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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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지나고 있다는 건 새로운 시작과 함께 날이 맑아지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커다란 집의 유일한 아이인 여름이 새 학기를 맞이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았으나, 여름의 선생인 연우의 어깨가 무거워졌다는 변화는 있었다. 아이를 버려 둔 줄만 알았던 형제와 상담 어린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큰 원인이었다.

제 학생인 여름의 방은 2층에 있었다. 으리으리하게 넓은 집도 이제는 익숙해져서인지 발걸음이 닿는 대로 계단을 오르려는 참이었다.

그때 저를 부여잡는 목소리는 아주 처음 듣는 음성이었다. 아니, 몸을 돌려 얼굴을 보니 반듯한 안경과 정장이 익숙했다. 아마 이 집의 사장님들이 비서라 부르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연우가 처음 계약서를 작성할 때 만났던 사람이기도 했다.

남자를 따라 들어간 곳은 1층의 가장 끝에 있는 방이었다. 1층을 돌아다닌 적도, 수업이 끝나면 왜인지 모르겠지만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는 탓에 곳곳이 처음 보는 색다름이었다. 그렇게 해서 들어온 방은 벽이 책장으로 가득한 넓은 공간이었다.

뒤로 방문이 닫히고 한가운데 위치한 원목 책상에 있던 이도, 소파에 편히 누워 있던 이도 고개를 들어 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 오셨어요?”

소파에서 눈을 비비며 일어난 이는 이온이었다. 수업마다 제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 건지, 수업 도중에도 품에 끼고, 안고 난리를 부렸는데 눈이 시릴 정도로 방해하던 이의 얼굴을 이곳에서 보는 건 또 새로웠다.

“아……, 네. 안녕하세요.”

연우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들에게 인사했다. 학창 시절,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교무실에 불려 온 기분이었다. 차갑게 쳐다보던 시선이 내려가고 원목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와 동시에 연우의 발걸음도 형제의 건너편으로 향했다. 아이를 선생에게 맡긴 부모와의 상담 시간이 분명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렸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듣지 못한 연우의 뺨이 붉어졌다.

“네?”

당황한 듯 되물은 연우의 말에 이훈은 고개를 더욱 치켜들고는 말했다.

“일한 지 얼마나 되셨냐고요.”

“아……, 반년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하고 끄덕이는 남자의 옆에 이온은 생긋 웃기만을 반복했다. 자다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재미있는 듯했다.

“한여, 여름이는 어떻습니까.”

연우를 만나고자 했던 건 궁금해서였다. 공부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한여름이 얼마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 여름이요.”

무서운 이훈의 얼굴과 달리 평범한 학부모의 태도에 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꾹 참았다. 연우는 전보다 편해진 얼굴로 위에 있을 여름을 떠올렸다.

“평범한 수험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진도를 잘 따라와 줘서, 앞으로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원하는 대학에 충분히 갈 수 있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

“그런데 문제는 여름이가 아직도 진로나 학과를 정하지 못했더라고요. 일찍 정하면 좋을 텐데. 그래도 시간은 넉넉하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생각보다 평범한 대화에 연우의 마음도 가벼워졌다.

“그렇군요. 계속 부탁드립니다.”

이훈의 말은 짧고도 굵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거워졌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가득한 부자로 보이는 이가 동생의 선생이라는 이유로 어린 학생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담백한 말이지만 진실 어린 말은 연우의 표정을 단숨에 굳게 했다.

“아, 그리고 다음 주는 안 오셔도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훈 옆으로 갑작스레 일어나 바짝 붙은 이온이 말했다.

“네?”

“가족 여행을 가기로 해서요.”

가족 여행을 말하는 이온의 표정이 가벼웠다. 이 집의 사정과 가족의 형태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다양한 가족 구성원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나라에서 이상한 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형제들끼리 뭉쳐 사는 부자 가족으로 보였기에, 그것이 전부였다.

가족 여행을 갈 정도로 형제간 사이가 좋구나, 미소가 절로 지어질 정도로 신기했다. 아마 집에서 엉덩이나 벅벅 긁고 있을 제 남자 혈육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여름이에게도 좋은 시간이 되겠네요.”

연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보다 10살은 많아 보이는 형제였지만 서로 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 한참이나 눈을 뗄 수 없었다. 실수라도 할까 봐 발걸음을 빨리하게 되는 것도 있었다. 남자 셋이서 하나 남은 삶을 살아야 할 텐데 저렇게 행복하다면 어려움이 하나도 없을 것으로 보였다.

겉보기엔 커다랗기만 한 집이었지만 온기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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