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4화 〉 전쟁 사업4
* * *
베스티야 왕국 사신과의 대화는 별 내용이 없었다.
엘라의 역할은 그저 정보를 전해주고 그 자리에서 오라토리엄 왕국에 우호적으로 협상하겠다는 확답을 듣는 것이지 다른 게 아니었으니까.
“……지쳤다.”
그래도 정신적으로 지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애초에 사람들과 부대끼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이번 건 국가에서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했지만…….
“레이시 보고 싶어. 에일렌도.”
“준비해드릴까요?”
“준비는 무슨 준비. 너도 미르랑 레아 보고 싶을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저는 메이드라서요.”
“메이드 이전에 레이시의 첩이지.”
“그럼 처인 공주님를 앞서갈 수 없죠.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싱긋 웃으면서 자리를 떠나는 미스트.
꽤 빠르게 사라지는 기척에 엘라는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멈춰섰던 발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으음…….”
엘라가 레이시에게 가면서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건 파티에 대한 것.
오늘은 에일렌을 핑계 삼아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있다지만, 내일은 그게 아니다.
내일도 박혀 있으면 사과하겠다는 사람이 와서 억지로 만나서 대화를 하려고 할 거고, 자기는 그걸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없다.
……일을 대충한다는 이미지를 감수하면서까지 무시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러면 노후계획에 문제가 생기니 안 되겠지.
“하아아아…….”
예전이라면 그냥 전쟁이 일어나든 말든 무시했을 건데…….
물러진 걸까? 아니면 지켜야 할 게 늘어나서 이렇게 된 걸까?
엘라는 자신의 미적지근한 대응에 한숨을 푹 내쉬다가 이내 왕궁 구석에 있는 카페에서 간식을 팔고 있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음, 이거 말고는 간식이 없는 거야?”
“엘라 공주님!?”
“없냐고.”
“아, 넷! 지금은 마카롱을 제외하면…….”
“쯧…….”
레이시가 마카롱을 좋아하던가?
닭꼬치는 좋아하는 것 같던데, 케이크 종류도 잘 먹던가……?
그런 생각을 이어가던 엘라는 이내 레이시가 싫어하면 미스트나 미네르바에게 주면 되겠지 싶어 마카롱을 잔뜩 사고서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먼저 가서 준비해놓는다는 미스트의 말대로 꽤 깔끔하게 준비되어 있는 저택.
엘라는 그 저택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천천히 문을 열었고, 이내 허리를 숙인 레이시와 발뒤꿈치를 들고 있는 에일렌이 춤을 추는 걸 볼 수 있었다.
추는 춤은……, 어설프긴 하지만 귀족들이 무도회에서 추는 춤인가?
손짓부터 시작해서 몸짓, 발짓까지 전부 서투른 두 사람.
하지만 그런 서투른 춤이라도 열심히 연습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엘라는 아까까지 쌓였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녹는 걸 느끼면서 배시시 웃었고, 레이시는 엘라가 자기를 보고 웃자 배시시 웃으면서 에일렌에게 엘라가 왔다고 속삭여주었다.
“엘라 엄마아아~.”
“오늘 잘 지냈어?”
“웅! 엘레오놀 이모가 춤 알려줬어!”
“그래? 열심히 했나보네.”
“웅!”
“상이야.”
마카롱을 입에 넣어주면서 배시시 웃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행동에 간식을 너무 많이 주면 안 좋다면서 잔소리하면서도 에일렌에게는 맛있냐고 물어봤고, 에일렌은 볼을 양손으로 감싸쥔 채 배시시 웃었다.
“마시썽! 이 닦구 올게에에.”
하나로 배가 불렀던 걸까?
에일렌은 곧바로 이 닦고 코오 한다면서 미네르바와 함께 욕실로 들어갔고, 엘라는 그런 에일렌의 모습에 키득키득 웃다가 레이시의 입에도 마카롱을 넣어주었다.
달콤한 냄새.
입을 가득 채우는 그 냄새에 레이시는 놀란 눈으로 엘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웬일로 이런 군것질거리를 산 거냐면서 엘라를 바라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질문에 싱긋 웃더니 미스트는 어디에 있냐고 물어봤다.
“미스트는 내일은 바쁠 테니까 오늘은 자기가 미르랑 레아를 돌본다고 했어요.”
“그래? 그럼 에일렌을 재우고 말하자. 아이가 듣기에는 안 좋은 이야기니까.”
마카롱을 베어물고서 눈을 지그시 감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엘라가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걸 깨닫고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미안하다면서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직접 요리하시게요?”
“간단한 건 할 줄 알아.”
와인과 계피, 그리고 각종 향신료를 넣고 차를 끓이듯 끓이는 엘라.
엘라는 와인이 끓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과일과 얇게 자른 생햄을 나무 꼬챙이에 꽂아 긴 그릇에 올려두었고, 레이시는 엘라가 준비하는 걸 보고는 식탁을 깨끗하게 치운 다음 잔을 두개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아샤에게 뭔가 일을 부탁할지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냥 같이 듣자. 에일렌에게만 듣기 좀 그런 이야기지 다른 사람들은 아니니까.”
“네.”
엘라의 말에 레이시는 아이들을 제외하면 알 건 다 알 것 같다면서 아샤에게 줄 잔과 안주로 먹을 치즈를 잘라 크래커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만화에서나 볼 법한 구멍이 송송 뚫린 노란 치즈.
이게 무슨 치즈라고 했었지?
분명 교양채널에서 배운 거 같은데 몇 년 지났다고 다 까먹었을까?
하긴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에 처했으니 몇 년 전 교양 과목의 내용은 아무래도 좋지만…….
“무서워?”
“네?”
“손, 떨리길래. 칼날이 안 날카로운 칼이라서 다행이네.”
“아, 아하하하…….”
엘라의 말에 칼을 내려놓고 손을 감싸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해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애초에 태어나서부터 사람을 죽이는 것도 못 하고 일반적인 멧돼지를 한 마리 죽여도 헛구역질을 하던 레이시니까, 사람이 반드시 대량으로 죽는 전쟁을 무서워해도 이상할 건 없다.
가족을 위해서라면서 이빨을 드러낼 수 있게 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리해서 참는 것이지 사람이 죽는 것에 무덤덤해진 것은 아니다.
그러니 레이시라면 무서워해도 이상하지 않다.
엘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크래커를 대신 준비한 다음 직접 끓인 뱅쇼를 레이시와 자신의 잔에 채웠고, 하양이와 나비를 돌보고 돌아온 아샤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레이시의 옆자리에 앉아 잔을 받았다.
그러자 곧바로 머리를 기대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몸이 살짝 떨리자 레이시의 어깨를 감싸안아주었고, 레이시는 아샤의 손길에 배시시 웃으면서 다시금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푸훗…….”
그 모습에 작게 웃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웃음에 얼굴을 붉히면서 머리를 뗐지만, 엘라는 긴장이 풀렸으면 됐다면서 잔을 기울였다.
“우선……, 레이시도 짐작했듯이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됐어. 전쟁을 반대한다면 다음에는 우리 국가에다가 선전포고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더라.”
“…….”
“다른 사람들이 별 같잖지도 않은 돈을 대가로 목숨을 잃는 건 나로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오라토리엄 왕가의 사람들과 네 목숨과 비교하면 그 사람들의 목숨이 좀 더 가벼운 걸 부정할 수가 없어.”
자기가 말도 안 되게 강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엘라.
그렇기에 엘라는 목숨의 우선순위를 둘 거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말에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엘라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렇다면 여기에서 자기가 엘라의 아내로서 할 행동은, 엘라가 품에서 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응?”
“미스트 말로는 내일부터는 다시 밖에 나가서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뭘 하면 될까요?”
“……고마워.”
“에헤헤, 뭘요.”
“연회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도 몰라. 지금 이 일은 국왕과 후계자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아이야트 오라버니와 슈레이 언니가 처리하고 있거든. 우리는 파티의 주인공으로서 거기에서 서 있는 게 우리가 할 일의 전부야.”
“그렇군요.”
“응.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뭘 할지 말지 의논하는 건 솔직히 별 의미가 없을 거야. 의미가 있는 건……, 내일 있을 일에 각오하는 거겠지. 조금 힘든 일이 있을 거야. 귀족들의 추악한 면을 다 보게 될 거거든.”
“…….”
“뒤에선 죽일 듯이 욕하면서도 앞으로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개처럼 꼬리나 살랑거리면서 토약질 나오는 감정을 감추려고 할 거야. 레이시는 연정의 야차니까 그 부분을 좀 더 강하게 느끼겠지만……, 그래도 참아줘.”
“노력해볼게요.”
레이시의 대답에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짓는 엘라.
엘라는 한 잔 더 마시라면서 주전자를 기울였고, 레이시는 잔을 채우는 약간 붉은 빛의 와인에 조금씩 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분명 한 번 끓이면서 알코올을 잃어버렸는데도 올라오는 취기.
아마 달콤하고 맛있어서, 그래서 계속 마셔버려서 취하는 거겠지.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전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자 뱅쇼를 마시는 걸 멈출 수가 없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음주에 눈을 가늘게 뜨다가 천천히 레이시의 등 뒤로 걸어갔다.
“아, 읍…….”
엘라가 뒤에서 자신을 껴안자 놀란 얼굴로 엘라를 바라보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다가 천천히 입술을 맞대었다가 떨어지는 걸 반복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입맞춤에 아샤가 보고 있다면서 엘라를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부드럽게 맞닿았다가 애타게 떨어지는 엘라의 입술에 레이시는 점점 엘라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고, 아샤는 그런 두 사람의 입맞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다가 레이시의 표정이 점점 풀리기 시작하자 한숨을 내쉬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훈련된 기사들 중에서도 전쟁 전의 스트레스를 못 이겨서 귀족으로서의 체면을 버리고 사창가에 가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성격 자체가 다툼을 피하는 레이시야 오죽할까?
사창가도 아니고 부부간의 관계로 스트레스를 제어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낫겠지.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자리를 뜨기 위해서 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응으으으…….”
그러자 레이시는 한쪽 팔로는 엘라를 껴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샤를 붙잡고 가지 말라는 듯 앙탈을 부렸고,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앙탈에 당황하며 레이시의 손을 맞잡았다.
“저, 저기…….”
“파하, 여, 옆에 있어주면 안 돼요?”
얼굴을 붉히면서 부끄러워 하는 레이시.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덩달아 얼굴을 붉히면서 엘라를 바라봤고, 엘라는 아샤의 시선에 자기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눈웃음을 지은 다음 계속해서 레이시와 입술을 겹쳤다.
“응……, 쪽, 쪽…….”
한참 귀여운 소리를 내면서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입맞춤을 이어가는 엘라.
끊어질 것 같지 않던 애정행각을 끝낸 엘라는 레이시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진정되었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엘라의 질문에 얼굴을 붉히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대답에 작게 웃다가 이제는 다른 게 문제냐고 물어봤다.
“으, 으으으…….”
“안아줄까?”
“안아……, 주세요…….”
“아샤는?”
“아, 아샤도…….”
“그럼 다 같이 할까?”
싱긋 웃으면서 레이시의 볼에 입을 맞추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안 그래도 붉어졌던 얼굴이 더욱 붉어지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고, 엘라는 레이시가 부끄러워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자 씻고 하자면서 레이시를 안아들었다.
“꺅……!”
“그럼 씻으러 갈까? 자기야.”
“아, 아으읏…….”
엘라의 미소에 얼굴을 붉히며 엘라의 목에 팔을 거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의 포옹에 배시시 웃다가 아샤에게 식탁을 치우고 방에서 기다려달라고 부탁했고, 아샤는 엘라의 부탁에 레이시를 힐끗 쳐다보다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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