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뭐든지 경험이 중요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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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보고 난 후에 더 강렬하게 온다고 하던가?
그런 생각을 한 레이시는 자신의 아랫배를 본 이후로 느껴지는 불쾌한 느낌의 감각에 어색하게 웃었다.
꿀럭이라고 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푸르릉이라고 해야 할까?
덜 굳은 피가 자신의 하반신을 통과하며 옷을 뚫고 땅에 떨어지는 느낌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런 느낌이었다.
“아, 아하하……?”
그나마 아프지는 않으니까 다행인가?
아니, 피를 이렇게나 쏟았는데 다행이고 뭐고 없잖아…….
머릿속에서 혼자서 대화를 주고받던 레이시는 저 멀리서 미스트가 달려오자 어색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희 먼저저택으로 돌아갈까요?”
“저기, 미스트.”
“네?”
“저도 하는 거네요……?”
뺨을 긁으면서 웃는 레이시.
손가락에 묻은 피가 얼굴에도 묻는다는 걸 생각도 못 하는 모습에 미스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레이시를 안심시키듯 웃으면서 레이시를 안아 들었다.
“저……, 피 묻어요.”
“괜찮아요. 그나저나 아프지는 않나요?”
“아프지는 않네요. 근데 뭔가 꿀렁꿀렁하는 거 같아요.”
아, 몸이 들리니까 뭔가 다시 꿀렁하는 느낌이다.
언젠가 한 번 직업체험 한답시고 만들다 실패한 선지의 느낌이 이랬던가.
그거 한 번 만들고 다시는 선지를 못 먹게 됐는데, 이제는 그게 내 몸에서 나오네.
레이시는 그런 생각에 실없이 웃다가 미스트의 옷에 적갈색 얼룩이 생기자 그제야 자신의 손에 피가 묻었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손을 뗐고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를 안고서 천천히 저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와 미스트의 모습을 보다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류테인 백작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냥 죽일까?
별 힘도 없는 백작 정도야 왕궁에서 사라져도 별 이야기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조용히 마탄을 준비했고 아샤는 그런 엘라를 보면서 이런 이유로 하는 살인은 안 된다면서 엘라를 막았다.
“참아.”
“…….”
“레이시가 싫어하는 건 뭔지 알고 있지? 나보단 네가 더 오래 있었으니까.”
엘라를 막기 위해서인지 욕설을 지우고 차분하게 말하는 아샤.
엘라는 그런 아샤의 말투에 한숨을 깊게 내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류테인을 보고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차후에 엘라 파우스트 오라토리엄의 이름으로 공식으로 항의하지.”
“……힉!? 자, 잠시……!”
“내 인내심을 한 번 더 시험해볼 생각이라면 말해.”
“흡!?”
두 번의 인내는 없다는 듯 차갑게 류테인을 노려보는 엘라.
엘라는 한참을 류테인을 노려보다가 류테인이 안 보일 정도로 멀어지자 잔뜩 당황한 얼굴로 아샤를 바라봤다.
“뭘 어떻게 하는 게 좋지!?”
“일단 진정해. 죽는 것도 아니고……. 말 타면서 허리에 충격이 쌓여서 안에서 피가 쏟아진 거야.”
“아니, 그런 건 알아! 아는데! 난 저런 거 안 한다고!? 미스트도!”
미스트는 애초에 종족 자체가 수인이기 때문에 월경이 오지 않는다.
자신은 어렸을 때 암살자에게 몸이 거의 양단 당한 채로 반격하느라 주요 장기를 제외한 장기에 심각한 데미지를 입어 초경도 못 겪었다.
즉, 엘라는 월경에 한해서는 남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었다.
레이시가 낙마해서 피를 줄줄 흘릴 땐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놀랐었고 레이시가 웃으면서 실없는 소리를 할 땐 뭔가 크게 잘못되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제대로 평정심을 되찾지 못해서 횡설수설했고 아샤는 그런 엘라의 반응에 재밌긴 하다고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지금은 자신의 감정보다 우선시 해야 하는 게 있다.
좋든 실든 지금은 다시 엘라의 기사가 됐고, 기사가 된 이상 주군을 진정시켜야 하니까.
공과 사를 나눠서 생각한 아샤는 파우치 안에 있는 것들을 만지작거리다가 이거로는 모자라다며 엘라를 데리고 기사단이 신세를 지는 의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두 사람이 보건실에 도착할 때쯤, 레이시는 머리에 물을 부으며 자신의 옷에 묻은 핏덩이를 봤다.
“우와…….”
자신의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피.
살짝 굳어서 나온 피의 모습에 레이시는 다시금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끼다, 이내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저은 다음 다시금 몸에 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몸에 묻은 핏자국은 잘 지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적갈색의 흔적이 번져 레이시의 피부를 더럽히기만 했다.
거기에다가 한 번 의식한 순간부터 자꾸만 뭔가 꾸물거리면서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럽다.
……왜 여자들이 월경을 그렇게 싫어했는지, 이제야 이해된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입을 틀어막다가 한숨을 내쉬며 미스트가 더럽혀도 괜찮다고 말한 수건을 물에 적셨다.
“으, 으으윽…….”
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레이시가 자신의 몸을 닦는 건 힘들었다.
몸을 힘줘서 닦으려는 순간 뭔가 나올 것 같은 감각이 레이시를 방해했고, 실제로 거의 다 닦아가서 무심코 힘을 주는 순간 피가 삐져나왔으니까.
치우면 피가 생기고, 또 치우면 피가 나오고.
그래도 점점 피의 양이 줄어들고 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라고 할까…….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한숨을 내쉬면서 검붉은색으로 변한 수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쥐어짜면 배에 힘 들어가서 100% 다시 더러워지겠지……?
하지만 핏물을 쥐어짜지 않으면 이 수건은 영영 쓰지 못하게 될 게 뻔하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미스트를 불렀고 문 앞에서 대기중이던 미스트는 레이시의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부르셨어요?”
“네, 이거…….”
몸을 가리듯 앉은 채로 피범벅이 된 옷가지와 수건을 건네는 레이시.
미스트는 그 옷들을 받아든 다음 레이시의 몸 상태가 어떤지 물었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질문에 괜찮다고 답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별안간 레이시의 눈앞이 핑핑 돌더니 레이시는 중심을 잃고 몸을 비틀거렸다.
하혈을 꽤 많이 한데다, 따뜻한 물로 계속 몸을 데우던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나서 생긴 기립성 저혈압.
미스트는 레이시가 비틀거리자 곧바로 레이시를 껴안은 다음, 욕실에서 나와 수건으로 레이시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으니까 스스로 닦을게요.”
“조용히 해요. 쓰러질 뻔 했으면서.”
“읏…….”
어떻게든 혼자 설려고 하는 레이시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미스트.
레이시는 처음 보는 미스트의 얼굴에 움찔 떨다가 얌전히 몸을 맡겼고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면서 레이시의 몸을 닦아주었다.
미스트가 손을 바쁘게 놀리자 금방 물기를 잃고 뽀송뽀송해지는 레이시의 몸.
미스트는 레이시의 몸에서 물기가 없어지자 새 수건을 몸에 둘러준 다음, 깨끗한 속옷에 멜리아가 건네준 생리대를 착용시키고 레이시에게 입혔다.
“멜리아 씨 말로는 피가 나오면 갈아야 한다고 했어요. 속옷과 생리대, 최대한 준비해드릴 테니 조금만 이상하다고 느끼면 갈아입으세요. 아시겠죠?”
“으, 으응……, 네.”
미스트의 말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레이시는 속옷에 뭔가 붙어서 나오자 마음이 심란해져 눈을 피했고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약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의학적인 지식이라면 있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지식.
레이시가 피를 얼마나 흘릴지, 그리고 언제 하혈이 줄어드는지, 그동안 레이시의 몸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예측하는 것조차 힘들다.
왕궁 내 다른 의사들이 도와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위안거리지만, 매번 의사들을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미스트는 문득 레이시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고 레이시는 미스트가 자신을 바라보자 헤실헤실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미스트는 뭔가 집중하면 입술을 깨무는 거 같네요.”
“네? 아…….”
“저는 괜찮아요. 죽는 것도 아니고……. 조금 낯설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될 거예요.”
월경은 생리적인 현상이다.
레이시는 그렇게 말하며 미스트의 손을 잡았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말에 한숨과 함께 약간은 가식적인 웃음을 만들었다.
자신이 레이시를 달래줘야 하는데 조금 경험이 없다고 레이시에게 위로받을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미스트는 레이시에게 셔츠와 바지를 입혀준 다음 그대로 침대로 데리고 가 눕혔다.
“저 안 아픈데.”
“괜찮으니까 조금 누워있어요.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올테니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네? 아샤?”
“네가 왔을 때 혹시나 해서 챙겨온 거긴 한데……, 레이시, 몸만 일어나봐.”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도장과 신분증을 챙기는 미스트.
미스트는 의사에게 레이시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말을 정리했지만, 그 순간 아샤가 엘라와 함께 들어오며 미스트를 말렸다.
파우치 안에 한가득 뭔가 들고 온 아샤.
아샤는 레이시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레이시에게 옷을 들어보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셔츠의 끝자락을 들어 자신의 배를 보였다.
“흐음, 좀 차갑거나 그러지 않아?”
“으응……, 조금은 차가울지도…….”
“그럼 이거 붙이고 있어, 배가 차가우면 아프거나 기분이 더럽다거나 그러니까. 차나 끓인 물 마시고, 찬물은 좀 삼가는 게 좋을 거야.”
“네.”
“그리고 아까 보니까 피 엄청 흘렸는데, 이거 먹어라. 철분 보충제랑 증혈보조제야. 그리고 당분간은 훈련도 금지. 네가 익숙해질 때까진 일은 하지 마. 안 그러면 일하다가 피 흘리니까.”
“웃……, 그건 좀 무서울지도.”
“그리고 자다가 덥다고 옷을 벗었다는데, 그러지 마. 월경 땐 안 그래도 몸살에 걸리기 쉬운데 그러다가 잘못하면 바로 독감 걸린다.”
“으응, 네…….”
“그리고 이건 못 참을 정도로 아프면 먹어. 진통제야. ……월경을 아예 멈추는 약도 있는데 그런 건 건강을 완전히 망쳐버리니까 먹지 마. 차라리 엘라한테 신경질 부려. 아니면 밖에서 발을 구르고 있는 미네르바에게 신경질 부리던가. 사실 여기에 있는 미스트도 네 짜증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거니까 마음껏 응석부려.”
“에헤헤……. 스승님, 오늘은 친절하네요.”
“……나라고 맨날 욕 박고 다니는 거 아니거든? 이 멍청아.”
아샤의 욕에 킥킥 웃다가 다시 침대에 눕는 레이시.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다가 거칠게 머리를 긁으며 이틀 뒤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고 미스트는 아샤를 배웅하겠다며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엘라와 둘이 남는 레이시.
레이시는 한참을 아무런 말도 안 하다가 엘라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옆에 눕자 우물쭈물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하하……, 한 달만의 재회가엉망이 됐네요. 죄송해요.”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어쨌든 이렇게 이야기할 시간이 생겼으니 괜찮아.”
“헤에~ 엘라도 꽤 친절해지네요?”
“왜, 놀려줄까? 평소처럼.”
“이히히, 싫어요.”
엘라가 고개를 반쯤 돌려서 자신을 바라보자 혀를 내밀고 웃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행동에 킥킥 웃으면서 레이시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었고 레이시는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는 엘라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가서 뭐 했어요? 위험한 일이라고 했잖아요.”
“응? 아……, 뭐, 습격을 많이 받긴 했지. 100명 넘게 죽였어.”
“……안 다쳤죠?”
“그런 상대로는 오히려 다치기 힘들거든.”
“그래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새로운 기사들이 왕가에 충성을 바치는 걸 보고 늙은이들과 기사 아카데미 예산을 늘릴지 줄일지 이야기하고……. 그게 끝이야.”
“그렇구나. 다행이네요. 안 다쳐서.”
“이야기만 하는데 다칠 리가 없잖아. 그나저나 레이시는? 훈련 잘 받았어?”
“네, 처음에는 이게 훈련이 되나 싶었는데 멜리아 씨랑 다른 급사분들 지키려고 바로 말에 탄 거 보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래, 잘 봤어. 많이 발전했더라.”
“그리고……, 미스트가 엘라랑 있으려면 옷이 필요하다면서 옷을 되게 많이 샀어요. 제 월급보다 많이 사서 엄청 놀랐어요.”
“흐흥, 그런 걸로 놀라면 곤란한데.”
“아니, 정말로 곤란하니까요.”
“킥킥! 그래서, 무슨 옷 샀는데? 전부 바지?”
“아뇨, 치마도 한 벌 샀어요. 미스트가 엘라하고 데이트할 거라면 필요할 거라고 해서요. 속옷도 억지로 사버려서 정말……. 엄청 난처했다고요? 막, 미스트도 점원도 프릴 같은 게 달린 속옷은 보여주기 위해서 입는 거라면서…….”
엘라의 손을 잡고 대화를 이어가는 레이시.
미스트도 아샤도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였으니까 나라도 평소처럼 있어야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추억을 떠올리듯 눈을 감고서 미스트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며 엘라의 손에 깍지를 꼈다.
엘라가 없어서 섭섭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잘 지냈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레이시는 그렇게 말하듯 엘라의 손으로 장난치다 눈을 뜨고 엘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엘라의 모습을 담은 연두색의 눈동자는 천천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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