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맨날 요즘 같으면 좋겠다.”
“이놈이 큰일 날 소리 하네.”
하윤의 힐난에도 무경은 웃기만 했다. 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왜 좋은지 이유를 물었다.
“왜긴 왜야. 네가 이렇게 내 옆에만 있잖아.”
“…….”
“주변 탐색하기도 편하고.”
하윤은 기가 차 무경을 노려보았다. 무경이 애써 탐색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수색에 가까웠다. 그는 하윤의 책상 서랍 안을 수시로 확인하고, 누군가의 선물이나 편지가 들어 있으면 자기가 먼저 열어 봤다.
학교 안은 에스퍼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이었다. 흉흉한 요즘 어떤 세력이 어떤 의도로 물건을 두었는지 의심스럽다는 게 무경의 의견이었다. 개인 프라이버시는 안전 앞에선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또한, 무경은 항시 하윤의 곁에 붙어 다른 반 혹은 다른 학년의 접근을 경계했다. 물론 이건 예전부터 한 일이지만 지금처럼 대놓고 하지 않았다.
“넌 너무 무뎌. 시설 안에 속 시커먼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남녀노소를 아우르기 위해 속 시커먼 것들이라고 호칭한 무경은 받치고 있던 하윤의 엉덩이를 살짝 때렸다.
“참 나.”
“참 나가 아니야. 정말 아니라고. 오늘 너한테 온 편지에서 머리카락이랑 주사로 그린 부적 나왔어. 정신계 애들 달라붙으면 얼마나 귀찮아지는데.”
“그거 말고. 그건 척 보기에도 수상했지만 다른 건 아니었잖아.”
“내 기준엔 다 수상했어.”
“야, 적당히 좀 해. 내가 너처럼 사사건건 참견하면 너도 갑갑하지 않겠어?”
“아니? 그러니까 너도 해. 아니, 좀 해.”
“…….”
하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피차 귀찮고 싫어야 보복이 되는데 상대가 도리어 그걸 바라고 있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약이 바짝 오른 하윤은 무경의 어깨를 깨물었다. 제법 아프게 잘근거렸는데도 무경은 반응이 없었다.
하윤이 물고 있던 살을 놓았을 때, 무경이 획 고개를 돌리며 뺨을 물려는 양 이를 들이댔다. 깜짝 놀란 하윤이 몸을 들썩이자 무경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하윤은 뒤에서 무경을 노려보다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근데 애들은 왜 데리고 하교하냐.”
“그건 내가 바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시키는데 어떻게 하냐. 그리고.”
“그리고 뭐.”
“여차하면 그 애들을 미끼로 써도 되고.”
“이야, 백무경 너 무섭다. 같은 반 친구들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어딨냐?”
“걔들도 속으론 비슷할걸? 문제 생기면 나더러 나서라고 하겠지. 그거나 이거나 똑같은 거고.”
“이 간사한 놈.”
“칭찬 고마워.”
무경을 힐난한 것과 반대로 기분은 좋아졌다. 하윤은 진짜로 간사한 놈은 누구인지 생각하다가 무경의 등에서 내려왔다. 어느새 하윤의 방 앞이었다. 하윤은 방문을 열고 들어간 뒤, 따라 들어오려는 무경의 등을 밀었다.
무경을 방 밖으로 내몬 뒤 하윤은 문을 닫았다. 이제 누구도 하윤의 허락 없이는 방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같은 능력을 갖고 있고, 이 집을 소유하고 서이주조차도.
“…….”
하윤은 가방을 벗었다. 무경이 내내 염력으로 들고 있었는지 벗을 때쯤에야 무게가 느껴졌다.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은 하윤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무경과 있을 땐 뒤척이기도 힘든데, 홀로 있으면 조금 넓게 느껴졌다.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을 때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빨리 씻으라고. 씻고 나와서 수박 먹어.”
그냥 말로 하면 그만인 걸 무경은 자꾸만 문고리를 돌렸다. 그런다고 열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하윤은 먹지 않는다고 말하려다가 문을 열었다. 무경은 문이 열리자마자 문틈 사이에 가방을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곧장 침대로 걸어와 하윤의 팔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왜.”
“누우면 자잖아. 더울 때 바로 씻어. 씻고 수박 먹자.”
“그럼 방까지 왜 데려왔어? 거실에 두지.”
“그러게. 그럴 걸 그랬어.”
상황이 자기 생각과 다르게 돌아간 모양이었다. 하윤은 캐묻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경의 채근에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가자 무경이 수박을 썰고 있었다.
그 또한 하윤이 씻는 사이 씻었는지 머리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무경은 커다란 수박을 사각형으로 잘랐다. 그런 다음 잘라 낸 수박 껍질을 다른 통에 담았다.
“그건 왜 안 버리고 담아?”
“아버지 드시라고.”
“…….”
“금방 써니까 거기 앉아 있어. 방에 가지 말고. 내가 과제도 다 꺼내 뒀어.”
무경의 말대로 소파 앞 탁자 위엔 책과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하윤은 소파에 누워 책을 들췄다.
미성년 에스퍼를 주 타깃으로 하는 납치 살인사건이 벌어져 단축 수업이 이루어졌지만, 어딜 가든 말 안 듣는 놈들이 있다.
멀쩡히 짝지어서 집에 잘 갔다가 슬쩍 밖으로 나오는 놈들이 있었다. 이를 미리 예측한 교사들은 과제를 쏟아 냈는데, 과제를 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말 안 듣는 놈들은 과제도 안 한다는 사실 말이다.
“에휴, 착하고 순한 놈들만 손해를 봐요. 손해를.”
예를 들면 김하윤 같은 아이들 말이다. 하윤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과제가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윤은 교과서 사이에 끼워 두었던 프린트를 찾아 꺼냈다. 멍한 눈으로 글자만 응시하고 있자 주방에 있던 무경이 피식 웃었다.
절 보고 웃는 게 싫었던 하윤은 반대로 누워 몸을 숨겼다. 프린트를 보는 척 얼굴을 가리자 무경이 수박씨 발라내는 소리만 들렸다.
무경이 젓가락으로 빼낸 수박씨가 쟁반에 연거푸 톡톡 떨어졌다.
하윤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프린트물을 슬쩍 내렸다. 괜히 멋쩍어진 하윤은 TV를 틀었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죄다 재방송에 홈쇼핑만 주야장천 나오고 있었다. 한참 채널을 돌리다가 영화 채널에서 멈췄다.
이미 명절에 몇 번씩 재방송했던 액션 영화였다. 하수도에서 괴수가 솟구치며 도로가 초코케이크같이 갈라졌다. 도로 위에 있던 차들이 공중을 날다 떨어져 불꽃을 터트렸다. 크와와와왕. 괴수가 울부짖자 건너편 빌딩 위에 있던 헌터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처음엔 주인공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선배 헌터가 주인공을 부르며 달려왔다. 와락 안긴 선배 헌터는 주인공에게 입 맞추기 시작했다.
진한 입맞춤이 이어지고 카메라는 그들의 주변을 돌며 키스신을 보여 주었다. 그사이 괴수는 한번 더 크와와와왕 울부짖었다. 괴수의 입안이 붉게 물들고 산성 물질을 막 뱉으려고 할 때, 키스를 마친 주인공이 빌딩을 박차고 날아갔다.
“이거 전에 봤잖아?”
“볼 게 없어서.”
“자, 수박 먹어. 씨 다 뺐어.”
무경은 먹기 좋게 썬 수박을 하윤에게 내밀었다.
“…….”
수박은 달고 영화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주인공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이다. 찰나의 순간, 주인공은 스승이 악당의 손에 죽어 가며 남겼던 유언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고 각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 괴수는 주인공을 집어삼킨다.
잠시간의 정적 뒤 괴수의 몸이 산산이 조각나며 진정한 힘을 각성한 주인공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가 남은 괴수를 처리할 때, 괴수를 유인해 주인공을 위기에 빠트렸던 악당들이 선배 헌터를 사로잡는다.
선배 헌터는 주인공에게 부담을 지게 할 수 없다며 악당과 함께 빌딩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진정한 힘을 각성한 주인공은 빛과 같은 속도로 선배인 여주인공을 구해 낸다. 비행 능력이 없었던 악당은 땅에 처박혀 곤죽이 됐겠지만, 그들이 알 바 아니었다.
주인공은 반대편 빌딩 옥상에 선배 헌터를 내려 주게 되고, 격앙된 둘은 또다시 입 맞추기 시작한다.
그렇게 도시는 새로 태어난 영웅의 활약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
“저거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주인공들이 비위가 참 좋단 말이야.”
“욕정이 활활 타는데 그런 게 보이겠냐.”
무경의 대꾸에 하윤은 코웃음 쳤다.
“왜 웃어.”
“그냥,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게 웃겨서.”
무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은근슬쩍 눕는 하윤을 다시 일으켰다.
“영화 다 봤으니까 이제 과제 해야지.”
“아, 잠시만. 잠시만.”
하윤은 무경의 손을 떼어 낸 뒤 그의 허벅다리를 베고 누웠다. 무경은 한숨같이 웃다가 하윤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겼다.
“너 또 이러다 자려고 그러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러나 무경은 조금 전과 달리 하윤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칼을 만지거나 눈썹을 살살 누르는 게 자라고 자리를 깔아 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오냐오냐해 주니까 내가 자꾸.’
자꾸만 마음이 얄궂어졌다. 무경이 좋지만 갑갑하고, 갑갑하지만 그가 있어야 안정된다. 그가 좋기는 하지만 부담스럽고 부담스럽지만, 그의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건 싫었다. 또 저는 다른 사람을 만나 보고 싶었으나, 무경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제 변덕, 사춘기는 무경과 관련이 있었다.
그래, 전부 무경의 탓이었다.
‘대체 왜.’
하윤은 손을 뻗어 무경의 목을 만지작거렸다. 괜히 무경의 잘생긴 이마나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러나 하윤은 주먹을 쥐는 대신 입을 열었다.
“너 키스해 봤어?”
무경은 대답 대신 하윤을 바라보았다.
“키스?”
“그래. 해 봤냐니까.”
“…….”
“뭐야, 왜 대답 안 해? 해 봤어? 언제?”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인 하윤은 벌떡 일어나 무경의 어깨를 붙잡았다. 배신감마저 들었다. 네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감히.
“너랑 했잖아.”
“야, 유치원 때 뽀뽀한 거 말고. 그런 거면 나도 경험 있다고 쳐야지. 그거 말고 혀 넣는 거.”
무경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움직였다. 그는 괜히 수박을 집어 먹다가 하윤의 입에도 수박을 대어 주었다. 하윤은 수박이 꽂힌 포크를 다시 접시로 내동댕이쳤다.
“진짜 없는 거 맞아?”
“하게 해 줬어야지.”
“뭐?”
“너랑 한 거 아니면 없어. 정말.”
하윤은 무경의 얼굴을 붙잡았다. 코 닿을 거리에서 지그시 눈을 바라보자 무경 또한 하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허리를 잡지 않고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건 왜 궁금한데?”
“난 안 해 봤는데 넌 해 봤으면 기분 나쁘잖아. 나만 늦은 것 같고.”
“어? 어어.”
“성의 있게 대답해.”
“알았어. 같이 하면 했지 너 하기 전까진 나도 안 할게.”
“두고 볼 거야.”
무경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조금 전 수박을 먹어 놓고도 목이 탄다며 일어나려했다.
“어딜 가려고.”
“물, 물 마시러.”
“이거나 먹어.”
하윤은 조금 전 내동댕이쳤던 포크를 다시 집어 들었다. 무경은 하윤이 주는 대로 수박을 넙죽 받아먹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
영화나 소설 속에서 입맞춤이 나오는 것은, 그것이 애정의 극점을 표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입맞춤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격한 감정. 반대로 입을 맞춰 보면 이 변죽 끓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입맞춤할 정도인지, 하지 않을 정도인지는 알지 않을까.
“연습해 보게.”
“연습?”
“나중에 다른 사람이랑 할 때 할 줄 모르면 창피할 거 아니야.”
“……다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