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집에 돌아온 하윤은 가방부터 팽개쳤다. 이 층 자기 방까지 올라갈 기력이 없었다. 이미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어차피 집에 아무도 없었다. 하윤은 단추를 풀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상의를 반쯤 벗은 상태로 냉장고를 열고 잠시 열기를 식혔다.
“쪄 죽는 줄 알았네.”
냉장고 안에 들어 있던 냉차를 벌컥이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한바탕 찬물을 뒤엎고 나서야 더위가 가셨다.
하윤은 대강 물기를 닦은 다음 욕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본디 있어야 할 공간이 아닌, 하윤의 방이 나왔다. 하윤은 셔츠와 사각팬티를 입고선 다시 문을 열어 거실로 향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발끝으로는 선풍기를 틀고 손으로는 리모컨을 집어 TV를 틀었다. 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오늘 폭염주의보가 내렸다며 더운 날씨에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폭염의 긍정적인 면을 소개하기도 했다.
폭염이 인간의 건강과 수면에 나쁜 영향을 끼칠지 몰라도, 이런 날 밤에는 괴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해 자체가 긴 데다가 열대야가 이어지니 괴물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날씨만 믿고 새벽 늦게 돌아다녀선 안 된다. 게이트가 언제 어디서 열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물론 암만 염불 외듯 말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유구한 역사 속 반복된 사건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더군다나 낮에 나오는 것들은 더위랑 상관없이 나오니까.’
씻어서 그런지 졸음이 밀려왔다. 막 씻고 나온 뒤라 무덥게만 느껴지던 공기도 서늘하게 느껴졌다. 하윤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시계를 흘깃 바라보았다. 다섯 시. 시간이 조금 애매했다. 세 시나 네 시였으면 낮잠을 잘 테지만 지금 자면 밤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사건 사고 소식입니다. 오늘 낮 두 시경, 용인 괴수생태연구소에서 단발성 게이트가 열려 천급 괴수 한 무리가 출현하였습니다. 마침 미성년 에스퍼들의 현장 학습을 대비하고 있던 헌터들이 즉각 대응하여 사태를 수습했는데요, 하마터면 아찔한 사고로 이어질 뻔했습니다. 현장에서 알려 드립니다.]
“어.”
가물가물한 눈으로 TV를 응시하던 하윤은 앓는 소리를 냈다. 마침 낮에 있었던 일이 방송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때마침 욕실 앞에 벗어 둔 옷 무더기에서 진동 소리가 났다. 닿을 리도 없는데 하윤은 발끝을 쭉 뻗었다.
받을까, 말까.
말까, 받을까.
일어나면 이 나른한 감각이 깨어질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누가 와서 갖다줬으면 싶었다. 그때 다급히 도어 록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백무경이 들어왔다.
“김하윤!”
“…….”
“왜 먼저 갔어?”
백무경은 더위로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씨근거렸다. 그러나 김하윤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백무경의 말이 시끄럽다며 귀를 틀어막았다. 보다 못한 백무경은 성큼성큼 걸어와 김하윤의 앞을 가렸다.
“바람 가려.”
“에어컨 틀면 되잖아.”
“에어컨 바람은 거슬려. 문도 다 닫아야 하고.”
김하윤은 백무경의 다리를 밀었다. 그러나 워낙 덩치가 있고 힘도 세다 보니 대강 미는 손짓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워!”
김하윤이 짜증 내듯 소리치자 백무경은 김하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달리 더 말하지 않고 에어컨을 켰다.
“왜 연락 없이 먼저 갔냐고.”
“연락하면 기다리라고 했을 거잖아. 오늘 얼마나 더웠는지 알아?”
“시원한 데서 기다리면 되잖아.”
“그래도 기다려야 하잖아.”
“그럼 연락이라도 해 주든가. 전화도 문자도 확인 안 하고.”
“씻는다고 몰랐어.”
“그래, 전화 한 번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
“무경아.”
“왜!”
“무경아.”
“…….”
“내가 먼저 가서 화났어?”
무경은 입을 굳게 다문 채 하윤을 노려보았다. 화를 삭이듯 돌아서서 눈을 끔뻑이던 그는 씻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뒤돌았다. 그런 다음 무경이 욕실로 가며 벗어 놓은 짐과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무경은 하윤의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찾아 하윤에게 던졌다. 하윤을 맞추는 척했지만, 휴대전화는 맞은편 소파에 떨어졌다. 하윤이 참지 못해 곧장 욕실로 들어갔던 것과 달리 무경은 이 층에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하윤은 TV를 껐다. 돌아누운 다음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하윤의 의지를 따라 열려 있던 창문들이 일제히 닫혔다. 무경의 등장으로 잠시 더웠으나 다시금 시원해졌다. 주변은 조용하고 시원했다.
결국, 하윤은 참지 못하고 잠시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죽 소파 눌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김하윤.”
절 부르는 소리에 하윤은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상대는 만족하지 않고 재차 하윤을 불렀다. 결국, 이기지 못한 하윤은 양팔을 벌렸다. 상대, 무경은 그제야 하윤의 품을 파고들었다.
“너 나 너무 귀찮아하지 마.”
“아니야, 내가 언제 널 귀찮아했어.”
“그게 아니면 연락을 왜 안 받았어?”
“넌 연락을 너무 많이 해.”
“네가 받았으면 그렇게까지 않았어.”
무경은 하윤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채 그를 노려보았다. 강렬한 시선에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하윤은 쿠션을 고쳐 베며 변명을 떠올렸다. 그러나 마땅한 게 없었다. 무경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답장할 만한 내용을 보내야지. 실습하고 있는 거 뻔한데 뭐 하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냐?”
꾸역꾸역 생각해 낸 변명이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무경은 한숨을 내쉬다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러곤 좀 더 단단히 하윤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언제 오신대?”
하윤은 무경을 슬쩍 밀어내며 물었으나 그는 꿈쩍하지도 않았다.
“오늘 장례식장에 가셨어. 지방이라 하룻밤 자고 오신대.”
“아침엔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
“낮에 갑작스럽게 부고를 들으셨대.”
“나한테는 왜 말씀 안 해 주시고?”
“아까 현장에서 들었거든.”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런 내용을 문자로 보내지 그랬어?”
“김하윤 하는 짓이 얄미워서 답장하면 말하려고.”
“뭐? 하는 짓이 얄미워?”
하윤은 무경을 힐난하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무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하윤의 입술을 손끝으로 톡톡 쳤다.
“딴 놈이 나한테 이렇게 말했으면 가만 안 뒀어.”
“참 나. 힘세다고 유세하냐?”
무경이 대답하지 않는 사이 하윤은 몸을 뒤집었다. 무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순순히 몸을 비켰다. 무경의 위로 올라타자 그제야 숨이 트였다.
“근데 누구 장례식이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정기오. 어릴 때 봐서 나는 기억 안 나는데, 넌 기억나?”
“나도 사진 봐야지 알 것 같은데.”
정기오, 정기오. 하윤은 속으로 이름을 되뇌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쩐지 조금 초조해졌다. 그때 무경이 손을 뻗어 하윤의 얼굴을 매만졌다.
“잠시 생각해 봤는데, 어머니 장례식장 가신다고 썼어도 넌 그냥 보고 답장 안 했을 것 같아.”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김하윤 일이 년 봤어?”
무경의 대꾸에 하윤은 키득거렸다. 하윤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무경은 하윤을 흘겨보았다.
“김하윤 진짜 싫어.”
“안타깝네, 나는 너 좋아하는데.”
“거짓말 좀 그만해.”
무경은 이번엔 하윤의 입술을 살짝 꼬집었다. 하윤이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자 금세 손을 뗐다. 그러곤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빨리 안아 줘. 나 김하윤 이틀이나 못 봤어.”
“…….”
오늘 괴수생태연구소 앞에서 일어난 단발성 게이트와 달리 미궁의 출입문이 열릴 땐 일정한 징조가 보였다. 동물이나 곤충의 갑작스러운 이동, 혹은 심해어가 수면으로 올라온다거나 등. 그 외에 공간의 왜곡 등이 대표적인 징후였다.
한번 열린 뒤 일정 수의 개체가 나오거나 단시간 열렸다가 닫히는 입구를 게이트, 미궁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를 처치하기 전까지 상시 이동이 가능한 입구를 출입문으로 불렀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똑같은 게이트이나, 차이가 있으므로 한국에서는 대부분 구분해 불렀다.
백무경은 징후가 발견된 곳에서 미궁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현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일이고 출현한 뒤 미궁을 정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왜 이렇게 빨리 나왔지.’
김하윤은 의문을 담아 백무경의 가슴팍을 지그시 눌렀다.
“안아 달라니까.”
“너 출입문에서 대기한 거 아니었어?”
“무산되어서 부근에 나타난 하급 괴수 처치하는 거로 바뀌었어. 그래서 어머니도 자리를 뜨실 수 있었던 거고. 사실 어젯밤부터 그런 기미가 보였었거든.”
백무경의 어머니, 서이주는 김하윤과 같은 능력을 지닌 에스퍼였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문을 볼 수 있었고 열 수 있었다. 지금은 특수재난관리청 산하에 있는 미궁의 출연 여부를 분석하는 연구소에서 소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래, 미궁이 관측된다고 해서 입구가 다 열리는 건 아니지.’
그사이 백무경은 조금 전 김하윤이 그랬던 것처럼 양팔을 벌렸다. 김하윤은 덥다는 핑계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에어컨 틀었잖아.”
“넌 너무 꽉 끌어안잖아.”
“살살 안을게.”
턱도 없는 소리였다. 백무경이 김하윤을 일이 년 본 게 아니듯, 김하윤 또한 백무경을 일이 년 본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틀 동안이나 보지 못했다.
‘하필 선생님도 들어오시지 않는 날이고.’
백무경은 넘어오지 않는 김하윤의 허리를 붙잡았다. 세게 끌어안지 않겠다는 말처럼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다가 간절한 눈빛으로 하윤을 응시했다.
‘곤란한데.’
큰 덩치와 날카로운 인상이 무색하게 퍽 귀엽게 느껴졌다. 웃음 없이 눈을 마주하고 있던 하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무경은 재차 두 팔을 벌렸다. 그러고는 재촉하듯 몸을 살짝 흔들었다.
“빨리.”
재촉을 이기지 못한 하윤은 결국 무경의 위로 몸을 엎드렸다. 하윤이 그를 끌어안는 순간, 무경 또한 하윤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돌렸다. 소파 안쪽으로 하윤의 몸이 들어가게 하고선 하윤의 다리 위에 다리를 올렸다.
“……김하윤 냄새.”
무경은 그가 짊어지고 있던 불안과 긴장을 쏟아 내듯 긴 숨을 내쉬었다. 이완된 근육과 약간 잠긴 목소리, 다정한 손길이 이어졌다.
반면 하윤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잠식하는 안도감에 미간을 찡그렸다. 강제적이리만큼 즉각적인 안정감이 조금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데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무경을 반가워한다는 것이었다.
‘고작 이틀을 보지 못했다고.’
초능력은 영혼이 온전하지 않다고 했다. 흔히들 말하길, 사람의 몸속엔 우주가 있다. 그리고 육체로서 우주의 평안을 도모하는데, 그 역할을 영혼이 대신한다고 했다. 그러나 에스퍼들은 영혼이 불안정하여 몸속에 우주를 가두지 못하고 쏟아 냈다.
불안정하면 불안정할수록 강한 힘을 내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 초능력이 없는 상태를 가장 안정된 상태, 완성된 우주로 보았다.
그렇다면 에스퍼들의 영혼이 왜 불안정한가. 과거 이름 있는 학자는 한 영혼에서 조각났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조각났기 때문에 또 다른 조각이 존재하며, 그와 함께하면 온전해진다고 했다. 심리적, 신체적 안정을 얻는 것이다. 또한, 서로는 하나이므로 서로가 서로를 해하지 못하고 불안정에서 기인한 힘이 줄어든다.
그러나 조각을 찾는 일은 몹시 드물고, 찾는다고 해도 더 강한 힘을 위해 상대를 살해하는 일도 빈번했다.
오늘날에는 조각의 상실이 수명과 관련 있고, 조각과 함께 있을 때 힘의 조절이 더욱 용이하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후로 조각이 조각을 죽이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러나 반대로 외부 세력이 조각이 있는 조각을 없애려 들었다.
아무도 에스퍼의 안정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에스퍼의 범죄에 노출된 일반인들도, 또한 조각을 찾지 못한 에스퍼들도.
첫째는 안정을 알게 된 에스퍼가 몸을 사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조각을 찾지 못한 에스퍼들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김하윤과 백무경은 서로의 조각이었다. 그 덕에 태어날 때부터 온갖 유난을 떨어 댔다. 같은 날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죽을 때도 아마 함께일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더군다나 같은 날 태어나는 게 같은 날 죽는 것보다 어렵지 않은가.
이미 태어났으니 죽는 것쯤이야.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하윤은 다른 생각을 했다.
어차피 평생 함께할 사이라면, 지금 꼭 함께할 필요가 있을까?
적어도 십 년 정도는, 다른 사람과 보내도 되지 않을까?
결코 무경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무경과 함께 있으면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조각과 조각을 맞춘 것처럼 안정이 찾아왔다. 그러나 너무 꽉 들어맞아 자신이 자신 같지 않았다. 그래서 하윤은 무경이 조금 답답했다.
“조금만, 조금만 떨어지자. 너무 갑갑해서 그래.”
하윤은 맞닿은 가슴팍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소파에 등이 닿아 있는 자세라 그런지 무경을 밀어낼 수 없었다. 무경은 하윤을 보고 웃었다.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