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2권 4장) (18/31)
  • <아기 광공 삼형제 2권>

    [4장]

    여름은 하루에 한 번, 어느 날은 이틀에 한 번은 꼭 정원에 나갔다. 한 번 나가면 꽤 오랜 시간을 머물다 들어왔기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하기는 충분했다.

    여름이 온 뒤로 이온이 마련해 준 아이의 의자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담장 너머 오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릴 때가 있었다.

    어떨 때면 집에 무얼 사 갈까 하는 담소가, 어떨 때는 누군가 급한 일을 처리하는 듯한 통화 소리이기도 했다. 아주 다양한 소리가 정원에 앉아 있을 때면 들렸다. 여름은 그 소리로 사람들이 밖을 돌아다니고 있음을 인지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가끔, 아주 가끔 저택에 오가는 사람들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 정도로 사람을 보지 않아 믿을 수 있는 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여름은 그럴 때면 이훈의 텃밭을 가꾸는 데 집중한다. 계절을 구별하지 않고 뿌린 씨앗은 죽어 버린 것도, 추위를 뚫고 올라온 새싹이 되기도 했다.

    이훈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기대를 좋아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텃밭은 이제 여름의 발걸음이 더욱 잦아진 곳이나 다름없었다.

    여름은 새로운 걸 볼 때마다 더 넓은 걸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금세 억누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가족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와 단어만으로 욕심이 사라진다. 여름이 느끼기에도 아주 신기한 단어가 아닐까 싶었다.

    “여름아, 준비 다 했어?”

    여전히 추웠기에 두꺼운 니트 하나를 입은 여름은 가볍게 싼 가방을 들고 이온에게 다가갔다. 그는 길고 어두운 코트를 입고는 아이의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었다. 그의 나이는 잘 몰랐지만, 분명 실제 나이보다는 어려 보이는 외향인 건 확실했다.

    “네.”

    “짐이 이게 다야?”

    “잠옷이 다 가벼워서…….”

    여름이 들고 있는 짐이라고는 커다란 백팩 하나가 전부였다. 그것도 책가방으로 쓰라고 이온이 방에 둔 가방이었다. 캐리어도 아니고 일주일을 여행 가는 데 한없이 부족한 짐일 게 분명했다.

    여름의 가방에는 대개 잠옷들이 들어 있었다. 무슨 옷을 가져가야 할지도 몰랐다. 겨우 허둥지둥 찾은 게, 이 작은 가방이었다.

    이온은 아이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고는 빈손을 어깨에 둘렀다.

    “얼른 가자. 형이 기다리겠다.”

    두꺼운 니트를 실내에서 입고 있으니 조금은 후덥지근했다. 벌써 그러한 날씨가 되었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1층에 내려오고 현관문을 통해 정원까지 나가는 길에도 이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온과 함께하는 길은 여름이 발걸음 한 적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길이었다.

    재헌과 밖으로 나갈 때도 창고에 이어져 있는 뒷문으로 나갔다. 정원과 아주 반대편에 있는 길은 아마 이훈과 이온이 출근할 때, 그리고 여름을 제외한 이들이 오가는 대문이 있었다. 그랬기에 여름과 먼 공간 중 하나였다.

    이온의 품에 안기다시피 옆에 서 있던 여름은 새로운 발자국을 만드는 사람처럼 천천히, 그리고 의식해서 걷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어두운색의 대문은 사람이 쉽게 오갈 수 있을 정도로 활짝 열려 있었다.

    문을 넘었다. 집이라는 공간에 들어온 기억도 없었지만, 나가는 기억이 새로 잡힐 줄은 몰랐다. 이온이 두른 팔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는 천천히 대문을 넘었다.

    그러나 환경만큼은 달랐다. 눈앞에 보이는 다른 집, 새카만 도로,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익숙하면서도 어색했다. 여름의 손이 잘게 떨렸다. 설렘인지 흥분인지 모를 감정은 여름도 모르는 사이에 들이닥쳤다.

    “왜 이렇게 늦어.”

    이온에 비해 두껍고 긴 코트를 입고 있던 이훈은 처음 보는 차, 그것도 운전석 옆에 서 있었다. 느릿하게 나오는 둘을 바라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출근할 때와 다르지 않은 차림에 덥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훈은 금세 운전석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 타. 형이 앞에 탈게.”

    “네.”

    짐을 들고 있던 이온은 트렁크에 가방을 싣고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날이 따뜻해서였을까 여름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좌우를 살피기 바쁜 여름의 등을 안으로 밀어 넣었기에 겨우 들어가 앉을 수 있었다.

    이훈이 운전하는 차는 꽤 넓었다. 자동차의 브랜드나 종류에 대해 무지한 여름이었기에 어떻다 결론 내릴 수는 없었지만, 넓었고 편했으며 깔끔했다.

    “어디로 가는지 안 궁금해?”

    이온이 조수석에 앉고, 안전띠를 매는 동시에 차는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훈은 앞만 보고 운전하고 있었기에 백미러로 보지 않는 이상 그의 등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훈을 보기보다도 더 바쁜 건 여름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온이 물었기에 예의상 대답은 했지만, 아이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목적지를 알고 싶은 마음 따위가 아니었다. 차가 흘러가는 대로 변하는 풍경이 무섭게 새로웠다. 이쪽을 보기도 저쪽을 보기도, 이훈이 있는 앞을 보기도 바쁜 여름의 뒤로 이온의 목소리가 울렸다.

    “형이 가지고 있는 별장 하나가 있거든. 별장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지만, 풍경은 꽤 예뻐서, 여름이 네가 정말 좋아할 것 같은데.”

    “그 정도면 별장이야.”

    낮은 이훈의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돌아가던 아이의 고개가 멈췄다.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게다가 엄청 조용해. 사람도 잘 안 다니고. 제격이지.”

    조금 무서울 것 같은데, 이온은 뒤를 돌아보며 생긋 웃어 보였다. 여전히 겨울의 흔적인 마른 나뭇잎만이 나무를 이뤘다. 그가 말하는 산이 조금은 푸릇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절로 생겼다.

    여름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가져온 옷이 잠옷밖에 없음에 감사하면서도 헛웃음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아이의 인생에 첫 가족 여행은 커다란 호수 앞에 위치하고도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여행은 가족을 더욱 돈독하게 하고 가까워지게 한다. 때로는 모르는 진실을 경험이라는 과정을 통해 깨달을 때도 있었다. 그들의 따뜻한 여행이 그랬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해지는 날씨는 여름의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게 했다. 형제가 출근할 때 걸어가는지, 차를 몰고 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운전하는 모습을 처음 본 건 사실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것뿐인 상황은 아이에게 흥미로 다가왔다.

    ***

    이훈이 모는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창문 너머로 보이던 많은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푸릇한 잎과 앙상한 가지가 어우러져 두르고 있고 한가운데에 있는 별장은 가을의 색을 띠고 있어서 그런지 잘 어울렸다.

    “내리자.”

    이온은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내렸다. 숨 쉬는 것이라고는 자연과 커다란 호수뿐인 듯했다. 그만큼 고요했다. 호수의 맑은 물은 안이 비춰 보일 정도로 깨끗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아이는 그를 따라 천천히 내렸다. 풀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엄청 시원해요.”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바람이 여름의 귓가를 스쳤다. 정원에서 자주 느낄 수 있었던 푸릇한 냄새가 아래에서 올라왔다.

    “그렇지? 여기는 사계절이 시원하더라.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가.”

    트렁크에서 짐을 꺼낸 이온이 양손 가득 들고는 별장을 향해 걸었다. 느릿하게 밖으로 나온 이훈 역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 여름을 두고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진 여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저 멀리 보이는 이훈을 따라 걸었다. 이것저것 챙겨 주며 바삐 움직이는 사람 하나 없는 아주 조용한 곳이어서인지 기분이 오묘했다.

    서울에 있는 집과 별다른 것 없는 구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형제의 별장은 느낌이 많이 달랐다. 돌아가는 동공을 가누지 못한 채 이훈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그들은 1층에 있는 소파에 얼마 없는 짐을 올려 두기 시작했다.

    그리 많은 짐이 아니었기에 짐을 두고 자리에 앉기는 편했다. 서울에 있는 집처럼 긴 복도를 따라 방이 곳곳에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이훈의 근처로 다가간 여름은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2층은요?”

    “있는데. 정말 창고용이라 잘 안 써. 1층에 있을 거 다 있기도 하고.”

    게다가 방으로 보이는 곳은 얼마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있는 커다란 공간에 넓은 침대고 책상이고 전부 눈에 담을 수 있을 위치에 있었다. 셋이 누워도 충분한 침대는 통창의 반대편에 있었기에 침대에 눕는다면 앞으로 뻗어 있는 풍경이 다 보일 정도의 절묘한 위치였다. 필요한 모든 것들이 1층에 모여 있었다.

    어느새 이훈은 들고 온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익숙하다는 듯이 짐을 풀고 있었다. 출발할 때나 지금이나 구겨진 미간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 끌려왔다는 말이 겉으로 뻔히 드러나 있었다.

    그의 기분에 거슬리지 않게 여름은 천천히 소파에 내려앉았다. 어쩐지 머리가 지끈 아파 오는 듯했기 때문도 있었다. 커다란 집에서 나와 차에 올라탈 때부터였다. 반년을 안에서 생활했다. 나가야 하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갇혀 있다시피 지낸 날이 후회스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여름에게 새로운 길 위로 발을 내딛는 건 피로를 낳기도 했다. 감탄과 설렘을 뚫고 피어오르는 모든 감각을 끌어오기 충분했다. 두통부터 시작된 고통은 어느새 목구멍을 찔러 오는 구토감으로 이끌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그런 걸까, 소파에 등을 편히 기댄 여름은 눈을 내리감았다.

    아침 일찍 출발한 여행이었다. 이온이 진작에 그리 짧지 않을 여행이 될 거라 언질했다.

    지난밤부터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뛰는 가슴에 여름은 평소보다 늦은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밤을 지새우고 일찍 일어났으니 졸음이 몰려옴에 당연했다. 게다가 오는 길 내내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며 바깥 구경을 했으니 여름은 정신도 기운도 전부 빠지고 난 뒤였다.

    ‘아마 도착하면 바로 점심을 먹기로 약속을 한 것도 같은데, 조금 눈을 붙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눈앞에 펼쳐진 커다란 호수를 마지막으로 여름의 무거운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귓가에 들려 오는 소리라고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

    졸음도 피곤도 남아 있지 않은 상쾌함은 여름의 잠을 깨웠다. 누군가 깨운 것도, 시끄러운 소리에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저절로 떠지는 눈만큼 기분 좋은 기상은 없었다. 분명 소파에서 잠깐 자고 일어나야겠다 하고 잠이 들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여름이 눈을 뜬 곳은 넓은 침대였다.

    몇 바퀴를 굴러도 충분하겠다, 감히 생각만 했던 문장인데 직접 누워 보니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말이었다. 어느새 목 끝까지 덮여 있던 이불을 의아하게 끌어 내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미미한 두통과 삐끗하는 어지러움이 남아 있었지만, 몸을 찍어 누르는 피곤이 가셨기에 다행으로 여겼다.

    점심시간 가까이 도착한 별장이었는데, 어느새 눈앞에는 저절로 고개가 치켜 올라가는 주홍빛 노을이 창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얼마나 잔 건지 감히 예상도 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여겨졌던 별장의 구조는 인제 보니 편리했다. 조용한 곳에서는 타닥 하는 작은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저절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훈이 자리 잡았던 테이블에는 어느새 그가 서재에서 사용하고는 하는 노트북과 여러 가지가 옮겨져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안경과 편한 옷을 갈아입은 채 일이라도 하는 것인지 집중한 표정은 어딘가 굳어 있는 듯 보였다.

    여름은 그에게 거슬릴까 두려워 느릿하게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그리고 몸을 낮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일하는 틈에 보이지 않는 이온도 찾을 겸, 별장의 이곳저곳을 둘러볼 셈이었다. 1층보다도 앞에 넓게 나 있는 마당과 호수가 궁금했다.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터질 듯한 심장을 꾹 누른 채 별장 안으로 들어와서인지 나가는 문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으나,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가능한 곳을 전부 가 보다 보면 답이 나올 테니까, 여름은 그렇게 믿고 이훈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정반대의 복도로 걸어가려 했다.

    신고 있는 실내화마저 소리 나지 않게 한 걸음 한 걸음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느새 들려오는 이훈의 목소리에 여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냥 가만히 있지.”

    “……네?”

    “나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길이라도 잃을 생각인가.”

    그의 목소리에 따라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훈과 눈이 마주쳤다. 한 공간에 있으면서 몰래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리석었다. 여름은 이훈의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 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하루를 통으로 날려 버려서일까, 움직이기라도 하고 싶은 작은 욕심이 무너졌다. 여름은 소파로 돌아가는 길에도 이훈에게 거슬릴까 싶어 발을 높이 들어 소리가 나지 않게 걸었다.

    푹석 내려앉은 아이는 소파에 편히 기대고는 저 멀리 보이는 호수만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넓은 잔디와 호수가 있다는 사실뿐이었지만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건 왜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 무얼 해야 하지, 형은 어디로 사라지신 거지 온갖 생각을 다 하고 있던 여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윤 비서가 가져온 짐을 가지러 내려갔어. 그냥 여기로 부르면 될 걸 직접 운전해서 받으러 가는 건 무슨 멍청함인지.”

    타이밍 좋게 이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름은 빠르게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랬구나, 생각하면서도 여름은 곧장 팔짱을 끼면서도 시계를 쳐다보고 있는 이훈의 모습에 사르르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 없었다.

    줄곧 생각한 점이지만, 매일 같이 다투고 통하지 않는 말을 주고받는 이훈과 이온이었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위하는 이들로 보였다. 그들을 단지 형제라는 단어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마중…… 나갈까요?”

    여름의 느릿한 말은 이훈의 눈이 아이에게로 고정되도록 했다.

    어느새 노을은 들어가고 바깥은 어두웠다. 이훈이 혼자 나가지 못하게 한 이유를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호수가 넉넉하게 보이던 풍경은 그 무엇도 보이지 않게 변해 있었다.

    이온이 언제 나갔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중과 동시에 산책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름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이훈은 여전히 단단하게 두른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여름은 아무 말도 않고 빤히 응시만 하는 이훈의 모습에 단호하게 거절하며 안 된다는 말을 뱉으리라 생각했는지 이훈이 입을 열기도 전 어영부영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혼자 못 들고 오실 수도 있고…… 아, 길을 잃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같이 나가서 마중하면 좋을 것 같아서…….”

    짧지 않은 말에 밖을 나가고 싶어 하는 여름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조금 더 몰았다가는 금세 울먹일 여름의 모습이 예상되었다.

    “…….”

    여전히 대답 없는 이훈에 실망했는지 어깨에 가득 들어간 힘이 빠져나가며 몸이 소파의 등받이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이훈을 보기 위해 돌아간 허리가 금세 앞을 향하고 양손을 맞잡으며 무안함을 달래야 했다.

    “옷 입어.”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넓은 공간에 이훈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고 이훈은 의자에 걸려 있던 겉옷을 어깨에 걸쳤다.

    사람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할 수 있을까, 여름의 순간이 그랬다.

    이훈은 여름이 갔던 곳이 아닌 반대의 복도를 거닐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질까 여름은 밝은 표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 소파에 얹어 놓았던 옷을 들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빠른 걸음이 뜀박질로 변한 건 그 뒤의 일이었다.

    이훈의 짧은 말에 의하면 이온은 차를 몰고 꽤 먼 곳까지 나갔다고 했다. 산자락 가운데에 있는 별장에 오면서 음식이고 식량이고 하나도 챙겨 오지 않았다. 당연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건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형제는, 아니 이훈은 당연하게도 윤 비서가 알아서 하리라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름과 함께 왔다는 사실에 달라진 점은 이온이 직접 윤 비서가 챙겨 온 음식들을 가지러 나갔다는 점이었으니 말이다.

    윤 비서를 이곳에 부르면 쉽게 끝날 일이었으나, 그가 어리석음을 자초한 이유를 이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복잡한 이유는 따위 없었다. 전부 이 작은 아이에게 있었다.

    여름과 지내게 되는 이 별장에 누군가의 흔적 하나 남는 게 싫었을 것이었다. 이온은 여름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완벽하게 끝내고 싶어 했다. 단지 그 이유였다. 몇십 년을 함께해 온 윤 비서에게까지 말도 안 되는 기준이 적용되는 걸 보면 아이를 향한 이온의 척도를 감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온은 여름이 잠에서 깨어나기 두어 시간 전 출발 했다고 했다. 짧은 산책 끝에 맞이할 이온을 기다리며 여름은 푸릇한 잔디를 밟기 시작했다. 어둠에 갇혀 색이 확실히 보이지 않았으나 생생한 풀냄새는 확실했다.

    들고나온 겉옷에 팔을 넣었다. 해가 내리 앉으니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팔에 달아오른 소름이 겉옷 틈으로 사라졌다. 여름의 발은 이훈의 방향에 따라 바뀌었다. 이훈이 이쪽으로 걸으면 그를 따라갔으며, 저쪽으로 발을 옮기면 여름의 몸 역시 틀어졌다.

    앞에 나 있는 호수 가까이에서는 다양한 생명체의 소리가 났다. 호수 가까이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으시려나, 여름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훈은 왜인지 별장 앞에 넓게 나 있는 마당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종착지는 침대에 누우면 보일 만한 잔디밭 위 벤치였다.

    별장의 통창을 뚫고 나오는 빛이 이훈과 여름을 감쌌기에 서로의 얼굴도 모습도 어둠 속에서 잘 보였다. 의자에 편히 기대앉은 이훈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흘깃 쳐다보던 여름은 양손의 손가락을 부딪쳤다.

    길지 않은 머리카락과 익숙한 안경은 단정한 이훈의 외모에 가장 잘 어울렸다. 게다가 이온보다는 두꺼운 인상이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게 만들었다. 여름은 소리 없이 앞을 바라보았다가 옆에 있는 이훈을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너는─”

    그런 여름을 눈치 못 챌 이훈이 아니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이훈은 목을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그렇게 생각도 의지도 없는 편인가?”

    “……네?”

    갑작스럽기도 하고 평소보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그의 목소리에 위압감을 느낀 건 보육원 원장님 책상 아래에서 울먹이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우리가 널 가두고 있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건가.”

    어느새 뜨인 이훈의 두 눈이 여름의 얼굴 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이훈은 옆으로 돌아앉아 있는 여름의 쪽으로 몸을 숙인 채 검지를 뻗어 아이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당황해서 불안에 잡아 먹힐 것 같은 여름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진짜 모르고 있었나 보네. 그 쉬운 걸 아직도 모르고 있으면 어떡해.”

    찬 바람이 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날씨보다도 낮아진 이훈의 주변이 더욱 차가웠다. 그가 하는 말이 머릿속에 뒤엉켜 한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이온을 마중하기 위해 나온 산책이었다.

    무얼 잘못한 걸까, 걸어오는 동안 나눈 대화라고는 이온의 여부뿐이었다. 어디가 거슬린 거지, 여름은 빠르게 뛰는 심장과 다르게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조금 더 파고들었다가는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그거야말로 최악의 행동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이는 쥐고 있는 주먹에 힘을 주며 이훈이 물어 온 질문에 답을 찾아야 했다.

    이훈의 손가락이 맞닿아 있는 턱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착각이 들었다.

    생각도 의지도 없냐고 물었다. 여름은 그의 말에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지금의 선택이 자신의 의지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이온이 없는 시간, 어둠이 내려앉은 이곳에서의 이훈의 말은 원하는 걸 포기하라며 재촉하는 듯한 착각을 들게 했다. 당장에라도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애원하길 바라는 눈은 여름을 곧장 굳게 만들었다.

    받기만 하는 관계는 절망을 가져온다. 탐욕을 낳고, 자만심에 빠지게 했다. 이훈의 말에는 오류가 있었다. 형제는 저에게 강요와 강제를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북돋아 주기를 반복했다.

    지난 시간 동안 여름에게 찾아온 건 자만도 탐욕도 아니었다. 잘하고자 하는 의지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만이 자리 잡았다. 형제는 그런 제 마음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속을 알 수 없는 건 여전했으니 말이다.

    “마음에 드시지 않을 점도 많고, 부족하고 모르는 것도 많은 건 사실이지만…….”

    “…….”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볼게요……. 뭐든지 잘 할 수 있어요. 이제 가족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잘해 보일게요, 여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선택이 아니었다. 분명히 해내야 했다. 그들이 귀찮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여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훈의 눈을 피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입 밖으로 포기하라며 꺼낼 그의 말이 두려웠다.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을 바라보던 여름은 금세 눈을 꾹 감았다. 당장이라도 나가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의 예상과는 달리 턱을 곤두세우던 이훈의 손가락이 따뜻하고 넓게 변해 한쪽 뺨을 감쌌다.

    뭐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뜨려는 참이었다. 분명 그러리라 머릿속에서는 생각했는데, 열기가 입술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순간 뜨인 눈은 이훈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새 올라온 그의 손이 여름의 양 뺨을 감싼 채, 입술이 서로 맞닿아 있었다. 그 흔한 쪽쪽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내려앉은 이훈의 입술이 아이의 아랫입술을 깨물듯 빨아올리고 있었다. 그에게 붙잡힌 여름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갑자기 맞닿아 버린 서로의 온기가 오가고 있음이 생생히 느껴졌다.

    분명 벗어나려 했으나, 뺨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은 그럴 의지마저 꺾이게 하였다. 이훈의 혀가 여름의 아랫입술을 건드리더니 틈을 만들어 침범하기 시작했다.

    “흥, 흐으…….”

    이전보다 더욱더 강하게 들어오는 이훈의 힘에 여름의 고개가 완전히 젖혀지고 허리가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가 잡은 뺨이 아려 왔다. 마구잡이로 헤집는 혀가 어색하고도 이상했던 여름은 숨조차 막히는 기분의 의도치 않는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름이 이훈의 등으로 팔을 둘러 강하게 내려치고서야 이훈의 얼굴이 떨어졌다. 물론 혀가 아이의 입 안에서 빠져나오며 입술을 핥아 올리는 마무리에 겨우 부여잡고 있던 정신마저 잃을 뻔했던 여름이었다.

    “갑, 자기…… 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젖을 대로 젖어 버린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믿을 수 없다는 눈을 치켜떴다.

    “이래도 괜찮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을 이용했다. 이훈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그의 눈을 통해 해답을 찾으려 해도 나오지 않는 답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여름은 그저 제 감정을 헤집었다. 할 수 있는 한 온 힘을 기울이기로 약속한 건 그들과 함께 따뜻한 식사를 할 때부터 다짐한 마음이었다.

    “모든 게 강제라도, 정말 괜찮다고?”

    “……싫지는 않았어요.”

    “…….”

    “한 번도 강제라고 생각하지는…….”

    아이는 말을 다 할 수 없었다. 이훈의 입에서 터져 나온 짧은 숨도 그렇고, 괜스레 보이는 눈치에 고개가 점차 아래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엉덩이를 이용해 이훈에게서 조금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래에 힘을 준 채 뒤로 물러나는 모습에 얼이 빠진 건 이훈이었다.

    이훈은 울 것처럼 굴더니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는 여름의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이온이 데려온 여행이었고, 벌써 아이를 데려와 지낸 시간도 길었다. 절대 다른 이들처럼 내칠 생각을 하지 않는 이온에 이훈은 시선을 돌렸을 뿐이다.

    그러나 완전히 늦어 버렸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마저도 늦었으니 이훈은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비슷한 걸 데려온 건 확실하네.”

    이온은 절대 변하지 않을 아이를 골라 데려왔고 그렇게 키우고 있었다.

    이훈이 흘리는 말이 여름에게도 들렸으나, 그는 대답을 듣지 않고 자리를 박차 일어났다. 단숨에 일어난 일은 여름에게 두통으로 다가왔다. 이훈을 따라가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두 걸음은 움직였을까, 그는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섰다.

    “언제 왔어.”

    알 수 없는 말을 뱉은 이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를 돌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을 옮겼다. 이훈이 바라본 채 외치던 방향을 바라보니 익숙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알고 있었어?”

    그에 말에 이어 드르륵 하는 굉음이 울렸다. 이온은 런치 박스가 가득 쌓여 있는 캐리어를 끌며 정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언제 도착한 것일지도 모를 이온의 모습을 보니 당황스러움보다도 반가운 마음이 먼저 밀려 들어왔다.

    “좋은 시간 보내고 있는 것 같길래. 잠깐 피해 준 건데. 벌써 들어가는 거야?”

    빠르네, 이온은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훈의 모습은 어느새 안으로 들어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이훈과 함께했던 자리에는 그가 들고 있는 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기 바쁜 여름만이 남아 있었다. 눈이 보기 좋게 반짝이고 있는 걸 보아 한참을 기다렸구나 싶은 이온은 입꼬리를 쭉 끌어 올린 채 아이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우리도 들어가자.”

    아득하게 내려앉은 어둠 사이를 뚫고 여름은 이온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익숙한 자세였다. 이온은 그제야 벌렸던 팔을 아이의 어깨에 두르고는 이훈이 걸었던 길 그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형과 무얼 했는지, 잠을 잘 잤는지 물어 오는 이온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무서웠던 이훈의 모습이 여름에게는 앞으로의 다짐이 되었다. 조금도 잊지 않고 되새길 밑거름 같은 것 말이다.

    아이의 어깨에 두르지 않은 손이 끌고 있는 캐리어에는 당연히 많은 짐이 담겨 있으리라 믿었다. 캐리어에서 들려오는 굉음과 함께 어둠을 뚫은 그들이 보낼 밤이 저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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