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0화 〉 온천에서의 하루2
* * *
“목욕인데 튜브까지 챙겨야해?”
“제가 놓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목욕하는 것보다는 물장구치면서 놀았으면 좋겠고요. 그나저나 미스트. 언제나 생각하는 건데 왜 말하는 것마다 있어요……?”
“후후, 그러게요?”
싱긋 웃으면서 에일렌의 몸에 맞춘 듯한 튜브를 건네주는 미스트.
레이시는 그런 미스트의 웃음에 어색하게 웃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은 다음 마차에 올라타 에일렌과 함께 온천거리로 떠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여긴 무역도시인데 왜 온천이 있는 걸까요?”
“아멜리아는반은 무역도시이고 반은 관광도시야. 동쪽의 사람들이 지금 우리 대륙으로 올려고 하면 아멜리아를 거쳐서 오는 방법밖에 없는데 시장밖에 없으면 조금 그렇잖아. 그래서 시장과 관광도시.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둘 다 수준급으로 올리는 게 힘든 일이기는 한데……, 뭐, 어려운 일이니까 국가적인 지원을 받고 엘레오놀 공주가 도와주는 거니까 그 정도 일은 해줘야지.”
“흐으으으응……. 둘 다 공존할 수 있는 거예요?”
“무리인 건 아냐. 발전시킬 방향성이 조금 억제되지만, 완전히 무리인 건 아냐. 그러네…….무력 수준으로 따지자면 벽천화 기사단 급의 정치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 돼. 애초에 이런 도시를 만드는 건 믿을 수 있는 부하가 더 중요해. 위에서 하는 일이 적다는 건 아닌데 도시의 세세한 부분을 제어하는 건 부하니까.”
“그래요?”
“응, 군대라면 모를까 도시 관리라면 부하를 고르는 게 더 중요하지.”
군대와는 다르다.
엘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시에게 군대 운용과 도시 치정과의 차이점을 말해주었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을 집중하면서 듣다가 미스트가 마차를 출발시키자 밖을 바라봤다.
이제 막 뜬 해로부터 햇빛이 쏟아지는 밖.
아침 일찍 출발했으니까 늦어도 점심 무렵에는 도착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기대를 잔뜩 품고서 주변을 둘러봤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다른 건 다음에 가르쳐주자고 생각하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도로 상태는 괜찮은데 가로등을 좀 더 설치하는 게 낫지 않으려나?”
“아직 마정석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없는 거겠죠? 연금술사 길드도 없고 그렇다고 사업체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던데.”
“왜?”
“상업과 문화를 집중적으로 관리하다 보니까 적합한 마정석 제작 업체를 구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거기에다가 마정석은 싼 가격으로 구할 수 있잖아요?”
“하긴 돌하고 연금술사만 있으면 저급 마정석은 무한대로 만들 수 있으니까 당연한가?”
“특히 가로등에 들어가는 건 가구에 쓰이는 것보다 훨씬 저품질이니까요. 그러다보니까 언제든지 원하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아직 정식으로 오픈한 것도 아니고.”
“흐응. 뭐, 이 부분은 루룬에게 맡겨야지.”
“공주님이 이 도시를 다스렸다고 한다면 연금술사 길드부터 만들었겠죠?”
“당연하지. 내가 무역 같은 불확실한 짓으로 중요한 부분을 충당할 리가 없잖아.”
일생에서 만난 사람의 8할이 적이었던 엘라는 미스트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고, 미스트는 엘라의 말에 환하게 웃으면서 사회가 만들어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를 완전히 무시했다면서 작게 박수를 쳤다.
“아아, 몰라. 그런 이야기는 공부할 때나 하라고. 지금은 그런 시간도 아니고 쉬는 시간이니까 다음에 해.”
“알겠습니다, 공주님.”
엘라의 말에 마차를 몰고 움직이는 미스트.
미스트는 그 뒤로도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면서 마차를 몰았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농담에 어울려주면서 온천거리에 도착할 때까지 잡담을 나누었다.
대부분은 육아와 관련된 이야기.
중간부터는 어째 공부하는 분위기로 흘러가서 이상하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엘라와 다르게 레이시는 미스트의 교육을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고,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태도에 다시 한번 엘라를 놀리다가 저 멀리서 경비병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엘라에게 준비하라고 말했다.
“어제 말해준대로 공주님의 신분을 이용해서 억지로 특별 손님으로 초대받은 거니까 문장을 준비해주세요.”
“알았어.”
미스트의 말에 마차에서 내리는 엘라.
엘라는 마차를 보고 달려오는 경비에게 문장을 보여주면서 어제 미스트를 통해 이야기했다고 말했고, 경비병들은 엘라의 문장을 보더니 마차를 마구간으로 안내하면서 엘라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10분 내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기운차게 경례를 올리고 도망치듯 가는 병사.
레이시는 그 병사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루룬을 불러오는 걸까 싶어서 자기가 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질문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평민만 있으면 별 상관이 없겠는데 여긴 귀족 투성이잖아. 지지 받는 사람이 지지하는 사람쪽으로 가면 이상한 소문이 돌아.”
“……귀족은 힘드네요.”
임산부를 괜히 움직이게 만드는 것 같아서 한숨을 내쉬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레이시의 머리를 꽉 끌어안아준 다음에 레이시도 임산부라는 걸 잊은 거냐며 히죽 웃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가 앞에서 수속을 밟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용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레이시 일행에게 다가가 방이 준비되어 있다면서 안내하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가족실로 안내받아 커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가 준비되어 있고 마석을 이용해서 방 전체를 데우는 형식이 아니라 전통 한옥처럼 바닥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누워 자고 온돌로 방을 데우는 형식의 방.
레이시는 그런 방의 구조에 그립다고 생각하다가 사용인에게 이불을 꺼내 써도 되냐고 물어봤고, 사용인은 레이시의 질문에 허리를 숙이며 이 방에 있는 물건은 무엇이든 써도 괜찮다고 말했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종을 울려 호출해주시면 됩니다.”
“네, 그럴게요. 수고해주세요.”
다소 딱딱한 말투에 쓰게 웃다가 바닥에 이불을 깔고 앉는 레이시.
난방을 강하게 틀지 않아 딱 기분 좋을 정도로만 따뜻한 바닥에 레이시는 부르르 떨다가 축 늘어지면서 배시시 웃었고,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웃음에 똑같이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얼마 안 가서 의자를 들고와 앉았다.
“으응? 아샤는 싫어요?”
“싫지는 않은데바닥이 따뜻한 건 안 익숙하네.”
“기분 좋은데.”
“그래?”
“네. 따뜻해서 잠이 잘 올 거 같아요.”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네.”
레이시의 말에 피식 웃더니 엘라는 언제 오는 거냐며 가볍게 투덜거려보는 아샤.
그러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듯 엘라가 루룬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고, 레이시는 루룬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루룬 씨, 오랜만이에요.”
“앉으셔도 괜찮아요. 그나저나 공주님께 들었는데 또 임신하셨다면서요. 힘드시겠네요.”
“아, 아하하하……, 루룬은 좀 어때요?”
루룬의 배가 살짝 부푼 걸 본 레이시는 허리나 등은 괜찮냐고 물어봤고, 루룬은 레이시의 질문에 지금은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좀 더 부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좀 힘들어질 거예요. 저는 야차라서 괜찮았는데 평범한 사람은 아무래도 좀……, 무거울 거예요. 그리고 근육은 그대론데 무게가 갑자기 늘어서 많이 피곤해질 거고요.”
“후우……, 걱정이네요. 앞으로 한 달이면 바빠질 텐데.”
“왜요?”
“이 곳의 활성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거라서요. 손님을 가려 받긴 하겠지만, 귀족 손님만 받는 것과 다른 사람들까지 받는 것은 꽤 차이가 심하니까요.”
아예 소규모에서 중규모 마을로 만들어서 관광을 담당할 생각이었다고 밝히는 루룬.
레이시는 루룬의 말에 무리는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해주었고, 루룬은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아이도 소중하니까요.”
“에헤헤……. 그렇죠?”
“그나저나 너무 오래 잡고 있었네요. 온천욕은 이쪽으로 들어가셔서 가족탕에 들어가시면 돼요. 열쇠는 여기에 있어요. 입욕제는 여기에 있는 것들 중 하나로 고르세요.”
“네에.”
루룬이 건네준 상자를 받고 일어나는 레이시.
루룬은 좋은 목욕이 되라면서 손을 흔든 다음에 다시 일하러 갔고, 레이시는 루룬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저렇게 일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면서 사용인이 안내한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시가 일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잖아? 나를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정말요?”
“응, 전보다는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집안일이 쉽지는 않잖아. 그래서 아내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일한다고 생각할 거야. 거기에다가 레이시는 이미 실적을 올린 상태니까 더더욱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지.”
“엘라가 말한 건 아멜리아와 관련된 일이죠?”
“응.”
“그건 어디까지나 루룬과 엘레오놀 공주님의 일이잖아요.”
“그렇지. 두 사람 다 네게 공을 돌리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러니까 그냥 편안하게 있어.”
레이시를 다독이면서 옷을 벗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옷을 벗고 에일렌과 함께 탕의 온도를 재기 시작했다.
미지근하지만 에일렌에게는 딱 적당한 온도.
레이시는 에일렌의 발에 물을 묻히면서 에일렌에게 튜브를 끼워주었고, 에일렌은 레이시가 손을 놓아도 자기가 물에 빠지지 않자 눈을 깜빡이면서 발을 움직여봤다.
열심히 발을 움직일 때마다 발가락이 닿을 듯 말 듯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몸.
걸음마를 연습할 때보다 훨씬 편한데다가 빠르게 나아가는 몸에 에일렌은 점점 눈을 빛내더니 자기 혼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꺄우아아!”
“아하하, 좋아요?”
에일렌이 다치지 않도록 유아용 목욕통의 모서리에 고무를 끼워두는 레이시.
레이시는 한참을 에일렌과 함께 놀아주다가 엘라가 슬슬 자기가 있는 탕에 들어오라고 말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탕으로 들어갔고, 엘라는 레이시가 들어오자 곧바로 레이시를 끌어안고 손을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앗!?”
“왜?”
“에일렌이 있는데 뭐하는 거예요…….”
엘라가 엉덩이를 쓰다듬자 얼굴을 붉히면서 몸을 비트는 레이시.
마냥 싫지만은 않은 건지 레이시는 얼굴을 붉히며 씻고 나서 하자고 말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내가 할 건 아니라서.”
“네?”
“나는 방에 가서 할 거고, 못 참는 사람이 있어서.”
히죽 웃으면서 미네르바를 보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미네르바가 장난감을 챙기는 걸 보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최소한 다른 사람이 안 보이는 곳으로 해달라고 말했고, 엘라는 레이시가 할 말을 대충 예상했다는 듯 방 안쪽에 달려있는 작은 방을 가리켰다.
“조금 좁긴 하지만 저기도 욕탕이야.”
“왜 작은 욕탕이 따로 달려있는 거예요?”
“글쎄? 노천탕이 싫은 사람이 쓰는 곳 같아.”
“아아아……. 확실히 그러네요.”
동양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오라토리엄 왕국에서 목욕은 보통 욕실이라는 방 안에서 하는 거니까.
평민들은 강이나 호수에서 씻기도 하니까 호불호를 좀 덜 탈지도 모르겠지만, 귀족은 그런 경험이 거의 없으니까 노천욕은 호불호를 탈지도 모르겠다.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장난감을 다 챙겼는지 손을 잡고 쭈뼛거리는 미네르바를 보고는 못 말린다는 듯 미네르바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욕실에 달린 작은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라의 말대로 노천욕을 꺼려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졌는지 오라토리엄 왕국의 평범한 욕실의 구조를 띄고 있는 작은 욕실.
레이시는 욕조의 물 온도를 재다가 이내 미네르바와 함께 욕조에 들어갔고, 미네르바는 자기 앞에 앉은 레이시의 배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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