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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 리클라이너에 앉아 이번에 주문한 책을 읽고 있었다. 한낮의 볕이 거실 바닥에 따스하게 내리 앉은 평온하고 여유로운 토요일이었다. 책은 리더십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이내 덮어 버렸다. 발 받침대에 다리를 올리고 길게 기대 눈을 감고 있으니 곧 샤워하고 나온 영인이 옆에 와서 섰다.
눈도 뜨지 않고 단지 기척만으로 영인이 왔음을 느낀 백이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 영인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백이 잠든 줄 알고 다가와 얼굴 구경이나 하려던 영인이 놀란 기색을 다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안 잤습니까?”
백이 슬쩍 실눈을 뜨며 웃었다.
“눈만 감고 있었지.”
이런 재미가 요즘의 낙이라면 낙이었다. 영인을 놀리고 만지고 관찰하고 예뻐해 주는 일상이 평화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가끔 영인이 자신을 보는 눈빛에 걱정과 죄스러움이 담겨 있다는 것도 진작 눈치채고 있었지만,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더 많은 사랑과 표현으로 확신을 주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영인은 실내용 파자마 바지만 입고 있는 상태였다. 백에게 오른손을 잡힌 탓에 왼손으로 어설프게 수건을 쥐고 젖은 머리를 털었다. 불편할 텐데도 백에게서 제 오른손을 빼 오지 않았다. 백이 미소 지으며 발 받침대를 발로 밀어 앞으로 멀리 보내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 앉아 봐.”
백이 다리를 넓게 벌려 앉고는 고갯짓으로 영인에게 신호를 주었다. 영인이 별 반발 없이 바로 백의 발치에 앉자 백이 자연스럽게 수건을 들고 영인의 젖은 머리칼을 매만져 주었다. 중간중간 손가락에 힘을 주어 두피도 꾹꾹 마사지해 주며 꼼꼼히 타월로 물기를 제거했다. 영인의 짧은 머리카락이 충분히 건조되었다고 느껴진 후에도 한참을 더 장난치듯 영인의 머리통을 쓰다듬고 만졌다.
햇볕 때문에 따끈하게 달궈진 거실 바닥에 앉아 백의 손길을 즐기던 영인은 나른함을 느꼈다. 오랜 잠에서 깬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또 잠이 쏟아졌다. 백의 무릎 근처에 뒤통수를 기대자 백이 가만히 영인의 옆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편안하고 행복했다. 더는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삶이 만족스러울수록 당연하게 영인이 가진 긴장의 파고도 높아졌다. 자꾸 몰려오려는 불안과 두려움을 외면하기 위해 영인이 자신의 양옆을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백의 발을 손으로 쥐었다. 단단한 발등이 느껴지자 그제야 다시 안정할 수 있었다.
“다음 주는 또 마감이다. 일요일 출근 예정. 하기 싫네.”
백이 가만히 영인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마감을 기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마감의 시작으로 한 달을 마무리하고 마감을 끝냄으로써 새로운 달을 맞이했다. 이번 마감이 끝나면 어느새 11월이었고, 올해도 얼마 남지 않은 셈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던 백이 문득 영인을 처음 만났던 5월을 회상했다. 겨우 반년 남짓한 시간 동안 변한 것이 너무 많았다.
“책임님도 일하기 싫을 때가 있어요?”
“매일 하기 싫은데. 노는 게 제일 좋아, 너랑.”
항상 활기차고 어떤 업무에도 쉬이 힘든 티를 내지 않는 백이어서인지 그 대답이 의외로 느껴졌다. 백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스스럼이 없었고 그럴 때마다 영인은 백과의 거리가 가까워짐을 느꼈다. 백이 또 곁을 허락해 준 것만 같았다.
“강영인 과장님은 그럼 개발이 재미있어요?”
백이 영인의 억양을 따라 하며 물었다. 그 물음을 듣고야 영인이 자신이 한 질문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머쓱하게 웃었다.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지 재미있을 리 없었다. 강박적으로 테스트를 진행해서 문제가 없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막상 소스 이관 날이 되면 초조해지곤 했다.
생각의 끝에 주어진 것은 묘한 동질감이었다. 모든 일에 초연한 백도 사실은 그렇지 않은 척 노력했다는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유치하게도 그게 또 만족스러웠다.
백이 영인의 정수리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인이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자 백의 손가락이 방금 입술이 지나간 자리를 간지럽혔다.
“점심 먹으러 가자.”
커다란 구름이 아파트 사이를 지나가는지 구름의 그림자가 방금까지 볕이 들던 자리를 어둡게 만들었다. 영인이 어두운 그림자를 지켜보다가 곧 백을 따라 일어섰다. 괜찮았다. 불안해질 때 손을 뻗으면 언제고 백과 닿을 수 있었다.
당장 다음 걸음을 떼지 않으면 그대로 가라앉을 늪 같은 삶을 살아가던 영인에게 최초로 단단한 지반이 생겼다. 비옥하고 풍요로운 대지에는 힘들면 언제라도 앉아 쉴 수 있는 커다란 나무와 그 나무의 그늘도 있었다. 모두 백이 마련해 준 무너지지 않을 삶의 토대였다.
외출 준비를 순식간에 마친 백이 고개를 돌려 영인을 보며 이어 말했다.
“밥 먹고 장도 보고 올까? 저녁 뭐 먹고 싶어?”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둘만의 온화한 나날들이었다.
* * *
디폴트란 사전적으로 프로그래밍할 때 응용 프로그램에서 사용자가 특별히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시스템이 자동으로 적용하는 미리 정해진 값이나 조건을 말했다. 영인에게는 사람의 의식도 컴퓨터 프로그램과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모두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시스템 로직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사고의 흐름이었다.
영인의 디폴트 값은 불안이었다. 노력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늘 불안을 기저에 두고 살았다. 거의 항상 불안한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면 그것은 모두 막지 못한 본인의 잘못이 되었다. 영인은 알 수 없었고, 알았어도 막지 못했을 수많은 제 탓이 아닌 불행들을 모두 자신의 과오로 여기며 살아왔다. 불안 위로 죄책감, 죄책감 위로 더 큰 불안. 그런 악순환 속에서 원망할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언제나 적당히 소란스럽고 또 적당히 고요한 사무실에 작은 야단이 벌어졌다. 커다란 사무실 한 층에서 일하는 인원만 백 명을 훌쩍 넘었다. 웬만한 소동은 그저 소동의 주인공들 선에서 작게 정리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오늘, 수림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된 소란은 넘실넘실 흘러 어느새 영인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자신에게 할당된 개발에 집중하던 영인이 자세나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평소라면 무시했을 영양가 없는 남 이야기였지만,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중간중간 수림과 영인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따가운 시선과 함께.
“강 과장님, 임수림 책임님한테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영인과 몇 번의 프로젝트에 함께 투입된 적이 있어 그나마 친분이 있는 정선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표정 관리를 위해 영인이 자신의 볼 안쪽을 지그시 물었다. 영인의 불안이 어찌할 새 없이 빠르게 영인을 잠식했다.
무표정한 영인의 얼굴은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음을 가장하고 영인이 천천히 수림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 백도 있었다. 팔짱을 끼고 걱정스럽게 상황을 파악하던 백이 영인을 가장 먼저 발견했다.
영인을 보는 백의 눈에 헤아릴 수 없는 염려가 담겨 있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백만은 지금 영인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당장 가서 영인을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남들의 시선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백은 무력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죠?”
영인의 음울한 음성에 각자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 한순간 영인에게 집중했다. 모두 이 폭탄의 원인, 불행의 시초를 보는 듯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수림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영인을 본 자는 수림이었다.
“영인아, 우리 어떻게 하지? 아니, 나 어떻게 하지?”
수림은 울고 있지 않았지만, 우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진다는 표현을 처음 한 사람은 누구일지 영인은 문득 궁금해졌다. 가슴이 정말로 쿵, 떨어졌다.
‘그래, 그때부터 이상했었지. 이럴 줄 알았는데.’
영인의 후회가 아프게 영인을 찔렀다. 나쁜 예감이 들었을 때 무시해서는 안 됐다. 자신의 자리에서부터 수림의 자리까지, 그 길지 않은 거리를 걸으며 영인은 이미 지쳐 버렸다. 무엇이 문제냐고 물을 힘도, 용기도 없었다.
“김태준 차장이 항의 메일을 보냈다네. 영화 전자, 영화 시스템즈 감사 쪽이며 인사부 쪽이며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들쑤셨나 봐.”
간신히 서 있는 영인의 어깨를 백이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무슨 항의요?”
“영인 과장이랑 수림 책임이랑 동창인데 공정한 투입이 맞냐 뭐 그런 거지. 강 과장님만 특급 대우받는 것도 문제 있는 거 아니냐면서.”
말을 마친 백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인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결국 또 문제는 자신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백이 경고하듯 던진 말이 부정적인 사고의 흐름을 끊었다. 백이 영인의 등에 손을 얹은 채로 수림을 향해 말했다. 그렇지만 그 말은 사실 영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강영인 과장 특급으로 계약한 게 우리 프로젝트에서만 이례적으로 있는 일도 아니고, 다 증빙할 수 있는 문제잖아. 김태준 차장이 못해서 수림 책임이랑 영인 과장이 배로 일한 것도 체크해 뒀었고. 좀 귀찮아진 거지 문제 될 거 하나도 없어.”
백이 단호하지만 따뜻한 음성으로 수림과 영인을 달랬다. 백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모든 문제가 더는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든든하고 강인한 보호막이었다. 절대 무너질 일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수림도 그 말을 듣고는 좀 정신을 차렸는지 표정이 변했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백의 말대로 귀찮고 피곤해진 거지 인생이 망한 것이 아니었다. 수림이 백을 보며 이제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이 미소 지으며 여전히 영인의 등에 올려 둔 손에 힘을 주었다. 창백했던 영인의 얼굴에도 다시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백의 핸드폰이 진동한 것은 그때였다. 영인의 등에서 손을 떼고 백이 핸드폰을 꺼냈다. 팀장 신영준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네, 노백입니다.”
-백아.
영준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백이 영인과 수림을 보며 살짝 웃어 보인 뒤 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일이십니까?”
-너 뭐 사고 친 거 없지?
“제가 무슨 사고를 쳐요.”
백이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대답하자 반대편에서 영준이 안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럼 됐다. 뭐 켕기는 거 있으면 나한테 꼭 말을 해 줘야 해. 그래야 내가 널 커버 치든 어쩌든 할 수 있다.
“켕기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무슨 일이신데요?”
-네가 켕기는 거 없으면 나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조 상무님이 너 좀 보자 하더라. 지금 가 봐. 진짜로 나한테 할 말 없는 거 맞지?
영준이 목소리를 확 낮춰 작게 이야기했다. 주변에 이 대화를 들을 사람이 없는데도 혹시 누가 들을까 봐 신경 쓰는 눈치였다.
“진짜로 없어요. 제 이름을 걸고.”
-그래, 그럼 다녀와서 나한테 무슨 이야기 한 건지 말 좀 해 줘.
“네.”
백이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문을 열려다 말고 백이 잠시 뒤돌아보았다. 여전히 수림의 앞에 서 있는 영인과 눈이 마주쳤다. 장난스럽게 눈을 한번 찡긋거려 준 뒤 백이 문을 열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멀어져 가는 백의 뒷모습을 보는 영인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왔나.”
조을현의 집무실 문을 열고 백이 들어서자 을현이 백을 보지도 않고 바로 아는 척했다. 백이 꾸벅 인사하자 그제야 을현이 모니터 화면에서 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앉아 봐라.”
을현이 응접용 소파를 가리키고 자신도 사무용 의자에서 일어서 백의 맞은편에 앉았다. 을현 앞에 앉은 백의 태도는 언제나처럼 당당했다. 어디서나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을현은 그 점을 좋아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백이 용무를 묻자 을현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백은 불길함을 느꼈다. 을현이 싫어하는 것은 시간 낭비와 인사치레였다. 용건이 있으면 빨리 용건을 말하고 끝내는 편이지 저렇게 말없이 사람을 떠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어떤 위기감이 느껴졌다. 백이 더욱더 꼿꼿하게 앉으며 긴장했다. 척추뼈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 인원 소싱 이슈 들었지? 니가 진행하던 프로젝트 문제다 아이가.”
“계약 연장 안 된 개발자가 임수림 책임한테 누명 씌운 그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백이 을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금 조 상무가 이곳에 자신을 부른 것도, 이 문제를 굳이 언급하는 것도 모두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백은 최대한 감정을 개입하지 않고 제삼자의 입장을 견지하며 말했다. 객관적인 방관자로 남아야 했다.
그렇지만 을현은 백을 무대 밖에 있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기세가 팽팽하게 맞섰다. 누구도 직접 드러내지 않았지만, 위기는 이미 코앞에 와 있었다.
“누명이라기엔 맞는 말 아이가. 강영인이하고 임수림이하고 친구라메. 요새 그룹 차원에서 공정과 정직의 가치를 강조하는 거 니도 알고 있지?”
백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그렇게 하면 을현의 검은 속내를 볼 수 있을 것처럼. 영화 전자는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대기업이었다. 입사 허들부터 높았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잘난 사람들 가운데서도 상위 1%에게만 임원의 길이 열렸다.
남들보다 확연히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일을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부하직원을 적재적소에 쓰면서 인재를 잘 알아보는 자질도 필요했다. 그 두 가지를 충족하는 사람들은 생각만큼 적지 않았다. 백이라고 왜 아닐까.
셀 수 없이 많은 날고 기는 사람 중 임원까지 올라간 자들에게는 그래서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양심이 없을 것. 다른 기업은 몰라도 영화 전자만큼은 어떤 최소한의 인간성을 버린 자들에게만 가장 마지막 성공의 문을 열어 주었다. 죄의식 없이 사람을 쓰고 버릴 줄 알아야 했다. 그리고 을현도 물론 그런 사람이었다. 똑똑하고 잘났으며 양심이라고는 없었다.
짧은 침묵 속 마주치는 시선을 통해 백은 을현이 자신을 다음 희생양으로 삼았음을 알아챘다. 방금 통화에서 몇 번이고 이어진 팀장의 유난스러웠던 확인이 이제야 납득이 됐다.
“그룹 전체 방향성이랑 우리는 얼라인 해야지. 맞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백은 미소 지었다.
“백아, 내가 니 아끼는 것도 알지?”
“그럼요, 상무님. 저도 상무님을 가장 존경하는걸요.”
백의 대답을 들은 을현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이 이슈가 영화 시스템즈에서 안 끝나겠더라. 우리도 감사가 들어갈 거야.”
백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작은 실소가 터졌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백이 을현을 응시했다.
“감사 과정은 내가 말 안 해도 니가 잘 알 거고. 백아 내가 다른 말 안 할게. 이번엔 네가 총대 메라.”
“하아.”
백이 한숨을 내쉬고 자세를 바꿔 앉았다. 바르고 꼿꼿했던 태도가 한순간에 변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가볍게 꼬며 을현의 진의를 고민했다. 백의 분위기가 바뀐 것만으로 을현과 백의 관계성마저 변한 것처럼 보였다.
영화 그룹의 감사 시스템이야 백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검사도 경찰도 아닌 자들이 검사나 경찰보다도 지독하게 감사 대상을 조사하고 탈탈 털어 댄다고 했다. 감사 대상은 보통 정말 비리에 연루된 사람이 아니라 잘라 내고자 하는 관리자급 인원이었다.
그 끔찍한 악명 때문에 감사 대상이 되었다는 소식만으로도 알아서 사직서를 제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명예 때문에, 가족 때문에 끝까지 결백이나 진실을 밝히려는 경우도 물론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변호사를 대동하고 굳센 마음으로 감사실에 가 봐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도 회사를 떠났다. 처음 입사할 때 의례적으로 쓰는 고용 계약서에 있던 조항들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회사가 요구하면 직원은 어떤 사적 정보라도 제공해야 했다. 감사팀과 법무팀에 고용된 변호사들은 핸드폰의 통화 내역과 문자 내역은 물론이고 통장 거래 내역도 함께 제출받아 문자 하나, 입금된 푼돈 하나 모두 시시콜콜하게 걸고넘어졌다. 모두 진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상자를 모욕하기 위해서 하는 행위였다.
“하, 참.”
백의 입에서 기어코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니까 을현은 지금 자신 대신 백을 제물로 삼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니는 솔직히 잘못한 거 없다 아이가. 한두 달 감사팀 아들 때문에 피곤이야 하겠지만, 털어도 먼지 나올 것도 없잖아. 니가 좀 고생해라.”
을현이 무골인 사람처럼 웃었다. 백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고도 그랬다. 백이 자신의 턱을 만지며 고민했다. 털어 봐야 나올 먼지는 없었다. 대신 영인이 있었지.
“왜 접니까?”
그 부분이 이해되지 않았다. 백은 을현에게 쓸 만한 말이었다. 이렇게 버려질 패가 아니었다.
“니 진작 장가만 갔으면 이런 꼴 안 봤지. 처자식 있는 사람들한테 이런 부탁은 가혹하지 않겠나. 백이 니야 니 한 몸만 건사하면 되는데. 마침 너거 프로젝트에서 잡음도 났고.”
을현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을현도 재촉하지 않고 진득하게 백의 응답을 기다렸다. 어차피 백에게 주어진 답은 하나뿐일 테니 급할 이유가 없었다.
백은 자신과 수림이 아주 나쁘게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부당거래를 한 자들이 피할 그림자를 태준이 마련해 주었고 그 덕분에 수림과 백이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게 생겼다. 재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 회사에서는 아무리 일을 잘해 봐야, 열심히 해 봐야 한낱 병졸에 불과했다. 허무했다.
이름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삶을 통째로 부정당하고 있었다. 그토록 애써 온 지난 세월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신물이 났다.
“그렇게 되면 제 회사 생활은 끝나는 거 아닙니까?”
이윽고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백은 결정을 마쳤다.
“무슨 말을 그래 섭섭하게 하나. 1, 2년만 천안 쪽 공장에 가 있어. 그럼 내가 니 팀장 시켜 줄게. 내가 니 없이 일을 못 하잖아.”
을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에 발린 말을 뱉었다. 거짓은 아니겠지만, 보장된 확언도 못 되었다. 을현의 내일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백에게 회사 생활은 의미가 없어졌다. 이토록 나약하고 불안정한 이름이었다니. 백이 온 생을 다해 지키고자 했던 이름이 권력자가 한번 손을 휘두르면 사라질 허상이었던 것이다.
그 아픈 깨달음 후에 백은 영인을 생각했다. 영인과 나눈 수많은 메시지가 공개된다면 자신은 몰라도 영인은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백이 지켜야 할 것은 분명했다. 지금 백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인이었다. 영인을 향해 돌아선 순간부터 우선순위가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이런 깡통 같은 회사 따위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소중했다.
영인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와 함께하지 않는 삶이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했을지 백이 생각했다. 그랬다면 과연 을현이 건네는 저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들였을까? 알 수 없었다. 영인이 없는 자신의 모습이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상무님.”
백은 더없이 잔잔해 보였다. 확고한 목소리로 자신의 결론을 을현에게 말했다.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를 악문 백이 을현의 얼빠진 표정을 짧게 감상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련은 없었다.
이 와중에 걱정되는 것은 자신의 평판도, 미래도 아닌 영인이었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영인은 또 세상을 멸망시킨 죄인이라도 된 것같이 굴겠지. 마음이 아팠다.
백이 사무실로 복귀하자마자 영준이 백을 끌고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마주한 영준은 화가 나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노백! 너 뭐 하는 거야?”
노성 띤 목소리인데 정작 소리는 크지 않았다. 영준은 조심스러웠다.
“조 상무님 전화 받으셨습니까?”
“네가 왜 그만둬. 그만두려면 저 늙은 여우가 가야지. 우리가 꼬바르자. 드러운 새끼.”
영준이 백의 양 팔뚝을 강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절대 백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 같았다.
“우리 팀장님 같은 사람이 담당님 되고, 본부장님 되고 그래야 하는데. 그쵸?”
백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영준은 답답해 미칠 지경인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가족 생각해서 만용을 부리시면 안 됩니다. 아무튼 잡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 그랬으면 좀 섭섭할 뻔했어요.”
백이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영준을 얼싸안았다. 취하지 않은 맨정신에 포옹은 처음이었다. 영준이 질색하며 백을 밀어내다가 ‘너는 진짜 나쁜 새끼야.’ 하며 백의 등을 세게 두드렸다. 누가 버림받은 건지 알 수 없는 장면이었다. 영준은 확실히 자신과 팀이 백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느꼈다. 내심 고고하게 떠나 버리는 백이 존경스럽고 부럽기도 했다.
“오늘은 대강 정리하고 내일 퇴직 신청 올릴 테니까 승인해 주세요. 남은 연차 다 넣고 끝나는 날로 퇴직일 지정하겠습니다. 아! 내가 이 마당에 인수인계는 못 해 주겠다. 제가 했던 업무들 다 정리해서 공유 폴더에 넣어 두는 것까지만 하겠습니다.”
영준은 백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정말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그저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백은 진실로 홀가분해 보였다.
노백의 퇴사 소식은 곧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소문은 점점 살이 붙어 백이 조 상무의 면전에서 퇴사 의사를 밝히며 들이받았다는 이야기로까지 번졌다. 화난 얼굴로 영태가 거칠게 백의 어깨를 잡아챘다.
“미쳤어? 이 새끼야.”
자신이 떠나고 남을 사람들을 위해 업무 파일을 정리하던 백이 씩 웃으며 그런 영태를 보았다. 어디서부터 뛰어온 것인지 영태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야, 이렇게 그만두면 어떻게 해. 우리가 뭐가 돼.”
“우리가 뭐가 돼야 해? 나는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거고, 너는 영화인으로 남아 승승장구하셔.”
백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저었다. 이미 너무 많은 방문자를 상대했다. 귀찮았다. 남들에게야 큰일이겠지만, 백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썩은 동아줄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더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퇴근하고 이야기 좀 하자. 나랑은 해야지.”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타입인 영태가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이따 회식하기로 했어. 되는 사람들이랑 송별회. 거기서 이야기 많이 하자.”
“너는 뭐가 이렇게 다 간편하냐? 속이 편한 건지, 속이 없는 건지.”
영태가 울컥 치미는 어떤 감정을 삼키고는 뒤돌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백도 다시 하던 일에 집중하며 내심 이번 주에 주성이 일주일짜리 진급 교육을 받으러 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성까지 있었다면 아마 더 부산스러운 분위기였을 것이다.
주성이 앞으로 맡게 될 파트는 특히 자세하게 작성하고 있었다. 한참 집중하는데 또 모니터가 어두워졌다. 누군가 뒤에 와서 선 바람에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었다. 백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가볍게 발로 땅을 밀고 빙글, 의자를 돌려 이번 손님의 정체를 확인했다.
“아이고.”
영인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백의 표정도 대번에 허물어졌다. 무표정하게 있었지만 백만 볼 수 있는 물기가 눈가에 어려 있었다.
“강 과장님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떻게 하나.”
백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턱짓으로 가볍게 사무실 문을 가리켰다. 영인과는 잠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영인이 먼저 걸음을 옮긴 백의 뒤를 조용히 쫓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백이 먼저 올라섰다. 이미 위층에서부터 사람들이 많이 타고 내려와서 영인과 백이 바짝 붙어 설 수밖에 없었다. 백이 습관적으로 영인을 구석으로 밀고 자신이 바깥쪽에 섰다. 다른 사람들과 영인이 닿지 않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덕분에 영인은 남들보다 편하게 붐비는 승강기 안에서 1층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사내 카페 안 구석 테이블에 백과 영인이 앉았다. 언제나처럼 영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백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막상 둘 다 음료에는 입을 대지 않았다.
영인은 백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러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는 차가운 컵의 표면을 손바닥으로 만지작거렸다. 백은 그런 영인의 잘생긴 손을 응시했다. 백도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망설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실은 하나인데, 그 진실을 전할 말은 너무 많았고 또 전혀 없었다.
“일단.”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백이었다. 영인이 백을 보았다. 눈이 혼란과 의심으로 탁했다. 그것들이 가라앉으면 까만 눈동자에는 아마 또 죄책감과 후회가 남아 있겠지.
“오늘은 송별회니까 먼저 집에 들어가 있어. 네 집 말고 우리 집으로. 1차만 하고 들어가서 무슨 일 있었는지 다 이야기해 줄게. 강영인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이상한 생각이나, 걱정은 하지 말고. 원래 연예인 걱정이랑 내 걱정은 하는 거 아니야.”
백이 장난스럽게 말을 마무리했지만, 영인은 웃지 않았다. 백도 고작 이런 이야기로 영인을 안심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엄청 쉬운 과제야. 하나, 노백 집에 간다. 둘, 아무 생각 하지 않는다. 셋, 노백을 기다린다. 할 수 있지?”
백이 곧게 뻗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설명했다. 고장 난 영인의 사고에 새로운 프로그램 로직을 입력하듯이 절제되고 간단한 명령어였다. 영인이 무슨 말을 내뱉으려다 삼키고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를 여전히 꼭 쥐고 있었다. 백은 그 단단한 손끝을 톡톡 건드리며 장난을 걸고 싶었지만 참았다. 입맛이 썼다. 남자끼리의 연애는 너무 불편했다.
퇴근한 영인은 홀로 백의 집을 서성였다. 앉아 있을 수도 없을 만큼 초조하고 답답했다. 밖은 진작에 어두워져 있었다. 갑자기 몰아닥친 일들이 어떻게 된 일인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영인은 알 수 없었다. 원인을 찾는 물음은 자꾸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결국 영인에게로 닿았다.
수림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했다. 이 프로젝트에 들어와서는 안 됐다. 자신 때문에 결국 백과 수림이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그저 작은 텃밭을 원했을 뿐이었다. 소박한 모래성을 쌓고 싶었을 뿐이었다. 고작 바라는 것이라고 해 봐야 그렇게 크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텃밭이 일구어질 때쯤이면, 모래성이 완성될 때쯤이면 어김없이 무례한 침입자에 의해 모든 것이 망가졌다. 영인은 덧없고 허무했다. 사라지고 싶었다. 한참을 이어지던 자학적인 생각을 끊어 낸 것은 백의 음성이었다.
‘둘, 아무 생각하지 않는다.’
영인이 마른세수를 하며 혼자만의 번민을 멈추었다. 그리고 거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백이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송별회인데도 백은 오래 앉아 있지 않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팀원들에게야 미안했지만, 기다리는 사람을 두고 언제까지 함께 어울릴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식사 자리일지라도.
“밥 먹었어?”
백이 들어서자마자 영인의 식사 여부부터 챙겼다. 영인이 대답도 하기 전에 주변을 살펴보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신만 기다렸을 영인의 상태를 알아챘다. 그럴 줄 알고 초밥을 포장해 온 참이었다. 식탁에 음식이 든 종이백을 올려 두고 옷을 갈아입은 백이 욕실로 가서 샤워를 시작했다.
영인은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살짝 열린 욕실 문밖에 서 있었다. 씻고 나온 백이 환하게 웃으며 영인에게 뺨을 비볐다. 씻고 나왔는데도 백에게는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남아 있었다. 본격적으로 영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안겨 든 백이 작게 속삭였다.
“나 진짜 괜찮아.”
영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은 오후 내내 정리한 자신의 심경을 영인에게 들려주었다. 여전히 자신의 연인에게 기댄 채로.
“그냥 이렇게 될 버튼이 늘 숨어 있었던 거 같아. 아무리 조심해도 못 피했을 거야. 언젠가는 밟았을 거야.”
말을 마친 백이 살짝 취기가 돈 눈으로 영인을 보았다. 그 어떤 거짓도 없는 얼굴이었다. 섣부른 위로를 위한 말이 아니었다. 백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나직한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참담한 내용과는 반대로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 시를 읊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고요하고 아름답게 들려 더욱 슬펐다. 백의 인생만큼이나 모순된 상황이었다.
“그게 지금이라 참 다행이지. 내가 지금은 혼자가 아니잖아.”
백이 다시 영인의 어깨에 자신의 이마를 기대었다. 씁쓸하게 웃었지만, 영인은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 지친다. 아등바등 사는 거, 나를 증명하는 거 다 너무 지겨워.”
영인의 커다란 손이 백의 등을 감쌌다. 그러고는 백의 내면에 쌓인 울분과 고통이 소화되도록 돕듯이 천천히 그 등을 쓸어내렸다. 말없이 반복되는 그 별것 아닌 손길에 백의 마음이 달래졌다. 백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영인과 시선을 맞추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부끄러운 듯 작게 속삭였다.
“내 이름 좀 불러 주라.”
영인이 손으로 백의 얼굴을 감싸 고정했다. 뜨거운 시선으로 백을 바라보았다. 드러내지 않을 뿐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백을 향한 열망과 사랑, 존경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꺼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영인의 입이 열렸다. 백은 침을 삼키며 그 입술을 홀린 듯 응시했다.
“백아.”
분명하고 똑똑한 발음으로 백의 이름이 불리었다. 영인은 여전히 백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백아.”
백의 텅 빈 가슴이 그 부름으로 인해 차올랐다. 아주 오랜 세월 무엇을 담아도 만족할 줄 모르던 커다란 구멍이 순식간에 메워졌다.
“나는 이거면 된 거 같아, 영인아. 나는 이거면 된 거 같아.”
백은 드디어 자신의 이름과 자리를 찾았음을 느꼈다. 더는 애쓰지 않아도 노백으로 있을 수 있었다. 넘치면 넘치는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백을 백으로 봐줄 이가 생겼다. 술기운 때문인지 눈물이 날 정도로 벅차올랐다.
“나는 정말 이거면 됐어.”
만족한 백을 보며 영인이 그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 눈썹, 코끝 그리고 마침내 입술. 질척하게 키스하면서도 영인의 입에서는 백의 이름이 계속 흘러나왔다. 백의 목 언저리를 빨고, 귀를 씹으면서도 영인은 끝없이 백을 불렀다. 그간 불리우지 못한 세월을 위로하듯이. 세상에서 백의 이름을 가장 많이 말한 자로 남고 싶다는 듯이.
* * *
모든 정리를 마친 백이 마지막으로 노트북과 사원증을 챙겼다. 이것들은 본사에 가서 인사팀과 짧은 면담을 진행한 뒤, 제출해야 했다. 그게 마지막 관문이었다. 그것으로 백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첫 회사 생활은 마무리가 되는 것이었다.
백이 복잡한 표정으로 넓은 사무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주성의 빈자리를 보자 잠시 아쉬움이 들었다. 강아지 같은 녀석과는 정식으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주성이라면 아마 조만간 한 번은 볼 자리가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배신자.”
영태가 백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백이 허허, 웃자 ‘나쁜 새끼’라고 또 욕을 했다.
“잘리는 사람한테 왜 욕을 해?”
“지랄하지 마. 1년 내려가 있으면 팀장 시켜 준다는데 왜 상을 다 뒤집어엎어? 조 상무 곧 전무 될 거래. 그냥 여기서 충성 맹세 한 번 하면 앞으로 앞길이 창창해지는 건데 왜 그런 거야, 도대체?”
영태가 백에게만 들리게 작게 이야기했다. 백이 아까와는 영 다른 표정으로 영태를 보았다.
“너더러 하래?”
“그래, 이 회사 취미로 다니는 새끼야. 고고하게 살아라.”
영태가 쓸쓸하게 말했다. 가장 친했던 동기이자 친구인 백의 퇴사도, 비굴한 자신의 회사 생활도 모두 지독하게 비렸다. 삼킬 수가 없었다. 백이 그런 영태의 어깨를 두드렸다. 남는 자는 남는 자대로, 떠나는 자는 떠나는 자대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주차된 차에는 영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동으로 영인도 자연스럽게 계약이 파기되어서 둘 다 백수가 된 셈이었다.
“서울 본사 갔다가 맛있는 거 먹고, 이제 남는 게 시간뿐이니 뭐 하고 놀지 고민 좀 해 볼까?”
백이 시동을 걸며 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영인도 크게 상심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냥 이것으로 됐다고, 백이 됐다면 자신도 된 거라고 영인은 생각했다.
“그러자, 백아.”
영인의 대답을 들은 백이 아프지 않게 영인의 뺨을 꼬집었다. 좋은 향이 나는 손끝이 머물다 간 뺨을 영인이 매만졌다.
“형이라고 해.”
말은 그렇게 해 놓고 백도 웃고 있었다. 사실 영인이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었다. 다만 형이라고 부를 때 더 귀여워서 그쪽으로 호칭을 고정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영인의 입가에도 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네, 형.”
영인의 낮은 음성이 백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쩌면 처음부터 저 목소리에 반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백은 생각했다.
자동차가 영화 전자 공장을 빠져나왔다. 뒤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영화 전자에서 멀어져 갔다. 다시는 올 일 없는 길을 미련 없이 떠났다.
평일 오전, 다니는 차도 거의 없는 공장 앞 넓은 도로를 자유롭고 시원하게 내달리는 백의 차 뒤로 가을의 볕이 내려앉았다. 해방이었다.
본사에 포맷한 노트북과 사원증을 내는 것으로 모든 퇴사 과정이 끝났다.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영화 전자의 본사에서 나온 백이 습관적으로 손목을 꺾어 시간을 확인했다. 평소라면 영태나 주성과 점심 메뉴를 고민했을 시간이었다. 그 짧은 상념도 잠시, 백이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영인에게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이제 자신의 새로운 일상은 영인이었다.
“수림 책임 감사는 언제나 끝나려나?”
백이 영인과 함께 걸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영인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백의 퇴사 소식에 아연실색하던 수림은 포기하지 않았다. 백만큼이나 회사에 삶을 헌신했던 수림이었다.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장 오늘 그래서 영화 시스템즈 본사에 끌려갔다. 시간을 두면 벌어질지도 모를 증거 조작이나 청탁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벌어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백이 핸드폰을 꺼내 수림에게 문자를 남겨두었다. 감사 관계자가 볼 수도 있으니 최대한 꼬투리 잡힐 부분이 없도록 간단하게 보냈다.
[나 강남인데 괜찮으면 같이 저녁 먹어요.]
이제 수림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는 둘만의 시간이었다.
“점심 먹고 야구 한 게임? 볼링? 당구?”
“다 하죠.”
영인에게 건네는 제안인데 말을 하면서 신난 것은 백이었다. 백이 지난번 족구의 치욕을 씻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수림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백과 영인이 세 번째 볼링 게임을 마무리했을 때쯤이었다. 백이 공중에 떠 있는 전광판을 보며 상쾌하게 웃었다. 백의 승리였다. 대학교 다닐 때 거의 프로 선수급으로 볼링장을 다녔던 사실을 영인에게 말해 주지 않고 종목을 골랐다. 약간 치사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오늘의 승부는 자존심 문제였다. 운동으로 어디 가서 져 본 적이 없었는데 두 번의 패배를 용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여보세요.”
-그냥 책임님 따라 관둘걸.
수림이 울먹이며 말했다.
“어디야?”
-본사 앞 편의점.
“우리가 갈게.”
영화 전자도 영화 시스템즈도 강남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백과 영인이 집으로 가지 않고 강남에 남아 시간을 죽인 것이었다. 수림에게도 위로가 필요할 테니까.
수림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정장을 갖춰 입고 힐을 신은 데다가 안경도 벗고 렌즈를 낀 상태였다. 그만큼 긴장하고 준비했다는 의미였다. 길거리에서 캔맥주를 홀짝이며 수림이 백과 영인을 맞이했다.
“안 추워?”
백의 걱정 어린 질문에 수림이 픽, 조소를 터뜨렸다.
“속에서 열불이 나요.”
“일단 어디 들어가자.”
셋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선술집으로 들어왔다. 수림의 맞은편에 백과 영인이 앉았다. 수림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대뜸 소주부터 시켰다. 말을 마치고는 이를 악물었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백은 그것만으로도 수림이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오뎅탕이랑 모둠꼬치랑 사시미 특으로 하나 주세요.”
백이 눈치껏 메뉴를 시키고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직원이 소주를 가져오자 수림이 잔 세 개에 소주를 콸콸 부었다.
“그 새끼들 완전 개새끼들이야.”
빈속에 수림이 소주를 넘겼다.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영인이 수림의 빈 잔을 채우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이게 왜 너 때문이야. 그 김태준 망할 새끼 때문이지. 내가 그 새끼 집 주소 알아내서 잠복했다가 뒤통수 꼭 깨 줄 거야.”
수림이 영인이 따라 준 술을 또 바로 비워 냈다.
“천천히 마셔.”
백이 걱정스럽게 이야기하자 수림이 백을 째려보았다.
“나 박살 날 거 알고 있었죠? 그 미친놈들이 뭐라는 줄 알아? 강영인이 준 축의금이 뇌물 아니냐고 나한테 그러는 거야. 개또라이들이 친구도 없나 봐. 내가 그 말 듣는데 하… 씨발 관두자. 이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어떻게 일했는데. 내가 어떻게 일했는데. 책임님은 알잖아요.”
수림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상황이 변했다고 말려 봤자 직접 해 보겠다고 덤빌 거 같아서 말 안 했어. 미안해요. 그리고 임수림이 어떻게 일했는지는 내가 알지. 영화 시스템즈 이제 망했지. 임수림 없이 어쩔 거야.”
“그치? 근데 그걸 말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 내가 얼마나 충성을 다했는데. S 한번 받아 보겠다고 진짜 하라는 건 다 했는데. 근데 나더러 잘했다고 해 주는 사람은 없고, 그 미친놈 메일 한 통에 나를 이렇게 만들어?”
결국, 수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분하고 억울하면서 슬펐다. 여자라는 핸디캡을 애써 무시하면서 다른 남자 동기들보다 일부러 더 악착같이 해 온 회사 생활이었다. 이 마당에 회사에 남아 봐야 이제 수림에게 미래는 없었다.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혀 버렸다.
“책임님은 이제 뭐 할 거예요? 그냥 월세 받으면서 살아도 되나? 아니, 근데 오늘 왜 둘이 같이 온 거야?”
곧 안주가 나왔고 백이 대답 대신 잔을 들었다. 수림과 영인이 백의 잔에 자신들의 잔을 부딪쳤다.
“하나씩 대답할게.”
산뜻하게 잔을 비운 백이 웃으며 말했다. 영인도 주의를 기울여 백의 말에 집중했다. 백의 계획에 대해서는 영인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내 대학교 동기 중에 박사 하다가 때려치운 인재가 있거든. 걔가 몇 년 전에 코딩 학원을 차렸어. 근데 이번에 세컨 카로 벤틀리를 샀다더라고.”
수림은 로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현실성이 없었다. 백이 좀 더 테이블 가운데 쪽으로 몸을 숙이며 작게 말했다. 수림과 영인도 곧 백처럼 자세를 고치고 백의 말에 귀 기울였다.
“돈이 너무 많아서 미치겠대. 그래서 내가.”
백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수림이 백의 입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틀어 더 집중했다.
“나 좀 고용하라고 말했어. 한 5개월? 간 좀 보게. 같이 해 볼래?”
말을 마친 백이 수림을 보고 물었다. 수림이 갑자기 받은 생각 하지도 못한 제안에 어안이 벙벙한지 정신을 못 차렸다. 영인도 의외라는 얼굴로 백을 보았다. 그런 쪽으로 생각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5개월 동안 간 보고? 학원이라도 차리게?”
“괜찮을 거 같으면. 교육의 메카로 가야지. 영인아, 어디가 좋아? 대치동? 목동?”
백이 영인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수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왜 강영인에게 묻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걸 왜 영인이한테 물어.”
“그거야 같이 가야 하니까. 그치? 우리 같이 이사하는 거지?”
백이 혼자 자신의 잔을 채우자 영인이 황급히 백의 잔을 손에 잡아 들었다. 수림은 둘이 하는 꼴을 멀뚱멀뚱 지켜보며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같이 이사라니?
“뭐야, 잠깐만. 내가 뭘 놓친 거야?”
수림이 가만히 자신의 팔을 감싸 안았다. 이성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동물적인 감각이 먼저 이상을 감지했다. 소름이 돋았다.
“둘이 설마….”
백이 보란 듯이 손바닥을 펼쳐 영인의 앞에 내놓았다. 영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림에게 둘의 관계를 밝히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영원히 백과 영인, 둘만의 비밀스러운 사랑으로 남을 것으로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다 백에게 혹시 다른 사람이 생긴다면 영인은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져 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백은 이 관계를 공언하려고 하고 있었다.
영인이 머뭇거리자 백이 ‘쓰흡’ 하고 소리를 내며 영인을 재촉했다. 끝까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영인의 커다란 손이 결국 백의 손을 잡았다. 백이 기다렸다는 듯이 영인보다 세게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라온 그 손을 꽉 쥐었다.
수림은 눈 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넋을 놓았다. 꿈은 아닌가 싶었다. 회사에서 팽 당한 것도 믿기지 않는데 강영인와 노백이 사귄다니? 영인이 애써 감추려는 수줍어하는 표정을 집요하게 살펴보던 수림의 눈에서 또 눈물이 흘렀다.
“꿈인가?”
“아닐걸.”
백이 얄밉게 대답했다. 수림은 오늘의 술자리 주제를 축하 파티로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망한 회사 생활에 대한 토로와 위로는 다음으로 미루면 그만이었다.
수림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낸 뒤 백과 영인이 대리 기사를 기다렸다. 밤이 되자 날이 추워졌다. 짙은 카키색 퀼팅 재킷을 입은 백이 팔짱을 끼고 발을 동동거렸다. 전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내가 추위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자 영인은 픽, 웃음이 나왔다.
백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영인을 보았다. 희미한 웃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얼굴을 따스한 눈으로 오래도록 살폈다. 영인은 집요한 눈길에, 묻은 것도 없는 뺨을 괜히 커다란 손으로 훑으며 민망함을 이겨내려 했다. 그러면서도 그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오늘 데이트 잘했네.”
백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정말로 오늘 하루를 즐거운 데이트를 한 날로 만들었다. 백의 퇴사도, 영인의 해고도 모두 거짓말처럼 잊혔다. 백이 살짝 손을 뻗어 영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찰나의 손길에 영인의 고개가 스르륵 백의 손 쪽으로 꺾였다.
“미용실 가야겠다.”
이전보다 많이 자란 머리카락 길이를 확인한 백이 작게 중얼거렸다. 함께 미용실을 갔던 날을 둘 다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는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실없이 웃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리 기사가 도착했다.
백이 자연스럽게 뒷문을 열어 영인을 먼저 앉힌 뒤, 자신은 대리기사 옆 보조석에 앉았다. 백과 기사가 나누는 일상적이면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영인이 눈을 감았다. 대화는 날씨부터 요즘 경제와 기사의 자녀 근황으로까지 흘렀다. 영인은 그 하등 궁금하지 않은 정보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나누는 백의 말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다. 편안하고 듣기 좋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영인이 백을 뒤에서 안았다. 안는 힘이 너무 세서 상체가 조여 왔다. 포옹이 아니라 구속처럼 느껴졌다. 백이 가만히 서서 그런 영인의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 확인이 필요하다면 확인을, 사랑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줄 마음이 되어 있었다.
영인이 백의 뒤에 서서 걸음을 옮겼다. 영인이 가는 대로 백도 몸을 맡기고 함께 걸었다. 두 사람의 몸이 꼭 붙어 있어서 마치 하나의 심장으로 피를 주고받는 존재가 된 듯했다.
영인은 자연스럽게 백을 소파까지 밀어붙였다. 소파에 백을 앉힌 뒤 소파의 등받이를 손으로 받치고 백을 내려다보았다. 백도 고개를 들어 그런 영인과 눈을 마주쳤다.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인데 발끝이 저릿했다. 그 저릿함은 서서히 몸을 타고 올라왔다.
백이 팔을 벌리고 영인을 불렀다.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흥분의 열을 폭발하게 하고 또 가라앉혀 줄 유일한 사람은 영인이었다. 영인만이 할 수 있었다.
“이리 와 봐.”
영인이 순순히 백의 품 안으로 몸을 낮춰 파고들었다. 거대한 몸이 제 품에서 느껴지자 백은 알맞은 짝을 만난 자물쇠가 된 느낌이 들었다. 영인만이 백의 몸과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그저 안고 있을 뿐인데 영인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 숨이 닿는 피부가 덩달아 더워졌다.
백이 먼저 살짝 입을 벌리고 영인을 유혹했다. 영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 벌어진 입 안으로 자신의 혀를 넣으며 백의 입술을 탐했다. 그저 키스일 뿐인데 몸이 들썩였다. 영인이 백을 점점 찍어 눌러서 백은 몸이 아팠지만, 영인을 밀어내지 않았다. 영인이 주는 아픔이 곧 쾌락으로 변하리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혀와 혀가 닿자 놀랍도록 달콤하고 시원했다. 둘의 혀가 얽히고 꼬여 끝없는 욕망과 열락을 나누었다. 아직 입고 있는 바지가 흥분으로 커진 중심을 압박해 왔다. 답답함을 해소해야 했다.
백이 버클을 풀기 위해 손을 아래로 내리자 키스에만 온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던 영인이 어떻게 알았는지 백의 손을 잡아챘다. 그러고는 욕정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으로 백을 응시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백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제정신인 사람은 없었다.
백의 손을 대신해 영인의 상체가 백의 중심을 향해 갔다. 고개를 숙인 영인이 바지 위로 자신의 뺨을 비벼대자 안달 난 백의 발끝이 곱아들었다. 그런 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인은 느긋했다. 바지 위로 한참을 얼굴을 문지르더니 이번에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백의 향을 음미하기 위함이었다.
섬유 유연제 냄새와 향수 냄새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 낮게 깔려 있는 수컷 냄새까지 모조리 깊게 삼켰다. 몸 안쪽이 온통 백으로 가득 차는 충만감이 느껴졌다. 이토록 지독하게 타인을 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영인은 두려울 지경이었다. 환상을 보듯 백을 올려다보았다.
“하아.”
백의 입에서는 애달픈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빨리.”
짧게 애원한 백이 영인의 뒤통수를 잡아 자신의 중심에 뭉개고는 하체를 움직였다. 뜨겁고 단단한 백의 것이 선연하게 느껴지자 영인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았다. 영인도 더는 참지 못하고 백의 버클로 손을 가져갔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울 심산이었다. 그 순간, 인터폰이 울렸다.
그 소리에 백이 반사적으로 인터폰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짜증이 난 듯 보였지만, 작고 네모난 액정에 있는 얼굴을 보고는 금세 표정이 풀렸다. 반대로 영인의 얼굴은 점점 더 사납게 변했다. 백이 신호음이 끊기기 전에 서둘러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공동 현관문이 열린 것이니 이제 방문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넌 빨리 침실로 들어가 있어.”
백이 영인을 재촉해 침실로 이끌었다. 침실 문을 닫고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보아도 앞섶이 비정상적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이런 꼴로 주성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급하게 주방으로 달려가 걸려 있는 앞치마를 둘러멨다. 아까보다는 덜 티가 났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어정쩡하게 앞치마 자락을 잡아 좀 더 앞부분을 평평하게 만들고는 백이 현관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점점 올라가 드디어 16층. 문이 열리고 침통한 표정의 주성이 내렸다.
“주성아, 너 교육은 어쩌고? 연수원 나오면 안 되잖아.”
백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주성이 자신의 눈가를 문질렀다.
“너 울어?”
황당함을 채 지우지 못하고 백이 물었다. 송별회에서도 물론 눈물 바람이 일기는 했었다. 팀장을 필두로 한 몇 명의 팀원들이 술이 머리끝까지 올라 울며 백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들을 달래 주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떠올랐다. 위로의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누군데 끝까지 주책 맞은 아저씨들이었다. 그런데 주성까지 울다니. 게다가 주성에게서는 술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백은 당황스러웠다.
“책임님 없으면 회사 어떻게 해요?”
주성이 울먹이며 한 말에 백이 귀엽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어른스러운 말투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까 영인과 당장이라도 붙어먹을 기세였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점잖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나 하나 빠져도 회사는 잘 돌아갈 거야. 처음에만 좀 어지럽지 금방 메워져. 울긴 왜 울어. 누가 그만두면 또 새로 누가 들어오고 그런 게 회사인데.”
백이 주성을 집 안으로 들이려는데 닫아 두었던 침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어느새 웃통까지 벗은 영인이 나왔다. 주성이 먼저 영인을 발견하고 경악하자 백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태까지 청산유수로 말을 잘하던 백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저 사람이 왜 여기서 나와요?”
주성의 물음에 백도 더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했다. 태연한 이는 오로지 영인 한 명뿐이었다. 저벅저벅, 백에게까지 망설임 없이 걸어온 영인이 마치 영역을 표시하듯 백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주성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너 왜 이래?”
영인은 백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이토록 자신이 백과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과시하듯 서 있었다. 영인과 주성 사이에 백만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서렸다.
“책임님, 저 사람이랑 사귀는 거예요?”
주성의 목소리가 떨렸다. 백이 혼자 주성에게 어떻게든 이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을 원망하듯 보면서도 그 팔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것이 결국 대답이었다. 백이 어색하게 웃은 뒤 입을 열었다. 진땀이 났다.
“뭐 네가 소문낸다면 내가 막을 순 없지만, 그래도 비밀 지켜 주지 않을래?”
대답한 것은 주성이 아니라 영인이었다.
“박주성 씨 소문 못 내. 자기도 게이인데 뭐.”
그 말을 들은 주성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뭐라고요?”
“동성애자 맞잖아요. 노백 좋아하는 거 나는 처음부터 알았는데.”
영인의 말에 이번에는 백도 놀랐다. 몹시 당황하여 생각보다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뭔 소리야?”
주성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아까보다 더 울상이 된 상태였다. 자신의 입술을 몇 번이고 이로 물고 씹던 주성에게서 한참 만에야 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책임님 남자랑도 되는 거였어요? 나는 그럼 괜히 숨기려고 애썼네.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나는 이름도 주승이라고 바꾸려고 했는데.”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주성이 손바닥으로 세차게 밀어 닦았다. 백은 갑자기 쏟아진 이야기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어깨 위에 있는 영인의 팔을 치우려는데 영인이 단단히 힘을 주고 버텼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어디 하나 쉬운 녀석이 없었다. 백이 흠흠, 목을 가다듬고 천천히 하지만 진지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 좋아하는 게 아니고 영인이를 좋아하는 거야.”
내뱉고 나니 너무 단호하게 상처를 주는 문장이어서 백의 얼굴이 금세 곤란한 표정으로 변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무슨 말을 덧붙여도 위로가 되지 않을 테지만, 아무튼 백은 노력했다. 주성이 영양가 없는 백의 말을 끊었다.
“책임님, 좋아해요. 책임님처럼 멋있는 사람 본 적이 없어요. 비밀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절대로 남들한테 말 안 해요.”
너무 늦은 고백이었다. 주성은 오늘 하루, 가장 존경하는 상사와 연심을 품었던 상대 둘을 잃은 셈이었다. 백과 영인을 차마 보지도 못하고 주성이 뒤돌아서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자꾸만 떨어지는 눈물을 거칠게 닦으며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누르고 서 있는데 뒤에서 백의 기척이 느껴졌다.
주성이 나가자마자 백은 황급하게 그 뒤를 따라 나온 참이었다. 마침 열린 승강기 안으로 주성이 들어갔다. 서서히 문이 닫히는데 백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문을 다시 열었다. 벌어지는 틈으로 주성의 놀란 눈이 보였다.
“주승아, 나는 나이를 이만큼 먹어서 멋있어 보이는 거야. 너도 내 나이가 되면 나보다 더 멋있어질 거야.”
20대인 주성과 30대인 백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따라잡지 못할 시간이었다.
“아니요. 책임님 같은 사람은 책임님밖에 없어요. 나이를 먹는다고 다 그렇게 되지 않아요.”
주성은 백의 말에 어떤 위안도 얻지 못했다. 백은 그런 주성의 모습마저 애 같아 보였다.
“주승아, 있지.”
의미심장한 표정의 백을 보고 주성이 다음 말을 자신도 모르게 기대했다.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 좋더라. 일 열심히 하고, 잘해라. 알았지?”
백의 이어지는 말에 주성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산통을 깨는 이야기에 눈물마저 쏙 들어갔다. 완벽하게 차였지만, 그래도 주성은 고백이라도 했음에 후련함을 느꼈다.
영인은 잔뜩 굳은 얼굴로 현관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백이 들어오자 그제야 조금 표정이 풀렸다. 그러나 백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이었다. 영인의 돌발행동에 놀랐고, 주성의 갑작스러운 고백에는 까무러칠 뻔했다.
“언제부터 알았어? 게이들끼리는 막 그런 게 다 보여?”
백이 묻자 영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동성애자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체육관, 헬스장, 카페, 식당. 어디에나 다 있어요. 그리고 분명 책임님을 좋아하는 남자도 어느 모임에 가나 한 명은 있었을 겁니다.”
영인의 말을 들은 백이 어쩐지 소름이 돋아 자신의 팔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전혀 인식하지 않고 살았던 다른 차원의 세계를 알아버린 것 같았다. 모르고 살았으면 편했을 세계를.
“제발 앞으로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요.”
영인이 물가에 내놓은 애를 보는 표정으로 백을 보았다. 그러고는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자신의 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고, 남의 몸을 만지던 백.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 애간장을 태우던 백. 이제 그런 백은 없어야 했다. 다른 남자가 백을 욕망한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고, 온몸이 분노로 뻐근해졌다.
“그런데, 잠깐만.”
백의 눈빛이 미심쩍게 변했다. 영인이 이유를 묻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설마 강영인도 나를 처음부터 노린 건가?”
백이 질문을 마치자마자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었다. 거의 자문자답 수준이었다. 백의 뜻을 알아챈 영인이 황당한 표정으로 웃었지만, 백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길 닦아서 강영인을 꼬신 게 아니고… 처음부터… 네가? 나를?”
백이 과장된 얼굴로 장난스럽게 말하자 영인의 입에서 기어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늦은 밤, 둘만의 집을 영인의 웃음소리가 메웠다.
“이 내숭쟁이.”
백이 그런 영인의 유두를 살짝 꼬집어 비틀며 말했다.
“내숭쟁이요?”
“그런 게 있어, 이 내숭쟁이야.”
말을 마친 백이 먼저 잘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영인은 백의 자취를 쫓다가 너무나 익숙해진 백의 집을 둘러보았다. 백의 집이, 백의 공간이 어느새 자신의 집보다 더 편해져 있었다. 알아채기도 전에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늦은 새벽, 잠에서 깬 영인이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나왔다. 희미한 달빛이 거실로 내려앉았는지, 집 안은 완전한 암흑이 아니었다. 깜깜했지만, 충분히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있는 안전한 어둠이었다. 찬물을 들이켜고 영인이 발걸음 소리를 죽여 다시 백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의 자리였다.
백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운 영인은 깊은 잠에 빠진 연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백은 잠결에도 커다란 몸이 팔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는 그 몸을 안고 토닥였다. 영인이 마신 숨에 백의 향이 가득했다. 백의 품속에서 백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영인은 비로소 안심했다. 이것은 실로 생에 처음으로 가지는 안정감이었다.
영인은 노백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백은 영민하지만 영악하지 않으며, 순수하지만 순진하지 않고, 무뚝뚝함을 가장하지만, 잔정이 많다. 사람들은 백이 맺고 끊음을 잘하고 냉정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영인은 백이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끊어 내는 데 미숙한 사람임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백은 영인을 버리지 않는다. 백은 영인을 버리지 못한다. 영인이 먼저 손을 놓지 않는 이상 백이 영인을 밀어낼 일은 없을 것이다. 영인은 그 기묘하리만큼 강력한 확신 속에서 안정했다.
더는 틈이 없는데도 강하게 백을 끌어안았다. 갑자기 느껴지는 압박감에 백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잠결에도 답답하고 아픈 것을 느꼈다. 그러나 백은 여전히 영인을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세게 안아 주었다. 그 서툴고 거센 감정마저 예외 없이 사랑하듯이.
외전
“아.”
영인은 눈을 뜨자마자 반사적으로 옆자리를 확인했다. 역시 백은 없었다. 백이 5개월간의 학원 강사 일을 정리하고 개원한 지도 어느새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입소문은 무서웠다. 개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맘카페에 백의 학원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고, 덕분에 무사히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학원 원장이 호감형이고 잘생겼다는 둥 학벌이 어떻고 전 직장이 어디였다는 둥 하는 이런 사사로운 개인 정보까지 모두 공공연히 돌고 있었는데 백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원생이 늘면 잘된 일이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영인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백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학원 규모를 키운 탓에 요새 영인의 연인은 정신없이 바빴다. 그래서 일주일에 단 하루, 일요일만 둘이 오롯이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고대하던 일요일이었다.
고작 하루 쉬는 휴일에도 백은 늦잠이라고는 잘 줄 몰랐다. 영인이 이미 주인이 떠나 온기마저 사라진 백의 자리를 여러 번 손바닥으로 쓸고 백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백과 동거를 시작한 뒤로는 불면의 고통이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잠들고 오래 잘 수 있었다.
침실 밖으로 나오자 마주한 광경은 눈 부시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과 그 아래에서 웃통을 벗은 채 팔굽혀 펴기를 하는 백이었다. 일요일만큼은 오로지 영인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백도 평소 가던 운동을 가지 않았다. 영인을 위해 둔 예외였다.
영인은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 비스듬히 선 뒤 그 모습을 감상했다. 백은 영인이 나온지도 모르고 숫자를 세며 일정한 박자로 팔을 굽혔다 펴는 동작을 반복했다. 움직일 때마다 백의 등 근육이 섬세하게 꿈틀거렸는데, 실내 암벽등반 클래스에 다닌 이후로 더 발달한 탓에 그 모양이 전보다 더 아름답고 야릇했다.
정해진 횟수를 채운 백이 무릎을 꿇고 앉은 뒤에야 영인을 발견했다. 영인은 꽤 오랜 시간 팔짱을 끼고서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잘 잤어?”
백의 다정한 인사 소리에 그제야 영인이 크게 숨을 내쉬고 침을 삼켰다. 음흉한 관찰의 시간이 끝났다.
“네.”
“잠시만.”
백이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두 팔을 땅에 붙이고 엉덩이를 높게 올려 등과 어깨 근육을 충분히 풀어 준 뒤, 상체를 세워 왼팔과 오른팔을 번갈아 가며 쭉쭉 뻗어 팔굽혀 펴기를 하는 동안 수축했던 근육을 늘렸다. 마지막으로 목을 뒤로 한껏 꺾어 턱 앞쪽과 목 근육을 스트레칭 한 뒤 개운한 표정으로 영인을 보았다. 햇볕 아래에 있는 백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영인이 성큼성큼 백의 앞까지 걸어와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백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나 땀났는데.”
백이 살짝 몸을 뒤로 물렀지만, 영인이 더욱더 거세게 백을 붙잡는 바람에 거리를 두는 데는 실패했다.
“땀도 달아요.”
영인이 백의 각이 진 턱 밑부터 목울대를 지나 쇄골까지 천천히 입술로 훑으며 작게 속삭였다. 간지러움과 함께 피어오르는 야릇한 감각에 백의 몸이 살짝 떨렸다. 춥춥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입맞춤일 뿐인데 놀랍게도 뱃속 안에 존재하는 욕망에 조금씩 불을 붙였다. 크지도 않은 그 젖은 소리가 내부를 온통 뒤흔들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우리 어제도 했잖아. 나도 회복할 시간은 줘야지.”
백이 정수리로 가볍게 영인의 얼굴을 밀었다. 익숙해질 만도 했는데 아직도 영인의 성기를 보면 억 소리가 났다. 때때로 정말 저 거대한 것이 제 배 속에 다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소름이 돋았다. 어제도 그랬다. 아무리 윤활제를 퍼부어도 부담스러운 행위였다.
영인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아 주겠다고 마음먹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영인은 정말이지 만족을 모르는 색마였다. 영인의 요구대로 다 해 준다면 백의 일상생활은 박살 날 것이 분명했다.
지난밤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구멍이 조여들었다. 단지 그 짧은 긴장만으로도 백은 영인을 느꼈다. 백의 저지에도 영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백의 약한 구석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넓은 어깨를 한껏 구기고 백에게 안겼다.
백이 그런 영인의 등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그러면서 오늘만큼은 절대로 이 유혹에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했다. 받아 주고 싶어도 어제 진력이 나게 빨리고 박힌 아래쪽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영인은 백의 속도 모르고 안겨 있는 척하며 거침없이 손을 놀려 백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틈을 가르고 파고들 것 같은 손놀림에 백이 영인의 손목을 힘주어 잡았다.
“진짜 안 돼.”
제법 진지한 얼굴로 하는 거절에 영인이 순간 상처 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 서운함을 흔적도 없이 능숙하게 감추었다. 그렇지만 백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진실이었다.
“어휴, 너도 참.”
백이 편하게 자세를 바꿔 앉고는 영인을 자신의 옆에 앉혔다. 영인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서는 차마 여태 밝히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마주 보고서 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네 것 너무 커. 매일 하기는 좀 무섭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영인이 고개를 틀어 백을 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백의 단정한 정수리뿐이었다. 영인에게서 이렇다 할 반응이 오지 않자 다시 백이 입을 열었다.
“오죽하면 요즘 매일 자기 전에, 씻기 전에 케겔 운동까지 한다고. 나 좀 봐주라. 어?”
치부를 모두 드러낸 백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웬만하면 밝히고 싶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영인과의 관계로 몸이 변해 가는 것이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었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생각한 것이 결국 이 은밀한 운동이었다.
단전에 힘을 주고 그곳을 풀었다 조였다 반복하다 보면 전에는 몰랐던 묘한 쾌감이 들었다. 여린 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영인의 단단한 손가락이 하나, 둘, 셋 그리고 이내 두툼한 대가리를 들이미는 보드랍고 뜨거운 좆. 그런 것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정말이지 난감한 운동이었다. 뜨끈하게 올라오는 열을 무시하고 백이 눈을 감았다.
백의 진실을 들은 영인은 충격받은 듯했다. 시선이 어지러웠다. 백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고백은 영인의 머릿속을 폭발시켰다. 삽입에 대비하기 위해 멋대로 움찔거리며 단련하는 백의 구멍이라니.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욕정이 치솟았다. 영인의 침묵을 백은 상황에 대한 이해로 받아들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미소 지으며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탐욕적으로 보일 만큼 흥분한 영인의 얼굴이었다.
“응?”
당황한 백의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을 영인이 삼켜 버렸다. 의도가 명백한 끈적한 키스였다. 백이 영인에게 턱이 잡힌 채로 정신없이 밀고 들어오는 혀를 받아 내느라 애를 먹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키스로도 영인은 마음에 인 불길을 끄지 못했다.
“보고 싶어요.”
“뭐가?”
“나 모르게 혼자만 하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형이 운동하는 모습 보는 게 제일 좋은데.”
영인이 백의 손끝에 입 맞추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백은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섰다.
“보기만 할게요.”
본격적으로 백의 손을 빨아대기 시작했다. 갈라진 손가락 틈으로 영인의 뜨거운 혀가 들락날락거렸다. 백이 신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거짓말.”
“진짜로요.”
백의 검지와 중지가 영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손가락에 뭉클하고 축축한 혀가 닿아올 때마다 저절로 인상을 쓰게 됐다. 그대로 살점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보고 싶어요.”
한 번 더 반복되는 애원에 백은 위기를 느꼈다. 이대로면 또 거절하지 못하게 된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격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위기는 새로운 기회를 모색할 환경이 되어 주기도 했다. 백에게도 영인만큼이나 꼭 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도 너한테 박고 싶어.”
승리감이 어린 미소를 띤 채 백이 말했다. 타인의 신체가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배덕한 감정을 가지고 오는지, 동시에 얼마나 참을 수 없이 원하게 되는지 영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그 감각을 알려 주고 싶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느껴지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은 공허함까지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도 영인의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남자라면 느낄 당연한 욕구였다.
백이 영인의 허리에 손을 둘러 당기자 서로의 상체가 빈틈없이 붙었다. 영인은 생각에 잠겼다. 백이 원한다면야 깔리는 것쯤은 문제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은 안타깝게도 여유가 없었다. 백이 자신한테 이럴 수는 없었다. 가혹한 행위였다.
“오늘은….”
“가위바위보 해서 정할까?”
백이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영인은 여태까지 백과 수많은 내기와 게임을 했지만, 이토록 이기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꼭 이길 수 있는 종목을 골라야 했다.
“아니면 턱걸이? 플랭크 오래 버티기?”
집에서 할 수 있는 게임들을 백이 줄줄 말했다. 영인은 그 순간 수림이 집들이 선물로 사 왔던 화투가 떠올랐다.
“맞고 칠 줄 알아요?”
영인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종목에 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맞고?”
무엇으로 승부 볼지를 영인이 먼저 제안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백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대충은 알아. 그림 맞추는 거잖아.”
사실 백은 포커나 블랙잭은 즐겨 해도 맞고를 친 적은 거의 없었다. 대학교 다닐 때 어깨너머로 남들이 치는 걸 구경하며 대충 룰 정도만 아는 수준이었다.
“그거 알면 다 아는 거죠.”
영인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고는 백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화투를 가지러 갔다. 이겨야만 했다. 흥분 때문에 열이 올라서인지 자꾸만 입이 말랐다.
백은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넓적한 운동 매트를 꺼내 깔았다. 내기나 게임을 워낙 좋아하는 성향이라서 영인이 먼저 무엇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 퍽 기분 좋았다. 영인의 검은 속내도 모르고.
게임이 시작되자 영인은 자연스럽게 상체를 양옆으로 흔들면서 백의 패를 훔쳐보고 있었다. 백은 그 패 도둑질을 꿈에도 모르고 밑에 깔린 패들과 자신이 쥐고 있는 패 사이에서 최고의 선택을 고심했다. 무방비하게 쥔 화투 앞면이 영인이 목을 빼고 흘낏거릴 때마다 조금씩 보였다. 이미 그 비열한 수로 백의 청단과 고도리가 깨졌기에 백이 점수 따기는 더욱 요원해졌다.
“아, 뭐가 이래?”
백이 영인과 자신의 상황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영인은 피 하나만 더 먹어도 나는 상황이었다. 고스톱 같은 것과 거리가 먼 줄 알았는데 그것은 백의 오판이었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영인은 아기 때부터 할머니 등에 업혀 동네 아낙네들이 오락 삼아 하는 화투판에 자주 갔었다. 지금 영인이 백에게 쓰는 수법은 그 시절, 여자치고 키가 컸던 영인의 할머니가 쓰곤 했던 비기였다. 무엇이든 배워 두면 쓰임이 있는 법이었다. 하늘도 영인의 편이었다. 마지막에 쌍피가 붙어 영인의 점수가 8점이 되었다. 났다.
“고 할 거지?”
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괜스레 눈을 찡긋거렸지만, 영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스톱’이었다. 중요한 것은 승패였지, 얼마나 크게 이기냐는 애초에 관심사가 아니었다. 백이 손에 들고 있던 화투패들을 내려놓으며 좌절했다.
“이럴 수가. 강영인한테 지다니.”
영인이 자리를 정리하며 자꾸 비죽 새어 나오는 미소를 애써 참았다.
“백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이 영인의 얼굴을 보았다. 다가올 수치를 예감했는지 벌써 볼이 좀 붉어져 있었다. 영인이 참지 못하고 그 잘난 얼굴을 쓰다듬었다.
“어디 가서 절대로 도박 같은 건 하지 마요. 진짜 패가망신한다.”
“형이라고 불러!”
백이 벌떡 일어섰다. 뒷정리를 대충 마친 영인이 떠나려는 백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요?”
아직 볼일이 남아 있었다. 포상의 시간인데 떠나려는 백을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씻고 올게.”
백이 영인의 손을 꽉 잡아 쥐며 말했다. 손이 아픈데도 영인은 자꾸 웃음이 났다. 백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영인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씻어요.”
쓸데없이 감미로운 음성에 백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정말이지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전 준비 됐어요.”
영인이 블라인드를 내려 창을 모두 가리고 식탁 의자를 거실 한복판으로 끌고 왔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자신이 이겼더라면 분명 지금 영인을 깔았을 것이니, 결과에 승복해야 했다. 각오를 다지는 백의 얼굴이 침통해 보였다.
“보기만 해.”
본격적으로 의자 앞에 정좌하고 자세를 잡은 영인이 고개를 황급히 끄덕였다. 아까 함께 샤워할 때 느꼈던 끈적한 손길을 떠올리며 백이 생각했다. 내가 또 알면서도 속아 준다.
백이 의자 등받이를 왼손으로 잡고 같은 쪽 무릎을 의자 위로 올렸다. 시작도 전에 이미 부끄러움은 한계치였다. 혀를 내어 메마른 입술을 핥고는 오른손으로 입고 있던 드로어즈를 내렸다. 애매하게 엉덩이 밑에 속옷이 자리하자 영인이 참지 못하고는 커다란 손으로 그것을 쑥 내려 버렸다. 하얗고 탄력 있는 엉덩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아.”
영인이 내쉬는 숨이 백의 맨살을 간지럽혔다. 땅을 디딘 오른발에 힘을 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수치는 순간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백이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한쪽 엉덩이를 오른손으로 당겼다. 그러자 닫혀 있던 골이 벌어지고 은밀한 구멍이 보였다. 백이 어떤 저지도 하기 전에 영인이 혀를 내밀어 꽉 다물어진 구멍을 맛보았다.
그 부드러우면서 뜨거운 자극에 백의 오른손이 갈 곳을 잃고 떨어졌다. 그 때문에 닫힌 골을 영인이 코끝으로 가르며 계속 애널을 빨아댔다. 결국, 땅 위에 굳세게 버티고 있던 백의 발이 허물어졌다. 뒤꿈치가 들리고 긴장한 종아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흣, 보기만 하라고.”
사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보기만 할 리가 없었다. 백도, 영인도 예상한 결말이었다. 영인이 양손으로 백의 엉덩이를 한쪽씩 잡고 엄지에 힘을 줬다. 다시 드러난 구멍은 피가 몰려 붉게 익은 것처럼 보였다. 영인의 침에 젖어 번들거려서 음란해 보이기까지 했다.
영인이 손끝에 더욱 힘을 주었다. 백의 치부가 모조리 눈에 들어왔다. 매일 넘치도록 보고 만지고 느끼는데도 현실감이 없었다. 이런 적나라한 확인만이 영인을 안심시켰다. 백은 영인의 연인이었다. 이런 짓도 함께 할 수 있는. 이 확신만으로도 영인의 성기는 이미 더는 단단해질 수 없을 만큼 단단해져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해 봐요. 보고 있어요.”
백이 의자를 뚫을 기세로 부여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아래쪽을 이완시켰다. 얼굴과 귀 뒤쪽이 뜨거웠다. 이 수모를 반드시 갚아 주겠다고 생각하며 숫자를 세며 힘을 풀었다. 하나, 둘, 셋, 넷…….
백이 무엇인가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사실 구멍이 확연히 벌어지지는 않았다. 영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이 진심으로 하는 것인지 하는 시늉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열까지 센 백이 이번에는 숨을 마시며 구멍을 조였다. 조일 때는 확실히 작고 단정한 구멍이 오므라드는 것이 보였다. 백은 영인의 의문을 알아채지 못하고 다시 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영인이 말없이 중지를 입 안에 넣고 충분히 적셨다. 그리고 백이 힘을 뺀 애널로 불시에 밀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놀란 백이 고개를 돌려 영인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강영인!”
“눈으로만 봐선 모르겠어요.”
말을 마친 영인이 더욱더 힘주어 길고 굵은 손가락을 깊숙이 넣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백의 내벽이 그대로 느껴졌다. 백의 등이 잘게 떨렸다. 영인이 주는 자극을 피하려고 움직인 탓에 발끝으로만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풀썩 꺾이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런 모든 면모가 아찔하게 영인을 유혹했다.
백은 모르는 백의 뒷모습. 오로지 영인만이 아는 백의 위태롭고 연약해 보이는 순간순간들. 때로는 그런 것들이 영인의 제어력을 모조리 앗아가곤 했다. 끝까지 백을 몰아붙이고 바닥까지 끌어 내리고 싶게 했다.
그런 연인의 위험한 욕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은 의자의 등받이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갑작스러운 침입을 견디고 있었다. 영인은 은근슬쩍 손가락을 움직이며 백을 애태웠다. 뭉근한 쾌감이 배 속 깊은 곳에서 찌르르 올라오자 백의 등 근육이 섬세하게 꿈틀거렸다. 영인이 백의 육감적인 엉덩이를 가볍게 베어 물었다.
“어떻게 하는 건지 얼른 보여 줘요.”
영인의 안달이 난 듯한 음성에 백이 천천히 아래쪽에 힘을 주었다. 조일수록 영인의 손가락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영인은 은근슬쩍 손가락에 힘을 줘 백이 느끼는 곳을 찾아 꾹꾹 누르고 있었다. 그 의도된 손길에 참을 새도 없이 점점 커지는 자신의 중심을 백이 손으로 꽉 잡아 쥐었다.
손가락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내벽과 수시로 움찔거리며 조여드는 구멍 입구에 영인도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런 짓거리를 혼자 하고 있었다니.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억울했다.
결국, 참지 못한 영인이 손가락을 급하게 뽑아 내고는 의자 등받이에 기댄 백의 상체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뜨거운 입술을 목덜미에 묻고 속삭였다. 입술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낮은 음성이 예민한 피부를 뚫고 백에게 들어왔다.
“침대로 갈까요?”
말을 마친 영인이 백의 대답을 기다리며 쉴 새 없이 백을 빨고 핥았다. 귓바퀴를 물었다 놓으며 건드리면 자지러지는 부분을 차례차례 공략했다. 백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런 영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허락을 뜻하는 침묵을 얻어 낸 영인이 그대로 백의 몸을 번쩍 돌려 안아 들었다. 백은 이럴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누군가에게 안길 일이 있을 줄 모르고 살았던 삶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금방 처지를 인정하고 단단하고 넓은 영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영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터질 듯이 발기한 백의 중심이 영인의 몸과 자꾸 부딪쳤다. 영인은 그 접촉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더욱 서둘렀다.
백을 침대에 던지듯이 내려놓고 영인은 급하게 침대 옆에 놓인 협탁에서 젤을 꺼내 들었다. 성급하게 손바닥에 쭉 짜는 바람에 끈적한 내용물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이 들었다. 뜨거운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대충 훑은 뒤 영인이 백의 뒤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백의 등을 손바닥으로 꽉 눌러 아래로 향하게 했다.
“으윽.”
치미는 수치와 흥분을 누르며 백이 작게 신음했다. 몸이 달았다. 높게 떠오른 엉덩이를 영인이 무자비하게 주물러 댔다. 깨끗한 살결에 붉게 자국이 남았다. 백의 하체 근육이 긴장했다. 아까까지 열심히 조였다 풀며 영인을 유혹하던 애널도 다음을 기대하는 듯 움찔거렸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그 기관에 영인이 젤로 질척이는 손가락을 한 번에 두 개 삽입했다. 미끈한 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백의 안으로 사라졌다. 바깥보다 뜨겁고 질척이는 내부가 끈질기게 영인의 움직임을 따라붙으며 방해했다.
“아앗! 흐윽….”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영인이 백의 회음부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달고 물이 많은 과일을 먹을 때처럼 요란한 소리가 나도록 핥았다. 애널 외부로 영인의 손가락에 묻어 있던 젤이 밀려 나왔다. 영인은 그 모든 것을 혀로 힘주어 핥고 도톰하게 살이 오른 회음부를 이로 긁어댔다.
그 열락과 날 것의 자극에 백이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군살 없이 탐스러운 근육이 들어찬 복근이 움직임에 맞춰 꿈틀거렸고 영인은 홀린 듯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구멍의 촘촘한 주름이 움찔거리며 영인의 손가락 마디를 물어댔다. 한계였다.
영인이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긴장해 도드라졌다. 손가락을 빼내고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성기 끝을 백의 구멍에 대고 허리를 가볍게 움직였다. 익숙한 감각과 체온에 백이 목을 뒤로 꺾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흥분으로 빠끔거리는 백의 구멍에 영인이 다시 주욱 젤을 짰다. 아낌이 없었다. 질척하고 차가운 젤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애널이 오므라들었다. 영인은 백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천천히 하체를 움직였다.
넣을 듯 넣을 듯 넣지 않고 계속 애타는 마찰이 반복되었다. 귀두가 회음부와 구멍 근처, 엉덩이를 멋대로 찌르고 문질러댔다. 맞닿은 부분은 모조리 더럽고 축축한 욕망으로 엉망이 되었다. 백이 헤매는 영인에게 길을 알려 주듯 상체를 더 바닥에 바짝 붙이고 다리를 벌렸다.
그러자 드러난 틈으로 영인이 드디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대로 내리꽂듯 누르자 귀두가 빨려 들어가듯 천천히 진입했다. 손가락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빠듯했다.
“흐읏… 으음….”
백이 배 속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을 다스리며 낮게 신음했다. 이상하게 영인의 것이 점점 팽창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평소보다 짧게 푼 탓에 더욱 부담스러웠다.
영인도 손가락을 구부려 손끝으로 등을 간지럽히며 백의 긴장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영인의 손이 닿았던 곳들은 모두 땀과 애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어 가자 영인이 다시 진입을 시작했다. 강하게 느껴지는 압력에 영인도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절반 정도 남은 것을 단번에 찔러 넣었다.
백이 미처 어떤 반응이나 적응을 위한 노력을 하기도 전에 영인이 거칠게 허리를 움직여 댔다. 막을 새도 없이 일방적으로 몰려오는 고통과 쾌감에 백이 참지 못하고 매트리스를 주먹으로 쾅쾅 쳐댔다.
마른침을 삼키며 영인은 그 무력한 몸짓을 눈으로 핥았다. 백의 핏줄이 선연하게 솟은 팔뚝은 충분히 영인을 밀어낼 수 있으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꽉 쥔 주먹으로 칠 수도 있으면서 그러지 않았다. 백이 선택한 무력함은 언제나 매혹적이었다.
영인의 하반신과 백의 엉덩이가 맞닿을 때마다 쩍쩍 소리가 났다. 백의 좁은 구멍이 영인을 받아들이느라 애써 넣어 둔 윤활제를 질금질금 뱉어 냈다. 영인이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모조리 훑자, 백의 구멍이 새로운 자극에 다시 눈에 보이게 움찔거렸다.
젖은 손이 찾아간 곳은 백의 중심이었다. 백은 그곳마저 잘생겼다. 휜 곳 없이 꼿꼿하며 색도 예뻤다. 쿠퍼액이 나왔는지 귀두 끝이 젖어 있었다. 영인의 큼직한 손이 그것을 꽉 붙잡고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하앗! 으핫… 응!”
앞뒤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쾌락에 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영인은 그런 백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며 집요하게 백의 안을 탐했다. 이제는 잔뜩 벌어진 구멍으로 점점 더 깊게 자신의 것을 쑤셔 넣고 허리를 돌렸다. 백의 전립선을 찾아 위에서 아래로 쳐올리기도 하고, 일부러 예상하지 못하도록 이곳저곳을 찔러 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백의 근육들이 아우성치고 몸부림하였다.
“하, 씨발. 하, 씨!”
한참을 견디던 백이 결국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사정했다. 어제도 영인에게 지독하게 시달린 탓에 평소보다 묽은 정액이 쭉 하고 뻗어 나갔다. 사정 후 늘어지는 백의 몸을 팔로 단단히 지탱하며 영인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백도 간신히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다시 퍼부어질 것들을 버티기 위해 준비했다.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백의 몸은 영인을 감당하기 힘들어했다. 내벽이 경련했지만, 영인은 익숙하게 백의 전립선을 찾아 천천히 꾹꾹 눌렀다가 속도를 더했다.
“크흑, 큽…! 아앗!”
자꾸만 꺾이는 허리에 힘을 주며 백이 신음했다. 영인은 그런 백을 두 팔로 가두듯 안았다. 퍽퍽 소리가 나게 강한 삽입이 시작됐다.
“얼굴… 흑! 보고 싶어.”
백이 고개를 꺾어 영인을 보기 위해 애썼다. 영인이 그런 백의 목을 받쳐 주며 백의 입술을 핥고 물었다. 영인은 눈을 감고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모든 것을 자신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그리고 백은 그런 영인의 모습을 감상했다. 그 어떤 애무나 섹스보다 영인의 이 쾌락 때문에 괴로워하는 듯한 표정이 만족스러웠다.
영인의 성기 모양대로 내장에 긴 길이 생길 것만 같았다. 영인이 주는 무자비한 쾌락을 허벅지에 힘을 주고 굳세게 버텼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움직임이 어느 순간 멈췄다. 영인이 백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참으며 사정했다. 한참 사정의 여운을 즐긴 영인이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울컥울컥, 허연 정액이 백의 구멍 밖으로 미어져 나왔다. 그 음란한 감각에 백이 반사적으로 구멍을 조였다.
“하아… 다시 커지겠어요.”
“그만해라. 넌 왜 갈수록 더 하는 거 같지, 영인아.”
백이 완전히 매트리스 위에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귀여운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생각할수록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 * *
“강 과장님, 오늘 진짜 안 돼요?”
퇴근 준비를 하는 영인을 보며 아쉬운 듯 함께 일하는 이유미가 재차 물어왔다. 영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약이 있어서요.”
다시 돌아온 거절에 유미의 얼굴에도 아쉬운 기색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강 과장님을 찾아?”
유미의 옆자리에서 업무 메일에 회신하며 김재우가 묻자 유미가 영인을 보며 대답했다.
“아니, 누가 강 과장님 소개해 달라고 하더라고. 내가 오늘 그 얘기를 좀 해 볼까 했지. 오늘 안 되면 언제 돼요?”
예상하지 못한 유미의 발언에 영인이 가볍게 인상을 썼다. 재우가 쯧쯧 혀를 찼다.
“강 과장님 퇴근하면 바로 집에 가는 거 보고도 모르나? 여자친구 있는 거지. 그 소개팅은 나나 해 줘.”
재우가 유미를 보며 씩 웃자 유미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진짜 여자친구 있어요?’ 하며 영인을 향해 물었다. 그 질문을 듣자마자 백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자친구는 아니지만, 애인은 있었다. 이 해프닝을 이야기해 주면 백은 박장대소하며 영인을 기특하게 보겠지.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영인의 기분도 좋아졌다.
“애인 있죠.”
대답하는 영인에게 머문 따스한 미소를 본 사람들이 모두 내심 놀랐다. 영인에게 너무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아질 만큼 진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유미 대리님, 텄다 텄어. 나나 해 줘요.”
재우의 설레발을 들으며 유미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영인이 남은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퇴근 후 백의 학원으로 가서 함께 퇴근하기로 한 날이었다. 내일이면 백은 일주일간 영국으로 출국해야 했다. 학원 고등학생 원생 넷과 그들의 보호자를 데리고 로봇 경진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출장이었다.
요즘 대학 입시는 수능 성적이 다가 아니었다. 학생부 종합평가라는 전형이 중요해졌는데 사실상 학부모의 정보력이 영향을 많이 미치는 부분이었다. 백의 학원에 다니는 원생들도 학종에 한 줄 더 써야 한다는 엄마들의 성화 때문에 팔자에 없는 영국행을 백과 함께 하게 된 것이었다.
백에게 향하는 걸음을 영인이 서둘렀다. 오늘이 지나면 처음으로 긴 이별이었다. 일 분, 일 초가 아쉬웠다. 백은 이옥자 여사가 성윤을 위해 남겨 준 마지막 유산을 모조리 학원에 투자했다. 백의 어머니 오정희는 백의 그런 소비를 응원하며 돈을 보탰고, 아버지 노민욱은 마뜩잖아했지만, 차마 말리지는 못했다.
백은 서울 사교육의 상징적인 거리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 상가의 세 개 층을 운 좋게 임대해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맞춤별 코딩 수업을 진행했다. 원생들이 늘어 고용한 강사들도 여럿이었다.
영인에게 내색하지 않겠지만, 사업을 꾸려 감에 있어 아마 어렵고 힘든 점이 많을 것이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학원 내부에 들어오자마자 영인은 그래서 큰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아팠다.
강사 사무실로 들어가자 수업이 없는 강사 몇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수림과 백은 커다란 화이트보드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림에게 무슨 말을 하고 웃던 백이 금방 고개를 돌려 영인을 발견했다.
“왔어?”
등을 보이고 서 있던 수림도 돌아보며 반가움을 숨기지 않고 웃었다. 정작 수림과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강영인, 때깔 좋은데?”
수림과 영인이 인사하는 것을 지켜보던 백이 턱짓으로 원장실을 가리켰다. 셋이 자연스럽게 백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애인 출장이나 가야지 이렇게 얼굴 보여 주는 거야? 섭섭하다.”
문이 꽉 닫힌 것을 확인하고 수림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영인이 멋쩍음을 숨기지 않고 턱 근처를 긁적이며 웃었다. 백 이외의 사람들이 안중에도 없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영인이 아까 웃던 백을 떠올리며 물었다. 수림의 입가가 씰룩였다. 백은 그런 수림을 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김태준 차장 말이야. 내가 열심히 입 털고 다니면서 평판을 아주 완전히 조져 놨잖아. 프리로 투입이 안 돼서 요즘 다른 일 알아보느라 바쁘다더라고.”
말을 마친 수림이 통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만 주둥이 있냐고.”
소문으로 남을 해친 자다운 최후였다. 그러나 백은 그 소식을 듣고도 입맛이 썼다. 사실 태준의 악질적인 메일은 배후가 없었다면 절대로 백이나 수림을 공격할 수 없을 조악한 함정이었다. 그 함정을 빠져나올 수 없는 덫으로 만든 이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그런 방식으로 살길을 찾아가며 잘 살고 있으니 이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영인이 그런 백의 눈치를 살피다 가볍게 백의 뺨을 쓸었다. 그 손길에 백이 웃었기 때문에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던 볼에는 금세 보조개가 생겼다.
수림은 자신을 앞에 두고 백을 만지는 영인을 보고 당황했다. 별것 아닌 스킨십인데 이상하게 눈 둘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고작 뺨을 만진 것인데, 보면 안 될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런 수림의 마음도 모르고 영인은 이제 손을 백의 귀로 옮겨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백이 눈치껏 영인의 손을 잡아 밑으로 내렸다.
“영인이 귀엽지?”
그러고는 영 이해할 수 없는 질문으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네?”
수림이 못마땅한 얼굴로 되묻자 백이 영인을 보며 말했다. 눈빛이 너무 다정했다.
“엄청 귀여워. 보면 볼수록 귀여워.”
백의 칭찬에 영인이 애써 부끄러운 기색을 감췄고, 수림은 그 모든 것을 바로 앞에서 낱낱이 보고 있었다. 수림이 과장된 얼굴로 토하는 시늉을 했다.
“우웩, 뭐야. 어디서 한 쌍의 바퀴벌레 티를 내? 나도 남편 있어.”
말을 마친 수림은 정떨어진다는 표정으로 둘을 보았지만, 이내 피어오르는 미소를 어쩌지 못했다. 강영인이 노백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을 잠시 훔쳐본 것 같았다. 친구의 새로운 사랑과 인생을 확인하니 안심이 되었다. 참으로 기뻤다.
세 사람은 함께 퇴근해 고급 한우 구이 전문 식당으로 향했다. 백이 없는 동안 백의 몫까지 고생할 수림과 집 떠나 여러 사람 챙기고 다녀야 하는 백을 위한 사적인 회식이었다.
“이러니까 꼭 프로젝트 할 때 생각난다.”
서버가 알맞게 구운 고기를 소금에 찍어 입에 넣으며 수림이 말했다. 자기가 말해 놓고는 곧 입맛 떨어지는 이야기라는 듯 인상을 쓰고 와인을 들이켰다.
“완전 다르지. 지금 와인이랑 한우 먹잖아, 우린.”
백이 웃으며 영인의 앞접시에 한우를 놓아 주고는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열심히 고기를 굽는 서버에게 두 손으로 건넸다.
“이제 저희가 구워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아이고, 뭘 이런걸!”
서버는 그렇게 말하고 익숙하게 팁을 받아 챙겼다. 아무래도 영인과 편하게 식사를 하려면 다른 사람이 없는 편이 낫겠다고 백은 생각했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벨 누르세요. 고기 더 드실 거 같으면 제가 좋은 거로 빼다 드릴게요.”
서버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백도 상냥한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방을 떠나자 그제야 완전히 셋만의 시간이 생겼다.
“원장님은 너무 헤퍼.”
백은 수림의 타박에도 별 반응 없이 영인을 챙기느라 바빴다.
“많이 먹어. 모자라면 더 시키고.”
“많이 먹고 있어요.”
“그래, 너 이런 거 원 없이 먹이려고 내가 돈 버는 건데.”
백이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영인의 뺨을 살짝 꼬집어 흔들었다. 맞은편에서 그 꼴을 보던 수림이 혼자 남은 와인을 그대로 목구멍에 쏟아붓고는 탁 소리가 나게 잔을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았다.
“적당히 합시다. 사람 있어요.”
이번 타박에는 백이 반응했다. 아하하 크게 웃고는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너무 귀엽지 않아?”
“그 말 지금 두 번째고, 내 눈에는 전혀 귀엽지 않아요. 그냥 커다래.”
수림이 잔뜩 인상을 쓰고 영인을 보았다. 정말로 귀엽지 않은 존재를 보는 눈이었다.
“얼른 돈 빡세게 벌어서 영인이 일 그만두게 하고 둘이 놀러 다녀야 하는데.”
“부럽다, 부러워. 우리 남편은 같이 빡세게 벌자더니 요즘은 셔터맨을 꿈꾸고 있어. 정신 교육 좀 시켜야겠어.”
수림이 영인과 백의 잔을 채우고 자신의 잔도 다시 채웠다. 두 사람을 보며 영인의 인생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에서 행운을 마주하기 마련인데 영인에게는 백이 그 행운인 것 같았다.
수림과 오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온 백과 영인은 말없이 서로를 보았다. 백은 영인을 두고 가는 것이 걱정이었고 영인도 집 떠나 해외로 나가야 하는 백이 걱정이었다. 고작 일주일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인데도 그랬다.
백은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그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영인아, 밥 꼭 때맞춰 챙겨 먹고 잠도 제때 자고,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통화할 상황이 될지 말지는 네가 고민하지 말고 그냥 전화해. 상황이 안 되면 내가 받아서 이야기해 줄 테니까. 알았지?”
현관 앞에서 영인과 막 키스를 마친 백이 다시 한번 당부했다. 영인은 벌써 수도 없이 들은 염려인데도 처음 듣는 것처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 말을 거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움은 어쩌지 못할지언정, 영인은 백의 말대로 얌전하고 건강한 일상을 보낼 것이었다.
아쉬움을 못 이겨 백이 다시 영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익숙한 향수 냄새와 백의 숨을 영인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헤어져야 했다.
“간다. 도착하면 전화할게.”
백이 영인의 뺨에 자신의 뺨을 여러 번 비비고서야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나갔다. 공항까지 함께 가자는 영인을 한사코 거절한 것은 백이었다. 낯선 곳에 영인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 더 힘들 것 같았다.
영인은 덩그러니 혼자 남은 집에서 닫힌 문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외로움이 무색해질 정도로 백은 영인에게 자주 전화했다. 언제든지 전화하라더니 영인이 전화할 틈이 없을 만큼 잦은 빈도였다. 거기다 시차를 고려해서 자신은 잠을 안 잘지언정, 영인이 잘 시간만 피해서 걸었다.
정말로 신기한 것은 영인의 마음에 어떤 불안이나 그리움이 떠오를 때쯤이면 귀신같이 백에게서 연락이 온다는 것이었다. 영인은 벨 소리가 울릴 때마다 설렘과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다가 깨닫고야 말았다. 백은 정말로 명백한 자신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몸과 마음 모두 백에게 저당 잡혔다.
어떤 통화는 아주 짧게 끊겼고, 어떤 통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길게 이어졌다. 백이 잠을 포기한 대가로 하는 대화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인은 쉽사리 먼저 끊자고 말하지 못했다.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백이 너무 좋아서.
어쨌든 영인은 잘 지내고 있었다. 백의 매뉴얼대로 움직이면서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사실 백이 없는 사이 몰래 일을 벌이고 있었다.
백이 떠나고 며칠 뒤 맞은 토요일, 영인은 용도 없이 방치되어 있던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쌓여 있는 잡동사니와 작은 소가구들을 정리하고 청소까지 마치자 예약해 둔 설치 업자가 올 시간이 얼추 되었다. 그러니까 영인은 지금 홈 짐(Home Gym)을 만들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선물을 가장한 영인의 간사한 꿍꿍이였다. 백이 헬스장에 가는 게 너무 싫었다. 자세와 근육의 움직임을 봐야 한다는 이유로 타이트한 운동복을 챙겨서 갈 때마다 끓어오르는 질투와 불안을 다스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백을 집 안에만 묶어 두고 싶었다.
퇴근 후 늦은 밤, 그런 백을 따라 운동 갈 때마다 짧은 스쿼트 팬츠를 입은 채 스쿼트며 데드 리프트를 하는 백 때문에 눈을 감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비단 자신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 리 없었다. 백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건 너무나 무방비한 유혹이었다.
업자가 도착하자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벽의 앞뒤로 큰 거울을 설치하고 소음을 차단하는 매트도 가장 값이 나가는 것을 선택해서 시공했다. 웬만한 짐에서나 볼 법한 스미스 머신에도 온갖 옵션을 다 넣었다. 모자람이 없어야 성공하는 작전이었다.
다양한 무게의 덤벨, 바벨과 케틀 벨 그리고 백이 치는 최고 중량에 맞춰 원판까지 정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법 고가의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사서 두자 제법 그럴싸한 공간이 완성되었다. 의도야 어쨌든 영인이 처음으로 준비한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 영인은 백이 와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홈 짐 구석구석을 쓸고 닦은 뒤 환기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방을 둘러보는데 마침 백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밥 먹었어?
백의 음성을 듣자마자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2시가 넘어 있었다.
“아직이요.”
-빨리 먹어.
따뜻하고 상냥한 말투로 백이 가볍게 재촉했다. 영인은 순간 이 모든 것이 너무 좋아 벅차올랐다. 백은 옆에 없으면서도 곁에 있는 사람이었다. 영인이 혼자였다면 영원히 가지지 못할 안정감과 믿음을 끝없이 주었다.
“왜 벌써 깼어요?”
영국은 아직 아침 6시도 되기 전이었다.
-신경 써서 그런가 봐. 아침에 눈이 일찍 떠지네. 너도 보고 싶고.
나른한 목소리로 백이 대답했다. 영인은 잘 살고 있었다. 백이 준 지침은 영인을 타락하지 않게 잡아 주었다. 양지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리움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보고 싶어요.”
영인의 감미로운 고백을 들으며 백이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말로 뱉고 나니 보고 싶다는 감정이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느끼고 나니 참을 수가 없어졌다. 당장 영인에게로 달려가고 싶었다. 어쩌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내달리고 있었다. 고작 일주일, 어른에게는 절대 길지 않은 그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렀다.
-어쩌면 좋지? 정말 네가 너무 좋아서. 너 때문에 잠도 못 자겠다.
너무 좋아서 어쩌지 못하는 것은 영인도 마찬가지였다. 영인이 눈을 감고 백을 떠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투입된 프로젝트를 접고 지금이라도 비행기를 타러 가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간이 백을 다시 영인에게로 데려올 것이라는 작은 확신이 영인을 위로했다. 백은 곧 올 것이다.
* * *
운전석에 앉은 영인이 작게 입으로 숨을 내뱉었다. 역시 운전은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백은 진작에 자동차 보험에 영인을 추가해 두었다. 마치 그런 서류에라도 둘의 이름이 함께 있는 것이 의미 있는 사람처럼.
진의 사고 이후 영인은 차를 폐차시키고 운전하지 않았다. 두렵거나 무서운 감정이 들지는 않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거북함이 치솟아서 차마 핸들에 손을 올릴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오랜만에 운전할 각오가 들었다.
늦은 밤, 긴 비행 끝에 도착한 백이 혼자 택시 타고 오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백을 보고 싶었다. 잠시 망설이던 영인이 룸미러와 사이드미러, 의자 간격을 조정하고 시동을 걸었다. 더 이상 과거는 영인을 붙잡지 못했다. 이미 깜깜한 하늘 아래로 영인이 운전하는 차가 거침없이 속도를 냈다.
백이 도착할 시간보다 한참 이르게 도착한 영인은 설레는 마음으로 입국장 안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직 백이 오려면 멀었는데도 자꾸만 고개가 돌아갔다. 기다림조차 즐거운 사람이 된 자신이 믿기지 않다가도 곧 있을 만남이 설레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23:14, 백이 도착할 시간이 되자 영인이 입국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영인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문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나 도착. 지금 캐리어 기다리고 있어.
“피곤하죠?”
-하나도 안 피곤한데. 너는?
백의 말끝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영인이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눈으로는 사람들을 살폈다. 가장 먼저 백을 찾고 싶었다.
“안 피곤해요. 혼자 온 거죠?”
-응, 애들은 엄마들이랑 다 같이 관광하고 온다더라고. 나는 너 보고 싶어서 제일 빨리 오는 비행기 타고 왔지. 어! 캐리어 나왔다.
백의 얼굴이 궁금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자신을 만나면 백은 기뻐할까? 당황할까? 화를 낼까?
“이따 봐요.”
-그래, 피곤하면 자고 있어. 금방 간다.
통화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인은 백을 발견했다. 백은 정말 후광이라도 있는 사람 같았다. 나타나자마자 순식간에 영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찾으려는 노력은 모두 헛된 것이었다. 그런 노력이 없어도 영인은 어디에서나 백을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었다.
영인과 마주친 백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떤 짧은 감격이 그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영인도 드물게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걸었다.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백은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영인을 번쩍 안아 주고 싶었다. 그만큼 반갑고 기뻤다. 그렇지만 공항 안 사람들을 의식해서 뛰듯이 걸어 영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백의 단정한 손이 영인의 등을 한참 두드렸다.
영인은 바로 코앞에 있는 백의 귓가에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꿈이 아니었다. 백의 내음에 섞인 피로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영인도 참지 못하고 강하게 백을 안았다. 너무나 그리웠던 품이었다. 재회가 보장된 헤어짐이 드디어 끝났다.
“내가 운전해도 되는데. 괜찮겠어?”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백이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영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언제나 백이 자신에게 해 주던 것처럼 보조석 문을 열었다. 낯선 배려에 백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서 웃었다.
“운전 잘하네.”
어두운 고속도로 위에서도 영인은 큰 어려움 없이 운전했다. 자신이 없는 사이 무엇인가를 극복한 듯한 연인을 백이 기특하게 보았다. 영인은 오른손을 자기 허벅지 위에 어색하게 올려 두고 있었다. 백이 조심스럽게 그런 영인의 손등 위를 자신의 손바닥으로 덮었다.
“다 컸어.”
백의 어이없는 발언에 경직되어 있던 영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비로소 백이 자신에게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집에 오자마자 백은 욕실로 직행했다. 반신욕이 절실했다. 영인은 가볍게 샤워하고 백의 짐을 정리했다. 백이 나오면 얼른 자신의 깜짝 선물을 보여 주고 싶어서 발걸음이 가벼웠다. 영인이 캐리어까지 완벽하게 제자리에 두고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다리를 떤 지 20분이 지나서야 아까보다 한결 편해 보이는 백이 씻고 나왔다.
“집이 최고야.”
개운한 얼굴로 백이 킥킥거렸다. 영인이 백의 손목을 잡고 자신이 준비한 거대한 선물 앞으로 향했다. 백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지만, 즐거워 보였다.
“열어 봐요.”
닫힌 문을 백이 망설임 없이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누가 봐도 큰돈과 신경을 쓴 티가 나는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보고 감탄했다.
“와!”
백이 입을 벌리고 영인을 보았다.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영인은 그런 백의 표정을 꼼꼼히 살피며 이어질 반응을 기대했다.
눈치가 빠른 백은 이미 이 방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말았다. 영인의 욕심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그리고 백은 그 욕심이 귀여웠다. 만족스럽고 기뻤다.
“이러다 나 집에 가둬 두는 거 아니야?”
백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방금까지 부모에게 선물을 준 아이 같은 표정으로 설레하던 영인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진지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가둬 두지 않아요. 여자한테 마음이 가면 언제든 말해요. 보내 줄게요. 남자는 안 되지만…….”
영인은 백의 인생에 유일한 남자로 남고 싶었다. 오점이어도 좋았다. 하지만 백이 여자가 좋아졌다고 하면 언제든지 기꺼이 물러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감히 백의 먼 미래까지 탐내지 않았다.
엉뚱한 영인의 말에 백도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영인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강영인, 너는 내가 그렇게 쉬워?”
백이 영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너를 떠나는데 상대가 누구인 게 중요해? 그냥 무조건 울고불고 매달려야지. 가지 말라고 붙잡고 늘어져야지. 너는 나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어?”
말을 마친 백의 얼굴은 화가 나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영인과 백의 시선이 마주쳤다. 백에게 애원하는 것은 영인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매일 빌고 애원할 수도 있었다.
오히려 보내 주는 것이, 인생의 단 한 번뿐인 거대한 행운을 놓아주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욕심보다는 포기가 백에게 더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든지 때가 되면 놓아줄 각오를 하고 살았다.
백도 이제는 충분히 영인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일방적인 배려가 의미하는 바를 가슴 아프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인이 그러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였다.
오늘 준비한 이 선물처럼 더욱 욕심내고 욕망하기를, 백에게 무엇이든 요구하기를 원했다. 백이 영인에게 그럴 권리를 주었으므로.
“나는 네가 남자든 여자든 다른 사람 좋아져서 떠난다고 하면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질 거야. 동네 망신 다 시키고 절대로 안 보내 줄 거야. 영인아, 나는 절대 너 안 놔줄 거야.”
백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백의 말을 듣자 영인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제야 백의 뜻을 이해했다.
영인이 그대로 백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백이 숨쉬기 답답할 정도로 백을 꽉 옭아맸다. 그러고는 백의 숨을 모조리 빼앗으려는 기세로 입 맞추었다. 백이 내뱉는 숨을 그대로 삼켰다.
이제 백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영인이 보내 준다고 했던 때가 그리워져도 절대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백 때문에 영인은 영원히 백의 곁에 남고 싶어져 버렸다.
“내가 진짜로 물고 늘어져서 안 놔주면 어쩌려고? 막 집착할 텐데.”
한참 만에야 백을 놓아준 영인이 음산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귓가에 느껴지는 간지러움 때문에 백이 몸을 살짝 떨고서 미소 지었다.
“제발 집착 좀 해 줘. 나한테 끝없이 요구하고 욕심내. 그게 내가 바라는 바야.”
백이 자신의 뺨을 영인의 뺨에 대고 중얼거렸다. 따스한 체온과 함께 보드라운 살결이 느껴졌다. 영인은 그대로 굳는 것도 같고 녹는 것도 같았다.
“겁도 없이.”
영인이 백의 어깨를 자신의 턱으로 누르며 말했다. 백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의 더럽고 위험한 속내를 알면 감히 저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영인의 존재를 느끼게 했다. 백은 영인이 기대는 것이 좋았다. 백도 더욱 지그시 영인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누르듯 기댔다.
“내가 네 마음을 겁내야 해? 왜?”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백의 산뜻하고 단순한 대답에 영인이 눈을 감았다. 백을 끝없이 원했다. 그 욕망 때문에 백이 다쳐서는 안 됐다. 가슴이 뜨겁게 불탔다. 백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을 기세로 뜨겁게 타올랐다.
“사실 나도 준비한 선물이 있는데, 잠시만.”
한참 영인의 등을 토닥이던 백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는 영인을 두고 떠났다. 사실 지금 주려고 한 선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영인에게서 받은 마음이 너무 좋아서 당장 줘 버리고 싶은 충동을 결국 이기지 못했다.
백은 드레스룸으로 가서 자신의 면티가 정리된 서랍을 열어 뒤졌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 깊숙한 곳에 숨겨 둔 상자를 찾아 꺼내 영인 앞에 섰다. 백의 손에 들린 것은 시계 케이스였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으로 사람들이 결혼 예물로 많이 선택하는 모델이었다.
영국 가기 전에 겨우 구한 선물이었다. 틈날 때마다 백화점을 갔는데도 구할 수가 없어서 이래저래 인맥을 통해서 재고가 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카드를 들고 달려가 산 귀한 물건이었다. 영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백의 손에 있는 시계와 백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아, 이건 사실 멋지게 차려입고 좋은 곳에 가서 주고 싶었는데… 빨리 주고 싶어서 내가 기다릴 수가 없네. 왜 선물 주는 사람이 더 이렇게 기대하고 조급해하지?”
근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백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으로 영인을 응시했다.
“프러포즈할 거니까 무릎 꿇어야지.”
백이 애써 긴장을 풀기 위해 농담을 건넸다. 영인은 그것을 듣고도 전혀 웃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백을 보고 있었다. 기분 나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말을 마친 백이 진짜로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영인이 재빨리 그런 백을 저지했다. 영인에게 양팔이 잡힌 채로 백이 어정쩡하게 상자를 내밀며 다정한 음성으로 진심을 전했다.
“영인아, 나는 네가 할아버지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때까지 너랑 이렇게 함께 살고 싶어. 너랑 같이 나이 들고 싶어. 내 평생의 반려자가 되어 줘.”
백의 잔잔한 고백을 들은 영인이 이를 사리물었다.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누군가의 좋은 남편이 되었을 백. 자상한 아버지가 되었을 백.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남부러운 것 없는 인생을 살았을 백. 그랬다. 백은 자신을 만나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가여운 연인이었다.
영인이 복잡한 얼굴로 백을 바라보았다. 백은 지금 영인을 완전히 자신의 곁에 꽁꽁 묶어 두려고 하고 있었다. 영인은 이 달콤한 유혹과 현실 사이에서 부유했다. 무엇이 백을 위한 것인지 고민했다.
백은 이제 영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엇을 걱정하고, 어떤 것을 죄스러워하는지도 모두 짐작할 수 있었다. 잘 지내다가도 한 번씩 백을 보는 그 눈빛의 의미도 이미 오래전에 파악했다.
그래서 잠자코 영인을 기다려 주다가 목을 한번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영인이 멈춰 있다면 백이 다가가면 그만이었다.
“나는 너를 만나기 전엔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어. 인정받고 싶고, 뒤처지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영인아, 너를 만나고 나는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게 됐어.”
사실이었다. 영인을 만난 후 삶의 방향성이 당위에서 욕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가장 큰 욕망은 당연히 강영인이었다. 인생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유일한 백의 목적지이자 최후까지 바라고 원할 백의 하나뿐인 사랑은 오직 영인이었다.
“나는 지금 태어나서 가장 행복해. 너는 어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것만 고민해 봐.”
고민할 것도 없었다. 영인은 백을 알게 된 이후로 쭉 버거울 만큼 행복했으니까. 눈물을 참느라 애쓰는 영인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백은 여전히 영인을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여유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겁쟁이 연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조금 돌아와도, 머뭇거려도 괜찮았다. 백은 영인에게 줄 것이 아주 많았다. 이까짓 시간쯤이야 전혀 아깝지 않았다.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영인은 어지럽고 어려운 마음의 길을 원 없이 헤맸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흐르고도 꿋꿋하게 자신을 기다려 주는 백에 앞에 무너지듯 무릎 꿇었다. 백의 정강이에 젖은 뺨을 기댔다. 백도 바로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런 영인의 등을 안아 주었다.
* * *
‘원하고 요구하라는 말이 이런 뜻은 아니었는데.’
백이 탄식하며 정액 범벅이 된 채로 침대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어떤 운동을 한 뒤보다 숨이 차고 지쳤다. 이제 정말 손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몇 번이나 사정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솟고 눈앞이 깜깜해지는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됐다.
유리잔 가득 물을 따라온 영인이 백에게 건넸다. 영인도 땀에 젖은 채로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무방비하게 쓰러져 있다가 간신히 컵을 건네받는 백을 보자 다시 고환부터 짜르르 피가 돌았다. 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켠 백이 또 커지는 영인의 것을 보고 경악했다.
“강영인.”
방금 물을 마셨는데도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영인과 눈이 마주치자 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영인은 거리낌 없이 탁한 액으로 엉망인 백의 몸 위로 올라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영인의 성기가 백의 성기를 집요하게 찌르고 문지르자 백의 의지와 상관없이 백의 것도 서서히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더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아니야, 이제 그만.”
“올라와요.”
영인이 백의 옆에 등을 대고 똑바로 눕더니 팔을 벌려 백을 불렀다.
“형 속도에 맞출게요.”
백은 지금 눈을 감으면 당장 기절하듯 잘 수 있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영인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러자 이제는 건드리기만 해도 아릴 정도로 부어오른 유두를 영인이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통증과 함께 오는 미약한 쾌감에 백이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로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무리 해도 실감이 안 나요.”
영인이 말을 마치고 백의 발달한 가슴을 크게 베어 물었다. 탄력 있는 근육이 입 안 가득 들어찼다. 부러 자국을 내려고 강하게 깨물자 백이 영인의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아읏!”
눈이 마주치자 백이 흐느끼듯 한숨을 쉬었다. 아까 울어서 평소보다 붉은 영인의 눈가를 보니 도저히 밀어낼 수가 없었다.
“진짜로 마지막이야.”
백이 영인의 위로 올라타며 말했다. 영인의 위에 앉자 주르륵, 영인이 양껏 싼 정액이 구멍에서 흘러내렸다. 백이 난감한 얼굴로 뒤늦게 구멍을 손으로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백의 몸 안을 채우고 있던 것들을 확인한 영인은 피어오르는 정복욕을 어찌하지 못했다. 백에게 더 자신을 남기고 싶었다. 더 깊은 곳에, 지워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 음흉하고 악한 생각에 영인의 눈도 위험하게 빛났다. 그러나 자신의 가슴을 주물러 대는 백의 손길에 이내 그 욕구가 사그라들었다. 지친 얼굴이면서도 백은 제법 집중하는 얼굴로 영인을 자극하고 있었다. 백의 단정한 손톱이 영인의 유두를 꾹 눌렀다.
“읏!”
영인의 신음을 들은 백이 씩 웃으며 몸을 숙여 이번에는 영인의 목울대를 쭉 빨아들인 뒤 다시 유두를 공략했다. 뜨거운 혀로 부드럽게 핥아대다가 영인이 예상하지 못한 때를 노려 이를 세워 물고 흔들었다.
영인의 성기가 더는 흥분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해, 투명한 쿠퍼 액을 흘리며 꺼떡거렸다. 영인이 못 참겠다는 듯 허리를 위로 쳐올리자 백이 다리에 힘을 줘 영인의 몸통을 조였다.
“빨리요.”
영인이 안달이 난 목소리로 백을 재촉했다. 백이 손을 뒤로 돌려 방금까지 시달린 자신의 애널을 확인했다. 축축하게 젖어 조금만 힘을 주니 금방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한 손을 영인의 가슴팍 위에 올려 의지하고 백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나머지 손으로는 영인의 기둥을 잡아 고정했다. 이제 앉기만 하면 됐다.
영인은 아까부터 집요하게 백을 관찰하고 있었다. 백의 고난과 망설임, 머뭇거림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영인이 두 손으로 백의 엉덩이 살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영인의 손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백이 작게 신음했다.
“아!”
영인 때문에 한껏 벌어진 구멍에서 칠칠치 못하게 정액과 젤이 섞인 탁한 점액이 주룩 흘렀다. 그 선연한 감각에 백이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이제 영인에게 더 보여 줄 바닥은 없었다. 모든 치부를 다 드러내고 내어 주었다.
영인은 백이 흘린 모든 것을 다시 다 넣고 싶었다. 그런 것들이라도 남겨 두고 싶었다. 영인의 속내는 꿈에도 모르고 백이 천천히 엉덩이를 내렸다. 그러자 그저 좁아 보이던 구멍이 탐욕스럽게 영인의 성기를 삼켜갔다.
“아흐… 흑!”
백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백의 무게 탓에 영인도 미칠 지경이었다. 벌써 여러 번 쑤시고, 싸 댔는데도 압력이 너무 거셌다. 구멍은 영인을 밀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자꾸만 조여들었다. 그것이 또 자극되어 영인의 악다문 잇새 사이로도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큭.”
마침내 백이 완전히 영인의 위에 앉았다. 항상 영인의 속도에 맞춰 이루어지던 삽입이었는데 자신이 주도해서 하자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그 어떤 자세보다 확실히 영인의 일부가 자신에게 들어와 있다는 감각이 선명했다. 백이 가만히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기는 영인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가장 원초적인 접촉을 하고 있는데도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똑바로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백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황홀하고 과분해 누군가 귓가에 대고 꿈이라고 말한다면 그럴 줄 알았다고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을 만큼 좋았다.
또 어딘가로 떠내려가는 영인을 붙잡으려는 듯 백이 서서히 허벅지에 힘을 줘 몸을 들었다. 내부를 가득 채우던 성기가 온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가는 것이 너무 잘 느껴져 소름 돋았다. 백의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함께 끌려가는 듯했다.
척, 척, 척,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고요한 방을 울렸다. 백은 망설이지 않고 상하 운동을 반복했다. 허리와 엉덩이 근육이 모두 잘게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보란 듯이 더 과격하게 움직여대자 영인이 점점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으흣, 흑. 좋아, 좋아.”
백이 영인의 가슴을 강하게 내리누르며 신음했다. 영인도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치기를 반복하며 점점 허리를 들어 올렸다.
“으! 읏!”
어느 순간 백의 움직임이 멎었다. 백이 자신의 성기를 손으로 꽉 쥐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눈으로 백의 몸이 순식간에 단단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보이는 곳이 그런데 보이지 않는 곳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에 영인도 고개를 뒤로 꺾고 낮게 신음했다.
“크학, 으읏!”
백은 눈을 감고 계속 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낯선 쾌감에 몸을 가눌 여력이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잡을 곳이라고는 없는 망망대해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쾌락이 범람해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영인이 백의 엉덩이를 잡고 허리 짓을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백의 피부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하게 붙들고 영인이 인정사정없이 쳐올려 댔다. 가까스로 숨만 쉬다시피 하던 백이 그대로 영인에게로 무너졌다.
자신에게 쏟아지듯 엎어진 백의 쇄골과 뺨에, 귀며, 입술에 입이 닿는 대로 빨고 핥아대며 영인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리를 움직여댔다.
“아앗! 흐아… 하지 마! 하지 마! 읏….”
백이 몸부림을 치며 영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영인은 백을 놓아주지 않았다. 굵은 팔로 백의 허리를 결박하듯 안고서 아까보다 더 깊은 곳을 노려 찔러댔다.
백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이제는 무리였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그야말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플 만큼 세게 때리는 쾌감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이성의 방벽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영인이 그런 백을 달래듯 그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러면서도 정작 백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침대가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백의 입에서는 이제 울음소리 같은 흐느낌과 숨소리만 흘러나왔다. 영인은 들려오는 그 모든 소리마저 다 가지고 싶었다.
“큭….”
영인이 턱에 힘을 주고 백을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곧 고지에 도달할 것이었다. 영영 닿고 싶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었다.
백은 혼이 빠진다는 문장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영인의 아랫배에 이리저리 멋대로 성기는 쓸려 자극됐고 쾌락이 배 속을 끝없이 두드려 댔다. 고문 수준이었다.
자신이 울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지경이었다. 백은 끝없이 울부짖으며 겨우 엉덩이를 조금씩 흔들어 영인을 감당했다. 영인이 어느 지점을 후벼 파듯 찌르자, 백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백이 참지 못하고 영인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영인은 백이 주는 고통조차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 지점을 집요하게 노려 쑥쑥 쑤셔댔다.
백의 입이 벌어졌지만, 터져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침묵의 교성 끝에 백의 성기에서 줄줄 맑은 물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도 영인은 멈추지 않았다. 영인의 성기가 길게 빠졌다가 끝까지 치받고 들어가면 마치 어떤 버튼이 눌린 것처럼, 백의 성기에서도 물줄기가 터졌다.
영인은 자신의 몸이 백이 쏟아낸 것으로 엉망이 되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철벅철벅, 질척이는 삽입이 이어지는 동안 백은 계속 울었고 영인도 마침내 절대로 당도하지 않기를 바라였던 열락의 끝에 도착하며 사정했다.
완전히 축축하게 젖은 이불 위에 나부라진 백이 자꾸 입 밖으로 나오려는 욕을 참기 위해 애썼다. 아무리 그래도 영인에게 욕을 해서는 안 된다고 옅게 남은 이성으로 자신을 다스렸다. 매트리스 커버며 이불도 갈아야 하고 자신의 몸도 씻어야 하는데 말 그대로 손 하나 까닥할 기운이 없었다.
영인이 백의 등 뒤에 앉아 백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백이 얌전히 영인에게 안겨 앉은 자세가 되자 컵을 들어 백의 입에 갖다 댔다. 하도 울부짖어서 아픈 목을 축이고 백이 영인의 몸에 완전히 자신을 기댔다.
“방금 내가 한 게 뭐야?”
백이 고장 난 호스처럼 물을 질질 흘려댄 자신의 성기를 손으로 쓸었다. 영인이 작게 미소 지으며 백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저도 소문으로만 들었어요. 진짜로 되는 건지는 몰랐는데. 엄청나게 잘 느끼는 편인가 봐요, 형.”
“다음부터는 이렇게 하지 마. 이건 정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기분이야. 힘이 다 빠졌다.”
통제할 수 없는 쾌감이 두려웠다. 이미 한계를 넘어선 감각이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밀려오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백의 말을 들은 영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의 허리를 다시 꽉 끌어안았다.
“내가 욕조까지 안아 줄까요?”
“뭐?”
백이 자존심이 상한 듯 정색을 하더니 영인의 다리를 짚고 일어섰다. 확실히 이렇게까지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었다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마 천하의 노백이 안겨서 욕실 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안겨서 갈 것 같아? 고작 섹스 때문에?”
백이 영인을 돌아보고 코웃음을 치더니 느직느직 걸음을 옮겼다. 평소 백의 힘찬 걸음과는 분명히 달랐다.
“고작?”
백의 뒷모습을 보며 영인이 백이 내뱉은 단어를 되뇌었다. 오늘이 고작이었다니. 다음번에는 어떻게든 백을 만족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영인도 백의 뒤를 따랐다.
몸을 닦고 침구까지 모조리 바꾸고 나자 어느새 새벽 4시가 넘어 있었다. 백은 이제 정말로 눈만 감으면 바로 수면 모드로 변환할 수 있었다. 영인도 백의 옆에 누워 자연스럽게 백의 품에 파고들었다. 정말 잘 준비가 끝났다.
“배고프다.”
별다른 뜻 없는 혼잣말이었다. 영인은 말을 마치고 두유라도 하나 먹을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백이 눈도 뜨지 못하고 물었다.
“두유 먹고 자게요.”
“두유 없을걸.”
부스스 백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누가 봐도 엄청 피곤해 보이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럼 그냥 자죠. 누워요. 깨워서 미안해요.”
영인이 다시 침대로 돌아왔는데 이번에 일어선 것은 백이었다.
“어디 가요?”
백이 기지개를 켜고 방문을 향해 걸었다.
“있어. 사다 줄게. 먹고 싶은 건 먹어야지.”
귀찮은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배고픔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렇지만 말리기도 전에 백은 이미 드레스룸으로 가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영인이 급하게 그런 백에게로 갔다.
“그럼 같이 가요.”
급하게 옷을 꿰입으며 백에게 말하자 백이 선선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내리는 부슬비가 보였다. 이 비가 그치면 아마 찬 바람이 불 것이다.
“그래, 비 온다. 우산 챙겨.”
각자 하나씩 우산을 손에 쥐고, 잠깐 나온다고 슬리퍼를 챙겨 신고 나온 두 사람의 모습이 닮아 보였다. 산뜻한 새벽 공기가 상쾌했다. 검은색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걷는 그 짧은 시간마저 달콤한 데이트였다. 많은 말도 필요 없었다.
“엇?”
갑자기 영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백이 바로 영문을 묻는 듯한 표정으로 영인을 보자 영인이 난감한 듯 발치를 보았다.
“왜?”
백이 영인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보았다. 영인이 신고 있던 조리의 끈이 끊어져 있었다. 까만 밑창 위에 그저 올라서 있을 뿐인 영인의 발을 보며 백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거리낌 없는 웃음소리를 듣자 영인도 짜증을 내는 대신 백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영인아, 하나를 사도 제대로 된 걸 사자.”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백이 말하더니 바로 자신이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서 영인 쪽으로 밀었다.
“그쪽도 벗어.”
그리고 영인의 슬리퍼 두 짝을 손에 쥐고 영인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걸음을 옮겼다. 보폭이 큰 탓에 백은 금방 멀어졌다. 백의 하얀 발이 어두운 땅 위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맨발로 길 위에 서 있는 백은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못 박힌 듯 멈춰 선 채로 영인은 그런 백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곧 백이 영인을 향해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빨리 와.”
영인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백이 남긴 슬리퍼에 발을 밀어 넣었다. 사이즈가 작아서 뒤꿈치가 삐죽 튀어나왔다. 그렇지만 그 슬리퍼 덕에 영인의 발은 더러워지지 않았다. 돌부리나 흙먼지로부터 보호받았다.
영인이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백의 앞까지 갔다. 그리고 자신의 우산을 접고 백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서 기꺼이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곳은 영인의 안전지대였다.
“업혀요.”
영인의 너른 등이 백의 눈앞에 놓였다. 백이 가늘게 눈을 뜨고 그 등을 응시했다. 단단하고 넓은 등이었다. 백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허락될 일이 없는 안전하고 강한 등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백이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는 영인에게 업혔다. 건장한 성인 남성인 백의 무게에도 영인은 꿈쩍하지 않았다.
백의 슬리퍼를 신은 영인이 백을 업고 걷기 시작했다. 영인은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느릿하게 이동했다. 이 모든 시간이 소중했다.
백은 우산을 들고 영인은 걸었다. 그렇게 한 우산을 쓰고 가는 두 사람은 꼭 한 몸처럼 보였다. 비로 젖어서 어둑한 길이 반짝였다. 그 빛나는 길 위에 있는 둘의 등 뒤를 새벽달이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둘만의 집을 향해 갔다. 영원한 안식과 사랑이 있는 곳으로.
<영인을 위하여 2권(외전1포함) 끝(완결)>
<영인을 위하여 외전2-3>
목차
외전 2
외전 3. 다시 사랑하게 될까요?(기억 상실 IF)
외전 2
금요일이었다. 오늘로 학원 방학도 끝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도 쉬기는 했지만, 어쩐지 수림은 이미 짧디짧은 휴가가 끝난 느낌이었다. 백이 미리 말해 준 방문 차량 전용 출입구로 들어서며 수림이 연신 주변을 살폈다. 백과 붙어 있으면 자신도 언젠가 이런 집 한 채 장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청사진을 그려 보면서.
학원의 규모는 빠르게 커졌다. 백의 사업 수완은 생각보다 좋았다. 분점도 여러 지역에 생겼고 판매용 교육 콘텐츠도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백이 없어도 백이 벌인 일들이 쉼 없이 돈을 벌어 왔다. 사업이 잘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학원 자체에 백이 끼치는 직접적인 영향력은 사라져 갔다. 때로는 자신에게서도 백이 멀어진 것만 같다고 수림은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의 만남이 더욱 반가웠다. 백의 얼굴을 마주하는 날 자체가 줄어들었으니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시간 또한 없던 요즘이었다.
백의 연락을 받은 것은 지난주 일요일이었다. 영상통화였다. 백은 시름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홀가분한 얼굴로 신혼여행에 왔다고 말했다, 쏟아지는 햇살,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바다와 이국의 것이 분명한 백사장을 배경으로 하고서.
백이 핸드폰을 쥔 손을 움직이자 백의 바로 곁에 있는 영인의 옆모습도 보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어울리지 않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채 바위처럼 서 있던 영인도 흘낏 액정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 장면은 꿈결 같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이었다.
‘집들이할 거니까 놀러 와.’
통화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대망의 집들이하는 날이었다. 수림은 주차하고 내려서 포장된 큼직한 상자를 뒷자리에서 꺼냈다. 집들이 선물로 신경 써서 산 조명이었다.
사실 자신이 갖고 싶었지만 가격이 부담되어서 못 샀던 것이었다. 소유를 위해 사려고 할 때는 손이 떨리더니 백과 영인을 위한 선물로 사자니 의외로 쉽게 지갑이 열렸다. 아깝지 않았다.
“와, 집 좋다.”
수림이 들어서자마자 감탄했다. 베이지색 앞치마를 두른 백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으쓱였다. 하여간 얄밉지 않았다. 수림이 실내용 슬리퍼를 꿰신으며 주변을 살폈다.
“좀 탔다?”
수림이 선물을 영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영인은 별말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더 편안해 보인다고 수림은 생각했다.
영인은 소파 테이블 위에 선물을 두었고 수림은 손을 씻고는 요리를 마무리하는 백의 곁으로 향했다.
주방으로 가는 복도 조명 아래, 예복을 입고 나란히 선 영인과 백의 사진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었다. 같은 모양의 반지가 자리한 두 남자의 손을 수림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느새 백이 수림의 뒤에 와서 수림이 보는 곳을 함께 보았다.
“멋있어?”
“나라도 부르지.”
수림은 누구도 초대하지 않고서 둘만 있었을 그 예식을 상상했다. 외로움과 엄숙함같이 백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가 떠올랐다.
“둘이어서 좋았어.”
백이 진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냉장고 한쪽에는 둘이 신혼여행으로 간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 두 장 붙어 있었다. 한 장은 백의 독사진이었고 나머지 한 장은 영인과 백이 함께 나온 사진이었다.
백이 혼자 찍힌 사진으로 먼저 눈길이 갔다. 환한 태양 아래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고 있는 백은 따스한 눈을 하고 있었다. 수림은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영인일 것을 직감했다.
백은 카메라 렌즈가 아니라 카메라를 든 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득 들어찬 애정과 흔들림 없는 마음이 사진에서도 느껴졌다. 어쩐지 수림은 잠시 둘의 시선을 훔쳐본 듯해 황급히 다음 사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백을 목말 태운 더 커다란 영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영인도 그답지 않게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기에 수림도 피식 웃으며 그 사진을 한참 보았다. 영인의 얼굴 쪽을 찬찬히 살핀 수림이 벗은 영인의 상체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자연스럽게 영인의 가슴팍 아래로 내려온 백의 다리를 발견했다. 하얀 발목에 유독 눈이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얀 발목 위에 가볍게 든 멍이 눈에 띈 것이었다. 그 발목에 남은 멍 자국을 수림이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야, 여긴 왜 이래. 삐었어?”
요리를 마무리하던 백이 수림의 곁으로 와서 손끝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멍을 발견한 백이 자신도 몰랐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정작 대답은 해 주지 않은 채 제자리로 돌아갔다. 뒤늦게 영인이 백을 따라 수림의 뒤에 와서 섰다.
“노빠꾸 발목 왜 멍든 거야?”
수림이 재차 영인에게 물었다. 벌써 수도 없이 본 사진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주의 깊게 보던 영인이 수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멍을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멍? 모르겠다.”
백은 굳이 수림의 옆까지 다시 걸어와서 그 대답하는 영인을 감상했다. 바라보는 곳은 영인의 얼굴도 눈도 아닌 귀. 영인이 거짓을 말할 때면 유일하게 진실을 드러내는 기관이었다.
사실 영인은 백의 발목에 든 멍의 존재를 진작 알고 있었다. 그 멍을 만든 사람이 영인 자신이었으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멍은 점점 옅어져 갔다. 그 희미해지는 흔적을 보며 영인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묘한 서운함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아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으레 그래 왔듯 자기혐오가 들었지만, 그것은 예전과는 다르게 쉬이 또 빠르게 영인에게서 물러갔다. 백 덕분이었다.
예상보다 긴 휴가를 낼 수 있겠냐고 백이 물어왔을 때 영인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바로 투입 일정 조절을 고려했다. 긴 여행을 가겠거니 예상했지만, 자세히 따지지는 않았다. 영인에게 백은 안전하고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안전하고 틀림없다는 말이 예상 가능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백은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오랜만에 느긋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리라는 영인의 예상은 틀렸다.
백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강원도 어느 산등성이에 있는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호젓하고 고즈넉한 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백이 섭외한 소수의 전문가가 백과 영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하지 못한 타인의 등장에 영인은 대번에 단단하게 굳었다. 백이 자연스럽게 영인의 긴장한 목덜미 부근을 따뜻한 손으로 가볍게 마사지했다.
“괜찮아. 저 사람들한테는 일이고 오늘이 지나면 또 금방 다 잊어. 사람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남들한테 관심 없다.”
신뢰감을 주는 음성이었지만, 영인은 이번만큼은 백의 말을 믿지 못했다.
쉽게 잊히고 기억되지 못하는 사람들과 백은 달랐다. 그러기에 백은 너무 잘생겼다. 백을 만난 사람들이 백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영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백은 여전히 너무 긴장감이 없었다.
영인이 말없이 백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백이 무거워진 영인의 분위기를 풀어 주려고 장난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영인은 자신을 알기 전과 다름없이 빛나는 백을 보며 묻고 싶어졌다.
자신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이런 초라하고 외로운 결혼식을 준비하며 정말로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느냐고.
해일처럼 몰려온 의문은 금세 의심으로 그 정체를 바꾸고는 했다. 밖으로 내뱉든 그렇게 하지 않든 영인을 해쳐 왔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영인은 백을 만나고 저런 자학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배웠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자기 자신을 설득할 수 있었다.
‘확인받고 싶은 충동은 내 이기심이다. 백이 자신을 후회할 리 없다. 나는 알고 있다.’
백이 퍼붓는 사랑은 때로는 불편하고 버거웠다. 무겁고 어려웠다. 그렇지만 영인의 것이었다. 무엇보다 귀했다.
자신이 죽기 전에 사라질 리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영인은 자꾸만 묻고 싶었다. 그리고 수없이 물어도 흔들림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때로 백은 묻기도 전에 대답하고는 했다. 영인의 의문을 이미 들은 사람처럼.
그러고서 떠난 신혼여행이었다. 오랜 비행 끝에 다시 경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신혼여행지는 영인으로서는 이름도 생소한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어느 섬이었고 그곳에는 리조트 직원을 제외하고는 영인과 백뿐이었다. 섬 자체가 하나의 고객을 위한 작은 리조트인 셈이었다.
두 사람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침실이었는데 금세 좁게 느껴졌다. 허니문을 축하하며 꾸며 둔 장식들을 모조리 넘어뜨리고 떨어뜨리며 영인과 백이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했다.
주도권은 수시로 바뀌었다. 백은 자신의 양팔을 옥죄듯 붙든 영인이 발치에 걸린 소파 다리 때문에 멈칫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오른손으로는 영인의 목 근처를 거머쥐고 왼손으로는 팔뚝 근처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왼발로 단단하게 땅을 디디고는 순식간에 오른발로 영인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푹신한 침대로 맥없이 쓰러진 영인이 눈을 감고 작게 웃었다.
“지금 나한테 기술 건 거죠?”
“억울하면 같이 배우시든지요.”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백은 다시 주짓수 체육관에 등록했다. 처음 백이 체육관을 알아보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영인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치 빠른 백이 아주 짧은 찰나 찌푸려진 영인의 눈썹을 보고 영인이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아챘을 뿐이었다.
영인이 온몸에 힘을 풀었다. 잡아먹을 테면 잡아먹으라는 그 태도는 분명 복종과 유순함을 담고 있었는데도 백을 올려다보는 표정은 이상하게 도발적이었다.
백이 영인의 양 손목을 모아 그러쥐어 머리 위로 속박하고 자신의 하체로 영인의 몸통을 강하게 눌러 제압했다.
“이제 우리 부부잖아.”
백이 크지 않게 속삭이며 자신의 상체를 낮추었다. 장난기가 묻은 음성이었다. 영인은 긴장하고 있었다. 영인의 온몸이 굳는 것을 백도 선연히 느꼈다. 더욱이 깔고 앉은 성기의 변화는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영인이 백에게서 빠져나오기 위해 꿈틀거렸다. 하지만 백은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어떤 운동이든 포지션은 중요했다. 좋은 위치와 자세를 선점하면 같은 힘으로도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길게 누운 영인의 위에 있는 지금만큼은 백이 확실히 우위였다.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여보 해 봐.”
백이 영인의 코끝에 자신의 코끝을 살짝살짝 부딪치며 말했다. 영인은 미칠 지경이었다. 여보라니.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지금은…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었다.
“놔줘요.”
“여보 해 봐. 응? 한 번만.”
양손으로 영인의 손목을 더욱 세게 잡고 백이 말했다. 정확히는 영인의 귓가에 속삭이며 웃었다. 본격적으로 몸부림을 치려던 영인이 그 웃음소리에 맥이 빠진 듯 힘을 풀었다.
“여보, 이렇게. 힘들어? 그럼 자기야? 자기야라고 해 봐.”
백은 작정한 사람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영인이 눈을 감고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썼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백의 말이 맞았다. 결혼까지 한 사이였다, 어쨌든.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자, 기, 야. 세 글자만 말하면 놔준다니까.”
이제는 백이 자신을 놀려 먹는 것인지, 진짜로 듣고 싶은 것인지도 혼란스러웠다. 영인이 꽉 잠긴 목을 풀자 백이 다시 웃었다. 백의 눈에는 그런 모습들이 다 귀여웠다. 수림이 들으면 또 토하는 시늉을 하겠지만.
영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른 말하고 이 품에서 탈출해야 했다.
“자….”
“그래, 자.”
백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형이든 자기든 책임님이든 그런 호칭이 뭐가 중요하다고. 영인은 백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백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있었다. 호칭 따위에 다 담을 수 없는 마음들이었다.
“자, 자, 자, 저기요.”
영인은 오작동하는 기계처럼 버벅거리더니 엉뚱한 호칭을 내뱉었다. 그 소리를 들은 백이 호탕하게 웃었다. 영인을 결박하던 손도 풀고 본격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영인이한테 나는 아직 자기보다는 저기구나.”
당황한 쪽은 영인이었다. 황급히 정정해 보려고 했지만, 혀가 꼬여 저기, 자기여, 이런 말만 나오고 정작 중요한 ‘자기야’는 나오지 않았다.
백이 채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영인에게서 떨어져 나와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요?”
졸지에 홀로 침대에 남은 영인이 놀라 물었다.
“저기요는 씻으러 갑니다.”
멀어지는 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백이 삐친 것인지 그런 척하는 것인지, 지금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것인지, 서운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혼자 허공을 향해 영인이 작게 되뇌어 보았다.
“자기야.”
말이 끝나자 백의 얼굴이 떠올랐고 귓가에 열이 올랐다. 그깟 호칭이 뭐라고 이렇게 부르기 힘든 건지. 백을 마주하고 부를 자신이 없었다.
샤워 가운을 걸치고 나온 백이 준비되어 있던 와인을 따서 잔에 따르고는 테이블에 기댄 채 향을 음미하는 척했다. 시선은 아까 내버려 두고 온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영인에게 고정된 채였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침묵 속에 대치했다. 백은 미소 짓고 있었고 영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쪽은 영인이었다. 영인이 빠른 걸음으로 백에게 다가갔다.
“씻고 와.”
이번에는 백에게 말려들지 않겠다는 각오가 보이는 확고함이 서린 몸짓이었다. 백의 젖은 머리카락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백을 끌어안았다.
“저는 아침부터 산책하고 운동하고 온 형이랑 달리 아까부터 씻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말이 사실인지 영인에게서 은은하게 백과 같은 바디워시 향이 났다. 백이 와인을 머금고 그대로 영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백의 취향이라면 드라이한 와인일 것이 분명한데도 혀를 적시는 와인은 달콤했다.
백이 넘겨준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더 원했다. 와인도, 사랑도, 애정도, 확신도. 영인이 입을 크게 벌리고 백의 입 안으로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이미 모든 것은 영인에게로 넘어갔는데도 영인은 흔적만 남은 향을 찾아 헤맸다. 정도를 모르고 파고드는 영인 때문에 백은 와인 잔을 내려두고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무리였다. 더 우월한 위치를 선점하지 못한 채로 영인을 제압하기는 힘들었다.
백이 천천히 한 손으로 영인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영인이 진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귓불을 아플 정도로 세게 쥐어야만 했다. 날카로운 통증에 놀란 영인이 눈을 떠 백을 보았다.
백은 웃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을지…….
시선이 마주치자 백이 물었다. 백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저기요, 저기랑 이런 짓 막 해도 되는 건가?”
“언제까지 놀릴 거예요?”
영인이 입술을 살짝만 떼고 물었다.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움직일 때마다 서로의 입술이 부딪히는 거리도 좋았다. 백이 가볍게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자기야라고 제대로 불러 줄 때까지?”
“나는 이름이 좋아요.”
기대와는 다른 답변에 백의 평정이 깨졌다.
“나는 형 이름을 부르고 싶어요. 백아, 이렇게.”
그리고 이내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기특한 일이었다.
“강영인, 많이 컸네.”
“백아.”
나직한 부름과 함께 영인이 백을 번쩍 들어 안았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번쩍번쩍 드는 일에 백은 적응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오히려 지금은 즐기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영인의 손이 거칠게 백의 엉덩이를 주물러댔다. 마구잡이로 내키는 대로 해대는 손짓 같았지만 은근슬쩍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백의 회음부와 구멍 근처를 쓰다듬고 찔러댔다.
“하아.”
백이 긴장을 풀려고 애쓰면서 깊게 숨을 내뱉었다. 단전부터 뜨뜻한 열이 뭉근하게 퍼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내장이 간지러웠다. 영인 때문에 변한 몸과 알게 된 여러 감각들이 덜컥, 겁이 날 때도 있었지만 다 순간적인 감정일뿐이었다.
백은 영인을 사랑했고 동시에 믿었다. 이미 영인에게 자신을 다 던진 지 오래였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어느새 알몸이 된 백을 내려 두고 영인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반쯤 선 백의 성기를 조심스럽게 쥐고서 고개를 들어 백을 살폈다.
영인과 눈이 마주치자 백이 완전히 흥분했다. 백이 영인의 뒤통수를 잡았다. 단단한 손끝이었지만, 아프지 않았고 영인은 단숨에 백의 것을 삼켰다.
크고 곧은 성기는 사정없이 목구멍 깊숙한 부분을 찔러댔다. 올라오는 욕지기에도 영인은 백의 것을 더 삼킬 뿐이었다.
꿀렁거리며 조여 오는 느낌에 백이 이상을 감지했다. 영인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백이 서둘러 닦으며 자신의 하체를 뒤로 무르려고 했다. 그러니까 이런 쪽은 백의 취향이 아니었다. 영인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싫었다.
그런 백을 영인이 저지했다. 영인의 커다란 손바닥이 각각 백의 엉덩이를 감싸고 끌어안듯이 자신에게 당겼다. 백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영인은 끈질겼다.
눈이 또다시 마주쳤고, 그 순간 백이 저항을 포기했다. 영인에게는 번번이 약해지고는 했다. 어떤 의미로는 자학처럼 보일 지경인 이런 애무조차도 응석으로 보이려고 하니 심각했다.
영인의 우뚝한 코가 백의 음모에 닿았다. 백의 몸 냄새에 영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목울대가 크게 한 번씩 움직였는데 백은 그럴 때마다 작게 인상을 썼다. 자기가 대신 괴롭기라도 한 사람처럼.
한참 지나서 영인은 백을 놓아주었다. 처음 영인과 눈이 마주쳤을 때 분명 완전히 발기했던 백의 성기는 오히려 아까보다 풀이 죽어 있었다. 일방적인 구음이 욕정보다는 염려를 불러일으킨 탓이었다.
영인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평소보다 갈라지고 거친 음색이 곧 울렸다.
“빨아 줘요.”
손톱을 바짝 깎아 단정한 손가락 끝을 백이 천천히 입 안에 넣고 빨았다. 검지와 중지, 약지 순으로. 질척한 소음 속 침묵이 흘렀다.
워낙 굵고 긴 손가락이었기에 끝까지 다 삼킬 수는 없었다. 되는 데까지 빨아댄 백이 혀를 내서 채 다 적시지 못한 손가락 마디들을 혀로 핥았다.
간지럽고 야릇한 행위였지만, 그 행간에 있는 애정과 마음을 영인이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영인이 다시 빳빳해진 백의 것을 향해 입을 벌리고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충분히 젖은 손가락을 내려 백의 탄력 있는 엉덩이 사이를 갈랐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행위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적응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백이 지그시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앞도 뒤도 영인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꼼짝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사랑을 나눈다거나 하는 낭만적인 행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점령당한다는 느낌이었다. 백은 그렇게 느꼈다.
또다시 컥컥거리며 영인이 백의 것을 무리하게 입 속으로, 목 안으로 삼켰다. 치미는 구역질에 한 번씩 상체가 크게 흔들렸지만,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뒤를 꿰고 있는 손가락에도 힘을 주었다. 영인의 중지가 서서히 좁은 구멍을 가르고 들어가며 자취를 감추었다. 백이 반사적으로 구멍을 조였고, 영인이 왼손으로 우악스럽게 백의 엉덩이 한쪽을 잡아 벌렸다.
“아, 아흐.”
엉덩이가 쫙 벌어졌기 때문에 백의 은밀한 부위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붉게 피가 몰린 구멍이 영인의 손가락을 감쌌고 빈틈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영인이 검지를 겹쳐 중지와 함께 밀어 넣자 의외로 큰 거부감 없이 쉽게 벌어졌다.
단숨에 영인이 손가락 뿌리까지 처박고 손가락을 안에서 꺾어 백을 자신 쪽으로 더 당겼다. 따뜻하고, 말할 수 없이 보드라운 백의 내장을 멋대로 누르고 찔렀다.
자꾸만 무릎이 꺾이려고 했기 때문에 백이 하체에 힘을 주었다. 그 덕에 바닥을 디디고 선 발가락부터 발목, 종아리를 지나 허벅지까지 모두 팽팽하게 긴장했다. 길게 뻗은 근육이 평소보다 더 드러났기 때문에 음영이 뚜렷해졌다. 강인하며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지금 백의 안을 헤집는 손가락은 세 개. 영인은 잔뜩 벌어진, 더는 틈이 없어 보이는 백의 안에 기어이 새끼손가락까지 넣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백은 자기도 모르게 까치발을 하며 영인에게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영인이 물고 있는 성기 때문에 그 몸짓은 이내 무용해졌다.
백이 영인의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영인이 고개를 들어 백을 보았지만, 여전히 그를 놓아주지는 않은 채였다. 입가에는 침이, 눈가에는 눈물이 매달린 영인의 얼굴을 보며 백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영인의 귀를 백이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말리지 않으면 영인은 정말 주먹까지 넣을지도 몰랐다. 그런 위기감이 들었다.
“영인아, 읏,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영인이 천천히 백의 성기를 뱉어 냈다. 하도 오래 빨린 탓인지, 공기가 닿았을 뿐인데도 귀두가 저릿했다. 퉁퉁 불어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나는….”
백이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전하고자 하는 뜻은 확실했으나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네 거야. 이제 애 그만 태우고 좀 박아 볼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영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무 격양된 탓에 성난 사람처럼 보였다. 백을 벽으로 미는데 그 몸짓이 고장 난 로봇처럼 뚝딱거렸다.
‘달래려고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자극한 셈이었다. 영인이 백의 한쪽 다리를 잡고 들어 한계까지 벌렸다. 그러고는 아직 채 닫히지 못한 구멍 입구에 자신의 성기를 가져다 댔다.
백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영인의 양어깨를 붙잡아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영인의 키가 좀 더 큰 탓에 진작 풀린 백의 애널을 뚫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박에 백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신음했다.
“아흑, 큭!”
생각지 못한 큰 소리에 백이 이를 악물었다. 턱의 긴장이 눈으로도 확인 가능했다. 길게 뻗은 백의 목줄기를 영인이 큰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백은 약점을, 자신의 급소를 개의치 않고 영인에게 드러냈다. 영인의 손길에도 전혀 의심이나 두려움 따위를 내비치지 않았다.
엄지로 그런 백의 목을 영인이 길게 쓰다듬었다. 백이 신음을 참았음에도 여린 살결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경이로운 생의 증거였다. 그 떨림과 맥박이 자신이 어떤 짓을 해도 백을 훼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증명 같아서 영인은 좋았다.
영인이 살짝 굽히고 있던 무릎을 완전히 펴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남아 있던 성기 뿌리 부근이 완전히 백의 안으로 사라졌다.
“아, 후… 후윽….”
백이 버거움을 견뎌내기 위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성이 날아가고 있었다. 서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낯선 압박감을 피해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등을 기댄 벽이 뒤로 물러설 리도 없었고 영인의 자지가 작아질 리도 없었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깨금발뿐이었다. 한쪽 발로, 그것도 발끝만으로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발가락들과 발목이 위태로워 보였다.
영인은 그런 백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받치고 있던 백의 다리를 더 단단히 고정했다. 오금 위 허벅지 뒤를 커다란 손으로 꽉 잡고서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에 힘이 들어갈수록 땅을 딛은 영인의 발에도 무게가 실렸다. 반대로 간신히 한 발 발끝으로 서 있는 백은 아슬아슬하게 휘청거렸다.
등뿐만 아니라 허벅지도, 지지대가 된 한쪽 다리도 모두 고통스러울 법도 한데 백은 통증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영인이 노골적으로 자신을 뚫고 들어오는 감각에, 악랄할 정도로 집요하게 예민한 부분을 쑤시고 찌르는 헤집어대는 움직임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하아, 형, 형.”
영인이 흥분한 목소리로 백을 불렀다. 마른 눈물 자국이 남은 뺨을 백에게 되는대로 문지르며 백을 쉼 없이 불렀다.
백도 한계였다. 애초에 윤활제가 부족했기에 아래 사정도 만만치 않게 벅찼다. 영인의 자지가 깊게 치고 올라왔다가 빠질 때면 그대로 온 내장과 여린 살들이 쓸려갈 것만 같았다. 마찰이 심해 오히려 영인의 물건과 자신의 내벽이 달라붙어 함께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끄, 흑, 영인아, 나 너무 힘들어.”
백이 영인의 어깨를 매달리다시피 붙잡으며 애원했다. 웬만해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수없이 많은 관계를 가져왔지만,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영인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백을 살폈다. 위태로운 발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뒤꿈치를 내리자니 배가 뚫리게 생겼고, 계속 올리고 있자니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도와줄게요.”
“침대로 가자. 젤도 좀 쓰고.”
그러나 영인은 백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만 고군분투하고 있던 백의 나머지 다리도 들어 올려 줄 뿐이었다.
놀란 백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좀처럼 백에게서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당황의 빛이 그대로 드러났다. 영인에게 업히거나 안기는 것은 적응했지만, 이렇게 들려지는 일은 처음이었다.
허공에 뜬 두 다리 때문에 자세가 너무나 불완전하게 느껴졌다. 백은 공포를 느꼈다.
“안아 줘요.”
공포는 숨길 수 없었다. 긴장한 백을 달래듯 영인이 속삭였다. 익숙한 애원이었다. 백이 눈을 감고 영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불안하지만 영인에게 기대야만 했다.
힘을 풀고 영인에게 안기자 자연스럽게 몸이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깊게 박힌 성기가 더 들어올 리 없는데도 무게가 실리자 다시금 두려워졌다. 백의 오금을 받쳐 들던 영인이 백이 자신에게 완전히 의지하자 천천히 팔을 풀었다.
자유로워진 다리로 백이 영인의 두툼한 몸통을 옭아맸다. 남자치고도 체구가 큰 백이 매달렸는데도 영인은 크게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한쪽 팔로 백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고 나머지 팔로는 엉덩이를 아플 정도로 세게 잡아 쥐었다.
영인이 본격적으로 다리를 좀 더 벌리고 서서 중심을 잡았다. 백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더 영인에게 매달렸다.
“야, 영인아.”
백이 고개를 돌려 영인을 보았고 영인은 곁눈질로 그런 백을 보았다. 백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안 떨어뜨려요. 엄청 가볍다.”
힘을 주어 백을 들어 올린 후 서서히 힘을 빼면 자연스럽게 백이 내려와 영인의 것을 삼켰다. 백과 자신이 완벽하게 연결되자 영인이 허리에 힘을 줘 틈이 없는 백의 구멍으로 자신을 더 밀어 넣기 위해 애썼다.
같은 행위가 반복되었는데 점점 강도가 강해지고 속도는 빨라졌다. 백은 이제 절박해 보일 정도로 강하게 영인을 붙들어 안았다.
연약한 내벽과 예민한 귀두가 마찰하는 쭙쭙거리는 소리만이 외설스럽게 반복되었다. 곧 백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었고, 이를 악물고 소리를 참던 백이 영인의 어깨 부근을 물고 빨며 신음했다.
영인은 이 일련의 과정으로 마치 백과 한 몸인 어떤 존재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잘 맞물린 톱니바퀴나, 끊임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유기적이면서 기계적인 흐름이었다.
영인은 백이 너무 좋아서, 언제나 백이 되고 싶었다. 백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었다. 백과의 섹스는 쾌락이나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런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영인이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찰나의 시간이었다.
지금 영인은 백의 일부였다. 완전히 종속되었다.
영인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직하게 신음했다. 백이 그 소리를 찾아 간신히 영인에게 입 맞추었다.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서로의 숨과 목소리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이름과 숨길 수 없는 사랑을 주고받았다. 어느 것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도 없었고, 더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처음 들려서 박힐 때 들었던 공포와 긴장 때문인지 되레 백의 사정이 늦어졌다. 먼저 사정한 쪽은 영인이었다. 진득한 영인의 정액이 백의 안을 채웠지만, 영인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까보다 더 질척이고 습한 움직임이었다. 피부가 맞닿은 모든 곳에 열이 올랐다. 백이 자꾸만 미끄러지려는 팔을 단단하게 다잡았다.
“하윽, 영인아, 더, 조금만 더. 아아, 아흣!”
백이 안긴 채로 몸을 들썩였다. 허리를 움직이다가 멈추더니 또 꿈틀거렸다. 영인이 아까보다 더 백을 세게 안아 그 움직임을 봉쇄했다. 바닥에 박히기라도 할 기세로 하체에 힘을 주고 백이 원하던 곳을 찍듯이 올려붙였다.
백의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눈을 감고 인상을 찌푸린 채 백이 울부짖듯 신음했다. 구멍도 멋대로 벌름거리며 영인의 성기를 조이듯 물다가 안에 있던 정액을 찔끔찔끔 뱉어 냈다.
“흐아악, 그, 그만. 그만! 흣.”
백의 외침에 영인의 움직임이 끝났다. 영인이 멈추었음에도 백은 숨을 마시기만 할 뿐 쉽사리 내뱉지 못했다. 사정하지 않았음에도 쾌락이 한계까지 몰아쳤다. 백은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영인이 조심스럽게 품 안에 있던 백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기절할 것 같더니 이제는 미친 듯이 잠이 쏟아졌다. 도무지 잠들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영인은 백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정하지 못하고 발기가 살짝 풀린 백의 귀두 끝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수면의 늪에 빠진 듯 완전히 늘어져 있던 백의 몸이 크게 펄떡였다.
“아, 영인아!”
백이 간신히 팔에 힘을 주고 상체를 뒤로 물렀다. 영인이 상처 받은 얼굴로 백을 보았지만, 백은 단호했다.
“우리 시간 많아. 응?”
백이 자꾸만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영인이 반사적으로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백은 통증을 느꼈다. 영인은 백의 얼굴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는데, 그러는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영인아, 나 아파.”
백이 영인에게 잡힌 발목을 가볍게 까닥였다. 그제야 영인이 이성을 찾은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백을 놓아주었다. 백의 발목에 붉게 영인의 손자국이 떠올랐다.
“…미안해요, 형.”
이번에는 백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백이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발목을 힐끗 보더니 금세 영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기야, 뭐가 그렇게 부족하고 불안해?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영인의 턱을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받쳐 들고 백이 물었다. 일견 능글맞아 보이기까지 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자기야’라는 호칭에, 백의 손길에, 질책하지 않는 태도에 영인은 몸 둘 바를 찾지 못했다.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고, 입가가 비틀렸다.
“어, 영인아!”
그때였다, 백의 얼굴에서 여유로움이 사라진 것은. 눈만 살짝 치떠 백을 보는 영인의 얼굴에 핏기라고는 없었다.
“너 코피 나.”
백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으로 영인의 코를 훔쳤다. 후드득, 붉은 피가 쏟아졌다. 영인이 재빨리 백의 손을 치우고 자신의 코를 감싸 쥐었다.
“여기 의사 있어. 불러올게.”
백이 잡히는 대로 옷을 챙겨 입고는 전화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백이 완전히 멀어지기 전에 영인이 그런 백을 잡아 세웠다.
“원래 코피 잘 나요. 곧 멎을 거예요.”
다른 사람이 오는 것은 싫었다. 말을 마친 영인이 다시 백의 발목을 보았다. 아무래도 멍이 들 것 같았다. 오늘 백은 멍이 들고, 자신은 피를 흘렸다. 모두 자기 때문이었다.
한심하게 첫날밤을 망쳤다고 영인이 자책하는 순간을 백은 놓치지 않았다.
백이 긴 팔을 뻗어 영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영인의 옆얼굴이 백의 말랑하면서도 탄탄한 가슴팍에 완전히 닿고서도 백은 영인을 풀어 주지 않았다.
두근두근,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울렸고 영인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금씩 자책과 초조함, 후회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희미해졌다.
“설마 아직도 불안해? 너는 우리 관계에 확신이 안 생기는 것 같아. 결혼반지로도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각자 이름을 문신이라도 할까?”
백의 자조 섞인 질문에 영인의 눈이 반짝였다. 겨우 고개를 위로 꺾자 보이는 것은 백의 단단한 턱이었다. 백이 영인의 움직임을 읽고 자신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농담 삼아, 위로 삼아 던진 말에 영인이 진심으로 반응했다는 것을 백은 그 짧은 눈 맞춤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진짜로?”
백이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눈을 찡그리듯 웃었다. 영인은 정말 어려운 사람이었다.
분명 별일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백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결국 의사를 불렀다. 휴양지의 의사는 정말 휴양지의 의사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태양을 많이 보는 게 분명한 피부색으로 다정하게 웃으며 영어로 증상을 물었다. 특유의 영어 억양마저 이곳이 집이 아님을 상기키셨다.
영인은 그저 피곤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고, 의사는 진통제와 냉찜질용 얼음팩을 주고 떠났다. 혹시 어지럽거나 피가 멈추지 않으면 꼭 다시 연락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고서.
“나 폭력 남편인 줄 알겠다. 그치?”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영인의 콧대에 수건을 두른 얼음팩을 가져다 대며 백이 말했다. 영인은 그저 눈을 감고 미소 지을 뿐이었다.
피부가 약한 편이었는지 백의 발목에는 그대로 멍이 들었다. 다음 날 해변에서 리조트 직원이 사진을 찍어 줬고, 그렇게 멍은 영원히 기록되고 말았다.
영인은 수림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수림은 대수롭지 않게 그런 영인의 뒤를 따라가 집 소개를 종용했다.
* * *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 과일과 맥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곯아떨어진 사람은 영인이었다. 처음에는 영인이 양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괴고 있어서 졸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워낙 말이 없는 편인지라 술자리에서 수림과 백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기도 했고.
“어머, 얘 잔다.”
영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수림이 백보다 먼저 영인이 위장한 채로 잠든 사실을 눈치챘다.
취기가 적당히 오른 백이 조심스럽게 영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단단하게 굳은 목 언저리를 가볍게 풀어 주며 백이 천천히 영인의 몸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영인아, 편하게 자.”
영인은 눈을 뜨지 않고 그 손길에 몸을 맡긴 채 그대로 백의 허벅지 위로 쏟아지듯 쓰러졌다. 백은 자신의 허벅지에 놓인 영인의 머리가 편하도록 자세를 다시 잡았고, 영인은 가뜩이나 넓은 어깨를 열심히 구겨 가면서도 백을 떠나지 않았다.
“편한 거 맞아?”
수림이 그 꼴에 혀를 차며 물었다. 백도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그러면서도 영인의 뒤통수와 보드라운 귓불을 자연스럽게 쓰다듬으며 영인이 더 깊은 잠에 빠져들도록 도왔다. 수림이 없었다면 자장가까지 부를 기세였다.
“정리 좀 해야겠다.”
수림이 파장의 기운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빈 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내버려 둬. 내가 치우면 진짜 금방 할 건데. 커피 한잔 마실래?”
“치우지는 말고 커피는 내려오라는 거지?”
백이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턱짓으로 자기를 베개 삼아 베고 누운 영인을 가리켰다.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림이 물보다 얼음이 많이 들어간 아메리카노를 백에게 건넸다. 백이 미소 지으며 고맙다는 식으로 고개를 까닥이자 수림이 유리잔을 들어 보이며 응답했다.
결혼에 신혼여행에, 좋은 일만 있었을 백인데 이상하게 피곤해 보였다.
“답지 않게 지쳐 보여.”
수림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하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런가?”
백이 자신의 턱을 손바닥으로 쓸어올리며 되물었다. 시끌벅적 웃음이 가득하던 시간이 끝났다. 고요가 찾아왔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백과 수림은 이런 예기치 못한 정적마저 평화로 받아들일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내가 믿음직한 스타일은 아닌가?”
그 평화를 먼저 깬 이는 백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백이 수림에게 물었다. 백의 뜬금없는 질문에 수림은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살면서 들은 말 중 가장 이상한 질문이었다.
“뭐래. 내가 지금 이 일을 하는 건 다 노빠꾸에 대한 믿음 하나 때문인데. 나 사람 잘 안 믿는 거 알지?”
수림의 단호한 대답에 만족한 것인지 백이 더 해 보라는 듯 손을 까닥이며 고개를 틀어 수림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수림이 푸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백도 미소 지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공허해 보였다.
“왜?”
이상을 감지한 수림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되물었다. 아까보다 낮고 차분한 음성이었다. 백이 동그란 얼음을 사탕처럼 입 안에서 굴리다가 어금니로 깨물었다. 파삭, 얼음이 깨졌고 파편은 금세 녹아 사라졌다. 작은 얼음의 냉기가 주는 얼얼함도 길게 가지 않았다.
“영인이가 아직도 불안한가 봐. 예전에는 영 혼자 삭이는 거 같더니, 요즘에는 내색은 하니 그건 좀 다행인 건가?”
백이 유리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엄지로 쓸어 닦았다. 더는 물방울이 없는데도 그 행위를 반복했고, 수림은 아까보다 편하게 소파에 몸을 기댄 채 그런 백과 백에게 기대 깊게 잠든 영인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이럴 것을 알고 시작한 사랑이었음에도 막상 아무리 쏟아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아귀 같은 영인의 내면이 백은 슬펐다. 안쓰러웠다. 그리고 좀처럼 느낄 일이 없던 무력감도 들었다. 체념과 좌절이라는 백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이 짙어져만 갔다.
“가끔 영인이는 나를 이상하게 봐. 내가 아무리 증명해도 언젠가 훌쩍 떠날 사람처럼 굴 때가 있어. 내 실체를 믿지 않는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믿는데 왜 영인이는…….”
자신의 손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야기를 이어 가던 백이, 말을 잠시 멈추고 수림을 보았다. 수림의 믿음, 다른 직원들의 믿음, 학생들과 학부모, 타인의 믿음을 받는 일에 익숙했다. 그 믿음을 저버린 적은 거의 없었고.
“그런데 왜 영인이는 그러지를 못할까?”
깊은 잠에 빠진 영인의 고른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백은 영인의 이마 근처에 자신의 손을 가져가 영인의 눈 근처를 가려 주었다. 물론 행여 영인이 깰까 염려해 직접 피부가 닿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였다.
그러자 밝은 조명을 가려 주는 훌륭한 그늘이 완성되었다. 어쩐지 영인도 아까보다 한결 편해 보였다.
수림도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단숨에 털어 마셨다. 딸려 온 얼음 두어 알을 깨물면서도 영인과 백을 지켜보았다.
백은 영인을 사랑하고, 영인을 잘 알지 못한다. 영인이 그러기를 원했겠지. 수림이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로 혀를 찼다.
“그건 아니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는지 백이 수림을 보았다. 피곤이 적당히 내려앉은 백의 얼굴은 서늘해 보였다. 굳게 다문 입도, 반듯한 이마와 잘 뻗은 콧대도 모두 그랬다.
“영인이가 못 믿는 건 노백이 아니라 강영인이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얘가 대표님을 못 믿으면 지금 여기서 이렇게 쿨쿨거리고 잘 리가 없지. 영인이는 원래 그래. 자기를 믿질 않아. 미워하는 거 같기도 하고…….”
수림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여기서 더 이야기하는 것은 월권 같았다. 영인의 과거를, 자신이 목격한 백 이전의 연애와 삶을 수림이 말할 수는 없었다.
수림이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럼 그게 더 문제네. 그게 더 문제야.”
수림의 두루뭉술한 답변을 들은 백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기껏 미로를 통과했더니 끝도 없는 벽을 만난 기분이었다.
수림이 가방까지 챙기자 그 기척에 백이 눈을 떴다.
“대리 불러줄게. 같이 나가자.”
“됐어. 그쪽 애기나 잘 챙기세요.”
수림이 성가시다는 듯 손사래를 치고는 곧장 대리기사를 부르는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백이 피식 웃고는 세상모르고 잠든 영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우리 애기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뭐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 * *
백은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인이 조금이라도 더 편해지기를 바라며 안식과 안정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언제나 어떤 일이든 결정했다.
무엇보다 신경 쓴 부분은 남녀관계였다. 왜 남녀관계냐면 이제 영인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경계했기 때문이다. 자기 딴에는 내색하지 않는다고 노력했지만, 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노력 때문에 더욱 짠하고 마음이 쓰였다.
백의 사업이 커질수록 인간관계의 확장은 필연적이었다. 이제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백은 그냥 모든 것을 오픈했다. 영인은 언제든지 백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갑과 메일, 핸드폰까지.
‘너한테는 털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게. 내 업보다, 이렇게. 털고 또 털러 와도 그러려니 할게.’
그렇게 말한 날에는 금융인증서 비밀번호를 적은 쪽지와 인감도장을 굳이 영인의 서랍에 넣어 두었다.
그러니까 백 스스로 자신이 최선을 다한다고 자평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백은 그렇게 자부했다.
이 모든, 자발적으로 선택한 불편은 백을 기쁘게 해 주는 일들이었다. 그런 행위가 백에게도 부담이 되거나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영인의 퇴근 시간을 확인하고 때맞춰 백은 영인을 데리러 온 참이었다. 근처 공용주차장에 주차하는 시간까지 고려했기 때문에 여유롭게 영인이 요새 일하는 건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영인의 반응을 상상하며 기다리자니 즐거웠다. 어느새 9월 초순이었다. 가을 해는 뜨거웠지만, 그늘은 선선했다. 백은 잘 맞는 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해를 등지고 서 있었다.
만면에 가득했던 미소는 영인을 발견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영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영인의 옆에는 보폭을 맞추며 함께 걷는 여자가 있었다.
사실 백이 영인을 발견한 것보다 영인이 백을 발견한 것이 빨랐다. 영인의 보폭이 점점 커졌다.
“웬일이에요?”
“시간이 좀 남아서.”
백은 영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영인의 옆에 있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가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꾸벅, 백을 보고 인사했다. 백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영인을 보았다.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던 영인이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아, 같이 일하는 이유미 대리님이세요.”
유미도 영인을 보았다. 소개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영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머뭇거리는 영인을 대신해 백이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영인 씨랑 같이 일했던 노백이라고 합니다. 같이 저녁이나 먹으려고 왔어요.”
백은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소개했지만, 숨이 턱 막혔다. 바지 주머니 속에 꽂아 두었던 왼손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겨 재빨리 반지를 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영인은 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는데도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까지 태워드릴까요?”
백이 유미를 향해 물었다. 좋은 매너를 아우르는 여유가 느껴지는 백의 태도는 쉽게 타인의 경계심을 허물고는 했다. 유미도 미소 지으며 백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바로 옆에 주차해 뒀어요. 가시죠.”
차에 이르자 백이 습관적으로 조수석 문을 먼저 열어 턱짓으로 영인을 불렀다.
“옆에 타.”
역까지는 멀지 않았다. 백이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며 흘낏, 뒷자리에 앉은 유미를 보았다.
“강 과장님이랑 어디 가시던 길이었어요?”
“아니요, 소개팅 한 번만 하라고 꼬시던 중인데 철벽이에요.”
유미의 대답을 들은 백의 입에서 흠, 하는 소리가 나오자 영인이 백의 눈치를 살폈다.
“애인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영인이 백을 곁눈질로 보며 유미에게 말했다. 낮은 목소리가 웅웅, 차 안을 울렸다.
“귀찮아서 애인 있다고 거짓말하는 거죠? 사진도 안 보여 주고. 진짜 괜찮은 친구여서 그래요. 과장님도 좋은 사람이고.”
유미는 잊을 만하면 영인에게 소개팅을 권유했다. 그때마다 거절했지만, 오히려 시일이 지날수록 유미는 영인에게 이미 연인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강영인 과장님 여자친구 있어요. 내가 봤는데.”
백이 둘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말했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채였다.
“정말요?”
유미가 안전벨트를 한 상태로 최대한 몸을 앞으로 숙여 백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네, 진짜 예뻐요. 장난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사진도 잘 안 보여 줘요. 너무 예뻐서 아까운가? 보여 달라고 하면 엄청 화내요.”
백과 영인의 눈이 마주치자 백이 유미가 보지 못하게 눈을 살짝 찡긋거렸다. 영인은 당황스러운 동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백은 알고 있을까?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백은 너무 예뻐서 아까웠고,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연인이었다.
유미가 아쉬워하며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 그곳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방금까지 유미와 편안하게 대화를 하던 백이 입을 닫고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만 응시했다.
영인은 백이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낯선 백의 태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용기 내서 검지로 백의 뺨을 쿡 찔러 보았다. 이런 장난은 다 백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탄탄한 뺨 너머로 꽉 다물린 어금니가 느껴졌기 때문에 영인은 다시 당황했다. 자신이 감지한 이상한 기류가 착각이나 예민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백은 그런 영인을 달래 주지 않았다.
백이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분위기는 애매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하는 백은 평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이다가도 순간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영인의 기분이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맞고, 틀리고 결과를 알 수 없는 확률 게임 앞에서 작아지고 있었다. 틀리면 빈털터리가 되는 사람처럼 결과에 절박해지기 시작했다.
백이 웃는 모습을 보아야, 자신을 보고 웃어 주는 모습을 보아야 이 불편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말주변이 없는 영인이 노력해서 평소보다 많은 말을 붙여 보았지만, 백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할 뿐, 웃지 않았다.
이제 영인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불편함을 넘어선 불안이 찰랑거렸다.
영인이 목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스테이크를 썰던 백이 고개를 들어 영인과 눈을 마주쳐 주었다.
백이 웃어 주어야 안심될 것이다. 이 불안은, 두려움은 그것으로만 종식되리라.
주변을 살피며 영인이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영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까만 입 속 동굴과 붉은 혀가 드러났지만, 역시 쉽사리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백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그런 영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지도 않고 그저 바라봐 주었다.
“후….”
영인이 크게 숨을 내쉬었고 백은 여전히 기다려 주었다.
“자, 자기야. 왜, 왜 그래?”
힘겹게 말을 마친 영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귓바퀴부터 붉어지더니 이제 목덜미와 영인의 얼굴까지 모두 빨갛게 물들었고, 백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참아 보았지만,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귀여운 것은 귀여운 것이었다. 귀여운 것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감미로운 백의 웃음소리가 번져 영인의 귓가에 닿았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백의 기운이 영인을 순식간에 점령했고 번뇌를 몰아냈다.
그제야 서서히 고개를 들어 백을 본 영인이 마주한 것은 자신을 보는 백,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따스한 그의 눈빛이었다.
“그 말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어?”
백이 물었고, 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이 바지 주머니에서 아까 빼 둔 반지를 꺼내 자신의 왼손 약지에 꼈다. 그러고는 주변을 한번 살피고 속삭이듯 작게 말을 이었다.
“몰래 연애하는 거 같고 좋다, 자기야.”
장난스러운 윙크까지 보고서야 영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백은 바로 씻으러 들어가 버렸다. 영인은 닫힌 문을 보며 백이 웃었으니까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인 뒤 그가 벗어 둔 옷가지를 정리한 뒤 자신도 다른 욕실로 씻으러 들어갔다.
영인이 수건을 머리에 걸치고 나왔을 때 백은 영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인은 별다른 무늬가 없는 회색 파자마 하의만 입은 상태였고 백은 짧은 반바지에 면티를 입은 채였다.
체온이 높은 편이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백은 보통 집에서 이런 상태였고, 반대로 맨살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는 영인은 팔다리를 다 감싸 주는 옷을 입는 편이었다.
영인이 목덜미 근처 물기를 수건으로 닦는데 백이 다가왔다. 직장동료가 영인에게 소개팅을 주선하려는 것을 알고부터 백은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질투 비슷한 감정. 아니 바로 질투 그 자체.
백이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영인의 어깨를 누르며 밀어붙였다. 영인은 속절없이 밀려 뒷걸음질 치다 막다른 벽에 이르러서야 멈출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단속하면서 너는 이러고 다닌 거야?”
영인이 백에게 붙들린 채로 백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백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특히 ‘그렇게 단속’과 ‘너는 이러고’의 의미를.
영인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백은 불쾌했다. 질투는 유치하고 성숙하지 못한 감정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소개팅 때문에요? 어차피 저는 여자한테는 아무것도… 형이랑은 다른걸요. 형은 여자한테도 남자한테도…….”
영인의 진심을 듣던 백이 눈을 가늘게 뜨다 결국 피식,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에 영인은 바로 말을 멈추었다.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영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을 주워 담을 수 있다면 냉큼 무릎을 꿇고 주웠을 것이다.
이제 백에게 영인은 투명한 사람이었다. 다 들여다볼 수 있었다. 도무지 속이거나 가장할 줄을 몰랐다. 돌이켜보면 자신에게 상처 주고 도망칠 때도 그랬다. 지금이라면 그 어설픈 연기에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영인이 짠하고 귀여워 보이면서도 얄미웠다. 자신은 모든 것을 내주었는데 아직도 남자고 여자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한다니. 게다가 영인은 어지간히 매력 발산을 하고 다닌 모양이었다. 앙큼하게도.
“그래, 그러고 보니 요즘 덩치 큰 남자가 좀 다르게 보이기는 하더라.”
백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서 영인을 놓아주었다. 뒤돌아 가는데 이번에는 백이 영인에게 잡혔다.
“화났어요?”
“기분이 좋지는 않네.”
대답하는 백의 표정이 오묘했다.
백은 기분이 나빴다. 자기가 질척거리는 처지가 되고 보니 찝찝했다. 자신이 산뜻한 사람이라고 평생 여겨 왔는데 아직도 주제 파악이 안 된 모양이다. 씁쓸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감정들을 쉬이 밀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인과 직장 동료가 함께 나오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쭉 노력했지만, 결국 영인을 붙들고 따지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개운하지 않았다.
영인을 등지고 서 있던 백이 갑자기 몸을 돌려 영인을 마주 보았다. 영인은 필사적으로 백의 눈치를 보았다.
“영인아.”
“네.”
“반지 끼고 다녀.”
영인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백은 드디어 미소 지으며 영인의 뺨을 툭,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튼, 남은 감정은 자신의 몫이었다.
* * *
영인이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열두 시를 넘어 시간은 새벽 한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자질구레한 집 정리부터 빨래까지 할 일은 진작 다 했고, 무료한 기다림이 이어진 지 오래였다.
백에게 메시지를 보내 볼까 하는 생각에 핸드폰 액정을 보다가 이내 다시 꺼 버렸다. 백이 해 준 연락은 한 시간 반 전에 온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먼저 자고 있어. 금방 갈게.]
먼저 자고 있을 수도 없었고, 백은 금방 오지 않았다. 하나도 맞는 말이 없는 메시지였다.
영인이 두툼한 맨투맨과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습관적으로 모자를 눌러썼다. 숙취 해소제라도 사 둘 요량이었다. 이 시간까지 백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웬만큼 술을 마셨다는 신호였다.
종류가 다른 숙취 해소 음료 2개와 환으로 된 숙취 해소제까지 사서 바지 주머니에 되는대로 쑤셔 넣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백이 아니라 수림이었다.
“여보세요.”
-자고 있어?
“아니.”
옆에서 백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오라고 해, 오라고.’
-목소리 들리지? 노빠꾸 취했어. 너 부르래. 나올래?
“갈게. 주소 찍어 줘.”
‘영인아, 빨리 와. 보고 싶어.’
조금 멀찍이서 백의 부름이 들렸다. 집으로 향하던 영인이 곧장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바지 주머니가 무거워 달리기에 방해되자 다른 사람 눈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바지춤을 붙들기까지 했다.
택시에 올라타고서야 수림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목적지를 말하고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와, 진짜 빨리 왔어.”
수림이 달려온 듯한 영인을 보고 놀리듯이 말했다. 오늘 자리는 주성이 자기가 한턱내겠다고 백과 수림을 불러낸 것이었다. 영인에게만 연락이 오지 않았으므로 백이 함께 가자고 했지만, 영인은 거절한 터였다.
“우리 영인이 왔네.”
백이 취기가 오른 얼굴로 헤실헤실 웃으며 영인을 반겼다. 함께 가기는 거절했지만, 보내 놓고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형은 영화전자 사람들 만나면 이렇게 과음하더라.”
영인이 백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수림에게 말했다. 따지는 듯한 뉘앙스였다.
“여기 억지로 노백 술 먹인 사람 없다.”
수림이 억울하다는 듯 얘기했고, 동조를 구하듯 주성을 보았다. 주성도 웬만큼 마셨는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는 평범한 영화전자 사람이라기에는 좀 더 돈독한….”
이어지는 주성의 말을 끊은 이는 영인이었다.
“데리고 가야겠다.”
영인이 무뚝뚝하게 말을 마치고는 백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 같이 정리하자.”
수림이 벗어 둔 외투를 챙겨 입으며 말했고, 주성은 아쉬운 듯 꾸벅꾸벅 조는 백을 살펴보았다. 영인이 그런 주성과 백 사이에 서서 백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어 아이를 일으키듯 일으켜 세웠다.
“간지러워.”
실실 웃으며 백이 그 손에 몸을 맡겼다. 배알이 꼴려 죽을 지경인 영인의 속도 모르고서.
일어선 백이 가볍게 영인을 밀어 길을 트고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성도 급하게 지갑을 챙겨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마음이 급한지 테이블에 부딪치고 발을 헛디뎌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영인이 가볍게 혀를 차고서는 백이 떠난 자리를 훑었다. 백이 잊고 간 것이 없나 꼼꼼히 확인하고서야 그 뒤를 따랐다. 백이 남기고 간 것은 없어 보였다.
상가 밖으로 나가자 백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주성의 스쿼트 자세를 고쳐 주고 있었다.
“또 시작이야.”
수림이 킬킬거리며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감상했다.
“저 PT 등록했어요. 이제 잘해요.”
주성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자기 가슴에 양손을 포개고는 천천히 앉았다가 같은 박자로 일어서자 백이 손뼉 치며 환호했다.
“그렇지, 뒤꿈치에 힘을 주고 쭉. 중량 올릴수록 중요한 게 복압이야.”
백이 다시 앉는 주성의 아랫배를 손으로 눌러 본 뒤 고관절이 제대로 접혔나 보고 힘이 들어간 부위를 차례로 만지며 확인했다.
“안 그러면 허리 나가.”
그러고는 자기를 보란 듯이 숨을 들이마시고 손가락으로 아랫배를 가리켰다. 주성이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탄탄한 백의 아랫배를 만진 뒤 감탄했다. 확실히 단단했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는 영인뿐인 듯했다. 영인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간신히 다스리고 백에게로 다가섰다.
“형 허리나 걱정하지. 집에 가요.”
“흐, 잠시만.”
영인과 눈이 마주치자 또 실없이 웃던 백이 똑바로 서서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이며 지갑을 찾았다. 그리고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여러 장을 꺼내 주성에게 건넸다. 일부러 준비한 깨끗한 새 돈이었다.
“봉투에 넣는 걸 깜박했다. 주승이 파이팅! 형이 주는 용돈.”
주성이 밥 사고 술 산다고 쓴 돈보다 확실히 더 많았다.
“우와, 박주성 씨 좋겠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
수림이 호응했고, 주성도 감격스럽다는 제스처를 격하게 하며 백에게 재롱을 부렸다.
“나도 줘요.”
영인이 백에게 큰 손바닥을 들이밀며 말했다. 퉁명스러운 음성이었다. 백이 히죽 웃으며 지갑을 여는 척을 하다가 그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안 줄 건데.”
“왜요?”
“네가 내 동생이야? 용돈 받게? 동생이야? 동생 할래?”
“아니요.”
영인이 제 손에 올라온 백의 손을 꽉 잡아 쥐었다. 그 둘의 대화를 듣던 주성이 대번에 인상을 쓰며 아까까지 소중하게 쥐고 있던 돈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백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우리 남편 거의 다 왔대. 나 먼저 간다!”
수림이 도무지 헤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자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안녕을 고했다.
백이 말없이 손을 흔들었고, 영인도 알았다는 듯 눈인사를 했다.
“주성이도 택시 타고 가. 택시비도 줄까?”
“이제 책임님이 주는 돈 안 받을 거예요.”
주성이 입을 삐죽 내밀고 대답했다. 백이 킥킥 웃었다.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회사 생활 잘해. 실수하지 말고.”
“잘하면 뭐 해.”
주성이 못마땅한 얼굴로 대답했다. 더는 백과 직장 동료로도 묶이지 못하는 현실이 싫었다. 백이 그만둔 뒤로는 실낱같이 있던 일에 대한 욕심이나 보람도 사라졌고, 영화전자의 일원이라는 자부심도 죽어 버렸다.
“잘해서 나중에 형 회사 영화에 꽂아 줘야지. 교육 지원으로. 쭉쭉 올라가. 쭉쭉. 알았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발장난을 치던 백이 순간 중심을 잃고 삐끗했다. 영인이 이제는 못 참겠다는 얼굴로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백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업혀요.”
백이 숨을 깊게 마시고 내쉬었다. 술 냄새가 났다.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이상하게 이전 회사 사람들을 만나면 조절이 잘 안 됐다. 그래서 이제는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 힘들 텐데.”
영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백을 기다렸다. 백도 더 말을 더하지 않고 그대로 영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업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인에게는 업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주성이도 잘 가.”
백이 영인에게 업힌 채로 주성에게 인사했다. 영인은 주성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주성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주성은 그런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뒤돌아서서 자기 갈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백이 가는 길과는 확실히 달랐다.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왔어.”
백이 영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기까지 나올 줄 몰랐어요. 편의점이나 다녀오려고 나온 건데.”
“갑자기 네가 너무 보고 싶더라고.”
백이 눈을 감고 완전히 영인에게 기댔다. 영인은 온전히 느껴지는 백의 무게와 체온이 좋아서 아까까지 느꼈던 불쾌함을 멀리 날려 버렸다.
‘보고 싶더라고.’
백이 같은 문장을 한숨처럼 반복해서 말했다. 영인은 괜스레 콧잔등이 찡해져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누구한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대로변까지 나오고도 영인은 한동안 택시 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도롯가에 서서 빠르게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빈 택시가 지나가는데도 손을 흔들지 않았다.
백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잠시 이렇게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신경하고 둔한 애인의 칠칠치 못한 행동도 다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좋았다.
이대로 세상이 멸망해 버린다고 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 * *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였다. 백은 영인이 마련해 준 공간에서 운동 중이었다. 풀업 바로 팔을 뻗었다. 영인은 잠자코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바를 잡은 그립을 몇 번이고 고쳐잡고는 백이 숨을 들이마시고 자신의 몸을 들어 올렸다. 상하로 움직이는 속도는 일정했지만, 횟수가 늘어나자 힘든지 백의 입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백의 등 근육 움직임이 선연하게 보였고 영인은 조용히 그 모습을 감상했다. 백의 취미가 운동이라면 영인의 취미는 이쪽이었다. 바로 구경, 아니 감상.
백이 세트를 마치고는 내려와 몸을 이리저리 틀어 근육을 풀며 거울을 보았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뒤에 있는 영인과 눈이 마주쳤고 백은 웃었다.
“너도 해 봐.”
백의 권유에 영인이 백에게 다가갔다.
“그냥 매달리면 돼요?”
“그냥 매달리면 안 되지.”
백이 차고 있던 그립을 풀며 대답했다. 그리고 친절하게 영인의 손목에 헬스용 그립을 조심스럽게 채워 주면서 말을 이었다.
“너는 나 정도는 업고 해야 운동이 되지 않겠어?”
그러고는 바로 영인의 등에 훌쩍 뛰어올라 매달렸다. 영인도 익숙하게 그런 백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받쳐 주고 나머지 손으로 풀업 바를 잡았다.
“양손으로 잡아.”
백이 두 다리로 영인의 몸통을 단단하게 감쌌다. 고목 나무의 매미라기에는 백이 너무 컸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그만큼 전반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였다.
백을 등 뒤에 매단 채로 영인이 풀업 바를 잡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몸을 끌어 올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만세를 한 채로 영인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백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빈틈없이 맞닿은 백의 가슴팍과 영인의 등 사이를 백의 웃음이 울렸다. 영인이 눈을 감았다. 백의 무게도 체온도 이 웃음소리도 진동도 모두 너무 행복해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백이 훌쩍, 영인의 등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영인은 갑자기 가벼워진 몸이 아쉬워 입맛을 다시며 통화하는 백을 돌아보았다. 백은 눈이 마주치자 입 모양으로 ‘잠시만.’이라고 한 뒤 방을 나섰다.
발신자는 백의 엄마, 오정희였다. ‘어머니’라는 발신자를 보며 백이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가족들과 더욱 소원해지던 차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이자 흉이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백도, 정희도 웬만해서는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네.”
영인은 방 안에 서서 백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아, 나 지금 서울 가고 있어. 너 이사한 지가 언젠데 내가 이제야 너 어떻게 사나 보러 가네. 정확한 주소 좀 메시지로 보내. 금방 서울 들어가.
갑작스러운 정희의 말에 당황한 백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미동도 없이 자신을 지켜보던 영인과 눈이 마주쳤다. 백이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기에 영인의 평정심도 금세 깨졌다.
“이렇게 갑자기요? 집에 제가 없으면 어쩌시려고요.”
-너 일요일은 쉰다며. 그리고 너 없으면 나 네 집도 못 들어가나? 너 좋아하는 밑반찬이랑 국 좀 끓여 왔어. 얼른 주소 보내 줘. 나 운전 중이라 통화 길게 못 해, 끊는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고 백은 이미 통화가 종료되었다고 표시된 액정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영인이 천천히 그런 백에게 다가섰다. 백의 반응으로 보았을 때 달갑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무슨 전화였어요?”
영인이 조심스럽게 백의 어깨를 뒤에서 안으며 물었다. 백이 자신의 목 아래를 넉넉히 감싸는 영인의 팔뚝을 토닥거리며 대답했다. 얼빠진 목소리였다.
“지금 어머니가 온다는데. 어떻게 하지?”
영인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백을 위로하려고 그를 안았는데 순식간에 입장이 반대되었다.
영인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나 백이 단단히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둘의 자세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 상태로 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걸리고 널려 있는 결혼식 사진은 말할 것도 없었고 살림살이에서도 둘이 사는 집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어쩌죠? 사진부터 치울까요?”
귓가에 낮고 음울한 영인의 음성이 울렸다.
“사진을 치우면 다음엔? 뭘 치울래?”
백이 되물었다. 한 손으로는 영인의 팔뚝을 잡았고, 나머지 손으로는 영인의 손목을 옭아맸다. 뒤통수를 영인의 쇄골과 목 언저리에 기대며 백이 영인을 보았다.
영인은 눈을 내리깔고 그런 백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제 옷이랑 신발도 치워야겠죠.”
“그리고 마지막엔 널 치우고?”
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가실 때까지 근처에서 지내고 있을게요.”
영인의 대답을 들은 백이 잠시 침묵했다. 짧은 고민이 이어졌고 이내 백은 결정했다.
“그러지 말자.”
백이 영인을 붙들고 있던 손을 모조리 놓고 완전히 뒤돌아서서 영인을 보았다.
“우리 그러지 말자, 영인아.”
영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백은 이미 모든 것을 정한 눈을 하고 있었는데 영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지 말자니.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부터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자신은 백의 빛나는 인생이 지닌 유일한 오점이었다. 백이 선택한 오답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자신이 백의 곁에 있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백을 거부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백의 허점인 자신도 백의 일부였기에 오히려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이에게 들키는 일은 조금 달랐다. 영인은 영원히 더는 누구에게도 백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그의 가족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사라지고 싶었다.
“시간 없어요. 사진들이랑 짐은 우선 차에 갖다 둘게요.”
잔뜩 굳은 얼굴로 떠나려는 영인의 손목을 백이 다시 가볍게 잡았다. 영인이 충분히 뿌리칠 수 있으면서도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책망하는 표정으로 백을 보았다.
“그러지 말자고. 그냥 얼른 씻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어.”
“왜요? 남자랑 살림 차렸다고 자랑이라도 하려고요? 아니면 친구인 척하고 있으라고요?”
영인의 성난 음성에도 백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저런 사진 같이 찍는 친구가 어디 있어. 반지도 껴.”
“후, 진짜 왜 이래요?”
“너 숨기기 싫어. 거짓말하는 것도 싫고. 마음 같아서는 영인아, 너희 회사에도 우리 학원에도 다 말하고 싶어. 근데 그건 내가 참아 볼게.”
백이 이번에는 진짜로 웃었다.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는 영인을 보았다. 이런 백의 노력에도 영인은 조금도 편안해지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못 해요. 형 어머니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을 수 없어요. 제가 어떻게 그래요. 그러라고 하지 말아요.”
백은 백이었고, 영인은 영인이었다. 백은 본래 물러섬 없이 돌진하는 사람이다. 영인은 회피하는 것이 편한 사람이다. 지금도 그랬다. 각자 자신다운 행동을 하고자 할 뿐이었다.
“내가 너한테 뭐 강요한 적 있던가?”
백의 뜬금없는 질문에 영인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우리 관계를 위해서 뭔가 요구하거나 조건을 건 적은?”
없었다. 영인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너 지금 엄청 도망치고 싶은 마음인 건 알겠는데, 이번에는 내가 강요 좀 할게. 오늘은 내 옆에 있어. 부탁 아니야. 이거 완전 강요야.”
영인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마구 흔들렸다. 백은 다시 한번 강한 어조로 반복해서 말했다.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영인아, 버텨. 그냥 버텨. 날 위해서.”
영인은 이제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다. 손바닥에는 자꾸만 식은땀이 맺혔고 팔다리에서는 힘이 빠졌다.
이 상황이 버거웠다. 백의 말이 맞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사라지고 싶었고 모든 것을 없던 일처럼 숨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영인은 절절히 느꼈다. 백의 맑은 눈을 마주하며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백을 거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영인의 본성을 완전히 거스르는 일일지라도.
깊은 한숨을 내쉬는 영인의 등을 백이 쓸어 주었다. 영인에게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백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인을 숨기고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은 한정적이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후회가 남기 마련이었다. 백은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영인을 숨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진실을 알린 후 찾아올 폭풍을 감당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영인이 버텨야 했다. 영인은 그것을 배워야 했다. 백은 그렇게 만들 작정이었다. 언젠가 자신이 영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영인이 버텨 나가기를 바라기도 했고.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 만큼 오랜 시간 그를 달랜 후에야 백은 손님맞이를 위한 준비를 하러 떠났다.
남겨진 영인은 아플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눈을 감았다. 각오를 다지는 듯했지만, 힘찬 기세보다는 우울함과 무력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성윤, 아니 백아…….”
정희는 아들이 이룬 거룩한 성과에 놀랄 기대로 상경했다. 보란 듯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할 거라고 했던 백의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지금, 정희는 분명히 놀랐다. 예상과는 다른 놀람이었다. 현관에 들어서 긴 복도를 지나는 걸음걸이가 점차 느려졌다. 양쪽 벽 작은 조명 아래 걸린 사진들은 지금 백의 곁에 있는 남자가 결코 백의 친구가 아님을 반복해서 알려 주고 있었다.
정희가 예복을 맞춰 입고 같은 반지를 낀 채 나란히 선 둘의 사진 앞에서 마침내 무너졌다.
백이 재빨리 정희의 뒤로 가서 그를 부축했다. 파리한 안색의 정희가 멍하니 백을 보았다. 눈가가 붉어졌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핏기 없는 입술로 간신히 숨을 내뱉고도 한참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너한테 잘못해서 이러는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부모한테 못 박으려고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냥, 그냥 그렇게 된 거예요.”
영인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앞으로 맞잡은 채 서 있었다. 차마 두 사람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모든 일의 원흉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턱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다. 어쨌든 지금은 버텨야 했다. 백의 어머니의 슬픔과 비탄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견뎌야 했다. 백이 그것을 원했으므로.
“엄마, 속일 수도 있었어요. 아닌 척할 수 있었는데 안 그런 거예요.”
백이 정희를 데리고 천천히 소파로 이동했다. 영인은 현관 근처에 널브러진 정희가 가져온 것들을 치울까 고민하다가 그냥 백의 뒤를 따라갔다. 자신의 손이 닿으면 정희가 싫어할 것 같았다.
“영인아, 우리 선물로 들어온 차 있지? 한 잔만 내려다 줘.”
영인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은 하얗게 질린 엄마와 그 못지않게 창백한 자신의 연인을 보며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왜? 어째서?”
정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백을 보았다.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도르륵, 흘렀고 그것을 시작으로 막을 수 없는 울음보가 터졌다.
영인이 가져다준 머그잔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정희가 엉엉 울었다. 따뜻한 무엇이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의 체온이었지만, 차 한 잔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정희의 온몸이 떨렸기 때문에 컵도 마구 흔들렸고 향긋한 내음이 나는 차가 넘칠 듯 출렁거렸다. 영인은 그 위태로운 모습을 잠깐 보다가 눈을 감았다. 볼 안쪽을 아프게 씹었지만,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꿈일지도 몰랐다. 몹시 나쁜 꿈.
“말씀드렸잖아요. 그냥 그렇게 됐어요. 그리고 요즘 정말 잘 지내고 있어요. 행복해요.”
“…행복해?”
“살면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던 거 같아요. 어머니한테는 이런 이야기 죄송하지만 돌이켜보면 형이 아프고부터 온전히 행복했던 적이 거의 없었어요.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말을 마친 백이 시선을 영인에게로 돌렸다. 잔뜩 굳어 있던 영인도 백의 말에 놀랐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백을 보았다. 백은 한편으로는 슬퍼 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개운해 보였다.
“그렇구나. 너도, 그랬구나.”
천천히 말을 내뱉은 정희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말없이 서 있던 영인이 용기를 내 정희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정희는 불쑥, 제 눈앞에 나타난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도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고서야 손수건을 받아들고 엉망이 된 눈가를 꾹꾹 찍어 닦았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었다.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내가 조금만 잘했더라면 더 나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와 상실감 그리고 그리움.
수많은 감정이 때로는 폭풍처럼 들이닥쳤고, 때로는 끝 모를 호수처럼 잔잔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차라리 이런 아픔은 나았다. 정희는 이것을 마땅히 감내해야 할 고통으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아프지 않은 것이 죄스러운 일이었다.
힘든 일은 따로 있었다. 자식을 잃은 어미를 향한 사람들의 판단과 평가가 그러했다.
성윤의 죽음 이후 정희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들을 잃은 불쌍한 엄마로 불리고 기억되었다. 그 사실은 크지 않은 동네에서 절대 희미해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성윤 엄마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별 뜻 없이, 습관처럼 부르던 그 호칭은 점점 정희에게 멸칭으로 느껴졌다. 아들을 잃은 엄마가 아니라 아들을 지키지 못한 엄마라는 비난으로 들렸다.
자랑스러웠던 성윤 엄마라는 호칭이 성윤이 사라지자 무거운 굴레로 변한 셈이었다. 그렇지만 정희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언제나 슬픔과 비탄을 드러내며 마땅히 성윤 엄마로서 보여야 할 태도를 지켜 나갔다.
그 거대한 상실은 분명히 그의 삶을 압도하였으나 그럼에도 삶은 때때로 아주 찰나 같은 기쁨을 혹은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말라 죽은 줄만 알았던 묘목의 가지에서 푸른 새순이 나던 순간이나 해 준 것도 없는데 늘 잘해 주던 둘째 아들의 성취, 어쩌다 발견한 취향에 맞는 그릇이나 책, 영화 같은 존재가 그랬다.
그런 행복을 어쩌다 마주하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갈 때면 정희는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제 입을 가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자식을, 그것도 장남을 잃은 여자가 그런 웃음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선고가 반평생 그를 짓눌러 왔다.
그래서 한 번씩 정희는 그렇게 가 버린 성윤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원망은 곧 더 큰 원망으로 변해 자신에게 날아왔다.
‘어떻게 감히 내가 성윤이를 원망했을까?’
황폐해진 삶은 정희로부터 많은 것을 앗아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러모로 자격이 없었다. 밥을 먹을 자격, 편히 잘 자격, 쉴 자격, 즐거울 자격 그리고 살아갈 자격.
정희는 이미 진작 떠나보낸 성윤의 이름으로 백을 부르며 수없이 죽어 갔다.
이제야 제대로 된 백이 엄마 노릇을 하려고 했는데 때가 늦어도 한참 늦었다. 백은 이제 엄마가 필요한 아이가 아니었다. 정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희는 말도 안 되는 삶을 선택한 백을 바라보다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백은 자기 말대로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비로소 정희는, 자신의 반짝이는 둘째 아들을 보며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의 몫인 줄만 알았던 그 모든 굴레를 스스로 벗어 버릴 수 있음을. 세상 사람들이 정해 준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셈이었다, 남자와 결혼한 자기 아들을 보면서.
정희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정희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백이 조용히 일어서서 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격렬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길고 큰 울음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백은 엄마의 마른 어깨를 감싸 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정희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선전포고했다. 결연하게 느껴지는 짧은 발언이었다.
“이혼할래.”
영인은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백은 처음부터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오히려 환영하는 기색이었다.
“그래, 어머니 인생 살아요. 성윤이 엄마 하지 말고 백이 엄마도 하지 말고 노민욱 아내도 하지 말고 며느리 노릇도 하지 말고 오정희로 살아요. 그러세요, 어머니.”
자신을 지지하는 아들의 응답에 정희가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퍽 소리가 나게 치며 신음했다. 이 복잡한 감정과 통한을 소화하려고 몸부림쳤다.
영인은 차마 그 모습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자신마저 고통스러웠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뜨끈해진 눈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정희가 진정하기까지는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정희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둘이 찍은 사진 하나만 줘라.”
“마음에 드는 거로 가져가세요.”
“아니, 제일 큰 거로 줘. 나중에 집에 걸어 둘래.”
백이 영인에게 눈짓하자 반쯤 돌아서 있던 영인이 어떻게 알고는 바로 가장 큰 사진이 걸린 액자를 가져왔다. 결혼식 사진이었다.
영인이 머뭇거리며 액자를 들고 정희의 앞으로 갔다. 정희가 액자를 든 영인의 손을, 팔뚝을, 어깨를 그리고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강영인 씨라고 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다음에 밥이나 한번….”
정희가 끝내 말을 잇지 못했고 영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이 자고 가라고 했지만, 정희는 한사코 거절했다. 결국, 백이 잘 아는 대리기사를 붙여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정희가 문제없이 떠나는 모습까지 보고 백은 집으로 돌아왔고, 그동안 영인은 정희가 해 온 음식들을 정리해 둔 상태였다.
“수고 많았어, 고맙다.”
백이 영인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다시 제 등에 찾아온 백의 무게와 체온에 영인은 안심했다.
“영인아, 이번처럼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네가 이렇게 잘 버텼으면 좋겠어. 너는 버티기만 하면 형이 다 해 주잖아?”
백의 이어지는 말을 들은 영인이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백이 영인의 등에 완전히 얼굴을 묻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가려진 표정은 여유롭고 장난스러운 음색과는 달리 사뭇 진지했다.
“그러니까 버텨. 알았지?”
“알았어요. 잘 버텼으니까 상 주세요.”
“상? 나로는 부족해?”
백이 뻔뻔하게 대답했고 영인은 작게 웃었다. 부족할 리가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산산이 부서지고 조각나서 바람에 휘날려 사라지고 싶었는데 이제는 버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요, 그거면 충분해요. 주세요. 다 주세요.”
새카맣고 잔잔한 영인의 눈동자는 밤바다 같았다.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 아래에는 끝 모를 탐욕이 깔려 있었다. 아름답고 위험했다.
영인이 팔을 뒤로 보내 백의 엉덩이를 아프게 쥐었다. 백이 바로 그런 영인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그의 손등을 잡았다.
“잠깐. 설마 오늘 또 하자고? 안 돼.”
아까까지 부드러웠던 음색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어제 잠자리의 여파로 아직도 느낌이 이상했다.
기분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백은 한 번 하고 나면 적어도 이틀은 회복의 시간을 갖고자 노력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안 됐다. 적어도 오늘은.
영인이 천천히 몸을 돌려 백을 마주 안으며 백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키스한 채로 중얼거렸다. 따뜻한 입술 감촉이 간지러워 눈가를 찡그리던 백이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형도 버텨 봐요. 날 위해서.”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 정말.”
영인이 그대로 백을 짐짝 들 듯 번쩍 들고 욕실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백은 일자로 뻣뻣하게 들린 채로 영인과 꾸린 이 삶을 충분히 감상했다. 만족스러웠다.
커다란 샤워 부스에 들어서자마자 영인은 행동을 서둘렀다. 백이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몸과 머리카락이 흠뻑 젖었다.
영인이 능숙하게 샴푸를 백의 머리카락에 문질렀다. 백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런 영인에게 자신의 머리통을 맡기듯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급하게 굴던 것과는 달리 손길은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충분히 두피를 마사지하며 거품을 내던 영인이 무슨 생각인지 백의 머리카락을 한 뭉텅이 붙잡아 뿔처럼 세웠다.
샴푸 거품 덕분에 뾰족하게 선 머리카락이 고정되었다. 백은 자기 머리 위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나의 뿔을 둘로 갈라 작은 뿔 두 개를 만들고 영인이 크게 웃었다. 젖은 욕실이 영인의 웃음으로 잔잔하게 진동했다.
그제야 백이 눈을 뜨고 거울을 확인했다. 거울을 통해 본 것은 어설픈 도깨비 뿔 두 개를 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그런 자신을 보고 웃는 영인이었다.
“영인아, 그렇게 좋아?”
영인에게 물어보며 백이 뒤돌아서 그를 마주 보았다. 그 질문에 영인은 채 웃음기를 지우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이 그런 영인을 찬찬히 살피다가 발기한 그의 성기를 보고 흠칫 놀랐다.
“너는 이런 거 보고도 서?”
백이 다시 거울로 자신의 몰골을 확인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영인은 흥분해 있으니 이해 못 할 일이었다.
“형이잖아요. 난 솔직히 형 발바닥 보고도 서요.”
영인이 샤워기로 백의 목덜미부터 적시며 말했다. 따뜻한 물줄기에 백이 고개를 뒤로 젖히자 영인이 백의 머리를 헹궜다. 행여 백이 아프지 않도록 손길에 신경을 썼는데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애틋해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형 배꼽 보고도 서요. 형 등에 점 있는 거 알아요? 이거 보고도 서요. 형의 새끼손가락이나 팔꿈치, 오금 이런 데도요.”
샤워 타월에 바디워시를 묻히고 영인이 백의 등을 문질렀다. 어느새 백의 온몸이 거품투성이가 됐고, 백이 기다렸다는 듯 타월을 건네받아 영인의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정성스럽고 꼼꼼한 행위가 이어졌다. 민감하고 예민한 부위를 문지르면서도 백은 크게 표정 변화가 없었다. 영인만 움찔거리며 작게 반응할 뿐이었다.
이제 영인의 것은 터질 지경이 되었는데도 백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손만 움직였다.
이윽고 백이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었다.
“다리 들어 봐.”
영인이 백의 말을 따라 오른발을 들었다. 백이 영인의 발바닥에 타월을 가져가자 영인이 간지러운지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렀다.
“난 너 발바닥 보고는 안 서는데.”
백이 한쪽 눈썹을 까닥이며 말했다. 간지러움을 참으며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던 영인이 그 말에 자기도 모르게 발끈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요?”
영인이 아직 거품이 묻어 있는 발로 바닥에 있는 백의 허벅지를 문질렀다. 하얗고 탄탄한 허벅지 위를 지분거리던 영인의 발이 백의 중심까지 거침없이 미끄러졌다.
물기 어린 백의 얼굴이 순식간에 상기됐지만, 영인은 모른 척 발끝으로 백의 귀두를 슬쩍슬쩍 건드리다 발등으로 백의 회음부와 음낭을 지긋이 올려붙였다.
“하아….”
백이 낮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한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영인이 지나간 곳마다 거품이 남아 흔적을 남겼다.
여린 살결이었다. 영인은 얇은 발등 피부로 그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끝내 거품은 모조리 사라졌지만, 영인은 그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적당히 쓸어내리다가 한 번씩 압박했고 그럴 때마다 백은 인상을 찌푸리며 반응했다.
“으, 영인아….”
나직한 부름에 영인이 고개를 기울여 백을 보았다. 정작 축축하게 느껴질 만큼 농밀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백은 입술을 살짝 물고 무엇을 견디는 듯한 표정을 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영인이 꼴깍 소리가 날 정도로 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엄지발가락으로 잔뜩 흥분해 있는 백의 성기 기둥을 훑었다. 아까와는 다른 직접적인 자극이 들어오자 백이 눈을 뜨고 영인을 올려다보았다.
젖은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떨어졌고 시원한 눈매 끝에도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평소보다 붉은 입술은 촉촉하게 젖은 상태였는데 그런 백과 눈이 마주치자 영인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백에게서 위협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압도되었다.
“이제 발바닥 보고도 서겠다.”
말을 마친 백이 피식, 웃고는 영인의 발바닥에 자신의 물건을 거세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하아, 영, 인아…. 흐음.”
과장되게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백은 영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도발적으로 맹렬하게 영인을 바라보았다. 영인을 욕망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 모습에 영인이 숨을 참고 자신의 성기를 붙들었다. 좋아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 누가 폐를 꽉 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숨을 뱉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다.
“부족해.”
백이 낮게 중얼거리고는 영인에게 더 자신의 몸을 밀착했다. 말 그대로 부족했다.
그리고 영인은 충분했다.
영인이 그대로 사정했다. 자기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지 몸이 굳었다. 반면 백은 아닌 밤중의 날벼락이었다. 영인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고 있었던 터라 영인의 정액을 고스란히 얼굴로 받았다.
잠시 멍하던 영인이 정액으로 엉망이 된 백의 얼굴을 보고 하얗게 질린 채 허둥거렸다. 백은 얼굴 근육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눈썹과 눈꺼풀, 입술 할 것 없이 쏟아진 분출액 때문에 눈앞도 흐렸다.
“아, 형, 미안, 잠시만.”
영인이 샤워기 수압을 조절해서 백의 얼굴을 씻어 내렸다. 백이 눈을 감고 물줄기와 영인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괜찮아.”
백이 말하고는 일어섰다. 오랜 시간 무릎 꿇고 있어서인지 잠시 비틀거렸지만, 금방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난 아직 부족해, 영인아.”
계속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던 백의 무릎이 평소보다 붉었다. 영인의 시선이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
영인이 백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거의 서로의 엄지발가락이, 무릎이, 가슴이 맞닿을 거리였다.
어정쩡하게 영인의 손에 들려 있던 샤워기를 빼앗은 백이 뒤에 대충 걸어 두고는 물도 완전히 잠갔다. 물소리가 사라지자 순식간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하.”
영인이 작게 숨을 내쉬었고 백이 영인에게 완전히 자신의 몸을 밀착했다. 영인의 가슴과 백의 가슴이 빈틈없이 맞닿았고 백은 한 손으로 영인의 등을 끌어안았다.
엉거주춤하던 영인이 이내 긴장을 풀고 자신의 몸을 백에게 맡겼다. 덩치가 큰 편인 영인이 오히려 안긴 모양새였다.
영인의 묵직한 체중이 느껴지자 백이 나머지 손으로 영인의 엉덩이를 꽉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서로의 중심이 부딪쳤다. 백의 의도대로였다.
“오늘은 이렇게만 하자.”
백이 속삭이듯 말하고 자신의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영인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는 입술을 한번 삐죽인 뒤 그런 백의 몸짓에 맞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성기끼리 불규칙적으로 닿았다가 떨어지기도 했고, 때때로 제대로 닿지조차 못하였다.
“후우, 이걸로는 안 돼요.”
영인이 감질나는 행위에 만족할 리 없었다.
“그럼 이렇게?”
백이 양손으로 자신의 것과 영인의 것을 감싸듯이 쥐고는 위아래로 천천히 흔들었다. 흔든다기보다는 쓰다듬는 것처럼 보이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예민하고 보드라운 피부끼리 접촉이 주는 쾌감과 체온이 주는 짜릿함은 기대 이상이었다. 적당한 압력으로 백이 귀두까지 쓸고 다시 기둥 쪽을 훑었다.
운동을 많이 하는 편이라 손바닥이 결코 부드러운 편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생경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손짓이 격해질수록 물기 때문에 찌걱이는 소리가 커졌다.
손짓이 점점 빨라졌고 백과 영인의 성기 끝도 젖어서 반짝였다. 백이 몸의 힘을 주는지 복근과 허벅지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갈라졌다. 점점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저절로 뒤가 조여 왔다.
영인이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웠는지 힘을 줘서 백에게서 빠져나왔다. 눈앞에 있던 고지에 오르지 못한 백이 원망하는 듯한 눈으로 영인을 보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애써 백의 눈빛을 외면하며 영인이 말했다.
“뒤돌아볼래요?”
백이 채 성기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영인이 다시 힘을 썼다. 백의 탄탄한 허리를 붙잡고 살짝 들어 그를 뒤돌려 세웠다.
“안 돼.”
“알아요.”
백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인이 대답하고는 백의 발목 안쪽에 자신의 발을 붙이며 슬며시 밀었다.
그러고는 백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혀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백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물건을 끼워 넣었다.
예민해진 성기에 여리면서 탱탱한 허벅지 살이 닿자 영인은 또 싸고 싶어졌다. 싸고 세우고 싸고 세우고, 그렇게 더는 무엇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다리 조여 줘요.”
영인이 하고자 하는 일을 대충 눈치챈 백이 허벅지 안쪽에 힘을 주었다. 부끄러워서인지 닿는 부분이 모두 화끈거렸다.
거품이 남은 피부를 영인의 성기가 가르고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백의 음낭과 성기를 쓸고 물러서고는 다시 찔러댔다.
충분히 음란하고 야릇한 움직임이었지만, 백은 여전히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허전함의 정체를 깨닫고는, 깊은 당혹감을 느껴야만 했다.
영인의 몸짓에 맞춰 허벅지를 조이고 허리를 움직이던 백이 멈칫했다. 그리고 언제나 예민한 영인은 잔뜩 흥분한 상태에서도 그 이상을 감지했다.
영인이 조심스럽게 백의 턱을 잡고 자신 쪽으로 그의 얼굴을 돌렸다. 별 저항 없이 백이 영인의 손길에 따라 고개를 돌렸고 곧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백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열에 들떠 그랬지만, 현재는 순식간에 몰려온 낯선 감정 때문이었다.
아프게 물린 백의 아랫입술을 영인이 젖은 엄지로 지그시 눌렀다.
“왜 그래요?”
이번에도 백은 순순히 영인의 뜻대로 입술에 힘을 풀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영인을 사랑하지만, 남자의 성기에 뚫리기를 갈구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삽입당하며 쾌감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보와 희생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믿어 왔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백은 멍한 표정으로 영인을 보았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그런 백을 한참 살펴보던 영인이었다.
“…후회해요?”
낮고 젖은 음성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하게 질문했지만, 결국 그 끝이 떨리고 말았다.
백은 영인의 질문으로 더 혼란스러워졌다.
백에게 이 감정은 혼란함 그 자체였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후회일까? 이런 몸이 되어서 후회하는 걸까?’
백이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영인은 사형 선고를 눈앞에 둔 죄수처럼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답은 한참 돌아오지 않았다. 둘의 몸도 차갑게 식었고 영인은 어쩐지 추워졌다.
기다리던 영인이 다시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후회…해요?”
같은 질문이었다. 아까보다 목이 메는지 목소리가 간신히 나왔다. 영인이 천천히 잡고 있던 백의 턱을 놓아주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백에게도 거리를 두었다.
당장이라도 백의 인생에서 사라져 줄 수 있었다. 백이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렇게는 해 줄 수 있었다. 다만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서, 백의 인생에 이미 흔적을 남겨 버려서 그것이 참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멍하니 허공을 보던 백이 영인이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본능적으로 팔을 뒤로 뻗어 그를 잡았다.
일단 잡고 볼 일이었다. 백의 연인은 도망을 잘 쳤고, 어둠 속에 잘 숨었으며, 겁이 많고 이상한 방향으로 배려를 하고는 했으니까.
백이 몸을 완전히 돌려 영인과 마주 보며 섰다.
“아니야, 내가 왜 후회를 해. 나는 후회 안 해, 영인아.”
영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백이 대답했다. 스스로 채 파악하지 못한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백이 잠시 망설였다.
백의 뒤늦은 대답에도 영인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기라고는 없는 눈가인데도 백은 이상하게 영인이 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백이 따스한 손으로 영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울지 않는 눈가를 쓸어 주었다.
“널 놓쳤으면 후회했겠지.”
영인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백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씁쓸해 보였다.
백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목덜미를 한번 주물렀다.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내뱉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 낫지, 이러다가는 영인이 또 상처 받을 게 뻔했다. 그리고 어쨌든 이리 돌려 말하고, 저렇게 둘러 말하고 이런 해결책은 백과는 맞지 않았다.
“사실 있잖아….”
영인이 이어질 백의 말을 유순하게 기다렸다.
“내가 있잖아….”
백이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영인은 달아오른 백의 귓바퀴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그, 저, 뭐냐, 그러니까, 내 말은….”
백이 눈을 뜨고 영인을 보았다. 영인이 아까와는 다른 표정으로 백을 보고 있었다. 백의 몸 전체가 붉게 물들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듣고 있어요.”
“하, 이런 말까지 내가 해야 하나? 정말?”
“후회해요?”
영인이 다시 묻자 백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이만하면 괜찮다고 알겠다고 해도 될 텐데 영인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후회 안 하고! 그, 네가 박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놀라서, 나도 모르게 그런 충동이 들어서 놀라서 그런 거였어.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나한테는 좀 충격적인 욕구야. 나는, 영인아, 널 만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이런, 이런 일이….”
백이 자신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영인도 얼이 빠졌다. 한편으로는 기뻤다. 그리고 죄를 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후회해요? 나한테 그런 욕망이 들어서 슬프거나 화가 나나요?”
“아니. 그냥 조금 놀란 거지. 이제 그리고 인정해야겠다. 나 너한테 박히는 게 좋아.”
빠르게 말을 쏟아 낸 백이, 인정 후 찾아온 편안한 마음에 놀라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백은 이제야 편하게 웃었고, 반대로 영인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다채롭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고백하고 나니 좋은데? 나는 강영인을 좋아하고, 나보다 운동도 열심히 안 하면서도 타고난 떡대랑 등빨이 좋은 강영인 몸도 좋아하고, 조개처럼 꾹 다문 입도, 가끔 하는 멍청하고 귀여운 질문들도, 강영인의 꼬인 성격도 좋아해.”
백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영인은 여전히 이상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강영인의 목소리도 소름 돋게 좋고 오늘 깨달은 건데 강영인 왕자지도 좋아해. 쭉 좋아했던 거야.”
백이 싱긋, 미소 짓고는 영인의 묵직한 성기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좋아해, 사랑해.”
흥분이 식었던 성기가 곧바로 반응했다. 그리고 영인은 놀랍게도 이 이상한 고백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고추가 좋다는데 눈물이 나려 한다니. 괴상한 일이었다.
“형, 가끔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원래 부부는 닮는 거야.”
백의 대답을 들은 영인은 미간을 찌푸렸고 백은 웃으며 무릎을 꿇고 영인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신혼여행에서 영인이 했듯 백이 입을 크게 벌리고 깊게 영인의 것을 삼켰다. 그러나 금방 몰려오는 구역감에 급하게 다시 뱉어 내야만 했다. 입술은 끈적한 침 범벅이었고 눈꼬리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런 백의 모습을 본 영인이 작게 욕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이거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한 거야?”
한참 숨을 고르고서야 백은 말할 수 있었다. 아직도 목구멍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백의 음성에 그제야 영인이 실눈을 뜨고 백을 다시 보았다. 아까보다 정돈된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제대로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백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인을 올려 보아야만 했다.
영인이 무표정하게 그 모습을 오래도록 관찰하였다. 탄탄하고 흰 허벅지 피부에는 불긋불긋한 자국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모두 자신이 남긴 것들이었다.
봉긋하게 잘 발달된 가슴에 난 잇자국도 그랬다. 지금 꿇어앉아 있는 백을 뒤로 넘어뜨려 양 발목을 잡아 벌리면 더욱 엉망인 허벅지 안쪽과 사타구니 근처 여린 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늘 멀끔하고 근사한 백의 알몸이 이렇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멋지게 차려입고 유능하게 일 처리를 하는 백이 사정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사정이 끝나고도 몰아치는 쾌감에 어떻게 울부짖는지, 채 닫히지 않은 구멍에서 흐르는 정액을 어쩌지도 못할 만큼 지친 날에는 무슨 욕을 하는지 아는 사람도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영인이 턱에 힘을 주어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부서질 만큼 힘을 준 탓에 턱 근육이 긴장하는 모습이 백에게도 보였고 관자놀이 근처마저 꿈틀거리는 듯했다.
커다란 영인의 손이 백의 길게 뻗은 목줄기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러자 백이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기울여 그런 영인의 손등에 자신의 뺨을 기댔다.
엄지로 백의 목선을 따라 훑으며 영인이 메마른 자신의 아랫입술을 혀로 한번 적시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무릎 꿇어 본 적 있어요?”
백이 영인의 체온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
대답을 들은 영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백의 목에 머무는 손길은 점점 야릇해져만 갔다.
엄지로 영인이 백의 목울대 근처를 매만지자 백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영인을 보았다. 그 눈에서는 어떠한 긴장이나 불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영인이 천천히 굴곡이 확실한 백의 목울대를 위아래로 반복해서 쓰다듬었다. 각진 턱도 꾹 닫힌 입술도, 불거진 목울대까지도 집요하게 눈으로 좇으면서.
엄지에 힘을 주고 영인이 살짝 백의 목젖을 누르자 백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벌어진 입술 틈을 놓치지 않고 영인이 자신의 검지와 중지를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목구멍을 완전히 열어야 해요.”
축축하고 부드러운 백의 혀를 지그시 누르며 영인이 말했다. 백이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영인을 보면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자지 끝까지 삼키는 법 알려 달라면서요.”
말을 마친 영인이 다시 자신의 손가락으로 백의 입속을 휘저었다. 정말 목구멍을 뚫고 들어올 기세였기 때문에 놀란 백이 급하게 영인의 손목을 낚아채 당겼다.
의외로 쉽게 해방될 수 있었지만, 당혹스러움은 빨리 가시지 않았다.
“못하겠죠?”
영인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화가 난 건지, 좋은 건지, 장난치자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백도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하지 말아요.”
말을 마친 영인이 백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이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어쩐지 개운하지 않았다. 영인에게 농락당한 느낌이었다.
“내가 할게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영인이 백의 성기를 삼켰다. 영인은 거침없이 백을 자신의 안으로 들였다. 백은 그제야 목구멍을 연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영인이 손을 뻗어 백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목 근처에 가져왔다. 불룩하게 부푼 목에 백이 놀라 흠칫하며 손을 빼려고 했지만, 영인은 이번에는 쉽게 백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를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성기가 영인의 목구멍을 타고 들락날락하는 것이 손으로도 선연히 느껴졌다. 당황스러운 것은 그 사실만이 아니었다.
백은 흥분하고 있었다. 힘겹게 구음하는 영인을 보면서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백은 행위 자체보다 그 부분이 더 당황스러웠다.
“그, 그만.”
백이 말했지만, 영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목구멍은 진작 백의 성기에 막힌 상태였으니까.
백의 상태를 파악했는지 영인이 더욱 집요하게 성기를 빨아댔다. 음란하고 젖은 마찰음이 끊이지 않았고 백은 참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오랜 싸움이 이어졌다. 먼저 지친 것은 영인이었다. 영인이 백의 성기를 천천히 뱉었다. 한 손으로 백의 음낭을 가볍게 감싸 쥐고 성기 기둥은 여전히 자신의 뺨에 댄 채로 낮게 속삭였다.
“그냥 싸 주면 안 돼요?”
“뭐라고?”
“그냥 나한테 좀 싸 주면 안 되냐고요.”
말을 마친 영인은 슬퍼 보였다. 영인은 이제 아예 백의 밑으로 기어들어 갈 기세였다. 몸을 낮추고 백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백은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젖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감했다.
영인은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백의 음낭과 성기를 자신의 얼굴로 떠받치듯 있었다. 그 모습은 무슨 기도라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백은 당장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 백의 반응을 무시한 채 영인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되는대로 백의 은밀한 구석들을 혀로 핥고 찔러댔다. 모습만 기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영인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백이 낮게 신음하며 허리를 앞으로 움직였다. 너무 큰 자극으로부터 피하려고 자신도 모르게 한 행위였다. 단단하게 경직된 백의 허리를 영인이 커다란 손으로 붙잡고 회음부 쪽을 진득하게 물고 빨았다.
백은 다음에 닥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영인의 뜨겁고 두툼한 혀가 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그곳을 끈질기게 빨고 좁은 틈을 가르고 들어올 차례였다.
“엎드려 봐요.”
영인이 서 있는 백의 등 하부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말하면서도 입을 음낭 근처에서 떼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백은 몇 번이고 몸을 떨어야만 했다.
백이 저항 없이 영인의 손길에 따라 상체를 숙이고 다리를 굽혔다. 영인도 그런 백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누웠다. 차갑고 딱딱한 부스 타일에도 개의치 않았다.
영인이 완전히 바닥에 등을 대고 눕고 무릎을 세웠다. 공간이 좁았다. 백의 다리 사이에 그런 영인의 몸통이 놓였고 백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영인을 등진 채였다. 백의 엉덩이는 영인의 코앞에 놓여 있었다.
영인이 다시 백의 등을 밀었다. 긴장해서인지 평소보다 백의 등골이 더 패이고 탄탄했다. 마른 아랫입술을 한번 핥고 백이 상체를 완전히 굽혔다.
백이 영인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영인의 허벅지 안쪽과 음낭, 성기 기둥에 가볍게 뽀뽀해댔다. 영인이 움찔했고, 그 모습이 귀여워 더 짙게 빨고 입 맞추었다.
“하아.”
영인의 입에서 젖은 숨이 터졌다. 영인은 완전히 발기한 백의 성기를 손으로 잡아 뒤로 꺾듯이 자기 쪽으로 당겼다.
“읏.”
갑작스러운 압력에 백의 몸이 영인이 당기는 대로 딸려 내려왔다. 영인은 처음에는 백의 귀두만 입에 물고 사탕 굴리듯 부드럽게 굴렸다. 그리고 그 달콤한 애무와는 상관없이 성기를 잡은 손은 여전히 억셌다.
백이 힘없이 영인에게 완전히 상체를 맡겼다. 상체가 풀썩, 내려가자 엉덩이가 더 위로 솟았다. 백이 멀어지는 게 싫은 영인은 다시 백의 자지를 잡아당겼다.
“으헙, 야!”
순간 크게 신음한 백이 고개를 돌려 영인을 노려보았다. 영인도 고개를 슬쩍 들어 그런 백과 시선을 마주쳤다. 성기를 입에 문 채로.
“아파.”
백의 기둥 반까지 삼켰다가 쭙, 소리가 나게 뱉고서 영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기는 계속 잡고 놔주지 않은 채였다. 맛있는 아이스크림이나 사탕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이 같은 천진무구하고 솔직한 욕망이 엿보였다.
“그냥 앉아요. 그럼 안 당길게요.”
“허.”
백이 기가 찬 듯 짧은 탄식을 내뱉었지만, 영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백을 졸랐다. 물기 어린 성기를 최대한 감싸 쥐고 귀두까지 쓸었다가 다시 뿌리를 조여 잡았다. 백의 몸이 크게 출렁였다.
잠시 주저하던 백이 무엇인가 결심한 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턱을 당기고 고개를 숙여 자기 엉덩이 아래에 있는 영인을 보며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이게 진짜 네가 원하는 거야?”
“네.”
영인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눈을 질끈 감고서 서서히 백이 영인의 얼굴에 자신의 은밀한 곳을 갖다 댔다.
보드랍고 폭신한 접근이었다. 영인이 눈을 감고 자신의 코로 백의 회음부를 쿡 찔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인의 숨결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음험하고 낮은 영인의 음성이 백의 아래쪽에서 울려왔다.
“완전히 뭉개 줬으면 좋겠어요.”
백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영인은 그 말을 끝으로 백의 허리를 붙잡고 힘주어 당겼다. 백이 순식간에 통제권을 잃고 영인의 말대로 완전히 영인의 얼굴을 깔고 앉고 말았다.
백의 샅에 얼굴을 묻은 영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눈을 감고 음미하듯 혀를 내어 이곳저곳을 핥다가 참을 수 없어지면 빨고 깨물었다. 이런 짙고 더러운 행위가 좋아 미칠 지경이었다.
“하아. 기분 좋아, 영인아. 크흑!”
백이 짧게 신음하고는 영인의 얼굴 위에서 엉덩이를 흔들었다. 기분이 좋아서 짜증 났다. 짜증 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속으로 욕을 마구 뇌까렸다.
갑작스러운 그 움직임에 영인은 덜컥 숨이 막혔다. 이대로 숨이 막혀 죽으면 그 나름대로 호상이겠지만, 부족했다.
백의 허리를 구속하던 손을 풀고 영인이 본격적으로 백의 엉덩이를 벌렸다. 비밀스럽게 숨어 있던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모습은 선정적이고 음란했다. 영인이 그렇게 길들인 곳이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구멍을 당겼다. 그 불편한 감각에 백이 몸서리를 치자 달래기라도 하듯 혀로 그 벌어진 틈을 핥아댔다.
팽팽하게 벌어져 긴장한 듯 보이던 애널이 영인의 끈질긴 혀 놀림에 점점 벌어지고 눅진눅진하게 변해 갔다. 백이 이를 악물었지만, 잇새를 통해 달큼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영인은 멈출 줄 몰랐고, 백은 점점 애가 탔다. 아무리 혀를 꼿꼿하게 세워 쑤셔 줘도 부족했다. 간지럽고 부드럽고 끈적한 애무가 이제는 괴롭기까지 했다.
“흐읏, 박아 줘. 침대로 가자. 여기 좁아.”
자신의 엉덩이를 아프게 붙잡고 있는 영인의 손을 백이 덮듯이 잡으며 속삭였다. 말없이 백을 빨아먹는 데 온 신경을 쏟던 영인이 그 애원에 곧장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로봇처럼 백의 엉덩이 위에 있던 손을 내렸다. 백이 일어서자 자신도 천천히 일어섰다.
두 남자의 성기에는 곧장 터질 것처럼 피가 몰려 있었다. 백은 이미 쿠퍼액까지 질질 나와 있는 상태였다.
정신을 먼저 차린 이는 백이었다. 백이 서둘러 샤워기를 틀고 영인과 자신의 몸을 문질러 닦았다. 능숙한 솜씨였다. 샤워 가운을 꺼내 자신이 먼저 입고 영인이 입기 편하게 잡아 주었다. 영인도 말없이 백이 건넨 가운에 팔을 끼우고 그대로 백에게 돌진했다.
백이 뒷걸음질 치며 영인에게 밀려 욕실 밖으로 나왔다. 영인도 그런 백의 샤워가운 깃을 거칠게 거머쥐고 걸음을 옮겼다.
일단 침대로 가서 박아 줘야 했다. 백이 그러기를 원했다. 영인은 격양된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황소처럼 몰아붙였다.
영인에게 밀리면서도 백은 당황하지 않았다. 영인이 이렇게 핀이 나가는 일에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했다.
침대에 먼저 걸터앉은 백이 샤워가운을 풀어 헤치고는 자신의 것을 손으로 잡고 쓸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서 있던 영인은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길게 찢어진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뭐 하는 거예요?”
“유혹?”
말을 마친 백이 슬며시 미소 지으며 영인을 응시했다.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상체를 뒤로 젖혀 앉은 채 한쪽 손으로는 몸을 지탱하고 나머지 손으로는 자신의 성기를 거침없이 흔들었다.
그 몸짓과 표정에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어 보였다. 발칙하고 도발적이었다.
영인이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자 한술 더 떠 손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허리 움직임이 유연했다. 그저 자위일 뿐인데도 마치 성행위처럼 보였다. 아마도 눈빛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영인은 생각했다.
백은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며 영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 같았다.
영인이 침을 꿀꺽 삼켰고 곧바로 입술이 떨어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 짧은 숨이 흘러나왔다.
백은 이제 그런 영인의 입술을 보았다. 눈으로 맛보고 있었다. 허리 짓에 점점 박차를 가하며 백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직도 영인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영인은 백의 것을 물지도 않으면서 무는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백은 영인의 입에, 영인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서 그를 탐했다. 백의 잘 잡혀 있는 복근이 선명하게 조여들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해요? 발바닥만 보여 줘도 되는데.”
영인이 느릿하게 말을 하고는 다시 침을 삼켰다. 백은 여전히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점점 속도가 느려진 탓에 오히려 더 농밀한 모습이 연출됐다. 허리가 꿀렁거렸고 엉덩이가 눌려 근육이 더 생생하게 보였다. 서서히 백이 더 뒤쪽으로 누우며 바닥을 딛고 있던 발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렇게?”
다리가 벌어졌고 그 순간 영인은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맹목적으로 백에게 달려들었다.
무자비하게 백의 엉덩이를 벌리고 자신의 성기를 욱여넣었다. 백뿐만 아니라 영인에게도 고통스러운 삽입이었다. 그런데도 영인은 멈추지 않았다.
백이 고통을 참기 위해 인상을 쓰고 주먹을 꽉 쥐었다. 손목 안쪽 힘줄이 도드라지고 백의 몸이 단단해졌다. 덩달아 메마른 구멍도 오므라들었기 때문에 진입이 더욱 어려워졌다.
“형, 힘 빼 주세요. 아파요.”
영인이 애원하듯 말했다. 백이 시선을 올려 영인의 얼굴을 보았다. 백의 연인은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백이 마찬가지로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몸 안에 남아 있는 모든 번뇌와 아픔을 내보내는 듯한 숨이었다. 긴장을 풀면 보란 듯이 자신의 몸을 찢고 들어올 영인의 거대한 성기가 느껴졌다.
‘내가 사랑하는 영인이와 영인이의 자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영인의 얼굴을 감싸 쥐며 백이 온몸에 힘을 풀었다. 영인은 계속 힘주어 밀고 있었기 때문에 곧장 백의 구멍을 뚫고 여린 내장을 헤집고 백을 침범할 수 있었다.
“으악!”
백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영인이 그런 백을 바라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슬퍼 보였다. 우리 영인이는 왜 또 슬퍼 보일까? 의아했다.
가쁜 숨을 여러 번 내뱉으며 고통을 다스린 백이 영인의 굵직한 목을 끌어안았다.
“기분 좋지 않아?”
다정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영인이 응석 부리듯 그런 백의 목 언저리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러면서도 점점 깊숙하게 백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멈추지 않았다.
“좋아서 죽을 거 같아요.”
“흐으, 그럼 이제 나도 기분 좋게 해 줘.”
백이 양다리로 구속하듯 영인의 허리를 감쌌다. 영인이 갑작스럽게 성기를 뒤로 뺐다가 백을 부술 듯이 박아 넣었다. 백의 온몸이 뒤틀렸다. 그 모습에 영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널 보면 참을 수가 없어, 백아.”
영인이 억눌린 목소리로 간신히 진실을 내뱉었다. 참을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고 그래서 슬펐다.
백이 한 손으로 고통 때문에 발기가 풀린 자신의 성기를 다시 붙잡고 흔들었다.
“왜 참아. 참지 마. 하아, 내가 하고 싶다고 했잖아.”
백이 영인에게 매달리듯 안겨 되는대로 자신의 성기를 영인의 몸에 문질렀다. 꿰뚫린 고통 너머로 미약한 쾌감을 찾기 위해 애썼다. 영인을 받아들인 곳에도 의도적으로 힘을 주었다가 풀면서 이완시키려고 애썼다. 수없이 했던 케겔 운동을 떠올렸다.
‘할 수 있다.’
어떤 그런 다짐과 각오로 움직이자 영인이 무너지듯 백을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괜찮아. 읏, 사과하지 마.”
백이 엉덩이를 흔들며 영인의 성기를 스스로 얕게 삼켰다가 뱉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도 다 백을 훼손하지 않았다. 백은 어떤 짓을 하든 자신을 잃지 않았고 영인을 사랑했다, 지금처럼.
영인이 백을 거세게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닥에 선 채로 시작한 행위였는데 영인이 점점 백에게 달라붙었기 때문에 결국 그도 침대 위로 올라오게 됐다.
영인은 백의 오금을 양팔로 받쳐 들고도 모자라 백의 뒷목을 감싸 안았다. 무릎을 꿇은 채 백을 찍어누르고서 끝없이 키스하며 백의 이름을 속삭였다. 백의 몸이 거의 반으로 접혔다.
백의 다리와 영인의 팔이 엉망으로 얽히고설켰다. 백은 되는대로 손을 뻗어 닿는 영인의 몸 곳곳을 마구잡이로 쓰다듬고 주물렀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여지는 쪽은 백이었는데도 오히려 간절하게 매달리는 이는 영인이었다. 백은 한계까지 벌어져서 터지기 직전인 아래쪽 사정을 애써 무시하고 서툴게 쏟아붓는 영인의 사랑을 온몸으로 맞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백의 이마에 영인이 도장을 찍듯 입술을 부딪쳤다. 중간중간 사랑한다는 고백이 쉼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달콤한 속삭임과 동시에 무게를 실어 콱콱 백의 전립선을 찌르고 눌렀다. 백이 자지러지며 발가락을 잔뜩 오므렸다. 눈을 감고 앓는 소리를 내는데 금세 영인의 입술에 그 신음마저 모조리 먹히고야 말았다.
영인이 성기를 끝까지 완전히 뺐다가 빠르게 백의 안으로 처박았다. 백이 끅끅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행위였는데 그러고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백의 엉덩이 살을 마구 벌렸다. 더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강하게.
곧 영인의 엄지가 틈이 없는 구멍을 파고들 듯이 눌렀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구멍이 터지든 내장이 찢어지든 둘 중 하나는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백은 숨이 막혔다.
“큭, 그만, 그만해.”
백이 팔을 뻗어 영인의 팔뚝을 잡았지만 자세가 좋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음에는 나한테 싸 줄 거예요?”
영인이 여전히 엄지에 힘을 준 채로 물었다. 무리하게 벌어져 이미 주름도 없는 구멍을 쓰다듬으며 약한 곳을 찾고 있었다. 조금만 틈이 보인다면, 그렇다면 영인은 아마도…….
“흐, 알았어, 알았어.”
백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제야 영인이 그 총부리 같던 손을 물렀다.
어떤 협박보다도 무서웠다. 강영인에게 목줄이라도 채워 놔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랬다.
“그럼 지금 당장 싸 줘요.”
영인이 백의 성기를 손으로 주무르며 말했다. 방금 과격한 협박으로 성기가 식어 있었는데도 영인이 아랑곳하지 않았기에 백이 어이없어 흐느끼듯 웃었다.
그러고는 영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싸 주려면 우선 흥분이 먼저였다. 그러려면 영인이 필요했다.
백과 시선이 마주치자 영인이 아까보다는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의 몸은 이제 뻔했다. 어디를 눌러 줘야 좋아하는지, 어디를 찔러 주면 괴로워하는지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조금씩 체온이 올라갔고 백도 한결 풀린 표정으로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이내 쩍쩍 살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와 체액이 뒤엉켜 찌걱이는 소리만 울리기 시작했다.
영인과 백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제 다른 어떤 일도, 사람도 상관없었다. 둘뿐이었다.
“하, 나 쌀 거 같아.”
백이 몸에 힘을 주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구멍도 조여들었고 영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도를 높였다.
뜨겁고 따갑고 짜릿했다. 목이 막히고 울렁거리면서도 간지러웠다. 백이 영인이 주는 쾌락에 몸을 맡긴 채 드디어 눈을 감고 입술을 물었다.
영인은 여전히 백의 성기를 쥔 채였다. 귀두를 감싸듯 잡고 있었는데 백이 사정하자 정액을 흘리지 않기 위해 손바닥을 오목하게 만들었다.
고인 정액을 영인이 망설임 없이 마셨다. 꿀꺽, 영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출렁였고 백은 아연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작 영인은 그러고도 모자란 듯 보였다. 여전히 갈증이 나는 얼굴로 백을 보며 말했다. 탁한 음성이었다.
“다음에는 꼭 나한테 싸 줘요.”
백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깨진 독은 메워질 줄 몰랐다. 백이 그 독 안에 들어가도 그럴 것만 같았다. 그 사실이 아득하면서도 좋았기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로는 그래서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좋았다.
영인은 백에게 새로운 감정을 가르치고 있었다. 질투와 독점욕 같은 것들. 백만이 영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었다.
백이 영인을 향해 팔을 벌렸다. 영인이 기꺼이 그 품에 안기며 자비 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이미 사정을 마친 백의 성기는 또 울컥울컥 맑은 액체를 쏟아 냈다. 백이 벅차오름을 견디지 못하고 영인의 어깨를 깨물어 기어이 잇자국을 내고야 말았다. 그 순간 영인이 낮고 긁는 듯한 신음을 내며 백의 안에 사정했다.
영인이 제 것을 쑥 뽑아 내자 백의 구멍이 채 다물어지지 않은 채 작게 떨렸다. 까만 구멍 틈으로 분홍색 속살과 밀려 나오는 허연 정액이 보였다.
영인은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백은 반쯤 잠에 빠진 채 영인을 품에 안고 토닥였다. 지독하게 당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인이기에 용인해 줄 수 있는 일이기도 했고.
영인도 만족스러운 사정 후 찾아오는 무력감에 당장이라도 잠들 수 있었지만, 자고 싶지 않았다. 영인은 이 모든 것이 아쉬웠다.
백은 알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백이 주는 모든 순간을 온전히 기억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자신을. 백의 얼굴과 음성, 손길과 내음, 체온까지도 모두 다 갖기를 원했다.
녹음이나 녹화로는 모자랐다. 그냥 이 순간을 그대로 박제하고 싶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웠다. 순식간에 과거가 되어 버리는 이 모든 순간순간이 전부 그랬다.
“영원히 이렇게 머무를 수는 없겠죠?”
좋은 시간은 금세 흐르고, 좋은 사람은 떠나가고, 좋은 감정은 변하기 마련이었다. 늘 그랬다.
영인의 쓸쓸한 음색에 백이 눈을 반쯤 뜨고 영인을 좀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도 그래, 영인아. 왜 다를 거로 생각해? 나도 마찬가지야. 너만큼이나 지금이 소중하고 아까워.”
말을 마친 백이 쿡쿡거리며 작게 웃었다.
“이거 봐. 나는 네가 하는 이런 이상한 질문들도 다 싫지 않아.”
영인은 백의 음성과 웃음을 감상했다. 꿈결 같은 소리들은 금세 귀를 타고 들어와 다시 과거로 흘러가 버린다.
“너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난다.”
백도 눈을 감은 채로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영인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고 혼잣말 같기도 한 어투와 음성이었다. 백은 누가 들어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는 말을 하는 사람 같았다.
“어땠는데요?”
영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백을 보았다. 백은 미소 지은 채 그날을 회상했다.
“뭐 저렇게 큰 사람이 다 있나 그런 생각했던 거 같아. 문짝만 했잖아.”
“그리고요?”
영인은 흥미를 느꼈다. 백이 자신을 기억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냥 수많은 배경 중 하나로 남았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
“목소리 참 좋네. 그런 생각도.”
“또?”
“말 더럽게 없네, 그렇게 생각했지. 있잖아, 영인아.”
“네.”
“살면서 되게 생생하게 기억나는 순간들이 있거든. 떠올려 보면 그때 냄새나 날씨, 두런거리는 주변 소음까지 다 떠오르는 날. 나한테는 그날 말이야, 너 처음 만난 날, 그날이 그래. 네가 열고 들어오는 문소리까지 이상하게 기억이 나.”
영인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듣기 좋아요.”
“뭐가?”
“형이 내 이야기 하는 거. 형 기억 속에 있는 나에 대해 듣는 거.”
“다음에 또 해 줄게. 내가 해 줄 이야기가 아주 많지. 너는 기억도 못 하는 그런 일들.”
“그런 일은 없을 텐데.”
영인의 무심한 대답에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 상대를 의식하고 신경 쓴 것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백이 아니라.
“오늘은 자자. 이 얘기 하려면 우리 오늘 잠 못 자. 영인이는 모르겠지, 자기가 얼마나 내 애를 태웠는지.”
백이 쭉 감고 있던 눈을 떠 영인을 보고 웃었다.
“자자. 내일이 있잖아.”
백의 긴 팔이 쉽게 영인의 커다란 몸을 감싸 안았다. 잠시 버티던 영인이 오래지 않아 백의 품 안에 코를 박았다. 깊게 들이마신 숨에는 오로지 백의 내음만이 가득했다.
“내일이 있잖아.”
백은 다시 한번 같은 문장을 힘주어 말했다. 영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잡을 수 없어 안타까울 만큼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떠나는 것이 아쉬워 자꾸만 고개를 돌리는 자신에게 백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백의 과거에도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자신이 있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을 테지.
영인이 백의 가슴팍에 가볍게 뺨을 비볐다. 백이 옆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에 충실하면 돼. 버티고 기억하고 사랑하고 지금처럼 앞으로도 쭉 같이.”
백이 하는 말 때문인지 지금 느끼는 백의 체온과 체취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영인은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어쩌면 처음부터 다 영인을 안심시키기 위한 백의 작전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영인은 백이 한 말을 떠올리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백과의 첫 만남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처음에는 백지에 아무렇게나 찍은 점처럼 뜨문뜨문 백과 엮였다. 어떤 특별한 사고나 대단한 우연이 아니고서야 백과 눈을 마주칠 일도 드물었다.
비정기적이고 드물게 일어나던 둘만의 시간이 점차 잦아졌다. 낯설고 어려웠던 남자는, 미처 깨닫기 전에 깊숙이 자신의 삶에 침투해 있었다.
간격도 배열도 제멋대로였던 점들은 점차 가까워졌고 많아졌다. 결국에는 점 옆에 점, 그 바로 옆에 또다시 점. 점과 점은 빈틈없이 맞붙었고 그 모습은 선과 다를 바 없는 셈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영인은 견디지 못하고 백의 목울대 근처를 깨물었다.
“아프다. 거기는 자국나면 보이기도 하고.”
백이 잠결에 영인을 저지하고 영인의 머리를 아래로 내렸다. 보이지 않는 곳은 물어도 된다는 것처럼.
자신과 백은 점처럼 만나 선을 이룬 사람들이었다. 지나간 시간도 현재도, 아직 오지 않은 때도 모두 다르지 않았다.
백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백이 옳았다. 갑자기 지나가는 시간을 아쉬워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재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선의 끝까지 남을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영인은 자신이 찍을 수 있는 마지막 점까지 최선을 다해 찍고 싶어졌다. 가장 크고 확실한 점으로 백의 곁에 남고 싶었다. 감히 그렇게 하고 싶었다.
백은 영인을 버리지 않는다. 백은 영인을 버리지 못한다. 영인이 먼저 손을 놓지 않는 이상 백이 영인을 밀어낼 일은 없을 것이다. 영인은 주문처럼 자신이 믿고 아는 바를 다시 되뇌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나는 백을 버리지 않는다. 나는 백을 버리지 못한다. 백이 먼저 손을 놓지 않는 이상 내가 백을 밀어낼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소란하고 엉망인 하루의 끝이었고 끝없이 이어질 선의 한중간이었다.
외전 3. 다시 사랑하게 될까요?(기억 상실 IF)
1박 2일의 짧은 입원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백은 손님처럼 어정쩡하게 자리했다.
“아직도 기억 안 나?”
수림이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묶으며 백에게 다시 확인했다. 백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나. 그래도 뭐 일시적인 거라니까.”
백이 말을 마치고 수림이 아닌 수림 옆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영인을 살폈다. 창백한 낯빛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사건의 시작은 사소했다. 수림과 백이 일찍 만나 점심 식사를 함께한 날이었다. 학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골목에서 튀어나온 오토바이가 문제였다.
반사적으로 수림을 보호하고 백이 오토바이와 충돌했는데 충돌 자체는 사실 별문제가 아니었다. 가볍게 넘어진 수준이었고 거기까지는 정말로 괜찮았다.
문제는 놀란 오토바이 운전자가 백에게 달려갔고, 백은 백대로 놀라 바로 일어섰는데 그의 헬멧과 백의 뒤통수가 너무 정통으로 부딪쳤다는 점이었다.
가벼운 뇌진탕 정도겠거니 했는데 수림과 눈이 마주친 백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백은 그 한 번의 충돌로 최근의 기억을 잃고 혼자 과거로 돌아가 버렸다.
“돌아오겠지.”
말을 마친 백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실 지금 가장 놀란 사람은 백 자신이리라고 생각했다. 잘 다니고 있던 회사를 퇴사하고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이나, 남자를 사귀고 있다는 이야기가 모두 황당한 농담처럼 들렸다.
자기가 알던 자기의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고 믿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 집에 와서 보니 모두 진실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어쩌면 가장 놀란 사람은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영인의 얼굴을 보자니 그랬다.
수림도 복잡한 표정으로 백과 영인을 보았다. 영인에게 머무는 시선이 더 길었다. 사고로 다친 백보다 영인이 더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영인만이 무엇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백도 수림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그저 너무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누구를 향한 원망인지도 모를 원망만 이어졌다. 가혹한 일이었다.
“일단 림수 책임은 가 봐. 뭐, 좀 며칠 쉬면 되겠지. 걱정하지 말고.”
백은 수림을 자신에게 익숙한 호칭으로 불렀다. 책임 자리를 버린 지 오래지만, 수림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백의 빈자리도 메워야 했고, 있어 봐야 가슴만 답답하지, 수림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했다.
“일단 이번 주는 쉬어 보고, 다음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자고.”
수림과 눈이 마주치자 백이 다시 말했다. 수림도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백의 의견에 동조했다.
“근데 나 일주일씩 쉬어도 되는 입장이야?”
백이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분위기에서도 농담이 나오다니, 수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 달도 쉬어도 돼. 아니 그냥 쭉 쉬어. 내가 다 해 먹게.”
말을 마친 수림이 혀를 차고는 가방을 챙겨 들었다. 현관 앞까지 따라온 영인의 어깨를 수림이 가볍게 두드렸다.
“괜찮겠어?”
영인이 꺼칠한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한번 세수하듯이 쓸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내가 잘 챙기고 있을게.”
푹 꺼진 뺨과 붉게 충혈된 눈만 봐도 영인이 이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백보다 영인이 문제였다.
“너 말이야, 너.”
“나는, 뭐. 버텨 봐야지.”
말을 마친 영인이 다시 한번 작게 ‘버텨야지.’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버티는 것은 백이 영인에게 강요한 단 하나의 요구사항이었다. 어떤 상황이든 백의 곁에서 버티는 것. 아무리 도망치고 싶어도, 아무리 사라지고 싶어도 버티는 것.
영인이 무르고 약한 마음을 단단하게 다잡기 위해 애썼다. 당장 백에게 사과하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고 짐을 챙겨 백의 인생에서 사라져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쩌면 이것은 백을 놓아줘야 하는 운명 같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자신의 뺨을 때렸다.
버텨야 했다.
백이 먼저 떠나라고 하기 전까지 영인은 그래 볼 작정이었다.
수림을 배웅하고 돌아온 거실에서 마주한 것은 백의 옆모습이었다. 백은 무표정한 얼굴로 냉장고에 붙어 있는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영인의 기척을 느꼈는지 금세 백이 미소 짓고 영인을 보았다. 영인은 그 미소를 보고 다시 무너져 내렸다. 그러니까 백의 저 표정은 너무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이었다.
영인과 백이 아무 사이도 아니었을 때, 영인을 향해 지어 주던 표정이었다. 그것은 사회적인 상호작용, 기본적인 예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남을 향한 배려였다. 백은 본래 더 따뜻하고 격의 없이 영인을 바라봐 주었다.
다시 자신이 넘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백을 바라보며 영인이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귓가에 언젠가 백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버텨, 영인아.’
결국 영인을 버티게 하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모두 백이었다.
“괜찮아요?”
백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위태로워 보이는 영인을 향해 물었다. 영인의 상념을 방해한 사람도 백이었다.
“네, 저는, 저는 괜찮아요.”
가까스로 대답한 영인이 눈을 내리깔았다. 도저히 백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백도 마찬가지였다. 영인을 보고 있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자기보다 반 뼘은 더 큰 사내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죄책감이 들어 불편했다.
잠시 침묵하던 백이 망설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영인은 그대로 땅에 박힌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강 과장님이랑 내가 사귀고 동거한다는 말 듣고 사실 나도 많이 놀랐어요.”
백의 이어질 말에 집중하며 영인이 자신의 뺨 안쪽 살을 깨물었다. 남자와는 사귈 수 없으니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빨리 짐을 싸서 백 앞에서 사라져 줄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백에게는 그런 영인이 무너지는 세상을 마주한 사람처럼 보였다. 영인의 반응에 아차 싶어 백이 재빨리 위로하듯 말을 덧붙였다.
“아시나 모르겠지만, 사실 제가 여자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당황스러워서. 그리고 원래 내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산다거나 그런 타입은 아니어서 이 상황이 놀랍기는 하네요.”
백의 말이 끝나자 영인이 고개를 들어 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마지막으로 백을 보는 것처럼 꽤 오랜 시간 말 없는 애틋한 시선이 이어졌다. 영인은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백을 자신의 눈동자에 새기고 싶었다.
백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불편한 그 시선을 견디고 영인을 기다려 주었다.
“…제가 나가야겠죠?”
영인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백이 작게 한숨을 쉬고서 망설였다. 백은 영인을 유능하지만 싹수가 없는 개발자로 알고 있었다. 거만하고 재수 없는 사람이라는 풍문을 여러 번 들어왔다.
그런데 지금의 영인을 보며 역시 풍문은 풍문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영인은 덩치만 컸지, 애처롭고 가여워 보였다. 비 맞은 유기견처럼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는 사내였다.
“확실히 내가 강 과장님이랑 같이 산 건 맞네요. 우리 제법 진지했나 봐요?”
백이 영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다른 주제를 던졌다. 이미 버림받을 각오를 하고 있던 영인이 뜻하지 않은 질문에 자기도 모르게 결혼반지를 끼고 있던 왼손을 백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것도 기억 안 나시죠?”
백은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신의 취향임이 분명한 반지를 보며 생각보다 영인과 더 깊은 관계였음을 직감했다.
“미안해요.”
백이 사과했고 영인은 그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연인을 눈에 담았다. 이제 물러서 줘야 할 시간이었다. 백이 원했기에 버티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가 원하지 않으면 버티지 않는다. 영인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영인이 짐을 싸려고 백을 등지고 돌아섰다. 아까 생각한 대로 우선 며칠 입고 쓸 것만 챙겨서 떠나고 백이 없을 때 다시 와서 완전히 자신의 흔적을 치우기로 계획하며 영인이 걸음을 서두르는데 백이 영인을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영인이 멈춰 서서 고개만 돌려 백을 보았다.
“일단 여기서 지내요. 나도 그게 마음이 편할 거 같은데. 우리 당연히 침실도 같이 썼죠? 내가 소파에서 지낼게요.”
충동적으로 영인을 붙잡았다. 사실 백도 어지럽고 소화가 되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대로 영인을 보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인과 자신의 관계를 떠나서 그냥 영인 자체가 그렇게 보였다.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 사람, 눈앞에서 멀어지게 하면 안 되는 사람, 말하자면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타입이었다.
백의 말을 들은 영인이 말없이 눈만 깜박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대답했다.
“아니요, 제가 소파에서 지낼게요.”
“뭐 그러셔도 되고요.”
백의 존댓말이 아프게 박혀 왔다. 그렇지만 영인은 백이 해 준 다정한 말들을, 사랑의 속삭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버텨, 영인아.’
우선은 버텨야만 했다. 버틴 이후의 일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영인에게 입력된 명령어는 오직 그것 하나였다.
“그럼 일주일 동안 뭐 하고 지낼까요? 강 과장님 출근하셔야 해요?”
“아뇨.”
마침 작업하던 프로젝트가 마무리돼서 유지 보수 관련 인수인계만 남은 상황이었다. 보통 이런 일에서는 몸값이 높은 영인이 가장 먼저 빠지기 마련이었고. 다음 프로젝트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출근할까요?”
영인이 백에게 되물었다. 자신이 있는 것이 불편하다면 어디로든 나가 줄 수 있었다.
“같이 있어야 기억이 빨리 돌아오겠죠. 오늘은 뭐하지?”
“집에서 쉬어야죠.”
“환자도 아니고 입원해 있는 동안도 갑갑해 죽을 뻔했어요. 나갑시다. 운동 좀 해요? 스크린 골프? 야구? 볼링?”
영인이 백이 나열하는 제안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니까 백은 백이었다. 기억을 잃든 잃지 않든, 영인을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백을 만나기 전과 후의 경계가 명확한 영인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볼링 치러 가시죠.”
“오, 우리 종종 볼링 같이 쳤나요?”
“네. 그런데 한 번도 책임님 이겨 본 적 없어요.”
영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로 그랬다. 볼링만큼은 백전백패였다. 고스톱은 그 반대였고. 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자꾸만 좋았던 추억이 떠올라 비죽 웃음이 났고, 그 웃음 뒤에는 순식간에 슬픔이 몰려왔다.
영인의 말을 들은 백이 놀란 표정을 짓고 곧 시원하게 웃었다.
“어? 내가 말해 준 적 없어요? 나 볼링은 준프로 수준인데. 아마추어한테 져 본 적 없어요. 이런 얘기도 안 해 주고 번번이 내가 이겨 먹었어요?”
“네, 한 번도 그런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패배의 순간을 영인이 복기했다. 백이 내기 볼링을 하자고 했던 날들, 그 내기에 걸렸던 많은 벌칙과 조건들…….
“내가 엄청 지기 싫어했나 보다. 보통 좀 봐주고 시작하는데. 와, 이거 나만의 비밀이었는데 내가 말한 건가? 기억 찾고 나면 그 백이 나한테 화내겠는데요.”
“네, 저도 그 백이 오면 좀 따져야겠어요.”
영인이 힘없이 대답했고 백은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팔짱을 끼고 소리 내 웃었다.
* * *
아침이 채 찾아오기 전 새벽, 백이 눈을 떴다. 침대는 혼자 쓰기 너무 컸다. 분명 두 사람이 썼을 침대였다.
일어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지만 눈이 떠진 이상 침대에 뭉개고 있을 백이 아니었다. 백은 곧장 몸을 일으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백의 시선이 자신의 옆자리에 머물렀다. 영인의 자리였을 곳이었다. 영인과의 시간이 너무나 순조로워서 백은 놀라웠다. 불편하다거나 어색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백은 영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영인을 계속 데리고 살고 싶을 정도였다. 애인으로는 몰라도 좋은 친구로, 룸메이트로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영인이 그것을 원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백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자신의 기억이 돌아오는 쪽이었다. 매번 자신을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가 실망하고, 서툴게 그 실망감을 감추려 드는 영인을 보는 것은 괴로웠다.
거실로 나오자 소파에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자는 영인이 보였다. 백이 큰 보폭으로 망설임 없이 그런 영인의 앞까지 다가와 무릎을 굽혔다.
“추운가.”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다시 영인에게 조심스럽게 덮어 주며 백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그 소리에 깼는지 영인의 눈꺼풀이 떨렸다. 사위가 어스름했는데도 그 떨림이 백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추워요?”
백이 묻자 영인이 눈을 뜨지 않은 채로 고개만 저었다. 기억이 돌아왔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백이 존댓말을 한다는 것은 여전히 영인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기억이 돌아왔다면 백은 지금 담요를 덮어 주는 게 아니라 영인을 안아 줬을 것이다. 백이 영인을 기억한다면 춥냐고 묻지 않고 바로 따뜻한 손으로 영인의 손과 목덜미를 짚어 보며 체온을 확인했을 것이다.
영인은 다시 떠오른 사랑받았던 기억 때문에 울컥해 백이 덮어 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턱에 힘을 줘 이를 악물었다.
영인이 담요로 얼굴과 머리를 가리자 비죽이 담요 아래로 맨발이 튀어나왔다. 오늘 밤에는 저 커다란 몸을 동시에 전부 가릴 수 있을 만한 큰 이불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백이 주방 쪽으로 몸을 틀었다.
“주스 마실래요?”
잠이 깬 것이 확실한 영인을 향해 백이 물었다. 영인은 자신의 눈두덩이를 꾹꾹 힘주어 누르고 대답했다. 갈라진 음성이었다.
“아뇨. 운동하려고요?”
“어떻게 알았지?”
백이 신통하다는 듯 대답하고 유리컵 두 개를 꺼내 오렌지 주스를 가득 따랐다. 영인의 대답은 무시당했다.
스트레칭을 하고 폼롤러로 등 근육까지 꼼꼼히 풀며 백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정말 공들여 만든 홈짐이었다. 헬스장까지 가지 않아도 웬만한 운동은 집에서 할 수 있었다.
백이 준 주스를 다 마시고 양치까지 하고 온 영인이 헬스용 스트랩을 들고 그런 백을 기다렸다.
백의 준비운동이 끝나자 익숙하게 영인은 백의 손목에 맞게 스트랩을 끼워 주었다. 하루, 이틀 한 보조가 아닌 듯한 그 손짓을 백이 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좀 그래요.”
갑자기 들려온 백의 음성에 놀란 영인이 서둘러 백에게서 손을 뗐다. 습관적으로 한 행동이었는데 백의 기분을 살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나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다.
“아, 죄송해요.”
뜬금없는 사죄에 백은 어리둥절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과였다. 그래서 아직 채 마무리되지 않은 왼손 손목을 영인 쪽으로 내밀며 되물었다.
“뭐가요? 여기는 안 해 줄 건가?”
“제 손이 닿아서 기분 상하신 거 아닌가요?”
엉뚱한 질문이었다. 백이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자신의 손목을 한 번 더 영인에게 내밀 뿐이었다.
“그게 아니고 나는 과장님을 잘 모르는데 과장님은 나를 다 아니까 내가 손해 보는 기분이라는 말이었어요.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튀지? 기분이 상하기는요. 챙겨 주니까 엄청 편하구만.”
스트랩을 조이는 영인의 손끝이 떨렸고, 영인은 백이 한 말의 진의를 살피려는 듯 슬쩍 백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가늘게 눈을 뜨고 자신을 보는 백과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영인은 한숨을 내쉬며 황급히 시선을 내렸고 백은 웃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자기보다 크고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왜 귀엽게 느껴지는 건지,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적당히 조인 스트랩을 확인한 영인이 갑작스러운 백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음성의 주인을 보았다. 지금 나가라고 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호텔일지 에어비앤비일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강영인 과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나도 좀 알아야겠어요. 궁금하기도 하고.”
영인이 정성 들여 채워 준 스트랩을 단숨에 벗어 버리며 백이 말했다. 용케 스트랩을 두는 곳은 잊지 않았는지 제자리에 두고는 방문을 나서다가 영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입을 열었다.
“얼른 씻고 준비해요. 오늘의 여행 테마는 강영인입니다.”
멋대로 결정을 내린 백은 금방 사라졌고 영인만이 홀로 거울이 가득한 방에 남았다.
“후.”
한숨을 내쉬며 영인이 자신의 턱 끝을 매만졌다. 나가라는 말보다는 훨씬 나은 이야기였지만, 여행 테마가 자신이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인은 들려줄 추억이, 알려 줄 과거가 거의 없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이야기들은 모두 초라하고 황량했다. 백을 알기 전 자신을 백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고, 백을 안 후 자신은 온통 백뿐이었다.
거울에 비치는 영인의 인영이 모두 무거운 표정으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먼저 준비를 마친 이는 백이었다. 얇은 검은색 터틀넥 니트에 같은 색 치노 팬츠를 입은 채였다. 언제나 그렇듯 백의 몸에 맞춘 듯 잘 맞았고 잘 어울렸다. 옷걸이에 걸린 트렌치코트가 나와 있는 것으로 봐서 외투도 이미 정한 모양이었다.
복도 한구석에 놓여 있는 장식장을 살펴보던 백이 영인의 기척에 뒤돌아보았다.
“우리 이런 것도 했어요?”
백의 손에는 화투가 들려 있었다. 화투는 백이 신혼여행에서 오는 길에 기념품 가게에서 산 보관함에 따로 넣어 둬서 보이지 않았을 텐데 영인을 기다리며 여기저기 꼼꼼히 살펴본 듯했다.
“네.”
영인이 볼캡을 깊숙이 눌러 쓰며 대답했다. 얼굴에 순식간이 그늘이 졌고, 그 작은 그늘 속에서 영인은 비로소 조금 안정감을 느꼈다.
“잘 쳐요?”
“…아뇨.”
영인이 대답하며 자신의 뺨 근처를 가볍게 긁적였다.
“이상하네.”
“왜요?”
“강 과장님이랑 고스톱 치면 안 된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되게 찝찝한데.”
영인이 재빨리 자신의 입을 꾹 닫았다. 정말이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기 때문에 미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한 점은 모자를 쓰고 있어 백에게 그런 자신을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돼요?”
백이 코트를 입으며 영인에게 말했다. 되돌아오는 대답이 없는데도 백은 거침없이 현관 쪽을 향해 걸었다.
“강영인 과장님 고향이나 가 볼까요? 나들이 겸.”
영인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고향이라……. 영인에게는 낯설고 무정한 단어였다.
“고향에는 아무도 없는걸요.”
“그냥 가 보는 거죠. 강영인 과장님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자랐고 어쩌다 나랑 이렇게 눈이 맞았나, 그런 거 얘기도 하고.”
“그걸 정말로 원해요?”
백이 멈춰 서더니 여전히 아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영인을 바라보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요?’라는 질문이 목구멍 언저리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영인은 가까스로 그 의문을 삼켰다. 그 질문에 백이 무언가 깨닫고 ‘그러게요.’라고 하며 영인을 내쫓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백이 원한다고 대답했다. 백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 수 있었다. 버티고 견뎌 내고, 눈치 없는 척하고, 뻔뻔하게 굴고 또 별 볼 일 없는 과거도 다 보여 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도 아닌 일들이다. 받은 것은 너무 많았고 해 줄 것은 이토록 별것도 아닌 것들뿐이었다.
주차장으로 갈 줄 알았는데 백은 대기 중이던 택시에 올라탔다.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가요. 술도 한잔해야지.”
백이 습관적으로 택시 뒷좌석 문을 열고 영인이 탈 때까지 잡아 주며 말했다. 영인이 올라타자 조심스럽게 문을 닫아 주었고 자신은 기사 옆자리에 자리했다.
“근데 강 과장님, 고향이 어디예요?”
안전벨트를 매며 백이 고개를 돌려 영인 쪽을 보았다. 영인에게도 안전벨트를 하라는 식으로 자기 어깨 쪽 벨트 끈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백이 물었다.
“순천이요.”
영인이 벨트를 몸에 맞도록 넉넉하게 빼고는 대답했다.
“기사님, 용산역으로 가 주세요.”
대답이 끝나자마자 백이 목적지를 말하고는 핸드폰을 꺼내 KTX 시간표를 확인했다.
* * *
‘일사천리.’
영인은 어느새 익숙한 순천 시내 한복판에 서서 그 단어를 생각했다. 그러니까 백이 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일이 그랬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웠다. 사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처음이었다. 십여 년만이었다. 얕은 감상에 빠진 영인을 현실로 불러온 것은 백의 음성이었다. 늘 그랬듯이.
“이제 어디로 가요?”
“버스 타야 해요.”
영인이 앞장서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백은 그런 영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영인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남자를 사귀는 것도 놀라운데 저렇게 큰 남자라니. 백은 자신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다. 저런 남자를 사랑하고 안는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 같았다.
시내버스는 배차 간격이 길었다. 그런데 백과 영인이 도착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곧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고 백이 작게 휘파람을 불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창가 자리에 앉으며 백이 말했다.
“오늘 일이 잘 풀리네요.”
“책임님이 안 풀리는 날도 있어요?”
백의 옆자리가 비었음에도 영인은 앉지 않고 그 앞에 서서 버스 기둥을 잡았다.
“나도 안 풀릴 때가 얼마나 많은데요.”
버스가 덜컹거렸고 백은 흔들리는 창문 밖 풍경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영인을 보았다. 영인은 미동도 없이 서서 그저 바닥만 보고 있었다.
“여기 앉아요.”
백이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영인은 흘낏 그 손을 바라보고는 무뚝뚝하게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우리 둘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데.”
영인의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이 자신의 몸을 창가 쪽으로 바싹 붙여 앉고는 다시 손으로 빈 좌석을 두드렸다. 영인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기둥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모자 그늘 때문에 영인의 눈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백은 손가락 끝으로 리듬 타듯 계속 그 옆자리를 두드렸다. 얼음처럼 단단하게 언 영인은 그 간단하고 가벼운 손짓만으로도 산산이 부서졌고.
손가락 움직임에 맞춰 백이 노래까지 흥얼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영인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멜로디에 맞춰 제멋대로 가사를 붙여 불렀는데 중간중간 영인의 이름을 넣었기 때문에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영인이 앉자 버스 좌석이 꽉 찼고 영인과 백 둘 다 어깨를 펼 수 없었다. 영인이 잔뜩 움츠린 채 팔짱을 꼈다.
“충분히요?”
“이거면 됐지.”
백이 웃으며 창가를 보았다. 시내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 타고 학교 다녔어요.”
듬성듬성 보이는 건물과 키가 작은 집, 흙길을 내려다보며 백이 입을 열었다. 백은 여전히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였다. 영인은 그 옆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며 백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친구들이랑. 강 과장님은 이 버스 타고 학교 다녔어요?”
“아뇨.”
백이 자신 쪽을 보려고 하자 영인이 먼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백은 영인의 얼굴이 아닌 아래로 향한 모자챙만 봐야 했다.
그대로 대화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영인의 대답이 이어졌다.
“저는 기숙학교 다녔어요.”
“그랬구나. 영인이는 기숙학교 출신.”
여러 번 같은 문장을 외우려는 듯 반복해서 백이 중얼거렸다.
“영인이는 기숙학교 출신.”
영인은 갑자기 들린 자신의 이름에 놀라 흠칫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저 이름 두 자에 이렇게 설레고 떨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너무 듣기 좋은 그 말소리에 눈을 감고 집중하고야 말았다.
미치도록 백의 손을 잡고 싶었다.
목적지까지 영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백도 더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짧은 정적이 둘 사이에 흘렀다.
“내리시죠.”
영인이 먼저 나섰고 백도 가볍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영인과 백이 내려서 떠나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한참 바라보았다.
“나 여기 알아요. 엄청 유명하잖아.”
백이 정거장 이름을 보고 말했다. 영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관광지였지만, 영인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것도 아주 척박하고 메마른.
“여기서부터는 좀 걸어야 해요.”
영인이 앞장섰고 이번에도 백은 그 뒤였다. 그 뒷모습을 보자니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홀로 걸어갔을 어린 영인의 모습이 상상됐다.
“얼마나 걸어요?”
백이 영인의 옆으로 가서 물었다. 성큼성큼, 따라붙으니 금방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영인이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앞에 펼쳐진 길을 보았다. 마치 거리를 가늠하듯이.
“모르겠어요. 어릴 때는 시간을 모르고 걸어서. 그냥 걷다 보면 집이 나왔죠.”
“엄마나 아빠가 마중하러 나오진 않으셨고요? 항상 혼자 걸었어요?”
백이 의아한 듯 물었다. 영인이 멈춰 서서 자신의 모자를 다시 한번 고쳐 썼다. 사실 고쳐 썼다기보다는 더 견고하게 방어막을 친 셈이었다.
“할머니 손에 자랐어요.”
충분히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는 생각이 들자 영인이 입을 열었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고 백은 자신을 꽁꽁 감춘 영인과 함께 선 채였다.
한적한 길이었지만, 중간중간 오토바이도 지나가고 사람도 지나갔다. 백이 행여 영인이 누군가와 부딪칠까 하는 염려에 그의 팔뚝을 잡고 자신 쪽으로 당겼다.
영인은 그런 백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얘기가 궁금해요?”
백이 영인의 팔뚝을 놓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해요.”
볕이 좋은 늦가을날이었다. 오후 세 시였고 선선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잠시나마 누릴 수 있는 평화롭고 다정한 날씨였다.
“보통은 다들 부모가 있잖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제가 살던 동네는 워낙 작아서 나 말고는 엄마 아빠 없는 애가 없었어요.”
영인이 백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영인이 먼저 떠났고 영인의 음성이 그 뒤를 따랐다.
분명 청명하고 아름다운 날이었는데 순식간에 쓸쓸해졌다고 생각하며 백도 걸음을 서둘렀다. 어쩐지 영인의 뒤가 아닌 옆에 있고 싶었다.
영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있었다. 어떤 날은 상처였고 어떤 날은 의문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할 수 있을까? 자신도 채 이해하지 못한 지난날들을.
“나도 태어난 걸 보면 부모님이 있긴 할 텐데 없더라고요. 엄마 아빠 얘기를 물어보면 혼났어요, 할머니한테.”
또래들은 모두 가지고 있던 부모를 영인만 갖지 못했다. 유년 시절에는 자신이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남들을 부러워해야 했다.
꾹꾹 눌러 담고, 최대한 꼭꼭 숨겨 둔 과거가 말하기 시작하자 영인이 어쩌지도 못할 새에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할머니가 많이 사랑해 주셨어요. 하지만 바쁘셨죠. 저를 책임지셔야 했으니까요.”
이 근원적인 결핍은 영인이 기억하고 있는 가장 첫 순간부터 늘 존재했다.
연로한 할머니가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이끈 영인의 생이었다. 영인은 할머니의 굽은 어깨나 거친 손바닥, 발바닥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짐스러운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자각해야만 했다.
“한 번씩 자다 밤에 눈이 떠질 때가 있잖아요. 어느 날 그랬는데 할머니가 안 계시더라고요. 너무 무서워서 맨발로 뛰쳐나왔는데 동네는 깜깜하지, 할머니는 어디에도 없지. 눈물이 나니까 더 보이는 건 없고 콧물이 나니까 숨은 막히고. 그렇게 집에도 못 가고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고 헤매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나타나서 제 등을 철썩 때리셨어요. 그 매가 아프고 무섭고 그런데 동시에 안심이 되고.”
어떤 생각은 정리도 하기 전에 말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내뱉고서야 영인도 자신의 진심과 진실을 깨달았다.
“무서울 만했네. 할머니도 놀라셨겠고.”
백이 진짜 아이를 달래듯 영인의 등을 토닥였다. 긴장하는 영인의 등 근육이 느껴졌다.
“네, 혼났어요. 뭐 한다고 밤에 깨냐고. 왜 잠도 제대로 못 자냐고. 그 이후로 밤에 깨면 절대 눈 뜨지 않았어요. 할머니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데, 있다고 믿으면서 눈은 안 떴지.”
때로는 확실한 진실보다 모호한 믿음이 더 위로되고는 했다. 아니 사실 영인의 삶 자체가 그러했다. 진실을 확인하기보다는 피하고 덮어두었다. 그편이 덜 두려웠다.
“그런 밤이면 시간은 어찌나 안 가던지. 잠은 왜 또다시 들 수 없는 건지. 왜 잠도 잘 못 자고 나는 이렇게 바보 같은지. 그런 생각 하면서 시간을 죽이다 보면, 그래도 아침은 오더라고요.”
이야기를 마친 영인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기도 잊고 있던 일들이었다.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났고, 백에게 말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강 과장님이 왜 바보예요. 똑똑한 편이지.”
유난히 높은 하늘을 보던 영인이 백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백의 얼굴을 보았다.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백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빈말은 안 합니다.”
이번에는 백이 먼저 걷기 시작했다. 길도 모르면서 백은 무작정 앞을 향해 갔다. 이번에 뒷모습을 보아야 하는 사람은 영인이었다.
어른이 되면서 영인은 자신의 할머니가 부모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왜 그렇게 호되게 혼을 냈는지 알게 되었다. 아마 그들은 자신만큼이나 구제 불능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식도 키우지 못하고 버리지.
백은 영인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 그런 백의 곁에 잠시 머문 것으로 일생의 행운을 다 쓴 것이 아닐까. 이제는 다시 각자에게 어울리는 삶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아닐까. 영인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쫓아오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자 백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영인을 확인했다. 영인은 아까 그 자리에 멈춰서 백을 보고 있었다.
“빨리 와요.”
입을 벌린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영인이 백의 부름에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옮겼다. 백이 영인을 부르자 다시 그 당부가 떠오른 탓이었다.
‘버텨, 영인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얼마 못 버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거운 걸음이었다. 실로 무거웠다. 죄의식과 두려움이, 불안함이 영인을 짓누르고 있었다.
백은 그런 영인을 지켜보다 자기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냥 불쑥 그러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홀로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외진 길을 걸어 다녔을 영인. 가로등도 드문 동네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에게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도 모르고 작은 발로 그저 내달렸을 영인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때 곁에 있었다면 업어 줬을 텐데. 잠들 때까지 등에 영인을 업고 대신 걸어 줬을 텐데.
그랬다. 백은 영인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백의 기억 속에 없는 영인이기에 그것은 적당하지도 마땅하지도 않은 감정인데도 그랬다.
영인이 백의 근처까지 다다랐을 때 백의 눈에 영인은 이미 그 작은 꼬마로 보였다.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백이 우두커니 서 있는 영인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고백을 시작했다. 백의 내밀하고 어두운 진실을 들려주고 싶어졌다.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냥 그렇게 물물교환을 하듯, 비밀을 나누고 싶어졌다.
“있잖아요, 사실 나도 형이 하나 있거든요. 외동으로 알고 있죠?”
백이 미소 지으며 물어왔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태도였다. 영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책임님한테 형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책임님이 다 이야기해 주었으니까요. 다시 꺼낼 필요 없습니다.”
이번에 충격받은 이는 백이었다. 누구한테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잠시 정신을 못 차렸다. 영인은 이렇게까지 당황하고 동요하는 백은 처음이었다.
“내가 우리 형 이야기를 했다고요?”
“네.”
“어디까지?”
“아마도 전부요. 다른 사람들이 책임님을 뭐라고 부르든 나한테는 언제나 노백입니다. 내가 책임님한테 어떤 사람이든 나한테 책임님은 유일무이하고 대체 불가능한…….”
영인이 채 말을 마치지 못했다. 절절한 사랑 고백과 찬양이 튀어나올 뻔했다. 참아야 했다. 백에게 부담 따위는 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백은 퍽 놀라고 동시에 감동한 상태였다. 자신이 여태 누구에게도 차마 밝히지 못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제 눈앞에 있었다. 게다가 그는 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강 과장님.”
백의 나직한 부름에 영인이 그를 보았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무슨 생각이요?”
푸른 하늘과 관리가 되지 않아 울퉁불퉁, 여기저기 갈라진 아스팔트 길. 그 틈 사이로 자라난 잡초들. 한구석에 못처럼 박혀 있는 강영인. 그리고 그런 영인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 자신.
“강 과장님이 나를 다시 꼬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
백의 말을 들은 영인이 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진 듯 휘청였다. 그러고는 아까와는 다른 속도로 빠르게 백의 곁으로 다가왔다.
“책임님.”
“네?”
백이 미소 지으며 영인을 보았다. 영인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백을 보다가 다시 자신의 발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요.”
“네.”
“그건 틀렸어요.”
“뭐가요?”
“제가 책임님을 꼬신 게 아니라, 그 반대였거든요.”
“…거짓말.”
백이 단호하게 영인의 말을 거짓말 취급했다. 놀라고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했다. 자신을 놀려 먹으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하는 영인은 장난치는 사람 같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조심스러워 보였다.
“제가 어떻게 책임님을 꼬시겠어요?”
백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영인에게 물었지만, 영인은 설명할 수 없었다. 갑자기 다가온 이도, 자신을 멋대로 옆에 둔 이도, 떠났다가 더 강력하게 돌아온 이도, 그러다가 기억을 다 잊은 이도 백이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아마도 책임님은 내가 불쌍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요? 그런데 지금 나는, 그때와는 달라서요. 책임님 덕분에 달라져서 더는 불쌍하지도 않은데 어쩌죠?”
서로를 만나고 많은 것이 변한 영인과 변함이 없는 백이 서로를 마주했다. 영인은 이전과 다름없이 무결한 백을 응시했다. 안타깝고 슬퍼졌다.
도망가고 싶지만, 그런 자신을 도망가지 못하는 게 하는 백과의 시간들. 일생이 불안정했던 영인을 붙잡고 땅에 발을 붙이고 살게 해 준 백. 그런 백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영인은 노력하고 있었다.
“뭐요? 불쌍? 그럴 리가. 내가 무슨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불쌍해서 반했을 리 없잖아요. 분명 다른 매력이 있었을 텐데…….”
백의 머릿속에 거대한 물음표만이 떠올랐고 영인은 그런 백을 두고 떠났다.
“진짜로? 진짜? 내가 꼬셨다고?”
영인의 뒤를 따라가며 백이 물었다. 영인은 그 천진하면서도 아픈 질문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짧은 산책이 끝났다. 영인과 백은 터미널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기차 출발 전 빵과 커피를 마셨으니 말하자면 제대로 된 첫 끼니인 셈이었다.
“소주 한잔할까요?”
백이 영인을 보고 물었다. 영인은 고개를 숙인 채 깍지 낀 자신의 손을 보고 있었다. 도무지 저 얼굴을 제대로 보여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책임님은 아직 술은…….”
“괜찮아, 괜찮아.”
영인이 마시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자 백이 곧장 손을 살짝 들어 주문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백반 2인분에 돼지 두루치기를 추가한 한 상이 금세 차려졌다. 백이 소주병을 흔들고 병뚜껑을 딴 뒤 영인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길쭉한 손의 경쾌한 움직임을 영인이 넋 놓고 바라보다가 현실 같으면서 현실 같지 않은 이 순간을 실감했다.
“총각들 매운 거 잘 먹나?”
서빙 하던 사장이 백과 영인의 테이블을 가만히 지켜보다 물었다. 잘생긴 남자 둘을 보자 뭐라도 하나 더 얹어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 모양이었다.
“잘 먹어요?”
백이 영인을 보고 묻자 영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는다는데요.”
“우리 밭에서 고추가 나는데 엄청 매워. 매운 땡초야. 좀 줄까요?”
“주세요.”
백이 웃으며 대답했고 곧 그가 종지에 된장과 마르고 작은 고추를 몇 개 가져왔다.
영인의 눈앞에 불쑥 소주잔을 든 손이 나타났다. 영인이 시선을 올려 그 반듯한 손톱과 적당히 핏줄이 솟은 손등, 단단한 손목을 천천히 관찰했다.
“한잔하죠.”
백이 소주잔을 가볍게 흔들었고 그 움직임에 맞춰 투명한 술이 찰랑거렸다. 영인이 자신의 잔을 들어 일방적으로 그런 백의 잔에 부딪히고는 그대로 술을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었다.
건배라기보다는 돌진 같은 그 행위에 놀란 것도 잠시, 백이 작게 웃으며 자신도 제 몫의 술을 비워 냈다.
“술이 고팠어요?”
질문하는 백의 음성에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영인은 이 말투를 잘 알았다.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었고. 빙그레 웃고 있는 백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영인이 말없이 자신과 백의 잔을 다시 채웠다.
묵묵히 두 번째 잔을 비우는 영인을 백은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저 커다란 남자가 어쩐지 투정 부리는 것처럼 보여서 귀여웠다.
귀여웠다. 저도 모르게 그 결론에 이르자 백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귀엽다니. 가슴 안쪽이 싸르르 아프면서 간지러웠다. 손으로 긁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부분이었다.
영인은 또 술을 따랐고, 백은 아까 받은 고추를 용기 내서 집어 들었다. 받아 놓고 안 먹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리고 한입 베어 무는 순간, 후회했다. 채 씹기도 전에 입 안에 침이 고였고 이 고추는 백이 먹을 수 없는 레벨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운터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 같던 사장이 그런 백을 보고는 덤덤하게 물어왔다.
“맵지요?”
백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밥 한 숟가락을 크게 떠서 매운맛을 중화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통증에 혼이 쏙 빠졌다.
그런 백을 걱정스럽게 보며 영인이 물을 한 잔 따라 백에게 건넸다. 백이 그 컵을 잡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과정에서 잠깐 손끝이 맞닿았고 영인은 숨을 참았다.
고픈 것은 술이 아니었다. 밥도 아니었다. 백이었다.
한참 지나서야 진정한 백이 한숨을 내쉬며 영인을 보았다. 민망한지 실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진짜 맵다. 매운 거 잘 먹어요?”
“네. 책임님은 못 먹는 거 알고요.”
“먹어 봐요. 이거 진짜 매워요.”
백이 코를 훌쩍이며 개중 가장 큰 고추를 영인에게 내밀었다. 영인이 고추를 받아서 된장과 고추장 어떤 것도 찍지 않고, 그대로 꼭지만 남기고 베어 물었다.
“후회할 텐데…….”
백의 중얼거림에도 영인은 으적으적, 그 매운 고추를 그저 씹을 뿐이었다.
고추는 정말로 매웠다. 백은 아직도 볼 안쪽과 혀가 화끈거렸다. 조금만 먹은 자신도 이럴진대 영인은 어떨지 걱정이 됐다.
그 염려와 걱정을 영인도 알아차렸다.
영인은 백에게 자신이 고추를 먹든, 고춧가루를 먹든 왜 걱정하냐고 묻고 싶었다. 나를 기억도 못 하면서 이런 건 왜 걱정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나는 노백한테 아무것도 아닌 타인이 되었는데 왜 쓸데없이 다정하고 친절한지, 왜 여전히 따뜻하게 구는지 알려 달라고 하고 싶었다.
영인이 완전히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 바닥을 응시했다. 모든 것이 이대로 끝날 것만 같다는 두려움과 백이 기억을 잃은 이후로 단 한 순간도 사라지지 않은 헛된 희망이 마구 뒤섞였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백은 버티라고만 했지, 언제까지 어떻게 하라고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그 당부는, 백이 준 지침은 어쩌면 이미 무효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영인은 참을 수 없었다.
“많이 맵죠? 맵다니까.”
푹 고꾸라진 영인을 보며 백이 말했다. 여전히 다감한 목소리와 어떤 숨겨진 의중도 없는 말이었다. 꼬아 들을 필요도, 숨겨진 뜻이나 행간을 읽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백의 말은 그냥 들리는 대로 듣고 믿으면 됐다.
그래서 영인은 슬펐다. 자꾸만 슬퍼졌다. 이것은 이별 여행인 셈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랜 침묵이 이어졌고 이내 조금씩 영인의 두툼한 어깨가 떨렸다.
“그렇게 매워요?”
백이 물을 잔뜩 따라 영인 앞에 내려놓고는 상체를 앞으로 숙여 영인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다. 망할 모자 때문에 제대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제 영인은 더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도 없었다. 그럴 여력조차 없었다. 영인의 등과 어깨가 아까보다 더 들썩였고 이를 악물어 보았지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졌다.
“울어요?”
이상을 감지한 백이 주변을 한번 살펴보고는 영인의 모자를 벗겼다. 갑자기 사라진 보호막에 놀란 영인이 고개를 들어 백을 보았고, 백은 채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엉망이 된 영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매워서요.”
가까스로 대답한 영인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입술을 물었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에 더 숨이 막혔다.
“하아.”
백은 영인의 모자를 든 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을 말없이 영인의 정수리를 응시했다. 꽤 긴 시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백의 한숨 소리가 들렸고, 그뿐이었다.
먼저 입을 연 이는 백이었다.
“미안해요.”
가까스로 감정을 추슬렀던 영인이 갑자기 들이닥친 사과에 다시 속절없이 무너졌다.
울컥하고 치미는 슬픔을 내뱉지 않기 위해 영인이 온몸에 힘을 주었다. 단단하게 긴장하는 영인의 어깨와 목 부근이 백의 눈에도 보였다.
백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영인의 옆자리로 왔다. 그러고는 함부로 벗긴 모자를 다시 영인의 머리에 제대로 씌워 주었다. 이편이 영인에게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백의 손길이 머리카락에 닿자 영인이 다시 흠칫, 놀랐다. 백은 그런 영인의 어깨 근처를 가볍게 잡고 눌렀다.
“미안해요.”
나직한 백의 사과가 반복되었다. 백의 말은 들리는 대로 들으면 됐다. 백은 영인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어서 미안한지, 사랑하지 않아서 미안한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랬다.
영인은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백은 울지도 않는 영인의 등과 어깨를 담백하게 쓰다듬으며 뜻을 알 수 없지만, 진심인 사과를 영인의 슬픔이 잦아들 때까지 끊이지 않게 속삭여 주었다.
“해가 지니까 춥네요.”
먼저 식당 밖으로 나와 있던 영인에게 말하며 백이 식당 문을 닫았다. 영인은 눈물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는 그러게요, 하며 작게 대답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훌쩍 떠나 버리는 영인의 뒤를 따라가던 백이 장난스럽게 영인의 팔에 팔짱을 꼈다.
“강 과장님 옷이 너무 얇다.”
갑작스러운 백의 접촉에 소스라치게 놀란 영인이 백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백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왜 이래요. 사람들 많은 데서.”
영인이 당황해하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 아저씨들 다 팔짱 끼고 난리 났는데 뭐 어떻습니까? 저 아저씨 둘은 뽀뽀한다.”
백이 킥킥 웃으며 영인을 붙잡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백의 말대로 거리에 있는 취객들은 다들 연인이라도 되듯이 얼싸안고 있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풍경이라면 풍경이었다.
“우리도 취한 척하면 되지. 빨리 가자, 가자. 춥다.”
그대로 영인을 끌고 백이 걸음 속도를 높였고 영인은 목석처럼 단단하게 굳은 채 어색하게 백에게 끌려갔다.
“그런데 언제까지 책임님, 책임님 할 거예요? 나 책임 관둔 지 오래라면서.”
“저도 강 과장 안 한 지 오래예요.”
무뚝뚝한 영인의 대답에 백이 웃었다. 별것 아닌 말들인데도 영인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나 뭐라고 불렀어요?”
“형이라고요.”
형이라는 호칭이 너무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렇게 불렀는데도 그랬다.
“훨씬 듣기 좋다. 형 해요, 형. 나는 강 과장님 뭐라고 불렀어요?”
영인이 걸음을 멈추고 백을 보았다. 백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반쯤 가려진 눈과 우뚝 솟은 코, 다부진 입매를 관찰했다.
“이름 불렀어요.”
영인이 자신의 턱 끝을 한번 쓸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영인아, 이렇게요?”
백의 입에서 나오는 익숙한 자신의 이름에 영인이 군침을 삼켰다.
“네.”
무언가 더 말할 것 같더니 영인은 그 짧은 대답을 끝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영인아.”
다시 이름이 들렸다. 영인의 움직임이 대번에 어색해졌다.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백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만 불렀나? 영인아.”
돌아보지 않는 영인을 향해 다시 말하고 백이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묘한 설렘이 느껴지는 걸음걸이였고 그래서인지 유독 발걸음 소리가 경쾌했다.
“우리 예쁜 영인이, 이렇게는 안 부르고?”
어느새 옆에 온 백을 영인이 외면했다. 명백한 놀림이었다.
“그렇게는 안 불렀어요. 그냥 영인아.”
대응하지 말아야 했는데 영인이 발끈하고 대답했다.
“우리 영인이, 귀여운 영인이. 이렇게도 안 부르고?”
급기야 자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백이 웃었다. 쌀쌀하지만 상쾌하고 맑은 가을밤 날씨와 적당히 오른 취기, 어쩐지 보호해 줘야 할 것만 같은 잊힌 연인. 이 모든 것들 때문에 백의 마음이 붕붕 떠올랐다.
남의 속도 모르고 장난만 치는 백을 영인이 쏘아보았다. 미웠다. 미웠는데 눈이 마주치자 보이는 입 모양 때문에 결국 허물어지고 말았다.
‘우쭈쭈, 우쭈쭈.’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리는 영인의 눈앞에서 백도 천진하게 웃었다.
“참나.”
“울다가 웃으면 거기, 털 나는데. 영인이 큰일 났다.”
“기억은 하나도 안 나는 거죠?”
영인이 작은 기대를 숨기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백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런데 되게 익숙한 느낌이 나. 그냥 말 편하게 합니다? 너도 형이라고 불러.”
영인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어쩐지 고개를 저은 것 같기도 했다. 백이 다시 그런 영인의 곁에 일부러 다가가 걸었다. 영인에게는 자꾸만 장난을 걸고 싶었다. 반응이 큰 것도 아닌데 그랬다.
* * *
백이 눈을 떴다. 또다시 새벽이었다. 보통 깨는 일 없이 푹 자던 백에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홀로 있자니 새삼스럽게 고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이나 외로움은 늘 이랬다. 사람이 약해진 순간을 귀신같이 알고 불시에 들이닥쳤다.
옆자리 시트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누구의 체온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선도 그 빈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큰 침대였다.
“맞다.”
돌연 백은 영인의 발이 떠올랐다. 채 몸을 다 가려 주지도 못하는 담요와 그 담요를 뚫고 빼꼼히 나온 잘생긴 발가락들.
간단하게 몸을 푼 백이 천천히 여분의 이불을 정리해 두었을 듯한 장 근처로 갔다. 내딛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백이 한 아름 이불을 챙겨 안고서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행여라도 영인을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몸놀림이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작은 담요와 씨름하며 잘 영인을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났다. 얼굴이냐, 발이냐. 무엇을 꼭꼭 숨기고 자고 있으려나. 백의 입꼬리가 백이 알아채기도 전에 올라갔다.
그러나 마주한 풍경은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영인은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자고 있지 않았다. 언제부터 깨어 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백이 다가가도 영인은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바닥 한구석만 바라보고 있었다.
‘영인이가 잠에서 깬 것이 맞을까?’
아닐 것 같았다. 영인은 처음부터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서늘하고 초췌한 인상에는 조금의 잠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이 제법 가까운 곳까지 왔는데도 영인은 혼자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뺨도 움푹 패어 있었다. 어두운 달빛 아래 앉아 있으니 그 음영이 더 짙게 보였다.
“안 자?”
백의 질문이 영인의 침몰을 막았다. 끝도 없이 가라앉던 영인이 놀란 눈으로 구명줄 같은 음성이 들린 곳을 보았다. 환상처럼 백이 서 있었다. 도무지 돌아와 줄 것 같지 않았던 연인의 얼굴을 하고서.
영인이 황급히 자신의 뺨을 손바닥으로 밀어 닦고 눈을 감았다. 슬픔이나 상실의 흔적을 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백에게 어떠한 죄의식이나 부채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까지는, 그런 것까지는 주고 싶지 않았다.
백이 소파 위에 이불을 올려 두고는 영인의 발치에 털썩 앉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백의 움직임이 다 느껴졌다. 귀를 막지 않았기 때문에 백이 하는 일을 다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발끝에 백의 정강이가 닿자 영인은 눈을 감은 채로 인상을 썼다. 영인이 슬쩍 발을 뒤로 물렀지만, 그만큼 백이 영인에게 다가왔다.
소파 때문에 이제 더는 뒤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영인이 원망하는 듯한 눈으로 백을 보았고 영인과 백의 눈이 마주쳤다.
백이 자연스럽게 영인을 향해 팔을 벌렸다. 영인은 활짝 열린 품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백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한번 끄덕여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마치 길을 알려 주듯이.
잠시 망설이던 영인이 어정쩡하게 몸을 구겨 백의 품에 안겼다. 애초에 영인보다 백이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자세가 더욱 애매했다. 영인은 마치 넘쳐흐르는 작은 컵 속 물처럼, 맥없이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그렇게 백의 품에 쏟아졌다. 거스를 수 없는 일이었다.
갑작스럽고도 자연스러운 포옹이었다. 영인은 제자리를 찾은 셈이었는데도 여전히 뻣뻣하고 어색하게 굴었다.
백이 단단하게 굳은 영인의 몸을 가볍게 쓸어 주며 토닥였다. 두툼한 등 근육이 손바닥에 느껴질 때 경외와 질투가 들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연민과 안타까움이 깔린 위로였다.
“왜 울어?”
꽉 잠겼지만, 다정한 음성으로 백이 영인에게 물었다. 눈물이 그친 지 오래였는데 백에게 들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다시 영인을 슬프게 했다. 울게 만들었다. 백의 가슴팍이 영인의 눈물로 차츰차츰 젖어 들어갔다.
꽤 오랜 시간 백은 영인을 안고 달랬다. 영인은 백에게 완전히 기대지도 못하고, 백을 떠나지도 못한 채 엉성하게 안겨 울었다. 백의 옷을 적시는 눈물이 아니면 영인이 운다고 느낄 수 없을 만큼 고요한 울음이었다. 코 한번 훌쩍거리지도 않고 몸 한번 들썩거리지도 않고 가만히 안겨 영인은 울었다.
서서히 영인의 슬픔이 잦아드는 것을 느낀 백이 영인을 더욱 세게 안아 주며 말했다.
“참 조용히도 운다.”
다 울고 나니 영인은 더 숨고 싶어졌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울면 혼이 났다. 할머니는 우는 영인을 싫어했다.
지금에서야 우는 영인이 아니라, 울어도 원하는 것을 해 줄 수 없는 형편과 상황이 싫었던 거라는 걸 알지 어릴 때는 그렇게 여겼다. 울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울면 혼난다고.
그때부터 생긴 버릇이라면 버릇이었다. 웬만해서는 감정을 억눌렀고, 아프고 힘든 것은 안으로 감췄으며 울지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는 누구도 모르게 아무도 못 볼 때 조용히 정말로 조용히 홀로 울었다.
그리고 백은 영인이 그렇게 우는 모습이 더 짠하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차라리 엉엉 소리 내고 펑펑 울지, 울부짖고 백을 탓하지. 저렇게 주룩주룩 소리도 없이 눈물만 흘려대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기억을 못 해서 많이 힘들어?”
“우리가 헤어질 것 같아요.”
영인이 백의 목덜미 근처에 이마를 기대고 속삭였다. 한바탕 울고 난 후라 음성이 평소보다 더 가라앉아 있었다. 백은 갑자기 느껴지는 간지러움에 순간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영인과 맞닿은 피부가 간지러운 게 아니라 그보다 더 아래가 간질간질했다.
“우리 헤어져야 해?”
백의 순수한 질문에 영인이 눈을 감았다. 헤어지지 않아도 되나요? 되묻고 싶었다. 당신의 인생에 내가 계속 머물러도 되나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영인은 따져 묻고 싶었다.
사랑은, 사랑했던 시간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고작 나뿐인데. 당신의 사랑 없이 내가 당신의 곁에 남을 수 있나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여러 날 잠들지 못하고 내린 결론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책임님, 나는 책임님을 사랑해요. 단순히 친구로 가족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순수한 게 아니에요. 하지만 책임님은 그렇지 않죠. 이렇게 계속 함께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영인은 백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차마 그렇게 부를 수 없었다.
백의 품을 벗어나려고 영인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몸짓은 금세 백에게 저지당했다. 백이 좀 더 영인을 당겨 안았다. 영인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백에게 안겨야만 했다.
“하지만 영인아, 어느 날 내 기억이 돌아왔을 때 영인이 네가 없으면 내가 얼마나 슬프겠어. 지금 너보다 더 많이 울 텐데? 이렇게 가 버리면 안 될 거 같은데.”
잡아 줘서 고맙고 또 고통스러웠다.
“가지 마. 같이 침대에서 자자. 소파는 너한테 너무 불편하잖아.”
백의 음성이 잔잔하게 영인의 귓가에 울렸다. 잠기운이 채 다 가시지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희미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확실하고 선명했다.
그리고 영인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백의 품에서 벗어났다. 일어서서 잠시 허공을 보던 영인이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는 백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책임님, 제 말을 이해 못 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책임님한테 성욕을 느껴요. 우리가 불알친구처럼 같이 운동하고 게임하고 그렇게만 지냈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 난 책임님 불알친구가 아니라 불알을 빨아먹고 싶은 사람이에요.”
말을 마치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뀌기는 뭐가 바뀌었다는 말인지. 영인은 자신이 그대로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관계를 망치고, 상대방을 상처 주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구제 불능,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비웃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제 끝났다는 표정으로 영인이 백을 다시 보았다. 백은 여전히 책상다리하고 편하게 앉은 채로 뭔가 고심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나도 아무 생각 없던 건 아니야. 너랑 나랑 결혼반지까지 나눠 낀 사이인데. 그 주제는 아직은 좀 껄끄러우니까 내가 외면했어. 미안. 고민 좀 해 보자. 그리고 너 그렇게 따지고 들면 나도 좀 억울해.”
전혀 타격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백에게 영인은 놀랐다. 뜨악한 기색을 감추려 괜히 더 날을 세운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기억 못 하는 게 아니잖아. 노력하고 있어. 도와줘.”
백은 어쩌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영인이 엉망으로 꼬고 망친 실타래를 아무렇지 않게 다시 풀고 있었다. 이번에도 영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도와주라. 응?”
백이 길쭉한 영인의 손가락 끝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튕기며 다시 말했다. 장난기가 섞였다.
“너도 이 백은 가고 그 백이 오는 게 낫잖아.”
영인이 울컥하는 표정으로 자기도 모르게 백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백이 씨익 웃으며 ‘그치?’라고 물었다.
“나한테는 이 백이랑 그 백이랑 다른 거 하나도 없어요. 다 노백이라고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자꾸 자기는 가고 다른 백을 소환할 것처럼 구는 백이 싫었다. 불청객이 아니었다. 백이 기억을 잃은 것은 재난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백이 백이 아닌 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영인은 백을 사랑했다. 기억이 있는 백이든, 그렇지 못한 백이든 그랬다. 백이 여기서 갑자기 100살 노인이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백이 유령이 돼도, 팔다리가 사라지고 몸통만 남아도, 아니면 고양이 몸에 들어가도 백은 백이다. 영인은 모든 백을 사랑했다.
가기는 어디를 간단 말인가. 보내 줄 마음은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자신의 모순이 명백하게 드러난 셈이었다. 보내 주지 않겠다면서 어떻게 자신은 떠나겠다고. 무슨 수로. 이렇게 비겁하다니.
“가자, 침대로.”
백이 복잡해 보이는 영인의 손목을 낚아채고 가뿐하게 일어섰다. 영인은 백에게 손목이 잡힌 채로 그런 백의 발뒤꿈치만 보며 끌려갔다.
침대에 먼저 누운 이는 백이었다. 백이 자신의 옆자리를 탕탕, 소리 나게 큰 손바닥으로 치고 “누워.”라고 말했다.
영인의 고뇌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고, 백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원래 네 자리잖아. 누워, 자자.”
영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너무 오랜만에 눕는 백의 옆자리였다. 백은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자신의 팔을 영인의 목 아래로 욱여넣기 시작했다.
“이리 와.”
영인을 보듬고 싶었다. 비 맞은 아기 새에게 손으로 우산을 만들어 주듯, 덜덜 떠는 강아지를 끌어안아 주듯.
일순 영인은 긴장했지만, 서서히 백에게 투항하듯 제 몸을 그에게 맡겼다. 백의 품에 영인이 완전히 안겼다.
“어? 나 이 감각과 무게가 너무 익숙한데. 우리 매일 이렇게 잤나 보다.”
장난스럽게 말하고 이내 백은 깊은 잠에 다시 빠져든다. 영인은 오랜만에 허락된 연인의 품에서 눈을 감고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새벽이 지나고 동이 틀 무렵이었다.
백이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았다. 벨 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채 눈도 뜨지 못한 상태였다. 행여 영인이 깰까 하는 염려가 들어 손길이 바빴다.
“흠, 여보세요.”
백이 간신히 손에 잡힌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발신자가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못하고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직도 자요?
“림수,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말을 마친 백이 아직 자기 품에 있는 영인을 흘낏, 살폈다. 영인은 금방이라도 잠에서 깰 것처럼 보였다. 미간이 찌푸려졌고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더 자, 더 자.”
백이 고개를 기울여 핸드폰을 어깨와 뺨 사이에 끼우듯이 고정하고 남은 손으로 영인의 가슴팍을 가볍게 토닥였다.
-진짜 여태 잤나 봐.
“응, 어제 좀 늦게 잤어.”
영인이 다시 잠들자 백이 조심스럽게 영인의 목 아래 깔려 있던 팔을 빼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영인에게 팔베개를 해 주었던 오른팔을 붕붕 돌려 풀면서 침실 밖을 나가기 전 백이 다시 한번 영인을 확인했다.
완전히 문까지 닫고서야 백의 목소리가 커졌다.
“웬일이야?”
-좀 어떤가 궁금해서. 괜찮아요? 기억은?
“기억은 아직 안 나고 괜찮은 거 같아. 나 없이 학원은 괜찮아?”
-너무 괜찮아. 더 쉬어도 되겠어.
수림의 과장된 대답에 백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핸드폰 너머에서 수림이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이제 할 말이 본론이겠거니, 백은 생각했다.
-그, 영인이는 좀 어때?
백이 다시 한번 뒤돌아보았다. 굳세게 닫힌 침실 문을 보며 드는 감정은 여러 가지였다.
“그냥 뭐. 오늘 같이….”
잠시 시간을 확인한 후 백이 말을 이었다.
“아침은 늦었고, 점심이나 할까?”
-그러면 한 시 반쯤 만나요. 이쪽으로 올 거지?
“아무렴, 제가 가야죠.”
이번에 웃은 이는 수림이었다. 백이 기분 좋게 수림과의 통화를 끝내고 다시 침실을 한번 보고는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온 백은 아직도 열리지 않은 침실 문을 한번 스윽, 보고는 머리를 말리고 옷을 챙겨 입었다. 문을 열고 영인이 아직 자고 있는지 확인해 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괜히 그 소리에 깰까 봐 그만두었다. 영인은 좀 잘 필요가 있어 보였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 올 계획이었다.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하려고 했지만, 냉장고 속 상태가 좋지 않았다. 버릴 건 버리고, 새로 채워 넣어야 했다. 이따 오후에 영인과 마트라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겉옷을 걸치는데 드디어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머리에 까치집이 진 채로, 눈을 껌벅이는 영인은 아직 채 잠에서 다 깨지 않은 듯 보였다. 여전히 꿈을 꾸는 사람처럼 묘한 눈으로 백을 응시했다.
“잘 잤어?”
백이 그런 영인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눈 뜨자마자 급하게 백을 찾으러 나온 영인은 그 질문을 듣고서야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 꿈이 아니라 진짜 백이었고, 이것이 현실이었다.
“어디 가요?”
외출 준비를 마친 백을 보며 영인이 물었다. 아침 인사가 무시당했는데도 백은 괜찮은지 웃으며 대답했다.
“커피 좀 사 오게, 샌드위치랑. 뭐 좋아해?”
“같이 가요.”
백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인이 말하고는 휘적휘적 화장실로 향했다. 양치와 세수만 급하게 마치고는 모자를 눌러쓰고 후드를 꿰입었다.
“그러자.”
이미 현관까지 앞서가 버린 영인의 뒤통수를 향해 백이 말했다. 강영인은 제법 웃기고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형은 여기 빵집 좋아해요.”
백이 낯선 빵집 앞에서 영인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고, 영인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형이 좋아하는 빵집에서 형이 좋아하는 빵이랑 영인이가 좋아하는 빵 사자. 형이 다 사 줄게.”
건수를 잡은 백이 어깨춤을 추며 순식간에 ‘형’이라는 단어를 쏟아붓듯이 이야기하고는 자동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들어갔다. 영인은 괜스레 간지럽지도 않은 이마를 긁적이고는 한발 늦게 그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 * *
점심 메뉴는 수림이 골랐다. 요즘 식이조절 중이라면서 샤부샤부 전문점에 와 놓고는 칼국수와 죽까지 추가해 먹어 버렸다.
“배 터지겠다.”
항상 후회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면 찾아왔다. 수림이 인상을 잔뜩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깔끔하네.”
백도 음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다음에 영인을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여기 원래 좋아했어. 진짜 기억이 없구나.”
“그래도 여전히 좋아하잖아. 변함없이.”
백이 능청스러운 얼굴로 대답하고 물을 마셨다.
“그래서 우리 영인이는 어쩌고 있어? 내 배 부르니 이제 걱정되네.”
“영인이는 뭐, 잘 있는 거 같은데. 내 걱정은 안 돼?”
“어.”
질문이 끝나자마자 수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너무한다. 나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인데. 남자랑 어? 그것도 나보다 큰 남자랑.”
“그것도 그렇긴 한데… 영인이는 하늘이 무너진 기분일 거 아냐. 대표님이야 그냥 깜짝 놀라고 이상한 일이겠지만, 영인이는 지금 거의… 에휴, 말을 말자. 내가 영인이 친구라서 더 영인이 걱정이 되나 봐.”
“강 과장이 많이 심약한 편인가?”
“그런 편이지.”
백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이 싫지 않았다.
“나도 질문 하나 하자.”
“뭔데요?”
“림수 책임이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해 봐. 눈 뜨고 보니 갑자기 낯선 남자가 내가 네 남편이다, 이러는 거야. 그래, 윤기 씨가 그러는 거야. 그러면 어떨 거 같아? 다시 사랑에 빠지겠어?”
수림이 고심했다. 혼자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백은 양손을 깍지 끼고 앉아 다리를 꼬고 수림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난 모르겠다. 얘 요즘 살이 너무 쪘어. 우리 스물세 살에 만났잖아. 그때랑 지금 너무 다른데.”
말을 마친 수림이 말하고도 웃긴 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달라.’ 하고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도 수림의 농담에 가볍게 웃었다. 그렇지만 수림에게 동조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백에게 사랑은 무거운 일이었다. 심심해서, 외로워서 시작하는 일이 아니었다.
전혀 기억에 없는 영인을 보면서 백은 서른이 훌쩍 넘어 처음으로 사랑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영인은 백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영인의 모든 몸짓과 눈길이 다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영인뿐만이 아니었다. 영인과 함께 찍힌 사진 속 과거의 자신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 기억에는 없지만, 여전히 자신의 입맛에 맞는 샤부샤부를 먹으며 확실히 알아차렸다. 마침 맞는 때에 만나서 우연히 운이 좋아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강영인을 사랑하게 되는 일은 언제고 어떻게든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결말은 없었다.
“나는 영인이가 자꾸 신경 쓰여.”
수림이 놀란 표정으로 백을 보았다.
“강영인이 나를 잘 꼬시는 거 같아.”
말을 마친 백이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백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면 그렇게 끝난 문제였다. 수림이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아, 일주일 동안 영인이가 대표님을 유혹한 거야? 강영인 보통 아니네.”
“아냐, 영인이가 아무것도 안 해도 이렇게 됐을 거야.”
백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장 정리를 마쳤다. 영인을 다시 사랑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영인과의 지난 시간도 모조리 다 되찾고 싶어졌고.
* * *
“영인아.”
현관에 들어서며 백이 영인을 불렀다. 양손에는 마트에서 사 온 식자재가 가득 든 봉투가 들린 채였다.
때마침 영인이 막 씻었는지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욕실에서 나왔다. 영인은 백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순간 자신의 몸을 손으로 감싸 가리고 욕실로 다시 쏙 들어가 버렸다.
“뭐야.”
백이 영인이 있다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보다가 눈썹을 한번 찡그리듯 들어 올리고는 장 본 것들을 모두 그 자리에 내려 두고 그대로 영인이 사라진 욕실로 걸음을 서둘렀다. 음모와 장난기가 반쯤 섞인 얼굴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숨으면 놀리고 싶잖아.”
백이 욕실 문을 중지 마디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신난 얼굴이었다. 누군가 본다면 이게 이렇게까지 신날 일인가 의문을 표할 정도로.
“나갈게요.”
영인도 자기가 숨을 필요는 없었는데 숨은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영인이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당기는데 미처 나가기 전에 백이 쳐들어왔다.
“나도 손 씻으려고.”
세면대 앞에 선 백이 영인의 몸을 훑었다.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얼굴이었다.
손을 씻은 백이 칫솔을 들고 양치를 시작했다. 영인은 말없이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치약 거품을 뱉고 입 안을 물로 헹군 백이 거울을 통해 그런 영인을 보다가 웃었다.
거울 속 영인과 백의 눈이 마주치자 영인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이제 거울에는 발갛게 달아오른 영인의 귓바퀴가 보였다. 백은 참을 수 없었다. 영인을 건드리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
백의 뒤로 영인이 지나쳐 가려고 하는데 백이 금세 뒤돌아 그런 영인의 가슴을 손끝으로 누르듯이 만졌다. 이어서 손은 영인의 어깨와 상완으로 옮겨 갔다.
“뭐 해요?”
영인이 당황한 듯 백을 보며 물었다. 백도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점점 손길이 묘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백은 이 탄탄하고 듬직한 몸을 만지는 일에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습한 욕실 공기가, 물기가 맺힌 영인의 피부가, 체온이, 음성이 다 백을 압도했다. 숨이 막혔다. 아랫배가 지글거리고 성기와 회음부 근처로 순식간에 피가 몰렸다.
백이 당황한 얼굴로 영인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영인의 몸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였다.
영인이 백의 손을 자신의 몸에서 떼어 냈다. 고통을 참는 듯한 표정이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무뚝뚝한 얼굴로 영인이 낮게 말했다.
“이런 건, 위험해요.”
백은 이제 자기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건, 위험해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영인의 발언이야말로 위험했다.
영인의 몸은 탐스러웠다. 백이 찬찬히 다시 영인을 살폈다. 백은 이 몸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만 같던 현재가 흐릿하게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당기면 우르르 기억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백이 참지 못하고 영인의 허리를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영인은 놀랐지만, 백을 피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영인아.”
영인과 백의 눈이 마주쳤다. 백은 마른침을 삼켰다. 갈증이 났다. 입 안이 자꾸만 바싹바싹 탔다.
“나 좀 꼬셔 줘. 기억날 거 같아.”
영인이 자신을 붙든 백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손목을 강하게 잡고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요. 꼬시는 건 제가 아니라….”
“알았어, 알았어. 어떻게 꼬셨지? 내가?”
백이 절박할 정도로 급하게 영인의 말을 끊고 물어왔다. 영인은 눈을 내리깔고 망설이다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벌써 꼬셨는데요.”
백이 영인처럼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수건은 이미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고 영인의 발기한 성기는 그 위용을 드러냈다.
“와.”
백이 작게 감탄했고 영인이 그런 백의 뺨을 애틋하게 감쌌다. 그러고는 키스할 듯 코앞까지 다가왔다. 백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옆으로 틀어 영인과 키스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기다려도 영인의 입술이 닿지 않았다. 그대로 두 사람은 멈춘 채로 한참 있었다. 백이 의아함에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키스를 기다리던 자신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영인.
백과 눈이 마주치자 영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중하고 낮은 음성이었다. 언제나처럼 선택권을 백에게 넘겨주었다.
“형이 가라면, 나는 가요.”
‘가.’라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영인이 백에게 준 칼자루였다. 관계를 끊을 수도, 영인을 찌를 수도 있는 것이었고 영인은 다 괜찮았다.
“너는 자꾸 어디를 간다는 거야.”
백이 영인의 목덜미를 낚아채듯 잡고서 말했다.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는데 허탈해 보였다. 백이 아플 정도로 세게 영인을 잡고서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백의 입술이 영인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음.”
백이 맛을 음미하듯 짧게 입맛을 다시고 다시 영인의 입술을 입술로 가볍게 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영인의 아랫입술이 백에게 물려 살짝 벌어졌다.
“나를 사랑해요?”
영인이 불분명한 발음으로 물었다. 백이 이번에는 영인의 윗입술을 괴롭혔다. 그러더니 쪽쪽, 여러 번 반복해서 귀여운 것들에게 해 주는 입맞춤을 해 주고서야 백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영인을 살짝 올려다본 채였다.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이럴 사람이야?”
네가 날 알잖아, 하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영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아니요.
“엇!”
당황한 백이 순간적으로 허우적거렸지만, 영인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백은 자신을 번쩍 들어 안고서 침실로 향하는 영인 때문에 놀랐다.
영인은 능숙하게 백을 다루었다. 침대에 백을 눕히고는 거침없이 간신히 허리에 매달려 있던 수건을 아예 벗어 던졌다.
백은 침대에 어정쩡하게 누워 그런 영인의 무신경한 스트립쇼를 감상했다. 어떤 막 하나만 벗겨 내면 소중한 기억이 그 정체를 드러낼 것만 같았다.
“괜찮겠어요?”
영인은 무엇도 가리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리고 백은 이 질문도 익숙했다. 정말 그랬다.
“어.”
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랑 키스하는 거예요.”
“방금도 했잖아.”
“거기서 안 끝나요.”
영인이 보란 듯이 자신의 성기를 양손으로 잡았다. 성날 대로 성난 자지에 혈관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가만히 손을 대면 두근거리는 맥박이 느껴질 것 같았다. 강렬하고 색정적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백이 영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영인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허벅지 근처에 가져갔다.
“나도 거기서 끝낼 마음 없어.”
단단한 백의 성기가 느껴졌고 영인은 눈을 감았다. 분명 자신의 연인이었던 백이었는데 이상하게 생경했다. 마치 백을 더럽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영인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영인은 백이 그리웠다. 아주 오래 참아 왔다. 영인이 억세게 백의 성기를 쥐고 백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으, 영인아….”
백이 작게 신음하며 영인의 귓바퀴를 만졌다. 영인이 다시 백을 들쳐 안았다. 당장에라도 백을 침대에 내던질 것같이 굴더니 정작 침대에 다가와서는 백의 목 뒤와 엉덩이를 받치고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일련의 과정이 모두 자연스러웠다. 백은 어느새 영인의 리드에 맞춰 상의를 벗고 그에게 유두를 빨리고 있었다.
영인은 백의 가슴을 한껏 모아 쥐고 유두를 희롱했다. 백이 예상과는 다른 전개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자극에 놀라 몸을 뒤틀었다. 그와 동시에 어떤 의혹이 강하게 들었다. 척추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잠, 잠깐만.”
“…싫어요?”
영인이 바로 백에게서 멀어졌다. 백이 그런 영인의 팔목을 잡아 일단 자기 쪽으로 당겨 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우린 둘 다 남자잖아. 뭐 정해진 포지션이 혹시 있었나? 아니면 돌아가면서?”
“내 자지가 좋다고 그랬었는데. 박아 줬으면 좋겠다고, 그런 말도.”
“진짜로?”
백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되물었다. 백답지 않게 동요하고 있었다. 영인은 평소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나는 한 번도 너를 못 안았어?”
영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백의 엉뚱한 반응 때문에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턱에 힘을 주고 간신히 참아 냈다.
백의 침묵이 이어졌다. 골똘히 무언가 고민하던 백이 아까보다 침울한 음성으로 질문했다.
“처음에 그렇게 결정 날 때 나 취했었나?”
“네.”
고개를 한번 끄덕인 백이 짐짓 결연하기까지 한 얼굴로 말했다.
“가져와.”
영인이 백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고 부리나케 다이닝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열장 앞에서 망설이던 영인이 제법 독한 위스키를 골라 위스키 잔에 가득 따랐다. 얼음도 넣지 않고.
알몸으로 찰랑거리는 술잔을 들고 온 영인을 백이 기막힌 표정으로 보았다. 둘 다 말이 안 되는 조합이었지만, 백의 현실이었다.
“요즘 나 술 이렇게 무식하게 먹어?”
“아뇨. 근데 그때 술을 좀 많이 마셨었어요. 그만큼 취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백이 영인에게서 잔을 건네받고 허공을 향해 살짝 치켜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하고는 그대로 독한 술을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속이 타는 듯한 감각이 들었고, 금방 술이 타고 내려간 길을 따라 몸이 뜨끈해졌다. 숨결에서도 독한 술의 잔향이 느껴졌다. 급하게 많은 양을 마셔서 머리도 핑 도는 느낌마저 들었다. 백이 잔뜩 찡그린 채 숨을 고르고는 뭔가 억울한지 다시 따지듯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야? 증거 있어?”
믿기지 않는다는 음색이었다. 영인이 가만히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몸 말고는 없어요.”
침대 옆에는 비밀스러운 서랍이 있었다. 부부의 사생활을 담아 둔 서랍이었고 영인은 거기에서 백이 특히 예민하게 반응했던 젤을 골라 들었다.
“벗고 누워요.”
백이 진실을 가늠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영인을 보았다. 영인에게서 거짓의 기운은 없었다. 천천히 바지를 내리고 질척해진 속옷을 내렸다. 영인이 백의 성기에 시선을 주지 않고 얼굴만 뚫어지게 보고 있어서 덜 민망했다.
“그래, 와라!”
백은 호기롭게 침대에 눕기까지는 성공했다. 그렇지만 정작 쉽사리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영인이 그런 백의 다리를 알파벳 M처럼 굽히게 하고는 백의 팔을 각각 오금에 걸었다.
“힘 풀어요.”
백이 민망함에 눈을 감았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행위는 섹스라기보다는 민망한 진찰을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술 때문에 알딸딸해졌는데도 그랬다.
쭙, 하며 젤이 좁은 통로에서 밀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 영인이 손가락 끝으로 긴장해 있는 백의 구멍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젤을 발랐다.
온몸이 간지러워졌다. 긁어도 해소할 수 없는 간지러움이었다. 피부가 아니라 그보다 더 아래 위치한 속살들이 간지러운 것 같았다. 손으로는 닿을 수 없는 미지의 곳이.
영인의 중지가 백의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영인은 손가락을 밀어 넣으면서도 젤을 다시 쭉 짜냈다. 일부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일부는 영인의 손가락에 묻고 일부는 백의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백이 숨을 내뱉고 고개를 돌려 뺨을 침대 매트리스에 비볐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이 느낌은 낯선 듯하면서 그렇지 않았다. 투명한 체액이 귀두 끝에 맺혔다.
영인은 백의 상태를 힐끔 확인하고는 능숙하게 백의 전립선을 찾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진작 손가락 개수를 늘려 욱여넣었겠지만, 오늘은 중지 하나로 끈질기게 백을 약 올렸다.
먼저 안달 난 쪽은 백이었다. 백이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구멍을 조여 왔다. 영인은 그 몸짓에 짧게 탄식했다. 참기 힘들었다.
낯설면서 익숙한 쾌감에 백은 몸서리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쉬웠다. 백이 다시 자신의 허리를 크게 흔들었다.
백과 영인의 눈이 마주쳤다. 백이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영인의 손가락에 반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이상해.”
흥분으로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며 백이 힘겹게 말했다. 말을 마치고도 한참 멍청한 표정으로 무언가 고심했다.
백은 새로운 감각과 입장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무릎을 굽혀 끌어안고 옆으로 누웠다. 새우처럼 몸을 말고 자기 무릎에 뺨을 기댔다. 영인은 그런 백의 등 뒤에 누워 백을 포개듯 끌어안았다. 초조하거나 불안한 감정이 없는 고요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괜찮아요?”
“어, 좀 기억이 날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어지러워.”
“더 해 볼까요?”
영인이 백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백이 간지럽고 묘한 감각에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 뒤에서 어깨와 가슴을 구속하듯 끌어안은 영인이 나머지 팔을 뒤로 뻗어 더듬거리며 젤을 찾았다. 뒤돌아 찾으면 훨씬 쉬운 과정이었을 테지만, 백을 품에서 내어놓으면 백이 그대로 사라질 것 같아서, 꿈이 깰 것 같아서 그러지 못했다.
손끝에 닿은 통을 간신히 끌어와 잡고는 그대로 자신의 성기 뿌리에 되는대로 짜 버렸다. 필요 이상으로 힘을 준 탓에 뿍,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통은 볼품없이 찌그러졌다.
‘뿍.’
온몸을 내리누르는 흥분과는 다른 그 이질감이 드는 소리에 백은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저 통에 닥친 일이 자신에게도 벌어질 것 같은 나쁜 예감이 들었다.
영인이 되는대로 윤활제를 자기 성기에 바르고는 손에 남은 것들은 그대로 백의 엉덩이 사이에 문질렀다.
문지르면서 의도적으로 손가락에 힘준 탓에 중지 한 마디가 구멍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고 다음에는 약지가 슬며시 들어갔다 나오며 백을 안달 나게 했다. 영인의 손가락과 성기도 백의 회음부와 애널도 모두 번들거리고 미끄러웠다.
이번에는 확실히 검지가 백의 구멍을 뚫고 들어왔다. 백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중지가 틈새를 가르고 들어왔다. 중지가 반쯤 들어갔을 때 영인은 주저하지 않고 약지까지 밀어 넣었다.
백은 아까와는 확실히 다른 압박감에 입을 벌리고 숨을 내쉬면서도 이 일련의 일들이 아프거나 힘들지 않아서 당황했다.
잠시 백이 적응하도록 시간을 준 영인이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백의 내벽을 꾹꾹 눌렀다. 시간과 공을 들이면 백은 그 이상 돌려주고는 했다. 채 준비되지 않은 백의 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는 편을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복습과 복기의 시간이었다. 백의 몸에 영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음을, 이 보드랍고 따뜻한 내장에도 백이 모르게 손가락으로 강영인의 이름을 무수히 새겼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자 백의 속살이 부드럽게 따라붙었다가 떨어졌다. 끈적하고 따뜻한 감각이 좋았다.
백도 눈을 감고 낮게 신음하며 그냥 영인의 손길을 느꼈다. 영인에게 뒤통수를 대고 완전히 기대자 영인이 화답하듯 아까보다 깊숙한 곳을 힘차게 찔러 주었다. 다리 사이로 나와 있던 팽팽한 음낭마저 영인의 손마디에 눌렸다. 그 통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강렬한 사정감을 불러왔다.
“아읏!”
백이 자신의 성기를 꽉 잡아 눌렀다. 영인이 백의 상태를 알아챘는지 손가락 뭉치를 거칠게 뽑으며 자신의 귀두를 백의 구멍 앞에 가져갔다.
“괜찮겠어요?”
은근하게 백의 회음부를 자신의 것으로 누르며 영인이 물었다. 백을 끌어안은 팔에서도 힘을 풀지 않았다. 백은 자신의 등에 맞닿은 영인의 단단한 가슴에 확실히 몸을 기댔다.
롤러코스터의 정점에서 떨어지기를 고대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안전장치를 꽉 붙들고, 다가올 추락을 대비했다. 백이 매달리듯 영인의 팔뚝을 꽉 잡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제 곧 떨어진다. 발끝이 꺼지고 심장이 내려앉는 그 감각.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숨이 막혔다가 곧 그 어느 때보다 숨통이 트이는 모순적인 순간. 백은 기대하고 있었다. 이 기대는 분명히 경험에서 오는 것이었다.
백의 대답이 없었는데도 영인이 서서히 허리에 힘을 주고 자신의 것을 백의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뭉툭한 귀두가 들어가자 굵은 기둥은 저절로 빨려 들어가듯 백의 안으로 사라져 갔다.
“하아.”
영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백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백을 당겨 안았다. 백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감싸서 완전히 그를 자신의 품 안에 옭아맸다.
그토록 바라던 백이었다. 백은 영인을 잊었어도 백의 몸은 잊지 않았다. 성기를 뿌리 끝까지 삼키고도 무리 없어 보였다.
영인은 턱에 힘주고 이를 악물었다. 너무 좋은 것도, 너무 행복한 것도 때로는 견디기 힘들 때가 있었다. 그대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아서 두려워졌다. 지금도 그랬다.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영인이 가만히 백의 안에 머물렀다. 이렇게 밤새, 아니 영원히 있고 싶었다.
먼저 움직인 쪽은 백이었다. 영인의 음모가 느껴질 만큼 둘은 빈틈없이 붙어 있었다. 이대로 있기는 버거웠다. 백이 움찔거리며 조금씩 앞으로 엉덩이를 움직였다.
“가지 마요.”
영인이 아쉬운 듯 속삭였다. 영인의 성기를 간신히 조금 뱉어 낸 백이 그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영인이 자신의 하반신을 다시 백에게 바짝 붙였다.
“헉.”
간신히 여유가 생겼던 백이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영인 때문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영인은 아예 도주의 통로를 완전히 막아 버리고 싶은 사람처럼 백을 더 강하게 속박했다. 옆으로 누워서 마찬가지 자세인 백의 다리 위로 자신의 다리를 올렸다. 의도적인 행위였다.
백의 다리를 자신의 다리로 옭아매서 벌어지게 했다. 둘의 몸이 거의 겹쳐졌다.
“어흐, 야!”
당황한 백이 소리쳤다. 허공에 그대로 사타구니를 노출한 자세가 된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영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백을 더 단단히 붙들었다.
“도망치지 마요.”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백이 무언가 말하기 위해 영인을 보았는데 영인은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못 참겠어요.”
그러더니 백을 완전히 당겨 안으며 자신도 몸을 돌렸다. 백은 이번에는 소리조차 치지 못했다. 입만 뻐끔거리며 지금 일어난 일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엉덩이는 거대한 자지에 뚫린 채였고 몸이 빙글 돌아 영인의 가슴팍과 배 위에 올라왔다. 그러니까 영인을 깔고 누운 꼴이 됐다. 다리는 활짝 벌리고서. 고간이 너무 휑했다.
‘이렇게까지 꼴사나운 자세를 해 본 적이 있던가….’
백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다리를 오므리고 싶어도 어느새 영인의 양팔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그 또한 불가능했다.
영인이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더 견고하고 정교한 덫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만족스러울 정도로 백을 구속하고서야 영인이 백에게 꼭 물려 놨던 자신의 성기를 느리게 뽑아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백의 오금에 걸어 둔 자신의 팔에도 힘을 줘서 백을 위로 들어 올렸다.
흉흉한 성기가 반쯤 빠져나오다가 다시 백의 안으로 처박혔다. 백이 크게 몸을 꿀렁이며 신음했다.
영인은 이제 반쯤 정신이 나가 보였다. 점점 허리의 움직임이 과격해지더니 이제 박아 올릴 때는 하반신이 반쯤 뜰 지경이었다. 백도 다르지 않았다. 영인에게 꿰인 채로 쑤셔질 때마다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고개를 마구 저으며 포효하듯 신음하는 백의 뺨에 영인이 자신의 뺨을 비볐다. 눈물과 땀으로 엉망인 얼굴이었다. 백의 귓가에 쉬쉬, 아이를 달래듯 바람 소리를 내고 다정하게 울지 말라고 속삭이다가 이내 울어도 된다고 고쳐 말했다. 울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은 정말로 도망치고 싶었다. 몸부림을 치면 영인이 무릎을 굽혀 허벅지로 허공에 뜬 백의 엉덩이를 받쳤다. 그리고 더 무지막지하게 백을 가르고 들어왔다. 영인의 엉덩이도 힘을 준 탓에 푹 파였고 백은 아예 온몸이 박동했다.
백이 아는 섹스는 이런 게 아니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표현하고 각자의 색으로 상대를 물들이는 어떤 그런 거룩한 행위였다. 사람들이 괜히 사랑을 나눈다고 표현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영인과의 행위는 잠식한다거나 물든다거나 혹은 스민다는 그런 아름답고 점잖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산 채로 뜯어먹히는 일이었다. 백은 정말로 뼈째 발라 먹히는 기분이었다. 노골적이고 지독한 침략 행위였다.
영인은 강박적으로 백의 약점만 노려 찔렀다. 쾌락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셈이었다. 고통스러웠다. 성기가 아니라 쇠망치로 쑤셔 박히는 것만큼 감각이 너무 거셌다.
“가, 너 가!”
백이 간신히 영인에게 외쳤다. 악을 무찌르는 절대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힘주어 말했지만, 끝에 결국 신음이 섞였다. 영인이 백의 귓바퀴를 깨물고 대답했다.
“안 가요.”
“가라면… 흐읏! 간다며!”
백이 억울한 듯 소리쳤다. 백의 여린 속살이 영인의 과격한 움직임을 버티지 못하고 딸려 나왔다. 영인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오는 그 내벽들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하, 사실 예전에 형이 어디 가지 말고 버티라고, 버티라고 말했어요. 못 가요. 큽….”
영인도 말을 마치고는 신음했다. 백 때문에 자지가 녹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백은 그 신음에 반응하고야 말았다. 영인의 신음이 놀랍도록 달콤해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성기를 쥐고 허리를 흔들었다.
자기 위에 누워서 허리를 들썩이는 백 때문에 영인은 이제 더는 버틸 수 없겠다고 느꼈다. 백의 다리를 쥔 영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절정에 치달은 백의 구멍도 제멋대로 경련하듯 조여들며 영인을 자극했다.
철벅철벅, 살과 살이 붙었다 떨어지고 영인이 본격적으로 백의 허리를 끌어안고 자신 쪽으로 찍어 눌렀다. 정말로 더는 들어갈 수 없을 지경까지 성기를 밀어 넣고 백의 배를 압박했다.
“흐악, 큭!”
그 순간 백이 사정했다. 뿌연 정액이 미처 어쩌지도 못할 사이에 손가락 틈 사이로 마구 비어져 나왔다. 백의 복근과 허벅지 안쪽이 마구 떨리고 요동쳤다.
영인도 이제 한계였다. 백의 안에 사정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백의 배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로 성기를 움직였다.
이미 싸 버린 백은 어쩌지도 못하고 영인의 움직임에 흔들리며 이를 악물었다. 고문 같은 쾌락이 몰아쳤다. 차마 성기에는 손도 대지 못할 정도였는데 방금 사정을 마친 성기에서 영인이 내장을 찍어댈 때마다 소변이 새어 나왔다.
실금까지 하다니. 아무리 백이어도 이런 일까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백이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한숨과 신음을 번갈아 가며 내뱉었다. 수치스러웠다.
영인은 사정을 마치고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아까보다 현저히 낮아진 속도에 백이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제대로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영인의 정액 때문에 이제 성기가 들락거릴 때마다 질척하고 음란한 소리가 울렸다. 질척하고 끈끈한 감각도 선연하게 느껴졌다.
“하아, 우리 늘상 관계가 이런 식이었어?”
백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영인의 위에서 내려가려고 했지만, 금방 영인에게 붙잡혔다.
“네.”
대답을 마친 영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덧붙였다.
“매일요.”
“뭐? 매일?”
이번에는 백이 빨랐다. 영인에게서 벗어나자마자 앉아서 영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미처 그러기 전에 엉덩이 사이로 주륵, 흘러내리는 정액에 허옇게 질렸다.
“으.”
영인이 백의 상황을 눈치채고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백의 구멍을 막아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으로 끝내지도 않았는데.”
“일단, 일단 씻어야겠다. 수건 좀 갖다줘.”
백이 혼이 빠진 얼굴로 작게 말했다. 정말로 기운이 없었다.
“수건 가지고 오는 사이에 다 흘리려고요? 제가 막아 줄 테니까 같이 욕실로 가요.”
백의 입술이 비틀렸다. 피곤하고 지쳤다. 영인이 얄밉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참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랑이란, 사랑이란.
백이 벌떡 일어섰다. 바닥에 발을 딛고 서자 주륵, 정액이 허벅지 안쪽을 타고 내려왔다. 보란 듯이 백이 당당하게 뒤돌아서서 욕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백의 자취를 따라 똑똑, 하얀 방울들이 떨어졌다.
침실 밖을 나가기 전 문고리를 잡은 백이 뒤돌아서 영인을 보았다. 영인의 시선은 백이 남긴 흔적과 백의 엉덩이와 백의 얼굴을 차례로 따르고 있었다.
“뒷정리는 너에게 일임한다.”
그 말을 남긴 백이 문을 열어 둔 채로 방 밖으로 나섰다. 엉망이 된 침대와 바닥과 영인만 남겨 두고서. 그렇지만 영인은 하나도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떨어진 정액이 백의 것이었다면 모조리 빨아먹을 수 있을 만큼.
백이 뽀송하게 변한 침대 위로 몸을 날려 누웠다. 어떤 기억들이 수면 위로 불쑥 솟았다가 영인이 너무 몰아붙인 탓에 놓친 기분이었다.
침실을 치우고 백이 거닌 길을 모조리 닦고 정리하느라 백보다 늦게 씻은 영인은 한참 후에야 백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인이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자 백도 길게 하품을 하고는 영인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천장에 거울이라도 달아 둘까요?”
영인도 백의 정수리에 자신의 뺨을 대고 말했다.
“뭐?”
맥락 없이 들어온 음습한 제안에 백이 놀라 영인을 보았다. 정작 영인은 잔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아까 형 얼굴이 안 보여서 아쉬웠어요.”
담백한 이유였다. 발언 자체만 보자면 그랬다.
“얼굴 보는 자세로 하면 되잖아. 마주 보고.”
“아니면 영상이라도 찍어 둘까요?”
백의 대안을 무시하고 영인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영인은 벌써 어떤 각도로 찍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상념에 빠진 영인을 눈치챈 백이 무성의하게 주먹을 말아쥐고 영인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까분다.”
영인이 참지 못하고 그 손을 잡아채서 주먹 마디마디에 입 맞춰댔다. 백은 그런 영인을 저지하지 않고 바라보다가 불현듯 자유로운 손으로 영인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들어 올렸다.
“영상 찍긴 해야겠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영인이 눈을 크게 뜨고 백을 보았다. 백도 영인과 시선을 맞추고 자신의 말에 확신을 더하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내가 아직 잘 모르겠는데, 강영인이 혹시 기억을 잃으면 그땐 증거가 필요할 거 같아. 날 너무 사랑한다고 영상 하나 찍어 놔.”
백의 장난 반, 진담 반인 말을 들은 영인이 웃음을 터뜨리고는 아직 주먹을 쥔 상태인 백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쳤다.
“저는 절대로 형을 안 잊을 건데요.”
백이 영인을 잊는 것은 영인을 잊는 것이지만, 영인이 백을 잊는다면 영인은 영인을 잊는 것이 된다. 영인은 그럴 일은 없다고 확신했다.
백의 다섯 손가락이 모두 펴지자 영인이 그중 약지를 골라 자신의 입에 넣고 꽉 깨물었다.
“으.”
백이 조그맣게 신음하면서도 영인을 피하지 않았다. 영인도 백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 번 더 백의 손가락을 물었다.
백의 약지에 반지 자국처럼 잇자국이 남았다. 그 손가락과 영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아팠다.
“미안해.”
모든 일이 미안했다. 그날 수림과 점심을 먹은 일도, 오토바이를 피하지 못한 일도, 오토바이 운전자의 헬멧과 부딪친 일도, 기억을 잃은 일도. 모조리 다 죄스러웠다.
“미안.”
백이 반복해서 사과하자 영인이 의아함을 지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미안해하지 말라고 알려 줬잖아요.”
그날 수림과 점심을 먹을 일도, 오토바이를 피하지 못한 일도, 오토바이 운전자의 헬멧과 부딪친 일도, 기억은 잃은 일도 모두 백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흘러가 버린, 누구의 탓도 아닌 사고였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사과해야 할 사람도, 사과받아야 할 사람도 없었다. 영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백이 알려 준 많은 다정하고 옳은 것들 중 하나였다.
말을 마친 영인은 정말로 편안해 보였다. 자신이 낸 잇자국에 입 맞추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반대로 무너진 쪽은 백이었다. 백은 이제 완전히 졌다는 표정이었다. 누군가한테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얼이 빠졌다.
정말로 자신이 그런 얘기까지 해 줬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형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그 밑에 깔린 진실들을 영인은 다 아는 모양이었다. 백이 아니면 그것들을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었다.
말하자면 영인은 백의 비밀과 상처를 아는 유일한 타인이었다. 백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
“내가 널 정말 무지막지하게 사랑했나 보다.”
“지금은 어떤 거 같아요?”
영인이 자신이 낸 잇자국을 쓸며 물었다.
“지금은 무지막지까지 사랑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무지막지가 저기 있다는 건 알아. 무지막지한 사랑이 여기 있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나 봐.”
백이 자신의 가슴을 둥글게 쓸어내리고 명치와 배꼽까지 쭉 쓰다듬었다. 온 내면에 영인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럼 기억나게 다시 한번 해 볼까요?”
영인은 당장이라도 백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박을 기세였다.
“아니. 그건 거의 기억 퇴마 의식 수준이던데. 내버려 두면 다 돌아와. 자자.”
백이 영인이 딴짓을 시도하기 전에 자리에 누웠다. 그러고는 팔을 벌리고 영인을 보았다. 영인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품에 기꺼이 자리 잡았다.
“잘 자, 영인아.”
백이 영인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묵직한 영인의 무게감은 안정감을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은 잠들었고, 영인은 백이 건넨 인사를 홀로 오랜 시간 곱씹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아침이었다. 영인이 백이 깨지 않게 조심하며 자신의 팔 안쪽을 꼬집었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영인으로서는 드물게 크게 환호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백을 되찾았다는 실감이 이제야 완전히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버티기를 잘했다고, 백의 곁에서 견디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도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감.
영인이 잠든 제 연인을 훔쳐보았다. 반듯한 콧대와 단정한 입매, 굳센 턱과 잘생긴 눈썹을 샅샅이 살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선하고 맑은 인상은 가려지지 않았다.
백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영인도 눈을 감았다. 쉽사리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하지만 잠들지 못해도 충분했다. 아니, 잠들기에는 아쉬웠다.
영인이 백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백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벅차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
“음.”
백이 고통에 잠에서 반쯤 깼는지 인상을 쓴 채로 영인의 등을 토닥였다. 거의 무조건 반사 수준이었다. 그 손길에 영인이 참지 못하고 백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붙이고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해, 백아.”
그 일방적인 고백을 들은 건지 잠든 백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영인은 그 미소 띤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백이 내뱉는 숨을 모조리 마셨다.
앞으로는 백이 가라고 해도 어쩌면 영인은 떠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아니 절대로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영인은 확신했다.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백은 이제 영인에게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가여운 영인의 연인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백은 천사처럼 눈을 감고 잠들어 있다.
* * *
지난밤, 영인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을 잠결에 깨달은 영인이 놀라 퍼뜩, 눈을 떴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백의 존재였다.
당연히 곁에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백은 영인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지 그런 영인을 보며 웃고 있었다.
영인이 입을 벌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먼저 이 침묵을 깬 이는 백이었다.
“자기야, 잘 잤어?”
산뜻하고 다정한 백의 음성이었다. 예전과 다름없는.
“기억이 돌아왔어요?”
영인이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세워 앉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고생 많았어.”
백이 잠에서 깼을 때였다. 백의 기억을 감싸고 있던 얇은 막에 생긴 미세한 틈을 비집고 과거의 조각들이 조금씩 쏟아져 내렸다. 틈은 점점 넓어져 구멍이 되고, 결국 막 자체가 완전히 찢어졌다. 소중한 시간의 타래가 막을 새 없이 쏟아졌고, 순식간에 백을 흠뻑 적셨다.
기억은 잃는 것도, 되찾는 것도 모두 순간이었다.
백은 꽤 오랜 시간 잠든 영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울지 않는 백인데도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영인이 얼마나 애를 쓰고 자기 옆에 붙어 있었던 건지, 지금의 백은 알고 있었으니까.
기특하고 가여워서, 안쓰럽고 고마워서,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너무나 미안해서, 백은 곤히 잠든 연인을 차마 쓰다듬지도 못하고 그렇게 지켜만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 덕에 영인이 잠에서 깨자마자 놀란 눈으로 자신을 찾는 모습을 모조리 감상할 수 있었다. 영인은 정말로 백이 아는 사람 중 가장 크고, 가장 귀여운 사람이었다.
“림수한테는 기억 못 찾은 척하고 둘이 어디 놀러 갔다 올까?”
백의 제안에 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이참에 정리하면 안 되나요? 내가 형 하나는 먹여 살릴 수 있을 텐데. 불안해서 못 보내겠어요.”
영인의 말을 농담으로 들은 백이 와하하 웃으며 ‘그럴까?’ 되물었다. 영인은 입을 꾹 닫고 그저 백을 응시했다. 어쨌든, 당장은 이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무지막지하게 사랑해, 영인아.”
백이 담담하게 고백하고는 영인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영인이 그제야 완전히 안도하며 백을 옭아매듯 품에 안았다.
“저도 무지막지하게 사랑해요.”
영인도 백에게 진심을 전했다. 이제 이것은 정말로 무지막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백은 영인에게 붙잡히듯 안기고도 편안하고 행복한 얼굴을 한 채, 영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영인을 위하여 외전2-3 끝(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