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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92화 (92/113)

92화

“무슨 소, 쿨럭!”

“이런, 아직도 몸이 안 좋은가 보구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짙은 꽃향기가 코끝을 휩쓸고, 주변이 부산스러워졌다.

한차수는 아직도 반항 스킬이 꺼지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 알림! ]

[ 내면의 반항심이 들끓고 분노가 의식을 잠식합니다! ]

자그마한 경고창은 시야 구석에서 얄미운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채라하를 만난 뒤 계속 저러고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채라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격렬한 증오심은 끓어오르지 않았다.

그냥 좀 머리를 쥐어뜯고 복부를 걷어찬 다음 그를 창밖으로 떠밀고 싶을 뿐이었다. 무거운 몸 덕분에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하아….”

겨우 숨을 고른 그의 눈에 채라하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정말로 몸이 약한 동생을 염려하는 형 같았다.

형이라.

‘S급 둘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데다 숙적이기까지 한 형이란 말이지.’

게다가 날 구하려던 주인공은 갑자기 여기서 휴가를 보낸다고 했고.

한데 모여서는 안 되는 단어들의 조합에 한차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낱 엑스트라 악역인 줄 알았던 인생에 뭐 이리 우여곡절이 많은 줄 모르겠다.

“괜찮니?”

채라하가 걱정스레 물었다. 한차수는 잠시 고민했다.

그의 본심은 몰라도 어쨌든 그는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하지 않았나. 잡힌 주제에 섣불리 반항해 경계심을 살 필요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조용히 답하자 채라하의 얼굴에 한가득 서려 있던 근심이 녹아내렸다. 그는 기쁘기 그지없는 얼굴로 자신의 뺨을 쓸었다.

“다행이다. 그럼 이따 보자, 차수야. 형이 조금 바빠서…. 자, 꽃은 여기 둘게.”

채라하는 무성한 꽃다발을 꽃병에 꽂고는 훌쩍 사라졌다.

참 적응 안 되는 풍경이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봤던 광경을 생각하면 더더욱.

한차수는 가만히 생각을 이어 나가다 서정민을 불렀다.

“서정민 씨.”

“목하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민목하.”

가지가지 하는군. 한차수는 한숨을 삼키고서 다시 그를 불렀다.

“…민목하 씨.”

“예, 도련님.”

가짜 신분을 벗어던진 게 만족스러운 걸까.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에 한차수도 마찬가지로 응수했다.

“배가 좀 고픕니다만.”

“아, 먹을 걸 좀 가져올까요?”

한차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정민, 아니. 민목하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자리를 떠났다.

한차수는 지친 듯 눈을 감은 채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을 때.

“길드장님.”

한차수는 꽃병을 가지고 어디론가 가려던 정이흔을 불렀다.

“어디 가십니까.”

“멀리 가지 않을 겁니다.”

누가 너 사라질까 봐 걱정된다고 했냐. 한차수는 핑글핑글 도는 머리를 짚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십시오.”

취조 시간이었다.

***

정이흔은 반항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고, 한차수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한차수 씨?”

“쉿.”

혹시나 도청당하고 있을 것을 우려하여 필담을 나누기 위함이었다. 채라하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건 알고 있었으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걸로 말하겠습니다.

정이흔은 잠깐 놀란 듯했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차수는 커다란 손을 도화지 삼아 천천히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이를테면 구슬을 깨트린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휴가는 거짓말이고 협박당해 이곳에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기태연은 무사하며, 바깥과 연락은 되는지 등을 말이다.

‘왜 대답이 없지.’

여러 가지를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전무했다. 한차수는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놓은 채 답을 기다리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붉은 눈동자가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건 궁금하지 않은 겁니까?”

“예?”

“한차수 씨 본인에 대한 것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육성보다 그 내용에 한차수는 놀랐다.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 첫 번째로 물어봤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방금 여쭤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답은 여기에 해 주십시오.

한차수는 그를 향해 제 손을 내밀었다. 창백한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정이흔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협박당했는지는 궁금하지만, 손에 난 멍 자국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군요.”

“…?”

“왜 자꾸 열이 오르내리고 경련이 그치지 않는지. 팔다리 어느 한 군데 빠짐없이 난 멍 자국은 도대체 뭐고, 베갯잇에 묻은 핏자국은 누구 건지… 한차수 씨가 물어봐야 할 건 그런 것 아닙니까.”

기태연이나 내가 무사한지 아닌지가 아니라.

나지막이 이어진 정이흔의 말에 한차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다른 건 걱정하면서 정작 본인은 챙기지 않는 건지….”

안타까움이 배어든 읊조림에 한차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리어 자신도 모르게 팔뚝을 세게 문지르다 정이흔에게 저지당했다.

“핏줄이 안쪽에서 터졌습니다. 안정제 부작용이라고 하더군요. 만지지 마세요.”

“아.”

그래서 팔다리가 멍투성이였던 거군. 한차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침음했다.

그러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도 부작용 때문인가. 작은 한숨이 입술을 타 넘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문지르자 정이흔이 득달같이 물어왔다.

“가슴도 아픕니까?”

“아, 아닙니다.”

한차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삼켰다.

정이흔은 정말 좋은 남자였다. 아무리 은인이라지만 한낱 길드원에 불과한 자신을 몹시 신경 써 주니까.

하지만 배려가 무색하게도 그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자신은 A급 암살자이며 재생 스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잘한 상처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쩔 수 없군.’

한숨을 삼킨 한차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몸이 무거운 건 그냥 오래 자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팔이 저린 것도 쥐가 난 거라고 넘겼고… 멍과 핏자국은 전혀 몰랐습니다. 길드장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눈치채지도 못했어요.”

“하나도 몰랐다고요.”

“정말로 몰랐습니다. 사실 아까 전부터 눈앞이 흐리기도 해서….”

대충 주워섬긴 말에 정이흔이 갑자기 돌진했다.

“잠깐. 고개 좀 들어 보십시오, 한차수 씨. 다른 데 보지 말고요.”

얘가 왜 이러지. 한차수는 제 얼굴을 감싸 쥔 큼지막한 손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냥 좀 흐릿한 것뿐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으레 그런 정도요. 그렇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한차수는 열심히 정이흔을 밀어내려 노력했다. 별 성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은. 아니, 아닙니다. 그럴 시간이 없었죠.”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울리고, 한차수는 숨이 막혔다.

빌어먹을 주인공 같으니. 부작용을 더 심화시킬 생각인가.

가까이서 본 정이흔은 심장에 해롭기 짝이 없었다.

“심한 건 아닙니다. 정말로요.”

한숨 소리가 들리고 한차수는 곧 뺨을 감싸던 온기가 사라진 걸 느꼈다.

“누워 있는 게 좋겠습니다. 부작용 중의 하나일 테지만 혹시 모르니 서정민 씨를 데려… 아니, 사람을 시켜 민목하 씨를 부르죠.”

정이흔이 다짐하듯 말했다.

“곁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거나 어딘가 아프면 바로 말하십시오. 억지로 버틸 필요 없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요. 평소처럼 거절하는 걸 보면 괜찮아 보이긴 합니다.”

“그럼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내가 한차수 씨를 혼자 두고 싶지 않으니까요.”

쿵쿵. 혈관을 세차게 내달린 피가 고막을 때렸다.

빌어먹을 부작용. 한차수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손끝이 저릿저릿하다 못해 작은 불꽃놀이가 몸 안쪽에서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민목하 씨가 올 때까지 잠깐 자는 건 어떻습니까?”

정이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별로 졸리지는….”

“한차수 씨 아까부터 계속 하품했습니다.”

…내가?

그러고 보니 눈이 좀 무거운 것 같긴 했다. 눈꺼풀 안쪽이 모래를 뿌린 것처럼 까끌거리기도 했고.

“졸리지 않으면 눈이라도 감고 계세요. 5분이 지날 때마다 아까 하신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씩 드리겠습니다.”

이건 거절할 필요가 없지.

한차수는 바로 냉큼 눈을 감았다.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리는 건 덤이었다.

정이흔이 긴 한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차수는 고집스레 눈을 감았다.

벽시계의 시침 소리가 적막 위에 내려앉았다. 정확히 5분이 지나고, 질문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구슬을 깨트린 덕에 자신을 쫓아올 수 있었고, 채라하와의 대화를 통해 서로 간의 오해를 풀고 싸움을 멈췄다고. 휴가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고 협박은 없었으며 기태연도 무사하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실 기태연 실장은 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곤란할 정도입니다만…. 한차수 씨?”

대답 대신 고른 숨소리만 이어졌다. 정이흔은 잠에 빠진 한차수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두근, 두근.

정이흔의 입에서 야트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감았다 뜬 붉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잘못된 건 없어.’

한차수는 살아 있었다. 자신은 그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채라하가 말한, 한차수를 노리는 어리석은 무리도 곧 잡아낼 예정이었다.

그러니 다 괜찮아질 게 분명했다. 한차수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사할 것이다.

기분 좋은 울림을 느끼며 정이흔은 눈을 감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민목하가 문을 열자마자 소리 지르기 전까지, 그는 한차수와의 시간을 탐욕스레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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