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1화 (프롤로그) (1/162)

공금

프롤로그. 원 라스트

김하윤이 태어나 첫 숨을 내쉬던 순간, 백무경 또한 세상에 태어나 첫 숨을 내쉬었다.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순간이나, 김하윤도 백무경도 그렇게 느꼈다.

그들은 운명으로 얽혀 있었으므로.

김하윤은 에스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순간 일대의 [문]이 경배하듯 흔들렸고, 주변에 있던 동능(同能)의 에스퍼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동능의 에스퍼가 아닌 백무경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백무경의 부모는 뛰어난 에스퍼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백무경 또한 일찌감치 에스퍼로 분류되었다. 태중에서 초능력을 사용하여 바깥에 간섭한 적도 있으며, 그 능력의 크기가 심상찮았다.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관련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들인 품이 무색하게 무경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중에 머물렀다. 무경이 초능력자가 아니었다면 유도분만이나 제왕절개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앞서 말했듯 태중에서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에스퍼였다. 그 말인즉 이미 두뇌가 상당히 발달하여 피아와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가 만약 분만을 유도하는 행위와 절개를 위험으로 판단한다면 어찌 될 줄 몰랐다.

그리하여 백무경의 부모와 관계자는 백무경이 세상에 나오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기엔 백무경은 너무 조용했고, 모친 서이주는 너무나 뛰어난 에스퍼였다.

어찌나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지. 출산에 대한 부담을 감안하고서라도 이리저리 불려 다녀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런 전조 없이, 주거지를 떠나 교외로 나왔을 때 서이주는 갑작스럽고도 과격한 태동에 쓰러지고 말았다.

본래 출산이 그러하듯 에스퍼의 출산과 탄생에도 다양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위험 범위가 그들 본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전문 시설에서 분만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산모의 상태가 심각하여 어쩔 수 없이 인근 산부인과로 호송되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여 인근에 있던 에스퍼들이 산부인과 부근에 배치되었다. 환자와 의료진의 안전에 대비해 몇 겹의 방호막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에도 수술을 쉽사리 진행할 수 없었다.

백무경이 이를 위협으로 인식할 경우, 병원의 다른 의료진과 환자들은 무사하겠지만 바로 코앞에 있을 의료진과 서이주의 목숨이 위험했다.

의료진과 보호자가 수술 여부를 두고 갈등하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산모가 산부인과에 도착했다. 예정일이 임박한 데다 가진통을 느낀 산모, 이인영은 씩씩하게 홀로 걸어 병원에 도착했다. 그녀는 아직 회사에 있는 남편과 태연하게 통화한 다음, 수속 절차를 밟았다.

남편과 모친이 도착하길 기다리는 동안 이인영은 계속해서 자리를 뒤척였다. 진통이 오기는 오지만 듣던 것과는 달리 그리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몸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여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산도가 열렸다. 아니, 어떠한 ‘문’이 열렸다고 하는 편이 나으리라.

양수가 터져 침대보가 젖어 가는 것과 동시에, 김하윤이 평온한 표정으로 세상 밖에 나왔다. 다른 산모의 혈압을 재고 있던 간호사가 마침 고개를 돌렸다가 이 광경을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곤히 눈을 감고 있던 아기는 그 소리에 놀란 것처럼 와앙 울음을 터트렸다.

김하윤이 태어나기 전, 서이주 또한 가까스로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온몸의 털이 삐죽 설 만큼, 무형의 힘이 집도의의 몸을 짓눌렀다. 집도의가 가까스로 서이주의 배를 갈랐을 때, 집도의의 코에는 피가 흘러내렸다.

의사는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아이를 꺼냈다. 아이는 눈을 홉뜬 채로 소리 내지 않았다. 그러나 수술실 문이 파르르 떨렸을 때 첫울음을 토했다.

병원 안팎에 대기하고 있던 에스퍼들은 이상을 눈치챘다. 그러나 따로 이상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그건 에스퍼들을 관리하는 관리국의 문제지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백무경을 본래 관리하기로 했던 시설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백무경은 병원을 벗어나길 거부했다.

정확히는 신생아실, 김하윤의 옆자리를 벗어나길 거부했다. 에스퍼들은 결국 알고 싶지 않았던 이상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백무경과 같은 시간에 태어난 사내 아기 김하윤. 이상은 그 아이에게 있었다.

김하윤은 겉으로 보거나 일반적인 측정 방식으로는 능력을 확인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김하윤의 부모는 초능력과 관련 없는 일반인이었다. 팔촌 내를 살펴봐도 에스퍼가 없었다. 그러나 김하윤은 에스퍼였다.

김하윤의 배냇짓 한 번에 병원의 온갖 문이 열리며, 심지어는 공간의 ‘문’도 덜컹 열리기 일쑤였다. 동능의 에스퍼인 서이주는 김하윤의 능력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이는 서이주가 질투가 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서이주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백무경은 김하윤에게서 떨어지려고도 하지 않았고, 김하윤의 부모는 일반인이었다. 그네들은 김하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부모라면 암만 상황이 이렇다 한들 첫 새끼를 남에게 덥석 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서이주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이인영에게 공동육아를 제안했다.

이인영은 거부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결국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서이주는 이인영 부부의 집 옆에 거처를 마련했다.

김하윤은 초능력을 제외하면 수더분한 아기였고, 어디서 자든 개의치 않았다. 반면 백무경은 곁에 김하윤이 있어야 했다. 깊이 잠든 중에도 김하윤이 사라지면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리하여 둘은 모든 순간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했다.

그런 삶이었다.

1화

1. 거짓말쟁이의 운명

“아, 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조별로 움직이고 개별 활동은 삼가도록 합니다. 만일 개별 활동을 하다가 발각될 시, 그에 어울리는 벌점이 부여될 겁니다.”

흔들리는 범죄자 호송 차량 안, 현장 학습을 인도 중인 교사가 아이들에게 경고했다. 교사는 경상도 특유의 억양을 숨기지 않은 채,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특별 주의를 받은 아이들은 야유를 보냈으나 교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교사는 마이크를 옆으로 젖히고 기사에게 길을 안내했다. 그사이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김하윤은 깜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제 옆자리에 앉은 친구 재형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김하윤은 한껏 벌린 친구의 입을 질린 눈으로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호송 차량은 직원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구름은 더러 있었지만 내리쬐는 볕을 억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아스팔트 도로가 지글지글 끓는 것만 같았다.

조금 있으면 에어컨 바람과 헤어져야 한다는 게 그렇게 원통할 수가 없었다.

‘나가기 싫다.’

그러나 어느새 호송 차량은 주차를 마친 뒤였다. 출입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짐을 챙기느라 부산떨기 시작했다. 교사는 차 안을 두루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제대로 준비를 마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교사는 아직 꿈나라에 가 있는 재형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마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네.”

교사는 재형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제야 잠에서 깬 재형은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아직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교사는 잽싸게 재형의 귀를 잡아 비틀었다.

“아야, 아, 아! 선생님 아파요!”

“아프라고 한 게 아니다. 잠 깨라고 한 거야. 암만 현장 실습이라 괴수를 매어 놓고 한다지만 괴수는 괴수야. 너같이 얼빠진 놈 돌아다니면 그놈들 눈 돌아가겠냐, 안 돌아가겠냐.”

교사는 이어 구석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잠자고 있던 아이들을 깨웠다. 그러고는 오늘만 해도 이미 네 번이나 한 현장 학습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괴수(怪獸), 말 그대로 괴상하게 생긴 짐승은 오랜 세월 사람들과 함께했다. 호환과 같이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며 세를 불렸다가, 다시 줄어들었다가를 반복했다. 특히 산업 혁명과 함께 수가 많이 줄게 되었다.

유례없는 발전으로 군수 사업의 덩치가 비대해졌으나, 군수 사업의 목적인 괴수들의 수가 줄어듦으로 사람들은 괴수가 아닌 사람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세계전쟁이 발발하고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을 때, 자취를 감추었던 괴수들이 다시금 세상에 나타났다.

미궁과 함께.

정확하게는 그제야 그들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괴수들은 미궁 혹은 던전이라 불리는 곳에서 나타났다. 미궁은 실재하나 또 실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미궁은 다른 차원에 있는 공간이었고, 이 세상에 나타날 땐 그야말로 우연히 공간이 겹쳤을 때뿐이었다.

반감기는 공간이 겹치지 않을 때였고, 증강기는 공간이 겹친 순간인 것이다.

어찌 됐든 괴수는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고 사냥했다. 또한,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발전된 군수 사업에는 비극적이게도 일반적인 화기로는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숱한 위험에 적응하며 살아왔고, 적응의 한 과정으로 괴수를 상대할 힘을 가진 존재들이 나타났다. 즉, 초능력을 가진 인간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 귀냥꾼, 혹은 싸울아비 등으로 불리며 괴수 사냥에 앞장섰으나 대우가 썩 좋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칼 없이도 상대를 베고 불을 뿜고 물을 쏟고, 얼음을 쏟아 냈다. 대우가 좋지 않다 보니 도적이 된 이들도 많았고 반란을 일으키려던 이들이 많았다.

그랬기에 대대로 특별 관리 대상이 되면서 과한 억압으로 반발이 이어지는 등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현재에 와서는 각종 미디어에 노출되고 헌터니 에스퍼니 하는 외래어 명칭이 기본이 되며 인식이 개선되었으나, 위험 대상이라는 취급은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맞는 말이었다. 에스퍼들이 모두 괴수를 처리하는 헌터 사업에 종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격과 거리가 먼 능력도 있었고 그야말로 에스퍼의 수만큼 다양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에스퍼들의 능력을 통제 관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초능력을 가진 청소년들을 특수 시설에서 의무 교육을 수행하도록 했다. 일반적인 의무 교육과는 달리 거부할 시 군 혹은 나라에 소속된 에스퍼들이 동원되었으므로 참여율이 높았다.

백 퍼센트는 아닌 것은 아예 작정하고 누락시킨 경우를 제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살이가 늘 그렇듯 예외가 있지 않은가.

일반적인 생애 첫 에스퍼 검사는 영유아 필수 예방 접종 단계에서 이루어졌다. 영유아 등이 주사를 맞다가 공격으로 인식하여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물론 더 이르거나 늦을 때도 공동 시설에 입소하기 위해선 검사가 필요했으므로 대부분 이 시기에 걸러졌다.

어쨌든 미성년 에스퍼를 수용하는 시설은 교육부가 아닌 국방부 소속 초인특수관리청에서 담당했다. 기본적인 능력을 제어하는 방법과 실습 외에도 혹시 모를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일반 교과목도 함께 배웠는데, 일반 교육 기관과 같이 초중고로 나누어 관리했다.

명칭 또한 에스퍼 전용 교육 시설이라는 것을 부각하지 않고 일반적인 초중고 교육 기관과 비슷했으나, 교육 기관을 담당하고 있는 초인특수관리청이 국방부 소속인 만큼 특유의 마크가 표기되어 있어 에스퍼 관련 기관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일반 교육 시설에 비하자면 교과 학습의 비중이 작아,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에스퍼는 따로 사교육을 병행해야 했다.

또 여기에 봉사 활동을 겸하게 했는데, 김하윤이 생각하기엔 어떻게 해서든 미성년 에스퍼들의 기운을 빼 놓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다소 빡빡한 교육 과정 중, 실습하는 날은 비교적 편했다. 일찍 끝나면 곧장 집에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하윤은 힘쓰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잘하진 못하지만, 교실에서 앉아 받는 교과 수업이 그리웠다.

하윤은 괜히 호송 차량의 쇠창살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버스에서 거의 다 내렸고, 네다섯 명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더는 미적일 수 없었다. 김하윤은 버스 밖으로 나갔다.

에어컨 바람을 쐬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오자 숨이 턱 막혔다. 볕이 어찌나 뜨거운지 아스팔트 바닥이 찌걱거렸다.

실습은 괴수생태연구소에 이루어졌다. 건물 지하 방공호에 실험용으로 포획한 하급 괴수를 팀을 나눠 처리하는 것이었다. 각자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지 계획표를 짜고, 실제 능력을 사용하였을 때 예상과 합치하는지, 어느 점을 더 보완할지 등을 기술하여 제출해야 했다.

기여도와 참가 여부, 그리고 보고서 작성을 점수로 매겨 수행 평가에도 반영된다.

하지만 능력치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같은 과제라도 난이도가 달라지고 위험도도 달라졌다. 따라서 조를 나누기 전 아예 배제된 아이들이 있었다. 그중에 백무경이 있었다.

백무경같이 전투에 특화된 아이들은 따로 분류되었다. 그들은 포획된 괴수가 아닌, 실전에 투입되었다. 물론 교수들이 함께 파견되어 그들의 안전을 살피지만, 그래도 포획된 괴수와는 위험 정도가 판이하였다.

또한, 실전이다 보니 괴수가 출현해야 하므로 대기 시간도 길었다. 김하윤은 자신이 그쪽으로 분류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백무경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그러나 교사가 코앞에 있어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별 쓸데없는 내용일 게 뻔했다.

인솔 교사는 아이들을 조별로 모이게 한 다음 줄을 서게 했다. 교사가 인원수를 확인할 때, 생태연구소에서 파견된 무장 경비원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교사가 넘긴 아이들의 정보를 확인한 다음, 줄 선 아이들을 에워쌌다.

초능력을 가진 아이들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국가의 귀중한 자산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더운 바람이 훅 불어왔다. 세찬 바람에 옷자락이 나부끼는 가운데, 하윤은 바람에서 유황 냄새를 맡았다.

이상을 눈치챈 교사가 무장 경비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모두의 걸음이 멈춰 선 순간, 허공이 갈라지더니 괴수가 나타났다. 신장은 삼 미터 정도, 질기고 두꺼운 검은 털이 서로 엉긴 채로 갈색 몸을 뒤덮고 있었다. 큰 얼굴엔 상하좌우를 다 합쳐 열두 개의 눈이 있었고, 손의 역할도 할 수 있는 발이 네 개가 달려 있었다.

크기가 고만고만한 같은 개체가 십수 마리가 튀어나왔으며, 가장 마지막에 두 배가량 큰 개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단발성 게이트 오픈, 괴수 한 무리 출현. 천급 다발눈성성이로 추정, 개체 열두 마리 중 우두머리 하나!”

인솔 교사가 다급히 관리처에 연락하여 상황 보고 및 지원을 요청했다. 무장 경비원들은 아이들의 퇴로를 트기 위해 앞장섰다.

보고를 마친 인솔 교사가 아이들의 대피를 도왔다.

“몸을 낮추고 소리 내지 마라! 당황하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없다.”

괴수는 일반 화기로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초능력이나 같은 괴수의 신체로는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덕분에 괴수의 신체는 자원으로 취급되기도 했는데, 사체를 다루는 것도 초능력이 있어야 가능했다.

이 때문에 괴수를 사냥해 왔던 에스퍼들은 괴수를 돈으로 봤는데, 전통을 살리기 위해선지 뭔지 1960년대부터 괴물의 등급을 명명하는 단위로 화폐 단위를 썼다. 하지만 일반적으론 외국에서 쓰는 S~F등급을 많이 썼다.

인솔 교사가 말한 천(穿)급은 E급 괴수로, 스스로 미궁의 출입문을 열 수 있는 최소 등급이기도 했다.

생태연구소 안에 이미 헌터들이 있었으므로 금방 지원을 나와 사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국가 시설이라 외부 방공호가 준비되어 있어 대피도 쉬웠다.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간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야! 최성한! 가지 마!”

“왜, 헌터들 다 있는데. 성능 한번 확인해 보자!”

실제 상황이었으나 헌터와 인솔 교사가 있다는 이유로 실습과 똑같다고 주장하는 미친놈이 튀어 나왔다. 화염 계열 에스퍼인 최성한은 근처에 있던 다발눈성성이에게 화염구를 던졌다. 안간힘을 다해 저희에게 시선을 돌리던 무장 경비원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자신만만한 청소년의 패기와는 별개로 화염구는 다발눈성성이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다. 원래도 용암 지대에 살기 때문이었다.

‘최성한 저 새끼는 수업 시간에 졸았나.’

인솔 교사 또한 미쳤냐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최성한을 혼내는 것과 동시에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발눈성성이는 말 그대로 많은 눈을 갖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다발눈성성이의 눈이 아이들을 향했다.

동시에 우두머리 다발눈성성이가 아이들이 타고 왔던 호송 차량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 달리며 호송 차량을 무기 삼아 크게 휘둘렀다.

저희를 향해 날아오는 호송 차량을 보며 김하윤은 안경을 내렸다. 다소 사나운 눈빛이 공간을 응시했다. 그러자 남들에겐 보이지 않을 수십 개의 문이 보였다.

하윤은 그중 하나를 열었다.

호송 차량은 문에 가로막혀 언덕을 타듯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하윤이 연 문은 동능력자가 아니라면 볼 수 없었다. 그저 다발눈성성이가 자기 힘을 이기지 못하고 잘못 휘두른 것처럼 보였다.

호송 차량이 학생을 빗겨나 위로 올라갈 때, 후방에 있던 헌터가 다발눈성성이를 향해 괴수 부속물로 만들어진 창을 날렸다.

그때, 창의 궤적을 따라 여러 개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통로가 열리면서 창은 더 빠르게, 더 짧은 거리를 날아 다발눈성성이의 심장을 꿰뚫었다.

다발눈성성이가 깨깩거리며 억눌린 소리를 냈다. 괴수의 몸을 꿰뚫은 창을 타고 바닥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달궈진 아스팔트 위로 액체가 쏟아지자 괴상한 냄새가 났다. 김하윤은 눈가를 찌푸리며 다발눈성성이를 바라보았다.

이미 숨이 끊어졌을 괴수의 눈 하나가 그를 보고 있었다.

“…….”

김하윤은 웃듯 어색하게 얼굴을 구겼다가 뒤로 물러났다.

창을 던진 헌터는 자신의 창이 낸 예상외의 위력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우두머리를 죽였을 뿐 아직 전부 죽이지 못했다. 헌터는 바쁘게 다른 대상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그사이 인솔 교사와 다른 헌터가 다가와 우두머리 다발눈성성이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학생들의 대피를 지도했다.

“빨리 대피소로 들어가!”

다급히 끌어당기는 손길에 김하윤은 대피소 안으로 들어갔다. 반장과 인솔 교사가 인원수를 빠르게 확인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문제고, 넘치면 넘치는 대로 문제였다.

다행스럽게도 인원수가 맞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인솔 교사가 외부와 연락하는 사이, 진정한 아이 중 하나가 조금 전 돌발행동을 했던 최성한의 멱살을 잡았다.

“미친 새끼야, 죽으려면 너 혼자 죽어!”

“야, 저딴 거에 누가 죽냐!”

“뭐 저딴 거? 이게!”

“헌터들 다 있고 선생님 있고 한데 내가 뭐 잘못 말했냐?”

“이 새끼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주먹다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최성한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 또한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를 밀고 잡아당기기를 반복했다. 최성한은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왔는지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달궈진 쇠처럼 시뻘게진 손으로 상대의 얼굴을 밀치려 했다.

그럴 줄 알았던지 상대는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최성한의 손을 내리찍었다. 최성한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상대는 그대로 몸을 돌리더니 최성한을 걷어찼다. 나동그라진 최성한이 고함을 바락 질렀다.

벌어진 입 사이로 이빨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최성한을 보고 수군거릴 뿐 말리려 하지 않았다.

조금 전, 대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한둘은 죽었을 것이다. 지금 모인 아이들은 실전에 투입될 만큼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랬다면 여기 있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오늘은 일반 전투 훈련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하는 비전투 능력계가 다수 섞여 있었다.

결국, 보고를 마친 인솔 교사가 나서 다시 엉겨 붙으려는 둘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아이들은 덩치가 제법 있었으나 인솔 교사의 힘 앞에선 갓 태어난 강아지같이 달랑거렸다.

“보고한다고 정신 팔린 사이에 기어코 일을 치네. 너흰 잠시도 가만히 못 있냐?”

인솔 교사는 아이들을 구석으로 몬 뒤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를 종용하며 노려보자 아이들은 서로를 눈짓했다. 네가 먼저 사과하라는 뜻이 분명했다. 의미 없는 기 싸움이 이어지자 인솔 교사는 그들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야말로 벌처럼 쏘는 듯했다. 아이들은 이마를 잡고 신음했다. 멀리서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윤은 작게 혀를 찼다.

아직 바깥에선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괴수의 울음소리와 쿵쿵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때 허벅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하윤은 인솔 교사를 힐긋거렸다. 아직 아이들을 혼내느라 바빠 보였다. 그제야 휴대전화를 꺼낸 하윤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메시지는 스무 통 넘게 들어와 있었다. 세 개는 스팸 문자였고 나머지 열일곱 개는 백무경이 보냈다.

‘왜 이렇게 보낸 거야.’

메시지 내용은 하윤이 예상한 것과 비슷했다. 대부분이 뭐 하냐는 문자였다. 그러다가 십 분 전에 이제 진짜 실습에 들어갈 것 같다는 내용을 보냈다. 자기 실습 끝날 시간과 하윤의 실습 끝날 시간이 엇비슷할 것 같으니 학교에서 만나 같이 돌아가자는 내용이었다.

실습이 끝나면 대체로 그 자리에서 해산하지만, 교사들도 있고 기숙사를 쓰는 아이들도 있어 학교로 돌아가는 교통편이 있었다. 그걸 타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더워 죽겠는데.”

대피소 안은 냉방이 되긴 했지만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들어온 탓에 영 신통찮았다. 냉기 관련 능력이 있는 한 명만이 명상하며 이 더위를 빗겨 나가고 있었다. 하윤은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작게 신음했다.

능력을 쓰고 싶어서 손끝이 간질거렸다.

그의 의지를 따라 수십 개의 문이 덜컥거리고 있었다. 또한, 그것들이 어디로 이어지는 문인지 짧은 정보가 머릿속에 일렁였다. 하윤은 인내하기 위해 아예 눈을 질끈 감았다.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러나 답장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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