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밤에서 밤까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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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을 도와주다 보면 가장 힘든 일은 고된 농사일도, 어르신들과의 마찰도 아니다.
가장 힘든 건 어떤 일이 있어도 몸이 농사일에 맞춰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일할 때가 되면, 생체 시계가 시간이 됐다며 크게 울리는 게 제일 힘들다.
가령 모내기 종료 기념 회식을 하게 되어 새벽 2시에 자더라도, 아무리 늦어도 4시 반에는 일어나게 된다.
“흐아아암…….”
그리고 그건 잠자리를 가져서 기절하듯 자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에 탈력감이 들어도, 아직 채 발산하지 못한 열기가 남아있어도, 레이시의 몸 안의 생체시계는 새벽 4시가 되자 얼른 일하라며 레이시를 일으켜 세웠다.
“…….”
어제 대체 몇 시에 잔 거지?
무도회장에 다녀오고,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그리고 곧바로…….
아니, 생각하지 말자.
침대 주변에 굴러다니는 것들과 이불에 남은 무언가가 말라비틀어진 흔적을 본 레이시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계속 생각하면 침대에서 떨어지기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레이시는 눈에 보이는 어젯밤의 흔적을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스트가 먼저 준비해둔 건지 곱게 개어져 있는 속옷과 작업복.
씻고 옷을 입을지, 아니면 일하고 나서 다시 씻을지 고민하다 이내 귀찮음이 앞서기 시작해 속옷은 내버려 두고 맨살에 작업복만 입기 시작했다.
“흐아아암~, 뭐야, 새로운 취미?”
“일어나셨어요? 그리고 새로운 취미라뇨?”
“노 팬티. 새로운 취향 만들어보는 거야?”
레이시가 옷 입는 소리에 잠에서 깨 눈을 깜빡거리는 엘라.
엘라는 침대에서 한참을 눈을 깜빡이며 부르르 떨다가 레이시가 옷을 입고 있자, 조심스럽게 뒤에서 레이시를 끌어안으며 가볍게 놀렸다.
농담의 소재는 레이시의 속옷.
옷을 입고 있는데 속옷이 곱게 접혀 얌전히 있자, 엘라는 레이시에게 아직 만족 못 한 거냐며 키득키득 웃었고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괜히 화를 냈다.
“놀릴 거면 안지 마요.”
짐짓 화를 내는 척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레이시의 손을 잡으며 능글맞게 웃었다.
“아하하, 싫어. 나랑 있어.”
“일해야 해요.”
“다른 사람에게 맡겨. 미스트라던가 미네르바라던가.”
“안 돼요. 말들도 그렇고, 사냥개들도 그렇고 제가 관리하는 애들이니까 제가 밥을 줘야 한다고요.”
“하루뿐인데도?”
“그 하루가 며칠이 될지 누가 알아요?”
“같이 있자니까아~, 뭣하면 공주 권한 써버리면 끝이야.”
“에휴……, 흔들리게 하지 마요. 안 그래도 허리 쑤시는데…….”
“풉, 그렇게 갔으니까 말이야.”
“으그으으……!”
“농담, 키스하면 보내줄게.”
레이시의 손을 붙잡고 문을 마법으로 막아버리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행동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키스를 해줄 것 같냐며 틱틱 쏘아대기 시작했다.
“입 냄새날 거 같으니까 안 돼요.”
“괜찮아.”
“안 된다니까요? 어제 밤부터 이도 안 닦고 그걸 해댔는데……. 엄청 냄새 날 거라고요.”
“어제 그렇게나 신경 썼잖아? 그러니까 몸으로 증거를 보여줘야지.”
하지만 엘라는 레이시가 자신을 쏘아대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침대에 앉아 레이시에게 오라며 손짓했다.
그러자 훤히 드러나는 엘라의 나체.
벌써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었던 몸이었지만, 레이시는 엘라의 나체를 보자마자 얼굴을 확 붉히며 깨끗한 수건으로 엘라의 몸을 가리며 화를 냈다.
“괘, 괜찮으니까 몸 가리기나 해요!”
“아니, 안 보여주면 안 믿을 거잖아. 안 그래?”
“믿을 테니까 놓아줘요오오!”
“안 믿는 얼굴인데?”
“아아~ 진짜!”
“아하하~, 그래서 싫어? 키스.”
레이시를 살살 놀리다가 팔을 활짝 벌리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행동에 원망스럽다는 듯 잠시 엘라를 흘겨보다가 엘라가 자신을 잡아당기자 못이기는 척 엘라에게 안겼다.
그러자 엘라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레이시의 뺨을 쓰다듬어주다가 장난스럽게 입을 맞췄다.
입술끼리 가볍게 맞댄 다음 레이시의 혀끝과 입술을 가볍게 간질이는 키스.
레이시를 리드하며 조심스럽게 혀를 섞던 엘라는 레이시가 눈을 반쯤 감자 아쉽다는 듯 입을 천천히 떼기 시작했다.
“하아아…….”
“후으…….”
혀끝을 약하게 깨물고 고개를 뒤로 빼는 엘라.
레이시는 금방 끝나버린 키스에 아쉽다는 듯 숨을 내쉬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작게 웃으며 뺨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냄새 났어?”
“……아뇨.”
“후후, 그렇지?”
엘라의 웃음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레이시.
레이시는 셔츠의 단추를 채우면서 자신의 입안에 남은 미묘한 향기에 괜히 쭈뼛거리기 시작했다.
향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하고 악취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분이 좋은, 미묘한 향기.
발효주나 치즈처럼 발효시켜 만드는 음식의 경우에는 호불호가 강한 요리가 많다더니 그것이 이런 느낌인 걸까?
처음 느껴보는 향기에 그렇게 생각하던 레이시는 자신의 심장이 크게 뛰자 고개를 세차게 저은 다음 옷을 마저 입고 밖으로 나갔다.
“후아……, 후아…….”
저택 뒤쪽에서 숨을 크게 내쉬면서 손수레에 사료를 담기 시작하는 레이시.
그렇게 말에게 줄 건초와 사냥개에게 줄 사료를 따로 구분해서 담자 미네르바가 축사의 앞에서 뾰로통한 얼굴로 레이시를 맞이했다.
질투심 가득한 얼굴로 레이시를 바라보며 날갯짓하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화났냐고 물어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질문에 눈매를 날카롭게 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자신과는 해주지 않았는데, 엘라와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질투를 표현하던 미네르바는 펼쳤던 날개를 접더니 레이시를 꽉 끌어안았다.
조금은 힘을 줘서 껴안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행동에 어색하게 웃다가 조심스럽게 장갑을 벗고 미네르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미네르바를 감싸고 있던 분위기가 한껏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이내 미네르바는 꽤 둥글둥글해진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일 끝나면 이렇게 안아줄 수 있나?”
“네?”
“……주인은 어제 일 때문에 힘들어 할 테니, 안기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그래도 안 되나?”
“……우윽! 그, 그게…….”
“안 되나……?”
자신의 말에 레이시가 크게 움찔거리자 거절하는 거로 알고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반응에 다급하게 헛기침하며 그냥 껴안는 거라면 일이 끝나고 해줄 수 있다고 말했고 그 말에 미네르바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날개를 펼치고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미네르바를 껴안아주는 레이시.
그렇게 한참을 미네르바와 체온을 교환한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품에서 빠져나와서 조심스럽게 어제 소리가 그렇게 컸냐고 물어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질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순식간에 부드러운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음심이 가득한 포식자의 눈이 되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의 얼굴에 질문을 잘못했다 싶어 침을 꼴깍 삼켰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반응에 눈을 가늘게 뜨다가 날개를 가볍게 한 번 펄럭거린 다음 고개를 돌렸다.
“내 인내심을 매번 시험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주인을 좋아하지만, 매번 명령을 따르는 게 괴롭다.”
“죄, 죄송해요.”
“사료, 나눠주러 가자.”
뾰로통한 얼굴로 레이시의 수레를 대신해서 잡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표정에 어색하게 웃다가 사육사의 일을 전부 끝낸 다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몸에 묻은 찝찝한 땀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후아아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저절로 나오는 신음.
레이시는 이런 몸이 됐어도 이런 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소리 죽여 웃다가 욕조에 몸을 맡긴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미네르바는 조심스럽게 욕실의 문을 열고 같이 씻어도 되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껴안는 거라면 얼마든지 해주겠다고 했으니까 지금 안아주기로 하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허락에 환하게 웃으면서 몸에 물을 뿌려 가볍게 적신 다음 욕조에 들어가 레이시를 껴안았다.
“후아아아~, 이러면 제가 안기는 거잖아요.”
“으응? 싫나?”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안아주셨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주인하고 붙어있을 수 있다면, 그건 아무래도 좋다.”
“아하하…….”
뺨을 부비면서 눈을 가늘게 뜨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여전히 대형견 같은 미네르바의 행동에 작게 웃다가 미네르바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며 한참을 미네르바와 놀아주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욕조에서 손장난 치면서 서로 껴안고 있자 미네르바는 만족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깃털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후아……, 이제 나가자, 주인. 따뜻한 물에 오래 있으면 다친다.”
“냐학!? 아하핫! 물 털지 마요.”
“…….”
“아하핫! 일부러 더 튕겼죠?”
“에헤헤…….”
레이시의 말에 배시시 웃으면서 레이시를 껴안고 밖으로 나가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몸을 깨끗하게 닦은 다음 속옷과 메이드로 있을 때 입는 제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옷을 다 갈아입자 기다렸다는 듯 미스트가 문을 두들겼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노크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무슨 일인가요?”
“공주님의 일 때문에 회의를 할 게 있어서요. 레이시도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네, 그럴게요.”
분명 일이 끝나고 엘라가 돌아온 날 3개월 간 아무런 일도 안 하고 휴가를 보내겠다고 말했는데, 무언가 중요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걱정 반, 의문 반 섞인 얼굴로 미스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레이시는 잠옷을 입고서 소파에서 투덜거리는 엘라를 보고는 크게 헛기침 했다.
“왜 그래?”
“‘왜 그래?’라는 말이 나와요!?”
“응?”
“오, 옷 좀 제대로 입어요! 비, 비치잖아요!”
엘라가 입고 있는 잠옷은 원피스 형태의 얇은 잠옷이었기에 그대로 무슨 속옷을 입고 있는지 비쳐 보였다.
검은색에 레이스 같은 게 없는 편의성 위주의 속옷.
레이시는 그 속옷을 빤히 쳐다보다가 엘라가 키득키득 웃자 다급하게 담요로 엘라의 몸을 가린 다음 그래서 생긴 일이 뭐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엘라는 별로 큰일은 아니라는 듯, 한 장의 편지를 테이블에 던졌다.
고급스러운 흰색의 종이.
편지지의 각 변에는 금박이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고 편지 봉투로 추정되는 종이에도 금박과 함께 인장이 새겨진 촛농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편지칼로 윗부분을 잘라내 멀쩡한 문양이 새겨진 촛농.
레이시는 익숙한 그 촛농의 모습에 잠시 눈을 찌푸리다 촛농의 문양이 왕가의 문양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어버버거리며 엘라를 바라봤다.
“와, 왕가에서 온 명령이네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일단 나도 공주인데 그렇게 쫄 필요는 없지 않아?”
“……아, 그러네요.”
“헤에~ 나는 편하다 이거야?”
“아, 아하하……. 그, 그래서 왕가에서 뭐라고 했어요?”
“사냥회에 참석하래. 아마 레베카가 추진한 일이겠지?”
“네?”
“아마 네게 호기심을 가진 걸 거야. 미스트의 말을 들어보면 너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람들이 생긴 모양이더라고.”
“저를요……?”
엘라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는 레이시.
미스트가 엘라가 사람을 들인 일이 꽤 화제라더니 그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뺨을 긁다가 엘라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한숨을 내쉬면서 마저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참석을 안 할 수는 없겠지. 일단 직위가 저쪽이 더 높으니까 거절하려면 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휴가를 보내겠다고 거절하는 순간 이런저런 잡소리가 들릴 거야.”
“아하하……, 휴가인데 힘드네요.”
“누가 아니래? 뭐, 마음 같아서는 레이시와 하루 내내 침대 위에서 뒹굴고 싶으니 꺼지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야.”
“그건 참아주세요.”
“그래야지. 그럼 참석한다고 편지 보낼까…….”
직장인은 휴가도 마음대로 못 보낸다더니 공주라고 별반 다를 게 없구나.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엘라를 달래주다 한숨을 내쉬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한숨에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씩 웃었다.
“그럼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어제 하던 거, 마저 할까?”
“네……?”
“미스트, 일 대신 해줘.”
“네. 공주님. 도구 트레이는 미리 거실에 들고 왔으니, 거기에 있는 걸 써주시면 됩니다.”
“…….”
레이시가 당황하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엘라와 미스트.
미네르바는 두 사람의 행동에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선 레이시를 꽉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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