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2/13)

2.

오디션 당일, 태오는 초인종을 눌러 대면서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켜 보니 아침 9시였다. 8시쯤 일어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늦었다.

그러나 오디션은 오후였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태오는 부드러운 이불에 푹 파묻힌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 유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도톰한 입술에서 잠결에 신음이 샜다.

“으응……. 형.”

“유채야.”

볼록한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단단하면서 매끄러운 감촉이 기분 좋았다. 유채는 조금씩 정신이 드는 듯, 팔을 뻗어 태오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태오가 나직하게 웃었다.

“형……. 일어났어요?”

“응. 유채야, 근데 밖에 누가 왔어.”

“누가?”

“몰라. 또 애들이겠지.”

“으……. 나가 볼게요.”

유채가 뭉그적거리면서 일어나 앉는 동안에도 바깥에서는 초인종이 연신 울렸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침실 문을 멍하게 바라보는 뒤통수에 머리카락이 삐죽 솟았다. 유채가 짧게 혀를 찼다.

“앞집으로 이사하게 두는 게 아니었어요. 맨날 새벽부터 이게 무슨 난리야.”

“새벽은 아니지. 아홉 시야.”

“그게 새벽이라고요.”

“우리 유채, 많이 게을러졌네.”

놀리듯 말했지만 여유가 생긴 모습이 보기 좋았다. 유채는 언제나 쫓기듯 살아왔고, 그 이유가 거의 태오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그랬다. 윤태오였던 시절에는 천만 배우인 태오를 뒤쫓고 싶어서. 태오가 사라진 뒤에는 태오의 유산을 고스란히 지키기 위해서.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채 자신이 톱스타가 된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태오 곁에서 지내는 것으로 행복하다고 했다. 충분히 쉰 뒤에는 유채도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여유롭고 편하게 지내는 게 태오도 좋았다.

유채가 침실 밖으로 사라진 뒤, 집 안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예상대로 케빈이 라윤과 함께 쳐들어왔다. 매일 아침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AMJ 엔터와의 계약이 끝나면서 래디언스는 기존 숙소에서 나와야 했다. 아직 명태를 대표로 한 회사 설립 계획이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지낼 곳이 막연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태오의 아파트에서 멤버들이 다 함께 살았다. 아파트가 넓어서 불편한 것은 없었지만, 태오 인생에서 가장 시끄러운 한때였다.

다행히 예전에 예리네가 살던 앞집이 매물로 나왔다. 전세가 아니라 매물이어서 명태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는데, 마침 태오의 건물 하나를 팔아서 유채와 우주의 남은 빚을 모두 청산하고 남은 금액이 매매가와 얼추 맞았다. 태오의 아파트는 유채 명의였으니, 이번에는 태오—우주—명의로 구매해서 멤버들 숙소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느라 또다시 증여세가 나왔다. 유채가 이를 갈았다.

-빨리 결혼해야지 안 되겠어요. 형이랑 나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건데 매번 증여세 내다가 세월 가겠어요.

-아 우리 결혼해?

-결혼 안 해요?

-어? 아냐, 해. 하지…….

그 결과 얼떨결에 청혼을 받아 버렸다. 국내에서는 아직 동성혼이 인정되지 않으니, 조만간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결혼한 뒤 나중에 동성혼이 법제화되면 소급 적용을 받겠다고 유채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태오는 그런 게 소급 적용이 되겠냐고 물으려다가, 유채가 너무 낭만에 젖어 있는 표정이어서 그냥 참았다.

결과적으로 앞집에 래디언스 멤버들이 이사 왔다. 태오도 그들에게 정이 많이 들었고, 그룹 활동을 할 때도 가끔 있었으니 가까이 사는 게 편하기도 했다.

다만 케빈과 라윤이 아침마다 찾아오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유채는 사생활을 침해받는다고 난리였다. 매일 아침 연락도 없이 신혼집 현관문을 두드리다니, 예의도 센스도 없다는 거였다. 청혼은 대충 넘어갔지만 결혼까지 대충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던 태오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결혼 아직 안 했는데 무슨 신혼집이야.

“또 왜 왔어. 아침에 오지 말랬지. 연락하고 오라고.”

거실에서 유채가 케빈을 구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구박당하는 케빈은 언제나 그랬듯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이, 케빈 안 오면 유채랑 우주는 아침 먹을 것도 없잖냐! 밥 먹으려고 왔지! 이거 봐라? 오늘은 전복죽이다!”

“이거 특대 사이즈 전복 엄청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집안일 봐주시는 이모님이 어제 만들어 주셨는데 진짜 맛있어요. 든든하고.”

“먹을 거 있어. 있다고.”

“유채가 만든 그거 말이냐?”

“어…….”

“그거는 맛없잖냐!”

“…….”

여전히 침대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던 태오는 후다닥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케빈 입에서 ‘우주도 대따 맛없다고 그랬다!’ 같은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막아야 했다. 태오가 대놓고 직접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다들 유채의 요리를 먹은 태오의 표정만 봐도 심기를 읽었다.

“어…… 왔어? 일찍 일어났네. 웬 전복죽이야?”

“뭐가 일찍이냐! 아홉 시나 됐다!”

“우주 형, 오늘 오디션이니까 든든하게 먹고 나가야죠. 어제 케빈 형이 이모님 졸라서 만들었습니다.”

“아 진짜? 매번 우리 식사까지 챙겨 주시네. 죄송해서 어떡하지.”

“아이, 아니다. 유채가 맨날 집에 있으니까 싹싹 잘 먹어서 음식물 쓰레기 안 나온다고 좋아하셨다!”

멤버들은 대부분 일을 마치고 밖에서 먹고 들어오는 터라 음식이 남을 때가 많았다. 바쁜 멤버들과 달리, 늘 집에서 지내는 유채가 잔반 처리반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유채는 어딘지 분한 표정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인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 같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케빈이 내놓은 전복죽에서 고소하고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솔솔 풍겼다. 오후에 있을 오디션이 신경 쓰여서 아무래도 긴장하고 있었는데, 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었더니 배도 든든하고 기분도 좋았다.

케빈이나 라윤이 아침마다 찾아오는 게 귀찮기는 했지만 매번 식사를 챙겨 주니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유채는 제가 직접 살림을 하겠다면서 도움 서비스를 전혀 이용하지 않았고, 멤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태오는 매일 유채가 한 요리를 먹어야 했을 것이다. 유채는 열심히 요리 강습을 받고 있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청소나 빨래도 마찬가지였다. 살림에 그다지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케빈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유채가 살림 다 해도 괜찮냐? 집도 좀 지저분한 거 같구…….”

잘 먹다가 갑자기 멱살이 잡힌 유채가 스푼을 탁 내려놓으면서 발끈했다.

“어디가 지저분해? 번쩍거리기만 하는데!”

청소해 줄 것도 아니면서 아침마다 참견이라고, 유채는 그러잖아도 케빈에게 불만이 많았다.

유채는 마음을 내려놓고 여유 찾기를 연습 중이긴 했지만, 워낙 호승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유채가 요즘 덤벼들고 있는 상대는 집안일이다. 유채는 제가 집안일에 소질이 없다는 걸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태오가 아무리 서비스를 신청하자고 운을 떼어 봐도 요지부동이었다.

“어디가 번쩍거리냐? 먼지 봐라, 먼지!”

“너 진짜……. 나가. 어? 안 나가?”

“아이이이이! 케빈 장난이다! 완전 번쩍번쩍한다. 아이 눈부셔!”

“후…….”

진심으로 때리고 싶다는 얼굴로, 유채가 케빈을 노려보았다. 라윤이 눈을 굴리다가 식탁 아래서 케빈의 다리를 걷어찼다. 케빈이 무릎을 끌어안고 아야아야 소리를 질렀다. 태오는 미간을 꾹 누르면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시끄러웠다.

“너희들 다 나가. 태…… 얘, 오디션 준비해야 해.”

“응응, 갈 거다. 우주 오디션 잘해! 당연히 합격하겠지만!”

“아, 당연합니다. 우주 형을 떨어뜨릴 안목이었으면 추 감독님이 그렇게 영화제마다 상을 휩쓸었겠습니까?”

“뭐……. 이런 영화는 처음이라 나도 모르겠어. 긴장되네.”

태오가 표정을 흐리면서 중얼거렸다.

예전 생에서도 태오는 추여정 감독 작품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러브 콜을 받은 적도 없었고, 오디션 제안만 몇 번 받은 게 다였다. 들어오는 시나리오가 아쉽지 않았던 태오는 추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굳이 오디션까지 치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작품을 고를 때, 태오는 작품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지만 상업성도 놓지 않는 영화 위주로 선택해 왔다. 태오는 하루빨리 은퇴해서 부동산 수익으로 여생을 보내는 게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태오가 보기에 추 감독의 영화는 지나치게 예술성에만 초점을 맞췄고 대중성을 감안하지 않았다. 추 감독도 적당한 상업성을 추구하는 태오가 눈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바뀐 것은 ‘타이 브레이크’를 촬영하면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온 뒤, 태오는 예전 삶에서는 알지 못했던 감정들을 많이 느꼈다. 태오는 연기를 좋아했고,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예전보다는 좀 더 폭넓은 경험을 하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차기작을 고민하던 차에 추여정 감독의 새 영화 ‘수수밭 너머’ 시나리오를 받았다. 섭외가 들어온 것도 아니었고, 공개 오디션 권유 정도였지만 마음이 끌렸다.

아무리 봐도 꿈도 희망도 없어서 상업적인 성공은 어려워 보이는 각본이었다. 더구나 추 감독은 깐깐하고 까칠해서 배우들을 쥐 잡듯이 다루기로 유명했다. 예전이었다면 감독이 직접 미팅을 잡아 캐스팅 제안을 했어도 내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오는 제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어쩌면 태오의 연기가 한층 더 성숙해질 기회일 수도 있었다. 꼭 붙고 싶어서 일부러 분량이 많지 않은 조연으로 오디션 신청을 넣었다. 캐스팅된다는 확신이 없는 건 데뷔 이래 처음이었다.

착잡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나 보다. 케빈과 라윤이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당황하는 게 보였다.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태오는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여느 때처럼 활짝 웃으려고 했다.

그때,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와 태오의 앞머리를 살살 쓸어 올렸다. 뺨을 토닥이는 손길이 간지러울 만큼 다정했다. 습관적인 미소를 지으려고 했던 태오 대신, 코앞까지 다가온 유채의 잘생긴 얼굴이 달콤하고 해사하게 웃었다.

“당연히 붙을 거야. 나만 믿어.”

“…….”

관계자도 아니면서 네가 어떻게 장담하느냐는 말은 농담으로라도 나오지 않았다. 곡선을 그리면서 휘어지는 눈꼬리와 말간 뺨, 위로 슬쩍 올라간 모양 좋은 입매가 확신을 주었다. 태오는 그 붉고 통통한 입술을 지그시 쏘아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릿속으로는, 빨리 케빈과 라윤을 쫓아내고 저 명란젓부터 쪽 빨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그날 오후, 태오는 명태와 함께 오디션장을 찾았다. 유채가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태오가 말렸다. 아직 인지도가 높지 않은 태오에 비해 유채는 지나치게 톱스타였다. 오디션장이 금세 술렁거릴 게 뻔했다.

“기왕 오디션 보는 거, 주연급으로 신청할 걸 그랬다. 충분히 붙을 수 있는데.”

긴장한 기색을 눈치챈 명태가 태오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실없는 소리를 했다. 차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태오는 무심결에 피식 웃었다.

“여주 원 톱 영화잖아요. 저 여자 캐릭터 연기해요?”

“아이, 수혜 역할 말고 남주도 있잖아. 정유인 역.”

“정유인 역은 공개 오디션 안 보잖아요. 섭외해서 캐스팅할 거라고 들었는데.”

“아, 그랬지. 내가 깜빡 잊었네…….”

태오에게는 정유인 역 캐스팅 제의가 들어오지 않았다. 몇몇 역할들에 대한 오디션 제안이 다였다. 명태가 태오의 눈치를 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미안. 내가 말실수했다.”

“별게 다 미안해요, 형은.”

“그래도.”

태오는 슬쩍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윤태오에게도 추 감독 영화의 주인공은 다소 버거운 도전일 것이었다. 우주로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럴듯한 필모라고는 ‘제왕’ 외에는 ‘타이 브레이크’가 다인 우주에게 오디션 제안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그나마도 ‘제왕’ 시절의 연기는 전혀 봐 줄 만하지 않았고, 성 감독이 각본을 대대적으로 고쳤는지 우주가 맡은 진연음 역할의 비중도 조연을 간신히 면한 수준이었다. 유채 곁에 나란히 선 우주를 보기 싫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얼마 전 어쩔 수 없이 모니터링하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밴이 오디션장에 도착했다. 실내로 들어섰더니, 대기 중이던 배우들의 시선이 태오에게 한꺼번에 쏠렸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이 브레이크’로 인지도가 올라간 탓도 있지만, 스토커 사건과 부모의 학대 사건으로 세상이 한동안 시끄러웠기 때문에 태오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태오의 입가에 난처한 듯한 미소가 슬쩍 스쳤다. 이렇게 주목을 받았는데, 똑 떨어지면 아무리 태오라도 멋쩍긴 할 것 같았다.

빈자리를 찾아 앉았더니 뺨이 따가울 정도로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스무 살 초반의 앳된 얼굴들이 후다닥 시치미를 뗀다. 태오는 싱긋 웃으면서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예? 아, 예, 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은 배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주변에서도 허둥허둥 인사가 쏟아졌다.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일순 풀렸다. 태오가 먼저 말을 걸었던 옆자리 남자는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눈을 빛냈다.

“우주 씨도 오디션을 보러 오셨어요? 섭외 쏟아질 것 같은데! 아, 신우주 씨 맞죠? 전 김명길이에요.”

“아, 네. 안녕하세요. 하하, 안 쏟아져요. 꼭 합류하고 싶어서 정유헌 역에 지원했어요. 대본이 워낙 좋아서요.”

“으아, 정유헌이요? 같은 역이네요, 어떡하지! 저도 진짜 출연하고 싶은데 망했어요.”

“아니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정유헌 역이래, 어울린다. 아, 나랑 안 겹쳐. 다행이다. 어, 나도.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태오는 명길과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이내 시나리오로 시선을 옮겼다. 대사를 다시 훑어보는 동안 진행 요원이 나와서 오디션 순서를 알려 주었다.

태오가 받은 번호는 거의 끝 순서였다. 어차피 당일 발표라서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할 테니 순서가 앞이든 뒤든 상관없었다. 태오는 허리를 곧게 펴면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았다. 어느 신을 요구할지는 모르겠지만, 정유헌 역이 나오는 신뿐만 아니라 받은 시나리오를 모두 연습해 두었으니 연기가 걱정되지는 않았다.

다만 깐깐한 추 감독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몰라서 그 점이 우려되었다.

시나리오를 읽기도 하고, 옆자리의 명길이나 다른 배우들과 가끔 대화도 나누면서 지루한 대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간도 오디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끝났다. 배우들이 기다리는 대기실 벽면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걸려 있었는데, 내부에서 진행되는 오디션 장면이 그대로 송출되었다. 그때부터는 모두 긴장한 얼굴로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태오도 배우들의 연기를 신중하게 살펴보았다. 추 감독의 영화답게, 오디션에 도전하는 배우들 실력도 상당했다.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이렇게 초조한 것은 처음이었다. 손바닥에 옅은 땀이 배어서 바지에 슥 닦아 내는데, 무음으로 돌려놓은 휴대폰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유채의 메시지였다.

16713626909582.jpg 

딱 보기에도 젓가락으로 집어 드는 순간 튀김옷이 줄줄 흘러내려서 오징어와 분리될 것처럼 대충 생긴 오징어튀김이 필터만 입혀진 채 휴대폰 화면 안에서 번쩍거렸다. 태오는 습관적으로 ‘반짝이 필터 입힌다고 오튀 맛있어지는 거 아니에요, 유채야.’라고 보내려다가 멈칫했다. 유채가 무슨 생각으로 오디션 시간 중에 이런 메시지를 했는지 투명하게 보였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고였다.

태오는 ‘반짝이 필터……’까지 입력한 것을 톡톡 지우고 다른 글자를 입력해 전송했다.

16713626909587.jpg 

***

호명된 태오는 오디션장으로 안내되었다. 등 뒤에서 대기하던 배우들이 연기가 궁금하다며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유채의 연락을 받고 잠시 풀렸던 긴장이 다시 찾아와 손안이 축축해졌다.

오디션장으로 들어가니 일자로 긴 테이블에 추 감독과 다른 심사 위원들이 앉아 있었다.

추여정 감독은 귀밑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가 은발에 가까운 잿빛인 70대의 노장이었다. 태오도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은테 안경 너머로 형형하게 빛나면서 태오를 바라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어지간하면 움츠러드는 일이 없는 태오도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다.

“유…… 신우주입니다.”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윤태오입니다, 가 먼저 나왔다. 태오는 재빨리 말을 바꾸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추 감독이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태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유헌이 수혜와 처음 만나는 신으로 볼까요? 수혜 역은 미희 씨가 받아 줘요. 정유인은 성구 씨 부탁해요.”

“네, 감독님.”

“예, 알겠습니다.”

테이블 한쪽 끝에 앉아 있던 심사 위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 감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신우주 씨, 준비되시면 시작하시죠.”

“예.”

태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카메라가 사방에서 태오를 비췄다.

영화 ‘수수밭 너머’는 전래 동화인 ‘해님 달님’에 등장하는 붉은 수수의 전설을 모티브로 한다. 오누이를 뒤쫓아 하늘로 오르려던 호랑이가, 썩은 동아줄이 끊어져 수수밭에 떨어져 죽으면서 튄 피로 수수밭이 물들어 수수의 색이 붉어졌다는 내용이다.

1930년대 영월, 산자락 마을. 방대한 수수밭 농가를 대대로 운영해 온 지주 가문에서 후손이 태어나지 않아, 근방의 작은 섬에서 고아인 ‘수혜’를 첩실로 데려오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섬으로 수혜를 데리러 간 사람은 가문의 서자인 ‘정유인’이다.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영월로 돌아오다가 사랑에 빠진다. 섬에서 홀로 외롭게 자라 온 수혜는 정유인이 자신을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함께 도망치길 원하지만, 적장자 ‘정유헌’의 수족으로 평생 학대당하다시피 부려져 온 정유인은 이복형이자 자신의 주인인 그를 끝내 배신하지 못한다. 두 사람은 영월에 도착하고, 수혜는 정유헌의 첩이 된다.

태오는 주인공 수혜의 남편인 정유헌 역에 지원했다. 영화가 정유인과 수혜의 사랑과 수혜의 비극적인 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정유헌의 분량은 많지 않았다. 유약하면서 다정한 정유인에 비해 정유헌은 냉혹하고 계산적인 사람으로, 수혜를 오직 집안의 소유물로 대한다.

추 감독이 주문한 신은, 수혜를 데려와 정유헌에게 처음 인사시킨 정유인이 그녀의 손을 정유헌에게 넘겨주는 대목이다. 정유헌은 이 첫 만남에서 이미 정유인과 수혜의 감정을 눈치채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를 의뭉스럽게 넘긴다.

수혜와 정유인 역할을 맡아 준 심사 위원들과 몇 마디 대사를 주고받은 후, 태오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수혜에게서 손을 떼는 정유인을 바라보면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유헌의 냉정한 성품을 한눈에 드러내는 표정 연기가 필요한 장면이었다. 웃어 보이는 신을 마지막으로 추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고 카메라가 꺼졌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태오는 숨을 몰아쉬었다.

추 감독의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간단한 언질이라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태오는 조금 풀이 죽었다. 추 감독은 심사 위원들과 몇 마디 의논하더니, 태오를 향해 다른 주문을 했다.

“조금 더 보고 싶은데. 다른 인물로도 연기 가능한가요?”

“예, 말씀해 주시면 해 보겠습니다.”

“같은 장면. 정유인으로 가 보죠.”

조금 의외였지만 오디션에서 다른 인물, 특히 지원한 역할의 상대역을 연기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상대방의 감정과 행동을 이해해야 맡은 인물을 더 깊이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태오는 이내 정유인에 몰입해 연기했다. 장면을 마무리한 후, 추 감독은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 볼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수고했어요.”

“아, 예…….”

연기를 못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예감이 좋지 않아서 기운이 빠졌다. 그래도 애써 밝은 얼굴로 인사한 뒤 오디션장에서 빠져나왔다.

대기실에 돌아오자, 모니터를 통해 오디션을 지켜본 배우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고 싶었는데 마지막 지원자가 오디션을 마칠 때까지 대기해야 했다. 태오는 힘없이 아까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진짜 떨어질 듯한 기분을 느끼니 입 안이 썼다. 예전 생에서부터 한 번도 실패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진작 오디션을 마치고 돌아온 김명길이 옆자리에서 기웃거리며 말을 붙였다.

“와, 진짜 연기 잘하시네요……. 정유헌 역 할 때 진짜 비열해 보이셨어요. 어엇, 욕하는 거 아니고 완전 칭찬이에요.”

“하하……. 네.”

“근데 정유인 역 하시니까 진짜 다정해 보이고…… 근데 또 연약해 보이고. 제가 반할 뻔했다니까요? 어떻게 그렇게 달라요? 당연히 우주 씨가 붙으실 거 같아요. 저랑 실력 차이가 너무 나서 질투도 안 나요.”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말은 고마웠지만 태오는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다. 자신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이상 심사 위원의 반응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권자인 추 감독의 표정이 개운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떨어질 확률이 높으리라 생각했다. 결과가 뻔한데도 계속 대기해야 할까.

풀 죽은 채 고민하면서 명길의 말을 받아 주는 동안, 결과 발표 시간이 되었다. 진행 요원이 합격자 명단을 들고 대기실에 들어와 지원자들 앞에 섰다. 태오는 초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정유헌 역 맡으실 분은.”

심장 박동 소리가 터질 듯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태오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꽉 움켜쥐었다. 이미 희망을 버린 듯, 곁에 앉은 명길은 시큰둥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김명길 배우님.”

“예?”

명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명길은 두리번거리면서 주변을 살펴보다가, 태오와 눈이 마주친 뒤 기절할 듯 놀랐다. 반사적인 대꾸가 더듬더듬 튀어나왔다.

“우, 우주 씨가 아니라 저요?”

“예, 맞습니다.”

“아니, 그 연기를 보셨으면 그럴 리가 없는데…….”

“합격하신 분들 남아 주시고, 다른 지원자분들은 돌아가셔도 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심코 깨문 아랫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예감이 줄곧 좋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속이 쓰렸지만, 태오는 명길을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축하해요.”

“아니, 저, 그게…….”

명길은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눈치를 보았다. 몇 마디 더 축하 인사를 건넨 뒤 자리를 뜨려는데, 명길이 옷자락을 잡더니 쩔쩔매면서 물었다.

“저기, 연락처 주실 수 있을까요? 나중에 술 한잔 같이 하고 싶은데…….”

“아, 예. 좋죠.”

태오는 선선히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줄곧 경황없어 보이던 명길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펴졌다.

태오는 곧장 밴으로 향했다. 초조한 듯 밴에 등을 기대고 대기하고 있던 명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닥에 짧은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태오의 표정을 본 명태는 묻지 않고도 결과를 알았다.

태오와 명태는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꽁초를 주웠다.

돌아오는 길이 멀었다. 태오는 물끄러미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떤 점이 잘못됐을까.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아도, 제대로 모니터링하지 않는 이상 정확히 짚어 내기는 어려웠다.

다만 어떤 점이 좋아서 명길이 선택되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태오도 모니터를 통해 명길의 연기를 보았다. 자연스럽고 명료한 연기였다. 튀지 않으면서도 인상에 남았다. 선이 굵고 큼직한 이목구비나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도 정유헌의 이미지에 어울렸다.

추 감독의 선택이 옳았다. 태오는 정유헌 역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명길 쪽이 훨씬 더 역할에 맞았다.

집에 도착한 태오를 유채가 맞아 주었다. 명태를 통해 이미 결과를 들었는지 별다른 말은 없었다. 태오는 피곤한 얼굴로 유채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우리 저녁 뭐 먹어?”

“음. 오징어튀김?”

“……그거 말고.”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좀 맛있는 게 먹고 싶었다.

유채는 통통한 입술을 조금 삐죽였다가, 경희궁에 나가서 먹자고 했다. 태오는 금세 신나서 좋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

뜻밖의 연락이 온 것은 며칠 뒤였다.

오디션에서도 똑 떨어졌으니 다음 작품을 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한동안 풀 죽어 있었지만 모처럼 쉬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날 태오는 케이크를 굽겠다고 낑낑대는 유채 곁에서 꼬마를 끌어안고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었다. 어차피 맛이 없을 테니 아이스크림으로 미리 배를 채워 둘 생각이었다.

“형, 그거 먹으면 케이크 못 먹어요.”

“으응……. 이상하게 이게 당기네. 유채도 한 입 줄까?”

“응. 한 입만.”

진짜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는 유채 입 안에 아이스크림이 듬뿍 담긴 스푼을 넣어 주었다. 직접 만든 케이크를 먹으려면 유채도 미리 배를 불려 놓는 게 좋았다.

“맛있지.”

“응. 그래도 너무 많이 먹지 말아요.”

“어어……. 당연하지.”

태오는 대충 주억거리면서 연신 손을 놀렸다. 그때,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외부에서 아파트에 출입하려면 일 층에서 인터폰을 해야 했다. 현관문을 바로 두드리는 것을 보면 케빈이나 라윤일 게 뻔했다.

유채의 반듯한 눈썹이 팍 찌푸려졌다.

“방 빼라고 해야겠어요. 이사 나가라고 해요.”

“뭘 또 그래. 사이좋게 지내야지.”

태오는 피식 웃으면서 유채의 뺨에 입술을 꾹 눌러 주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오디션에서 떨어진 뒤 멤버들의 출입이 좀 더 잦아졌는데, 다들 태오의 기분을 풀어 준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우…… 우주야!”

“명태 형?”

뜻밖에도 잠금장치를 풀자마자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사람은 명태였다. 후다닥 구두를 벗고 들어온 명태는 태오가 의아한 얼굴로 내준 생수를 받아서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래요?”

“아니, 그게. 너 미, 미팅, 미팅 들어왔어.”

“그래요? 누군데 그러세요?”

‘타이 브레이크’ 성공 이후 태오에게는 미팅 제안이 밀려들었고, 적당히 거절하는 일도 많았다.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고서는 명태가 이렇게 흥분하지 않을 터였다. 유채도 궁금했는지 케이크를 만들던 손을 멈추고 명태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대로 케이크 만들기는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명태의 대답을 들었을 때, 유채는 물론 태오도 케이크 같은 것은 머릿속에서 하얗게 날려 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 그. 추, 추 감독님이야!”

“……추여정 감독님이요?”

“어! 미쳤다!”

“‘수수밭 너머’ 미팅 맞아요?”

“그렇다니까! 돌았지!”

“와…….”

태오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오디션을 보았던 날 대부분의 역할은 이미 정해졌다. 태오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추 감독이 이유도 없이 괜히 식사나 같이 하자고 태오에게 미팅을 요청할 리는 없었다. 캐스팅에 빈자리가 난 것이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유채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정유헌 역으로요?”

“그 말씀은 안 해 주셨는데……. 가 봐야 알 것 같아.”

태오는 그날 만났던 김명길을 떠올렸다.

태오 앞이라서 내색은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캐스팅이 되어서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정유헌 역을 거절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역이라도 상관없었다. 첫술에 배부를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조연으로라도 한 번 출연해서 좋은 인상을 남기면 재기용되기도 수월할 테니 충분히 좋은 기회였다.

“잡아 주세요, 미팅. 어떤 역이라도 좋아요.”

“그렇지? 그럼 아무 때나 맞춘다고 할까?”

“네. 저야 뭐, 당분간 일정도 없고. 언제든 좋으실 때로요.”

“어어, 바로 연락드릴게.”

명태는 들어오자마자 태오의 답만 받은 뒤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태오는 기운이 빠져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손에 케이크 반죽을 잔뜩 묻힌 유채가 난처한 얼굴로 제 손을 들여다보더니, 머뭇머뭇 다가와서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팔로만 태오를 살살 끌어안았다.

“형, 이번엔 진짜 잘될 거 같아요. 따로 부르기까지 하신 거 보면.”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태오는 유채의 팔 안쪽 부드러운 살결에 뺨을 바르작대면서 중얼거렸다.

***

미팅은 바로 다음 날로 잡혔다.

약속 시간 십오 분 전, 태오는 명태와 함께 추 감독이 알려 준 한정식집에 도착했다. 유채는 이번에도 따라오고 싶어서 발을 굴렀지만, 대체 네가 왜 따라오느냐는 명태의 타박에 할 말이 없어서 뺨만 퉁퉁 부었다.

오 분 정도 기다렸더니 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태오는 벌떡 일어나서, 혼자 들어온 추 감독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추 감독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할 뿐이었지만 눈빛에 웃음기가 스쳤다.

“이 나이 먹고 보니 쓸데없이 아는 사람만 많아서, 우주 씨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다 쓸모없었네요.”

추 감독이 착석하자마자 꺼낸 말이었다. 우주의 인성 문제로 탈락한 건가, 싶은 생각이 얼핏 들었다. 추 감독은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이면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들리는 말로 배우를 판단할 마음은 없었어요. 서 PD랑 작업한 드라마에서 괜찮게 보았는데, 아무래도 드라마와 영화는 호흡이 다르니 영화 출연작을 열어 봤죠. 그런데 거기서는 또 영…….”

태오는 주먹을 말아 쥔 채 입가를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제왕’에서 우주의 연기는 태오도 보았으니 알았다. 그 자료 화면을 참고했다면, 오디션 기회를 주었다는 게 대단한 일이었다.

“그래도 한 번은 직접 보자 싶어서 오디션 제안 보낸 거였어요. 제칠 때 제치더라도 내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는 성미라.”

“예…….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탈락시키긴 하셨지만요. 태오는 말끝을 삼키면서 싱긋 웃었다. 그런데 추 감독이 태오와 시선을 맞추면서 마주 빙긋 웃었다. 태오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흠칫 놀랐다. 나란히 앉은 명태의 다리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늘 싸늘하고 무표정했던 추 감독이 웃는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무서웠다.

“그런데 연기가 그새 더 늘었더군요. 드라마도 괜찮았는데, 드라마보다 오히려 영화 쪽이 더 잘 맞을 것 같기도 하고.”

드라마 작업도 여러 차례 했지만, 태오는 원래 영화로 데뷔했고 작업도 훨씬 더 많이 했다. 차기작 범위를 영화로 좁힌 것도 그래서였다. 태오는 짤막하게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시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지 의아해졌다.

이야기는 한참 더 빙빙 돌았다. 추 감독은 태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도 했고,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해 주기도 하면서 식사 시간을 보냈다. 태오도 점점 긴장이 풀어져서 말이 많아졌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태오가 더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 혼자 너무 얘기했네요.”

“아니에요. 내가 먼저 물었는걸. 얘기 많이 들으니 좋네요. 예전 생각도 나고.”

“예전 생각이요?”

“전에 연기도 좋고 사람이 괜찮아 보여서 줄곧 눈여겨봤던 친구가 있었어요. 우주 씨와 느낌이 비슷하네요. 얘기해 보니 더 그렇네.”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우주 씨랑 좀 다른 점은, 그 친구는 다 좋은데 별로 열의가 없어 보였어요. 이렇게 말하면 내가 꼰대 같은데 꼰대 맞으니까, 뭐. 그 친구는 워낙 재능이 뛰어나서 그런지 매사에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느낌이라 나도 딱 꽂히지가 않았죠.”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같았다. 태오는 긴장한 얼굴로 무릎을 움켜쥐었다. 태오도 딱 저런 사람을 알았다. 윤태오라고…….

“같이 한번 작업하고 싶긴 했는데 긴가민가해서 줄곧 고민만 했죠. 그래도 진작 같이 일해 볼걸. 그렇게 갈 줄 알았으면…….”

윤태오도 저렇게 일찍 죽었는데…….

“우주 씨도 아마 알 거예요. 윤태오 배우. 아까운 친구였죠.”

역시. 태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알았다.

아무래도 남들 눈에도 설렁거리는 태도가 다 보였던 모양이다. 창피하기도 하고, 추 감독이 이렇게 기억해 주는 게 놀랍기도 했다.

“오디션에서 우주 씨 연기 보는데 내내 그 친구 생각이 났어요. 우주 씨가 열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언뜻 보이는 센스나 재능이 너무 비슷해서. 그 친구가 연기를 정말 좋아하게 됐다면 딱 우주 씨 같은 연기를 했을 것 같아요.”

“아…….”

태오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줄곧 표정이 굳어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뜻밖의 이유에, 태오는 놀란 눈을 깜빡거렸다.

“어린 친구가 너무 일찍 간 게 계속 생각나서 내가 표정이 안 좋았어요. 언짢았을 거 같은데, 미안해서 사과하려고 자리 마련해 달라고 김 실장에게 부탁했어요.”

“아, 예……. 아니, 아닙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태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태오를—윤태오든, 신우주인 태오든—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하지만, 그러니까 이건 캐스팅 제안이 아니라 그냥 사과하는 자리였던 걸까? 김칫국을 너무 들이켰는지 속이 쓰렸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어요. 오늘은 이쯤 하죠. 다들 바쁘실 텐데.”

추 감독은 자리를 적당히 마무리하려는 듯 짐을 챙기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오는 곁눈으로 명태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명태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농담이시죠? 하고 묻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캐스팅 제안이라고 기대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태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예, 감사…… 감사합니다.”

“아 참, 그리고.”

문밖을 나서려던 추 감독이 뭔가 생각난 듯 몸을 빙글 돌렸다. 추 감독을 배웅하려고 함께 일어섰던 태오도 얼떨떨하게 멈췄다.

“혹시 다음 작품 아직 안 잡았으면, 정유인 역으로 합류하지 않을래요? 우주 씨만 오케이하면 바로 계약서 보내고 싶은데.”

“예……?”

들었다 놨다 하는 기술이 예술이었다.

***

한 달 뒤, 대본 리딩이 있었다. 일찌감치 리딩실에 도착한 태오는 석 달간 함께 일하게 될 촬영 팀과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에 만난 명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태오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와, 정유인으로 합류하실 줄이야! 역시, 그 연기를 보고 떨어뜨리실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당연하죠!”

“하하…….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빈말 아닌데. 진짜라니까요! 여기 다들 그날 우주 씨 연기 보신 분들이잖아요. 제 말이 맞죠, 맞죠?”

“아, 그럼요. 그날 대기실에서 다들 숨소리도 못 냈잖아요. 탈락하셨다고 해서 의외였는데 감독님께서 주연으로 캐스팅하려고 그러셨구나.”

주연인 정유인과 수혜 역을 맡은 배우, 그리고 몇몇 원로 배우들을 제외하면 모두 그날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된 사람들이었다. 다 함께 대기실에서 기다리느라 태오의 연기를 모두 보았기 때문인지, ‘타이 브레이크’ 당시보다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웠다. 이런저런 사건을 통해 우주의 비호감 이미지가 상당히 없어진 덕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크랭크 인이었다.

주연을 맡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제왕’이 마지막이었으니 거의 오 년 만인 셈이다. 영월 신은 나중에 영월에 내려가 한꺼번에 촬영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세트장이 배경인 영화 후반부 내용부터 찍게 되었다.

영월에 도착한 수혜는 정유인을 잊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정유헌의 눈을 피해 관계를 이어 나간다. 정유인 또한 수혜를 향한 마음이 깊어 가지만, 평생 집안 어른들과 정유헌에게 세뇌당해 왔던 탓에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다가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다. 영화의 전개 파트에서는 잘못된 동아줄을 잡고 기약 없는 희망에 부푼 수혜의 순진한 사랑과, 서서히 이성을 잃어 가는 정유인의 모습이 비춰진다.

초반에는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하다가, 정신을 놓으면서 광기 어린 모습을 보이고 간간이 제정신이 돌아올 때면 좌절하면서 울부짖는 정유인은 연기하기가 어려운 역할이었다. 추 감독이 정유헌도 아닌 정유인 역을 제안했을 때 태오와 명태가 동시에 놀랐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태오가 아무리 ‘타이 브레이크’에서 인정받았고 오디션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다 해도 우주는 신인 배우에 불과했다. 정유인 역을 제대로 해내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추 감독이 전적으로 태오를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투자자들 사이에서 잡음도 심했을 것이다. 자신의 네임 밸류만으로 영화를 밀어붙일 수 있는 백전노장이었기 때문에 캐스팅이 가능했다. 그런 만큼 태오도 부담감이 컸다. 추 감독의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오늘 찍을 장면은 정유인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수혜가 깨닫게 되는 신이다. 정유인은 처음으로 수혜를 알아보지 못한 채 광기를 보인다. 태오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수혜 역을 맡은 이주윤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추 감독이 태오와 주윤을 향해 가볍게 눈짓했다. 그리고 스태프가 외쳤다.

“슛 들어갑니다!”

***

“으……. 연기 너무 어려워.”

태오는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침대 위에 그대로 뻗었다. 유채가 묵묵히 다가와 태오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등과 다리가 받쳐진 채 안겨서 식탁 앞으로 옮겨졌다. 눈을 깜빡이는 동안 한 손에 수저가 쥐어졌다.

“점심도 안 먹었다면서요. 명태 형한테 다 들었어요.”

유채가 언짢은 얼굴로 채근했다. 태오는 머쓱한 듯 눈을 굴렸다.

“너무 바빴어. 통 시간이 안 나서……. 그래도 에너지바는 먹었어.”

“점심시간 있었는데도 몇 숟갈 못 떴다고 하던데.”

“너 나 감시해?”

화난 척 목소리를 높였지만 유채는 고개를 팩 돌리면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태오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유채의 관심을 끌어 보려다가, 밥을 먹기 전에는 정말로 쳐다봐 주지 않을 기세라서 풀이 죽고 말았다.

“이게 뭐지……. 삼계죽인가?”

“빈속이니까 죽이 나을 거 같아서요.”

그릇에는 고소한 향이 솔솔 나는 삼계죽이 담겨 있었다. 하루 종일 굶은 탓인지 음식을 보는 순간 급격히 허기가 졌다. 하지만 이내, 유채가 직접 만든 요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태오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이거 네가 한 거지……?”

유채가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요. 형 먹을 건데 내가 직접 해야죠.”

“으응.”

태오는 차마 그 소리가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한 스푼을 떠서 입 안에 넣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음식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작게 찢어진 살코기는 부드러우면서 고소했고, 찹쌀은 찰지면서 목 넘김이 좋았다. 대추나 인삼, 밤 같은 부재료도 넘치게 들어갔다. 태오는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거 네가 했어? 정말?”

“응……. 별로예요? 선생님이 많이 나아졌다고 했는데.”

유채가 걱정스러운 듯 눈치를 봤다. 태오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면서, 유채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제야 안심한 듯 유채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눈꺼풀의 움직임을 따라 긴 속눈썹이 부드럽게 팔락거렸다.

“와, 노력으로 안 되는 게 없구나. 진짜 맛있어.”

“정말요? 그럼 이제까지는 맛없었어요?”

“어, 이제까지는…….”

조금 먹어 주기 곤란한 맛이었지. 하고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계죽과 함께 꿀꺽 삼켰다. 유채가 이제 덫도 칠 줄 알았다. 우리 아기새가 많이도 컸다.

태오는 수저를 놀리면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싱긋 웃어 주었더니 말간 뺨이 금세 붉게 달아오른다. 태오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꽤 맛있었는데, 이제는 눈물 나게 맛있어.”

“진짜요?”

“당연히 진짜지. 내가 언제 거짓말했어?”

언제나 했다.

“다행이다……. 튀김은 튀김옷 입히는 게 너무 어려운 거 같아요. 그래도 다른 요리들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내일은 생선 요리 해 볼게요.”

“어어. 원래 튀김옷 입히는 게 어려운 기술이야.”

제 손으로 튀김을 만들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면서 알은척은 잘했다. 유채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촬영은 녹록지 않았고, 연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늘 유채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좋았다. 하루의 피로가 흔적도 없이 풀렸다.

***

촬영이 이어지면서 태오의 연기도 갈수록 능숙해졌다. 추 감독도 만족해했고, 현장 분위기도 줄곧 좋았다. 그러나 감정이 폭주하는 후반부부터 촬영하고 있어서 감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태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쥐고 대본의 중후반부를 폈다. 다시 천천히 읽어 보면서 감정을 가다듬으려는 생각이었다.

영화의 절정부, 수혜는 결국 정유인의 아이를 가진다. 그러나 정유인은, 그들의 관계를 눈치채고 자신을 지속적으로 괴롭혀 온 정유헌을 견뎌 내지 못해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뒤였다.

수혜는 앞날을 고민하면서 임신 사실을 숨기지만, 갑작스레 쓰러지면서 임신 사실이 집안에 알려지게 된다.

그런데 정유헌은 사실 이미 오래전 불임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을 보기 위해, 오랫동안 제 수족으로 세뇌해 온 정유인을 일부러 섬으로 보내 수혜와 사랑에 빠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모든 것을 깨닫고 절망하는 수혜에게 그는 거래를 제안한다. 아기를 낳아 대를 이어 준다면, 정유인이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고 평생 돌봐 주겠다는 것이다.

수혜는 정유헌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정유인과 이별한다. 정유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수혜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해 절망하고, 정신 병원에 갇혀 서서히 미쳐 간다.

수혜는 정유인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믿으며, 아기를 낳은 뒤 도망쳐 그를 찾아갈 날을 꿈꾼다. 그러나 수혜의 출산일, 썩은 동아줄을 잡은 호랑이가 추락해 물들인 붉은 수수처럼 수혜의 침상도 붉게 물든다. 수혜는 건강한 아들을 낳지만 출혈이 심해 결국 사망하고, 완전히 이지를 잃은 정유인이 정신 병원의 창살 너머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진짜 어렵다…….”

태오는 대본을 내려놓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에 수혜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는 장면을 촬영할 차례였다. 정유인은 잠시 이성이 돌아온 상태였고, 수혜가 자신을 떠나려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그녀를 보내 주게 된다.

아무런 희망도 꿈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정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수혜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뿐이었다. 수혜가 진심으로 그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지 못한 채. 그런 정유인의 감정에 이입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다만 정유인을 떠나보내려는 수혜의 감정은 알 것 같았다.

태오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절망의 끄트머리까지 몰렸을 때, 상대만은 이 어둠 속에서 벗어나길 바랐던 기억.

“잘 안 풀려? 이제 곧 촬영 시작할 텐데 괜찮겠어, 우주야?”

명태가 곁에 놓인 간이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물었다. 태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엷게 웃었다. 작게 고개를 저으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아뇨,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상대역인 수혜의 심정을 안다면 정유인의 감정에도 닿을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마주하는 게 겁날 뿐이었다.

“……컷!”

추 감독이 컷을 외치면서 촬영이 종료되었다. 태오는 조금 멍한 얼굴로 서 있다가, 수혜 역 배우인 주윤이 내민 손수건을 받아 들고 정신을 차렸다. 눈가만 젖은 줄 알았는데 뺨도 축축하고 입술에서도 짠맛이 났다. 태오는 멋쩍게 웃었다.

“좋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우주 씨, 오늘 특히 좋았어요. 앞으로도 수고해 줘요.”

“예……. 감사합니다, 감독님.”

“감사하긴. 내가 감사하죠.”

추 감독은 소문만큼 꼬장꼬장하거나 까탈스럽지 않았다. 디렉션이 상세하고, 매사를 꼼꼼하게 짚고 넘어가는 편이긴 했다. 그러나 태오의 연기에는 언제나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배우들은 늘 태오를 부러워했다. 지적을 많이 받는 편인 주윤이 가장 그랬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저 때문에 계속 지체되네요. 우주 씨한테 제일 죄송해요.”

“아닙니다. 저도 주윤 씨 덕분에 편하게 일하고 있어요.”

“에이, 그럴 리가요. 이제 좀 괜찮아지셨어요? 오늘 많이 몰입하셨나 봐요.”

“예, 좀……. 이제 괜찮아요. 손수건 고맙습니다.”

“덕분에 감독님이 좋아하셔서 일찍 끝났어요. 매일 덕만 보네요.”

밴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주윤은 졸졸 따라오면서 감탄을 늘어놓기 바빴다.

자신을 밀어내는 수혜에게서 등을 돌리고, 마침내 본가를 떠나는 정유인이 홀로 눈물 흘리는 장면을 카메라가 집요하게 잡았다. 추 감독은 곧바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모두가 만족했다. 그런데 태오는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마음이 지치고 피곤하기만 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저기, 오늘 좀 일찍 끝난 기념으로 다 같이 맥주 한잔하려고 하는데 우주 씨도…….”

“죄송해요.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서. 내일 뵐게요.”

“아, 네…….”

주윤이 아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태오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대기하고 있던 밴에 올랐다.

밴이 도로 위를 미끄러지는 동안 창가에 이마를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선팅이 짙게 된 유리창이 태오의 얼굴을 비췄다. 눈두덩이도, 뺨도 퉁퉁 부어서 얼굴이 엉망이었다. 짐작보다 자신이 많이 울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손수건을 건넬 때 주윤도 놀란 표정이었다.

주윤의 말이 맞았다. 오늘 태오는 정유인에게 지나치게 이입해 버렸다. 몰입이 사라진 뒤에도 가슴 안쪽이 욱신거렸다.

극 중 내용이라고 치부하고 잊기엔 태오의 지나간 날과 지나치게 닮았다. 그것을 태오는 카메라 앞에서 정유인이 된 후에야 깨달았다. 태오는 수혜가 어떤 마음으로 정유인을 밀어냈는지 잘 알았다. 그러나 그게 맞는 길이었을까?

지난 삶에서도, 우주의 몸에서 새롭게 눈 뜬 후에도 태오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유채와 함께 가라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채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째서 마음대로 속단하고 유채와의 기억을 잘라 내 버렸을까.

유채는 태오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쪽을 더 원했을지도 몰랐다.

수혜와 정유인의 비참한 미래는 태오와 유채의 삶이었을 수도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서, 태오가 이렇게 되살아나지 않았더라면.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룸 미러를 통해 로드 매니저가 흘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곁에 앉은 명태는 태오가 아직 정유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혀를 차면서 손등을 토닥거렸다.

***

집에 도착했을 때는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 버렸다. 현관까지 나온 유채는 태오의 부어오른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서 얼음 팩을 준비하겠다며 분주하게 굴었다. 태오는 몸을 돌리려는 유채의 손목을 잡아챘다. 손안에 붙는 온기가 좋았다. 유채의 넓은 어깨 위에 이마를 툭 떨어뜨렸다.

“형?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냐, 어……. 그냥.”

“왜요. 응? 왜 그러는데.”

유채가 태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살살 달래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귓가에 속삭여 묻는 나지막한 음성 하나로.

“유채야, 미안해.”

그래서 입을 열 수 있었다. 태오는 제가 이 말을 아주 오래전에 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네가 원한 건 날 이 빈집에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을 텐데.

우주의 몸으로 돌아온 뒤, 곁에서 지켜보았던 유채의 텅 빈 인형 같은 모습을 떠올렸다. 태오가 연기해야 할 정유인의 마지막 장면과 같았다. 그런 앞날에 유채를 영원히 가둬 둘 뻔했다.

“응? 뭐가요?”

유채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태오는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가 그만두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서 유채를 다시 힘들게 할 필요는 없었다.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래서 다른 얘기를 했다.

“그게, 나 거짓말했어.”

“무슨 거짓말이요?”

유채의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온몸이 틈 없이 맞닿았다. 온기가 퍼지는 순간 웃음이 났다. 태오는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유채가 눈을 깜박거렸다.

“사실은…… 네가 만든 오징어튀김 맛없어.”

“……네?”

“튀김옷도 다 떨어지고 간도 하나도 안 맞아……. 엄청 짰다가 엄청 싱거웠다가 그래. 그리고 밀가루 맛 나.”

“…….”

“거짓말해서 미안해.”

“아 진짜, 형.”

유채가 바람을 훅 불었다. 이마를 덮었던 앞머리가 가볍게 날렸다. 어이없다는 듯, 작게 퍼지는 웃음소리가 청량했다.

“놀랐잖아요. 무슨 심각한 말 하려는 줄 알고.”

“심각한 말을 왜 해. 그럴 일 없어.”

다짐하듯 말했다. 유채가 아니라, 태오 자신에게. 유채가 키득거리면서 태오의 뺨에 입을 맞췄다. 통통한 입술이 부어오른 뺨에 꾹 눌렸다.

“진짜 그렇게 맛없어요……?”

“으응, 그래도 삼계죽은 맛있었어.”

“그럼 앞으로 삼계죽만 할까?”

“그 정도는 아니고…….”

“아, 뭐예요 진짜. 내가 꼭 엄청나게 맛있는 오튀 만들고 만다.”

“아냐, 진정해.”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바짝 붙어 키스를 받았다. 길게 이어진 입맞춤 끝에 태오가 소곤소곤 말했다.

“그래도 너 요리 엄청 늘었어. 나 진짜 행복해.”

유채가 눈이 안 보일 만큼 접으면서 웃었다.

“나도 진짜 행복해요.”

이렇게 태오와 유채는 예정되었던 미래와 다른 결말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바랄 일이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