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1화 〉 망친 데이트2
* * *
레이시에 의해서 엘라에게 끌려간 남성은 트롤과 일 대 일로 마주쳤을 때보다 더한 공포를 느끼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불만이 있다고?”
태평한 얼굴로 웃는 엘라.
그런 엘라의 옆으로는 삐진 듯 입술을 샐쭉하게 내미는 레이시와 그런 레이시를 달래는 아샤가 있었고, 엘레오놀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언뜻 보면 평화로운 모습.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모습의 뒤엔 집채만한 호랑이와 늑대가 서로 그르렁거리면서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고, 마력이 남자의 어깨를 짓누르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었다.
“말해보지?”
“그, 그, 그게.”
“아, 왕족상해죄는 신경 쓰지 마. 나는 아샤와는 다르게 레이시를 밀쳤다고 너를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도 제대로 된 해답 없이 내게 불만을 품었다면 네가 그렇게 원하던 이주를 시켜줄 생각이야. 엘레오놀 공작, 좋은 곳이 있나?”
“어머, 저는 이 나라에 온지 1년도 안 된 신입 귀족인데요?”
“적당히 말해. 이런 평민 가족. 어디로 보내든 별로 상관이 없으니까.”
“그럼 저희 영지에 있는 코키아라는 곳은 어떤가요? 한낮에는 영상 10도의 기온을 지닌 선선한 곳인데.”
“밤에는?”
“영하 50도요.”
“살만하네.”
피식 웃으면서 영주를 불러서 남자의 이름을 물어보는 엘라.
영주는 엘라의 질문에 의문을 느꼈지만, 분위기를 읽고는 조심스럽게 남자의 이름, 남자의 가족들에 대해 알려주었고, 엘라는 영주의 설명에 남자의 가족을 전부 코키아로 차출하라는 명령서를 쓴 다음 손가락 사이에 도장을 끼고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도장만 찍으면 당장에 끌려갈 상황.
남자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빌기 시작했고, 엘라는 남자의 애원에 레이시를 바라봤다.
홧김에 끌고 왔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살짝 당황한 듯한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피식 웃더니 손가락을 튕기며 레이시를 불러 어떻게 해줄지 물어봤고, 레이시는 엘라의 질문에 움찔 떨더니 조심스럽게 남자를 바라봤다.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땅에 박는 남성의 모습.
미네르바야 약한 주제에 나대면 이렇게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니 그렇다 쳐도 평민일 병사들까지도 남자가 사과하는 모습에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지 않자 우물쭈물거리면서 엘라를 껴안았고, 엘라는 레이시가 겁을 먹은 듯 눈치를 보자 키득 웃으면서 기회를 새로 줄지 물어봤다.
“으, 으응, 네.”
“그렇다네. 정말이지, 우리 아내는 너무 자애로워서 문제야. 안 그래? 아샤.”
“그렇군요. 팔 하나 정도는 잘라도 아무도 뭐라 못 할 텐데 말이죠.”
“뭐,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너를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아야지. 엘레오놀. 이 녀석에게 최고로 힘든 일을 줘버려. 삽질 해야 하지?”
“가족 전체를 굴릴까요?”
“아이 빼고 어른들은 전부 다. 임금은 80% 선에서 내줘. 그리고 너, 한 번만 더 레이시의 눈앞에 보이면 그땐 정말로 코키아로 보낼 테니까 꺼져.”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땅에다 머리를 몇 번 박더니 달려가는 남자.
레이시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다가 복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한숨에 신경 쓰지 마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바깥에 돌다보면 저런 일 많을 꺼야.”
“그건 그렇겠지만……, 엘라의 일을 뭐라고 해서 홧김에 데리고 왔더니 반쯤 죽은 얼굴로 덜덜 떠는 모습을 보니 영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그래도 익숙해져야지.”
“아샤…….”
“높은 사람이 무조건 친근하다고 좋은 게 아냐. 권위에 덤비면 짓밟으면서 위치를 알려줘야 해. 그래야 명령에 따라.”
“으응, 그럴게요.”
이번에는 아샤에게 안겨서 애교를 부리는 레이시.
아샤는 자기가 레이시를 혼낸 꼴이 되자 머리를 긁적이면서 화를 내거나 그런 건 아니라며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췄고, 레이시는 아샤의 입맞춤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의 데이트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아샤를 올려다보자 아샤는 레이시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어주다가 엘라에게 시간을 좀 더 내겠다면서 나비를 불러 손을 까딱거렸다.
“조금 더 놀다올게.”
“밖에 나가게?”
“응.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놀아봤자 또 이런 일이 생길 거 같고, 몬스터의 피로 오염된 건 우리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치니까. 나비나 코코도 그렇고.”
“하기야. 레이시. 조심해서 놀고 와.”
“죄송해요오오오.”
“아냐, 어차피 내일까지는 서류 작업이니까.”
“미르랑 레아, 잘 부탁드려요.”
“응.”
“그, 그리고 미르랑 레아 밥 먹지 말구요…….”
얼굴을 붉히면서 엘라의 볼을 콕 찌르는 레이시.
전과가 있었던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눈을 꿈뻑거리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면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반응에 한숨을 푹 내쉬다가 엘라의 뺨에 입을 맞춘 다음 나비의 등 뒤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아샤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고, 아샤는 자기 허벅지에 눕는 레이시를 보고 말타는 것처럼 타지 않는 거냐고 물어봤다.
“나비는 무척 커서 괜찮아요.”
“하긴 이런 도시가 아니라면 마을 외각에 둘 정도로 크기는 하지.”
과장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집채만한 호랑이니까 사람 한, 둘 정도는 어깨와 목 사이의 공간에 누워도 아무렇지 않겠지.
아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레이시는 아샤의 손길에 눈을 깜빡거리다가 마수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나올지 물어봤다.
“글쎄? 에일렌을 가지기 전에 신수가 있는 곳에 가본 적 있지?”
“아, 하늘섬이요?”
“그래, 그런 곳에는 정순한 마나가 모이고 거기에서 생활하는 동물들은 정순한 마나를 먹고 신수가 돼.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살의와 적의가 가득한 마나가 담긴 피를 마신 동물들은 마수가 되고.”
“그 말은 땅이 정화될 때까지는 계속 마수가 나온다는 거네요?”
“응, 그래서 이런 땅을 가진 영주로는 안 된다는 거야. 그야 여기가 대곡창 지대지만 서류상으로는 스트라이크 공작 가문의 땅이고, 영주는 막말로 사원에 불과해서 함부로 지원해달라고 말하지 못하거든.”
“왜요? 제가 영주라면 스트라이크 공작 가문에게 지원해달라고 말할 건데.”
“음, 맞아. 영주도 신청했지.”
“그런데요?”
“수복에 실패했어. 그런데 또 스트라이크 가문에 도와달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해고된다?”
“그래, 그러니까 갈리아 공작 가문과 오라토리엄 왕가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지. 둘 중 하나만 되도 자기의 실패는 로비 비용으로 돌릴 수 있고 자기는 계속 영주로 살 수 있어.”
“그럼 재무대신님……, 그리니까 공작님과 아버님은 왜 받아들였어요?”
“갈리아 공작은 아마 스트라이크 가문에서 도와달라고 부탁을 받았을 거야. 마음대로 자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넓은 대곡창 지대를 다스릴 사람들을 일일이 뽑는 것도 일이니까 어쨌든 겉으로 자기 이름이 나오지 않게만 하라는 거지.”
“공작님은 그냥 그걸 받아들였고요?”
“갈리아 공작은 지금 동대륙에 대한 개방 정책을 펼치고 있어. 하지만 언제나 보수적인 사람이 있으니까 정책 정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 그런 상황에서 스트라이크 가문에서 자기를 지지해준다면 커다란 마찰 없이 정책 수립이 가능하지. 그래서 받아줬을 거야.”
“아버님은요?”
“너 때문이야. 엘라랑 나만 하더라도 신분이 말도 안 되는데 지금 백작으로 복귀를 명령 받은 미스트까지 너 하나랑 결혼해봐. 귀족들은 네 세력이 너무 커진다고 견제할걸? 어떤 세력이든 말이야. 하지만 네 이력서에 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어중간한 녀석들은 널 못 건들 테니까 이런 일을 하는 거겠지.”
“그렇구나…….”
“너에게 잘 대해주면 엘라가 왕의 명령을 잘 들을 거고, 엘라가 다음 왕가에도 힘을 보태줄 시간이 길어지겠지. 그래서 받아들인 거야. 아마 네가 왕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왔어도 네 이름으로 명령장이 갔을 거야. 물론 부탁을 흔쾌히 들어줘서 갈리아 공작과 국왕이 널 좀 더 좋아하겠지만.”
레이시는 아샤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샤를 꽉 끌어안고 아샤는 대단하다며 칭찬해주었다.
그러자 아샤는 얼굴을 붉히면서 이런 건 경험이 많으면 된다면서 레이시를 떨어트리려고 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행동에 배시시 웃으면서 짓궂은 농담을 건네기 시작했다.
“에헤헤, 이럴 땐 정말 귀여워요.”
“으윽!?”
“으응? 부끄러워요? 아샤가 이렇게 불러달라면서요. 귀염둥이.”
“으으윽……! 새, 생각보다 부끄럽네. 연극에서 하던 걸 그대로 부탁했는데.”
“귀여워.”
“하, 하지마.”
“쪽.”
“으으으…….”
레이시의 입맞춤에 아샤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레이시를 약하게 밀어내며 한숨을 내쉬었고, 레이시는 그런 아샤의 모습에 키득키득 웃다가 아샤를 꽉 끌어안고 나비의 배를 베개 삼아 낮잠을 자자고 말했다.
“그, 그럴까?”
“네! 에헤헤, 나올 때 담요도 챙겼고요.”
“으응, 그럼 낮잠이나 자자.”
레이시의 말에 아샤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는 나비와 함께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다른 무언가를 하지는 않지만 평화롭고 나른한 시간.
아샤는 자기 품에 기대어서 자는 레이시의 모습에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하품을 늘어지게 했고, 나비는 커다란 꼬리를 툭툭 흔들다가 이상한 인기척에 몸을 들었다.
“왜 그래? 이상한 거라도 발견했어?”
“그르릉.”
“……후우, 뭔데? 혼자서 죽일 수 있겠어?”
아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나비.
아샤는 나비의 대답에 머리를 긁적이다가 레이시를 자신의 품으로 더욱 끌어안으면서 혼자서 죽이고 시체를 끌고 올 수 있겠냐고 물어봤고, 나비는 아샤의 질문에 곧바로 몸을 뒤집고 산군의 위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저 멀리 가버릴 정도로 있는 힘껏 달림에도 울리지 않는 땅.
아샤는 그런 나비의 모습에 레이시의 마력을 듬뿍 먹어서인지 곧 신수로 진화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으으응…….”
“깼어?”
“나비는요?”
“사냥갔어.”
“후아아아암, 같이 자지.”
나비가 갔다는 말에 레이시는 시무룩하게 있다가 다시 아샤의 품에 안겨 배시시 웃었고,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낮잠은 안 잘 거냐고 물어봤다.
“나비, 돌아오면 입이 피투성이가 돼서 들어올 텐데.”
“으으응~ 그래도요. 저희만 자는 건 조금 그렇잖아요. 주변에 산책이라도 해요.”
“그럴까?”
이 근방은 마침 탐색되지 않은 부분.
레이시와 산책하면서 흑창 기사단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고.
어디까지나 보고서에 한 줄 추가될 뿐이지만, 레이시를 공격할 사람들은 그걸 전부 다 읽어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레이시의 손을 잡고 조사단이 가기 힘든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이내 지하동굴을 발견하고는 어떻게 할지 물어봤다.
“안으로 가볼까?”
“그럴까요? 뭔가 모험 같아서 재미있어요!”
“뭐, 자연 발생한 던전이겠지만.”
이러면 피가 고여서 안에는 특히 강한 마수가 모이겠지.
흑창 기사단이라면 아무래도 이런 던전 탐험에는 약하겠고.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레이시에게 아무래도 자연발생한 언데드가 있는 것 같다며 주의하라고 말했다.
“엣…….”
“아마 용아병 같은 거 아닐까?”
“그, 그런가요?”
“응, 일반적인 스켈레톤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
“어느 정도로요?”
“흐음, 용아병이라면 흑창 기사단이나 벽천화 기사단 중에서 한 25등 정도 하려나?”
“으응?”
아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반응에 왜 그러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뭔가 미묘하다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25등이라면 하위권이잖아요.”
“왕가가 직접 운영하는 최상급 기사단이야. 그중에서 하위권이라고 해도 전체적인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십만 명 중에 하나에 들 사람들이야.”
“헤에에……, 몰랐어요.”
“뭐, 레이시도 야차 중에서는 말도 안 되게 센 편이잖아? 엄연히 천재야, 레이시는.”
달그락거리면서 천천히 다가오는 용아병.
아샤는 레이시에게 레이시도 저 정도 녀석은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면서 주먹을 휘둘렀고, 레이시는 가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용기병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기는 아샤처럼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 되겠다면서 아샤의 뒤를 따라 동굴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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