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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9화 (9/162)

9화

무경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윤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쭈물거렸다.

혹 추울까 싶어 이불을 끌어다가 하윤의 몸에 둘렀다. 때맞춰 하윤의 몸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무경은 곧장 이불로 감싼 하윤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 일 없어.”

“아니, 나는.”

“내가 오늘 너 뭐 했는지 다 알려 줄게.”

무경은 습관처럼 하윤의 콧대를 매만졌다. 안경 때문에 곧잘 자국이 남는 부분이었다. 하윤이 간지럽다는 양 콧등을 찡그리자 나직한 목소리로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읊조렸다.

가만히 듣고 있자 하나둘 기억나기 시작했다.

“샤워하는데 네가 깨갱거려서 뛰쳐나온 것도 기억나?”

“네가 샤워하다가 뛰쳐나온 건 기억하는데 내가 깨갱거린 건 기억 안 나.”

“큰일인데. 정말 깨갱거렸는데.”

하윤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무경은 웃는 얼굴로 하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느새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 맞출 것 같았다. 하윤이 눈을 감는 사이 무경과 코끝이 닿았다. 숨결이 쏟아지더니, 이내 입술이 아닌 뺨에 입 맞췄다.

“마저 씻고 나오라고 해서 나오니까 네가 눈을 가물거리잖아. 그런데 그때 자면 밤에 못 자기도 하고 밥도 못 먹잖아. 그래서 계속 깨웠지.”

“어떻게 깨웠는데?”

무경은 이불 틈새로 손을 밀어 넣었다. 간지럼 타는 곳에 무경의 손끝이 닿자 하윤은 몸을 들썩였다.

“야아!”

“봐, 이렇게 하면 화들짝 놀래면서 잘 깼어.”

“나 진짜 기억이 없어.”

“피곤했나 보지.”

하지만 단순히 그렇다고 정의 내리기엔 무경의 표정이 이상했다. 하윤은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무경과 대화로 자신이 서이주와 대화한 것까진 기억났다. 그러나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해야 할 것 같은데.’

차라리 서이주한테 묻는 게 어떨까. 그것도 기억 못 하냐며 한숨을 내쉬겠지만 그래도 다시 가르쳐 줄 것이다. 하윤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숨을 크게 들이켠 채로 잠시 숨을 멈췄다. 눈동자만 데구룩 굴려 무경을 올려보자 그가 반대편 뺨에 입 맞췄다.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그러나 무경은 한술 더 떠 자신의 뺨을 가리켰다.

하윤은 멈췄던 숨을 내쉬며 무경의 뺨에 입 맞췄다. 혀를 섞어 본 뒤라 그런지 뽀뽀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경은 깜짝 놀랐다는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쪽도.”

“…….”

“해 줘.”

무경은 배시시 웃으며 반대쪽 뺨을 내밀었다. 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전보다 빠르게 입 맞췄다.

“그렇게 빨리 떼는 게 어딨어? 닿자마자 떨어져서 느낌도 안 나잖아.”

“몰라, 난 했어.”

“더 해 줘.”

하윤은 대답 대신 몸을 뒤집었다. 그러나 무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하윤을 몸으로 짓눌렀다. 하윤이 작게 비명을 지르자 드러난 얼굴과 목덜미에 쪽쪽 입 맞추기 시작했다.

“그만해, 그만. 나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 해.”

무경이 다시 달려들까 봐 하윤은 밀쳐낼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무경은 순순히 그만두었다.

“손 줘 봐.”

“…….”

무경은 하윤의 손을 살살 주무르다가 이어 그의 발을 주물렀다.

“이제 조금 괜찮네. 아까 많이 차가워서 걱정했어.”

“갑자기 그냥 놀랐나 봐.”

무경은 피식 웃다가 마저 자자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그러나 하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 전 무경과 장난을 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윤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바라보자 무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산책하러 가자.”

“이 밤에? 나 밖에 나가기 싫어.”

“알아. 너 벌레 싫어하잖아. 지금 나가면 최소 세 방은 물리겠다.”

“그럼 어디 가게.”

“그냥 이 층 돌아다니게.”

하윤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무경이 제 등을 내밀었다.

“뭐? 업히라고?”

“응.”

“에이.”

“어서.”

무경의 재촉에 하윤은 못 이긴 척 그의 등에 업혔다. 무경은 얇은 이불을 염력으로 움직여 하윤을 감쌌다. 어째 모양새가 어디서 많이 본 모양이었다.

“지금 나 포대기 한 거야?”

“응.”

“왜?”

“그러고 싶어서.”

무경은 하윤을 업고서 본격적으로 하윤을 어르기 시작했다. 몸을 들썩이며 방을 서성이다가 밖으로 나갔다. 새벽녘이라 그런지 온 집 안이 조용했다.

그러나 무경이 이따금 발걸음 떼는 소리와 하윤이 흔들리며 내는 숨소리가 새벽녘 침묵을 방해했다.

“넌 옛날에 내가 얼마나 이렇게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

“옛날에 언제?”

“세 살쯤?”

“넌 그때 기억나?”

“다는 아니고 몇 장면 정도만. 그때도 네가 밤잠을 못 자서 아버지가 널 업고 얼렀는데 그게 너무 싫은 거야.”

“내가 아버지를 빼앗아서?”

“아니, 아버지가 널 빼앗아서.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해 줄 수 없으니까 자신이 해 준다고 하셨어. 나는 할 수 있다고 우기고. 그도 그럴 게 그때쯤엔 이미 염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단 말이야. 널 드는 건 식은 이유식 먹기보다 쉽다고 생각했지.”

“아, 그거 그 사진인가?”

하윤은 어릴 적 사진을 떠올렸다. 그때도 덩치가 컸던 무경이 제게 등을 내밀고 있고 저는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울고 있었다. 주변에 다른 물건들이 동동 떠 있는 건 덤이었다.

그 시절 무경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조각인 하윤에겐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늦게나마 소원 이뤘네.”

“맞아.”

무경은 몸을 살살 흔들었다. 에어컨이 나오는 방이 아니라 후덥지근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놀라며 바짝 곤두섰던 신경이 이제야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대신 바깥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꼭 태풍이 오기 전날 같았다.

무경은 이 층 복도를 다 돌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부모님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내려가서 하윤이 마실 물을 떴다. 그때 알람을 맞춰 두었는지 압력밥솥이 돌아가려 했다. 무경은 흠칫 놀라다가 이내 하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하윤은 무경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무경은 압력밥솥을 끄고 솥을 꺼냈다. 아직 잡곡이랑 섞지 않은 쌀을 한 컵 퍼서 살살 씻은 뒤, 솥 한쪽에다가 슬쩍 넣었다.

위장용으로 하윤이 잘 먹는 잡곡 몇 가지를 그 위에 올리고는 다시 솥을 넣었다. 잊지 않고 취사 버튼도 눌렀다. 그 뒤 무경은 다시 냉장고를 열었다. 뽀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까 봐 염력으로 간식거리를 하나씩 들어 보이며 하윤의 눈치를 살폈다.

하윤이 영 동하지 않자 무경은 냉동실을 열어 호두 맛 아이스크림 바를 꺼냈다. 흡사 데시벨이 높게 나오면 벌칙을 받는 게임이라도 하듯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백무경이 이렇게 하찮은 일로 능력을 쓰는 줄 모를 것이다.

하윤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 하윤의 손끝에 아이스크림 포장지가 닿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손끝을 움츠리자 무경이 고개를 돌렸다.

“왜, 싫어? 너 이거 좋아하잖아.”

“이 밤에 먹으라고?”

“안 먹을 거야? 다시 넣을까?”

“아니. 먹을래.”

무경은 씩 웃으며 하윤을 소파 위에 내렸다.

“너는 안 먹어?”

“그냥 너 먹는 거 한 입 먹게. 먹다가 질린다고 할 거잖아.”

“야, 맨날 그러는 거 아니거든.”

하윤은 포장지를 깐 아이스크림을 무경에게 내밀었다. 무경은 남은 걸 먹겠다고 했지만, 하윤이 계속 들이밀자 결국 조금 베어 먹었다.

어찌나 조금만 먹었는지 이빨 자국만 내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윤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며 무경에게 물었다.

“너 나한테 이렇게 하는 거 안 귀찮아?”

“이렇게?”

“자다 놀랜 거 달래고 그런 거.”

“맨날 놀라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그게 왜 귀찮아? 네가 좋아하잖아.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면 뭐든 좋아. 다른 사람 만나는 거 빼고.”

하윤의 옆에 앉은 무경은 자연스레 하윤을 끌어 제 품 안에 가뒀다. 하윤 또한 익숙하게 무경의 가슴팍에 몸을 기댔다. 무경은 하윤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고운 이마를 드러내고 고집스러운 눈썹을 살살 문질렀다.

“가끔 나는 네게 작은 조각 같아. 없어도 괜찮은 조각. 그래도 나 버리지 마. 남들이 해 줄 수 있는 건 나도 다 해 줄 수 있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하윤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작은 조각이었으면 진작 털고 갔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경도 말하는 것이리라. 하윤은 확인차 몸을 반쯤 돌려 무경을 올려다보았다. 무경은 하윤을 보며 작게 웃었다.

“그럼 귀찮냐고 묻지 말고 너도 내가 좋아하는 거 해 줘.”

“내가 좋아하는 게 네가 좋아하는 거라고 했잖아. 그럼 내가 할 게 뭐 있어?”

“옆에 있어 줘야지.”

“지금도 옆에 있잖아.”

“……입 맞춰도 돼?”

“아까 많이 했잖아.”

“나는 온종일 하고 싶어. 학교에서도 내내 그 생각밖에 안 했어. 빨리 집에 오고 싶고, 둘만 있고 싶었어.”

“너, 너 조심해야 해.”

하윤은 아이스크림을 앞뒤로 흔들며 무경에게 경고했다.

“선생님이 너 암시 풀렸냐고 물으시더라. 자꾸 이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 아냐. 이러다 이제 선생님이 돈까스 먹으러 가자 그러면 너 암시 강화하러 가는 거야.”

“암시 강화하는 게 너한테 좋은 거 아닌가?”

“너 그거하고 오면 까칠해지잖아. 머리도 아프다고 그러고. 정신계 그건 자주 해서 좋을 거 하나 없다고 그랬어.”

“암시 강화 안 해서 내가 못 참으면 어떻게 할 건데?”

“너 내가 싫어하는 건 안 하잖아.”

“네가 안 싫어하면 할 수도 있지.”

“…….”

예리한데. 하윤은 목 끝까지 떠오른 말을 꼴깍 삼켰다.

여태 무경이 밀어붙이긴 했지만, 자신이 정말 싫어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암시가 그랬고 무경 본인도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윤은 아직도 자신이 무경과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자꾸만 상황이 반복되자 어쩌면 끝까지 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었다.

“어쨌든 네가 아픈 건 싫어.”

“다 컸네. 김하윤.”

무경은 하윤의 목덜미와 뺨을 쓸어내렸다. 슬쩍 올려다본 무경의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질거리고 있었다. 마주할 자신이 없어진 하윤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아이스크림 먹는 데 열중했다. 그사이에도 무경은 부지런히 하윤을 어루만지고 지분거렸다.

“하윤아, 뺨 깨물어도 돼?”

“미쳤어?”

“그럼 귀는?”

“거긴 더 안 돼.”

“그럼 목.”

“말도 마.”

“다 안 되면 나는 어디 깨물어? 나 좀 생각해 줘.”

“너도 나 좀 생각해 줘. 왜 깨무는데.”

“너 너무 좋아서.”

하윤은 피식 웃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럼 그냥 만지게만 해 줘.”

“진짜 미쳤어?”

하윤은 바락 소리 내 대답하다가 지레 놀라 입을 다물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서이주 부부의 방을 힐끔거렸다.

“왜 안 되는데?”

“선생님이랑 아저씨 주무시잖아.”

“그럼 방에 갈까?”

뭐에 또 꽂혔길래 이러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무경은 손가락으로 하윤의 목을 살살 쓸었다.

“너 이러면 싫어.”

“왜, 야한 짓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만져 보자는 건데. 너 혹시 내가 널 만지면 흥분해?”

“……아니거든.”

“그럼 왜?”

“아니, 왜 만지냐고.”

“자꾸 보이잖아.”

“…….”

하윤은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빠는 것보단 만지는 게 낫잖아. 정 안되면 깨물래.”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윤은 한 번 더 서이주 부부의 방을 힐끔거렸다. 이러다가 들킬 것만 같았다.

“그래, 만져라. 만져.”

하윤은 만만한 귀를 가리켰다. 앞에선 안된다고 했지만, 괜히 다른 곳에 손대는 것보단 귀가 나은 것 같았다. 허락이 떨어지자 무경은 하윤에게 바짝 붙었다. 마주한 얼굴이 가까워 입술을 닿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입술보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무경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하윤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튼 사이, 무경은 아주 느릿하게 하윤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무경의 손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아주 조금씩, 또 조금씩. 차가운 손끝 때문에 괜스레 몸이 긴장했다.

하윤은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무경 몰라 마른침을 꼴깍이다가, 주의를 돌리기 위해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너 타임캡슐에 뭐 넣었어?”

“안 알려 줄 건데.”

“왜.”

“십 년 뒤에 열어 보려고. 그럼 넌 뭐 넣었는데?”

“넌 안 알려 주면서 나는 말하라고?”

“아니야. 그건 안 물을래. 나중에 열어 보지 뭐.”

물품만 전달하고 타입캡슐을 묻는 건 서이주와 백진하가 대신했다. 덕분에 하윤은 그들이 언제 타임캡슐을 묻었는지 무엇을 묻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들 서로가 묻은 것을 비밀로 했기 때문이었다.

“치사하게.”

그때, 먹는 것을 잊은 아이스크림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차 해서 입으로 가져가자 마주 고개를 숙인 무경이 대신 핥았다.

바깥으로 나온 혀가 잠깐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놀라 눈을 부릅뜬 순간, 하윤은 자신이 어느새 무경의 가슴이 아니라 소파 바닥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달음의 순간을 기념하듯 아슬아슬하게 바에 매달려 있던 아이스크림이 하윤의 가슴팍에 떨어졌다.

“어.”

하윤은 자신의 위로 드리워지는 익숙한 그림자에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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