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 새끼가 자꾸 너 쳐다보잖아. 감히.”
여유로 가득하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윤은 그의 눈에 스친 경멸을 읽고는 이내 뒤로 덜렁 누웠다. 그사이 무경은 몸을 돌려 하윤의 허벅지가 아닌 복부에 머리를 기댔다.
“너 무거워, 저리 가.”
“싫어.”
“이게 네 배냐? 내 배지.”
“그럼 나도 네 거 해.”
“무슨 소리야. 또 억지 부리지.”
하윤의 타박에도 무경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듯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 뒤를 봐주고 있는 것 같아.”
“뭐?”
난데없는 말에 하윤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무경이 입가에 손가락을 대며 소리를 죽일 것을 당부했다. 무경은 이어 서이주가 했던 동작들을 살짝 따라 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국을 가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주어가 없었으나 하윤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알아들었다. 누군가가 제페토 김득철의 뒤를 봐주고 있고, 아직 그는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 어디 있을까?”
하윤의 질문에 무경은 배를 두드렸다. 그의 동작에 하윤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배를 짚었다. 그러나 제 배 위엔 무경의 머리가 있었다. 졸지에 머리를 얻어맞은 무경이 엄살을 부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하윤의 웃옷을 걷고 맨살을 드러낸 다음 그 위에 입을 벌렸다.
“아, 안 돼, 안 돼! 깨물지 마. 깨물지 마!”
깨물 듯 이를 세우고 있던 무경은 웃음을 터트렸다. 살을 한입 가득 아프지 않게 베어 물었다가, 다시 뱉으며 길게 숨을 뱉었다. 하윤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무경에게 붙잡혔다.
무경은 하윤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너무 궁금해하지 마. 불안하기만 하고 네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잖아?”
“…….”
“저렇게 이야기한다는 건 그만큼 보안이 중요한 거니까. 굳이 알려고 하지 마. 괜히 휘말려서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무경의 숨결이 하윤의 귀를 간질였다. 하윤은 목을 움츠리며 숨을 헉 들이켰다.
“난 너만 무사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그러니까 위험한 짓 하지 마. 차라리 그 관심 나 줘.”
어째 무경의 말이 섬뜩하게 들렸다. 하윤은 더 파고드는 대신 말을 돌리기로 했다. 대신 관심을 달라는 말은 자연스레 무시했다.
“근데 넌 어떻게 알아봤어?”
“자기들끼리는 바꾼다고 하는데, 그래도 일정한 규칙이 있잖아. 그걸 십칠 년간 주야장천 보는데 모르는 게 말이 되냐? 그리고 끄트머리에는 그거 하자고 하더라.”
“…….”
주야장천 봤으나 알아보지 못했던 하윤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윤이 소리가 없자 무경은 잠시 자리를 뒤척였다.
“딴생각 그만하고 자자. 잘 시간 지났어.”
무경은 초능력으로 전등불을 껐다. 장난을 치며 뒤척이느라 침대 밑으로 떨어졌던 이불도 어느새 날아와 그들의 배를 덮고 있었다.
하윤은 제 배를 감싸고 있는 무경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갰다. 그가 마지막으로 가리킨 배의 의미를 알아듣기 힘들었다. 더 묻는다고 해서 가르쳐 줄 것 같지 않았다.
‘알려 줄 거면 진작 알려 줬을 거니까.’
포갠 손을 꼼지락거리자 무경이 간지럽다고 속삭였다.
“네가 더 간지러워. 목에 대고 말하지 말랬지.”
“네가 언제.”
“옛날부터.”
“아닌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게 얄미웠다. 자신은 모르는 서이주 부부의 암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살짝 배 아팠다. 하윤은 무경의 손을 들어 그의 손등을 깨물었다. 무경은 더 깨물라며 손등을 계속 들이밀었다.
하윤이 보란 듯이 퉤 뱉어 내자 이제는 손가락으로 입에 들이댔다. 또 먹으라고 그러는데 그러기 싫어 잠든 척을 했다. 그러나 얼마 하지 못하고 다시 눈을 떴다. 몸을 돌린 하윤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불안이 잦아들지 않았다. 왜 불안한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울면서 잠에서 깼던 그날에서 아직 벗어난 것 같지 않았다.
“…….”
하윤의 불안을 알았던 것인지 무경은 하윤을 바짝 끌어안았다. 그는 하윤의 이마에 입 맞춘 뒤 등을 도닥였다.
“잠들 때까지 업어 줄까?”
하윤은 무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캄캄한 밤중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다정을 느낄 순 있었다. 하윤은 무경의 머리를 제게 끌어당기며 대답했다.
“아니.”
대답과 동시에 입술이 맞닿았다. 하윤은 숨을 가볍게 들이켜다가 무경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가볍게 머금고 떨어졌다가, 다시 머금으려 할 때 무경의 혀끝이 하윤의 혀끝에 맞닿았다. 가벼운 접촉에 속이 간질거렸다.
은근하게 손끝을 비비는 게 속셈이 있는 것 같았으나 하윤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못된 마음을 품자 정말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윤은 무거워진 눈꺼풀을 기꺼운 마음으로 닫았다.
그리고 까무러치듯 잠든 것과는 별개로 하윤은 꿈을 꿨다.
거대한 무언가가,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가가가각-!
벽이 긁히고 무너지는 소리가 뒤따랐다. 하윤은 마른침을 꼴깍였다. 꼭 지하철 선로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바다 한가운데서 저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유조선이나.
그러나 보이는 것이 까맣기만 했다. 하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침내 방향을 인지하고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달린 것 같은데 숨은 한 시간쯤 달린 것처럼 거칠었다. 하윤은 유독 크게 들리는 제 숨소리에 가슴을 쳤다. 그러나 소리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점점 몸에 힘이 빠졌다. 하윤은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만큼 가까워졌는지 확인이라도 해야 좀 나아질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린 순간, 온통 검기만 하던 사위가 황금빛으로 바뀌며 자신을 쫓아오던 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크고 검은 문이었다.
문을 보는 순간 심장이 조이는 기분을 느꼈다. 온몸의 감각이 위험을 경고했다.
‘이게 대체 뭐야?’
하윤은 이내 황금빛 공간을 두리번거렸다. 하윤은 이내 이곳이 자신이 구축한 공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하윤은 여태 이곳에서 이런 문을 본 적이 없었다.
하윤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문은 아직 제게로 다가오는 중이었고,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 가만있다간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하윤의 눈에 부서진 문들이 스쳤다.
깨어진 문에선 벌건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흘러내린 핏물이 바닥에 차올랐다. 발등에 찰랑이던 핏물은 어느새 무릎까지 차올랐다. 점점 다리가 둔하게 움직였다. 속도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결국 얼마 가지 못해 하윤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무릎 정도밖에 오지 않았던 수위였으나, 중심을 잃고 쓰러진 순간 바다에 빠진 것처럼 다리가 닿지 않았다. 한참을 허우적거리며 입과 코 안으로 밀려드는 핏물을 먹었다.
거의 울부짖다시피 하여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땐, 거짓말처럼 바닥에 무릎이 닿았다. 하윤은 새어 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가슴팍을 들썩이며 끅끅거리다가 천천히 상체를 들어올렸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으나 누군가 자신의 고개를 잡고 돌리는 것처럼 몸과 고개가 돌아갔다. 하윤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여전히 등 뒤에는 검은 문이 서 있었다. 그러나 문은 더는 그를 쫓아오지 않은 채 멈춰 서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핏물 위로 파동이 치기 시작했다.
점차 파동은 거세어져만 갔다. 공간을 만들고 있던 문들이 일렁일 만큼 강한 파장을 내뿜다가, 돌연 멈추었다. 대신 금방이라도 열릴 듯 덜컥거리기 시작했다. 하윤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꾸만 문을 열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열고 싶지 않았다. 열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저걸 열어선 안 돼. 저걸 열면.]
검은 문에 생소한 글자가 일렁였다. 그러나 흐려서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제대로 보인다고 해도 읽을 수 없을 만큼 낯선 글씨였다. 글씨를 보던 하윤은 숨을 헉 들이켜다가 잠에서 깼다.
“…….”
잠에서 깼음에도 현실 같지 않았다. 하윤은 자신의 얼굴을 더듬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호한 현실을 분간하기 위해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끙끙거리고만 있자 덩달아 잠에서 깬 무경이 입을 열었다.
“왜? 또 꿈꿨어?”
‘또 꿈?’
자신이 언제 이런 꿈을 또 꿨던가. 하윤은 고개를 젓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무경의 품을 파고들었다. 무경은 하윤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무경의 온기가 닿은 순간,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무경을 불렀다.
“무경아.”
“왜에.”
하윤은 무경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문득 조금 전엔 못 들었던 세찬 빗소리가 들렸다. 후두두 떨어지는 소리가 컸다. 하윤은 움직임을 멈추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세찬 빗소리 중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무경아, 저 소리 들려?”
“무슨 소리? 빗소리?”
“아니. 그거 말고.”
하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곧장 방 밖으로 나가려 하자 무경이 재빨리 그의 손을 붙잡았다.
“왜, 물 마시러 가?”
하윤은 고개를 내저었다. 무경의 의문을 해소해 줄 정신이 없었다. 하윤이 막무가내로 발걸음을 움직이자, 결국 무경도 하윤의 뒤를 따랐다.
일 층 거실로 내려간 하윤은 이유를 묻는 무경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윤이 거실 한가운데 서서 숨죽이자, 무경 또한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리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소리가 들려.”
하윤은 최대한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나 무경은 여전히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무경이 고개 젓는 것을 본 하윤은 그와 마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빗소리에 묻히긴 했지만, 확실히 소리가 들렸다.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하윤은 그것이 문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기감이 좋은 무경이 듣지 못했을 리 없으니까.
하윤은 차마 바깥은 보지 못하고 서이주 부부의 방과 통하는 문을 살짝 열었다.
“……선생님.”
목소리 끝이 떨렸다. 그 순간 무경이 하윤을 자신의 뒤로 숨기며 커튼을 움직였다. 정원이 훤히 보이는 거실 창 끄트머리엔 현관도 살짝 보였다. 무경은 그곳에서 저희가 보이지 않도록, 적어도 하윤이 보이지 않도록 조금씩 움직였다.
안 그래도 거세던 빗줄기가 더욱 거세져 아직 어둑한 바깥이 희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딩-동, 딩-동.
하윤과 무경은 동시에 인터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화면 바짝 얼굴을 들이민 채로 활짝 웃고 있었다.
하윤은 초인종의 위치를 떠올렸다. 저만한 아이가 혼자 얼굴을 들이밀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무경을 슬쩍 바라보자 그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딩-동, 딩-동.
반응하지 않자 계속해서 초인종이 울렸다. 보다 못한 무경이 인터폰을 향해 나아갔다. 하윤은 놀라 무경의 팔을 끌어안았다.
“가지 마.”
“이대로면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가지 마.”
그때 서이주 부부 방의 문이 열렸다. 잠옷 차림인 하윤이나 무경과 달리, 둘은 간단하게나마 무장하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 나온 서이주는 인터폰 화면을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막 입을 떼려는 순간에 받지도 않은 인터폰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