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2/13)

Chapter 2.

유채는 거실의 러그 위에서 퍼뜩 눈을 떴다. 늦은 새벽까지 게임을 하다가 그대로 잠들었는지 손안에 컨트롤러를 쥔 채였다. 전면 유리창에 드리워진 흰 커튼 너머에서 겨울 햇볕이 쏟아져 눈을 찔렀다. 침실 안쪽에서는 태오가 분주한 듯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잔 소음이 유채의 잠을 깨운 모양이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숙소와 달리 태오의 아파트 온도는 언제나 일정했다. 이불은커녕 담요 한 장 덮지 않았는데도 따뜻해서 나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바로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비스듬히 누운 자세 그대로 꾸물거렸다. 몇 분이 채 지나기 전에 태오가 거실로 나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후다닥 눈을 꾹 감고 자는 척했다.

가까이 다가온 태오가 허리를 숙여서 유채를 살펴보는 기척이 났다. 이내 긴 손가락이 그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채는 숨을 멈추고 그 손길을 참아 냈지만 제 뺨을 부드럽게 톡톡 건드리는 것까지 견디지는 못했다. 속눈썹이 파드득 떨리고 눈꺼풀이 저절로 밀려 올라갔다.

눈앞에서 태오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길게 접히는 눈 끝이 초승달 같았다. 작은 웃음이었는데도 주변이 환했다. 조금 전까지 눈가를 간지럽히던 햇살 조각보다 더 눈이 부셨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네 방에 들어가서 자지 않고.”

“게임하다가…….”

이제 막 깬 탓에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채는 목을 가다듬으면서 태오를 곁눈질했다. 오늘 태오는 일정이 많았다. 유채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태오는 바쁘게 움직이는 대신 거실 TV를 흘긋 돌아보더니 혀를 찼다.

“네 방에 TV 들여놓을게. 앞으로는 방에서 놀다가 자.”

“아니……. 안 그래도 돼요. 그렇게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네 방’. 그 단어가 주는 느낌이 기분 좋아서 유채는 뺨을 붉혔다.

태오의 아파트에는 언젠가부터 유채의 방이 생겼다. 처음에는 그저 게스트 룸이었는데, 연습생 시절보다 데뷔 후에 오히려 한가해진 유채가 밤늦게까지 태오와 노닥거리다가 자고 가는 날이 많아지면서 그의 방이 되었다. 침실 한편에 이어진 작은 드레스 룸에는 유채의 옷이 가득했다. 태오가 직접 골라서 사 준 것들이었다.

“슈트 입고 나가는 거 아니었어요?”

벌써 외출복 차림인 태오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유채가 물었다.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내려 이마를 덮고, 올이 성긴 흰 스웨터에 블랙진을 입은 태오는 제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나란히 서면 사람들이 유채와 또래로 볼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 즐거워져서 유채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오늘 슈트는 협찬이라 보은 실장님이 가져올 거야. 숍에서 입기로 했어.”

“아……. 보고 싶었는데.”

유채는 아쉬운 얼굴로 섭섭해했다. 몸에 딱 맞는 고급 정장을 입고 헤어를 만진 태오를 오랜만에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태오가 멈칫하더니 유채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고 물었다.

“그럼 숍에 같이 갈래?”

“음…….”

유채는 일정을 더듬는 척 눈을 굴렸다. 생각할 거리가 있을 리 없었다. 래디언스는 벌써 한 달 가까이 스케줄이 없고, 연말을 맞아 멤버들은 모두 본가로 향했다. 돌아갈 집이 없는 유채만 태오의 아파트에 며칠째 머물고 있었다. 12월 31일, 연말 무대가 방송국마다 꾸며졌지만 어디에서도 래디언스를 부르지 않았다. 첫 앨범을 발표한 후 반년이 지나도록 후속 소식이 없을 만큼 존재감 없는 그룹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에요. 오늘은 연습실 가 보려고요. 요즘 너무 연습을 못 해서.”

“그래, 그럼.”

오늘 같은 날 연습실에 가려고? 태오는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밥 잘 챙겨 먹어. 연습한다고 건너뛰면 안 돼.”

“안 그래요.”

“말만 그렇게 하고 너 자주 안 먹잖아.”

언제나처럼 잔소리 같은 당부도 빠지지 않았다. 태오는 늘 이런 식이었다. 유채의 자존심을 찌를 수 있는 길은 슬쩍 피해 가면서 걱정과 염려는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그게 좋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스물이 되면, 유채의 기분이 다치지 않도록 태오가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열두 시간 뒤가 되면 스무 살인데도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유채는 아랫입술을 꾹 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유채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태오가 벽시계를 흘긋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시간이 촉박할 게 뻔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가 봐야겠다는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형, 늦겠다. 빨리 나가 봐요.”

그래서 유채가 대신 말했다. 줄곧 뭉그적거리던 러그 위에서 일어나 태오의 앞에 똑바로 섰다. 이제 태오의 눈높이는 유채보다 손가락 한 마디쯤 낮은 곳에 있었다. ‘저 한참 더 클 거거든요?’ 많이 컸다고 태오가 기특해하면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대꾸했었다. 유채는 아직 성장기였다.

“응. 일찍 들어올게.”

말은 그랬지만 일찍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태오도 알고 유채도 알았다. 연말 시상식은 새벽이 되어야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유채는 입술을 당기면서 웃었다.

“응……. 시상식 볼게요.”

유채가 스무 살이 되는 열두 시.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럴 수 없는 것은 태오의 옆에 나란히 서지 못한 유채의 탓이었다.

***

멤버들과 함께 태오를 만났던 날 이후 네 달하고도 삼 주가 느릿느릿 흘렀다.

9월에는, 한 달 가까이 휴식기를 갖던 태오가 새 매니지먼트사를 결정했다. 기획사 대표가 태오의 아파트로 직접 찾아와서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작품 고를 때 간섭하지 마시고, 겹치기 출연 안 해요. CF 들어온다고 다 할 생각 없으니 1차로 추릴 때 신경 써 주세요.”

“아이, 그럼. 걱정하지 마. 다 네가 원하는 대로 맞춰 준다니까.”

“코디는 확정됐나요?”

“어, 그럼. 전체 스타일링 담당은 네가 말한 보은 실장이랑 어제 계약서 썼어. 헤어랑 메이크업은 회사 톱 티어로 데려와서 드림팀 꾸렸지.”

태오와 전부터 알고 지냈다는 새 소속사 대표는 그를 데려가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태오가 계약서에 사인하는 동안 입이 찢어질 듯 벌어진 채 싱글거렸다. 유채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테이블 곁에 오도카니 앉아서, 존경하는 눈빛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래디언스로 데뷔하면서 아티스트 계약서를 쓸 때의 유채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10월. 태오는 복귀작으로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를 택했다. 입대 전에는 무거운 분위기의 영화에 주로 출연했던 태오의 선택을 두고 언론이 떠들썩했다. 오랜만에 달콤한 로맨스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소감이 어떻냐고 묻는 인터뷰에서 태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연애하고 싶어지네요.]

Y튜브를 통해 태오의 인터뷰를 보던 유채는 들고 있던 캐러멜 팝콘 통을 툭 떨어뜨렸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귀 끝이 새빨개져서 후다닥 화면을 껐다.

11월. 태오의 드라마 촬영이 한창이었다. 마지막까지 수정을 거듭하느라 쪽대본이 되어 버리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 덕분에 촬영 팀이 모두 고생이라고 했다. 그래도 그렇게 해서 나온 대본의 작품성이 뛰어나다며, 태오는 피곤이 묻어나는 해쓱한 얼굴로 웃었다.

“현장 분위기도 좋아. 방영하면 반응 나쁘진 않을 거 같아.”

“나쁘지 않긴요, 완전 대박칠 거예요.”

유채가 기쁜 얼굴로 맞장구쳤다. 래디언스의 정규 1집 발매가 미뤄졌다는 통보를 받은 날이었지만 태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일정이 언제로 잡힐지는 아무도 몰랐다.

12월. 태오의 새 드라마가 방송되는 날마다 드라마 제목인 ‘천생연분을 만들어 드립니다’와 태오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에 떴다. 연말 시상식에서 태오는 최우수상 후보에 올랐다. 유채는 속으로 당연히 대상 후보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렸다. 새해 첫 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하게 된 게 아쉬웠지만 예상한 일이었다.

12월 31일.

태오가 시상식장으로 출발한 후 유채는 연습실로 향했다. 회사 지하 연습실이 아니라, 태오의 아파트 근처에 있는 유채의 개인 공간이었다.

래디언스의 데뷔 앨범이 저조한 성적을 낸 이후 신 대표는 회사 건물에서 유채를 마주칠 때마다 눈치를 주었다. 회사에 들렀다가 우연히 그 모습을 본 태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채의 손목을 잡고 그길로 부동산을 찾았다.

다음 날 유채에게는 개인 연습실이 생겼다. 종종 케빈이나 이신, 라윤이 찾아와 함께 연습했지만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태오와 유채밖에 없었다.

오늘은 멤버들도 모두 본가로 돌아갔으니 유채 혼자였다. 태오의 시상식 무대를 기다리면서, 유채는 하루 종일 거울을 마주한 채 춤 연습을 했다.

12월 31일, 11시 40분.

휴대폰의 작은 화면 속에서 태오가 수상 소감을 발표하고 있었다. 유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심조심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 녹화를 떴다.

1월 1일, 2시 30분.

쉼 없이 춤을 추었더니 운동화 끈이 다 풀렸다. 왼쪽 운동화 끈을 오른발로 밟는 바람에 스텝이 꼬여 넘어지고 말았다. 연습실 바닥에 무릎이 찍히면서 쾅, 소리가 요란하게도 났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팠다. 유채는 그대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태오를 만난 이후 유채는 줄곧 외롭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태오가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가슴이 조금 먹먹해졌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텅 비어 있을 게 분명한 연습실 밖의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던 것은 그때였다. 놀란 유채가 황급히 몸을 세워 앉았다. 터치 패드가 빠르게 눌리고, 잠금장치가 풀리면서 연습실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유채야? 왜 그러고 있어.”

태오가 유채보다 더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흰 셔츠의 목덜미에 매인 붉은 넥타이 색이 태오와 잘 어울렸다. 어깨너비에 딱 맞게 떨어지는 재킷 안쪽에서 재질이 부드러워 보이는 정장 조끼가 허리를 반듯하게 조였다. 검은 정장 바지가 허벅지 부근에서 팽팽했다가 발목까지 곧게 떨어져 내렸다. 앞머리를 모두 넘겨서 반듯한 이마를 훤히 드러내, 이목구비가 또렷한 작은 얼굴이 가려지는 곳 없이 단정하고 화사해 보였다.

“넘어졌어?”

그러나 태오의 시선이 유채의 다리에 닿은 순간, 완벽한 대리석 조각 같았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긴 다리가 성큼성큼 움직여 유채의 앞에 섰다. 유채는 눈을 내리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괜찮아요.”

“어디 봐.”

태오는 유채의 대꾸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발목까지 덮은 트레이닝팬츠를 걷어 올리는 손길에서 상냥함이 묻어났다. 가슴 안쪽이 조금 뻐근해져서 유채는 눈썹을 슬쩍 찡그려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기가 차올랐던 가슴팍이 이번에는 산불이 난 것처럼 홧홧해졌다.

“다쳤잖아!”

무릎과 종아리가 빨갛게 부었다. 태오의 미간에 세로로 주름이 졌다. 어느 정도 다친 것인지 가늠해 보는 듯했다. 자잘한 부상에 익숙한 유채는 이 정도면 내일쯤 시퍼렇게 멍이 올라오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입을 열진 않았다.

대신 유채는 태오의 팔을 움켜쥐었다. 태오는 놀란 듯 유채를 바라보았다가, 입술을 꾹 문 그의 표정을 눈치채고 조심스러운 얼굴이 됐다. 그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 ‘많이 아파?’ 하고 물었다. 온기가 도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눈가는 오히려 건조했다. 어깨와 허리선에 딱 맞는 슈트 차림의 태오와 트레이닝팬츠를 무릎까지 말아 올려 맨종아리를 훤히 내놓은 자신의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형.”

가만히 태오를 불렀다. 태오가 ‘응.’ 하고 유채와 눈을 맞춰 주었다.

“운동화 끈 묶어 줘요. 꽃 모양으로.”

“하하…….”

태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빠르게 손을 놀려 유채의 운동화 끈을 당겼다. 흰 운동화 위에 꽃잎 네 장이 금세 만들어졌다. 유채는 그 꽃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집에 가자. 약 발라 줄게.”

‘이제 됐지?’ 하는 얼굴로 태오가 유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태오의 말은 틀렸다. 유채에게는 ‘집’이 없었다. 재혼한 아버지가 사시는 집도, 멤버들과 함께 생활하는 숙소도 유채의 집이 아니었다. 태오의 아파트는 그의 집일 뿐이다. 그런데도 태오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집에 가자.’

그 집에는 유채의 침실이 있다. 처음으로 가져 본 자신의 방이었다. 태오와 함께한 모든 것이 유채에게는 처음이었다.

-첫사랑이에요.

열여섯의 유채가 숨 쉬듯 고백했을 때 태오는 웃었다.

-너 지금은 이게 세상 전부 같아도…… 스무 살쯤 되면 나 같은 건 기억에도 안 남아 있을걸.

그러나 두 시간 반 전에 스무 살이 된 유채의 세상에는 여전히 태오밖에 없었다.

“형, 기억나요?”

“뭐가?”

태오가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형이 나중에 내 우주가 되어 주겠다고 했던 거.”

태오가 순순히 웃었다. 그리고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나 이미 네 우주 아니었어?”

그 순간, 충동과 함께 뱃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의 손을 잡았다. 맞닿은 체온을 느끼면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힘을 주어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어어?”

갑작스러운 악력을 이기지 못한 태오가 땀에 젖은 유채의 몸 위로 쏟아졌다.

TV 화면 속에서는 끝까지 채워져 있었던 셔츠 단추가 두어 개 풀어진 채 태오의 흰 목덜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유채는 제 몸의 희미한 떨림을 무시하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지를 태오의 긴 목 위에서 미끄러트리고, 가운데 톡 튀어나온 울대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목울대가 꿀럭, 움직였다.

태오의 붉은 입술에서 숨결이 샜다. 뜨거운 호흡이 유채의 뺨에 닿았다.

“유채야. 왜 그렇게…….”

쳐다봐. 태오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유채는 기습적으로 그에게 입술을 찍어 눌렀다. 새가 부리를 쪼듯, 통통한 살갗이 꾹 눌리는 짧은 키스였다. 불시에 입맞춤을 당한 태오는 눈만 껌뻑거리다가 황망한 얼굴로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의 도톰한 입술 너머에서 새빨간 혀가 보였다.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순식간에 자세가 바뀌었다. 태오의 허리를 꽉 껴안으면서 그의 위에 올라탔다. 유채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한 태오가 팔다리를 버둥대다가 뒤로 넘어가 기어코 바닥에 누워 버렸다. 태오의 뒤통수 아래에 손바닥을 받쳤다. 하체가 틈 없이 밀착되었다.

당황한 태오의 눈가가 축축하고 붉었다. 태오를 완전히 집어삼켜 버리고 싶었다. 가슴속에서 날것의 감정이 폭주했다. 허겁지겁 태오의 등을 끌어안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유채는 스무 살이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태오와 함께 새해를 맞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방송국에서 가장 넓은 홀의 맨 앞줄과 맨 뒷줄에 떨어져 앉아도 같은 공간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무 살은 기적의 단어가 아니었고, 유채가 모르는 태오의 세계는 여전히 까마득히 멀었다. 유채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유채의 볼에 말캉한 온기가 닿았다. 유채는 순간 생각이 멈췄다.

“스무 살 축하해.”

뺨에 닿은 입맞춤이 솜털처럼 간지러웠다.

“세 시간이나 늦어서 미안.”

유채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태오를 향했다.

단정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을 내리뜬 태오의 긴 눈매 아래로 그림자가 졌다.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과 잘 어울리는 속눈썹이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했다. 빽빽한 속눈썹은 그의 숨결을 따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연습실에 옅게 깔린 흰 먼지와 칙칙하고 어두운 형광등 불빛 아래 누웠던 그날 태오의 모습은 유채의 기억 속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온 세상에 그와 단둘만 있는 것 같았다.

유채는 입을 열었다.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시간 반이에요.”

고작 두 시간 반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끝없을 것이다. 태오가 유채의 곁에 있을 시간이.

커다란 손이 태오의 어깨를 꽉 누르면서 아랫입술을 성급하게 빨아 올렸다. 태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딱 붙이고 힘을 주었지만, 말캉한 혀끝이 그 틈을 파고들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순간적으로 잡아당기듯 혀가 깊게 빨아 들여졌다가 부드럽게 풀려나면서 입 안에 타액이 고였다.

유채는 태오의 입천장을 톡톡 두드리고, 입 안을 훑어 낸 후 다시 한번 아랫입술을 빨았다가 잘근 씹었다. 정신없이 달려드는 그에게 휘말려 정신을 못 차리던 태오가 가쁜 숨을 할딱거렸다. 그제야 태오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아…….”

무심코 짧은 신음이 샜다. 그것이 자극이 된 듯, 잠시 물러났던 유채가 또다시 와락 덤볐다.

입 안에서 혀끝이 다시 엉켰다. 찰팍거리는 소리와 함께 타액이 오갔다. 태오는 점점 더 호흡이 버거워졌다. 머릿속이 뜨겁고 눈가가 젖어 들었다. 그때, 유채가 고개를 들었다.

“형…….”

덜 자란 소년 같은 얼굴이었지만 날카로운 턱선은 단단히 여물었다. 그런데 표정이 엉망이었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기도, 웃어 버릴 것 같기도 한 얼굴로 유채는,

“형하고 나는 정말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라고, 태오가 누운 채로도 펄쩍 뛰어오를 법한 소리를 했다.

“뭐라는 거야?”

태오가 정색하면서 따졌다. 그러자 유채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래도 좋아해요. 형하고 내가 어떤 모습이든.”

이어진 목소리는 물기 하나 없이 버석했다.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거예요.”

그 마음이 어떤지 알 것도 같아서, 태오는 말없이 팔을 뻗어 유채를 당겨 안았다.

“어, 나도.”

그리고 유채의 서른두 번째 고백을 드디어 받아 주었다.

새해 첫날의 새벽. 유채는 스무 살이 되었다.

태오가 그와 함께 있었다. 눈앞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태오의 뺨은 조금 창백했고, 귀 끝과 목덜미는 온통 붉었다. 유채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에 이채가 담겼다. 반쯤 벌어진 입술 틈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났다.

잔물결이 파도를 타고 밀려오듯, 느릿한 열기가 유채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끓어올랐다. 이유 없이 숨이 가빴다. 목덜미를 단정하게 조였던 넥타이가 반쯤 풀린 채,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맨살갗이 투명하고 매끄러웠다. 그 흰 목덜미에 다급히 고개를 묻었다. 입술에 닿는 살결이 열이 오른 듯 뜨거웠다. 저도 모르게 이를 세워 콱 물었다. 태오가 팔다리를 파르르 떨었다.

“유채야. 잠깐. 잠깐만.”

태오가 할딱이면서 유채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의 손은 유채의 넓은 어깨 위에서 허둥대다가 길을 잃고 미끄러졌다. 유채는 목이 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 미안해요. 못 참겠어요.”

태오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곁눈으로 연습실 입구를 흘긋 바라보는 시선이 흔들거렸다.

“아무도 안 와요.”

“그래도.”

이 연습실은 태오가 유채를 위해 만들어 준 공간이었다. 위치를 알고 있는 멤버들도 연말을 맞아 모두 집으로 돌아갔으니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태오는 불안한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문이라도 잠그고 오라면서 눈짓을 했다.

유채는 후다닥 일어나 연습실 출입문을 이중으로 잠갔다. 뛰듯이 돌아온 유채의 다급한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유채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그 입술에 또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마음껏 할짝거리고 빨아 대다가 혀끝을 찔러 넣었다. 숨이 막히는지 뒤로 넘어가는 태오의 고개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 뺨을 쥐었다. 태오의 입술에서 야트막한 신음이 샜다.

길게 이어진 거친 키스 끝에 얼굴을 들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희미한 은사가 툭 끊겼다. 뺨이 온통 붉게 달아오른 태오가 멍한 눈으로 유채를 올려다보았다. 그답지 않게 잔뜩 흐트러진 말간 얼굴을 마주한 순간 넘실거리는 열기가 유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고개를 숙여 태오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 바닥을 긁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 아프게…… 조심해서 할 테니까.”

그러자, 거짓말처럼 태오가 뚝 멈췄다. 나른하고 야릇하게 풀어졌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응?”

태오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도 정보가 제대로 입력되지 않은 듯, 다시 물었다.

“응?”

“네?”

유채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태오는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뜯어보더니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태오가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아래야?”

“그럼 형이 위로 가려고 했어요?”

어이가 없다는 듯한 유채의 말투에 태오가 더 어이없었다. 말문이 막혀서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유채의 채근하는 표정에 떠밀려 대답이 툭 나왔다.

“아니, 그게…… 생각 안 해 봤는데.”

유채를 상대로 구체적인 상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막연하게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떠올려 보았을 뿐이다. 그러자 유채는 조금 시무룩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많이 했는데.”

“뭘 해?”

“…….”

“……아니, 대답하지 마.”

갑자기 두통이 이는 것 같았다. 태오는 눈썹을 찡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를 곰곰이 뜯어보던 유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그럼. 생각 안 해 봤으니까 생각 많이 해 본 내 생각대로 하면 되겠다.”

“그게 무슨 기적의 논리지?”

“싫으면 싫다고 해요. 안 할게요.”

“너…….”

그러나 세 시간 전에 스무 살이 된 어린애는 초조한 표정을 감추려고 애쓰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까부터 태오의 허벅지를 찔러 대는 묵직한 양감이 한층 더 커졌는데도 그랬다. 태오는 인상을 썼다.

“난 아래로 해 본 적 없어. 남자랑 잘 때도 항상 위에서…….”

“……뭐라고요?”

유채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서늘한 눈이 태오를 노려보았다. 실수했다. 태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잊어버려.”

유채를 알기 전에 만났던 인연들에 대해서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었다. 태오는 난처한 얼굴로 유채를 흘긋 바라보았다. 흰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태오를 똑바로 응시했다. 짧은 대치가 이어졌다.

“아…….”

결국 태오가 먼저 신음 같은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유채의 부루퉁한 뺨을 톡톡 건드렸다.

“미안.”

“형은 그 얘기를 꼭 지금.”

“안 할게. 하던 거 하자. 응?”

태오는 바닥에 누웠던 등을 반쯤 일으켰다. 위로 가겠다고 버티기에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두 팔꿈치로 바닥을 지지한 채, 유채를 흘긋거리면서 눈을 굴렸다.

유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형을 안 좋아했겠어. 많기야 했겠죠. 그래도 별로 알고 싶진 않아요.”

“……뭐……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엄청 많이 만나고 다닌 것 같은데.”

“아니에요?”

“너 처음 만난 날 후에는 한 명도 없었어.”

“……정말?”

유채가 태오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사 년이나 수절했단 얘기를 이 시점에서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형형하게 눈을 빛내는 유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유채는 순식간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

“가끔은 애인 만났을 줄 알았는데.”

“너는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네가 눈앞에서 매일 알짱대는데 내가 누굴 만나.”

“사 년 동안 한 번도?”

“사 년 동안 한 번도.”

짧은 정적이 흘렀고, 민망해진 태오는 난처한 얼굴로 웃어 버렸다. 그때, 유채의 입술이 태오의 입에 쪽, 닿았다.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유채가 수줍게 키득거렸다.

맞닿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온기가 도는 간질거림이 가슴까지 퍼졌다.

“그래서, 하던 거 계속해요?”

태오는 물끄러미 유채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도 표정을 굳혔던 얼굴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옅은 색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리는 것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유채는 지금이라도 태오가 저를 밀어낼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태오가 눈을 쌕 접었다.

그는 다시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웠다. 두 팔을 벌리고, 유채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올라와.”

유채의 눈이 커졌다.

유채는 태오를 향해 달려들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레 흔들린 몸이 유채의 품 안에서 덜컹거렸다.

태오는 유채의 넓은 등을 쓸어내리면서 타박하듯 말했다.

“너, 내가 져 주는 거야.”

“응, 응.”

“다음에는 이렇게 안 넘어가.”

“다음?”

“어.”

유채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반쯤 쉰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다음도 있어요?”

“뭐? 그럼 없어?”

태오가 눈썹을 구긴 채 혀를 쯧, 찼다.

그를 물끄러미 응시한 유채의 연갈색 눈동자가 투명했다가, 한순간에 새카맣게 반들거렸다.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와 태오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줄곧 투덜거리던 태오가 숨결을 흡 들이켰다.

목소리가 툭 끊긴 자리에 가쁜 호흡이 남았다.

유채는 뜨거운 숨을 태오의 뺨에 붙였다. 입술이 태오의 말캉한 볼에 닿았다가, 날렵한 턱선을 거쳐, 모양 좋은 입매에 도착해 아랫입술을 쪽, 빨았다. 생애 두 번째 키스는 서툴렀다. 첫 입맞춤보다 더 다급했고, 허기져 있었다.

“하……. 으으……”

태오의 무방비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유채의 허리 아래가 묵직해졌다. 그는 정신없이 팔을 뻗어 태오의 뺨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태오에게 몸을 붙이고, 입술을 삼키고 혀끝으로 말캉한 살덩이를 빨아 들였다. 벌어진 입 안에서 젖은 소리가 났다. 오랫동안 애타게 바라보기만 했던 입술은 뜨겁고 부드러웠다.

흰 셔츠 자락이 정장 바지 밖으로 빠져나온 채였다. 그의 몸을 감싼 정장 재킷과 조끼를 찢어 내고, 셔츠 단추를 모두 뜯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구김이 가도록 거칠게 조끼를 움켜쥐었을 때, 태오가 유채의 손등을 감싸면서 고개를 저었다. 잔뜩 빨리고 씹혀 부어오른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빨간 혀끝이 날름거렸다. 그런 얼굴로, 태오가 속삭였다.

“유채야. 이거, 협찬…….”

“씨발!”

심장이 미친 것처럼 쿵쿵 뛰었다. 어쩔 수 없이 태오의 슈트를 조심스럽게 다루려고 애쓰는 손길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태오가 숨을 할딱이면서도 유채의 팔을 토닥여 주지 않았으면 결국 찢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긴 인내의 시간 끝에 재킷과 조끼, 정장 바지까지 모두 상하게 하지 않고 벗겨 낼 수 있었다.

그리고 태오의 맨살갗이 드러났다. 허벅지에 딱 붙는 까만 브리프만 걸친 채였다. 유채는 몸을 움직여 그에게 바싹 붙었다. 심장 박동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태오의 살갗 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상쾌하고 달큼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꽉 잡았다. 유두를 힘주어 비틀자 태오가 허리를 뒤틀었다.

태오가 유채의 티셔츠 자락을 손에 쥐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일렁거리고, 뺨에는 발긋하게 열이 올랐다. 속눈썹이 빽빽한 눈가가 달아오른 듯 붉었다. 유채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유채가 허리를 일으켰다. 티셔츠를 벗어서 연습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그대로 태오의 몸을 덮쳐 버리듯 안았다. 하체가 겹쳐졌다. 태오의 허벅지 안쪽에서 묵직한 부피감이 느껴졌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온몸의 살갗이 타오르듯 뜨거워졌다.

“형, 좋아해. 사랑해요.”

유채는 정신없이 태오의 목덜미를 씹었다. 입술은 점점 더 아래로 미끄러졌다. 작고 동그란 젖꼭지를 입 안에 넣고 굴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채의 넓은 어깨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흐, 흐읏…….”

태오는 유채의 서른세 번째 고백에 대답하지 못했다.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느라 아랫입술을 깨물기 바빴다. 그러나 아랫도리가 유채의 손에 꽉 잡혔을 때는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검은 브리프 위로 툭 튀어나온 귀두에서 쿠퍼액이 흘러내려 헝겊을 축축하게 적셨다.

“형…… 이것도 협찬이에요?”

“흐, 으…… 뭐?”

“아닌가……?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 벗어야겠다…….”

“……하…….”

‘이 새끼가.’ 하는 눈빛으로 태오가 유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유채는 저를 쏘아보는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당겨 올리면서 힘겹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태오는 그제야 유채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불현듯 깨달았다. 유채가 스무 살이 된 지는 고작 세 시간이었다.

태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뺨이 홧홧해졌지만, 이내 결심한 듯 제 브리프의 허리끈에 손가락을 걸고 잡아 내렸다. 부어오른 성기가 퉁, 나타났다. 그리고 한 손으로 물건을 감쌌다. 아래위로 제 성기를 움직일 때마다 태오의 목이 점점 더 뒤로 젖혀졌다. 유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 타는 듯한 시선을 온몸의 세포로 느꼈다. 태오는 어제까지도 소년이었던 유채의 눈앞에서, 양말만 걸친 나신을 드러낸 채 자위를 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열이 끓었다.

몇 번 거칠게 흔들린 끝에 희끄무레한 점액을 왈칵 쏟아 내고 말았다. 지나치게 빠른 사정에 태오가 당황했다.

“유채야, 이건, 그러니까.”

그러나 유채는 홀린 듯한 눈으로, 백탁액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무안해진 태오는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다. 허벅지가 강한 악력에 잡힌 것은 그 순간이었다.

“형.”

목 안쪽을 긁어내며 울리는 듯한 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태오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자꾸만 정신이 흐릿해져서, 주먹을 꽉 쥐려고 애쓰면서 숨을 할딱거렸다. 유채가 한 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말랑한 살덩이가 커다란 손안에 쏙 들어찼다.

허리 아래에서 성감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낯설고 야릇한 감각이 요동쳤다. 맨허벅지 사이의 입구가 불에 덴 듯 뜨거워지고 있었다.

“형, 다리. 다리 더 벌려 줘요.”

“유채야.”

“빨리…….”

온몸에 열기가 피었다. 모든 생각이 녹아내렸다. 태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다리를 벌렸다. 눈앞이 흐렸다. 유채의 서늘한 눈매만이 또렷했다. 형형하게 반질거리는 시선이 태오를 옥죄는 것 같았다.

유채는 성급한 손길로 태오의 아랫배와 허벅지에 흥건한 정액을 쓸어 모았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금세 끈적하게 더럽혀졌다. 그는 한 팔로 태오의 허리를 감싸 안고, 백탁액을 그러모아 쥔 다른 손으로 태오의 허벅지 사이를 갈랐다. 아까부터 옴찔거리던 입구가 만져지는 게 느껴졌다.

“하, 으읏…….”

가벼운 마찰이었을 뿐인데도 유채는 온몸을 벌벌 떨었다. 어린 뺨이 창백했다. 구멍 주변에 점액을 치덕치덕 펴 바른 후, 그 애의 두 손이 갈피를 잃고 방황하는 게 보였다. 태오는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잠긴 목소리가 까슬하게 흘러나왔다.

“너도 벗어야지, 유채야.”

“아.”

그제야 생각난 듯 유채가 볼을 붉혔다. 티셔츠는 진작에 벗었지만, 여전히 트레이닝팬츠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성마른 손길로 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벗었다. 허리 아래에서 성기가 드러났다.

“형……. 이제 할게요.”

유채가 머뭇머뭇 말했다.

그러나 태오는 잠시 넋이 나간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물건의 크기에 압도당해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어렴풋한 윤곽으로 짐작했을 때도 작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실물을 확인한 느낌은 암담했다. 게다가 아직 완전히 커진 것도 아닌 듯, 그것은 빳빳하게 고개를 들면서 착실히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저기, 유채야.”

간신히 입술을 달싹여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 얌전한 대답이 돌아왔다. 태오는 삐걱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생각해 보자고, 최대한 상냥하게 달래 보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유채의 눈빛이 지나치게 간절하고 애처로웠다.

“…….”

태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유채의 턱을 당겨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말캉하고 폭신한 입술이 닿자 각오가 섰다.

“그래. 해.”

어쩔 수 없이 꿈틀거리면서 다리를 벌렸다. 최대한 힘을 빼고자 심호흡을 했다.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안에 가쁜 숨소리만 작게 흘렀다.

유채가 태오의 둔부를 움켜쥐면서 양쪽으로 벌렸다. 훤히 드러난 입구를 바라보다가 퍼뜩 얼굴을 붉혔다. 수줍은 반응에 태오까지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아프면 말해요. 바로 뺄게요.”

눈매 위에서 내쉬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안 뺄 거 같은데……. 태오는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진 않았다.

유채가 성기를 입구에 맞추는 것이 느껴져 허리가 움찔 떨렸다. 둥근 귀두의 끄트머리가 살짝 닿았을 뿐인데 애널이 빠끔거리면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흐, 흐으읍……!”

끝만 슬쩍 들어갔던 성기가 입구를 파고들며 내벽 안으로 단숨에 박혔다. 불에 타오르는 듯 뜨거운 감각이 꼬리뼈를 타고 척추 위쪽까지 벼락처럼 꽂혔다. 눈앞이 하얗게 흐려지면서 연습실의 하얀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묵직하게 아래가 압박되어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다.

태오는 아랫입술을 깨물어, 당장 터져 나올 것 같은 비명을 억지로 참았다. 눈꼬리 끝에 맺혔던 생리적인 고통에 의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아, 하으, 윽…….”

유채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참으려 했지만 결국은 할딱거리고 말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아래에 시선을 고정하고 집중하고 있던 유채가 고개를 들었다가, 눈가가 발개진 채 뺨이 젖은 태오의 얼굴을 보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형, 아파요? 많이 아파요?”

다급하게 묻는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렸다. 아래가 두 동강이 나 쪼개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정신을 놓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태오는 울음을 삼키면서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참을 만해. 계속해.”

“형, 형 울잖아요. 그렇게 아파요? 울지 마요…….”

“괜찮…….”

정말로 괜찮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유채는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뺄게요. 아, 어떡해요. 미안해요.”

유채는 조금씩 허리를 움직여 물건을 빼냈다. 적어도, 시도는 했다.

그것은 정말 순간적이었다. 태오의 안에서 잔뜩 크기를 부풀린 성기가 입구로 빠져나오고자 움직였을 때, 그것을 꼭 물었던 내벽이 딸려 나갈 듯 움직이면서 거대한 자극이 파도처럼 전신에 몰아쳤다. 굵은 살덩이가 안쪽 깊은 곳 어딘가를 뭉근히 자극해 댔다. 질척하게 젖은 안이 급작스럽게 다시 좁아지면서 성기를 꽉 물었다.

몸부림을 치면서 할딱거리다가 유채와 시선이 마주쳤다. 갈색 눈동자에 어쩔 줄 모르는 당황이 스쳤다.

“그만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아, 아니, 나는…….”

당황한 것은 태오가 더했다.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내벽이 유채의 성기를 움켜쥔 채 꿈틀거렸다. 문득, 유채가 눈을 크게 떴다. 투명했던 눈이 일순 새카맣게 가라앉으면서 형형하게 빛났다.

그 순간, 입구까지 거의 다 빠져나왔던 물건이 단숨에 한쪽 깊은 곳까지 쑤셔 넣어졌다.

“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다리를 바둥거렸지만, 유채가 태오의 허벅지를 꽉 누르면서 힘을 주었다. 근육이 단단하게 자리 잡은 그의 팔뚝에 파릇하게 힘줄이 돋았다. 그리고 태오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아까부터 자극되고 있었던 안쪽의 어느 지점을 거칠게 쳐 댔다. 그 어떤 쾌감과도 비교도 할 수 없는 자극이었다.

“아, 아흐으, 거기, 안, 돼!”

입구는 이미 찢어질 것처럼 한계까지 벌어져 있었다. 그의 물건은 뿌리까지 깊게 태오의 안으로 쑤셔 박혀 깊은 곳을 찔렀다. 내벽이 경련하면서 좁아져 성기를 물었다가 한 번씩 쑤셔질 때마다 구멍은 숨을 토하듯 움찔거렸다. 유채의 것과 태오의 입구가 맞물린 틈에도, 유채의 아랫배에도, 태오의 허벅지에도 조금 전 사정한 태오의 정액과 유채의 쿠퍼액이 질척하게 섞여서 미끄덩하게 흘러내렸다.

유채가 크게 허리 짓을 했다. 움직임이 지나치게 빠르고 격했다. 신음이 마구 튀어 허공을 울렸다. 압박감에 숨이 막히면서 등줄기가 오싹하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앞은 조금도 자극이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당장 사정할 것 같은 쾌감이 들었다. 태오는 숨도 쉬지 못하고 유채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은 채 매달려 끙끙거렸다.

온몸이 덜컹거리면서 흔들렸다. 신음이 새어 나오다가 비명이 터졌다. 유채가 힘을 줄 때마다 그의 복근이 선명하게 갈라졌다.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렀다.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거친 허리 짓은 멈추지 않았다.

“아, 흐, 흐으, 으읏……!”

내벽을 타고 뜨거운 액이 갑작스럽게 퍼지면서 아랫배 안쪽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유채의 아랫배에, 어느새 꼿꼿해졌던 태오의 성기에서 튀어 버린 백탁액이 희끄무레하게 번졌다. 유채의 까만 동공에 불길 같은 것이 번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 눈빛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아득히 멀어졌다.

***

태오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유채의 목을 끌어안았던 팔에 힘이 풀렸다. 손등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유채의 눈동자에도 천천히 초점이 돌아왔다. 연습실의 맨바닥에 태오가 나신으로 누워 있었다. 순간적으로 눈이 커졌다. 유채는 안절부절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후다닥 손을 더듬어서 근처에 던져 놓았던 제 티셔츠를 태오의 벗은 등 아래에 받쳐 주었다.

그러느라 태오의 안에 연결되어 있던 것이 느릿하게 빠져나왔다. 성기가 맞물렸던 입구에서 반투명한 점액이 후드득 쏟아져 흰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몸을 일으켰던 유채가 멈칫했다. 시선이 집요하게 태오의 다리 사이를 좇았다.

조금 전까지도 그의 물건을 꽉 물고 있던 구멍은 통통하게 부어 있었다. 빠듯하게 좁았던 입구는 여전히 슬쩍 벌어진 채였다. 유채는 홀린 눈으로 손을 뻗어서 구멍을 꾹 눌러 보았다.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태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으으, 음…….”

놀라서 다급히 손길을 거두었지만 태오가 깨어난 것은 아닌 듯했다. 몇 번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더니 기척이 다시 잠잠해졌다. 유채는 눈을 굴리면서 눈치를 보다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부어오른 입구에 제 것을 가져다 댔다. 아래로 허벅지를 겹치면서 위로는 태오를 끌어안고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목덜미에 닿는 그의 뺨도, 맞닿은 가슴팍도, 겹쳐진 다리도 모두 뜨거웠다. 동시에 귀두가 입구 안으로 빠듯하게 밀려 들어갔다. 구멍이 오물거리면서 성기를 삼키는 모습이 야릇해 머리에 피가 몰렸다.

그러나 삼분의 일쯤 들어갔을 때, 태오가 헉, 소리를 내며 눈을 퍼뜩 떴다.

“유채야. 너.”

목소리가 다 갈라져 있었다. 낯빛은 안타까울 정도로 창백했다. 그 모습이 그답지 않게 연약해 보여서 유채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모습에, 태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빼.”

“형, 한 번만.”

“한 번은 아까 이미 한 거 아니었나?”

“두 번만.”

“빼라.”

지친 음성에 날카로운 기색이 섞였다. 어깨를 움찔한 유채는 금세 풀 죽은 표정이 됐다. 평소라면 그쯤에서 들어주었을 태오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미간에 세로로 간 주름이 한층 더 깊어지기만 했다. 태오가 입술을 비틀었다.

“한유채.”

“넵.”

유채가 후다닥 몸을 물렸다. 다급한 움직임을 따라 내벽의 붉은 속살이 딸려 나와 빠끔 보였다. 아랫배에 후끈 열이 몰렸지만, 유채를 올려다보는 태오의 시선이 너무 차가웠다. 기세 좋게 타오르려던 뱃속의 불길이 힘을 잃었다. 열기가 파스스 식은 자리가 얼어붙었다.

“형……. 많이 아팠어요? 하나도 안 좋았나…….”

태오는 시무룩해진 유채의 음성을 들으면서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딱딱한 바닥에서 유채의 격한 움직임을 받아 내느라 온몸이 다 아팠다.

그나마 회사에 있는 지하 연습실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태오가 신경 써서 만든 이 2층 연습실은 난방이 따뜻하게 되어 공기가 훈훈했고, 유채가 편하게 연습할 수 있도록 방음 장치에도 특별히 공을 들였다. 아래나 위층 사무실에 사람이 있었더라도 연습실 안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용도로 사용하려고 방음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아니었는데 엉뚱한 덕을 보았다.

“미안해요, 형.”

태오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에 할 말이 가득했다. 배우 몸에 이렇게 자국을 많이 남기면 어떡해. 콘돔은 꼭 사용해. 그렇게 무식하게 큰 걸 넣으려면 미리 풀어 줘야 돼. 무작정 쑤셨다가 찢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기절한 사람한테 계속 박아 대는 거 아니야. 안에 쏟아 낸 거 빼내지 않으면 내가 배 아파서 고생해. 다리 벌리고 있는 사람 앞에서 이제 해도 되냐고 묻지 마. 하고 나서 좋았냐고 물어보지도 마. 그리고 너 아까 욕했지.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그러는 동안 유채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내리깔았다. 고민에 빠진 듯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풍성한 속눈썹이 부드럽게 오르내렸다. 도톰한 입술이 잠시 달싹였다가 멈추고,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유채는 점점 더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끝내는 울상을 하고 말았다. 울먹울먹 ‘형…….’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태오의 시선이 움직여 유채에게 닿았다.

말간 뺨이 퉁퉁 부어올라 찌그러진 찐빵 같았다. 유채 자신은 모르겠지만, 태오는 제가 이 얼굴에 한 번도 이겨 본 적 없다는 것을 안다. 긴 속눈썹을 나비 날개처럼 팔락거리면서 붉은 입술을 달싹거리면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뭐든지 다 들어주고 싶었다. 결국 져 주는 것은 언제나 태오 쪽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태오는 입꼬리를 당기면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머릿속을 가득 채운 얘기 중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아냐, 나도 좋았어.”

눈가에 물기를 매단 유채가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태오에게 와락 안겨 드는 어깨가 넓고 단단했다. 벗은 살갗이 맞닿자 옅은 땀 냄새와 살갗 내가 훅 번졌다. 한입에 답삭 넣고 삼켜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유채가 너무 커다래져 버렸다.

***

유채가 태오를 살살 부축해서 연습실의 거울 벽에 등을 기대어 앉혔다. 이 꼴로는 집에 가기는커녕 건물 밖으로도 나갈 수 없을 터였다. 태오가 아픈 허리와 배를 누르면서 한숨을 쉬는 동안, 유채는 연습실 안쪽의 샤워실을 향해 뛰어나갔다.

수건에 뜨거운 물을 적셔서 가져온 유채가 태오의 다리 사이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이리 줘. 내가 할게.”

손을 내밀었지만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닦아 주기만 할게요. 맹세해요.”

“응?”

정신을 잃은 태오를 몰래 건드렸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양 볼과 목덜미가 울긋불긋한 채로, 단호하게 꾹 다문 입매가 결의에 차 있어서 태오는 조금 웃었다.

“힘들잖아요, 형.”

“뭐…… 그렇긴 하지.”

손가락 끝이 미미하게 떨릴 정도로 탈진한 것은 사실이었다. 고작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을 뿐인데도 숨이 가빴다. 태오는 굳이 부인하는 대신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채는 이제 태오가 마음을 풀고 기댈 수 있을 만큼 컸다. 앞으로 더 자랄 것이었다.

“그래, 그럼.”

벗은 다리를 넓게 벌렸다. 주름이 팽팽하게 펴질 정도로 부어오른 붉은 입구가 눈앞에 훤히 드러나자, 유채는 태연한 척했지만 귀 끝이 붉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태오의 허벅지 안쪽에 하얗게 말라붙은 흔적들을 닦아 내렸다.

아래로 내리깐 눈꺼풀 탓에 유채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갈 길을 잃고 흔들리고 있을 게 뻔했다. 파드득 떨리고 있는 그의 숱 많은 속눈썹처럼. 유채는 그렇게 눈가를 발긋하게 붉히고 얌전히 손을 놀렸다. 아래로는 제가 싸질러 놓은 흔적들을 정리하느라 분주하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흘긋 눈을 치뜨면서 태오를 훔쳐보는 청순한 얼굴에 태오의 여유도 실시간으로 닳았다. 까칠하게 유채를 떼어 놓았으면서, 이제 와서 아랫배가 후끈 뜨거워졌다. 일단 집에 가야지. 태오는 머릿속으로 양 다섯 마리, 양 아홉 마리를 세면서 생각했다. 여기서 또다시 일을 벌였다가는 허리가 끊어질지도 몰랐다.

“다 됐어요. 집에 가서 다시 제대로 씻겨 줄게요.”

“……음, 그래.”

다행히 아랫도리가 힘을 받기 전에 정리가 끝났다. 유채가 몸을 일으키면서 물러서자, 태오는 침을 꿀꺽 삼키고 머릿속에서 뛰어다니던 양들을 치워 버렸다. 세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뒤돌아선 유채가 주변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트레이닝팬츠 하나만 걸치고 상체는 여전히 벗은 채였다.

넓게 벌어진 어깨 아래로 날개뼈가 톡 도드라졌다. 살결은 하얗고 매끄러웠지만 마냥 보드라워 보이진 않았다. 몸을 움직이느라 힘이 들어갈 때마다 등 근육이 꿈틀거렸던 탓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오의 입 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을 때, 유채가 휙 돌아서 이쪽을 보고 섰다. 태오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표정을 빠르게 고쳤다.

“형, 이거 어떡하죠?”

“……어…… 뭐가?”

“형 옷이요.”

유채는 난처한 얼굴로 한 손에 태오의 슈트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허공에서 부유하던 정신이 강제로 제자리에 돌아와 퍼뜩 깨어났다. 태오는 눈썹을 구기면서 짤막하게 신음을 뱉었다. 협찬받은 정장을 이 끈적한 몸 위에 걸칠 수는 없었다. 정장은 태오가 사 버리면 그만이었지만 매니저에게 이유를 둘러대기가 난처했다.

유채가 태오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조심 물었다.

“일단 집에 갈 때만 제 옷 입을래요? 사물함에 트레이닝복 몇 개 있어요.”

“그러자.”

“얼른 갔다 올게요. 잠깐만요!”

태오의 벗은 몸 위에 제 티셔츠를 덮어 준 유채는 또다시 사물함을 향해 뛰었다. 이리저리 잘 뛴다 싶어서,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파진 와중에도 입가에 웃음이 고였다.

***

입대 전에 새로 매입해서 이사한 태오의 아파트는 연습실에서 멀지 않았다. 자차도 면허도 없는 유채가 오가기 편하려면 가까워야 했기 때문에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연습실을 사 준 것이다. 예상했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제법 유용했다.

운전은커녕 운전석에 앉아 있을 자신도 없었던 태오는 유채의 옷을 입고 유채의 캡을 푹 눌러쓴 채, 유채의 등에 업혀서 집으로 운반되었다. 어깨선이 아래로 흘러내려 긴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트레이닝팬츠는 아랫단을 한 번 접어 입었다.

“형, 눈 오네요.”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면서 걷던 유채가 건물의 일 층 현관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췄다. 유리문 바깥의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송이가 나풀거리면서 떨어지고 있었다.

“응, 그러게.”

작게 대답하면서 눈 구경을 했다.

유채는 이내 회전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섰다. 우산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졸음이 밀려와서 입을 떼기가 힘들었다. 온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없었다.

태오는 유채의 목덜미에 뺨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축축한 눈 냄새와 그의 청량한 체 향이 섞인 채 옅은 땀 냄새가 났다. 눈발이 굵어지면서 날씨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형, 자요?”

잠잠한 태오가 수상했는지, 유채의 목소리에 의심이 곁들었다.

“아니…….”

졸음이 섞이기 시작한 목소리가 민망했지만 태오는 부인부터 하고 봤다.

“그새 잔다고요?”

“안 잔다고…….”

눈꺼풀이 자꾸 무겁게 떨어져 내렸다. 유채의 넓고 판판한 등이 따뜻하고 편했다.

“춥지는 않아요?”

묻는 목소리 끝에 다정함이 묻어났다. 안 추워. 웅얼거리면서 온기를 찾아 그의 등에 바짝 붙었다.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형.”

“응…….”

눈도 뜨기 힘들 만큼 잠에 겨웠을 때, 달래는 듯한 나른한 목소리가 태오를 불렀다.

“근데 있잖아요……. 아파트에 제 방 말이에요. 형이 TV 달아 준댔잖아요.”

“응……. 근데 싫다며.”

“생각해 보니까 좋은 거 같아요. 플스도 안으로 들여놓고.”

“그래, 그럼.”

“근데 요즘 짐이 너무 많아져서 가뜩이나 복잡한데. 너무 좁아지니까 아예 게임 룸으로만 쓸까요?”

“으응……. 그럼 너는?”

“저야 뭐 형 침실 같이 써도 되고.”

“그래……?”

“어차피 형 침대도 킹사이즈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럼 오늘부터 같이 잘까요?”

“응……. 그래…….”

더 이상 대꾸할 기력도 없이 태오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유채가 작게 웃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 것 같았다.

***

다음 날 눈을 떠 보니 유채의 벗은 팔이 자신의 가슴팍 위에 턱 걸쳐져 있었다. 거위 털 이불로 태오를 꽁꽁 싸매다시피 한 채, 유채는 이불도 덮지 않고 옷도 입지 않은 맨몸으로 엎드려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하하……. 얘 좀 봐라.”

유채의 등에 업혔던 것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 들어가기도 했고,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는 유채의 손길에 맥없이 몸을 맡겼던 기억도 희미하게 났다. 그렇게 태오를 씻기고 닦아서 침대에 넣어 놓은 후, 유채는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멀쩡한 제 침실을 놔두고 태오의 침대 안에서.

“혀엉……. 일어났어요?”

유채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눈꺼풀을 밀어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꾸물꾸물 다가와 두 팔로 태오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바르작대는 볼이 따끈했다.

“눈떴는데 형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

청순한 얼굴이 고개를 들더니 태오를 바라보면서 얌전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살살 녹아내렸다. ‘그럼 오늘부터 같이 잘까요?’ 어렴풋한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태오는 손을 뻗어서, 유채의 말캉한 뺨을 꼬집고 양쪽으로 쭉 늘리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또 져 준다.

“네 베개 가져오고, 이불도 제대로 덮고 자. 왜 나한테만 덮어 놨어.”

유채는 발긋하게 달아오른 복숭아 같은 뺨을 한 채, 옅은 갈색 눈으로 태오를 가만히 올려다보더니 수줍게 웃었다.

***

유채와 한 침대를 쓰기 시작한 이후 일어나기가 힘들어졌다.

아침마다 태오는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말캉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잠에서 깼다. 밤늦게까지 시달린 탓에 부어오른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면, 태오의 가슴 언저리에 매달려 있던 유채가 눈을 새초롬하게 치켜뜨면서 생긋 웃었다.

“유채야, 너. 읏…….”

눈짓만 해도 긴장해서 후다닥 떨어지던 유채는 이제 제법 뻔뻔해졌다. 태오가 나무랄 틈도 없이 입을 벌려서, 동그란 유두에 혀를 대고 쪽, 빨았다. 태오의 잠긴 목소리가 신음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렇잖아도 통통하게 부어 있던 젖꼭지가 뾰족해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발끝까지 구부러드는 느낌에 진저리 치면서 유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옅은 백금발이 태오의 손가락 사이에 성기게 엉켰다.

유채가 가슴팍 여기저기에 이를 세울 때마다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아래로 처져 있던 태오의 물건이 빳빳하게 힘을 받는 것을 눈치챈 유채가 한 손을 뻗으면서 눈웃음쳤다. 눈꼬리가 길게 접히면서 반달 같은 곡선을 그렸다. 매번 당하면서 태오는 또다시 넋을 놓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유채의 커다란 손안에서 거칠게 흔들린 성기가 한 차례 묽은 정액을 왈칵 토해 낸 뒤였다.

“나 오늘 스케줄 있어.”

“응, 응.”

달콤하게 대꾸하면서도 유채의 손은 태오의 젖은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부어오른 입구를 살살 건드리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위에서는 여전히 젖꼭지를 입 안에 넣고 굴리다가 츄웁 빨아 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태오는 어이가 없어서 웃어 버렸다.

“이따가 해. 밤에 하자. 응? 일찍 들어올게.”

“으응……. 정말요?”

“그래. 그러니까 이제 일어나.”

유채의 앞머리를 걷어 내고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유채는 뺨을 붉히고 배시시 웃으면서, 두 팔을 뻗어 태오를 으스러지게 꽉 끌어안았다가 겨우겨우 놓아주었다.

그날도 그런 아침을 보내던 수많은 날 중 하루였다. 연이은 연말과 신년 행사들로 인해 휴방되었던 드라마가 다시 방영을 시작하면서 촬영도 재개되었기 때문에, 태오는 평소보다 조금 더 바빴다.

유채는 아침부터 허리에 달라붙으면서 보챘다. ‘가지 말라는 건 아니고요…….’ 하고 웅얼거리면서도 떨어지질 못했다. 태오는 벽시계를 흘긋 바라보았다. 시간이 빠듯했다.

“음, 그럼 같이 갈래?”

“응?”

태오의 목덜미에 뺨을 부비던 유채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아침 햇볕을 받은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촬영장에요? 하루 종일? 그래도 돼요?”

“매니저 대신 챙겨 주러 왔다고 하지 뭐. 휴가 주면 문식이 형도 좋아할 거야.”

갑작스런 휴가를 신나게 받아 챙겨 갈 매니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태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채는 상상 속의 김문식보다 더 들뜬 얼굴로, 태오에게 코알라처럼 매달리면서 조잘거렸다.

“내가 갈게요! 내가 문식이 형보다 더 잘 챙길 수 있어요!”

“하하……. 뭘 챙겨. 그냥 현장 구경한다고 생각해. 혹시 알아? 나중에 너도 어쩌면 연기할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

“내가요?”

유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촬영장 가운데 선 제 모습을 그려 보는 듯했다. 그러더니 이내 눈이 안 보이도록 활짝 웃었다.

“기왕 연기할 거면 형이랑 같이 촬영했으면 좋겠어요. 남주랑 서브 남주로.”

“응. 그러자.”

태오는 길게 접힌 유채의 눈가에 입술을 꾹 누르면서 다정하게 대꾸했다.

***

그들이 그렸던 상상은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남주와 서브 남주는 아니었지만, 남주와 엑스트라로 한 화면에 잡힌 것이다. 매니저의 대타로 태오의 촬영장에 따라간 유채가 그날 연기까지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유채와 함께 촬영장에 도착하니 주변이 어수선했다. 임 감독은 구석에 쪼그려 앉은 채 덥수룩한 앞머리를 헤집으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고, 곁에 선 조감독은 난처한 얼굴로 핸드폰을 귀에 붙이고 바쁘게 떠들고 있었다. 태오는 의아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삐죽 올렸다.

“뭐예요, 형. 아직 시작 안 했어요? 저 오기 전에 다른 신 따 놓는다면서요.”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마친 태오가 임 감독에게 다가서면서 물었다. 유채가 그의 뒤로 쪼르르 따라붙었다.

드라마의 총연출인 임기환 감독과는 그의 전작 ‘햇빛’에 출연한 인연이 있었다. 드물게 젊은 감독이기도 했고, 스스럼없고 수더분한 성격이 태오와 잘 맞아서 그 후로 편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힘없이 태오를 올려다보더니, 금세 우는 얼굴로 태오에게 안기려고 들었다.

30대의 커다란 덩치가 울먹울먹하는 게 보기에 영 못마땅했다. 태오는 잽싸게 몸을 물리고 유채의 뒤로 피했다.

임 감독은 유채를 빙 돌아 태오를 쫓아가면서 한탄을 늘어놓았다.

“태오야……. 어떡하냐. 오늘 촬영 못 하겠다.”

“촬영을 왜 못 해요? 빠진 사람도 없는 거 같은데.”

“아니이……. 오늘 최원오가 카메오 출연하기로 했잖아. 근데 못 온대. 중요한 장면인데…….”

최원오가 맡기로 한 배역은 지나가는 역할에 불과했지만, 남주인 태오를 자극해 질투를 폭발시켜야 했다. 외모가 중요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다. 애초에 톱 배우에게 카메오 출연을 부탁한 것도 그래서였다. 톱스타라고 책임감 없이 구는 것은 질색이라, 태오는 눈썹을 구기면서 인상을 팍 썼다.

“당일인데 갑자기 캔슬했어요? 뭐야. 왜요? 다리라도 부러졌대요?”

“응…….”

“……네?”

“밤샘 촬영 하다가 사고 나서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네. 병원에 실려 갔대.”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태오는 머쓱한 얼굴이 되어서 최원오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한 후, 시무룩해져 있는 임 감독을 달랬다.

“당장 방송 분량 찍어야 하는데 그 장면이 다음 회차에 나와야 하잖아요. 단역 배우 써요.”

“야, 안 돼. 손 작가가 신신당부했어. 꼭 잘생기고 몸 좋은……. 배우로 눈길을 확! 사로잡아야 한다고.”

“흠.”

나름 손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서비스 컷인 모양이었다. 태오라고 딱히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눈만 굴리고 있는데, 머리를 쥐어뜯던 임 감독의 눈길이 태오의 곁에 딱 붙어 선 유채에게로 향했다.

제게 닿은 시선을 눈치챈 유채가 허리를 구십 도로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렛 어스 샤인……. 아니, 오늘 태오 형 일일 매니저인 한유채입니다!”

“으응? 태오 매니저예요? 못 보던 얼굴인데.”

“오늘 문식이 형 휴가라서 데리고 왔어요.”

“으응,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매니저님 얼굴에서 빛이 나네……?”

“아이돌이에요. 래디언스라고, 작년에 데뷔했어요. 곡 들어 볼래요? 노래 좋아요.”

태오는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서 래디언스의 데뷔곡을 트느라, 임 감독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유채를 살뜰하게 뜯어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진득한 시선을 받은 유채만 안절부절못하고 태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응? 유채야, 왜.”

태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임 감독은 이미 유채의 두 손을 덥석 움켜쥐고 신나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아이돌이에요? 연기도 해 봤어요? 아냐, 안 해 봤어도 상관없어요. 소속사 어디예요? 지금 계약서 쓸 수 있나? 아니, 뭐, 한 컷 나오는 단역이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할 것도 없긴 한데. 그래도 연락처 좀 줘 봐요. 내가 지금 전화해서…….”

“형, 형.”

임 감독의 기세에 놀란 유채가 눈만 깜빡거리는 동안, 태오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를 말렸다.

“제대로 얘기해요.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아니, 그러니까 오늘 인턴 역할 말이야. 이 친구가 하면 좋지 않을까? 어차피 대사도 거의 없고, 아이돌이면 몸도 좋겠네!”

“네? 제가요? 인턴 역을요?”

유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래디언스의 스케줄이 아무것도 잡히지 않은 지 벌써 한 달이었으니 회사에서 거절할 리 없었다. 유채의 긍정적인 반응에, 임 감독의 표정에도 화색이 돌았다. 가운데 낀 태오의 표정만 미세하게 굳었다.

“형, 나 해도 돼요? 형이랑 같은 화면에 잡히는 거 맞죠?”

유채가 태오를 휙 돌아보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들뜬 얼굴에 대고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어서, 태오는 유채에게 대꾸하는 대신 임 감독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영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저기요, 감독님.”

“응? 우리 태오가 왜 정색은 하고 그러지, 무섭게?”

하나도 안 무서운 얼굴로 임 감독이 싱글거렸다. 오히려 유채가 퍼뜩 긴장한 듯 태오의 안색을 살폈다. 태오는 기대와 걱정이 반반씩 들어찬 유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을 골랐다. 유채의 드라마 출연이 싫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다만…….

“유채랑 찍는 건 좋은데, 그 장면은 빼면 안 됩니까?”

“응? 무슨 장면?”

바로 알아들었으면서 임 감독은 딴청을 부렸다. 태오의 미간에 세로로 잡힌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다. 한층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오가 어금니를 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벗는 거요.”

“아이, 그게 포인트인데 그걸 빼면 어떡해.”

“그렇다고 애를 벗겨요!”

“애? 유채 씨, 애야? 미성년이었어?”

임 감독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유채가 커다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뇨, 스무 살 됐어요. ……일주일 전에.”

“뭐야. 일주일이면 다 컸네!”

“형, 그래도.”

“야, 태오야. 누가 보면 내가 유채 씨 다 벗기려는 줄 알겠다. 상탈 좀 하는 거 가지고 왜 그래? 유채 씨는 싫어요?”

“아, 아뇨. 싫은 건 아닌데…….”

유채가 태오의 눈치를 보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태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출연은 하고 싶은 게 빤했다. 그 얼굴이 드물게 초조하고 애타 보여서, 태오는 몇 마디 더 하려다 말고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고, 회차마다 시청률이 수직 상승 중인 히트작에 출연할 기회다. 한 컷뿐이지만 주인공인 태오와 같은 화면에 잡히는 신이었고, 톱 배우인 최원오에게 카메오 요청을 했을 만큼 임팩트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유채에게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노출 신인 게 마음에 걸리지만 심사가 조금 뒤틀린다고 해서 그런 기회를 막을 수는 없었다. 태오는 몰래 한숨을 쉬고, 유채에게 눈을 맞추면서 싱긋 웃었다. 억지로 당겨 올린 입꼬리가 미세하게 파들거렸다.

“그래, 그럼. 유채야, 잘할 수 있지?”

“네, 네!”

“오, 해결됐다. 유채 씨, 고마워요!”

유채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고, 임 감독도 유채의 어깨를 탕탕 치면서 호탕하게 웃어 댔다. 태오는 뱃속이 끓었지만, 유채가 카메라 앞에서 상의 좀 벗는다고 바짝 약 올라 하는 제가 조금 한심스러워졌다.

원래 출연하기로 했던 최원오가 마침 유채와 같은 회사 소속이었던 덕분에 얘기가 쉽게 되었다. 유채의 소속사와 통화하고 온 임 감독은 기쁜 얼굴로 준비를 부탁했다. 태오의 스타일리스트와 헤어, 메이크업 담당이 유채에게 따라붙었다.

태오는 코디들에게 이리저리 손을 타는 유채의 곁에서 제 순서가 올 때까지 대기하면서 연습을 봐주었다. 막상 촬영이 확정되고 나니 유채는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래도 티 내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는 게 안쓰러웠다.

“너 처음인 거 감독님도 아시니까 긴장하지 말고.”

“응……. 잘할게요.”

“부담 갖지 마. 그냥 하던 대로만 하면 예쁘게 나올 거야.”

메이크업을 해 주던 스태프가 ‘태오 씨랑 정말 친하신가 봐요.’ 하면서 말을 붙이자, 유채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염색 스프레이 뿌릴게요. 눈 감아 주세요.”

“네.”

사내 연애가 주요 내용인 드라마였고, 유채의 역할도 대학생 인턴이었다. 백금발 그대로 촬영할 수 없어서 염색 스프레이를 뿌렸다. 순식간에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한 유채가 어색한 얼굴로 곁에 선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어때요?”

“……어, 예쁘네.”

흰 드레스 셔츠를 갖춰 입고 갈색 앞머리를 뒤로 넘겨 이마를 환하게 드러낸 유채가 대리석 조각처럼 서늘해 보였다. 조금 당황해 버린 탓에 대답이 늦게 나왔다. 그러자 유채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면서 긴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차가웠던 인상이 한순간에 바뀌면서 해사해졌다.

“다행이다. 안 예쁠까 봐 걱정했어요.”

“네가 왜 안 예뻐.”

“그래도……. 형이랑 한 화면에 나올 건데 오징어 되면 안 되니까.”

“그런 걱정을 왜 해.”

“윤태오 씨, 옆으로 좀 비켜 주실게요-!”

“엇, 미안.”

방해된다면서 얼쩡거리지 말고 물러나 있으라고 손을 휘휘 내젓는 스태프에게 밀려서 태오가 몇 발짝 떨어져 섰다. 보디 메이크업을 할 차례였다.

유채는 셔츠 단추를 풀었다.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그의 맨몸에 메이크업을 입혔다.

“복근이 탄탄해서 크게 손대지 않아도 되겠어요.”

“네…….”

몸매를 칭찬받는 게 부끄러웠는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한 유채의 귀 끝이 줄곧 달아오른 채 제 색을 찾지 못했다. 옆에서 스타일리스트가 너무 귀엽다며 소리 내 웃었다가 태오의 싸늘한 눈초리를 마주치고 머쓱한 얼굴로 뚝 그쳤다.

태오가 자꾸 구겨지려는 미간을 펴려고 노력하는 동안, 몸 선을 따라 하이라이터만 살짝 바르고 어두운 파데로 복근 라인을 약간 강조한 정도로 메이크업이 마무리되었다. 때맞춰 나타난 임 감독이 유채를 내려다보고 손뼉을 쳤다.

“오, 좋네. 다들 준비됐어?”

“네. 시작하시죠.”

다 함께 촬영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유채는 태오의 곁으로 바투 붙으면서, 후다닥 앞섶을 여미고 셔츠 단추를 잠갔다.

***

촬영 장소는 탕비실로 꾸며진 실내 세트장이었다. 드라마는 방영 막바지였고, 우여곡절 끝에 연인이 된 주인공들의 소소한 질투 에피소드를 촬영할 차례였다.

“액션!”

임 감독의 큐 사인이 들어왔다.

주식회사 호연, 사내 탕비실.

태오가 맡은 역할인 김원진 대리는 그의 연인인 박하민 사원이 떠들어 대는 불만 사항을 접수하면서 혼나고 있었다. 하민은 그를 등지고 선 채 뒤통수만 보여 주는 중이다.

‘원진: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고 생각한다.’

태오는 손 작가가 꼼꼼하게 써 준 지문을 떠올리면서,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지만 사랑의 힘으로 버텨 내는 중인 얼굴을 했다.

AD가 유채에게 신호를 보냈다. 줄곧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유채가 금세 표정을 지우고 세트장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하민 선배님.”

대학생 인턴이 허리를 꾸벅 숙여 가며 인사했지만 흥분한 하민은 듣지 못한 채, 여전한 기세로 원진을 몰아붙인다.

“우리 대리님께서는 그렇게 일에 빠져서 회사 사랑만 하다가 하민이 사랑은 언제 해 주려고 그러지? 하민이도 사랑 좀 받자고! 로맨스가 부족하다고!”

“……하민아.”

저도 모르게 비밀 사내 연애의 한복판에 발을 들인 인턴이 창백한 얼굴로 얼어붙었다.

“진짜 내가 살 수가 없어요. 열받아서!”

그때, 하민이 분을 이기지 못한 듯 맹렬한 기세로 몸을 홱, 돌린다.

가까이 서 있던 인턴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하민과 세게 부딪쳤다. 하민의 손에 들렸던 컵이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인턴은 졸지에 냉수 한 사발을 쫄딱 맞았다. 하민이 놀란 얼굴로 눈을 끔뻑거린다.

“어어, 저기…….”

인턴의 셔츠가 물에 흠뻑 젖어 살갗에 달라붙었다. 넓은 어깨 아래에서 가슴팍과 허리선으로 이어지는 날렵한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필이면 흰색 셔츠였던 탓에, 몸에 달라붙은 천 너머로 살색 피부는 물론 옅은 분홍빛이 도는 유두까지 훤히 비쳤다.

“헉, 미……미안해요! 어떡하지. 여벌 셔츠 있어요? 일단 어, 얼른 벗어요! 감기 들겠다…….”

“아……. 네.”

드물게 당황한 하민이 허둥대는 사이, 인턴이 단추를 풀어 내리더니 셔츠를 벗어젖혔다.

숨결을 따라 두툼한 가슴이 오르내린다. 근육이 불거진 탓에 푹 들어간 가슴팍의 라인 아래로 잘 짜인 복근이 자리 잡았다. 탄탄한 허리 부근에서 좁은 골반이 이어진다. 장골의 아래쪽은 정장 바지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졌지만, 허리띠 위로 길게 뻗은 윗부분은 움푹 패었다.

탕비실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하민이 마른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뒤를 돌아보고, 넋을 놓은 하민의 표정에 발끈한 원진이 소리 지른다.

“하민아. 어디 보는 거야! 눈 안 내려? 나도 벗어? 그러면 돼?”

“컷!”

임 감독이 컷을 외쳤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조감독이 카메라 옆으로 바투 붙으면서 신나게 떠들었다.

“와, 화면 되게 괜찮게 빠졌다. 그쵸, 감독님. 유채 씨라고 했나? 몸 진짜 좋네요.”

“당연하지, 누가 뽑았는데. 내가, 어? 보는 눈이 딱 있잖아. 태오야! 태오야, 유채 씨랑 같이 이리 와서 모니터링해 봐.”

“……네.”

카메라가 멈추는 순간부터 태오의 표정은 다소 굳었지만 유채 외에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태오는 난처한 얼굴로 제 눈치를 보는 유채의 손목을 낚아채고 카메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임 감독이 손을 파닥거리면서 채근해 댔다.

“이거 봐요, 유채 씨. 생각보다 더 괜찮죠? 태오야. 맘에 드냐?”

“예……. 뭐.”

태오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임 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뭐가 이렇게 시큰둥해. 별로야?”

“아니……. 너무 노골적으로 찍으신 거 아니에요? 복근밖에 안 보이네…….”

“아이, 서비스 컷이잖아. 눈길이 확 가는데, 뭐. 이걸로 기사 분명히 나간다. 내가 장담해!”

“……그래요? 기사 뜰까요?”

“당연하지, 야. 방영할 때마다 쏟아지는 기사가 몇 갠데. 유채 씨 단독 기사도 뜰걸?”

“단독이요?”

태오는 잠시 솔깃한 얼굴이었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꼭 벗을 필요 있나? 셔츠 입고 있을 때도 벌써 다 비치는데?”

그러나 임 감독은 듣는 둥 마는 둥, 벌써 신이 나서 오케이 사인을 내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케이! 이대로 하고, 다들 다음 신 가자!”

“네엡!”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여 다음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유채의 분량은 끝났지만 태오의 촬영은 아직 한참 더 남았다.

의상도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고쳐야 하는데 태오는 여전히 뚱하게 선 채 유채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입술만 잘근거렸다. 유채는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자꾸만 위로 당겨지는 입꼬리를 힘주어 아래로 끌어 내렸다. 태오를 흘긋거렸다가 눈을 굴리는 유채의 귓불이 붉었다. 태오가 아까부터 이상했다. 너무 오랫동안 좋아했기 때문에 혼자 마음만 앞서 달려 나가는 짓은 안 하고 싶은데,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자꾸만 김칫국을 마셨다. 유채는 들뜬 나머지 태오의 귓가에 소곤소곤 묻고 싶었다.

형.

왜 자꾸 화내요.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벗어서 그래요?

형 앞에서만 벗었으면 좋겠어요?

형, 지금 질투해?

***

결국 유채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태오의 귀 끝을 길게 핥아 올리면서 속삭이듯 묻고 말았다. 촬영이 모두 끝난 후, 스튜디오 3층 화장실의 칸막이 안에서였다.

“질투했어요, 형? 다른 사람들이 나 벗은 거 다 봐서…….”

“흐, 읏…….”

발긋하게 달아오른 태오의 귀 끝이 움찔거렸다. 그는 뒤돌아서 화장실 칸막이에 두 손을 붙이고 선 채 몸을 떨었다. 맥없이 고개를 떨구고 칸막이에 이마를 기댄 탓에 희게 드러난 목덜미가 미끈했다. 그 살갗에 이를 세우고 물어뜯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유채는 한 손으로 태오의 벨트를 풀고 바지와 브리프를 검지에 걸어서 끌어 내렸다.

“말도 안 돼. 형도 질투해요? 정말?”

“너 진짜, 으……, 갑자기 왜 이래.”

“일부러 벗은 것도 아니고 그냥 촬영인데. 저 TV 데뷔잖아요. 형이 기뻐할 줄 알았는데, 막 계속 노려보고. 서운해요…….”

“기뻐. 당연히 기쁘지. 내가 언제 노려봤…… 한유채!”

맨허리를 타고 미끄러지던 유채의 긴 손가락이 엉덩이를 꽉 쥐었다. 태오는 퍼뜩 놀라 순간적으로 움찔거리면서 허리를 비틀었지만, 미처 그의 손을 떼어 내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허벅지에 걸렸던 바지와 브리프가 발목까지 떨어졌다. 어느새 바짝 힘을 받은 유채의 물건이 태오의 통통한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마른 편인 팔다리에 비해 허벅지에는 제법 살이 있었다.

“다리 붙여요, 형.”

유채가 태오의 귓불을 입 안에 넣고 잘근거리면서 속삭였다. 발끝이 오므라들고 가슴이 간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태오는 대꾸도 제대로 못 하고 다리를 모았다.

빳빳하고 커다란 성기가 맞붙은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어 다리 사이를 갈랐다. 연한 살갗을 태워 버릴 것처럼 뜨거운 열감에 놀란 태오가 휘청거렸다. 유채는 태오의 등에 가슴팍을 붙이면서 두 팔에 그를 가둔 채 꽉 끌어안았다.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굵은 성기가 태오의 허벅지 사이를 오가면서 회음부를 비벼 댔다. 귀두에서 질금질금 흐른 투명한 쿠퍼액이 태오의 아랫도리를 적셨다. 찌걱거리는 마찰음이 점점 더 커졌다.

스튜디오 한구석의 화장실이었다. 뒷정리하느라 바깥 복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의 발걸음 소리가 생생했다. 그런데도 태오는 유채의 앞에서 벗은 하체를 내놓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를 못 견딜 만큼 달아오르게 했다. 태오는 입을 벌리고 가쁜 숨을 할딱거렸다. 유채의 혀끝이 그의 눈가를 길게 핥았다. 그제야 눈꼬리에 눈물이 조금 맺혀 있었던 것을 알았다.

“왜 그런 일로 화나고 그래요. 왜 그랬어요, 어?”

“하, 흐으, 으읏.”

“어떡해요, 형……. 너무 좋아.”

유채의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졌다. 누군가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칸막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챌 것 같았다. 아무리 태오가 아랫입술을 깨물어 신음을 삼켜도, 제 엉덩이에 유채의 아랫배가 부딪칠 때마다 요란하게 철퍽대는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심장이 떨렸다.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올랐다.

“흣, 형……!”

유채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태오의 허벅지 사이는 갑작스레 쏟아진 희끄무레한 체액으로 흠뻑 젖었다. 비릿한 내음을 풍기면서 다리 안쪽을 타고 흐르는 타인의 정액이 뜨겁고 미끈거렸다. 태오가 후들거리는 허벅지에 간신히 힘을 주면서 버티는 동안, 유채는 태오의 다리 안쪽을 더듬어 제가 뿜어낸 백탁액을 그러모았다. 이내 동그란 엉덩이가 커다란 손에 꽉 잡혀 양쪽으로 벌어졌다. 서늘한 공기가 구멍에 닿았다. 유채의 긴 손가락이 그것을 더듬으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꽉 다물어진 구멍 위에 따끈하고 질척한 액체가 치덕치덕 발렸다.

“지금, 하려고? 여기서?”

고개를 비틀어 유채를 바라보는 태오의 눈가가 발그스름했다. 유채는 고개를 숙여서 그의 따끈한 눈 위에 입술을 내렸다. 혀끝으로 눈꺼풀을 간질거릴 때마다 안쪽의 눈동자가 움찔거렸다. 태오의 온몸에서 미미한 떨림이 느껴질 때마다 가학심이 들었다. 통째로 잡아먹고 싶었다. 뱃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응……. 안 돼요?”

그러나 태오를 한입에 삼켜 버리는 대신, 유채는 눈꼬리를 축 내리고 말끝을 늘어뜨렸다. 유채가 그럴 때면 태오의 표정에는 늘 망설이는 기색이 스쳤다.

머뭇거리던 태오가 석연찮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끝까지는 못 해. 집에 갈 때 운전도 해야 하고.”

“그럼 손가락만요…… 응?”

유채는 태오의 몸을 제 쪽으로 돌려 당겨 안으면서 졸랐다. 태오가 길게 내쉰 한숨이 유채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알았어. 손가락만이야.”

“응, 응.”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은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이는 단정한 얼굴이 사무치게 좋았다. 태오는 언제나 유채에게 져 주었다.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제 편일 것 같았다. 그때마다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솟았다.

“형, 좋아해……. 사랑해요.”

가슴속을 덮쳐 오는 감정이 해일 같았다. 유채가 태어나서 단 하나 가져 본 제 것이었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가가 뜨거워졌을 때, 태오가 부은 눈을 치켜뜨면서 말했다.

“어, 나도. 그래서…….”

짤막하게 할딱인 끝에,

“아파트에 가둬 놓고 나만 보게 하고 싶어. 왜 온 국민이 다 보게 벗고 난리야, 씨발…….”

하고 욕했다. 유채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이상한 얼굴이 되어서, 태오의 눈가와 뺨과 입술에 정신없이 키스를 쏟아부었다.

왼손으로 태오의 다리 하나를 들어 무릎 아래의 오금을 받쳤다. 그의 다리 사이가 순식간에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모아 입구 안쪽으로 단번에 찔러 넣었다.

“하, 으으으…….”

좁은 내벽이 빠듯하게 벌어지면서 유채의 손가락을 오물거리고 물었다. 유채가 길게 뻗은 태오의 목선을 할짝거리면서 말했다.

“형이 그러라면 그럴게요.”

“씨발, 진짜……. 왜 하필이면 아이돌이야. 콘서트 때마다 벗을 거 아냐.”

“나 아이돌인 거 싫어요?”

“다른 직업도 많잖아. 의사라든가, 변호사라든가…….”

“형, 욕심쟁이 학부모였어요?”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네 아빠야?”

“그럼 큰일 나죠.”

농담 같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 유채의 손가락들은 태오의 엉덩이 골에 빠듯하게 들어가 내벽을 자극해 댔다. 태오는 유채의 팔 안에 갇혀서 진저리를 치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내 말은……. 사람들 앞에 너 안 내놔도 되는 거.”

“의사도 변호사도 다 사람 만나는데.”

“그럼 그냥 집에 들어앉든가.”

“응……. 형이 싫으면 다 그만둘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흐윽, 마…….”

그 순간, 기다란 손가락이 하나 더 내벽 안쪽에 쑤셔 박혔다. 낮게 울리던 태오의 숨소리가 조금 더 거칠어졌다.

“왜요? 저 내놓는 거 싫다면서요.”

“유채야, 아무리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거 못 하는 게 더 싫지.”

“그럼 나 사람들 앞에 나가도 돼요?”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 내가 다 하게 해 줄게…….”

유채는 파드득 떨리는 태오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울고 싶은 기분인데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유채는 소리 내 웃어 버리는 대신, 비어 있는 한 손으로 태오의 뺨을 쥐었다. 그의 고개를 들게 하고 입술을 삼켰다.

아까보다 조금 더 길고 깊은 키스가 지나간 입 안에 달콤한 향이 남았다. 태오의 붉은 입술이 타액에 젖어 반짝거렸다.

시선을 눈치챈 태오도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눈길 끝에서 그가 흐릿하게 웃었다.

“너, 머리 색 다르니까 새롭네.”

“응?”

단정하게 뒤로 넘겼던 유채의 앞머리가 어느새 쏟아져 이마에 드리워졌다. 가슴팍을 덮은 유채의 몸 아래에서 흔들거리면서, 태오는 그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바람피우는 거 같네…….”

입 안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했다. 그러나 유채의 움직임을 딱 멈추기에는 충분히 컸다.

“……우리 사귀어요?”

“응?”

태오가 큰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이내 그의 입가에 잔물결 같은 웃음이 졌다.

“그럼 안 사귀어?”

수십 번 고백했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응, 나도. 그뿐이었다.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혹은 사귀자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었지만, 조금은 상관있었다. 유채는 서러운 눈으로 태오를 바라보면서 웅얼거렸다.

“형이 그런 말 한 번도 안 했잖아요.”

“허어……. 유채야.”

금세 미간을 구긴 태오가 혀를 찼다. 유채가 시무룩한 얼굴로 태오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 1월 1일부터 사귀었잖아.”

“응……?”

“자기만 해 놓고 안 사귀려고 했어? 그럼 우리가 뭐, 섹파야? 유채야.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웠어? 잤으면 서로 책임져야 하는 거야. 나 보수적이야.”

“그럼 형…… 내 애인이에요?”

“당연한 소리를 왜…… 아…… 흐으윽, 으읏!”

여전히 태오의 아래에 박혀 있던 손가락들의 움직임이 와락 거칠어졌다. 유채는 검지와 중지로 그의 내벽을 늘리듯 틈을 벌리면서 가위질을 하듯 움직여 댔다. 뜨겁고 축축한 안쪽 벽이 긴 손가락을 빈틈없이 집어삼켰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놀란 태오가 숨을 몰아쉬면서 자꾸만 무너져 내렸다. 유채는 그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유채의 아랫도리도 다시 힘을 받아 뻣뻣하게 일어선 채 투명한 액을 흘리고 있었다. 허리 아래가 간지러우면서도 뻐근한 감각이 휘몰아쳐 정신이 없었다. 당장 태오를 엎어 놓고 손가락 대신 이것을 구멍에 넣고 박아 대고 싶었다. 그러나 태오를 끌어안은 채 마냥 뺨을 바르작거리고 싶기만 한 마음이 동시에 찾아와 혼란스러웠다. 유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입술만 잘근 씹었다.

“유채야. 그만, 그만해.”

그때, 내벽 깊은 곳의 어딘가가 강하게 눌렸는지 태오가 몸서리치며 자지러졌다. 할딱거리면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애원에 가까웠다. 그러나 유채는 조금 전의 그곳을 몇 번 더 빠르게 누르면서 안쪽을 쑤셨다. 태오의 다리가 풀리고 몸이 쏟아질수록 그를 몰아붙이고 싶었다.

“하으, 으윽……!”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던 태오의 것이 꺼덕거렸다. 동시에 태오의 허리가 뒤로 꺾이면서, 그의 허벅지 사이가 왈칵 젖었다. 유채가 다급히 받아 낸 그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쏟아 낸 정액이 벌어진 다리 아래로 툭툭 떨어져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알싸하고 시큼한 냄새가 태오의 살갗 내에 섞여 들었다.

“흐읏…….”

태오가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유채는 그의 엉덩이 골에서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뺐다. 살갗이 비벼지고 체액에 부딪히면서 찌걱거리는 작은 소음이 공간에 울려 퍼졌다. 내내 들고 있던 태오의 왼 다리를 내려놓고 와락 끌어안았다.

태오가 유채의 가슴팍으로 이마를 툭 떨어뜨렸다. 가쁘게 호흡을 내뱉느라 어깨가 들썩거렸다.

유채가 심란한 척 말했다.

“형…… 손가락으로 가면 어떡해요, 질투 나게.”

“뭐야?”

태오는 유채에게 기댔던 고개를 퍼뜩 들고 눈썹을 구겼다. 시선이 마주쳤다. 유채는 말간 뺨이 달아오른 채 상쾌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마주한 태오의 표정이 묘해졌다.

“질투 나니까 제대로 하게 해 줘요. 이번에는 내 거로.”

“……하.”

유채는 마음대로 떼를 썼다. 태오는 유채가 아무리 멋대로 졸라도, 결국은 대부분 들어주었다. 그러나 들어주지 않아도 좋았다.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되었다.

태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손을 들어 유채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눈빛이 단호했다.

“웃기지 마. 나 지금 다리 후들거려. 여기서 더 하면 우리 집에 못 가. 운전도 못 하는 게?”

“면허 딸래…….”

“그래, 그래. 내일 운전 학원 등록해 줄 테니까 오늘은 일단 집에 가자. 어?”

“으응. 잠깐만, 형 몸 좀 닦고요.”

“어…….”

“다리 벌려요.”

“……그런 말은 좀 평범하게 해.”

“다리 벌리는 걸 다리 벌린다고 하지 뭐라고 더 평범하게 해요?”

“유채야, 입 다물자.”

“응.”

유채를 타박하면서도 태오의 입꼬리가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어이가 없다고 투덜거리더니 이내 피식 웃고 마는 눈매가 깨끗했다. 볼록해진 뺨에 길게 보조개가 팼다. 태오의 웃음은 언제나 밝고 단정해서, 바라보는 유채조차 기분이 좋았다. 그 미소를 떠올리면 마음 안쪽까지 느릿하게 열이 올랐다.

태오와 함께했던 그 무렵의 기억은 언제나 투명하고 환했다. 몇 번의 계절을 반복해서 함께 보내도록 변하지 않았다.

***

며칠 뒤, 유채가 출연했던 회차가 방영되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드라마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태오의 곁에, 거대한 팝콘 통을 끌어안은 유채가 다가와 바짝 붙었다.

“유채야, 그거 뭐야?”

“응? 캐러멜 팝콘이요.”

“어……. 그래 보이네.”

팝콘 종류를 묻는 게 아니라 영화관에서나 파는 팝콘 통이 어디서 났냐는 얘기였지만, 태오는 피식 웃으면서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 보는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나 보다. 유채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형도 먹어요.”

“아냐, 양치했어. 먹고 싶긴 한데.”

“아, 벌써요? 엄청 맛있는데…….”

달큼한 냄새가 훅 끼쳐서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그래도 양치를 두 번 하기는 영 귀찮아서, 태오는 캐러멜 팝콘 대신 유채의 통통한 입술을 쪽, 빨았다.

“응, 진짜 맛있네.”

“응…….”

태오가 만족스럽게 웃고 유채가 속눈썹을 나풀거리면서 눈을 내리까는 동안,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하민 선배님.]

화면 안에서 슈트를 갖춰 입고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유채가 허리를 숙였다. 태오는 ‘오.’ 하면서 눈을 크게 떴고, 유채는 팝콘을 와작거리면서 부끄러운 듯 웃었다.

장면이 조금 더 이어지다가 유채가 물벼락을 맞았다. 젖은 셔츠가 달라붙어 가슴팍이 훤히 비쳐 보이다가, 아예 맨몸이 드러나는 모습에 태오가 미간을 좁혔다. 커다란 화면으로 보니 예상보다 더 적나라했다.

유채가 검지를 뻗어 태오의 미간에 세로로 진 주름을 꾹꾹 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턱을 괴면서 소곤소곤 물었다.

“아직도 마음에 안 들어요?”

[나도 벗어? 그러면 돼?]

TV에서는 태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후, 이내 장면이 전환되었다. 태오는 한숨을 삼키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일인데 뭐, 어쩔 수 없지. 나도 다른 영화 찍으면 언젠가 벗을 텐데.”

“응?”

“키스 신도 찍고.”

“으응?”

“베드 신도 찍고.”

“…….”

유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태오는 통통하게 부으면서 앞으로 튀어나오는 유채의 입술에 팝콘을 물려 주면서 씩 웃었다.

“일이니까 잘 참을 수 있지?”

“참나…….”

투덜거리는 유채의 뺨을 토닥이면서 휴대폰을 켰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연예 뉴스란에 익숙한 이름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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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예요? 왜 형한테 벗으래?”

“오…….”

클릭 수를 유도하기 위해서 사실을 담은 단어들을 적당히 재조합해 자극적인 타이틀을 내보내는 것은 흔한 일이다. 기사의 어그로에 익숙하지 않은 유채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분개했지만, 태오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훑으면서 기분이 한결 풀렸다.

조금 전까지도 화면을 보면서 굳이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찍을 필요가 있었냐는 생각에 임 감독을 향해 험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 방영이 끝나기도 전에 쏟아진 반응을 보니 가치가 있었다. 그 와중에 마지막 기사의 제목은 묘하게 사실이었다.

“제목만 보면 너랑 나랑 커플인 줄 알겠다.”

“으응…….”

엄지를 슥슥 움직여서 화면을 내리고 있는데 유채의 반응이 석연치 않았다. 왜? 입 모양으로 물었더니, 유채가 태오의 배에 얼굴을 묻으면서 웅얼거렸다.

“그냥, 윤태오 버스 타는 기분이 좀 들어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감독님이 너 마음에 들어서 쓰신 건데.”

“그런 거 같아서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기사가 형하고 얽혀서 뜨니까…….”

“나하고 얽히는 게 싫어? 서운하게.”

“아이, 그런 게 아니고요.”

유채는 태오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은 채, 그를 올려다보면서 눈을 길게 접고 생글 웃었다.

“형하고 친하니까 주목해 주는 거 같아서 괜히 제 발 저렸어요.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텐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태오가 제게 달라붙은 유채를 떼어 내면서 정색했다.

“너랑 내가 왜 친한 사이야. 사귀는 사이지.”

“응. 맞아, 맞아.”

유채가 키득거리면서 태오의 옆구리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유채의 생각을 알고 나니 며칠 전에 섭외가 들어온 예능에 출연하겠다고 연락하기가 망설여졌다. 한창 인기 있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기획한 ‘닮은 꼴 특집’이었는데, 태오는 래디언스의 신우주와 동반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예능 경험이 없는 우주를 혼자 내보내긴 어려우니 게스트로 래디언스의 다른 멤버들을 두어 명 더 부를 계획이라고 들었다. 태오는 대체로 예능 출연을 하지 않지만, 유채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생각해 보겠다고 보류해 둔 상태였다.

드라마가 끝난 후 유채에게 얘기를 꺼내 보았더니, 예상대로 그는 눈썹을 모으면서 묘한 표정을 했다.

“형 예능 출연 싫어하잖아요.”

“뭐,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야…….”

“저 때문에 생각해 보겠다고 한 거예요?”

유채가 아니라면 고민할 여지도 없이 거절했을 건이긴 했다. 데뷔한 지 제법 오래되었지만 예능에 출연했던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신비주의 전략이라기보다는, 태오 자신이 즐기지 않았다.

“그 이유가 없지는 않지…….”

태오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유채가 눈꼬리를 접어 내린 채 생글거리면서 태오의 목덜미에 뺨을 묻었다.

“고마워요, 형. 근데 형 싫은 건 하지 마요.”

“어어……. 흐, 읏…….”

그리고 이번에는 또 뭐에 꽂혔는지, 말캉한 혀끝이 태오의 목선을 할짝거렸다. 이런 얘기를 하면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걱정했는데 자존심 대신 다른 걸 건드려 버린 모양이었다.

***

태오는 결국 ‘닮은 꼴 특집’ 출연을 거절했다. PD는 태오가 승낙하리라고 생각했는지 무척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결국 신우주를 닮은 꼴 게스트 대신 일일 서브 MC로 섭외했다. 애초에 얘기했던 대로 다른 래디언스 멤버들도 두 명 정도 더 보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회사에서는 우주와 함께 케빈과 유채를 내보냈다. 잠깐 만나 보았을 뿐이지만 케빈은 어디에 내놔도 주눅 드는 법이 없어 보였다. 한국말이 어눌한 것과 솔직하고 재미있는 캐릭터가 겹쳐서 주목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채의 경우에는, 태오의 드라마에 깜짝 출연해서 ‘탕비실 상탈남’으로 화제가 되었던 덕을 보았다. 한 컷 나왔을 뿐인데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다.

구독용 계정으로 가끔 들여다보는 SNS의 피드에도 유채의 사진이 하루에 몇 번씩 떴다. 게다가 태오와 같은 화면에 잡혔기 때문에 그의 팬카페에도 게시물이 심심찮게 올라왔는데, 몇몇 팬들이 기사 제목을 인용하면서 태오와 유채를 엮는 댓글을 달았다가 날 선 지적을 받고 삭제하곤 했다. 진실은 언제나 박해받는 법이야. 생각하면서 태오는 혼자 웃었다.

래디언스의 촬영분이 방송되던 날, 유채는 연습 일정이 겹쳐 버린 탓에 태오와 함께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못했다. 멤버들과 밤늦게까지 연습하다가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다 같이 볼 예정이라고 했다. 태오는 조금 샐쭉해졌지만, 어금니를 꽉 물고 유채를 웃으면서 보내 주었다. 실시간으로 속이 좁아지고 있어서 큰일이었다.

[……Let us shine! 안녕하세요, 래디언스입니다!]

화면 속에서 긴 소파에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늘의 서브 MC라면서 그들을 소개하는 MC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상대로, 우주를 소개할 때는 태오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았다.

[……우주 군은 영화배우 윤태오 씨와 닮은 꼴로 유명하시죠. 윤태오 씨가 만약 이 자리에 우주 군과 한 팀으로 참석하셔서 다른 팀과 닮은 꼴 순위를 겨루었다면 어땠을까요. 몇 위 예상하시나요?]

질문이 게스트들에게 돌아갔다. 저마다 웅성거리면서 우주를 직접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태오와 닮았다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정작 당사자인 우주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새침한 얼굴로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래디언스의 생각은 어때요? 유채 군은 얼마 전에 윤태오 씨와 드라마도 하셨잖아요. 직접 만나 보시니까 어때요?]

유채가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잘생겼습니다.]

[아,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고요…….]

[좋았습니다.]

무뚝뚝하게 툭 던진 유채의 대꾸에 게스트들의 웃음이 터졌다. 노련한 MC는 당황한 척 어깨를 으쓱하면서,

[하긴, 그 윤태오 씨를 코앞에서 직접 만났는데 어떻게 안 좋았겠어요. 나도 만나 보고 싶다.]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유채는 별다른 표정 없이 ‘예, 뭐.’ 하고 덤덤한 대답만 했다.

“유채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야지.”

신인 아이돌이 태도가 왜 저러냐, 너무 건방진 거 아니냐, 하는 인터넷 악플이 순식간에 달릴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태오는 초조한 얼굴로, 유채가 집을 나서기 전에 제 품에 안겨 주고 간 팝콘 통에서 캐러멜 팝콘 하나를 꺼내 와작 씹었다. 유채의 입술에 남아 있었던 맛처럼 달착지근하진 않았다.

TV에서는 MC가 유채에게서 반응을 이끌어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우주의 같은 그룹 멤버로서 보기에 태오와 우주가 얼마나 닮은 것 같냐는 질문이 조금 더 직설적으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제대로 대답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태오는 팝콘 하나를 집어 들고 화면을 향해 던졌다. 캐러멜 팝콘이 정확히 유채의 입술 부근에 맞고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글쎄요.]

“유채야…….”

처음으로 예능에 내보냈는데 이렇게 속 터지게 찍고 왔을 줄은 몰랐다. 태오는 또다시 팝콘 한 움큼을 유채에게 던지려다가, 팝콘 통을 아예 침대 아래로 치워 버렸다. 이러다가 침실 바닥이 팝콘으로 뒤덮일 것 같았다.

“엄청 닮았다고 해야지. 그래야 한 번이라도 더 관심받을 거 아냐…….”

태오가 투덜거리면서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유채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엔 별로 안 닮았는데요. 태오 혀…… 선배님은 얼굴에서 빛이 나요.]

[하하, 유채 군이 윤태오 씨에게 푹 빠졌나보네요!]

[유채 군, 옆에서 우주 군이 서운해하잖아요.]

[그러게요. 우주 군도 얼마나 잘생겼는데!]

MC는 물론, 게스트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떠들어 댔다. 그러자 유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진짜 빛이 나는데 어떡해요.]

그러더니 눈을 접고 씩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냐…….”

태오는 귓바퀴가 조금 뜨거워져서,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침대 아래에 던져 놓은 팝콘 통을 주워 들었다.

TV에서는 유채가 아직도 태오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표정에 활력이 돌아서인지, 스튜디오의 분위기도 초반보다 훨씬 더 화기애애해졌다. 태오는 그제야 마음이 놓여서, 느긋하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팝콘 하나를 꺼내 입 안에 쏙 넣었다.

“……맛있네.”

와작와작 소리가 왁자지껄한 TV 음향에 자연스럽게 섞여 침실 안에서 울려 퍼졌다.


★ K-POP TALK

[잡담] 래디언스 우주? 윤태오 닮긴 닮았다 ㅋㅋㅋ

지금 닮은 꼴 특집 어쩌고 해가지고 윤태오 닮은 아이돌 나오는데 겁나 닮았네 ㅋㅋㅋ 이목구비 존똑 ㅋㅋㅋ

[댓글(39)]

▶ 뭐래……. 망돌을 태오한테 비비냐;;; 시력 무슨일이야;;;

↳ 첫 댓부터 왜 이래

↳ ? 래디언스가 왜 망돌소리 듣지 이해안가네ㅋㅋㅋㅋㅋ;

↳↳ 2222 망돌은 아니지;;;; 망돌이 어케 더넥게에 출연함

↳↳↳ 아니 그니까 더넥게 출연한게 윤태오 버프잖아; 짭태오에 태오들마 엑스트라출연에

↳↳↳↳ 후려치기 쩌네;; 윤빠들 하여간 윤태오 얘기만 나오면 달려듬;

↳↳↳↳↳ 왜 케팝 카테까지 와서 발작해; 윤태오카테로 가

↳↳↳↳↳ ㅋㅋㅋㅋㅋ망돌무새임 고척못가면 다 망돌;;ㅋㅋㅋ

▶ 얘 걔잖아 짭태오

↳ 엌ㅋㅋㅋㅋㅋ 기억난닼ㅋㅋㅋㅋㅋ

↳↳ 응…… 닮긴 닮았드라……

▶ 얼굴만 예쁘고 무매력 아님? 얘보다 옆에 있는 노란머리가 귀엽네

↳ ㅇㅇ 성질더러워보임

▶ 노랑머리도 태오가 낫다네 ㅋㅋㅋㅋㅋㅋㅋ

↳ 짭태오 얼굴 구겨진다 ㅋㅋㅋㅋ

↳↳ 그래도 멤버 면 좀 살려주지;; 내가 다 무안함;;

↳↳↳ 뭐래 애가 웃자고 하는소리에 죽자고 달려들지좀 마라

↳↳↳↳ ㄴㄴ 쟤 진심인거가테

▶ 앜ㅋㅋㅋㅋㅋㅋ 쟤 이름 뭐냐ㅋㅋㅋㅋ 윤태오 빠돌이같은데ㅋㅋㅋㅋㅋㅋ

↳ 어 1절만 할줄 알았더니 2절하고 3절하고 지금 대체 몇절째ㅋㅋㅋㅋ

↳↳ ㅋㅋㅋㅋㅋ아니 심지어 존나 구체적이야ㅋㅋㅋ 얼핏보면 닮은 느낌도 드는데 웃는 얼굴이 완전 다르고 윤태오는 보조개가 매력적이랰ㅋㅋㅋㅋㅋ

↳↳↳ rgrg 어어어 윤태오보조개 존나유명하지... 근데 왜 무뜬금 윤태오찬양;;;;

↳↳↳↳ 윤태오 보조개 얘기 언제까지 할건데 그만해ㅋㅋㅋㅋㅋㅋㅋㅋ

↳↳↳↳↳ 엠씨 당황했다 ㅋㅋㅋㅋㅋ

↳↳↳↳↳↳ 윤태오가 진짜 좋았나봐 귀엽다ㅋㅋㅋ

↳ 걔 이름 한유채! 신인돌 래디언스 메인댄서!

↳↳ 메댄 우주임 걔는 걍 듣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망돌들 사이에 서열따지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그놈에 망돌타령 시바,,

▶ 노랑머리 윤태오랑 찍었다는 들마 뭐임?

↳ 요즘 하는 거잔아… 천생연분어쩌고

↳↳ 엥 그거맞음? 나 다챙겨봤는데 쟤 못 봤는데…

↳↳↳ 걔 아냐??? 탕비실 상탈남??????

↳↳↳↳ 헉 그 복근??? 아 머리색 달라서 못알아봄;;;

↳↳↳↳↳ 안 벗고 있어서 못알아본거 아니냐ㅋㅋㅋㅋㅋㅋ

↳↳↳↳↳↳ 성희롱 뭐야……

▶ 래디언스가 그룹이름임?

↳ 그럼 사람이름이겠냐?

↳↳ 왜그래 예명인 줄 알 수도 있지…

↳ 남의 돌 존중 좀;

↳↳ 헐 얘네 팬도있음? 망돌이라 아는 사람도 없는 줄 ㅋㅋㅋ

↳↳↳ 너도 알잖아 ㅅㅂ

↳↳↳ 망돌무새 다죽었으면;;;

↳↳↳↳ 싸우지들 마.. 그래 많이 닮았네 뭐

↳↳↳↳ 망돌은 아닌 듯.. 둥글게 얘기하자.. 망돌은,, 내 최애가 망돌이구,, 아씨 눈물나네..

↳↳↳↳↳ 야 왜 자폭하고그래 울지마ㅋㅋㅋㅋㅋㅋㅋ 너 최애 누군데

↳↳↳↳↳↳ 말해도 너 몰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아앗... 미안;;;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잘생겼다ㅋㅋㅋ

↳ 누구? 짭태오?

↳↳ 아니 탕비실 상탈남

↳↳↳ 윗댓 화나겠다;; 짭태오도 잘생겼는데 왜그래…

↳↳↳↳ 너때매 더빡쳐

▶ 우주유채,, 관계성 쩐다,, 우유즈 어떰?

↳ 이게 어딜봐서 우주유채 관계성……?

↳↳ 존나 바퀴가튼 홈충;; 하다하다 걔들을 갖다붙이냐;;

↳↳↳ 걔들 관계성은 둘다 남자라는 거밖에 없어요…

↳↳↳↳ 왜 구박해 창작은 자유지ㅋㅋㅋㅋㅋ 우유즈 이름 이쁘네ㅋㅋㅋㅋㅋㅋㅋ

↳↳ 차라리 윤태오랑 관계성있겠다 유태즈 어떰?

↳↳↳ 그게 모냐 씨바,, 너도꺼져;;;

↳↳↳↳ 아무데나 즈 붙이면 조합명 되는거 아니에요;;;;

↳↳↳↳↳ 윤태오 글케 못잃냐... 태오 좀 놔줘라 시바;;;;;


유채의 드라마 출연과 예능 효과가 겹치면서 반응이 확실히 왔다. 특히 예능 직후에는 기사가 쏟아졌는데, 태오와 우주를 엮어서 홍보해 보려던 프로그램 PD의 의도와는 달리 유채의 이름이 대부분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연예] 윤태오♥에 반한 ‘래디언스’ 유채… “윤태오 얼굴에서 빛이 나”

[한국연예닷컴 왕해나 기자] 신인 보이그룹 래디언스 유채(20·본명 한유채)가 TvL 드라마 ‘천생연분을 만들어 드립니다’에 함께 출연했던 탤런트 윤태오(25)에 대해 입을 열었다.

28일 방송된 JTAB 예능 프로그램 ‘한시운의 the next guest’에는 아이돌 그룹 래디언스의 우주, 케빈, 유채가 스페셜 MC로 자리를 함께했다. 유채는 얼마 전 그가 ‘탕비실 상탈남’으로 특별 출연 해 화제가 되었던 ‘천생연분’에 대해 언급하면서 윤태오에 대해, “얼굴에서 빛이 난다”, “볼수록 잘생겨서 눈을 못 뗐다”, “얼굴만 봐도 행복해진다”, “함께 촬영할 수 있어서 기뻤다… 태어나길 잘한 것 같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본인 대신 윤태오가 복근을 노출했으면 어땠을 것 같냐는 MC 한시운의 짓궂은 질문에는, “윤태오 선배의 몸을 함부로 보여 줄 수 없다”며 정색해 웃음을 선사했다. 그러나 한시운이 “하긴, 혹시 식스팩이 없으면 윤태오 씨가 난처하시지 않겠냐”고 덧붙이자, “그럴 리가 없다. 초콜릿 복근이 있다는 데 손목도 걸 수 있다”고 단호하게 대답하며 윤태오에 대한 동경을 듬뿍 드러냈다. 왕해나 기자 [email protected]

[댓글]

▶dowo****

극찬이라고 쓰고 주접이라고 읽으면 되는 거임?ㅋㅋㅋㅋㅋㅋㅋ

(좋아요 332 싫어요 19)

↳ ㅅㅂ손목을 왜 걸어ㅋㅋㅋㅋㅋㅋ 손목 애껴라 유채야 초콜릿없으면 어칼라그래ㅋㅋㅋㅋㅋ

↳ 귀여워ㅋㅋㅋㅋㅋㅋㅋ얼굴도 유채꽃처럼 생겼다ㅋㅋㅋㅋㅋㅋ

↳↳ ㅇㄱㄹㅇ이름 잘 어울림ㅋㅋㅋㅋ 실명인가? 이쁘다

↳↳↳ 둘이 투탑으로 드라마 찍었음 좋겠다ㅋㅋㅋㅋ 어울림

↳↳↳↳ 윤태오가 망돌이랑 들마찍을 급은 아니지;;;

▶ritt****

이거 봤는데 재밌었음ㅋ 유채 얼굴이 젤 재밌었음ㅋㅋㅋ

(좋아요 229 싫어요 3)

↳ 2222 니 얼굴에서도 빛이 나 유채야…

↳↳ 3333 니 얼굴만 봐도 행복해져 유채야ㅋㅋㅋㅋㅋ

↳↳↳ 444 ㅁㅈㅁㅈㅋㅋㅋㅋㅋ

▶sonb****

케빈? 걔도 귀엽드라ㅋㅋ 윤태오 자꾸 형이라고 했다가 유채한테 혼나는거 봄?ㅋㅋㅋ

(좋아요 431 싫어요 23)

↳ 봄봄ㅋㅋㅋㅋ 유채가 선배님이라고 하라고 정색빠니까 케빈이보다 나이 많으면 형 아니야? 하는데 넘 해맑음ㅋㅋㅋㅋㅋ

↳ 유채 지도 자꾸 혀…까지 튀어나왔다가 수습하드만ㅋㅋ

↳↳ 유채는 윤태오랑 직접 아는 사이고 케빈은 아니니까 안되지

↳↳↳ 머래 누가 보면 유채랑 윤태오 절친인 줄 알겠네 걔네도 딱한번 몇시간 본 사이거든여

↳↳↳↳ 유채랑 윤태오가 딱한번 본 사인지 죽고 못사는 사이인지 니가 어케 앎?

↳↳↳↳↳ 공식 기사에 이런 댓좀 달지 마…

▶hann****

가운데 앉앗던 애는 입도 뻥긋 안하더라…ㅋㅋㅋ 윤태오 닮았다고 띄워주는데 반응도 없음

(좋아요 131 싫어요 35)

↳ ㅇㅇ 걔좀 싸하드라

↳↳ 지 이름보다 짭태오로 더 유명한데 싫을만도 함…

↳↳↳ 짭태오로 떴으면서 무슨 소리야ㅋㅋ 지가 윤태오 아니었음 어케 더넥게에 나옴

↳↳↳↳ 짭태오가 언제 떴음?

↳↳↳↳↳ 좀… 넘어가라ㅅㅂ…


그날 밤은 기사뿐만 아니라 온갖 커뮤니티와 SNS가 래디언스와 유채의 이름으로 뒤덮였다. 래디언스의 데뷔 당시, 홍보 팀장이 갖은 애를 다 써서 밀어붙였어도 만들어 내지 못했던 성과였다.

한 해에만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돌 그룹이 런칭된다. 짧게는 몇 달이지만, 길게는 십수 년까지 혹독한 연습생 생활을 견뎌 낸 끝에 데뷔한 아이돌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버리는 것은 그들의 실력이나 외모가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결국은 노출의 문제였고, 그래서 대형 기획사에서 자본을 쏟아부어 밀어주는 그룹의 경우 확실히 유리한 면이 있었다.

태오의 전 소속사이자 유채의 현 소속사인 AMJ 엔터테인먼트는 아이돌 명가로 알려진 대형사였으니 데뷔 당시에도 래디언스의 홍보가 부족하진 않았다. 다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모든 마케팅이 다른 멤버들을 배제한 채 우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우주가 센터라서 그렇다기에는, 애초에 센터 자리조차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작스레 차지한 것이었다.

그래도 결과가 좋았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관심의 대상이었던 우주가 문제였다. 우주는 시종일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고, 실력이 없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매사에 대충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짜인 대형이 제대로 빛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결국 래디언스는 몇 차례의 태도 논란 이후 활동을 흐지부지 접어야 했다.

AMJ는 래디언스 외에도 쥔 패가 많았다. 반응이 좋지 않은 그룹에 목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래디언스는 결국 후속 활동을 하지 못하고 반년이 넘는 공백기에 들어갔는데, 우주만 혼자서 예능에 간간이 출연하거나 드라마의 조역으로 꽂혔다. ‘리틀 태오’라는 별명이 그나마 인지도가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유채를 비롯한 나머지 멤버들은 이렇게 묻혀 버리나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채의 연이은 드라마와 예능 출연은 기회가 좋았다. 소속사에서 특별히 애쓰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 화제를 모으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AMJ에서도 처음부터 래디언스를 방치하려는 생각은 없었을 테니,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본격적으로 그룹을 밀어줄 것이다.

‘이젠 좀 반응이 있겠네.’

한참 더 연예 뉴스와 커뮤니티 반응을 둘러본 후, 태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

래디언스의 행보는 태오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유채와 케빈의 캐릭터를 재미있게 본 스포츠 예능 PD가 그들을 둘만 따로 게스트로 불렀다. 유채는 몸으로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잘했고, 케빈도 크게 뒤지지 않아서 둘 다 방송 내내 날아다녔다. 그 후로 둘은 다른 스포츠 예능의 고정 멤버로 투입되었다.

케빈은 어눌한 한국어로 대선배들에게 밉지 않은 반말을 툭툭 던지면서 귀엽게 굴어서 인기를 끌었다. 유채의 경우에는, 줄곧 입을 다물고 시키는 일만 지나치게 열심히 했다. 태오는 유채의 예능을 모니터링할 때마다 그 표정 없는 반응에 발을 굴렀지만, 유채가 끼면 확실히 팀전력이 올라가기 때문에 매번 벌어졌던 유채 쟁탈전이 프로그램의 인기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 태오 이야기만 꺼내면 유채의 표정이 확 달라지는 게 여러 번 화면에 잡혔다. 평상시의 얼음 같은 표정과 대비되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그런 장면이 전파를 탄 날이면 태오의 팬카페에도 유채 앓이를 하는 게시물이 올라오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누구도 래디언스와 태오의 관계를 얘기할 때 ‘리틀 태오’를 들먹이지 않았다. 대신, 어느새 유채가 태오의 연관 검색어가 되어 있었다.

얼마 뒤에는 각각 메인과 서브 보컬인 라윤과 이신이 보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갖은 고생 끝에 라윤이 우승을 했고, 이신의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그즈음, 래디언스의 데뷔곡이 차트에서 역주행을 했다. 시작은 누군가 SNS에 유채의 상반신 노출 움짤 타래를 올리면서부터였다. 태오의 드라마에서 첫 노출을 한 이후, 스포츠 예능에서는 그 부분을 셀링 포인트로 잡았는지 툭하면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 내서 유채의 복근을 노출시켰다. 유채가 합류한 이후 프로그램에는 부쩍 수영장 촬영이 늘었다.

움짤 타래가 수없이 리트윗되면서 SNS의 실시간 랭크에까지 오르자 유채의 팬이었던 게시자는 타래의 끝에 슬그머니 링크를 하나 달았다. 데뷔 활동 당시 유채의 세로 직캠을 모은 Y튜브 영상이었는데, 며칠 만에 조회 수 480만을 찍었다.

래디언스의 데뷔곡은 거의 대부분의 음원 차트에 재진입했다. 몇몇 주요 차트에서는 짧게나마 1, 2위에도 올랐다. 유채는 갑작스럽게 쏟아진 관심에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 무렵부터 태오는 유채의 예능 촬영장에 커피 차를 보내고 싶은 유혹과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태오의 이름으로 보내기에는 너무 눈길을 끌 것 같았고, 그렇다고 팬 이름으로 보내자니 래디언스는 아직 팬클럽도 없었다.

“빨리 팬클럽 창단했으면 좋겠다…….”

어느 날, 소파 위에 앉은 태오가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유채의 뺨을 조물거리다가 무심코 툭, 말했다. 태오는 제가 한 말에 움찔해서 유채의 눈치를 봤는데, 반쯤 눈을 뜨다 말고 졸고 있던 유채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우리 팬클럽이요?”

“아……. 그야 당연히 곧 생기겠지만.”

태오가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러자 유채가 눈을 깜빡거리면서 태오를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활짝 웃었다.

“왜요? 생기면 형 가입하려고요?”

“……응?”

“가입하면 나 아이디 알려 줘야 돼요. 몰래 활동하지 말고.”

“내가 무슨 활동을 해…….”

“할 거면서.”

“음.”

“아니야?”

“맞지만…….”

유채가 키득거리면서 태오를 답삭 끌어안았다. 눈가와 뺨에 쏟아지는 키스가 정신없었다. 태오는 몰래 한숨을 쉬면서, 커피 차를 익명의 팬인 척 보내도 유채가 금방 눈치챌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무렵, 기약 없이 미뤄졌던 래디언스의 정규 1집 일정이 확정되었다.

***

1집 앨범의 콘셉트 회의가 있기 전날, 태오는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유채를 억지로 숙소에 보냈다. 전에는 활동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최근에 생긴 스케줄도 개별 활동 위주였기 때문에 큰 상관이 없었지만, 팀 활동을 시작한 뒤에도 유채 혼자서 태오의 아파트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매니저들의 눈은 곧 회사의 눈인 데다, 멤버들도 이제는 탐탁지 않게 여길지 몰랐다.

“형들이랑 라윤이 그런 생각 안 해요.”

유채가 태오의 허리를 감은 팔을 풀지 않은 채 툴툴거렸다. 태오는 검지로 유채의 이마를 슬쩍 밀었다.

“그럼 우주는?”

“걔야 뭐…….”

“한 명이라도 싫어하면 안 되는 거야. 팀워크잖아.”

“걔는 내가 뭘 해도 싫어할걸요.”

“왜? 너 좋아한다며.”

유채가 우주의 고백을 거절한 후 둘 사이가 급격히 얼어붙었다는 듯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태오의 입에서, 빈정거리는 소리가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아, 형! 그만 놀려요!”

태오는 말해 놓고 제풀에 더 놀랐다. 유채가 장난으로 받아들인 기색이라 다행이었다. 태오는 붉어진 귓불을 만지작거리면서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 올렸다. 뺨에 길게 팬 보조개가 파르르 떨렸다.

표정을 겨우 수습한 태오는 유채의 손목을 잡아끌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유채는 줄곧 투덜거렸지만 결국 태오의 차에 타는 수밖에 없었다.

유채를 숙소에 데려다주고 난 뒤 혼자서 집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사람의 기척이 없는 넓은 아파트가 어색했다. 태오는 서먹한 얼굴로 서서 유채와 함께 사용하는 침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예전에 유채가 사용했던 게스트 룸으로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멀쩡한 내 침대를 두고 이게 웬 청승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

콘셉트 회의가 끝난 후 유채는 상기된 표정으로 태오의 아파트를 찾았다. 24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온 유채를 바라보면서 태오는 기가 막힌 척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아이돌이라고 꼭 합숙을 해야만 할까?’ 하는 유혹이 이성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당분간 숙소에서 지내랬잖아. 휴일에만 돌아오라니까.”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나절에야 잠들었기 때문에 이제야 일어난 터였다. 태오는 잠긴 목을 큼큼 가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유채는 그 타박을 듣는 둥 마는 둥, 태오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그의 목덜미에 뺨을 기댔다.

“응, 잠깐 얘기만 하려고 온 거예요. 곧 숙소로 갈게요.”

“아…….”

‘자고 가려고 온 거 아니었어?’라는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태오는 입꼬리에 힘을 꽉 주어 잡아당기면서 유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무슨 얘기? 콘셉트 회의에서 좋은 얘기 나왔어?”

“응, 그게 있잖아요.”

유채는 태오의 손을 잡고 거실 소파로 데려가더니 끄트머리에 앉은 태오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 모습이 십 년을 함께 산 부부처럼 자연스러워서 태오는 유채에게 손이 잡힌 채로 슬쩍 웃었다.

들뜬 얼굴로 태오를 올려다보는 유채의 입매가 곡선이었다. 거실의 전면 창으로 쏟아지는 오후 햇볕이 옅은 눈동자에 닿아 투명하게 빛났다. 태오는 곧 숙소로 돌아가겠다는 유채의 말에 내심 섭섭했던 것도 잊고 유채와 눈을 맞췄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태오는 아무래도 유채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일은 삼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얼굴이 화면에 잡힌다면 누구에게라도 의심을 받을 것 같았다.

“왜, 뭔데?”

자꾸만 끝이 처지면서 둥글게 휘어지려는 눈매를 바로잡으면서 물었다. 유채는 수줍은 듯한 얼굴로 배시시 웃더니, 금세 휙 일어나서 태오의 뺨을 쥐고 입술을 쪽쪽 눌렀다. 유채는 어린 새가 부리를 쪼는 것처럼 입술만 맞닿는 키스를 좋아했다.

태오는 핸드폰에 저장된 유채의 이름을 ‘찐빵’에서 ‘아기새’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입맞춤을 받았다. 며칠 전, 찐빵이라는 저장명은 너무 사랑이 부족해 보인다는 유채의 컴플레인이 있기도 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왜 이렇게 신났어?”

내버려 두고 얌전히 키스만 받으려고 했더니 끝이 없었다. 잦은 마찰로 인해 건조해진 입술이 슬슬 따끔거릴 때쯤, 슬쩍 밀어내면서 채근했더니 그제야 유채는 태오의 어깨를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유채는 여전히 키가 자라는 중이었다. 슬슬 체격 차이가 나기 시작해서, 태오는 이제 유채의 가슴팍에 알맞게 안겼다.

“아까 회의에서 실장님들이랑 멤버들이랑 다 같이 했어요. 우리 의견도 반영하고, 제작에 참여시킨다고…….”

“그랬어?”

콘셉트 회의라길래 정해진 곡만 받아 올 줄 알았더니 의외로 래디언스를 신경 써 주었나 보다. 데뷔 앨범 때와는 대우가 사뭇 달라졌다. 다른 친구들도 애썼지만 특히 유채의 드라마 출연이 시발점이었던 것 같아서 태오는 기분이 좋아졌다가, 그 드라마 출연 때문에 생긴 유채의 복근 짤 타래가 떠올라 조금 언짢아졌다.

“응, 그래서 다 같이 가이드곡 듣고 의견도 나누고 투표도 하고…… 그렇게 타이틀곡 정했어요.”

“같이 정했구나. 잘했네.”

“김민구 작곡가 곡이에요. 곡 엄청 좋아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작사는…….”

들뜬 목소리로 회의 내용을 늘어놓던 유채가 숨을 골랐다. 목울대가 느릿하게 꿀렁, 움직이는 모습이 시선에 닿았다.

“우리가 써 오래요. 하나씩 가져와 보고 제일 나은 가사 고르기로 했어요. 다들 쉬는 동안 작사 공부했으니까.”

“아……. 그래?”

그쯤에서는 유채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알 것 같아서 불길했다. 제일 나은 가사라니. 태오는 유채의 작사 실력을 아주 잘 알았다. 다만, 한 번도 얼마나 잘 아는지 유채에게 실토하지 않았다.

“……그럼 너도 가져가려고?”

유채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채는 태오의 그런 기색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한 듯 여전히 설렌 목소리로,

“응, 전에 보여 줬던 가사 있잖아요? 그거 조금만 손봐서 곡에 맞추면 딱 좋을 거 같아요. 형도 가사 너무 좋다고 했었잖아요.”

하고, 아주 심란한 소리를 했다. 태오의 눈썹이 팍 구겨졌다.

유채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에 걸쳐서, 태오를 끌어안은 채 제 가사가 붙은 타이틀곡이 발표되면 어떨지 떠들어 댔다. 자신감이 있는 건 좋았지만…….

“유채야.”

귓가에 울리는 듣기 좋은 저음을 간신히 밀어낸 태오가 입을 열었다. 그 가사는 정말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는 얘기를 어떻게 상처받지 않게 말하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정작 유채는 말간 얼굴로 ‘응?’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그 표정이 귀엽고 예뻐서, 꼭 네 가사가 선택될 거라고 대답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거렸다.

하지만 역시 AMJ 직원들과 멤버들 앞에서 유채가 망신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 전에 보여 줬던 가사는 나한테 주는 곡 아니었어?”

“어, 맞아요. 형 생각하면서 썼어요.”

눈을 내리깔고 뺨을 붉히는 얼굴이 수줍어 보였다. 가사를 처음 들려주었을 때도 이런 표정이었다. ‘형한테 바치는 거예요…….’ 덧붙이는데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혼자서 습작처럼 써 본 가사이니 진실이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 귀엽고 예쁘고 너무 아름답다고 빈말을 늘어놓았다. 가사에 대해 칭찬한 게 아니라 유채의 얼굴을 보면서 한 말이었다는 것을 유채는 아직도 몰랐다.

그 거짓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유채야, 그 가사는…… 나한테만 들려줬으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말고.”

태오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면서 한참 고민하다가, 나니까 참고 들어 준 가사를 회의에 가져가면 안 된다는 얘기를 돌려서 했다. 유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얼굴로 저를 흘끔거리는 태오를 향해, 눈을 길게 접으면서 활짝 웃었다. 태오는 속으로 조용히 식겁했다. 왜 웃어. 뭘 또 오해한 거야?

“형…….”

부르는 목소리에서 달콤함이 뚝뚝 떨어졌다. 태오는 의아한 얼굴로 유채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로맨틱해요. 설레게…….”

“응?”

어느 부분이 로맨틱한 건지 따라잡을 수 없어서 태오는 눈만 깜빡거렸다. 유채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눈웃음을 쳤다.

“형을 위한 가사니까 당연히 나도 형한테만 들려주려고 그랬죠. 근데 타이틀곡이 진짜 너무 잘빠졌더라고요.”

“으, 으응.”

“요즘 래디언스 인지도도 꽤 올라갔고, 곡도 좋아서 이번 앨범 잘될 거 같거든요. 그럼 형 생각하면서 쓴 가사가 거리에 막 울려 퍼지고…… 레스토랑마다 들리고. 그러면 진짜 좋을 것 같아요…….”

“…….”

유채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태오는 난처하게 눈만 굴렸다. 혼자서 질주하는 유채의 상상을 깨뜨려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다시 제대로 얘기를 꺼내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두서없이 떠드는 유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주었다.

“형……. 내 가사가 그렇게 별로예요? 다들 완전 비웃었어요…….”

다음 콘셉트 회의가 바로 다음 날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태오는 유채를 열심히 달랬다. 너무 시무룩해서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시간에 걸친 노력 끝에 겨우 희미하게 밝아진 얼굴을 끌어낼 수 있었다. 유채는 흐릿하게 웃으면서 태오의 어깨에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형도 별로였어요?”

태오는 또다시 거짓말을 할지, 이제라도 진실을 털어놓을지 갈림길에 섰다. 적당히 달래서 넘어간다면 언제고 또 지난번과 같은 부메랑이 돌아올지 모른다. 예를 들면, 그 엄청난 가사를 붙인 노래를 태오 자신의 입으로 직접 부르게 되는 일 같은 것.

“뭐? 누가 그래. 걔네가 안목이 진짜 없네. 누구, 기획이사야? 아니면 A팀 김 실장?”

부메랑을 선택한 태오를 향해 유채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냥 전부 다…….”

“그래서, 네 가사로 안 한대?”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이제 막 뜨기 시작한 래디언스를 위해서라도 유채 가사로 해서는 안 되었다.

“응……. 내 가사는 얼마 부르지도 못했어요. 한 소절만 듣고 다들 그만하래서.”

“뭐? 진짜 못됐네. 다들 왜 그러지?”

“라윤이 가사에 작사가가 조금 수정해서 쓴대요…….”

하지만 연신 풀이 죽어서 통통 부은 찐빵 같은 뺨을 한 유채를 웃게 해 주기 위해서라면, 부메랑 몇 번쯤 맞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태오는 유채의 눈가에 입술을 꾹 누르고 우물거렸다.

“내가 네 가사로 불러 줄게.”

“응?”

“타이틀곡, 네가 네 가사로 불러서 녹음해 줘. 그거만 듣지 뭐.”

“아…….”

태오가 유채를 좋아하는 점은, 그가 이럴 때 전혀 빼지 않는다는 거였다. 유채는 눈을 크게 떴다가 금세 길게 접으면서 뺨을 붉혔다. 여전히 붓기가 가시지 않은 빨간 뺨을 검지로 쿡 찌르면서 태오가 ‘피자 찐빵.’ 하고 놀렸다.

“피자 찐빵이 뭐예요, 남자 친구한테.”

유채가 제법 의연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조금 전까지 시무룩해서 울먹거리고 있었으면서.

“편의점 피자 찐빵 보면 딱 너 같은 색이야. 말랑말랑하고 통통한 게 똑같네.”

“형이 편의점의 세계를 뭘 안다고.”

“왜 몰라? 너 새벽까지 연습할 때마다 야식 사다 나른다고 AMJ 앞 편의점을 얼마나 들락거렸는데.”

“아, 맞다.”

유채는 눈을 내리깔고 푸시시 웃었다. 긴 속눈썹이 웃음소리를 따라 팔락거렸다. 태오는 유채의 무릎 위로 올라가 그와 마주 본 채 겹쳐 앉았다. 그리고 유채의 커다란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유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불러 봐, 유채야. 네 가사로.”

모양 좋은 입매에 입술을 붙이면서 속삭였다. 맞붙은 살갗이 말캉거렸다.

“응…….”

대답해 놓고도 유채는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너라도 그 가사를 붙인 곡을 무반주로 부르기는 쉽지 않겠지. 태오는 속으로만 웃으면서 유채 대신 그 곡을 흥얼거리면서 거짓말을 늘어놓은 죗값을 치렀다.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소름이 일어나 온몸에 번졌다. 그래도 태오 자신의 부메랑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때? 정말 좋지.”

“응, 좋아요. 형이 부르니까 더 좋아.”

유채로 말할 것 같으면, 마찬가지로 나름의 부메랑을 맞으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한 번도 태오에게 실토한 적은 없지만 태오는 음치였고 그가 음치라는 걸 태오만 몰랐다. 그러니 유채가 태오를 위해 쓴 가사를 타이틀곡에 붙이고 싶었을 때, 그는 자신이 그 곡을 태오에게 불러 주겠다는 것이었을 뿐 태오가 불러 주길 바라지 않았다. 아무리 사랑해도 태오의 노래를 듣는 서브 보컬의 귀가 편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무도 부를 일이 없는 노래를 태오가 불러 주는 건 좋았다. 아무도 부를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타이틀곡에 붙이지 못해서 더 잘된 것 같았다.

***

정규 1집 타이틀곡 ‘Hush, hush’가 17위로 음반 차트에 진입하면서 래디언스는 순조롭게 두 번째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번 미니 앨범 발매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순위였다.

유채는 줄곧 정신없이 바빴다. 일주일 내내 음악 방송 활동이 줄을 이었다. 라디오나 예능 참여도 잦았는데, 미니 앨범 활동 때에는 주로 우주를 중심으로 투입되었던 것과 달리 멤버들이 둘씩, 혹은 셋씩 짝지어 여러 프로그램에 투입되었다. 회사는 여전히 우주를 위주로 내보내고 싶어 했지만 PD들이 구체적으로 다른 멤버들을 요구했다는 듯했다. 다들 스포츠 예능이나 서바이벌 프로그램, 드라마 등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높였던 것에 비해 우주의 활동이 부진했던 탓일 것이다.

차기작을 시작하지 않아서 여유가 있었던 태오가 소파에 늘어져 시나리오들을 훑어보는 동안 래디언스의 차트 순위는 착실히 높아졌다. 얼마지 않아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음악 방송에서도 1위 후보에 올랐다.

SNS나 커뮤니티를 둘러보아도 래디언스를 폄훼하는 발언보다는 새로운 대형 그룹이 등장했다며 기대하는 댓글이 훨씬 많이 눈에 띄었다. 가끔 온라인 반응을 모니터링할 때마다 거슬렸던 망돌, 혹은 듣보 발언에 내심 원한을 갖고 있었던 태오는 뿌듯해졌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그런 발언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즈음 태오는 래디언스의 매니저를 따로 만나서 1위는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매니저 김명태 실장은 태오에게 스밍하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음반 판매 성적도 중요하다는 언질을 주었다. 오백 장이면 되냐고 되물었더니 그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예? 오백 장…… 이요?”

“부족해요?”

태오가 고개를 갸웃하자 김 실장은 펄쩍 뛰었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오백 장이면 천만 원어치인데요.”

“흠.”

아무래도 오백 장은 부족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태오는 천 장으로 주문을 넣었다.

“이걸 다 어디에 두시려고 그러세요…….”

주문을 도와주던 김 실장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태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빈방에 두면 되지.”

“방 한 칸에 들어갈 부피가 아니라고요.”

“우리 집 커요.”

“네, 알아서 하세요…….”

있는 돈을 쓰시겠다는데 제가 말릴 수 있나요. 김 실장이 감탄인지 불평인지 한탄인지 모를 말을 덧붙이는 동안 태오는 내친김에 줄곧 궁금했던 얘기를 물어보았다.

“근데 이 정도면 팬 사인회 갈 수 있어요? 곧 한다면서요.”

“팬싸 컷이요? 뒤집어쓰고도 남죠, 무슨 말씀이세요.”

“정말이에요? 팬싸 컷이 얼마큼인데요? 부족하면 어떡해요?”

“우리 애들 많이 크긴 했는데 그래도 이제 막 뜬 거라…… 오십 장이면 갈 거예요…….”

SNS에서 곁눈질로 보았던 바로는 몇백 장씩 사야 팬 사인회에 갈 수 있는 아이돌도 있는 듯했는데 래디언스가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태오는 내심 시무룩했다가, 다음 앨범 때는 더 높아지겠지,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김 실장이 그런 태오를 불안한 눈으로 흘긋거렸다.

“설마 오시려는 건 아니죠?”

“거기 가면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손도 잡아 준다면서요?”

“아니 집에서 물어보고 손잡으시면 되잖아요!”

“그거랑은 다르죠.”

“대체 뭐가 다르……. 아니, 오지 말아 주세요…….”

“마스크랑 선글라스 쓰고 갈게요.”

“그런다고 태오 씨를 못 알아보겠어요?”

이천만 원을 쓰고도 팬 사인회 출입을 거절당한 태오는 눈썹을 구기면서 인상을 썼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 애들 안 쳐다보고 태오 씨한테만 사인받으려고 하면 어떡해요.’ 하는 김 실장의 시무룩한 대꾸에는 더 우기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문했던 래디언스 앨범 천 장이 오늘 도착했다.

예상보다 훨씬 부피가 컸다. 태오는 현관문 앞 복도를 가득 메운 어마어마한 크기의 상자를 받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오 씨, 태오 씨.”

마주 보는 앞집에 사시는 예리 어머니가 불편한 얼굴로 태오에게 손짓을 했다. 태오는 민망한 표정으로 주춤주춤 예리 어머니 앞에 가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섰다.

“이게 다 뭐야.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득 찼잖아.”

“네……. 죄송합니다……. 바로 치울게요.”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다 치울 수는 있는 거야? 집이 꽉 차겠네.”

“그러게요. 저도 이럴 줄은…….”

‘이걸 다 어디 두시게요?’ 하던 김 실장의 어이없어하는 눈초리가 떠올라서 한숨이 나왔다. 상상 속의 김 실장이 태오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거보세요.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어요.’

태오는 앨범 900장을 예리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기부하고, 남는 백 장만 아파트에 들여놓기로 했다. 정작 앨범을 받아 든 예리는 뚱한 얼굴로 ‘우리 반 애들은 다 언컨트롤 좋아해요!’ 하면서 언컨트롤 앨범은 없냐고 물어 왔다. 태오는 조금 상처받았다.

앨범 백 개를 담은 박스를 집 안으로 옮긴 후 한숨 돌리면서 포장을 열어 보니, 두툼한 사진첩 두 권과 엽서와 포토 카드가 여러 장 들어 있었다.

“저번 앨범보다 훨씬 많이 들었네. 이렇게 잔뜩 퍼 주면 뭐가 남나?”

태오는 신기해하면서 앨범 몇 개를 더 열어 보았다. 네 번째 앨범에서 유채의 포토카드가 나왔다. 카드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근데 이걸 다 어쩐다…….”

태오는 산처럼 쌓인 래디언스 앨범 박스를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앨범 대부분을 무사히 처분한 것은 좋은데 여전히 남은 백 장의 부피도 상당했다. 실물이다 보니 처치가 곤란했다. 그렇다고 유채의 앨범을 뜯지도 않은 채 버리고 싶진 않았다.

결국 태오는 앨범 백 장을 하나하나 뜯어서 유채의 포토 카드만 소중하게 모아 두었다. 첫날에는 열 장만 뜯고 지쳐 버린 탓에 며칠이나 걸렸다.

정리를 마친 뒤에는, 오래되어 입지 않는 옷을 넣어 두는 드레스 룸에 앨범 박스를 숨겨 놓았다. 혹시 유채가 발견할까 봐 걱정되었던 탓이다. 음반을 사겠다고 유채에게 말해 두기는 했지만 천 장이라고 실토할 수는 없다. 태오에게도 체면이 있었다.

‘한 열 장 정도 샀다고 하면 되겠지.’

남자 친구로서 애정을 보이면서 창피하지는 않을 정도의 구매량을 가늠해 보면서 태오는 TV를 켰다. 음악 방송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래디언스의 무대가 지나간 뒤 1위 발표 순서가 되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하냐고 생각하면서도 손끝으로는 소파 앞 테이블을 연신 두드리고 있었다. 영화제 수상 후보였을 때보다 더 초조한 기분이었다.

[1위는…… 래디언스의 ‘Hush, hush’!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MC들과 1위 후보 그룹들이 순식간에 래디언스를 동그랗게 둘러쌌다. 저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래디언스 멤버들을 거쳐,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유채가 화면에 잡혔다. 유채는 입을 꾹 다문 채 눈꼬리를 길게 휘면서 말없이 웃었다.

태오는 마시고 있던 캔맥주를 화면을 향해 들어 올렸다.

“축하해. 네가 탈 줄 알았어.”

***

정규 1집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유채는 미니 시리즈의 조연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무렵 팬클럽이 생겼기 때문에 태오는 드디어 팬인 척 유채의 드라마에 밥 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스테이크나 이동식 뷔페로 주문하려다가 마지막에 멈칫한 것이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단역에 가까운 조역인데,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중식으로 골랐다.

그즈음의 유채는 언제나 바빴다. 드라마 출연이 연달아 있었고 고정으로 참여한 예능도 늘었다. 드디어 콘서트 일정까지 잡혔을 때, 태오는 어쩔 수 없이 미루고 미루던 차기작을 골랐다. 제가 휴식기라고 해도 유채를 만나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마침내 받아들인 결과였다. 계약서를 쓰고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힌 태오 대신, 복귀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던 태오를 재촉도 못 하고 속만 태우던 그의 매니저가 얼굴을 활짝 폈다.

그 후로 이 년간, 유채는 몇 번 더 컴백을 했고 활동 때마다 어렵지 않게 1위에 올랐다. 얼마간은 얼굴을 보기는커녕 목소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바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유채도 제법 여유가 생겼다. 길거리에 나가서 열 명을 붙잡고 물으면 일곱 명 정도는 유채의 얼굴을 안다고 대답하겠다 싶을 만큼 얼굴을 알린 뒤에는 들어오는 스케줄을 요령껏 조정해 시간을 만들어 냈다. 태오는 여전히 일 년에 한 작품 정도만 맡았기 때문에, 유채가 만든 시간은 모두 태오와 함께 보낼 수 있었다.

비활동기에 개인 활동을 할 때는 라윤과 이신이 주로 음악 예능에, 케빈이 스포츠 예능에 출연한 것과 달리 유채와 우주는 연기에 매진했다. 둘 다 연기에 대단히 재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사심을 최대한 덜어 내고 객관의 눈으로 평가할 때 그래도 우주보다는 유채가 나았다. 일단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단박에 시선을 끌었고, 연기도 매번 꾸준히 나아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캐스팅될 때마다 유채가 맡은 역할의 비중이 점점 더 커졌다.

스물두 살의 유채는 완전히 자리 잡힌 톱 아이돌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십 대나 이삼십 대는 물론 중장년층에게도 꽤 인기 있는 배우가 되어 있었다. 주로 주인공의 성실하고 서글서글한 막냇동생 같은 역으로 드라마에 자주 얼굴을 비춘 덕분이었다.

“이대로만 하면 조만간 주연도 맡겠다.”

모처럼 유채와 느긋한 휴일을 보내고 있던 날이었다. 며칠 전에 촬영을 종료한 유채의 드라마를 모니터링하면서, 유채가 입 안에 넣어 주는 캐러멜 팝콘을 입만 벌려서 받아먹던 태오가 불쑥 말을 꺼냈다. TV 화면 속에서는 유채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죽어 가고 있었다. 가벼운 분위기의 로맨틱 코미디에 주로 출연했던 유채가 처음으로 진지한 역을 맡은 드라마였다.

“아직 무리예요. 연기도 안 되고.”

제 죽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 유채가 눈을 내리깔면서 대꾸했다. 수줍은 듯한 표정과는 달리 태오의 허리를 꽉 잡고 제 쪽으로 바투 당겨 안으면서 하는 말이다. 가까이 닿은 어깨가 태오의 어깨선보다 제법 높았다. 언젠가는 유채가 그를 올려다보았던 적도 분명 있었는데, 이제는 손가락 세 마디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에 벌써 익숙해졌다. 이 년 전에 이미 태오의 키를 앞질렀던 유채는 그 후에도 조금 더 자랐다.

“아냐, 많이 늘었어. 이번 연기 변신 되게 괜찮다.”

“응……. 정말?”

“그럼, 정말. 이제 우주랑은 비교가 안 되네.”

“신우주요? 갑자기?”

뜬금없이 우주 얘기를 왜 꺼내냐는 듯한 표정에 태오는 입을 꾹 물었다. 데뷔 무대 당시, 유채의 센터 자리를 뺏긴 이후 차곡차곡 쌓아 올린 깊은 한을 밝힐 수는 없었다. 세 번째 앨범부터는 유채가 메인 댄서로 바뀌었는데도 감정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단순한 억울함 외에도, 또 다른 유치한 감정이 섞여 들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태오의 표정을 살핀 유채가 눈치를 봤다. ‘형?’ 하면서 태오의 뺨을 손가락으로 살살 간지럽힌다. 퍼뜩 정신이 든 태오는 입꼬리를 애써 말아 올렸다.

“아무래도 연기는 둘만 하니까. 신경이 좀 쓰이네.”

유채는 태연하게 둘러대는 대답에 수긍한 기색이었다. 말이 난 김에 요즘 우주는 어떻게 지내냐고 떠보았더니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글쎄요? 드라마 하느라고 바쁘지 않을까요?”

“응? 옆방에 살면서 왜 모르는 말투야?”

“얘기도 거의 안 하고 사는데요, 뭐.”

시큰둥한 대꾸가 돌아왔다. 태오는 무심코 슬쩍 웃어 버렸다.

우주가 이제 몇 살이 되었나 되짚어 보았다가 스무 살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래도 미성년자를 상대로 질투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한 얼굴로 유채의 가슴팍에 뺨을 기댔다. 유채가 그의 이마에 입술을 꾹 찍으면서 우물거렸다.

“형, 저는 차기작에서는 형이랑 같이 연기하고 싶어요. 이제 슬슬 그래도 될 것 같아서…….”

“응? 그럼 이번에도 주연 못 할 텐데?”

“당연하게 형이 주연이라고 생각하는 거 좀 봐.”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

농담 같지만 사실은 서로 진담인 말들을 웃으면서 주고받는 동안 드라마가 끝났다. 유채는 리모컨을 집어 들면서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는 주연보다 형이랑 같이 촬영하는 게 더 좋아요.”

“그래도 이제 주연도 노려봐야지.”

“상관없어요. 형이랑 같은 시나리오 받으면 무슨 역이든 할 거예요.”

“나 이번엔 영화 할 건데.”

“그럼 나도 영화 할래요.”

“영화 쪽에서는 아이돌 잘 안 쓰는…….”

“…….”

“…….”

금세 뺨이 부어서 태오를 바라보는 유채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태오는 그 통통한 뺨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쥐고, 한참 튀어나온 입술에 입을 쪽쪽 맞추면서 붓기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부루퉁한 얼굴로도 얌전히 입맞춤을 받고 있는 유채를 향해서,

“그럼 너부터 영화 확정해. 너 캐스팅하는 영화로 내가 들어갈게.”

하고 아주 거만한 소리를 했다. 유채는 통통해졌던 뺨을 삐죽거리면서 그대로 웃어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란히 기대앉아서, 이제부터는 유채의 예능 방송분을 함께 보기로 했다. 벌써 삼 년째 고정으로 출연 중인 스포츠 예능에서 이번에는 서핑을 갔다. 저 프로그램은 유채가 출연한 이후 수영 예능으로 장르를 바꿔 버린 것 같았다. 태오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딱 붙는 래시가드를 입은 채 촉촉하게 젖은 화면 속의 유채를 노려보았지만, 제 곁에 앉은 유채의 목덜미에서 나는 비누 향이 풋풋하고 포근해서 금세 나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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