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처음부터 그리 순탄한 인생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빙의되자마자 주인공의 동생을 살려 놨더니 은인이라며 붙잡고, 겨우 퇴원하나 했더니 아이템에 눈이 돌아간 S급에게 습격당하고.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식이라 한차수는 납치당하면서도 그리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짜증이 좀 났을 뿐이다.
도대체 가족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철저하게 자신의 삶에서 그들의 존재를 지워 버린 걸까.
그리고 그렇게 흔적 없이 지워 버린 가족이 자신을 찾아왔다면 그건 분명 보통 일이 아니겠지.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이군.’
한차수는 납치를 당하면서도 자연스레 그 다음에 이어질 일을 예측했다.
상식적으로 납치와 감금은 한 몸처럼 같이 가기 마련. 채라하라는 놈은 그를 가둬 둘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그가 취해야 할 태도는 납치범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탈출을 모색하는 것이다.
하지만 몸에 익다시피 한 법칙은 그가 눈을 뜬 순간부터 흔들렸다.
“아, 정이흔 씨는 오늘부터 한동안 우리와 함께 지내시기로 했단다. 그동안 밀린 휴가를 이곳에서 보내고 싶다네.”
자신을 구하러 온 놈이 역으로 붙잡히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함께 휴가를 보내러 왔다는 미친놈은 흔하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희한한 상황이지.’
머리가 아팠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어찌되었든 아는 얼굴이 곁에 하나 있다는 건 선택지가 넓어지는 셈이니까.
다만 되려 왜 자신을 챙기지 않느냐며 타박받을 줄은 몰랐지.
“왜 자꾸 열이 오르내리고 경련이 그치지 않는지. 팔다리 어느 한 군데 빠짐없이 난 멍 자국은 도대체 뭐고, 베갯잇에 묻은 핏자국은 누구 건지… 한차수 씨가 물어봐야 할 건 그런 것 아닙니까.”
사실 내가 빙의된 세계는 원본 소설이 아니라 누군가 어설프게 재창작한 다른 세계가 아닐까.
거듭된 충격에 한차수는 혼란스러웠지만 내색할 여력이 없었다.
고열과 경련에 시달린 몸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면 잠에 들어도 좋다 손짓한 까닭이었다.
‘피곤하다.’
한차수는 거절하지 않고 초대를 받아들였고, 그대로 잠에 들었다. 그리고 내심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틀에 박힌 장면이 펼쳐지길 기원했다.
이를테면 누군가와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정이흔이라든지, 창문마다 채워진 격자 창살이라든지. 그게 아니면 적어도 매 시간마다 먹이려 드는 수상한 약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한차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음식이 입에 안 맞니? 메뉴를 바꿔 달라고 할까?”
“…아뇨.”
괜찮습니다. 채라하의 다정한 권유에 한차수는 낮은 음성으로 답했다.
꽤나 신경 쓴 구석이 돋보이는 식사였다. 다양한 맛과 식감의 전채부터 시작해 여러 방법으로 요리한 육류까지.
점심 식사라고 하기엔 성대했으나 하나뿐인 동생과 오랜만에 하는 식사라고 한다면 그리 이상하지도 않은 구성이었다.
그래, 이상하지 않았다.
채라하가 직접 덜어 준 큼지막한 고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곁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먹기 힘듭니까? 작게 잘라 줄까요?”
정이흔이 붉은 눈을 깜빡이며 손을 뻗었다.
그는 자신이 어린아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접시를 통째로 가져가려 했다.
“뭐하십니까?”
“고기가 큰 것 같아서요.”
“됐습니다.”
겨우 그를 제지한 한차수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쓸모없는 짓인걸 알면서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
달라지는 건 없었다.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기분 좋은 햇살. 고급스러운 식기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 서빙을 위해 드나드는 이들의 조심스러운 몸짓.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채라하와 언제든 도와줄 기세로 들썩거리는 정이흔까지 전부 그대로였다.
샹들리에가 달린 넓은 식당.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의자에 앉아 한차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처구니없지만 그는 지금 납치범과 함께 아쉬울 것 없는 점심 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직전까지 민목하의 안내를 받아 저택을 구석구석 구경했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예? 뭘요?”
“…아닙니다.”
이게 도대체 뭐 하자는 걸까.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어 한차수는 도리어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목에 칼을 들이대며 협박하는 편이 대하기 쉬운데 말이지.’
하지만 납치 이후 이어진 건 예상을 벗어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한차수는 차가운 물을 가득 채워 넣은 수영장에 들어가 볼 것을 권유받았으며, 커다란 요트가 정박 중인 선착장을 구경했다.
만약 누군가 식사 때라며 부르지 않았다면 지금쯤 요트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때마침 헬기를 타고 돌아온 정이흔을 만나러 헬기장에도 가지 못했을 테고.
그래, 그게 문제였다.
채라하는 자신을 납치한 주제에 감금하지 않았다. 아예 그럴 의도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택의 모든 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커다란 유리창에는 삭막한 창살 대신 아름다운 햇살만 가득했다.
복도를 돌아다니는 건 완전 무장한 경비원이 아니라 격식 있는 차림새의 직원들이었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상냥한 미소로 자신을 대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무해했으며 완벽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경계심과 의심이 전부 무용하다는 걸 알려 주려는 것처럼.
그때, 별로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그를 상념에서 건져 냈다.
“그게 입에 맞나 보구나. 좀 더 가져오라고 할까?”
푸른빛 도는 회색 눈동자가 그를 정겹게 바라보고 있었다.
입맛이 뚝 떨어지는 눈빛이었다.
말없이 수저를 내려놓자 옆에서 또 참견이 날아왔다.
“같은 소스를 이용한 다른 음식은 없습니까? 한차수 씨가 의외로 입이 짧아서요. 똑같은 걸 오래 먹지 못하더군요.”
“신경을 많이 써 주네. 보기 좋아요, 정이흔 씨.”
“칭찬 들을 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뭐가 좋습니까 한차수 씨?”
“…….”
“한차수 씨?”
“아무거나 좋습니다.”
“안 됩니다. 후식도 생각하셔야죠!”
마음대로 해라. 딴지를 걸며 끼어든 민목하가 제멋대로 떠들게 두며 한차수는 나른한 몸을 의자에 기댔다.
‘이쯤 되면 억지로 경계하는 게 더 피곤하지.’
상대가 대놓고 헛수작 부릴 생각 없다고 광고를 하는데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힘들고.
그럼 원하는 대로 어울려 주자.
‘어디까지 맞춰줄지 한 번 보자고.’
물잔 튕기는 소리가 식탁을 울렸다. 세 남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차수는 의자에 반쯤 파묻힌 채 입을 열었다.
“채라하 씨.”
“형이라고 불러야지, 차수야.”
“채라하 형씨.”
일부러 성질을 긁어 보려 던진 말에도 채라하는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두 눈을 빛내며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띠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 애칭인가?”
미친놈인가?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유한 반응이었다. 한차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자신이 여기서 무슨 개짓거리를 하든 채라하는 적당히 관대하게 받아들여 줄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일단 던지고 보기로 했다.
“애칭으로 불리기를 원하십니까?”
“네가 불러 주기만 한다면 뭐든 좋지.”
“그럼 설명해 주시죠.”
“뭘?”
“처음부터 끝까지.”
납치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자신의 곁에 당당히 앉아 있는 정이흔까지.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을 한 번 훑은 그가 당당히 선언했다.
“그리고 알고 있겠지만 나는 당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당신을 포함해 가족 전부.”
민목하를 첩자로 뒀으니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일부러 짚고 넘어갔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은 채라하가 작게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다만 한 가지 정정할 게 있네. 차수야, 난 널 납치한 게 아니야.”
그게 납치가 아니면 뭐란 말이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는 한차수를 향해 채라하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균열 안에서 차수 넌 거의 빈사 상태였어. 자상은 말할 것도 없고 허벅지와 허리 부근에 큰 관통상이 있어서 목하가 바로 치료하지 않았다면 생명이 위급할 정도였지. 게다가 네 입으로 광증까지 걸렸다고 말했고.”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상관… 아.
설마.
한차수는 탄식을 흘렸다.
“관리국에 등록을 마친 각성자. 그것도 관리국의 실책으로 인해 부상을 입은 각성자의 거취와 치료에 대한 권한은 관리국이 아니라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가 우선적으로 가지지.”
그건 각성자 관리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비윤리적인 실험의 면모가 밝혀진 뒤 제정된 법률이었다.
당시 관리국 국장은 다친 각성자들에 대한 치료를 전적으로 관리국이 책임지겠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실험에 강제 참여시켰으니까.
그러니 채라하의 말인즉, 관리국 내에서 일어난 사고로 인해 치명상을 입은 자신을 데려온 건 적법한 절차였다는 뜻이다.
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는 것도 여기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한차수는 스스로 광증에 걸렸다고 시인했으므로.
거취에 대한 권한은 보호자에게 넘어간 상태다.
“하지만 당신이 진짜 내 가족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한차수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을 때였다.
“한차수 씨의 친형이 맞습니다.”
정이흔이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친형이 아니었다면 그날 죽었을 테니까요.”
반사적으로 돌아본 사내의 낯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러나 붉은 눈동자 표면을 스치듯 지나간 감정은 그리 유쾌한 종류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나흘 전, 채라하가 정이흔에게 죽음을 각오하라며 외쳤던 날.
정이흔은 당연히 그의 협박에 응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채라하에게 역으로 물었다.
“그렇게까지 아끼는 동생이라면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
“당신이 한차수 씨의 형이자 가족이라면, 증명하십시오.”
끓어오르는 대지 위에서 정이흔은 담담히 요구했다.
헌터용 계약서에 죽음을 대가로 진실을 맹세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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