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스물한 살 윤태오의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해 보자면 행운의 여신에게 엄청난 총애를 받아 꽃길만 걸어온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태오의 첫 행운은 열다섯 살의 가을, 하굣길에 들른 오락실에서 펀치 게임을 하다가 캐스팅 디렉터에게 명함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얘, 몇 살이니? 너 영화 출연해 볼 생각……, 아니지, 연기에 관심 없니?”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동그란 안경을 쓴 어른은 피로에 지쳐 낯빛이 꺼멓게 죽은 채로도 태오를 훑어보면서 눈을 빛내다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너 혹시 소속사는 있어?”
태오는 기획사 명함을 몇 번이나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상황이 새삼스럽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내민 명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또렷한 목소리로 어머니에 의해 주입된 대답을 늘어놓았다.
“소속사 있어요. 이미 계약했어요.”
이렇게 대꾸하면 열에 아홉은 아쉬운 얼굴로 등을 돌려 떠나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태오가 마주쳤던 열 명의 어른 중 마지막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기획사 사람이 아니라 영화의 캐스팅 디렉터였던 탓이었지만 당시의 태오가 그 속사정까지 알 수는 없었다.
당황한 마음을 무표정한 얼굴로 감춘 채 묵묵히 선 태오를 유심히 뜯어본 후, 여자는 코끝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면서 반색을 했다.
“그래? 정말 잘됐다. 어느 소속사 소속이니? 연습생이야? 아니면 아역? 매니저 있으면 연락처 좀 알려 줘.”
“네?”
명함을 거절해 본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질문이 쏟아진 경우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 당황한 태오는 뒷걸음질 치면서 주춤거리다가 펀치 머신에 뒤통수를 쾅, 부딪치고 말았다. 눈앞에 별이 번쩍 튀었다. 눈물까지 찔끔 흘린 태오의 팔을 붙잡고, 여자는 강경한 어조로 저 할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 놓았다.
“너 김화진 감독님, 알지? 이번에 새 영화 들어가시는데 아역이 필요하거든. 주인공의 첫사랑 역할이라 마스크랑 분위기가 정말 중요한데 원래 맡았던 애가 갑자기 부상을 당했지 뭐야. 그래서 이렇게 급하게……. 그런데 너, 연기 쪽도 하니? 혹시 아이돌 연습생이야? 요즘은 아이돌 데뷔 전에 연기로 미리 얼굴 알려 놓는 것도 괜찮아. 연기가 필요한 역은 아니거든. 아무튼 내가 직접 너희 회사와 딜해 볼 테니 연락처 좀 알려 줘. 응?”
“어……. 네?”
태오가 얼얼한 뒤통수를 붙잡고 눈만 깜빡거리는 사이, 그의 한 손에는 어느새 여자가 쥐여 준 영화 대본과 그녀의 명함이 들려 있었다. 소속사 연락처를 내놓으라고 채근하는 여자를 냉정하게 떼어 내지 못한 태오는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다가, 결국 그녀에게 어머니의 연락처 대신 아버지의 번호를 넘겨주었다.
태오가 들뜬 기색이 완연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캐스팅 디렉터의 사무실을 찾은 것은 일주일 뒤였다.
“예? 소속사가 없다고요? 분명히 이미 계약된 곳이 있다고 했는데.”
“아이가 하도 명함을 받아 와서 애 엄마가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쳤거든요.”
연예계 활동을 반대하는 어머니 몰래 태오를 데리고 캐스팅 디렉터의 초청에 응한 것은, 태오가 기획사 명함을 받아 올 때마다 신나 하곤 했던 아버지의 소심한 반란이었다.
펀치 머신 앞에서 연락처를 받아 갔던 캐스팅 디렉터, 오 실장은 난처한 얼굴로 태오와 아버지를 번갈아 훑어보았다. 시선은 태오에게 조금 더 길고 날카롭게 머물렀다가 이내 허공을 향했다. 미간을 좁힌 채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신음을 내뱉는 표정에서 무언가 고민하는 기색이 읽혔다.
태오는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서서 그저 기다리고만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비밀로 하고 사무실에 함께 다녀오면 돈가스를 사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망설이는 척 시간을 끈 덕분에 디저트로 눈꽃 빙수까지 야무지게 얻어 낸 태오는 다가올 포상을 기다리면서 사무실 벽지에 그려진 도형 무늬의 개수를 셌다.
그런 태오를 아쉬운 눈길로 자꾸만 흘끗거리던 오 실장이 마침내 긴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트레이닝도 전혀 안 되어 있겠네요. 뭐, 연기력이 필요한 역은 아니니까요……. 좋아요, 일단 카메라 테스트부터 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태오야, 인사드려야지.”
“예에…….”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허리를 꾸벅 숙인 태오가 그때 한 생각은,
‘아 언제 끝나……. 아빠 이번에도 돈가스 안 사 주기만 해 봐.’
몇 번이나 아버지의 공수표에 당한 경험이 있는 태오는 주먹을 움켜쥐면서 다짐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카메라 테스트가 길게 이어진 끝에 흥분한 오 실장이 김화진 감독을 불러냈고, 피곤한 얼굴로 나타난 김 감독은 카메라 화면 너머의 태오를 향해 두 눈을 번뜩거렸다. 당장 계약서를 쓰자면서 재촉하는 그녀의 등쌀에 못 이기는 척하면서 아버지는 태오의 출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캐스팅을 축하하자면서 향한 회식 자리에서는 한우가 나왔다. 김 감독은 천재 아역이 나왔다고 신이 났고 오 실장은 얼굴 천재가 나왔다며 광대를 들썩거렸다. 아버지는 태오가 자신을 닮아 그렇다고 한껏 어깨를 폈지만 태오는 사실 어머니를 닮았다.
어쨌든 모두가 흥겹게 신이 난 자리에서, 아직은 한우보다 돈가스가 좋은 나이였던 태오만 혼자 풀이 죽었다. 태오의 연예계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그 무렵의 태오는 순풍 속에서 사각 돛을 네 개쯤 달고 활짝 편 채 달리는 범선처럼 운이 좋았다.
오 실장의 호언장담대로 태오가 맡은 배역은 연기력이 필요하지 않은, 마스크와 분위기만으로 존재 가치가 충분한 역할이었다. 어른이 된 주인공의 회상 속 ‘죽은 첫사랑’ 역이었기에 대사도 몇 마디 되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태오가 해야 하는 일은 중학교 교실의 낡은 창가에 앉아 바깥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가만히 응시하면서 눈을 깜박이는 것 정도였다. 김 감독은 이른 오후의 햇살이 태오의 흰 얼굴에 물결 같은 그림자를 그리고, 그의 긴 속눈썹 위에서 금빛으로 부서지는 모습을 잡아내면서 추억 속의 첫사랑을 만들어 냈다.
영화는 대히트를 쳤다.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휩쓸었기 때문에, 몇 컷 등장하지도 않은 태오도 매번 덩달아서 레드 카펫을 밟았다. 이미지와 인지도로 모든 게 결정되는 곳이 연예계였다. 태오는 단번에 주가가 치솟아, 오래지 않아 공중파 청소년 드라마의 주연을 맡았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아역을 도맡게 되었다.
수많은 아역 배우들 중에서도 태오가 특히 운이 좋았던 것은 그에게 자신도 몰랐던 자질이 있었다는 점이다. 캐스팅되는 자리에서 했던 생각이라고는 돈가스와 눈꽃 빙수가 전부였던 것치고, 태오는 뜻밖에도 재능이 넘쳤고 연기가 적성에도 맞았다.
스무 살이 된 태오는 아역 스타의 이미지를 벗고 연기 변신을 시도하고자 연상인 여배우와의 격정적인 로맨스 영화를 골랐다. 다음 해에 개봉한 영화가 누적 관객 수 천만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을 때, 태오는 이미 시대를 대표하는 톱 배우가 되어 있었다.
열여섯의 한유채를 처음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당시 배우 기획사로 유명했던 태오의 소속사는 아이돌 명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양재역 부근에 위치한 높은 사옥의 엘리베이터를 타면 허리를 구십 도로 접으면서 인사해 오는 아이돌 멤버들, 혹은 연습생들을 수없이 마주칠 수 있었다. 예쁘장한 외모의 소년들이 귀엽긴 했지만 누구에게도 특별히 관심이 가진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태오는 지나치게 높은 곳에서 빛나는 사람이었고, 태오에게 있어서 그들은 불특정 다수의 얼굴 없는 사람들이었다.
CF 계약 문제로 회사에 들렀던 그날도 태오는 바짝 얼어붙은 채 고개를 숙이는 몇 명의 연습생을 지나쳐 건물의 옥상으로 향했다. 조용히 한숨 돌릴 수 있어서 사옥으로 출근할 때마다 찾곤 했던 작은 공간에는 구름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 흠이 파인 시멘트 바닥이 그대로 방치될 정도로 관리가 소홀했던 탓에 오가는 직원들의 흡연 구역으로 전락한 지 오래된 곳이었다.
라이터로 불을 댕겨 담배에 붙인 뒤 입술 사이에 물었다.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뿜었을 때, 흡연 구역을 몰래 찾아온 듯한 연습생들이 담배 연기 사이로 부옇게 보였다. 조금 전 태오에게 꾸벅 인사하고 지나갔던 몇몇 어린 얼굴이 눈에 익었다. 그들은 가운데 선 백금발의 남자애 하나를 빙 둘러싸고 선 채, 삐죽한 눈가와 날 선 입매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연습생들 사이의 군기 잡기 시간인 듯했다.
실제로는 몇 살 차이 나지 않더라도 스물을 기점으로 나뉘는 미성년과 성년의 차이는 물과 기름의 경계처럼 뚜렷한 법이다. 십 대 중후반의 아이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서열과 체계가 있기에, 태오는 그들의 틈에 끼어드는 대신 툭 튀어나온 기둥 뒤편으로 몸을 숨기면서 숨을 죽였다. 별다른 일이 없이 시비조의 말다툼으로만 끝났더라면 아마도 계속 그랬을 것이다.
이른 겨울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꼈던 하늘이 온종일 어둑했었다.
“한유채. 너, 씨발. 혼자 튀면 좋냐? 팀킬한다고 뭐, 얻을 거 있냐?”
“네가 연습 안 해서 못한 게 왜 내 탓이야?”
“안 닥치냐? 한유채, 터져 봐야 정신 차릴래?”
“평가 결과 나빴다고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너희들 다 여자 친구 사귀고 계속 놀기만 했잖아.”
“씨발, 이게 진짜…….”
팽팽한 목소리가 뒤엉키고 연습생들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을 때 부슬비가 내렸다. 목덜미를 잘게 적시던 빗방울은 이내 굵어져 차갑고 날카롭게 뺨을 때렸다. 빗소리가 신호가 되었는지, 가운데 선 백금발 소년을 두고 주먹질과 발길질이 퍼부어졌다. 겨울비가 요란하게 쏟아지면서 그들이 만들어 낸 소란을 삼켰다.
태오는 눈썹을 찡그린 채,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바닥에 툭 던지고 고민에 빠졌다. 연습생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여전히 망설여졌지만 소년이 계속 맞게 둘 수는 없었다. 태오는 끙 소리를 내면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몇 걸음 더 다가가, 소년을 향해 두꺼운 주먹을 맹렬하게 휘두르던 덩치 큰 연습생의 팔꿈치를 잡았다.
“뭐야? 왜……. 히, 히끅, 유, 윤태오 서, 선배님…….”
거칠게 태오의 손을 뿌리쳤다가 상대를 확인한 연습생의 태도가 다급히 공손해졌다.
상황은 단번에 정리되었다. 연습생들은 순식간에 얌전해져서 일렬로 섰지만, 바닥에 쓰러졌던 몸을 이제 막 일으켜 앉은 백금발 소년은 그 어수선한 대열에도 끼지 못했다. 누군가 태오의 눈치를 보면서 운동화 끝으로 소년의 다리를 툭툭 쳐 댔다.
“무슨 일이에요?”
태오가 짐짓 모른 척 고개를 갸웃하면서 묻자, 상황의 주동자인 듯했던 덩치 큰 연습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연습생들 간의 폭력은 쉬쉬하면서 묻히기 마련이었지만 목격자가 윤태오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 저, 유, 윤태오 선배님. 지금 이건 보시는 그런 상황이 아, 아니고…….”
“여럿이서 저 친구를 일방적으로 때리는 걸로 보이는데 그런 상황이 아닌가?”
“아니 그, 그게 말씀입니다…….”
극존칭으로 말을 더듬는 연습생의 턱에는 수염이 거뭇하게 올라와 있었다. 스물한 살이었던 태오와 한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을 듯한 얼굴이었지만 큰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새파랗게 질린 채 파르르 떨었다. 회사를 대표하는 톱 배우와 데뷔 조에도 들지 못한 연습생의 격차는 그만큼 컸다. 태오는 그를 비롯해 나란히 늘어선 연습생들의 면면을 주의 깊게 확인해 두었다.
“저, 선배님. 그게, 한 번만 요, 용서를…….”
“이번이 처음인가요?”
“……예?”
그렇잖아도 어두웠던 연습생의 얼굴에 쨍하고 금이 갔기 때문에, 태오는 그 대답이 ‘아니요’라는 것을 알았다. 얼굴이 저절로 굳었지만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대신 덤덤하게 한 마디 내뱉었을 뿐이었다.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일은 아니죠. 담당 실장님께서 처분하시도록 얘기해 둘 테니 이만 내려가 보세요.”
“서, 선배님!”
얼마간의 소란 끝에 연습생들이 모두 자리를 떴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태오의 시선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은 소년의 옆얼굴에 닿았다. 그 애는 혼자서 맞고 있을 때에도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태오는 소년에게 한 발 다가섰다. 점점 더 거세지는 빗줄기 속에서 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
어둑한 공기 속에서도 소년의 흰 피부가 말갛게 빛났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숱 많은 속눈썹에 고였던 빗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태오를 마주하자, 빚어낸 조각처럼 깨끗한 볼이 조금 붉어진 채 상기된 얼굴을 한 소년.
주먹질을 당해 부어오른 뺨을 타고 흐르는 물기가 안쓰러웠다.
“너…… 괜찮아?”
태오가 물었고,
“아무렇지도 않아요.”
소년은 태오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이내 긴 눈매를 둥글게 휘면서 말했다. 색소가 옅어 투명하기까지 했던 연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씩씩하네.”
태오의 대답에, 소년의 희고 말간 얼굴에 풀처럼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
내뱉는 한숨이 차가운 겨울비에 부딪혀 부옇게 흐려졌던 날. 몇 년의 시간이 흘러 그들이 연인이 되었을 때에도, 그 순간은 태오에게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되었다.
***
태오가 회사 옥상을 다시 찾은 것은 한 달 뒤였다.
건조한 겨울 공기가 부쩍 더 차가웠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곳답게 옥상의 ‘구름정원’에는 변변한 난방 시설도 제대로 없었다. 본격적인 추위가 찾아오기에는 이른 시기였는데도 손끝이 곱아들었다. 다음에 들를 때는 아무래도 올라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태오는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다음 작품을 고르는 일을 두고 회사의 신우필 대표와 한바탕 신경전을 치르고 올라온 참이었다. 신 대표는 누군가에게 청탁이라도 받은 것인지, 태오가 진작부터 제쳐 둔 작품을 테이블 위로 다시 끄집어냈다. 날림으로 쓴 티가 역력한 시나리오는 둘째 치고, 촬영장에서 스태프 폭행 논란으로 입지가 크게 추락했던 감독이 재기를 노리면서 메가폰을 잡은 영화였다.
-야, 태오야. 남 감독이 이번에 칼 갈았어.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 보겠다는데, 네가 좀 도와줘야지. 너 신인 때 남 감독이 얼마나 너 챙겼냐.
-대표님은 남 감독에게서 얼마 챙기셨습니까?
-아니, 왜 생사람을 잡아. 그런 적 없다.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응?
-이 얘기 계속하실 겁니까? 그럼 전 먼저 나가 보고요.
-……너무 그러지 마라. 너 잘나가는 거야 알지만 그게 다 누구 덕인데. 이제 좀 컸다고 고분고분한 맛이 이렇게 없어서야 되겠어?
-저랑 계약 해지 하고 고분고분한 배우 데려다가 작업하시면 되겠네요. 위약금 얼마 물어 드리면 됩니까?
소속사와의 계약 해지가 쉬울 리는 없었다. 그러나 태오가 이렇게 버티면 신 대표도 더는 고집부리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신 대표의 두꺼운 입술이 못마땅하게 비틀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태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바로 옥상을 찾았다.
업계를 대표하는 기획사였지만 아무래도 신우필과 합이 맞지 않았다. 태오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면서 회사와의 남은 계약 기간을 가늠해 보았다. 이 년 남짓이면 계약이 종료되고 태오는 스물셋이 된다. 군대를 더 미룰 마음도 없으니, 입대를 핑계로 연장하지 않아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옥상의 반대편 구석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관상용 플랜트 하나 없이 방치한 명목상의 정원에 웬일로 음악을 틀어 놓았나 싶었지만 귀를 기울여 보니 제대로 된 스피커를 가져다 놓은 것은 아닌 듯했다. 핸드폰으로 볼륨을 한껏 높여 재생했을 듯한 조악한 울림이 끝날 줄 모르고 울려 퍼졌다.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음악을 틀어 놨어.’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이었어도 거슬렸을 판인데 하필이면 머리를 쾅쾅 울리는 케이팝이었다. 오늘은 어딜 가도 두통만 얻는 날인가 싶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몇 모금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휴지통 위의 재떨이에 비벼 끈 후 등을 돌려 떠나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시끄럽게 쿵쿵대는 비트 사이로 빠르게 스텝을 밟는 소리와 숨 가쁜 호흡이 한데 뭉쳐서 섞였던 탓이다. 음악을 틀어 놓기만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안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한 것은 순전히 변덕이었다. 태오는 회사 어디에나 가득한 연습생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말 한마디라도 섞어 본 것은 한 달쯤 전에 폭행당하고 있던 어린 연습생 하나를 도와줬던 일이 전부다. 그때도 이 옥상이었다.
그래도 정원이라고 간이 의자와 테이블 같은 것을 가져다 놓은 이쪽 사이드와는 달리, 반대편 옥상은 휑하기까지 한 공터였다. 태오는 그곳에서 또다시 그 애를 만났다. 소년은 흐릿한 겨울 해를 등지고 춤을 추고 있었다.
칙칙한 시멘트 바닥 위에서 흰 운동화가 사뿐히 움직이면서 어지러운 곡선을 그렸다. 소년이 팔을 높이 뻗을 때마다 헐렁한 소매가 펄럭거렸다.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고음에 맞추어 높이 뛰어오르면, 흰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흩어져 허공에서 반짝거렸다. 마르고 길쭉한 팔다리가 만들어 내는 모든 동작이 섬세하고 예뻤다.
가만히 그 애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음악이 끝났다. 조금 전까지의 유려한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고, 소년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놀란 태오가 뛰어가 그 애의 팔을 잡아 주었다. 말간 뺨이 익은 복숭아처럼 달아오른 소년이 이쪽을 돌아보면서 태오보다 더 놀란 눈을 했다.
“괜찮아?”
태오가 다급히 물었다.
햇볕이 비쳐 들 때마다 소년의 옅은 백금발에 반사되어 부드럽게 빛났다. 동그랗고 흰 이마와 높은 콧잔등에도 빛이 닿았다. 눈을 깜박이면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나풀거리듯 움직이면서 성긴 그물 같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투명한 눈동자 속에서 태오의 인영이 흔들거렸다.
태오를 알아본 아이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들었다. 긴 눈꼬리가 아래로 조금 처져 있었다.
“형.”
목소리는 나지막했고 힘이 있었다.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은근히 태오를 책망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형, 하고 고작 한마디를 짧게 발음했을 뿐인데도 태오는 그 애가 자신을 흘겨보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태오는 홀린 듯한 얼굴로 얼떨떨하게 말했다.
“응.”
“왜 이제 왔어요? 늦었잖아요.”
“응……? 그랬어?”
‘늦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당황한 태오는 적당히 대답하면서 맞장구쳤다.
소년은 맡겨 둔 약속을 찾아가는 것처럼 당당하게 굴었다. 그게 어리거나 건방져서가 아니라 덜덜 떨리는 손끝을 감추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그 애가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겨울의 옥상에서 태오를 기다렸다는 것도 태오는 아주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런데도 그날의 태오는 어떤 책임감에 휩싸였고, 소년을 일으켜서 데리고 근처의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아이는 키가 삐죽 컸지만 너무 말랐다. ‘늦은’ 죄가 있으니 잘 먹여야 할 것 같았다.
뭘 먹고 싶냐고 묻자 소년은 떡볶이라고 말했다. 가게 전체가 개별 룸으로 나뉜 고급 한정식집에 떡볶이가 있을 리 없었다. 태오는 대신 궁중떡볶이를 시켜 주었지만, 소년은 밍밍하게 흐릿한 색을 입은 동그란 떡을 보는 순간 표정을 흐렸다. 태오는 돈가스를 사 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한우를 먹인 아버지에게 한동안 화나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조금 웃었다.
“또 만날 수 있어요?”
차로 숙소 앞에 데려다주었을 때 그 애가 물었다. 이처럼 격의 없이 친근하게 구는 연습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태오는 줄곧 당황한 상태였다. 허리를 꺾으면서 폴더 인사를 하기는커녕, 태오를 빤히 올려다보는 연갈색 눈동자가 반질반질했다. 대답 대신 엉뚱한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너는, 뭐, 미국에서 왔니?”
“미국이요?”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듯 소년이 갸웃거렸다. 고개를 살래살래 저을 때마다 연한 백금발이 찰랑거렸다.
“아니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아, 그래…….”
호구 조사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태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소년이 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물었다.
“형은요?”
“응? 나?”
제법 진지한 얼굴이었다.
연습생들이 모여 사는 허름한 빌라 앞에 차를 세워 둔 채, 태오는 그 애와 꽤 오랫동안 서로의 인적 사항을 주고받았다. 덕분에 태오는 소년의 이름이 한유채이고, 열여섯 살이며, 어머니는 그 애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오래전에 이미 다른 가정을 꾸리셨다는 걸 알았다. 이제 한 달만 지나면 열일곱 살이 된다고 유채가 몇 분에 걸쳐서 강조하는 동안, 태오는 그 애의 이름이 소년에게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그 뒤로 유채와 자주 만났다. 태오는 아직 차기작을 결정하지 않은 채 휴식기였기 때문에, 일정이 꽉 찬 연습생인 유채의 시간에 맞춰 주어야 했다. 밤 열한 시. 한 달에 두어 번 들를까 말까였던 회사 건물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번 주만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다.
유채는 늘 연습실에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지하 연습실은 난방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춥지 않으려면 몸을 움직이면 된다고 말하면서 유채는 환하게 웃었다. 다른 건물에 연습실을 하나 해 줄까. 무심코 생각했다가 태오는 흠칫 놀랐다. 연습실을 왜 해 줘? 조금만 경계를 늦추면 생각이 자꾸 엉뚱하게 튀었다.
연습실에 도착하자 혼자 춤추고 있는 유채가 눈에 들어왔다. 유려한 물결 같은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태오는 요즘의 제 행동을 변명해 보았다. 유채가 조르는 대로 모두 들어주지 못해 안달인 것을 스스로도 느꼈다. 유채가 귀엽고 안쓰러워서 그런 거라고, 어린 동생 같다고 말하기에는 찔리는 면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유를 들 수도 없었다.
몇 년 후, 유채는 그 무렵의 태오를 두고 그렇게 말했다.
‘형도 나한테 첫눈에 반했죠?’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태오는 질색하면서 펄쩍 뛰었다. 그러나 정말로 아니었냐고 묻는 연갈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해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슬쩍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형, 왔어요? 왜 안 불렀어요.”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유채가 연습을 마쳤다. 가쁜 숨을 할딱이면서 바쁘게 뛰어온 소년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태오는 무심코 손을 들어 그 복숭아 같은 볼을 찔러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연습하길래. 언제 끝나?”
“다 끝났어요. 이제 가면 돼요.”
“아닌 거 같은데……. 나 기다려도 돼. 하고 싶은 만큼 더 해.”
“괜찮다니까요. 정말이에요.”
배고프니까 빨리 나가자면서 태오의 팔을 흔드는 유채의 귀 끝과 목덜미가 온통 붉었다. 태오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언제나 환하게 반짝거렸기 때문에, 태오는 그 애가 저를 만나는 이 두 시간을 만들기 위해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알지 못했다. 유채도 그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
유채는 어느 날 불쑥 태오에게 고백했다. 새벽 한 시. 여느 때처럼 차갑게 식은 연습실에서, 태오가 가사 도우미에게 부탁해 만들어 간 떡볶이를 먹으면서였다.
“좋아해요, 형.”
기습 공격에 놀란 태오가 컥컥거렸다. 새빨간 떡볶이가 목에 걸려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매웠다.
“너, 이…… 쪼그만 게.”
당황을 얼버무리는 데는 괜한 구박만 한 게 없었다. 진지하게 고백을 받아 주기는커녕 못 들은 체 넘어가려는 태오를 눈치챈 유채가 하얀 뺨을 동그랗게 부풀리면서 삐죽거렸다.
“나중에 내가 형보다 더 클 거예요.”
유채는 태오보다 한 뼘이나 작았다. 근거 없는 큰소리에 태오가 코웃음을 쳤다.
“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손발이 크잖아요. 내 손이 형보다 큰 거 알아요?”
말하면서 슬쩍 손을 잡아 오는 게 아주 고단수였다.
태오라고 가만히 손을 잡혀 주지는 않았다. 태오에게는 지나간 몇몇 연인들이 있었고, 대부분이 여성이었지만 남자 애인도 두셋은 되었다. 유채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내면서 태오는 나름의 경험을 살려 신중하게 조언을 건넸다.
“너, 어른한테 고백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진지하게 생각한 거예요.”
유채는 통통하게 부었던 뺨을 착 가라앉히면서 어른스러운 표정을 했다.
“……너는 네 또래를 만나야지. 너희 반에 친구들 많잖아.”
태오는 힘겹게 대꾸하면서 그 뺨을 꼬집어 주고 싶어 자꾸만 손이 올라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왜 다른 애 얘기를 해요? 나는 형이 좋아요.”
“나이도 어리고 앞날도 창창한 애가 왜 그래……. 너도 나이 먹어 보면 다 알아. 지금은 이게 세상 전부 같아도 살다 보면 별게 아니야.”
그러니 한때의 별거 아닌 감정에 너무 목숨 내놓고 달려들듯이 굴지 말라는 거였다. 유채는 옅은 백금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면서 새침하게 흥, 무시해 버렸다.
“형은 뭐 막 나이 엄청 많아요?”
유채가 눈을 흘겼다. 그 표정이 귀여워서, 태오는 빙글거리면서 몇 살 같은데, 하고 물었다.
“음……. 서른 살?”
“…….”
그날 태오의 충격받은 표정이 인상 깊었는지 유채가 먼 훗날 고백하기를, 순전히 태오를 약 올리기 위해서 열여섯의 그 애가 생각하기에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나이를 아무렇게나 불러 보았다고 했다.
소년의 생각은 옳았다. 스물한 살의 태오에게 서른 살이냐는 질문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태오가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파드득 떨면서 처연하게 물었다.
“너 이 자식……. 너는 몇 살이라고 이래?”
“열여섯이잖아요. 알면서 그런다.”
존나 어리네. 태오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열여섯. 소년은 태양의 계절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고, 태오는 그 한여름 같은 햇살에 눈이 부셨다.
***
일 년 뒤, 태오는 소속사와의 계약이 종료되자마자 입대를 했다. 열일곱 살이 된 유채가 긴 눈매에 물기를 그렁그렁 매달고 배웅을 왔다.
“아가, 울지 마. 형 금방 올 거야. 요샌 뭐, 군대도 짧아져서 눈 감았다 뜨면 제대야.”
“나 때는 삼 년이나 했는데. 일 년 반이면 뭐, 총은 제대로 쏴 보고 끝나나?”
유채가 하도 태오의 본가에 자주 드나들어서 그새 익숙해진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를 달랬다. 눈 감았다 뜨면 제대라니. 태오가 남의 일이라고 대충 얘기한다고 부모님에게 섭섭해하는 동안 유채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눈물에 푹 젖은 목소리로,
“아기 아니에요. 다음 달에 열여덟 살 돼요!”
하고 애처롭고 절박하게 외쳐서 모두를 웃겼다.
그즈음 유채는 열다섯 번의 고백과 열일곱 번의 손깍지 시도를 태오에게 모두 거부당하고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태오가 입영 날짜를 받아 놓고 조금 심란해졌던 어느 날 밤, 여느 때처럼 재채기 같은 고백을 퍼부어 놓고 거절당한 유채는 차가운 연습실 바닥에서 태오의 곁에 꼭 붙어 앉은 채 말했다.
-형이 조금만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좋았잖아요.
소년의 통통한 뺨에 떠오른 불만이 너무 진심이어서 태오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태오가 유채의 농담 같은 진심을 여지도 남기지 않고 싹둑 잘라 버리는 이유와, 그가 평범하지 않은 톱스타라는 사실은 아무 관련이 없었다.
-내가 평범했으면 뭐, 어린애랑 만났을 것 같아? 꼬마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이제 유채는 제법 키가 자라서, 허리를 세우고 곧게 서면 머리끝이 태오의 이마까지 닿을 정도로 컸는데도 태오에겐 여전히 애였다. 178센티 정도 되었으려나. 그의 신장을 가늠해 보는 태오를 향해 눈썹을 치켜뜨면서 유채가 물었다.
-그건 내가 돈도 없는 연습생이라서 안 되는 게 아니라 어려서 그렇다는 뜻이에요?
어린애의 질문은 맹랑하기도 했다. 태오는 말문이 막혔지만, 빤히 올려다보는 투명한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어서 우물우물 입술을 달싹거렸다.
-연습생인 게 무슨 상관이야, 돈은 내가 많은데.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스무 살 되면 나 같은 건 기억에도 안 남아 있을걸.
-그건 두고 봐야 알죠.
유채는 한껏 밝아진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랬다.
-저는 기다리는 거 잘해요.
열일곱 해의 인생에서 유채는 가져 본 게 별로 없었고, 무언가를 차지하려면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소속사는 연습생들이 매달 보컬과 댄스 테스트를 치르게 했다. 평가 결과가 매겨질 때마다 성적에 따라 데뷔 조가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했다.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그를 소속사 숙소에 덜렁 남겨 놓고 떠났던 열한 살 이후로 유채는 두 손으로도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의 평가를 받았다. 유채가 그때 갖고 싶었던 건 최종 데뷔 조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연습생들의 에이스 자리도, 데뷔 조의 센터도 긴 기다림 끝에 유채의 차지가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유채는 하나밖에 없는 운동화 밑창이 닳아서 구멍이 뚫리고, 발가락마다 잡혔던 물집이 터지고 피 나기를 반복하다가 굳은살이 될 때까지 지하 연습실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다.
때로는 그런 시간 뒤에도 유채의 두 손에 쥐어지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가 있었다. 누구나 다 유채를 에이스로 꼽았지만 몇 년이 지날 동안 회사는 유채를 데뷔 조에 넣어 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데뷔 조에 든 뒤에도 데뷔 일정은 기약 없이 밀리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유채는 빈주먹을 등 뒤로 감추면서 다음에는, 하고 입속말로 중얼거린 후 표정을 고쳤다. 기다리는 모든 것이 언제나 제시간에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유채에게 와 주었다.
태오도 그럴 거라고 유채는 믿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은 댄스반의 월말 평가일이었다. 다섯 명이 조를 짜서 추었던 군무 테스트에서 유채 혼자 만점을 받았다. 유채는 나머지 네 명에게 양쪽 팔이 잡힌 채 옥상으로 끌려가 따귀를 맞았다. 연이어 날아드는 발길질은 눈물이 찔끔 나도록 아팠다.
유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데뷔 조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는 것만 되새기면서, 자꾸만 아래로 처지려는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어차피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었다. 십 대의 연습생들은 기약 없이 어둡기만 한 미래 앞에서 쉽게 무너져 내렸다. 뺨에 시커먼 멍을 달아도 쫓아와서 따져 주는 사람이 없는 유채는 그들이 막연한 두려움을 풀어내기에 좋은 배출구였다. 흐린 겨울날, 이 시간이 어서 끝나길 기다리면서 유채는 소리도 내지 않고 맞았다.
그때, 어둑한 하늘과 축축한 공기 사이에서 태오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윤태오. 그는 이미 높은 곳에서 빛나는 천만 배우였고, 유채도 당연히 그를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태오는 키가 훌쩍 컸다. 적당한 운동으로 단련된 어깨는 탄탄하고 넓어서, 가뜩이나 작은 얼굴이 더 조막만 하게 보였다. 반듯한 이목구비는 또렷하면서도 오밀조밀한 구석이 있었다. 칙칙한 겨울비가 그의 매끈한 뺨에 닿아 부서지면서 봄볕처럼 빛났다.
태오는 몇 마디 말로 순식간에 연습생들을 쫓아 보냈다. 그들은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모두 다 계약 해지가 되었다.
옅은 쌍꺼풀이 진 태오의 눈매는 부드러웠다.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유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상냥한 시선이 지나치게 달았다. 그 다정에 흠뻑 젖어 숨이 가빴다.
왜 나를 걱정해 주지?
유채는 울컥했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가슴 안쪽이 뻐근하게 뛰었다. 다행히도, 부슬거리며 떨어지던 빗줄기가 이내 굵어지면서 유채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을 가려 주었다.
침묵이 길어졌지만 유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 박동 소리가 태오에게 들릴까 봐 초조해하느라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도 몰랐다. 태오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유채는 어쩔 줄 모르고 두 손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는 유채가 처음으로 가져 본 ‘내 편’이었다.
-너…… 괜찮아?
태오가 물었고,
-아무렇지도 않아요.
유채는 제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만 평생 해 왔다. 그러나 그날부터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온 세상을 통틀어 유채의 세계에는 오직 태오뿐이었다. 그 사실을 들키면 부담스러워진 태오가 놀라서 멀찌감치 물러설까 봐 유채는 안간힘을 다해 제 마음을 숨겼다. 그래도 가슴 속 상자에 구겨 넣은 마음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팡 터져서 흘러넘칠 때가 있었다.
이를테면 태오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유채의 구멍 뚫린 운동화 곁에 하얀색 새 운동화를 놓아 줄 때 그랬다. 진작에 작아져서 벌어진 틈으로 발가락 끝이 나왔던 낡은 운동화보다 한 치수 큰 사이즈였다.
-이런 거 안 사 주셔도 되는데.
쑥스러워진 유채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고 웅얼거리면,
-춤추는 사람은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신어야 해. 넘어져서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춤이라고는 유치원 다닐 때의 재롱 잔치에서도 춰 본 적 없는 태오가 유채의 새 운동화 끈을 매 주면서 잔소리를 했다.
-작아지면 또 사 줄게.
유채는 태오가 꽃잎이 네 장 달린 꽃 모양으로 끈을 묶어 준 운동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쪽 꽃은 분홍색, 다른 쪽 꽃은 노란색이었다.
-예쁘지. Y튜브 채널에서 보고 배웠어.
자랑하는 태오의 얼굴이 뿌듯해 보여서, 유채는 춤출 때 신는 운동화 끈을 이렇게 묶으면 안 된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입 밖으로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형, 좋아해요.
태오를 향한 유채의 고백은 언제나 재채기 같았지만 그날은 아예 딸꾹질 수준이었다. 유채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놀란 태오가 허둥지둥 유채의 뺨을 쥐고 눈물을 쓸어 주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쳐지지가 않았다.
-알아. 아니까 울지 마. 뚝 그쳐. 응?
-알긴 뭘 알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후드득 눈물을 쏟으면서도 유채는 야무지게 따졌다. 태오는 그만 입을 꾹 다물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면서 ‘어쩌라는 거지.’ 하는 얼굴을 했다.
-형은 나한테 전 세계란 말이에요. 그것도 알아요?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었다. 유치하고 위태로운 데다 맹목적이기까지 한 제 약점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꼴이었다. 유채는 입을 여는 순간 큰일 났다는 것을 알았다. 딸꾹질을 와르르 쏟아 놓고 유채는 겁을 먹었다.
태오가 당장이라도 얼굴을 굳히면서 등을 돌려 나가 버릴까 봐 무서웠고, 그걸 짐작하면서도 울음이 그쳐지지 않아서 겁났다. 이대로 태오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만약 그를 잃는다면 유채의 세상은 무너져 버릴 것이다. 차라리 유채가 죽는 편이 나았다.
-전 세계만으로 되겠어?
그런데 상상 속에서 수없이 부담스러운 얼굴을 하고 유채를 밀어냈던 태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여상하게 말했다.
-기왕이면 꿈이 커야지. 우주쯤은 되어 달라고 해.
놀라서 울음을 뚝 그친 유채는 까만 눈동자를 장난스럽게 빛내는 태오를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면서 속으로만 물었다. 진짜야?
-진짜야.
입 밖으로 내지도 않은 소원을 태오는 당연한 듯 알아들었다. 태오가 두 눈을 쌕 접었다.
-내가 네 우주 해 줄게.
그러니 그가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유채는 태오가 제게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연락 자주 해야 돼요.”
그래도 열일곱—다음 달이면 열여덟이 되는 소년에게, 살아온 인생의 십분의 일이나 되는 시간인 일 년 반은 너무 길었다. 기다릴 자신이 있는 것과 기다림의 시간이 힘겨운 것은 다른 문제다. 그래서 유채는 군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깎아지른 태오의 앞에서 서러운 얼굴로 훌쩍훌쩍 울었다.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빼곡히 들어찬 짙은 속눈썹이 흠뻑 젖은 채 가닥가닥 갈라져 있었다.
“핸드폰 받자마자 전화할게.”
태오는 난처한 얼굴로 웃으면서, 유채의 말간 뺨을 적신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주었다. 비밀리에 입대하느라 방송국 카메라가 와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
태오가 군대에 머무는 이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유채는 제법 비싸게 굴었다. 휴가를 나가도 유채의 백금발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볼 수 없었다. 제대할 때가 다 되도록 유채를 한 번도 못 만날 줄은 몰랐던 태오는, 네 번째 휴가를 마치고 타박타박 부대에 복귀하면서 조금 허탈한 마음이 되었다.
유채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좋은 일이 있었다. 데뷔 조에 속한 후 이 년, 드디어 데뷔 일정이 잡힌 것이다. 유채는 본격적인 데뷔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태오는 모처럼의 휴가 중에도 유채를 못 만나게 된 게 섭섭했지만 그래도 기쁜 마음이 훨씬 더 컸다.
어느 날은 운 좋게 시간을 내서 전화를 걸어 온 유채가 보고 싶다고 우는소리를 했다.
“데뷔 준비랑 내 면회 오는 거 중에 하나만 골라야겠네.”
태오가 놀렸다. 그러자 단박에 태오를 선택할 줄 알았던 유채는 의외로 곤란한 듯 머뭇거렸는데, 태오는 과장되게 서운해하는 척 장난을 치면서 유채를 당황시켰지만 사실은 정말로 섭섭했다.
[데뷔하고 빨리 돈 많이 벌어서 형 호강시켜 주고 싶어요.]
“뭐? 하하…….”
연달아 웅얼거리는 유채의 대꾸에 웃어 버리느라 서운함이 오래가진 못했다. 태오는 제 명의로 된 건물들의 월세 수익만으로도 평생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래. 기대할게.”
하고 대꾸해서 유채를 기쁘게 해 주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회사 밖으로 나와 본 적도 몇 번 없었던 유채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회사가 몇 년 만에 런칭한 새 보이그룹의 이름은 ‘래디언스’였다. ‘행복한 빛’이라는 뜻이 유채와 잘 어울렸다. 정작 유채는 조금 더 박력 있는 이름을 원했는지 휴대폰 너머에서 툴툴거렸다. 그래도 목소리에 기쁨이 넘쳤다. 하필이면 런칭 시기가 사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월드컵 시기와 맞물려 버려서, 첫 활동이 다 끝나 가도록 주목받지 못하고 그저 그런 아이돌 그룹 중 하나로 성적이 매겨지게 되었는데도 그랬다.
“아, 회사 일 안 하지. 월드컵 6월인 거 하루 이틀 일이야? 안 되겠다, 실장들 죄다 갈아 치워야겠어.”
팬카페에서 많이 본 팬들의 말투를 흉내 내서 화내는 태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유채는 뭐가 좋다고 키득거렸다.
“국대가 이렇게 잘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면서 회사의 입장에서 변명까지 해 주었다. 역대 최약체라고 평가되었던 탓에 16강도 못 가고 떨어질 줄 알았던 대표팀이 8강까지 올라가면서, 월드컵의 열기가 6월 말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래디언스의 런칭 시기와 겹쳐 버린 것이었으니 유채의 변명이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그런 거 다 계산해서 전략 짜라고 회사가 있는 거야.”
[전 진짜 괜찮은데.]
“아냐, 안 되겠어. 내가 기획사 세울 테니까 거기 계약 끝나면 나하고 일하자.”
[좋아요.]
유채가 신나는 목소리로 냉큼 대답했다.
그러나 회사에 대한 태오의 불만이 그뿐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데뷔 조에서 유채는 내내 센터였는데도 막상 데뷔하고 보니 다른 소년이 그 자리를 맡았다. 뒤늦게 합류한 아이는 유채보다 두 살 어렸고, 춤도 노래도 랩도 유채보다 뛰어난 것 같지 않았다. 정확히는, 매사에 묘하게 설렁거렸다.
래디언스의 영상이라면 음방에 직캠, 연습 영상까지 마르고 닳도록 돌려 보았던 태오가 그 애매한 기류를 모를 수 없었다. 말끔하고 예쁘게 생긴 외모가 눈에 띄긴 했다. 그러나 태오가 보기엔 그마저도 유채가 훨씬 나았다.
“병장님, 또 그 동생분 영상 보십니까? 지금 클로비스 컴백 방송하지 말입니다.”
같은 숙소를 쓰는 상병이 함께 걸그룹 무대를 보자고 졸랐다. 손사래를 치면서 밀어냈지만, 그는 태오의 곁에 붙어 앉으면서 목을 길게 빼고 태오의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병장님 동생분 지인짜 잘생겼습니다.”
“……그렇지?”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 했었죠?”
“유채. 한유채. 이제 좀 외워라, 외워.”
기분이 풀어진 태오가 상병 쪽으로 핸드폰을 기울여 주었다. 상병이 연신 종알거렸다.
“아, 근데 전에 봤을 때도 느꼈는데 말입니다. 여기 이 친구, 병장님이랑 정말 닮았습니다.”
“뭐? 누구?”
눈을 크게 뜬 태오가 상병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유채의 자리를 빼앗아 간 센터 멤버의 상기된 얼굴이 화면 가득 잡히고 있었다. 태오가 의아한 듯 물었다.
“얘가 날 닮았다고?”
“예. 모르셨습니까? 기사도 떴었지 말입니다. ‘리틀 태오’라고 부르던데요?”
“그랬어?”
“그래서 이 친구 덕분에 유입이 좀 있는 모양입니다. 역시 병장님 파는 게 최고인 거 같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닮지 않았습니까?”
“나는 잘 모르겠는데.”
태오는 상병에게 적당히 대꾸하면서, 자신을 닮았다는 영상 속 소년을 바라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어딜 봐도 유채가 낫잖아. 왜 얘한테 밀린 거야?’
유력한 집안의 아들이 회사에 뒷돈을 넣어서 데뷔 조 멤버를 바꾸는 경우를 간혹 보았기 때문에 의심이 들었다.
‘밀어낼 때 밀어내더라도 근거는 있어야 할 거 아냐. 회사 일 처리 자꾸 이따위로 하지?’
상병은 그 후에도 한참 동안 ‘리틀 태오’에 대해서 떠들어 댔다. 맞장구는 쳐 주었지만, 다른 생각에 빠진 태오의 귀에는 상병의 시답잖은 수다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말년 병장이 된 태오는 넘쳐 나는 게 시간이었다. 그날도 오후 훈련을 마친 후, 래디언스의 영상을 틀어 놓고 유채와 ‘리틀 태오’를 비교해 보고 있는데 유채에게서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보통은 군부대에서 금지되는 영상 통화를 요 며칠 이벤트성으로 허가해 주었다는 얘기를 기억해 둔 모양이었다.
태오는 반대편 구석에서 늘어져 TV를 보고 있는 상병을 훠이훠이 손짓해 쫓아냈다. 눈이 뾰족해졌던 상병은 태오가 그에게 오만 원권 두 장을 쥐여 주면서 ‘과자 사 먹고 와.’ 하자, 래디언스에게 평생 문자 투표를 하겠다면서 ‘충성!’ 하고는 후다닥 뛰쳐나갔다.
“응, 유채야.”
백금발 아래의 해사한 뺨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방금 무대를 마치고 왔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유채의 표정은 밝았다.
[형. 뭐 하고 있었어요?]
“나야 그냥 있지.”
유채의 센터 자리를 빼앗아 간 열일곱 살짜리를 상대로 진지하게 한을 품고 있었다고 말하기가 괴로워서 태오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너는?”
[저는 사녹이요.]
“어떻게 핸드폰을 받았어?”
유채와 연락이 잘되지 않는 것은 그 애가 바빠서인 탓도 있지만 핸드폰을 반납해야 했던 까닭이 더 컸다. 음방에서 몇 위 이상을 하면 돌려준다던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태오는 요즘에도 그런 게 있냐면서 펄쩍 뛰었다. 그러나 낮 동안 핸드폰을 압수당하는 처지인 것은 태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대기 시간이 너무 길다고 매니저 형이 회사 몰래 가져다줬어요.]
“아, 잘했네.”
래디언스의 매니저가 누구더라. 태오는 떠나온 지 일 년이 훌쩍 넘어가는 회사의 직원들을 떠올려 보았다.
[명태 형이요. 예전에 언컨트롤 로드로 있었던.]
“아, 김명태 씨. 다행이다. 사람 좋고 일 잘한다고 칭찬하는 얘기 많이 들었어.”
매니저가 누구더라, 할 때 태오가 무심코 소리 내어 중얼거렸는지, 냉큼 대답한 유채는 태오의 말에 눈매를 길게 접고 웃었다.
“왜 웃어.”
태오가 묻자,
[그냥요. 형이 신경 써 주는 거 같아서.]
유채가 섭섭한 소리를 했다. 태오는 미간을 좁혔다.
“내가 언제는 신경 안 썼다고?”
[백 번 신경 써 주면 백 번 다 좋아요.]
태오는 별다른 대꾸 없이 제 입가를 쓰다듬으면서 그냥 웃어 버렸다.
십만 원을 들고 신나서 뛰쳐나간 상병은 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유채의 대기 시간도 하염없이 길었다. 그래서 모처럼의 대화는 길게 이어질 수 있었다. 불러 놓고 애들을 고생시킨다며 음방의 관례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던 태오의 불만이 오늘따라 쏙 들어갔다. 통화는 오랜만이었다. 얼굴을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더 오래전이다.
쓸데없고 영양가 없고 소소한 얘기가 끊임없이 오가던 도중 누군가 유채를 불렀다. 유채는 금세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분위기를 보니 바로 가 봐야 하는 것 같았는데 자꾸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 애의 마음이 편하도록 얼른 가 봐, 하고 등 떠밀어야 하는데 태오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이를 헛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 뚫었네?”
유채를 채근하는 목소리가 몇 번 더 들려오는 것을 불편한 마음으로 무시하면서 다른 얘기를 꺼냈다. 살짝 부어오른 귓불에 까만 원형 피어싱이 꽂혀 있었다. 아까부터 눈에 띄었지만 다른 이야기들을 하다가 언급하는 걸 잊었다. 유채의 표정이 환해졌다. 알아봐 주길 바란 것 같았다.
[네. 며칠 안 됐어요. 어때요?]
“예뻐. 근데 아직 안 아물었어?”
[조금 덧나서……. 약간 부었어요.]
“아파서 어떡해.”
유채가 웃었다. 그리고 태오의 귓가에 소곤대는 듯한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아요.”
대꾸하는 유채의 뺨이 발긋했다. 태오도 유채와 시선을 마주치면서 따라 웃었다.
[유채 형. 왜 대답 안 해.]
그때, 화면 안으로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유채의 표정이 슬쩍 굳었고, 태오는 눈을 크게 떴다.
[뭐야. 통화하고 있었어? 그만 끊어. 명태 형이 잠깐 오래.]
프레임 안에 새로 나타난 얼굴은 눈에 익었다. 조금 전까지도 영상 속에서 그 애를 보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년 넘게 데뷔 조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네 명의 연습생 사이에 몇 달 전 갑자기 나타난 열일곱 살짜리, ‘리틀 태오’. 회사의 핑계는 ‘무대 대형을 짤 때는 홀수여야 좋다’였지만, 그렇게 등장한 다섯 번째 멤버에게 유채의 센터 자리를 뺏어다 준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곧 갈게. 먼저 가 있어.]
[아이, 왜. 같이 가자, 응?]
소년은 두 팔을 뻗어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기댔다. 유채보다 조금 작은 탓에 아이의 뺨은 유채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 뺨이 유채의 맨 살갗에 바르작거리는 감촉이 느껴질 것처럼 생생했다. 태오의 눈이 조금 더 커졌을 때, 유채가 딱딱한 얼굴로 소년을 밀어내 떼어 놓았다.
[형,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대꾸하는 대신, 유채는 화면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소년의 시선도 유채를 따라 이쪽으로 움직였다. 액정 너머에서 소년이 태오를 향해 눈싸움을 걸어왔다.
[유채 형, 저 사람 누구야?]
화면 속의 소년이 유채의 귓가에 대고 소곤소곤 물었다. 태오는 눈썹을 구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리틀 태오’로 이름을 얻은 소년이 태오의 얼굴을 몰라볼 리는 없으니, 열일곱 살짜리는 대놓고 태오를 도발하는 중이었다. 태오는 헛웃음을 쳤다.
[신우주. 좀 떨어져.]
유채의 센터를 빼앗아 갔다는 생각에 노려보기만 했을 뿐 소년의 이름을 찾아볼 만큼의 관심은 없었던 태오는 그때 그 애의 이름을 알았다. 이름 예쁘네. 태오는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형, 미안해요. 이따가 일정 끝나면……. 아니, 나중에요. 나중에 또 전화할게요.]
일정이 끝나면 핸드폰도 다시 반납할 테니 유채의 ‘나중에’가 언제가 될지는 태오도 모르고 유채도 몰랐다. 그러나 태오는 싱긋 웃었다.
“잘 가. 일 끝나면 밥 잘 챙겨 먹고, 잘 자고.”
[……응. 형도.]
전화가 툭 끊겼다.
태오는 까맣게 꺼진 화면을 가만히 쏘아보다가, 자괴감 섞인 한숨을 푹 쉰 후 검색창에 글자를 톡톡 쳐서 넣었다. ‘래디언스 신우주’. 뉴스 기사 몇 개가 금세 나왔다.
[포토] 신인 보이그룹 래디언스 ‘우주’, 윤태오 닮은 꼴 ‘리틀 태오’로 눈길
“리틀 태오? 과분한 칭찬 같아… 윤태오 선배님께 죄송하죠”
[한국연예닷컴 왕해나 기자] 신인 그룹 ‘래디언스’의 메인 댄서 우주(17)가 영화배우 윤태오(24) 닮은 꼴로 화제를 모았다. 우주는 작은 얼굴과 사랑스러운 눈웃음, 인형 같은 외모가 ‘국민 첫사랑’ 시절 윤태오를 꼭 닮았다는 평가와 함께 ‘리틀 태오’로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한편, 우주가 속해 있는 보이그룹 ‘래디언스’는 지난 22일 서울 한남동 블랙스퀘어에서 선보인 첫 번째 미니 앨범 ‘One summer night’ 발매 기념 쇼케이스를 통해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마쳤다. ‘행복하고 밝은 빛’을 뜻하는 그룹명 ‘래디언스(radiance)’는 팬들에게 행복을 주는 따스한 빛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왕해나 기자 [email protected]
[댓글]
▶boys****
얘네 누구야? 개나소나 태오한테 들이대는거 나만 불편해?
(좋아요 403 싫어요 19)
↳ 어 너만불편해
↳ 대충봐도 닮았더만 윤태오빠순이들 남의돌 기사까지 쫓아와 지랄ㅋㅋ
↳↳ 엥ㅋㅋㅋ 니네돌이 태오한테 먼저 비빈거잖아ㅋㅋㅋㅋㅋ
▶whn8****
리틀 태오ㅋㅋㅋㅋㅋㅋ 기사 수준 실화냨ㅋㅋㅋㅋㅋㅋㅋ
(좋아요 332 싫어요 12)
↳ 3초 윤태오
↳↳ ㄴㄴ 백미터태오
↳↳↳ 백미터 떨어지면 망돌이 윤태오 됨?ㅋㅋㅋㅋㅋ
↳↳↳↳ 근시냐
▶byki****
? 우주 실물 오지는데 어딜봐서 윤태오닮음
(좋아요 32 싫어요 419)
↳ 다늙은 윤태오 신인돌이랑 닮았다해주면 좋은거 아니냐ㅋㅋㅋㅋ 언제적 국민첫사랑 ㅋㅋㅋㅋㅋ
↳↳ 태오가 뭐가 아쉬워섴ㅋㅋㅋㅋㅋㅋ 니돌 너만알지 듣보거든요ㅋㅋㅋㅋㅋ
↳↳↳ 윤태오 지금 내무반에서 기사보다가 래디언스가 뭔데? 온수매트냐? 이러고있을듯ㅋㅋㅋㅋㅋ
↳↳↳↳ 태오는 이런 기사 안 봐……
▶kimg****
듣보망돌이 어디서 태오한테 숟가락 얹어…… 리틀 태오,,,? 짭태오겠지……
(좋아요 457 싫어요 9)
↳ 짭태오ㅋㅋㅋㅋㅋㅋㅋ 이거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ㅁㅊㅋㅋㅋ 기사 타이틀 바꿔라 짭태오로ㅋㅋㅋㅋㅋㅋ
▶tan9****
그래서 태오 언제 제대함?
(좋아요 157 싫어요 7)
↳ 나올 때 됏는데…… 태오야 누나가 두부가져갈게 언제니ㅠㅠㅠㅠ
↳↳ ㅅㅂ두부를 왜 가져가;;; 윤태오 감방갔냐;;;
↳↳ 윤태오 어디 감?
↳↳↳ 군대갔다고ㅆㅂ 눈깔이 장식인가
↳↳↳↳ 왜이렇게 화났어;;;;
▶momo****
이왕 비슷한 얼굴일거면 늙은군바리보다 파릇파릇한 애가 낫지 안냐 ㅋㅋㅋㅋㅋ
(좋아요 12 싫어요 512)
↳ ㅇㅈㅋㅋㅋㅋ생긴거존꼴
↳↳ 네 다음 은팔찌
↳↳ 철컹철컹ㅋㅋㅋㅋㅋ
▶sans****
나 얘네 알아 저기 존잘 하나 있음
(좋아요 112 싫어요 31)
↳ 누구? 짭태오?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도랐나
(더보기)
댓글까지 꼼꼼히 읽어 보았지만 유채에 대한 언급은 한 줄도 없었다. 태오는 속상한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끄면서, 마지막 댓글이 말한 ‘존잘 하나’가 유채일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유채의 첫 활동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오의 전역일이 다가왔다. 유채와 통화할 때마다 자리를 비켜 주는 대가를 쏠쏠히 챙겨 왔던 상병이 서러운 얼굴로 엉엉 울었다.
“그만 울어. 휴가 나올 때 연락하면 용돈 챙겨 줄게.”
“제가 뭐 용돈 때문에 슬픈 줄 아십니까?”
“아니야?”
“용돈 안 주셔도 됩니다. 대신 술도 사 주시고 밥도 사 주시고, 어, 영화도 같이 봐 주십쇼.”
“너는 애인도 없어?”
“있겠습니까?”
태오는 182센티인 저보다도 한참 더 커 보이는 덩치가 안기려고 드는 것을 피해서 빠르게 도망쳤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상병에게 손을 흔들어 준 후 등을 돌리자,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걸음이 빨라지는 것이 의식될 때마다 말아 쥔 손안에 땀이 배었다. 급할 게 뭐 있어, 천천히 가야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태오는 입구를 향해 뛰었다. 유채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부대 입구를 나서자 먼발치에서 연신 이쪽을 기웃거리며 서 있는 길쭉한 인영이 보였다. 서둘러 긴 다리를 움직이던 태오의 걸음이 뚝 멎었다. 눈, 코, 입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유채가 웃는 것 같았다.
“형!”
흙바닥에 부딪히는 발걸음 소리가 다급했다. 단박에 와다닥 달려와 팔에 덥석 매달린 유채에게 밀려서 태오의 몸이 휘청거렸다. 제자리에서 굳어 서 있던 태오가 그제야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태오는 괜히 목이 메는 거 같아서, 헛기침을 흠흠 하고 중얼거렸다.
“유채야……. 너 이제 이렇게 덤비면 안 돼, 무겁잖아.”
“형, 형.”
“떨어져 봐 봐. 얼굴 좀 보자. 대체 키가 얼마나 큰 거야?”
유채는 자꾸만 태오에게 안기려고 했지만 한쪽 어깨가 그의 품 밖으로 삐죽 나왔다. 넓고 다부진 어깨가 낯설었다. 태오는 그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유채를 살살 달래 떼어 놓았다. 그에게서 겨우 떨어진 유채가 허리를 곧게 펴면서 똑바로 섰다. 태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채를 훑어보았다.
흰색 반팔 티가 가슴팍에서 팽팽했다가 허리 부근에서 낙낙해졌다. 단단한 허벅지 선이 드러나는 물 빠진 청바지 아래로 끈이 다 풀린 운동화가 보였다.
“신발이 그게 뭐야. 운동화 끈 제대로 묶어야지.”
“몰라, 형이 묶어 줘요. 꽃 모양으로 예쁘게.”
유채가 고개를 갸웃해서 태오를 내려다보고 투정을 부렸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태오는 조금 멍해지고 말았다.
헤어질 때는 겨울이었는데 7월도 벌써 중순이었다. 반년만 지난 게 아니라 계절이 한 바퀴 더 돌았다. 여름 해가 하늘 한가운데 또렷하게 떠 있었다. 쨍한 햇볕이 내리쪼여서 눈이 부셨다. 직접 만나는 것은 일 년 반 만이었다.
유채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햇볕이 고인 긴 속눈썹 아래에서 투명하게 빛났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통통한 느낌이 났던 뺨은 살이 빠졌는지 갸름했고 턱선이 날카로웠다. 그러나 흰 피부는 여전히 부드러워서, 예전보다 더 말갛고 해사해 보였다. 그리고,
낯선 각도에서 태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오보다 눈높이가 조금 높은 곳에서 유채가 눈을 깜박거렸다. 태오는 당황한 얼굴로 ‘아.’ 하고 신음을 뱉어 버린 뒤 말이 없었다.
“형?”
“어, 유채야. 그러니까…….”
태오는 황급히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복잡한 생각을 털어 내듯 머리를 흔들고, 군모를 고쳐 썼다.
태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네가 지금 몇 살이지?”
“저요? 열아홉 살이요.”
유채는 의아한 듯 대꾸하더니, 이내 볼을 붉히면서 작게 덧붙였다.
“다섯 달 반 지나면 스무 살이 돼요.”
유채의 스무 살을 반년 앞둔 여름. 태오는 그 애를 다시 만났다.
***
태오는 전역 후에도 바로 복귀하지 않고 휴식기를 가졌다. 아직 새 소속사를 결정하지 못했던 탓이다. 혼자서 활동하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매니저나 스타일링 팀 없이 움직이기에는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여기까지 생각한 태오는 헛웃음을 쳤다.
‘핑계 좋네.’
첫 활동기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난 후, 유채는 요즘 이렇다 할 스케줄이 없었다. 오히려 데뷔를 준비하던 기간에 훨씬 더 바빴던 것 같다. 불러 주는 데가 없다는 뜻이니 신인 아이돌로서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태오가 드디어 제대를 했기 때문에 유채는 줄곧 기분이 좋았고, 태오의 아파트를 매일같이 들락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태오는 이 기회를 틈타 유채와 놀고 싶었다. 쉼 없이 밀려드는 매니지먼트 회사들의 러브콜을 줄곧 거절하고 있는 이유가 투명했다.
어느 날은,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유채와 카레이싱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유채의 생일 선물로 사 준 것이었는데 제대하고 와 보니 태오의 아파트에 있었다. 둘 다 말없이 게임에만 열중하느라 조용해진 거실에 음향 효과와 함께 컨트롤러의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탁탁 울렸다. 태오는 한 번쯤 유채를 이겨 보고 싶었지만 십 대를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3전 3승을 하면서 태오를 약 올리던 유채가 불쑥 그랬다.
“애들이 형 궁금해해요. 케빈 형이랑 라윤이는 형 팬이래요.”
“애들?”
“멤버들이요.”
“아아.”
데뷔 직전에 합류한 신우주를 제외한 나머지 래디언스 멤버들은 태오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유채는 태오가 입대하기 전부터 데뷔 조였기 때문에, 연습실로 유채를 보러 갈 때 가끔 마주치곤 했다.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거나 시간을 보냈던 적은 없다. 무심했나 싶어서, 태오는 소파에 기대어 늘어지듯 누웠던 몸을 바로 세우고 고쳐 앉았다.
“애들이랑 날짜 잡아 봐. 맛있는 거 사 줄게.”
“그래도 돼요?”
그러고 싶어서 꺼낸 얘기면서 유채는 반색을 했다. 말간 뺨에 홍조가 도는 게 귀여워서 태오는 조금 웃었다.
“그럼. 어디 가고 싶어?”
“거기, ‘경희궁’이요. 룸도 따로 있으니까 편할 것 같아요.”
“음……. 다른 데 가도 돼.”
“거기가 좋아요.”
유채가 단호한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첫 앨범을 낸 래디언스는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유채는 여전히 모자와 마스크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밖을 다녔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룸이 필요한 쪽은 래디언스가 아니라 태오였다.
십 대의 남자애들이 한정식집을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태오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입술만 달싹거렸다. 유채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태오의 눈치를 봤다.
“싫어요, 형?”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다른 데 알아보자.”
“저는 거기가 제일 좋은데.”
여러모로 편리했기 때문에 태오는 경희궁의 오랜 단골이었지만, 몇 번 데려갈 때마다 유채는 상 위에 가득한 궁중 요리들을 깨작거리면서 먹는 시늉만 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으로 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태오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형이랑 처음으로 데이트했던 데잖아요. 멤버들한테 자랑하고 싶은데. 데이트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요.”
유채가 꿍얼거렸다.
데이트라고 말을 못 하는 것은 당연했다. 유채가 열여섯 살이었을 때, 두 번째 만났던 날 그와 함께 경희궁을 방문했던 그 일은 데이트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태오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그건 데이트가 아니고, 우리는 아직 데이트를 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최소한 반년간은 데이트할 예정이 없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눈만 느릿하게 깜박거리는 태오의 목덜미에 유채가 이마를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넓은 어깨를 구깃하게 접으면서 태오의 품을 파고들려고 했다.
“떨어지자, 유채야.”
유채의 스물세 번째 스킨십 시도는 가볍게 차단되었다. 동그랗게 톡 튀어나온 유채의 흰 이마를 검지로 밀어내면서 태오는 웃음을 삼켰다. 유채의 말랑한 뺨이 통통하게 부어 있었다.
“형, 이제 다섯 달 뒤면 내가…….”
“스무 살이 되네, 우리 유채가 벌써.”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태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섯 달이 군복무 일 년 반보다 더 긴 것 같았다.
***
가게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잎새 룸은 태오가 경희궁을 방문할 때마다 이용하는 곳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태오가 미안한 듯 웃으면서 방에 들어서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래디언스 멤버들이 경직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태오를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저희는……”
‘Let us shine! 안녕하세요, 래디언스입니다.’ 하면서 아이돌 구호까지 외칠 기세였다. 태오는 움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문가에 등을 부딪쳤다.
“와, 네. 알아요, 래디언스. 괜찮으니까 어서 앉아요.”
“예, 영광, 그, 감사합니다! 형님, 아니 저, 선배님!”
“하하, 네. 진정하고 편하게 해요. 형이라고 해도 돼요.”
“아닙니다, 저희가 어떻게 감히!”
쪼르르 섰던 세 명의 소년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 태오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오는 제 곁에 자리 잡은 유채에게 눈인사를 하고,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고 있는 마지막 멤버를 흘긋 바라보았다. 태오의 시선을 눈치챈 누군가가 소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신우주예요. 저까지 불러 주실 줄 몰랐네요. 감사합니다.”
전혀 감사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묘하게 빈정거리는 말투 같기도 했다. 옆에서 유채가 그를 노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태오는 싱긋 웃으면서 우주에게 고개를 까딱한 후, 테이블 아래로 유채의 허벅지를 토닥거렸다.
소년들의 긴장은 금세 풀렸다. 이 년 전부터 이미 안면이 익은 사이였고, 유채의 ‘친한 형’이라고 마음이 편해진 덕분이기도 했다. 줄곧 얼굴을 굳히고 있는 사람은 우주뿐이었다.
그러나 유채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굳이 관심 둘 필요가 없었다. 태오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유채 형, 이거 먹어. 떡볶이 좋아하잖아.”
“……괜찮아.”
“그래도 하나만 먹어 봐. 맛있다. 응?”
우주가 제 앞에 놓였던 궁중떡볶이를 유채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유채는 어딘지 고집스러운 얼굴로 그를 외면하더니 평소에는 손도 대지 않던 취나물 그릇에 젓가락을 댔다. 태오는 고개를 기울여, 아까부터 신난 얼굴로 연신 떠들어 대는 케빈의 수다를 받아 주었다. 신경 쓰지 않기로 10초 전에 자신과 한 약속을 착실히 지키는 중이었다.
유채보다 한 살 위로 미국 출신이라는 케빈은, 다소 어눌한 한국말로도 나머지 멤버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말이 많았다.
“그래서 제가 유채한테 그랬어요! 이 샛기야, 깝치지 마! 네가 무슨 윤태오를 안다고 그러냐? 구라 까고 있네! 근데 진짜 완전 친하잖아요? 케빈 진짜 깜짝 놀랬어!”
“케빈아, 말조심.”
리더라는 이신이 케빈의 팔을 툭툭 쳤다. 아까도 우주의 옆구리를 찔렀던 소년이었다. 스물한 살로 그룹에서 가장 연장자라서 리더가 되었다더니, 멤버들을 챙기고 분위기를 수습하는 역할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이신은 눈썹을 좁히면서 케빈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또 라윤이가 가르쳤어? 나중에 카메라 앞에서 그러면 안 돼. 태오 선배 앞에서도 안 돼.”
“그런 말이 모야? 이 샛기?”
“케빈아!”
몰래 얘기하려는 것 같았지만 다 들렸다. 태오는 후식으로 나온 매실차로 입술을 축이면서 슬쩍 웃었다. 얌전히 있다가 이신에게 지목당한 라윤이 펄쩍 뛰었다.
“저 아닙니다! 이신이 형은 왜 뻑하면 저만 팹니까?”
“너 지금 말하는 거 봐. 너 아니면 누구야.”
“아 유채 형일 수도 있잖습니까?”
열일곱 살짜리의 말투가 군 생활을 함께했던 상병과 비슷했다. 태오는 부대에 남겨 두고 온 덩치 큰 곰 같은 상병과 눈앞의 예쁘장한 소년을 비교한 것을 내심 미안해하면서 여상하게 말을 받았다.
“우리 유채는 그런 말 몰라.”
“…….”
“…….”
“……예…… 그렇습니까?”
소년들이 모두—유채와 궁중떡볶이를 놓고 여전히 옥신각신 중이던 우주까지—잠시 굳었다. 그룹에서 막내라는 라윤만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쳤다.
***
돌아가는 길에는 유채가 조용했다. 나머지 멤버들은 매니저가 숙소로 데려가고, 유채만 차에 태워 태오의 아파트로 향하는 길이었다. 태오는 검지를 세워 핸들을 톡톡 쳤다. 유채가 곁눈으로 그를 흘끔거렸다.
“왜? 재밌게 논 거 아니었어?”
태오가 물었다. 잘 놀고 왜 시무룩해졌냐는 뜻이었다. 유채는 어딘지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듯한 미간이 초조한 듯 찡그려졌다.
“사실은 말 안 한 게 있어요.”
몇 번이나 달싹거리다가 다물어 버리기를 반복하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말해 보라는 뜻으로 눈짓하자 유채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더니, 쓰고 있던 캡을 벗어서 손으로 앞머리를 다 헤집어 놓았다.
“우선……. 오늘 죄송해요. 걔가 형 앞에서까지 그럴 줄은 몰랐는데.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웬일로 따라온대서 그냥 뒀더니.”
태오는 무슨 말이냐고 묻는 대신 묵묵히 전면 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유채가 말하는 ‘걔’가 누군지 알아듣지 못하기는 어려웠다. 우주는 식사 내내 태오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눈치가 별로 없어 보이는 케빈까지 ‘야, 신우주. 너 얼굴을 왤케 구기고 그러냐? 배탈 났냐?’ 하고 화장실 방향으로 눈짓을 꾹꾹 할 정도였다.
“숙소 돌아가면 제가 가만 안 둘게요. 그러니까 형도 기분 풀고…….”
태오는 직접 만나 보니 생각보다 더 자신과 닮았던 우주의 얼굴을 떠올리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왕 비슷한 얼굴일 거면 파릇파릇한 애가 낫지 않냐.’ 우주의 ‘리틀 태오’ 기사 아래에서 읽었던 댓글이 문득 떠올랐다. 그러나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목소리는 부드럽게 나갔다.
“그러지 마.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길게 이어질 것 같았던 유채의 말이 뚝 멎었다.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태오가 그를 돌아보았다.
볼살이 내려 갸름해진 얼굴의 유채는 무표정했다. 미동도 없는 빽빽한 속눈썹 아래로 연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퍼뜩 빛났다. 눈높이가 태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게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까슬하게 갈라져 있었다. 유채가 건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신우주랑 사이좋게요?”
“우주든, 누구든. 멤버들이잖아.”
“형은 아무렇지도 않다고요? 정말 그래요?”
“안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
“……형은 왜 그렇게 항상 여유 있어요?”
앞 유리 너머에서 파란불이 켜졌다. 태오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고 액셀을 밟았다. 태오는 열다섯 살 이후 줄곧 배우로 살았다. 그는 연기에 능했다.
“너희 칠 년 계약이잖아. 오랫동안 같이 살고 활동해야 해. 얼굴 붉혀서 좋은 거 없어.”
차체가 도로 위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내가 말 안 한 거 있다고 했죠?”
귓가에 낮은 음성이 닿았다. 여느 때처럼 응, 하고 대꾸하는 대신 태오는 아랫입술을 말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처음으로 유채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유채는 기어코 입을 열었다.
“신우주가 나한테 고백했어요.”
핸들을 움켜쥔 태오의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
아파트에 들어선 유채는 그대로 거실 소파 위에 길게 엎어졌다. 백금발의 동그란 뒤통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태오가 몸을 휙 돌려 주방으로 사라졌다.
주방 안쪽에서 연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채는 몸을 뒤척여 바로 눕고, 커튼이 드리워진 주방 쪽을 흘긋거렸다가, 다시 눈을 꾹 감고 주먹을 말아 쥔 팔로 눈꺼풀 위를 가렸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태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유채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가슴이 서늘했다.
유채는 삼십 분을 더 버티다가 벌떡 일어섰다. 주방으로 향하는 걸음이 조급했다. 그런 얘기는 하지 말걸. 태오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고작 신우주 때문에.
“형, 내가…….”
잘못했어요. 말하려고 커튼을 걷었을 때였다. 아일랜드 식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 태오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 눈앞의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생긴 눈썹이 자꾸만 꿈틀거렸다. 유채도 태오의 찌푸린 시선을 따라 눈을 내렸다. 이제 막 완성된 듯한 빨간색 떡볶이가 보였다.
“어…….”
유채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태오는 고개도 들지 않고 턱 끝으로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시키는 대로 순순히 앉았다.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머뭇머뭇 눈치를 보는데, 태오가 툭, 말했다.
“‘이거 먹어. 떡볶이 좋아하잖아.’”
궁중떡볶이를 앞에 두고 우주가 했던 말이다. 제대로 비꼬는 목소리였다.
우주와 실랑이했던 것을 보고 있었는지는 몰랐다. 유채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면서 생각이 멈췄다. 당황한 유채는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가 닫기를 반복하면서 뻐끔거렸다.
그때, 태오가 고개를 툭 떨어뜨리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허탈한 듯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주방에 울렸다. 유채는 눈을 크게 떴다.
“아, 내가 진짜.”
혼잣말하듯 태오가 중얼거렸다. 유채는 어쩔 줄 모르고 입술만 꾹 물었다. 그리고 태오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짜증 난다, 유채야.”
평온한 말투와 달리 목소리는 온도가 높았다. 입매에 걸린 미소가 신경질적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안 먹어?”
유채는 그 순간 퍼뜩 상황을 깨달았다. 아까부터 줄곧 초조하게 떨렸던 심장이 이제 쿵쿵거리며 큰 소리로 뛰었다. 귀 끝에 순식간에 열이 몰렸다.
“먹어요.”
유채는 황급히 포크로 떡볶이 하나를 쿡 찍어 입 안에 넣었다.
집안일은 모두 가사 도우미의 손을 거치는 태오가 할 줄 아는 음식이 하나 있었다. 유채가 좋아하는 스타일인 눈물 날 만큼 맵고 단 떡볶이였다.
경희궁에서 처음으로 데이트했을 때, 희끄무레하게 만든 궁중떡볶이를 몇 입 먹지 않고 밀어 두었던 유채를 기억한 태오가 가정부에게 배워서 이미 몇 번이나 직접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태오가 뭐라고 하든 그건 그들의 첫 데이트가 맞았다.
두 뺨이 빵빵해지도록 입 안에 빨간 떡볶이를 잔뜩 밀어 넣은 유채를 빤히 바라보던 태오가 피식 웃었다. 아까보다 표정이 한결 풀려 있었다.
“잘 먹네. 맛있어?”
입을 벌릴 수가 없어서, 유채는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음식을 꿀꺽 삼킨 후 다시 떡볶이를 집는 유채를 향해서 태오가 또 물었다.
“그래서?”
“뭐가요?”
밑도 끝도, 주어도 목적어도 없이 ‘그래서?’였다. 유채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태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깨끗한 볼에 긴 보조개가 패었다.
“확실하게 거절했어?”
묻는 목소리가 나긋했다. 유채는 떡볶이를 흡입하다 말고 눈을 흘겼다.
“형, 진짜. ……당연하죠.”
혼자서 접시를 반쯤 비운 후, 이번에는 유채가 슬쩍 물었다.
“질투했어요?”
“누가. 내가?”
태오는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가뜩이나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채가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형이.”
“하.”
고개를 휙 돌리면서도 태오는 부인하지 않았다.
떡볶이가 가득 담겼던 접시가 금세 깨끗해졌다. 유채는 팔다리를 의자에 길게 늘어뜨렸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태오에게 와락 덤볐다. 태오는 당황하지도 않고 손을 휙 들어 유채를 털어 냈다.
스물네 번째 스킨십 시도가 또다시 막혔다. 유채가 약 오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섯 달만 지나 봐요.”
“네 달 삼 주야.”
태오가 대꾸했다. 열다섯 살 이후 줄곧 연기를 해 왔던 배우답게 표정 변화가 하나도 없었다. 야밤에 떡볶이를 잔뜩 먹고 통통하게 부어오른 유채의 두 뺨만 발긋하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