 죽었지.]
귓속을 파고들던 비명이 그치고 문하영은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사이 서이주는 침착하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녀는 통화를 종료하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어떻게 지랄을 떨어 왔는지, 대강 알겠군.”
그 순간 화면에 남자 손이 불쑥 튀어 나왔다. 그는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팔찌를 화면에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인터폰 화면은 문하영의 이마로 가렸다. 이어 끼릭끼릭 철문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에는 수많은 방범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째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문이 곧 열릴 것 같았다.
백진하는 무경에게 눈짓했다. 무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하윤의 손을 이끌었다.
“왜, 왜.”
“이리 와.”
무경은 서이주 부부방 옆에 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서재 안 서랍장에서 각종 물품을 꺼내 하윤에게 들려 주었다. 우비, 방독면, 그리고 간단하게 싼 생존 가방, 종아리까지 오는 양말과 군화, 호신 무기 등.
집 안에 언제 이런 걸 준비해 뒀는지 모를 일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비와 양말, 군화를 착용한 무경은 초능력으로 하윤이 입는 것을 도왔다.
무경은 문을 바라보는 하윤의 뺨을 살짝 도닥였다.
“우리가 지금 여기 없는 게 둘 도와주는 거 알지?”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이주와 백진하는 강했다. 더욱이 저희를 미리 탈출시키려 할 정도면 사태가 심각하다는 증거였다.
‘문태강의 손녀. 그리고 문태강.’
문태강이라는 이름이 자꾸만 거슬렸다. 관련해서 뭔가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납치되었다가 탈출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외에는.
‘그런데 내가 언제 그걸 들었더라.’
다 같이 식사할 때였던가, 아니었던가. 하윤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 무경은 서재 책상 밑을 더듬었다. 조밀하게 붙어 있던 바닥재를 떼어 내고 그 밑에 있는 십오 센티는 넘어 보이는 블록을 들어냈다.
흔적이 밟히지 않도록 부스러기를 공기를 제어하는 건 덤이었다. 이윽고 비상통로가 나타났다. 무경은 그 아래를 잠시 응시하다가 하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하윤은 무경의 손을 잡고 통로 안으로 내려갔다. 콘크리트 벽에 철근을 박아 만든 사다리는 조악했으나 내려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윤이 바닥에 내려간 것을 확인한 후 무경 또한 통로 안으로 내려왔다. 무경은 내려오자마자 다시 바닥재를 덮었다. 아마 위는 문을 열기 전과 별반 다름없는 상태이리라. 통로를 닫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가자.”
무경의 말과 동시에 하윤은 손전등을 켰다. 가볍게 손전등을 돌리며 통로를 확인했다. 비상 대피 훈련을 제외하면 드나들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익숙하지 않았다.
“너도 넘어올 수 있는 거면 문을 열면 되는데.”
하윤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자 무경은 가볍게 웃었다.
“너, 나 버리고 가면 안 돼.”
“너나 그러지 마.”
그러나 높은 확률로 하윤이 무경을 버리고 갈 가능성이 높았다. 하윤은 지레 찔려 어깨를 으쓱였다.
일견 통로는 한길로 이어지는 것 같았으나 군데군데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서재 바닥을 감췄던 것 같은 형식으로 된 것도 있었으며, 서이주가 일부러 만든 문도 있었다.
기존에 공간과 공간이 연결된 문이 아닌, 문의 통로에 난 틈새를 억지로 비집고 나가 만든 길이었다. 이를테면 터널과도 같았다.
이런 공간은 여러 번 오가면 오갈수록 점점 문과 같이 바뀌어 여닫을 수 있었다. 그러다 간혹 만든 사람도 지나갈 수 없게 되곤 했다.
하지만 이 문은 하윤이 열더라도 무경은 지나갈 수 없었다.
‘밟고 올라가는 건 되는데 지나가는 건 안 된단 말이야.’
이럴 땐 조각끼리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게 아쉽기 그지없었다.
“최대한 여기서 멀리 벗어나야 해.”
“……?”
그건 하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문밖에 있는 문하영 때문에 다른 문도 열지 못했다. 어째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도 뭔가가 다가오는 것은 분명했다.
바쁘게 이동하던 중에 돌연 무경이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
“뭐가?”
“밖에 여자애. 그리고 손 주인도.”
“문하영?”
무경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화면에 언뜻 나왔던 남자 손,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팔찌. 그게 무엇이길래 이토록 불안한 건지 몰랐다. 하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진정하려 애썼다.
‘혹시 그 남자가 김득철은 아닐까.’
하지만 김득철은 수배 중이었다. 온갖 에스퍼들이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무수한 검문을 뚫고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서이주는 연쇄 납치살인사건이 문지기들이 살해당한 일과 관련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시기상으로 겹쳐 자신이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을 뿐, 확실히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동일범이라면 새삼스레 쳐들어올 필요가 있을까.
근래 이어졌던 연쇄 납치살인사건은 미성년 에스퍼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범행 대상의 나이가 점점 더 낮아지고 있었다. 사십 대인, 그것도 미궁을 연구하는 연구소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서이주와 백무경의 집을 쫓기는 중에 찾아올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쫓기는 중에도 찾아와야 할 만큼 중요한 게 이곳에 있다는 소리도 됐다. 그게 대체 무엇이길래.
‘피노키오는 새로운 에스퍼를 만들려고 인체실험을 했다고 했는데…….’
불안에 잠긴 하윤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를 눈치챈 무경이 하윤을 불렀다.
“김하윤, 정신 차려.”
“…….”
“괜찮을 거야.”
무경의 말에 하윤은 숨을 헉 들이켰다. 괜찮다는 위로를 들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무경이었다.
“그래, 맞아. 괜찮을 거야.”
설사 김득철이 등장했다고 해도 서이주와 백진하는 강한 에스퍼였다. 하윤이나 무경과 달리 숱한 실전을 거쳐 왔다. 분명 이번도 무사히 잘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위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쿠콰과과광!
“……!”
하윤과 무경은 재빠르게 자세를 낮추며 방독면을 착용했다. 이어 희미하게나마 대피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단순한 괴수 출현 경고가 아니었다.
미궁 출현을 알리는 경고음이었다.
하윤은 숨을 헉 들이켰다. 하윤의 불안을 감지하듯 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저희를 열고 가라는 듯이 문을 들썩였다. 하윤은 무경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가볍게 고개를 내젓자 대부분의 문들이 사라지고 서이주가 만든 문들만 남았다.
하윤과 무경은 다시 자리를 박찼다. 힘껏 내달리자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도 끝이 나고 있었다. 길 끝에 다다랐을 때, 무경은 또다시 벽면을 채우고 있던 시멘트 블록을 꺼냈다. 서재 입구를 막고 있던 블록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두께였다.
일반인이라면 이 블록을 꺼낼 수도, 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경은 가뿐히 블록을 치워 낸 뒤 방호창의 암호를 맞췄다. 방호창에 걸린 비밀번호를 제거하지 않으면 문 너머의 복도에 설치된 적외선 탐지에 걸리기 때문에 주의해야 했다.
“천천히, 침착하게 해.”
긴장으로 손이 미끄럽기도 하고, 암호를 맞추기 위한 다이얼엔 숫자 표시가 없었다. 암호 맞추는 게 녹록하지 않자 무경은 작게 신음했다. 그러다가 아예 초능력으로 다이얼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길 수분 후, 아직 사이렌은 그치지 않았고 재차 폭발음이 들려왔다. 무경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윽고 작게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무경은 하윤을 보내기 전에 돌조각을 안에 던졌다. 달리 반응이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하윤을 이동시켰다.
무경은 또다시 입구를 막은 다음 하윤을 뒤따랐다. 하수관과 이어지는 통로로 나오자 사이렌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들리지 말아야 할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도 함께 들렸다. 하윤과 무경은 동시에 멈춰 섰다. 둘은 벽에 몸을 붙인 채 고민했다. 둘 다 자잘한 괴수라면 해치우고 나아갈 자신이 있었으나, 자잘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을 경우가 문제였다.
마침 무경이 말하려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하윤은 자연스레 그의 머리를 눌렀다.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윤은 무경이 무엇을 말할지 빤히 알았다.
‘저 버리고 나가서 구조요청이나 하라고 하겠지.’
목숨이 경각에 다다르면 저도 모르게 달아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결코 아니었다.
하윤은 무경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하윤아, 방법이 없어.”
기감이 민감한 무경은 앞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한 듯했다.
“수가 너무 많아. 하수관으론 나갈 수 없어.”
소리를 감지했는지 괴수들이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숨을 내쉰 하윤은 주변에 있는 문들을 응시했다. 문들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드러내는 명패가 바뀌고 있었다. 하윤이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일그러졌다.
‘마치, 꿈속에서 본 검은 문처럼.’
미궁이 열리면 일대에 영향을 끼친다. 미궁의 영향권 아래 있는 문들은 즉시 이전 공간을 다른 공간으로 인식하여 문패를 바꿨다.
“…….”
하윤은 재빨리 통로 내부로 이어지는 [문]들을 점검했다. 하수관으로 갈 수 없으니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지상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가든, 방공호로 내려가든 정해야 했다. 일반적인 괴수 출현이라면 방공호에 숨는 게 제일이지만, 미궁이 열린다면 최대한 범위 밖으로 달아나는 게 우선이었다.
미궁이 열리게 되면 그 영향을 받는 문이 닫힐 때까지 해당 구역은 출입이 봉쇄되기 때문이었다. 그게 일 년이 될지 삼 년이 될지. 그도 아니면 아예 닫히지 않아 출입금지 구역으로 남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서울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문을 닫으려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하윤의 예상이었다. 방공호에 저장된 음식이나 물품들이 있긴 했지만, 될 수 있으면 봉쇄지역에서 고립은 피하고 싶었다.
미궁에서 어떤 괴수들이 쏟아질지 알 수 없었다. 그중에는 정신계 괴수들도 있었기 때문에 물리적인 피해로 벗어났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었다.
방공호를 제외하자 선택지는 두 개가 남았다.
본래 왔던 길을 아예 되돌아가서 서이주 부부와 합류하든지,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로 나가든지. 만약 남자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면 바깥이 낫겠고, 밖에 있다면 합류하는 게 나았다. 하윤은 바깥 통로로 이어지는 문을 찾았다.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문을 조금 연 순간, 사람들의 비명과 으적으적 뼈 씹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문을 닫은 하윤은 무경을 바라보았다. 서로 마주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하나 남은 길을 응시했다.
함께하려면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