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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이었다. 이제 다음 주 월요일이면 드디어 대망의 프로젝트 오픈 날이었다. 사실 이미 만반의 준비는 끝난 상태였다. 수림이 마지막으로 셋업까지 완료하고 이 일을 해낸 자신에게 박수 쳐 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백이 큭큭거리고 웃었다. 개발자들이, 특히 영인과 수림이 착취당했지만 어쨌든 마무리가 되었다. 수림은 탈수까지 마친 수건이 된 기분이었다. 몸에도 마음에도 수분이라고는 없었다.
“그래도 이제 진짜 내일 마지막 준비하고 이관하고, 월요일에 셋업만 활성화시키면 끝이네요. 세상에 나는 이번엔 진짜 망했다고 생각했어. 어떻게 이렇게 마무리는 하네.”
수림이 백을 보며 말했다.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수고 많았어. 모두 수고 많으셨어요. 오픈하고는 또 대혼란의 시기일 테니까 일주일 정도는 대응 각오해 주시고요. 이번엔 오픈하고 사용자 교육을 다녀야 해서 아마 저는 초반 2일 정도는 자리에 없을 것 같아요. 마무리 회식은 다음 주 금요일에 제대로 하시죠. 팀장님이 소고기 사신다고 했어요.”
“예!”
백이 말을 마치자마자 주성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은 제가 저녁 살게요. 다들 가시죠. 청첩장 받으셔야죠. 내일보다는 오늘이 낫겠죠? 시간 안 되시는 분?”
수림이 말하며 프로젝트 룸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적대감과 불편함이 있었다.
“바쁘시면 안 오셔도 돼요.”
“그러려고요.”
제3자도 느낄 수 있는 냉한 기류에 백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김 차장님, 그래도 다음 주 금요일 회식은 참석하실 거죠? 같이 고생하셨는데.”
백이 부드럽게 태준을 보며 말했다. 태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식에 가고 싶을 리가 없었다. 이 프로젝트는 확장성이 있었다. 이번에 국내 법인들에 우선 시스템을 오픈하고 이어서 중국과 유럽 쪽 법인까지 적용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고 했다. 일을 키운 것은 백의 능력이었다.
태준을 제외한 수림과 영인은 해외법인 적용 프로젝트에 재투입되었다. 태준만 계약 만료로 내일이면 짐을 싸야 했다. 자존심 상하고 불쾌한 일이었다. 누가 봐도 쫓겨나는 모양새였다. 프로젝트 마감 회식 같은 데 참석할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저야 내일이면 철수하는데요.”
말에 뼈가 있었다.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있으면 만나겠죠.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무래도 확대 적용이라 공수가 첫 개발 건만큼 안 나와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백이 매끄럽게 태준을 위로했다. 다시 만날 일이 없으리라는 것은 프로젝트 룸 안에 모두가 알고 있었다. 태준이 작게 미소 지으며 ‘그렇죠’라고 대답했고, 곧 퇴근 준비를 했다.
수림이 영화 전자 근처에 있는 먹자골목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제법 규모가 큰 돼지갈비집이었다. 예약했는지 임수림의 이름이 적힌 방으로 직원이 그들을 안내해 주었다. 수림과 영인이 함께 앉고 맞은편에 주성과 백이 앉았다.
수림이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하고는 가방에서 깨끗한 청첩장 봉투를 꺼내 사람들에게 건넸다. 봉투 겉면에 또박또박 받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백이 바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청첩장에는 상투적인 초대 문구와 임수림과 서윤기의 결혼식 날짜와 장소에 대한 안내가 적혀 있었다.
“진짜 창원에서 하는 거야?”
백이 ‘경상남도 창원시’라고 적힌 예식장 주소를 보고 확인하듯 물었다. 수림이 그렇게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와! 너무 멀다.”
“팀 사람들은 버스 대절을 해 주기로 했는데 백 책임님은 거기 타고 오긴 또 불편하겠지?”
직원이 들어와 갈비를 굽자 맛있는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마음도 덩달아 너그러워졌다.
“알아서 갈게. 우리 팀 대표로 또 내가 나서야겠네. 임수림 웨딩드레스 입는 거 봐줘야지.”
“아름다웠다고 소문 좀 내줘. 그럼 내가 책임님이랑 영인이 KTX 표는 사 줄게.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세요.”
황금 같은 토요일에 멀리까지 결혼식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울상이던 주성이 백의 말을 듣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백이 가볍게 주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주승이는 봉투만 나한테 줘.”
“아, 저도 가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주성은 백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창원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영인만 수림의 제안에 잠시 숨을 참고 절망했다. 차라리 영화 시스템즈 사람들 틈에 섞여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백의 앞에서는 속절없이 흔들렸다. 게다가 백의 태도 또한 묘하게 달라졌다. 찬 바람이 불고, 자신을 외면할 때가 차라리 편했다. 요즘은 거리를 두는 것 같기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다정한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지럽고 어려웠다.
“2주 뒤네? 늦지 말고 나와요, 과장님.”
백이 다시 청첩장을 확인하더니 영인을 향해 말했다. 영인은 멍한 얼굴로 살짝 입을 벌린 채 그런 백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 일어난 변화를 당사자인 영인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침 떨어지겠어요.”
백이 그런 영인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영인은 울고 싶었다.
오랜 식사 끝에 냉면까지 먹고 난 주성이 마지막으로 나가떨어졌다.
“야, 20대는 확실히 다르다. 잘 먹는다.”
수림이 그런 주성을 보고 감탄했다. 목 끝까지 음식과 술이 찬 바람에 수림은 젓가락을 놓은 지 오래였다. 백도 적당히 기분 좋게 먹었는지 유쾌하게 수림의 말에 동조했다. 영인만 그 큰 몸을 늘어뜨리고 테이블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식사 내내 겉도는 모습이었다.
“얘는 술 줄인다더니 또 왜 이래. 강영인! 정신 차려. 이제 2차 가야지.”
수림이 영인을 흔들어 깨우자 영인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수림이 계산서를 들고 제일 먼저 방을 나섰다. 주성도 곧 신발을 신었고, 백도 잠시 영인을 지켜보다가 가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마지막에 남은 영인이 천천히 사람들이 간 곳으로 향했다.
셋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수림이 맛있는 수제 맥주집을 찾아왔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길을 확인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영인은 아직도 가게 앞에 우두커니 서서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쟨 왜 안 와.”
수림이 그런 영인을 잡으러 가기 위해 뒤돌자 백이 손사래를 쳤다.
“내가 데려올게.”
수림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성과 다시 맥주집을 향해 걸었다. 백은 여유롭게 영인에게 갔다. 영인은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발치를 보고 있었다. 백이 영인 앞에 서고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영인과 다르게 백은 전혀 취해 보이지 않았다. 멀쩡했다. 영인과 백은 어떤 거대한 혼란과 괴로움을 나눠서 지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누군가 가벼워지면 상대는 무거워졌다. 오늘 무게추는 영인에게로 기울어진 듯했다.
백은 영인과 일부러 시선을 마주쳤다. 항상 그렇듯 흔들림 없고 꼿꼿한 눈빛이었다. 영인은 어렵지 않게 백에게서 다정하고 따스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백이 다정해진 게 맞았다. 상황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 얼굴이 너무 좋아서 변화의 원인을 깊게 고심할 수 없었다.
영인은 백을 사랑하는 어항 속 물고기였다. 어항 밖으로 나가서 백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볼 뿐.
나직한 목소리로 백이 속삭였다.
“영인아, 많이 힘들어?”
영인의 시선이 갈 곳을 잃었다. 그러자 백이 영인의 귀를 잡고 당장에라도 키스할 것처럼 다가왔다. 영인은 그 갑작스러운 접근에 눈을 감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마치 무엇을 기대하는 사람 같았다. 가령 입맞춤 같은 것. 그것을 알아챈 백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서로의 코가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고서야 백이 입을 열었다.
“나도 이제 오래 못 기다려. 답은 알고 있잖아.”
그 말을 끝으로 백은 바로 뒤돌아 걸어갔다. 영인의 대답도 반응도 기다리지 않고서. 홀로 남은 영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해진 마음을 어찌 다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백은 모든 것을 다 파악한 사람 같았다. 영인의 가난하고 초라한 속내까지도. 그렇지만 영인은 그렇지 못했다. 백이 말하는 답을 알 수 없었다.
* * *
영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수림이 영인을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KTX 표 예매 내역 전달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내가 특실로 예매했으니까 백 책임님이랑 내일 잘 타고 와. 책임님은 결혼식 보고 고향 집에 간다더라. 올라올 땐 혼자 편안하게 오시면 돼요.”
수림이 웃었다. 개발 자재 추적 및 감사 시스템 오픈 후, 2주간 상황실을 운영하며 영인과 수림 모두 말 그대로 등골까지 빨아 먹혔다. 주성도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몸서리를 칠 정도로 질려 있었다. 그들 중 수림은 급하게 다이어트를 한다고 식이조절까지 한 바람에 특히 더 마르고 안쓰러워 보였다.
“하루 정도는 연차 내고 관리 좀 받고 결혼식 가지.”
“야, 어떻게 너만 두고 가냐. 백 책임님도 저렇게 바쁜데. 나 저번에 너한테 일 미루고 칼퇴근했다고 노빠꾸 책임한테 얼마나 타박 들었는 줄 알아?”
수림이 진저리를 치며 인상을 썼다. 영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수림이 ‘말을 말자’라고 중얼거리며 퇴근 준비를 했다. 영인은 핸드폰 액정에 뜬 KTX 표를 보았다. 10C와 10B, 나란히 위치하는 좌석이었다.
영인의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액정 위에는 ‘노백 책임’으로부터 온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내일 아침 7시 40분까지 집 앞으로 나와요.]
“어휴.”
“왜?”
영인의 한숨에 노트북을 정리하던 수림이 물었다. 영인은 씁쓸한 얼굴로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쨌든 프로젝트는 끝났고 이제 이 작은 회의실에서 모여 일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영인은 영인의 자리로 수림은 수림의 자리로 백은 백의 자리로 갈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듯했다.
수림의 결혼식 날이었다. 영인은 7시 20분이 되자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서자마자 심장이 쿵쿵거렸다. 창원까지 4시간이 넘는 여정을 백과 단둘이 해야 했다. 불안을 진정시킬 비상용 약까지 챙겨 오기는 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백보다 먼저 와서 기다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공동현관을 나오니 백의 차가 늘 영인을 기다리던 곳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백은 차 안이 아닌 밖에 서 있었다. 평소 입던 캐주얼 비즈니스 룩과는 다른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다. 흠잡을 곳 없이 멋졌다. 눈이 부신 모습으로 차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영인이 나오는 것을 백이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타요.”
그리고 별다른 말 없이 턱으로 보조석 차 문을 가리키고 자신도 운전석 쪽 문을 열었다.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있었을까? 영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백에게로 걸어갔다. 이제 곧 10월이었다. 이른 아침 공기는 제법 찼다.
서울역으로 운전하는 동안 백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영인도 굳이 백과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기에 입을 꾹 다물고 창문 밖만 내다보았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만이 숨 막히는 둘만의 공간을 울렸다.
백은 서울역에 익숙한지 도착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주차장을 찾아 들어갔다. 주차까지 마치고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먼저 내렸다. 자동차 앞 유리로 걸어가는 백이 보였다. 백은 보조석 쪽으로 일부러 와서 마치 여자친구를 에스코트하듯 차 문을 연 채로 영인이 나올 때까지 잡고 있었다.
“후.”
영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 모습을 본 백은 미소 지었다. 말을 잃은 사람들처럼 둘 다 상황이나 관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영인이 완전히 차에서 빠져나오자 급하지 않게 보조석 문까지 닫고서 백이 앞장서서 걸었다. 영인은 그런 백의 옆도 뒤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서 백을 쫓았다.
“햄버거 하나씩 먹고 갈까요? 시간 괜찮은데.”
백이 역사 안에 위치한 패스트푸드점 문 앞에서 영인을 보며 물었다. 영인은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았지만, 자동문 열림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번에는 영인이 먼저 들어갔기 때문에 백이 그 뒤를 따랐다.
영인이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영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잘 맞는 재킷 밑으로 영인의 탄탄한 엉덩이가 드러났다가 이내 다시 숨었다. 질 좋은 바지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섹시하게 느껴졌다.
주문을 마치고 받은 진동벨이 울렸다. 영인이 어쩌기도 전에 백이 나서서 양손에 트레이를 하나씩 들고 가져왔다. 영인은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런 백을 바라보았다. 백이 능숙한 웨이터처럼 영인의 자리에 먼저 영인의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던 영인이 치즈버거 하나를 느릿하게 먹는 동안 백은 고기 패티가 두 개나 든 햄버거를 착실하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식사는 비슷한 속도로 끝났다.
백이 커피로 입가심을 하다 말고 냅킨을 영인에게 건넸다. 영인이 영문을 묻는 듯한 표정을 짓자 시원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자신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영인이 황급하게 백이 준 냅킨으로 입가를 훔쳤다. 백은 웃으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차 시간에 맞춰 둘은 플랫폼에 서 있었다. KTX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도착했고 드디어 백과 영인이 기차에 탔다. 영인이 각오를 다지듯 주먹을 꽉 쥐고 정해진 자리로 갔다. 이번에는 절대로 백에게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백은 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핸드폰을 잠시 보다가 이내 의자에 기대 잠들었다. 영인은 백이 어떤 접근도 없이 잠들어 버리자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백과 닿은 다리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었다. 무릎부터 종아리까지 둘의 다리는 붙어 있었다. 백이 완전히 잠들었는지 점점 더 영인에게 닿은 다리에 무게가 실려 왔다. 영인은 그것을 피하지도 밀어내지도 못하고 혼자 괴로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귀 뒤부터 목덜미가 온통 뜨거워졌다.
백은 정말 목적지에 거의 도착해서야 부스스 눈을 떴다. 길게 기지개 켜며 작은 신음을 냈다. 영인은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백의 다리 때문에 내내 너무 긴장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백은 영인의 사정도 모르고 개운한 얼굴로 창밖 풍경을 구경했다.
창원역에서 나오자마자 백은 택시를 잡고서 영인을 뒷자리에 앉게 하더니 자신은 보조석에 앉아 예식장 이름을 말했다.
“둘 다 아주 헌칠하시네.”
“맞습니까?”
택시기사의 칭찬에 백이 넉살 좋게 맞장구를 쳤다. 평소에는 쓰지 않는 경상도 사투리 억양을 일부러 티 내면서 말했다. 그러자 기사는 경상도 사람이냐며 반가워했다. 2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백은 기사의 자식이 몇 살이고 기사가 원래 하던 직업을 그만두고 택시를 하게 된 사연까지 알게 되었다. 영인은 사소한 수다 소리를 들으며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아 팔짱 끼고 눈을 감았다. 그 소음이 정겹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여유 있게 도착한 덕에 백과 영인은 예식이 시작하기 전에 신부대기실에 방문할 수 있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머리를 질끈 묶고 있던 공장 사무실 안 수림과는 다른 사람 같은 수림이 화려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와!”
백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수림이 반가워하며 얼굴을 어색하게 찡그렸다. 드레스 차림에 대한 민망함과 먼 거리를 와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담긴 표정이었다. 영인도 막상 결혼을 앞둔 수림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알고 지냈다. 모두 영인을 잊었을 때도 수림만큼은 끝까지 곁에 남아 주었다.
“같이 사진 찍어요.”
수림이 영인과 백을 불렀다. 사진작가가 곧 영인과 백의 위치를 잡아 주었다. 백과 수림이 앉은 소파 뒤에 영인이 섰다. 백과 수림은 환하게 웃었고, 영인은 간신히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내가 온 목적.”
백이 들고 왔던 가방에서 봉투 뭉치를 꺼냈다. 봉투가 하도 많아 눈으로 헤아릴 수도 없었다. 영화 전자에서 수림을 아는 사람들이 맡긴 축의금이었다. 수림이 영인과 백을 보았을 때보다 더 기뻐하며 신부대기실에서 수발을 들던 여동생을 불렀다.
“식권 드릴까요?”
수림과 닮은 여동생이 들고 있던 가방에 축의금 봉투를 넣으며 상냥하게 묻자 백이 영인을 보며 확인했다.
“과장님, 식사하고 가요? 나는 식만 보고 가야 할 것 같은데. 대학교 동기들 있죠?”
“영인이랑 나랑은 둘만 친해요.”
수림이 영인 대신 대답했다. 영인과 수림의 접점이었던 사람은 이제 없다. 영인의 입가가 떨렸다.
“그래? 결혼식장에서 혼밥은 영인 과장님이 하기는 너무 고난도인데.”
백이 미소 지으며 수림의 여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식권 두 장 주세요.”
영인이 백의 손바닥에 놓인 식권을 보고 말했다.
“일찍 가 보셔야 한다면서요.”
“버스야, 뭐. 다음 차 타면 되죠.”
백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을 잠시 홀린 듯 보던 영인이 백의 재촉에 놀라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수림의 여동생에게 주었다.
“야, 뭐야. 너무 두툼하다?”
수림이 일반적이지 않은 두께를 보고 놀라 말했다. 영인이 가볍게 웃었다.
“뭐 좋은 거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너무 급하게 알아서 그러진 못했고. 살림살이 필요한 거 사. 많이는 안 넣었어.”
수림은 감동했다.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인이 마음을 썼다는 점에 울컥했다. 영인과 지내며 영인에게 상처 받고 서운했던 적도 많았다. 30살이 지나면서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강영인에게는 기대를 말아야지. 그러면서 쏟아부은 업보 같은 우정이었다. 일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증표를 받은 것 같아 정말 기뻤다.
“울겠다. 울면 안 돼. 예쁘게 입장해야지.”
백이 수림을 놀리듯 말하자 바로 잠시 고였던 눈물이 말랐다. 이어서 백과 영인이 수림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신부대기실을 나섰다. 수림의 고향 친구들이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어서 더 시간을 뺏을 수 없었다.
영인과 백은 신부 측 좌석이 놓인 곳 가장 뒤에 섰다. 둘 다 키가 커서 시야를 가리는 것은 없었다. 일반적인 결혼식과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수림과 입장하는 수림의 아버지가 유독 수척해 보인다는 점만 빼면.
수림의 결혼식을 함께 보며 백과 영인은 서로의 미래를 점치고 있었다. 백은 자연스럽게 영인과는 결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라스베이거스라도 가야 할까? 그런 엉뚱한 결론에 다다르자 혼자 작게 웃었다.
그러나 백에게는 산뜻하고 별문제 없는 상상이 영인에게는 너무 어렵고 불행한 일처럼 그려졌다. 영인의 상상에서 백은 고통받고 슬퍼하며 괴로워했다. 그런 백의 모습은 영인을 더욱 불행하게 했다. 영인은 백의 곁에 있고 싶으면서도 불안에 잠식되어 용기 낼 수 없었다.
웨딩드레스 입은 수림에게서 영인이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수림과 윤기를 보며 백의 결혼식을 상상했다. 턱시도를 입고 당당하게 신랑 입장하는 백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역시 이쪽 미래를 그려 보는 것이 더 행복했다.
식장 뷔페에서 식사를 마친 후 백은 버스 터미널로, 영인은 다시 기차역으로 가야 했다. 고향 집에 가서 또 성윤인 척 해야 하는 백을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백이 눈치 빠르게 영인의 얼굴에 어린 걱정을 읽어 냈다.
“왜요? 걱정돼?”
장난스러운 음성으로 백이 물었다. 영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미 들킨 걱정을 숨기지 않고 백을 보았다.
“괜찮아요. 이제 인이 박였어. 의사 흉내 잘 내요. 오늘은 가서 이래야겠다. 아, 강영인이란 환자가 내원했는데 상태가 너무 안좋아요. 큰일 났어.”
정말 의사같은 얼굴과 말투로 줄줄 내뱉는 엉뚱한 대사에 영인이 작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이 걱정을 완전히 날려 주지는 못했다. 백이 영인을 위로하듯 영인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쥐었다. 어느새 주객이 전도되었다.
예식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백이 택시를 잡아 영인을 먼저 태웠다.
“조심히 올라가요.”
문을 닫기 전 영인을 보며 인사했다. 영인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백이 문을 닫았고 택시가 출발했다. 영인은 함께 내려왔던 길을 홀로 돌아가는 것이 생각보다 더 쓸쓸하고 외롭게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 * *
백이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불부터 켰다. 9월 마감을 마치고 퇴근하니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피로가 며칠째 누적되니 신경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이 상황을 타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독한 술을 마시고 눕는 것이었다. 그러면 스위치가 꺼지듯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좋지 못한 방법이라는 것을 백은 알고 있었다.
이제는 그런 자학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스스로 중심을 잡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자기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인생을 꿈꾼다는 것은 어불성설,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백은 지난번 먹다 남은 위스키를 까는 대신 옷을 갈아입었다. 짧게라도 밖을 달리고 오면 지쳐서라도 잠들 수 있을 듯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핸드폰을 챙기는 대신 스마트 워치를 차고서 동네 한 바퀴 가볍게 돌 경로를 설정했다. 그리고 가볍고 땀 흡수에 좋은 트레이닝복에 얇은 경량 패딩 조끼만 걸치고 볼캡을 눌러썼다.
야밤에 달리기였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목표했던 코스를 다 뛰고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 백이 천천히 몸을 풀었다. 다 달리고 난 뒤 몰려오는 피로감이 클수록 성취감도 커졌다.
갈증이 났다. 이어폰을 빼서 주머니에 넣고 생수를 하나 사서 마실지, 좀 참았다가 집에서 마실지 고민하며 백이 단지 앞 편의점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운 밤, 외롭고 지친 사람들을 위한 등대처럼 편의점만은 환했다.
영인은 텅 빈 냉장고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정신없이 살았는지 생수조차 없었다. 수돗물을 마실까 하다가 핸드폰 하나 챙겨 들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생수만 사려고 했는데 막상 맥주를 보니 구미가 당겼다. 어지럽고 더운 속이 맥주로 달래질까?
결국 맥주를 4캔 같이 샀다. 생수 2병과 맥주 4캔이 든 비닐봉지는 제법 묵직했다. 차가운 밤공기에 어깨를 움츠리며 편의점 문을 밀고 나왔을 때, 마주한 이는 다름 아닌 백이었다. 백을 발견하자마자 영인은 뒷걸음질 쳤다.
“으억!”
그리고 계단 턱에 부딪혀 볼품없이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영인을 보고 놀랐던 백이 태산 같은 영인이 허물어지듯 넘어지는 것을 보고 더 놀라 정신없이 영인을 향해 달려왔다. 영인은 당장 느껴지는 통증보다 백에게 이런 형편없는 모습을 보인 것이 더 괴로웠다. 땅으로 꺼지고 싶다는 관용적 표현이 절절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강 과장님! 괜찮아요?”
백이 영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백이 내민 손이 아니라 땅을 짚고 일어섰다. 제대로 서자 왼쪽 발목이 시큰거렸다. 백이 쭈그려 앉아 영인의 양 발목을 확인했다. 방금 넘어진 것인데도 왼쪽 발목이 부어오른 것이 눈에 보였다.
“이거 내일 병원 가 봐야겠다. 다리 삔 거 그냥 두면 두고두고 고생해요.”
진지한 얼굴로 백이 말했다. 영인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고 바닥에 널브러진 봉투와 짐을 들었다. 백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영인의 손에 들린 봉투를 보았다.
“이 새벽에 뭘 사러 나와서 이런 봉변을?”
가볍게 웃으며 봉투 속을 슥 보았다. 맥주캔을 보자마자 장난스럽게 혀를 찼다.
“이건 압수. 이따 물만 집에서 줄게요.”
영인의 손에 든 봉투를 빼앗듯이 가져가고 영인의 왼편에 섰다.
“기대요.”
그리고 영인의 왼팔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두르게 했다. 영인이 바로 거절하듯 뒤로 물러섰지만, 왼 다리에 힘이 들어가자 자기도 모르게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백이 거 보란 듯이 다시 영인의 팔 안쪽으로 들어갔다.
영인의 무거운 왼팔을 어깨에 얹고 자신의 오른팔을 영인의 단단한 허리에 둘렀다. 오른손에는 비닐봉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영인의 왼손을 잡았다. 영인은 낭패를 마주한 사람처럼 난감한 얼굴을 하고는 백이 이끄는 대로 함께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백의 몸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어떤 저항의 의지조차 잃고 말았다. 한없이 무력해졌다. 백 앞에서는 자꾸만 바보가 되었다.
두 사람은 어설픈 이인삼각을 하는 사람들 같아 보이기도 했고, 사이 좋게 어깨동무한 친구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백은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영인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을 영인은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관 앞까지 도착해서야 백이 영인을 풀어 주었다. 영인이 도어록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자 닫히기 전에 백이 잽싸게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영인이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백은 이미 거실까지 진입해 있었다.
“저는 물 한 잔 주세요.”
백이 뻔뻔하게 소파에 앉아 말하자 영인이 절뚝이며 아까 사 온 생수를 챙겨서 주방으로 갔다. 백은 그런 영인을 보고서야 아차 싶었는지 그 뒤를 쫓아갔다.
“과장님이 앉아 있어요. 제가 알아서 마실게요. 내일 꼭 병원 갔다가 출근해요. 늦어도 괜찮으니까.”
영인을 강제로 식탁 의자에 앉히고 밝은 조명 아래서 발목을 다시 확인하며 말했다. 발목이 확실히 부어 있었다. 백이 자기 집처럼 자연스럽게 냉동실 문을 열어 얼음팩을 꺼낸 뒤 얇은 수건에 감싸 영인의 발목에 갖다 대었다. 예고 없이 느껴진 냉기에 영인은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일단 오늘은 냉찜질 좀 해 두고요. 술은 먹지 말고.”
백이 아이를 달래듯 다정하게 말했다. 영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백이 일어서자 영인의 얼굴 위로 백의 그림자가 앉았다. 감은 눈 아래로 더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영인이 천천히 눈을 뜨자 백이 영인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피부로 느낄 수 있다면 아프리만치 흔들림이 없이 영인을 찌르는 듯한 시선이었다.
“강 과장님.”
백이 영인을 불렀다. 영인이 고개를 들어 백을 보았다. 백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한테 안 미안해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영인이 애써 숨기고 감추려던 일을 파헤쳤다. 전혀 언급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다. 지금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묻어 버리고 싶은 것들 투성이였다. 백을 포함해서.
그렇지만… 그렇지만… 미안했다. 영인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잠시의 정적 끝에 영인이 진심을 내보이고 말았다. 백이 대답을 듣고는 입술을 잠깐 삐죽였다. 예상하지 못한 빠른 인정에 당황했다.
“뭐가요?”
이것은 과거 여자친구와의 싸움 끝에 건넨 사과에 늘 돌아오던 대답이었다. 뭐가 미안한데? 그 질문이 족쇄 같고, 항복 선언을 요구하는 것 같아 답답할 때가 있었는데 막상 자신이 그 입장이 되니 그제야 그녀들이 이해되었다. 이해와 공감이 바탕이 된 확실하고 정확한 사죄가 필요했다. 그래야 같은 일로 두 번 상처 받지 않을 테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내는 상처는 너무 아프니까.
영인의 내면에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영인은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도 모르고 폭풍 같은 감정에 휩쓸리고 있었다.
“다요.”
그리고 한참 만에 겨우 대답했다. 상처 받으라고 내뱉은 모든 칼 같은 말들도, 감히 품은 연정도, 백을 알게 된 것도 다 미안했다.
“나 안 좋아한다고 한 거?”
백이 확인하듯 되물었다. 영인이 죄를 자백하는 범인처럼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좋아하는데 잔 거라고 변기 취급한 것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백이 다시 헤집어 놓고 있었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영인이 크게 숨을 한번 마시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굴복하듯 진실을 말했다. 백이 칭찬하듯 영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영인치고는 무척 잘한 것이었다.
영인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더 백과 대화했다가는 모든 것이 수포가 될 것이었다. 영인은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제가 책임님이랑 사귄다든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영인이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은 말을 듣고 백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 과장님 마음 잘 알았으니까 이제 얼른 잘 준비 해요. 자는 거 보고 갈게요.”
백이 영인의 어깻죽지를 잡아 일으켰다. 아까 집에 왔을 때처럼 영인의 품 안으로 들어가 영인을 받쳐 주었다. 침실에 달린 욕실까지 영인을 밀어 넣고 그 앞에 서서 기다렸다. 오랜만에 들어온 영인의 침실이었다.
가만히 둘러보니 바뀐 것은 없어 보였다. 한 군데만 빼고.
영인의 평평한 침대 헤드 위에 낯익은 네이비색 시계가 놓여 있었다. 스마트 워치로 시간을 확인하니 시간까지 정확히 맞게 잘 작동하는 시계였다. 영인이 건전지를 챙겨 넣고 시간을 맞추었음이 분명했다. 백은 그 시계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 준 것이니까.
그 시계를 보는 순간 백은 직감했다. 이 기다림도 여기서 끝이라는 것을.
강영인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제 옆에 두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치솟았다.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졌다.
잘 준비를 마친 영인이 백을 멀뚱히 보았다. 백이 영인의 손을 잡고 영인을 침대에 눕혔다. 조명을 끄고 영인에게 이불을 덮어 준 뒤 침대 옆에 걸터앉아 영인의 가슴을 토닥여 주었다.
영인은 백이 신기했다. 백은 자신을 어느 날은 여자친구에게 하듯 에스코트했고, 어느 날은 아이를 돌보듯 어루만졌다. 백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얼른 자요. 자는 거 보고 갈 거니까. 늦게 잠들면 내가 내일 피곤하겠죠?”
그 말에 영인이 눈을 감았다. 일정한 속도로 백이 영인의 가슴을 쓰다듬듯 두드리자 거짓말처럼 잠이 쏟아졌다. 얼른 잠든 척이라도 해서 백을 보내 주자는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영인이 잠들어 버렸다. 백은 영인이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하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영인은 어떤 생각으로 저 시계를 침대에 둔 것일까? 백은 웃음이 났다. 패배를 예감한 탓이었다. 무슨 수로 영인이 자신에게 올 때까지 기다린단 말인가. 승산이 없는 게임이었다.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백은 확실한 삶의 기준이 있었다. 합리적인 방안을 이성적으로 생각해 결정하고 나면 그것을 뒤바꾸는 일은 절대 없었다. 선택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일단 정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후회하지 않았다. 지나 온 과거를 아쉬워하지 않고 주어진 현재에 충실했다. 그것이 백이 절대적으로 지켜 온, 결코 거스르지 않는 백의 원칙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지금, 그 기준마저 모조리 흔들리고 있었다. 백은 알고 있었다. 영인을 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거시적으로 봤을 때 옳은 선택이라는 것을.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백은 그 모든 선택을 번복하고자 했다. 백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강영인은 객관적으로 똥차였다. 인력거였다. 이런 사람을 사귀면 마음고생할 것이 뻔했다. 상처 받고 슬퍼지는 날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랑하는 마음을 정리하는 게 맞았다. 이성적으로는 그랬다.
그렇지만 백은 그럴 수 없었다. 영인이 똥차라면 백이 똥차 드라이버가 될 것이다. 영인이 인력거라면 백은 인력거꾼이 되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영인을 놓을 일은 없었다. 놓을 수가 없었다. 백이 영인과 시계를 번갈아 보다가 영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숭쟁이.”
작게 중얼거리고는 가뿐하게 일어섰다. 이것은 백의 완벽하고 완전한 패배였다. 사랑이 주는 시험에 그대로 굴복했다. 함정인 줄 알면서도 빠졌다. 하지만 함정이어도, 어둠이어도, 상처뿐이어도 백은 영인이 좋았다. 그래서 이 패배가 달콤했다.
사실 백의 패배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셈이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게임이었다. 백은 영인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늘 밤, 영인을 위하여 기꺼이 삶의 기조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후진 없는 인생은 여기까지였다. 백은 멈추었고 지금 최초로 인생의 유턴을 결심했다. 영인을 위하여. 오직 사랑하는 강영인을 위하여.
* * *
영인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백이 있었던 침대 가장자리를 확인했다.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커다란 손으로 차갑게 식은 이불을 훑어보았다. 아쉬웠다. 한참을 그렇게 빈자리를 매만지고서야 영인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영인을 놀리듯 주방 식탁 위에는 백이 남긴 쪽지가 놓여 있었다. 여전히 단정하고 반듯한 글씨체였다.
[병원 다녀와서 늦는다고 사무실에 이야기 해 둘 테니 꼭 한의원이든 정형외과든 갔다 와요. 혹시 몰라 집에 있던 파스 두고 갑니다. 필요하면 쓰세요.]
영인은 그 짧은 쪽지를 아주 여러 번 읽었다.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읽으니 이번에는 백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백의 얼굴을 마주하고서 그 말을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난밤도 그보다 더 오래된 날에도 늘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출근한 사무실에 백은 없었다. 발목이 아프지 않아 병원도 들르지 않고 서둘러 한 출근이었다. 넓은 사무실은 어두컴컴했다. 보통은 가장 먼저 출근한 백이 불을 켜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영인은 어쩐지 덜컥 겁이 나서 백에게 연락하려고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뻣뻣한 몸짓으로 조명을 켜고 백의 자리를 지나쳐 프리랜서 개발자들이 모여 앉는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영인은 시시때때로 사내 메신저 창을 열어 접속한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했다. 백의 이름은 계속 오프라인을 뜻하는 회색이었다. 어제 너무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돌보느라 일어나지 못한 것일까? 아픈 곳이 있을까? 안절부절못하던 영인이 괜히 용무도 없으면서 사무실 복도를 따라 걸었다. 백의 빈자리가 아프게 눈에 박혀 왔다.
“강영인.”
오전 시간 내내 사무실을 배회하는 영인을 수림이 잡아 세웠다. 수림의 자리에는 주성도 와 있었다.
“이리 와 봐.”
영인이 가던 방향을 틀어 수림의 자리에 섰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주성이 꾸벅 먼저 인사하자 영인도 가볍게 묵례를 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백 책임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네.”
수림이 건조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백의 조사를 알렸다.
“아.”
영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왔다. 백은 어두컴컴한 새벽에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홀로 운전해서 그 먼 길을 떠났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나를 두고서.
“백 책임님 고향이 진주였나?”
수림이 주성을 보고 묻자 주성이 끄덕였다.
“네. 점심 먹고 회사에서 버스 출발할 것 같아요. 일단 저희 팀장님이랑 파트원은 다 갈 예정이고. 아마 다른 팀원들이랑 옆 팀 사람들도 갈걸요. 백 책임님 일이니까.”
주성이 대답했다. 보통 조부모상은, 특히 거리가 멀 때는 특별히 가까운 사람들만 대표로 참석하고는 했지만, 백의 경우는 너 나 할 것 없이 챙기려고 할 것이 뻔했다. 수림도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버스 탈 수 있나? 나 안 그러면 팀장님 차 타고 가야 해.”
수림이 슬픈 표정으로 주성을 보았다. 수림의 팀에서야 각 파트장과 팀장, 그리고 백과 친한 수림 정도만 참석할 것이 뻔한데 그 아저씨들과 함께 오랜 시간 한 차를 타고 이동할 생각을 하면 아찔했다.
“책임님 탈 자리는 당연히 있죠! 버스가 45인승이니까 여유 있을 거예요. 윤창이한테 책임님도 타신다고 얘기할까요?”
주성의 긍정적인 대답에 수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성이 바로 핸드폰을 꺼내 참석자 인원 체크를 하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는데 잠자코 듣고만 있던 영인이 끼어들었다.
“나도, 아니, 저도 갈게요.”
수림이 의외라는 얼굴로 영인을 보았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영인, 사회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그래. 이럴 땐 가 줘야지. 그게 사람 도리지.”
수림이 오버하며 영인의 등짝을 철썩철썩 때렸다. 주성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꺼낸 영인을 보았다. 영인이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자리였다. 수림에게 봉투만 건네도 충분한 자리였다. 그런데 영인이 끼어든 게 주성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선배님.
그리고 그때 핸드폰 너머로 윤창이 응답했다. 주성이 얼떨결에 수림과 영인도 탄다고 전해 주었고 사원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수림은 영인을 올려다보며 뿌듯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이제 내가 너를 좀 덜 신경 써도 되겠다.”
영인이 부담스러운 수림의 눈빛에 어쩔 줄 모르며 어색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주성도 용건을 마쳤는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두 시 반까지 셔틀버스 타는 곳으로 오세요.”
“그래요, 고마워! 영인아, 우린 점심 같이 먹자.”
“난 생각 없는데.”
“내가 안 돼. 버스에서 배고파 혼절할걸. 열한 시 사십 분쯤 눈치껏 나와.”
수림과 영인은 시간 맞춰 버스에 올라타 가장 구석을 찾아 앉았다. 영인이 창가였고 수림이 복도 쪽에 자리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승객 중 대부분이 잠들었다. 수면 부족은 현대인에게는 고질병이었다. 오직 영인만이 잠들지 못했다.
수림은 꾸벅꾸벅 졸며 영인의 어깨에 조금씩 머리를 기대어 왔다. 영인은 그런 수림을 밀어내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백이 괜찮을지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간다고 해 줄 수 있는 일도 없으면서 그래서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장례식장 앞에는 수많은 화려한 근조화환이 잔뜩 놓여 있었다. 그 문구만 읽어도 백의 부모가 얼마나 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역구 국회의원부터 큰 단체장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그 끝에는 영화 전자와 영화 시스템즈, 백의 대학교 동아리 모임 등에서 보낸 화환도 몇 개 있었다.
수림의 팀원들보다 수림이 먼저 도착한 탓에 수림은 영화 전자 사람들과 어정쩡하게 합류해 앉았다. 영인이라도 왔다면 둘이 자리를 따로 잡았을 텐데 영인은 기껏 여기까지 와 놓고 정작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친구였다.
백이 지친 얼굴로 고마운 조문객을 맞아 주었다. 장례식장 안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서 괜히 왔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조의를 표하고 자리 잡은 사람들을 향해 백이 일일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수림을 보고는 특히 반가워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백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음식을 먹으며 적당히 맞장구치던 수림이 넌지시 영인이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강영인 과장이 지금 같이 왔는데 무슨 이유인지 여길 안 들어오네요. 아마 밖에 있을 거 같긴 한데.”
수림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백은 단번에 수림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잠시 문장을 복기하더니 놀란 얼굴이 되었다.
“들어오라고 전화할까요?”
“아니, 내가 찾으러 갈게.”
백이 사람들과 좀 더 시간을 보내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끊임없이 방문객이 와서 백에게 인사했고, 백도 아는 척했다. 잠시 실내를 한번 돌아본 백이 구두를 신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손님을 만나기 위해서.
어느새 주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영인은 멀지 않은 곳에 홀로 서 있었다. 외딴 섬처럼.
백은 나오자마자 붉게 타고 있는 담뱃불과 회색 연기 그리고 영인의 검은 인영을 발견했다. 말없이 보폭을 크게 해 영인의 곁으로 걸어갔다. 10월 같지 않게 차가운 날씨였다. 영인은 눈동자만 움직여 그런 백을 쫓았다.
“왔으면 들어오지 왜 이러고 있습니까?”
백이 영인의 바로 옆에 서며 말했다.
“그러게요.”
영인이 힘없이 웃었다. 백은 별말 없이 정면만 바라보았다. 쓸쓸한 밤공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영인은 그런 백의 옆모습을 흘낏 보며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비벼 뭉그러트렸다.
“이제 역할극은 끝났어요?”
“그런 셈이죠. 그런데 이 집에 내 자리가 아직 남았나 모르겠네.”
백은 홀가분하면서도 슬픈 얼굴이었다. 비로소 할머니와 함께 성윤도 완전히 보낸 듯했다. 반듯한 이마부터 날렵한 콧날까지, 말을 마치고 굳게 다문 입술도 모두 슬퍼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위로가 필요할 것 같아서 왔는데… 생각해 보니 내가 위로가 될 것 같지 않더라고요.”
영인이 황량한 병원의 장례식장 건물을 보며 입을 열었다. 삭막하고 스산한 기운이 드는 것이 영인과 꼭 어울리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백에게 갈 수 없었다. 어둠이 잠시 그늘이 진 양지를 달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더 어둡게나 만들겠지.
이제는 두 사람의 시선이 모두 정면을 향했다.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외로운 사람은 둘이 모여도 외로움을 물리칠 수 없었다. 더욱 고독해질 뿐.
“위로가… 되네요. 고마워요.”
백이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영인의 서툰 위로를 충분히 느끼고서야 내뱉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응답으로 이 만남은 영인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영인은 위로해 주러 와 놓고는 위로받은 자신이 한심하고 우스웠다.
“밥 먹고 가요.”
“아니요. 이제 가 보려고요.”
백이 드디어 영인의 얼굴을 보았다. 영인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런 백의 얼굴을 보았다. 허공에서 마주한 시선에 대번에 영인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럼 잠깐 기다려요, 가지 말고!”
말을 마친 백이 건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가볍게 달리는 백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작아져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유독 추운 날이었다. 10월이 이렇게 추웠던가. 영인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몸을 잠시 움츠렸다.
돌아온 백의 손에는 유리병에 담긴 두유와 정체 모를 까만 천이 들려 있었다. 백이 이번에는 영인의 맞은편에 바짝 다가와 섰다.
“나는 왜 이 상황에서도 강영인 과장 옷 얇은 게 걱정될까?”
백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뒤 들고 있던 천을 영인의 목에 감쌌다. 가까이에서 보니 백의 얇은 니트였다.
“우리 할머니가 항상, 감기라는 놈은 목으로 들어와. 꼭꼭 싸매고 다녀! 그러셨었어요.”
훤하게 드러나서 유독 춥고 외로워 보이는 영인의 목을 백이 꼼꼼하게 자신의 옷으로 감싸 주었다.
“둘러 줄 게 이거밖에 없네요. 아프면 안 되죠. 일해야 하는데. 배도 고프면 안 되고.”
백이 들고 있던 두유가 영인의 손으로 전달되었다. 그것은 아주 따뜻했다. 영인은 그 순간 옷에서 느껴지는 백의 체취도, 두유에서 느껴지는 백의 체온도 모두 잃고 싶지 않아졌다. 그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욕심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백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백은 아무런 말없이 그런 영인의 눈을 마주보다 가볍게 영인을 안아 주었다.
영인은 낯선 동네의 버스 터미널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쥔 유리병이 깨지지는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힘을 준 상태였다.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영인은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자마자 백이 준 것들을 소중하게 소파 테이블 위에 올리고 마치 죄를 씻어 내듯, 더러운 욕심을 지워 내듯 오래도록 샤워했다. 차가운 물줄기가 아프게 몸을 때려 오는데도 더운물을 틀지 않았다.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물기 어린 거울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절망했다. 감히 백을 원하고 있었다. 욕심내고 있었다. 그 처절한 욕망이 가리지도 못할 만큼 넘쳐흘러서 이제는 백을 속일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멋대로 백의 손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또 잡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털어 내고 영인이 오랫동안 치워 두었던 액자를 꺼내 와 소파에 앉았다. 진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밝게 웃으며 서로를 얼싸안고 있는 진과 영인의 순간이 그곳에 여전히 박제되어 있었다. 시선은 진의 얼굴에만 머물렀다.
금세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언제까지고 마음에 품고 있겠노라고 다짐한 약속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진과 함께, 진이 준 어둠 속에서 남은 생을 살고자 했다. 그것이 진을 향한 영인의 사랑이자 속죄였다. 아프고 외로운 삶만이 역설적으로 영인을 살아가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짙은 밤이어도 해가 뜨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암흑 같은 영인의 삶에도 여명이 드리우고 있었다. 막을 재간이 없었다. 암만 두 손으로 눈을 가려 봐야 실낱같은 작은 틈으로 빛이 새어들어 오고 있었다. 영인이 채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며 슬퍼했다.
꽁꽁 묶어 둔 가슴에 불이 났다. 그리고 그 불은 뜨겁게 모든 것을 태워 버렸다. 영인을 옭아매던 사슬과 올가미마저 모두 불타올랐다.
불을 지른 이는 백이었다. 그로 인해 깊은 밤만 이어지던 영인의 삶이 어쩌지도 못한 사이 새벽이 되고 말았다. 아침이 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었다. 진은 옛사랑이자 과거가 되었다. 영인은 마음이 움직였음을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영인이 액자를 뒤집어 사진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이제 시선은 백이 준 두유와 옷으로 향했다. 그랬다. 영인은 백에게 사로잡혔다. 아플 정도로 백을 사랑하고 있었다.
마음을 인정한 영인은 다음 날부터 호되게 앓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열이 나고 기운이 없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만 하루를 누워서 신음했다. 백을 향한 사랑을 인정하자마자 벌을 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프면서도 좋았다. 벌은 끝나기 마련이니까. 이후에는 용서가 있기 마련이니까. 주말이어서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한 일이었다.
월요일이 되자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는 있었지만, 역시 상태가 완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수림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선 영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야! 너 왜 이래?”
“좀 아팠어. 지금은 괜찮아.”
영인이 꺼칠한 얼굴로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 이상 걱정이나 염려를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림이 소리가 들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퇴근하고 병원에 가서 수액이라도 맞으라고 해 주고 싶었지만, 사정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오늘부터 수림과 영인은 또 한시바삐 움직여야 했다. 시원스레 쉬라고 하지 못하는 상황에 수림의 속도 말이 아니었다.
상을 다 치른 백도 정규 출근 시간에 맞추어 출근했다. 하루 정도 더 쉬라는 팀장의 만류를 거절하고 바로 올라온 참이었다. 백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사람이 염려를 나타냈다.
“인간아, 좀 쉬어라!”
커피를 내리던 영태도 백을 보고서 가볍게 타박했다. 백은 피곤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대충 영태에게 대답하고 영인을 찾았다. 영인에게로 가는 길목에 있는 수림을 발견하고 높게 떠 있는 수림의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앉아서 열심히 무엇인가 작성하고 있던 수림이 가볍게 고개를 꺾어 백을 보았다.
“컨디션은 괜찮아요? 잘 보내드렸고?”
“그렇지, 뭐. 와 줘서 고마워. 주말 잘 쉬었어?”
“푹 쉬었지요. 이번 주부터 또 극한 개발이니까.”
백이 수림의 엄살에 소리 내 웃었다. 양치했는지 양치 컵과 칫솔을 들고 나오던 주성이 백의 웃음소리가 들리자마자 레이더를 가동해 백을 찾았다.
“책임님!”
반가운 얼굴로 백에게 태클 걸 기세로 달려들었다.
“어이쿠야.”
백이 거뜬하게 그런 주성을 받아 주었다.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늘 왜 나오셨어요? 쉬시지. 책임님도 사람인데.”
주성이 투덜거리듯 응석을 부렸다.
“나 좀 쉬게 얼른 내 일 좀 가져가, 주승아. 뭐부터 넘겨줄까?”
당장이라도 인수인계를 시작할 것 같은 백의 반응에 주성이 꽁지가 빠지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수림은 아직도 애 같은 주성이 귀엽기도 하고, 자신의 후임이 아닌 것이 기쁘기도 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백은 다시 영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영인에게만 특수 효과를 준 듯 눈에 확 들어왔다. 백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영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웅크린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영인이 엎드려 쉬는 것으로 생각했던 백이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영인의 상태가 평소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영인은 백이 자신의 의자 옆에 다가와 섰는데도 눈치채지 못하고 힘없이 책상에 상체를 기대고 있었다. 백이 가만히 영인의 맨살이 드러난 뒷덜미를 짚었다. 뜨끈뜨끈한 열이 느껴졌다. 영인은 갑작스레 타인의 손이 예상치 못한 곳에 닿자 놀랐는지 파드득 몸을 일으켰다.
걱정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않은 백이 영인을 보고 있었다. 영인이 멍하니 그런 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열 때문에 얼굴은 발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아픈데 왜 출근했어요?”
백의 음색이 짐짓 엄했다. 영인이 백의 손이 닿았던 목덜미를 여러 번 쓸고서야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뭐가 이렇게 매일 괜찮은지.”
피할 새도 없이 백의 손이 영인의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을 대어 보다가 체온이 잘 가늠되지 않는지 다시 손등으로 확인했다.
“열 많이 나요. 퇴근해요.”
“오늘부터 수림 책임이랑.”
백이 영인의 말을 끊었다. 백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니, 일정 조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늘은 들어가요. 이러다 더 아프면 그땐 진짜 내가 어떻게 해 줄 수도 없어요.”
백이 동의도 없이 영인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영인은 어쩌지도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영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프리랜서 개발자 정선영이 끼어들었다.
“강 과장님 아파요?”
“네, 아픈데 여기 이러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백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런 선영에게 되묻자 선영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백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요. 가셔야지. 우리도 옮으면 어쩌라고. 몸이 재산인데.”
선영이 밉지 않게 이야기하며 영인더러 빨리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백이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영인이 있을 곳이 없어졌다. 백의 손에 있던 짐들을 영인이 도로 빼앗아 왔다. 잠시 망설이다가 백의 말을 따르기로 한 것인지 가방에 남은 물건들을 챙겨 넣었다. 어설픈 반항을 해 봐야 소용이 없겠다는 결론에 이른 탓이었다. 백은 미소 지으며 그런 영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인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데 그 뒤를 백이 쫓았다. 영인은 이제 된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백을 보았지만 백은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처음에는 퇴근하는 모습만 확인하려고 했는데 막상 힘없이 걸음을 옮기는 영인을 보니 데려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문으로 가는 길에서 다시 아까 마주쳤던 사람들을 또 만났다. 수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을 쳐다보았다.
“강영인 과장님 보내고 올게.”
백이 걸어가면서 작게 대답했다. 가장 말석에 앉은 주성도 백과 영인의 모습을 보았다. 백이 잠시 멈춰 주성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주승아, 나 오늘 오전 반차. 병원 좀 다녀와야겠다.”
“어디 아프세요?”
“좀 무리했나 봐.”
백이 대충 둘러대고는 주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영인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백은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속도대로 영인에게로 걸어갔다.
승강기의 문이 열렸지만, 영인은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백을 기다렸다. 아슬아슬하게 문이 닫히기 전 도착한 백이 열림 버튼을 누르고 서자 그제야 영인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자기가 왜 이러고 백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열이 나서 멍했기 때문이라고 여기며 영인이 자신의 뺨을 쓸었다. 부끄러웠다. 그러나 정작 백은 그런 영인의 행동을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백은 영인을 태우고 우선 병원으로 향했다. 집 근처 내과로 영인을 데려다주며 수액을 맞을 건지 물었다. 수액까지 맞는다면 시간이 걸리니 백도 나름대로 시간을 보낼 일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뇨. 그냥 진료만 보고 집으로 가겠습니다.”
영인이 평소보다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영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진료실로 영인이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백이 먼저 병원을 나서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죽을 포장했다. 보나 마나 영인의 집에 환자가 먹을 음식은 없을 것이 뻔했다.
타이밍 좋게 영인이 1층에 있는 약국으로 오고 있었다. 영인은 약국 앞에 서 있는 백을 보고서는 애써 당황한 얼굴을 숨겼다. 진료 후 나온 대기실에 백이 없어서 놀란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빨리 끝났네요. 약 받아서 얼른 집에 가요. 가서 죽 먹고 약 먹고 푹 자요. 내일도 아프면 내일까지 쉬고.”
백은 그런 영인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척하며 아무렇지 않게 약국 문을 열고서 영인을 기다렸다. 몸이 아픈 것보다 백과 있는 것이 더 괴롭고 힘들었다. 백의 몸짓 하나,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도 영인은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영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백이 먼저 화장실로 가서 손을 닦은 뒤 영인을 불렀다. 영인은 제집이면서도 손님처럼 어색하게 굴었고 백은 마치 자기 집처럼 자연스러웠다.
“얼른 손 씻고 죽 먹어요. 자는 거까지 보고 갈게요.”
두 사람은 세면대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거울에 비치는 둘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백은 따스한 눈으로 여유롭게 영인을 보았다. 영인은 길을 잃은 사람처럼 불안한 눈으로 거울도 백도 아닌 수도꼭지만 응시했다. 영인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다 느리고 꼼꼼하게 손을 닦았다. 백이 기다렸다는 듯이 수건을 내밀었다. 젖은 손을 수건에 닦으며 영인이 물끄러미 백을 바라보았다. 백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영인의 손에 물기가 남아 있지 않자 그 손에 들린 수건을 다시 가져오면서.
“나한테,”
영인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백에게 말했다.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처음으로 백에게 건네는 진심이었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줍니까? 내가 뭐라고? 책임님이 뭐라고?”
영인의 우울이 백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조금만 방심하면 영인을 삼켜 버릴 늪 같은 감정이었다. 땅을 박차고 뛰어나가면 금방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힘을 주면 줄수록, 애를 쓰면 쓸수록 더 헤어날 수 없어지는 아주 오래된 함정이었다.
거듭된 실패 끝에 영인은 모든 시도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늪에 빠져 죽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백은 거의 평생을 기다려 온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감격한 얼굴이었다. 그런 질문에는 얼마든지 답해 줄 수 있었다. 마침내 찾아온 소통의 시간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영인의 진짜 마음이 나타났다. 놓칠 리 없었다.
“나는 노백이죠. 36살이고 노민욱, 오정희 사이에서 차남으로 살다가 본의 아니게 외동아들이 됐어요. 영화 전자 책임이고 할머니가 유산을 많이 남겨주신 덕에 월급쟁이치고 부동산도 제법 가지고 있는 편이고요.”
백은 마치 이력서에 쓰는 자기소개처럼 상세하게 자신에 대한 사실들을 나열해 말했다.
“거짓말은 싫어하고요. 그리고,”
백과 영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럴 리가 없는데 영인은 그 눈 맞춤이 너무 뜨거웠다. 말 그대로 뜨거웠다. 눈자위부터 눈꼬리, 관자놀이까지 지져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강영인을 좋아하고 포기할 생각도 없어요. 포기 안 하려고.”
영인은 백의 말이 끝나고서야 자신이 느끼던 뜨거움이 눈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인은 울고 있었다.
백은 영인의 눈물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영인은 백의 고백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포함한 이 모든 상황이 다 끔찍한 몰래카메라처럼 느껴졌다. 영인을 놀리기 위해 누군가 장치한 정교한 계략 같았다.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벅차오르는 감정이 들쑥날쑥하게 드러났다가 이내 하나로 뭉쳐져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어졌다. 명확하고 분명한 것은 백뿐이었다. 언제나처럼, 늘 그래 왔듯이.
“더 솔직하게 말해 주자면 너를 원해. 너랑 자고 싶고 너를 만지고 싶고 시도 때도 없이 네가 보고 싶어.”
백이 세면대를 깨 버릴 기세로 힘주어 잡고 있는 영인의 손을 감싸듯 매만졌다. 하얗게 질린 손끝을 하나하나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자꾸 신경 쓰이고 챙겨 주고 싶어. 네가 아프면 미칠 것 같고 웃을 때 옆에서 같이 웃고 싶어. 영인아, 나는 이런 사람이야.”
백의 잔잔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진심이 영인의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잠긴 문이, 단단하게 걸어 잠근 빗장이 부서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말을 마친 백은 처분을 기다리는 듯했다. 더없이 평화롭고 고요해 보였다. 백은 이로써 자신의 몫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백의 역할은 끝났다.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모든 진심을 내놓은 백이 홀가분한 얼굴로 영인의 앞에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영인을 바라보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영인이 그런 백의 목줄을 손에 쥐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벽에 아프게 부딪힌 백이 인상을 썼지만, 영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어뜯듯 백에게 키스했다.
열이 나서 영인의 혀도 입 안도 평소보다 뜨거웠다. 눈물로 젖은 뺨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하나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영인은 그 모든 열기와 혼란을 어쩌지 못하고 백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목이 잡혀 숨이 모자란 백조차 힘겨워 보이자 그제야 영인이 온몸에서 힘을 뺐다. 백이 잠시 목을 만지작거리며 통증을 달랬다. 이런 행동에도 크게 영인을 나무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헛기침을 몇 번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백이 영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확인이 남아 있었다.
“강영인, 내가 누구야?”
영인이 대답조차 잊은 채 눈앞의 사내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백에게서 도망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제 영인의 눈앞에는 온통 노백뿐. 오직 노백뿐.
백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전히 백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영인을 보며 백이 씩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별안간 영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장난기가 묻은 음성이었다.
“형, 힘들어요.”
뜻 모를 백의 말 때문에 영인의 표정이 순간 무너졌다. 단단한 갑옷 같은 무표정 안에 숨어 있는 여린 속살 같은 그런 얼굴들이 백은 좋았다. 영인이 약하고 여리니까 그만큼 열심히 무장하고 사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렇게 말해 봐. 형, 힘들어요. 그러면 다 괜찮아질 거야.”
이어진 백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앞선 문장의 의미를 알아챈 영인이 푸스스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백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중얼거렸다. 백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였다.
“형, 힘들어요.”
달콤한 음성이었다. 그것으로 영인의 무장이 그대로 해제되었다. 개운해 보이기까지 했다. 완전한 함락이었다.
영인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파도 거품이 공중에 흩어졌다가 다시 바다에 떨어져 물러가듯이 영인의 모든 것이 떠밀려 갔다가 이내 다시 돌아와 바위 같은 백에게 자기 자신을 내던졌다.
파도를 맞이하는 백은 물러섬이 없었다. 파도가 아무리 자신을 때려도 바위는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켰다. 아주 오랜 시간 반복된다면, 영겁의 시간만큼 지속한다면 바위가 파도로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았다.
깎아 내려져 돌멩이가 된다 한들 모래알이 된다 한들 이제는 다 상관없었다. 아니, 모래알이 되고 싶었다. 한 톨 모래가 되는 날 백도 망설임 없이 저 파도에 몸을 던져 함께 휩쓸려 갈 수 있을 테니까.
백과 영인 모두 마침내 상대방에게 백기를 들고야 말았다. 승자는 없었다. 이곳에는 패배자들뿐이었다. 찬란한 패배의 증표로 서로를 손에 쥐고 있었다.
백이 자신에게 온전히 몸을 기댄 영인을 칭찬하듯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영인의 긴 팔이 백의 허리를 아플 정도로 세게 감싸 안았다.
영인의 양손이 마치 제자리를 찾아가듯 백의 엉덩이 위로 스멀스멀 내려갔다. 백이 영인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대며 다시 영인의 체온을 가늠했다. 역시 열이 높았다. 영인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하체를 백에게 밀착하기 시작했다. 힘주어 백의 몸을 당기고 있었기 때문에 백은 몸을 뒤로 피할 수도 없었다.
“너 아파.”
백이 그런 영인을 말리듯 영인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손에서도 뜨끈뜨끈한 열이 올라오고 있었다.
“괜찮은데요.”
백의 목에 입술을 묻고 영인이 속삭이는 바람에 백은 얼굴을 찡그렸다. 온몸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영인의 건조한 입술이 내뱉는 숨도 목소리도 모든 것이 뜨거웠다. 의도적으로 비벼 오는 영인의 중심은 이미 빳빳하게 성이 난 상태였다. 백도 그것을 오롯이 느끼고 있었다.
거절해야 했다. 이 끈적한 유혹을 물리치고 영인에게 죽과 약을 먹인 뒤 재우고 사무실로 다시 복귀해야 했다. 그렇지만 영인은 항복 이외의 것을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꾸만 더 백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영인을 번쩍 들어 안아 침대에 휙 던져 놓고 이불을 덮어 주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백은 연인관계에서 육체적으로 약자인 입장에 놓인 것이 처음이라 살짝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이성만큼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어른이야. 서른여섯 살이나 먹어 놓고 고작 성적인 욕망에 져서 아픈 연인과 그런 사고를 칠 풋내기는 아니지.’
영인은 백의 뺨에 가만히 자신의 뺨을 대고서 턱으로는 백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영인의 무게감이, 체온이 그의 순수한 욕망을 가감 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반면 백은 아까의 굳은 결심이 무색하게도 영인이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자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히 어른인데, 어린애가 아닌데. 당장 솟구치는 성욕에 무너져서 아픈 사람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닌데, 번번이 무너지고 있었다.
영인이 백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 맞추었을 때 결국, 백의 모든 이성도 연기처럼 하늘하늘 날아가 버렸다. 백이 영인의 턱을 잡고 올려 자신의 얼굴 쪽으로 당겼다. 백은 자신이 이토록 충동에 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훌륭하거나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인간이 못 되었다.
영인은 백에게 패배한 이후로 내내 기도하고 있었다. 백을 안게 해 달라고, 백이 안게 해 달라고. 그러나 좀처럼 백에게서 그럴 기색이 느껴지지 않아 점점 초조해지던 차였다. 영인의 상태를 걱정하는 백은 아무리 꼬셔 봐도 넘어올 것 같지 않았다.
영인의 기도는 점점 간절해졌다. 그래서 백이 낮게 욕을 하며 자신의 턱을 세게 잡아 올렸을 때 환희했다. 하늘이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날도 있기는 하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거구의 두 남자가 마치 싸우듯 엎치락뒤치락 뒤엉켜 침대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두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백은 영인의 멱살을 잡아당기고 있었고, 영인은 백의 어깨를 부술 기세로 세게 구속한 채였다. 먼저 침대에 나동그라진 것은 영인이었다.
백은 여전히 영인의 옷깃을 꽉 잡고 있었다. 무력하게 누워 자신을 올려다보는 영인을 보니 가슴 한쪽이 싸해지며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지금 아픈 사람에게 무슨 짓을. 달뜬 얼굴로 거친 숨을 내뱉으며 백이 영인을 붙들고 있던 손에 힘을 풀려던 찰나였다. 영인이 큰 손으로 백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강하게 느껴지는 악력에 백이 고민을 멈추었다.
영인의 유혹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원한다면 그럴 것이었다. 영인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백이 영인의 몸에 자신의 몸을 완전히 기대듯 누우며 그 입술을 빨아 당겼다. 때로는 무게감이나 통증 같은 감각이 존재의 증거가 되곤 했다. 그런 감각들에 기대며 안정하게 되곤 했다. 그래서 영인은 지금 백이 자신에게 올라탄 이 상황이 몹시 만족스러웠다. 그 무게를 음미하며 백과 숨을 나누었다. 그리고 기쁘게 백의 몸을 잡히는 대로 주물렀다.
“아!”
백이 작게 신음하며 영인의 성기 근처에 자신의 성기를 문질렀다. 영인도 그에 화답하듯 허리를 쳐올리며 백의 양쪽 볼기를 강하게 잡아 쥐었다. 두꺼운 바지 위로도 탄력 있는 살덩어리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주물러도 직접 닿지 못하니 말할 수 없이 갈증이 났다. 부족했다. 모자랐다. 조금 더. 조금 더.
영인의 끝 모를 욕심을, 한없는 욕망을 백도 느끼고 있었다. 백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속옷 앞부분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소년이 된 것처럼 솟아오르는 충동을 어찌할 바 몰랐다. 어설픈 몸짓의 구애가 이어졌다. 아직도 젖은 영인의 뺨에 입술을 문지르며 백이 성급하게 영인의 상의를 위로 말아 올렸다.
“으하.”
백의 손길에 영인이 포효하듯 신음했다. 아직도 흐를 눈물이 남은 것인지 또 눈시울이 뜨거워지려고 했다. 투박하고 거칠게 손으로 눈가를 문지른 영인이 백의 등을 끌어안고 상체를 일으켰다. 영인의 허벅지 위에 백이 앉은 자세가 되었다.
백이 멍한 눈으로 영인을 보았다. 영인이 서둘러 상의를 벗어 버렸다. 백도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위에서부터 단추를 푸는 백을 보고 영인이 아래쪽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백지장을 맞드는 것과 같은 협력이 이어졌다. 백이 셔츠를 아무렇지 않게 바로 침대 밑으로 던져 버렸다.
어느새 둘 다 속옷 차림이 되었다. 음욕에 눈멀어 허겁지겁 옷을 벗어 버린 백이 머뭇거린 시점이었다. 정작 영인은 발기한 백의 성기를 동요 없이 바라보았다. 어떤 경건함이 느껴질 정도로 엄숙한 표정이었다. 외려 그것이 노골적이고 외설적인 눈빛보다 백을 부끄럽게 하고 있었다.
그럴 것 같지 않던 백이 살짝 손으로 자신의 중심을 가렸다. 영인은 그런 백의 행동에도 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처음부터 백은 영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감히 욕심내서는 안 될 빛나는 존재. 호감과 사랑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백은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 노백이 자신의 앞에 이런 모습으로 나를 보고 있다니.
꿈이라면 깨지 말기를, 삶이라면 나의 하찮은 욕심이 백을 망치지 않기를 영인은 간절히 염원하며 백의 손끝에 키스했다. 영인이 눈을 치떠 백을 보자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백은 또다시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영인과 상하 관계나 갑을 관계로 있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영인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그래서 저런 영인의 눈빛이 부담스럽고 안쓰러웠다. 엉거주춤하게 자신의 앞을 가리고 있던 백이 짧은 고민을 한 뒤 자세를 낮추었다.
영인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이는 백을 보고 어쩔 줄 몰랐다. 백은 패기 있게 영인의 성기 앞까지 얼굴을 내렸는데 막상 가까이에서 보니 더 엄청나게 느껴지는 그 존재감에 잠시 당황했다. 그렇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다소 진지한 얼굴로 영인의 속옷을 내리고서는 벌떡 일어선 그것에게 인사하듯 가볍게 뽀뽀했다.
그 한 번의 입맞춤에 영인의 온몸이 단단하게 굳어 버렸다. 영혼까지 얼어 버린 듯했다. 백은 흘낏, 그런 영인을 한번 올려 보고는 자신의 과업에 다시 집중했다. 지난번 영인이 자신에게 해 주었던 애무를 떠올렸다. 단지 그 짧은 회상만으로도 아랫배가 찌릿찌릿 아려 왔다. 그때 영인의 표정과 혀 놀림이 생생하게 그려진 탓이었다.
백이 조금씩 귀두를 입 안에 머금었다. 난생처음 빨아 보는 동성의 성기는 묘한 느낌이었다. 그 자체로 생동하고 있었다. 크게 입을 벌리고 엉성하게 혀와 턱을 움직였다. 영인은 그 모자라고 허술한 행위에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궁금하여 반응을 살피기 위해 영인을 본 백은 깜짝 놀랐다. 영인은 눈을 감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한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순간적으로 백이 스스로 오럴 섹스에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느낄 정도로 처절한 표정이었다. 쾌감과 흥분이 아닌 고통을 느끼는 사람처럼 여겨질 정도로.
어쨌든 백은 최선을 다했다. 영인은 자신의 눈 아래 펼쳐진 장관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백이 움직일 때마다 백의 등 근육이 함께 꿈틀거렸다. 하얀 나신의 남자가 어떤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낮춘 모습이 영인의 인생에 있던 그 어떤 장면이나 기억보다 자극적이었다. 백의 등은 강인해 보였지만, 영인 앞에 무릎 꿇은 백 자체는 연약해 보였다. 그런 이중적인 모습이 영인의 음심을 들끓게 했다. 당장에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영인이 황급히 백의 뺨을 잡았다.
“그만.”
백은 턱도, 목구멍도, 입술도 아프면서도 이 행위가 즐거웠다. 영인의 저지가 그래서 달갑지 않았다. 여태까지 늘 끝까지 몰린 것이 자신이니 이번엔 반대입장이 되어 보고 싶기도 했고. 하지만 막상 영인의 얼굴을 보니 더 할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절박하고 간절한 표정이었다. 백이 고개를 들고 허리를 세워 앉아 그런 영인에게 키스했다. 그 키스로 자연스럽게 백이 영인에게 전세를 넘겨준 셈이었다. 영인은 능숙하게 백을 침대에 눕히고 백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여유가 없으면서도 여유를 부렸다.
“흐음.”
백이 나른하게 숨을 뱉으며 몸을 이완시켰다. 죽 뻗은 목선이 아름다웠다. 영인이 군침을 삼키고는 백의 가슴을 양손으로 밀어서 모았다. 적당한 근육이 있는 가슴이 모여 골이 생긴 것을 보고 백이 눈을 감았다. 너무 남사스러웠다. 그러나 영인은 그런 백을 모른 척하고 백의 유두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옅은 색의 유두를 이로 살짝 물었다 놓는 것을 반복하자 서서히 그곳이 단단해졌다. 그저 가슴의 끝을 가볍게 자극하는 것뿐인데도 백은 가슴 전체가 간지러웠다. 마구 긁고 싶었다. 그런 백의 마음을 읽었는지 영인이 좀 더 강하게 깨물었다.
“아!”
기어코 백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병 주고 약 주듯 영인이 혀로 아까 아프게 한 곳을 핥았다. 그것이 오히려 백을 미치게 만들었다. 간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백이 힘주어 몸을 흔들며 영인을 털어 내려고 했다.
“그냥, 그냥 하자. 빨리. 응?”
영인이 백의 가슴에 묻은 얼굴을 들었다. 백의 근육들이 성난 듯 아우성치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유혹적이었다. 약간 화난 듯한 백의 표정마저도.
“그만 갖고 놀고 빨리하자고.”
백이 영인에게 농락당해 붉게 부푼 유두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처음에는 살짝 만져서 간지러움을 달랠 생각이었지만 막상 손끝이 닿자 순식간에 밀려오는 낯선 감각에 크게 탄식하며 손톱을 세워 꾹 누르고 말았다.
영인은 상상도 못 한 백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홀로 가슴을 애무하는 백이라니. 영인이 백 모르게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아팠다. 환상이나 꿈이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갖고 노는 건지 모르겠어요.”
영인이 누구도 만져 주지 않아 외로워 보이는 백의 반대쪽 유두를 세게 꼬집고 비틀었다. 순간 백이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으읏. 야!”
“아파도 좋지 않아요?”
영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도 더 낮게 울렸다. 영인이 그렇게 말하자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통증이 가라앉으며 묘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졌다. 아픈 게 좋다니. 백은 변태라도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영인을 사랑하는 일은 아프면서 좋은 일이었다. 아파서 좋은 건지, 아파도 좋은 건지 모를 만큼 좋았다.
“엎드려요.”
백이 어쩌기도 전에 영인이 백을 옆으로 굴렸다. 빙글, 백의 몸이 뒤집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속옷이 벗겨져 엉덩이마저 훤하게 드러난 후였다. 백은 베개 위에 얼굴을 묻고 무릎을 세운 자세가 되었다. 엉덩이만 높게 떠 있었다. 백은 베개에 더욱더 깊게 얼굴을 박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도무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포지션이었다.
영인은 빨갛게 달아오른 백의 목 뒤와 등을 감상했다. 백은 영원히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영인의 손바닥이 백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움찔하고 떨리는 허리도 힘주어 잡았다. 마치 잠시 백을 소유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보다 뜨거운 영인의 손이 닿는 곳마다 흔적이 남는 것 같았다. 분명히 이미 떠난 손길인데도 백은 그 여운에 어쩔 줄 몰랐다. 차라리 빨리 엉망이 되고 싶었다. 느리고 애타게 하는 손길보다 정신이 날아갈 만큼 뜨겁고 자아가 사라질 것같이 몰아붙이는 섹스가 나을 것 같았다.
“하아… 빨리.”
백이 으르렁거리듯 재촉하자 영인이 입맛을 다시고 백의 볼기를 벌렸다.
“그거 꼭 해야 하나?”
영인의 이어질 행위를 예상한 백이 고개를 돌려 애처롭게 영인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표정과는 반대로 다가올 진득하고 끈질긴 쾌감을 기대하며 구멍은 이미 움찔거리고 있었다. 영인은 백의 얼굴과 구멍을 번갈아 보며 무엇이 진실을 말하는지 헤아렸다.
“젤이 없어서요.”
백의 머리가 힘없이 고꾸라졌다. 다시 베개에 깊숙이 얼굴을 파묻고 백이 베갯잇을 꽉 붙들었다. 다가올 태풍에 대비하는 무력한 노력이었다.
영인이 손가락에 힘을 주어 무리다 싶을 정도로 골을 벌렸다. 단정하고 깨끗한 백의 구멍이 빠끔 살짝 벌어졌다 다시 꼭 닫혔다. 익숙한 바디 워시 향이 나는 그곳에 영인의 입술이 닿았다. 꾹 도장 찍듯 세게 눌러 애널에 입을 맞춘 영인이 느릿하게 혀를 내어 맛을 보았다.
시작은 젠틀했다. 매너 있는 신사처럼 조심스러운 혀 놀림이었다. 그러나 이내 게걸스럽고 탐욕적으로 변했다. 질척한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백의 억눌린 신음이 베개를 통해 진동처럼 전해졌다.
“흐윽.”
집요한 침략에 분홍빛 구멍 안쪽이 살짝 드러났다. 영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어코 혀를 밀어 넣었다. 평소 바깥의 존재와 마주칠 일 없는 내벽이 뜨겁고 부드러운 침입자에 놀라 멋대로 움찔거렸다.
백의 허리가 점점 아래로 무너지자 영인이 허리를 끌어안아 굳세게 받쳐 주었다. 백은 맘대로 쓰러질 수조차 없었다. 넓게 벌린 영인의 다리 사이에 백이 묶였다.
영인은 빼앗는 사람이었다. 백은 영인과 관계할 때면 그렇게 느꼈다. 백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발라먹을 기세로 달려드는 영인이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그런 상념조차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영인의 양 검지가 동시에 백의 구멍으로 진입했다.
처음부터 손가락이 두 개나 들어오자 백은 살짝 거북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불쾌한 감각은 금세 잊혔다. 마치 주삿바늘의 아픔을 손매로 달래 주는 간호사처럼 영인은 더 큰 자극으로 앞선 침입을 잊게 했다.
손가락으로 왕복 운동할 것이라는 백의 예상이 틀렸다. 영인의 손가락은 앞뒤로 움직이지 않았다. 영인의 양 손가락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백의 구멍을 벌렸다. 살면서 느껴 본 적 없는 치욕과 수치가 백을 끌어 내렸다. 백의 머릿속은 까맣게 암전되었다. 정말 모조리 빼앗기고 있었다.
백이 손을 뒤로 뻗어 더듬거리며 영인의 손목을 찾아 잡았다. 그렇지만 너무 미약한 저항이었다.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 사이로 영인이 다시 입술을 가져갔다. 소중하고 귀한 것에 경애를 표시하듯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작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백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인이 그 구멍 틈으로 침을 뱉기 전까지는. 그 더럽고 추잡한 행위에 놀란 백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영인을 노려보았다. 당장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는데 항상 그 얼굴이 문제였다. 영인이 젖은 눈으로 백을 보고 있었다. 도저히 화를 낼 수 없게 하는 얼굴이었다.
“미안해요. 너무 오랜만이라 아플 것 같아서.”
영인의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그 깊은 구멍 안으로 침을 뱉은 행위가 욕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배려라는 것에 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영인은 당장이라도 백이 그만두라고 할 것을 염두에 두고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백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다음부터는 꼭 젤 사 놔.”
백이 이를 악물고 화를 참으며 말하고 다시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귀 뒤가 뜨거워졌다. 흥분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수치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열이 올랐다. 영인은 백이 보지도 않는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다시 침으로 번들거리는 구멍을 늘렸다. 손가락을 고리처럼 걸어서 여러 방향으로 충분히 벌린 뒤 오른손의 손가락 개수를 늘렸다.
자연스럽게 왼손 검지를 빼고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쑥 밀어 넣었다. 찰진 내벽이 손가락에 느껴지자 성기가 더 뻣뻣해졌다. 아까 백의 혀가 닿았을 때부터 이미 한계치였다. 왼손으로는 백의 귀두를 쓰다듬고 조였다가 풀었다.
“흐윽, 흡.”
백의 작은 신음이 영인을 독려했다. 영인이 부지런히 백의 구멍을 풀어 가며 앞도 자극했다. 자신의 성기도 백의 허벅지에 되는대로 문질렀다. 백의 허리도 마치 섹스를 하는 것처럼 조금씩 흔들렸다. 그 몸짓을 보는 순간 영인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영인이 손가락을 빼 버리고는 그대로 자신의 귀두를 구멍에 들이밀었다. 백의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며 힘겹게 영인을 감당했다. 후배위로 하니 접합부가 적나라하게 영인의 눈에 보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영인이 숨을 참았다. 감당할 수 없는 자극에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백은 복식호흡을 했다. 속으로 릴랙스를 외치며 신입사원 시절 잠시 배웠던 요가를 떠올렸다. 정신으로 몸을 지배하는 상상을 했다. 근육을 이완시키고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내 몸은 찢어지지 않는다. 내 배는 터지지 않는다. 강영인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 그런 자기 암시에도 좀처럼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지 않았다. 심장은 터질 듯 두방망이질 쳤고 영인은 느리지만 조금씩 계속 자신을 밀어 넣고 있었다.
베개를 쥐고 있는 백의 팔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영인이 그런 백의 팔을 쓰다듬었다. 잠시 진입을 멈추고 상체를 낮춰 백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만할까요?”
백이 고개를 저었다.
“빨리 기분 좋게 해 줘.”
허락이 떨어지자 영인이 백의 몸통을 안고 들어 올렸다. 영인의 가슴팍과 백의 등이 맞닿았다. 두 사람 다 무릎을 꿇고 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반동에 영인의 성기가 더 깊게 백의 몸 안으로 박혔다. 백이 작게 신음하며 인상을 썼다.
영인의 두 팔은 백의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가 어깨를 꽉 잡아 안았다. 그 포옹은 백을 지지하기 위함 같기도 했고 또 동시에 구속하기 위함 같기도 했다. 백은 영인의 단단한 팔에 몸을 맡겼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영인의 입술을 찾아 빨고 진통제를 찾듯 영인의 혀를 갈구했다. 그리고 자신의 성기를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백은 압박감과 두려움을 이길 쾌락을 찾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있었다. 영인이 그런 백을 도와주려는 듯 기꺼이 입을 살짝 벌려 백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백의 엉덩이와 영인의 샅이 부딪치며 철벅철벅 소리가 났다. 점점 출입의 속도가 빨라졌다. 영인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서 떼고 발바닥으로 침대를 디뎠다. 미묘하게 삽입의 각이 변하며 백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아! 아앗!”
백의 입에서 신음이 점점 크고 빠르게 터져 나왔다. 그 반응에 맞춰 영인도 더 강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백은 자신의 성기를 손에 쥐고 어쩌지도 못하고 영인의 움직임에 그저 흔들릴 뿐이었다.
영인의 물건이 백의 전립선을 자비 없이 때려대기 시작했다. 백의 허벅지가 긴장하며 균열이 깊어졌다. 그 덕에 영인도 강한 압력 때문에 이를 악물고 작게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크흣! 힘 좀 빼 주세요.”
“흐윽! 흡….”
백이 영인의 요청에 힘을 빼려고 노력했지만, 불가능했다. 잠시 힘을 빼면 그 틈을 노리고 영인이 더 폭력적으로 쑤시고 들어왔다. 그러면 몸이 다시 조여들었다. 발가락조차 맘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백의 몸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컨트롤이 불가능해졌다.
백이 고개를 뒤로 꺾었다. 영인이 어깨를 내밀어 그런 백의 뒤통수를 받쳐 주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백의 성기를 잡고 본격적으로 흔들어 댔다. 백은 앞뒤로 폭격처럼 쏟아지는 쾌락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백이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모조리 잃었다. 백은 그저 신음하며 드디어 영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갈 곳 없는 손을 간신히 휘둘러 영인의 팔뚝을 잡아 의지했다. 백의 손이 닿자 영인의 온몸이 크게 부푸는 것처럼 보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영인이 더는 틈도 없을 만큼 자신의 하체를 백에게 밀어붙였다.
“흑!”
짧은 흐느낌과 함께 백의 성기에서 하얀 정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백은 탈진할 것 같았다. 영인의 인정 없는 삽입에 절정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백의 놀라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직 영인은 멈출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영인은 정액으로 젖은 손으로 백의 가슴을 마구 문질렀다. 백이 고개를 저었지만, 영인은 느릿하게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이미 한 번의 사정으로 잔뜩 예민해진 내벽과 전립선이 아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침입에도 비명을 질러댔다. 백의 허리가 부들부들 떨려 왔다.
“큭! 그만… 그만해.”
백이 팔을 뒤로해 영인의 몸을 밀어냈다. 견딜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의 자극은 무리였다. 영인이 백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고 백에게 간청했다.
“안에 싸고 싶어요.”
이미 열이 오를 대로 올라 몸은 물론 뇌까지 푹푹 끓어오른 상태인 백은 울고 싶었다. 영인이 백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뺨을 문질렀다. 목 뒤를 살짝 깨물고 잇자국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싸고 싶어요.”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을 인정한 영인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백이 짧게 침음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이 고른 사람이었다. 똥차인 걸 알면서도.
영인과의 사랑은 깨진 독에 물을 담는 것처럼 오랫동안 반복해서 많은 것들을 줘야 하는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을 알고 던진 마음이었다.
“강영인.”
그 부름에 영인이 백에게 기댄 자세 그대로 눈만 올려 떠 백을 보았다.
“사랑한다.”
백이 고백하며 영인의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마치 말의 출발을 허락하는 것처럼. 영인이 정말 종마라도 된 양 거칠게 박아대기 시작했다. 사정을 끝내고도 힘을 잃지 않은 백의 성기도 그 자극에 맞춰 다시 꺼떡댔다.
“흐아! 앗!”
“흡!”
백의 내벽이 경련하듯 떨렸다. 침입을 막으려는 듯 오므라드는 근육을 헤치며 비로소 영인도 극치의 쾌락에 다다르고 있었다. 집요하게 이어진 삽입에 백의 성기에서는 묽은 전립선액이 후드득 떨어졌다. 백은 온몸을 뒤틀며 떨었다. 영인의 중심에서도 울컥하며 정액이 터져 나왔다. 영인은 사정을 마치고도 천천히 허리를 계속 움직였다.
백의 떨리는 몸을 달래듯 쓰다듬고 안아 주면서도 도무지 멈출 줄 몰랐다. 한계 이상으로 몰린 백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당장 잠들 수 있을 만큼 지쳤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데 꿈결 같은 영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해요.”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었다. 영인의 고백에 백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바닥에 떨어진 백의 핸드폰은 아까부터 한 번씩 진동했다. 액정에는 주성으로부터 온 메시지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책임님, 언제 오세요?]
[책임님, 많이 안 좋으세요?]
[책임님, 오늘 연차 쓰신다고 팀장님한테 말씀드렸으니까 푹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