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정연이의 동아리는? (3)
* * *
확실히 재밌는 게임이긴 해도 다른 동아리에서도 공연이나 체험활동이 많은데 게임 가능한 컴퓨터 하나 뒀다고 이렇게 인기가 많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시점,
이 부스 진행팀으로 보이는 선배 하나가 내게 말을 건다.
"오, 후배님도 도전하시려고요? 1000원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시죠!"
"예?"
"아직 룰을 안보셨나 보네요, 자 여기."
작은 안내카드를 하나 건네주는 그.
[ E스포츠 동아리 고인물을 이겨라! ]
참가비 : 1000원
종목 : TEKEN 7
룰 : 5판 3선으로 동아리의 고인물 OB를 이길경우 그 시점까지 쌓인 전체 참가비의 2배를 드립니다! 특채로 면접 없이 동반 1인까지 우선합격 기회도 부여!
'아... 인기있을만 하네...'
격투게임은 본질적으로 뉴비가 아무리 운이 좋아도 5판 3선으로 숙련된 고인물을 이기기 매우 어려운 게임 장르다.
프레임 단위로 반응해야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수십개의 캐릭터 기술들을 어느정도는 다 알고 있어야 대처가능하기때문에 뇌지컬과 함꼐 복잡한 커맨드를 실수없이 입력해서 콤보로 연계해야하는 피지컬까지.
"우리 후배님 에타에서 본 것 같은데. 혹시 참가하시겠어요?"
"아뇨, 격겜은 잘 못해서... "
사양하고 돌아가려는데 언제 왔는지 아름이가 내 손에 있던 안내카드를 가져가 읽고있었다.
"이거 재밌겠네요."
"응? 아.. 난 못하는데...?"
"언니도 하실 생각이셨어요? 제가 하겠다는 말이었는데요."
"어... 어..."
조금 당황스러운 전개였지만 참가비 1000원이 큰 돈도 아니고 아름이는 이런 대학생스러운, 새내기스러운 활동을 많이 해보고 싶어했으니 재미로 해봄직 한것 같아 나도 구경하기로 한다.
"오 이쪽 후배님이 하시는건가요? 학생증 한번 보여주시고, 학번, 이름, 연락처 적어주세요~"
신청서를 작성하는 아름이는 오늘 본 모습 중에 가장 신나보였다.
"지금 앉아있는 학생 끝나면 바로 하시면 돼요. 이번 버전 기준이고 캐릭터도 다 있으니까 걱정마시고."
"네."
...
어느새 아름이 차례가 되어 자리에 앉아 게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대편 동아리 대표는 15학번이라는데... 6년이나 차이나는 매치라니.
"형 지지마요! 오늘 부스 끝나가는데 괜히 방심하지 말고."
"에이, 걱정마. 딱 기다려라 오늘 회식하고 좀 더 보태서 동방 컴퓨터 바꾸는 날이니까."
"자, 아름 후배님 참가비 1000원 되시겠습니다. 현금으로 주셔도 되고 여기로 송금도 괜찮아요."
아름이는 지갑을 꺼내 1000원짜리 한장을 참가비 통에 넣는다.
평소에 늘 카드만 쓰고 쇼핑을 하면 고가품만 살텐데 의외다.
"아름아 1000원짜리는 왜 가지고 다니는거야?"
"... 편의점에서 1050원 긁으면 실장님이 컵라면인거 알아서요... 캠퍼스에서 필요할거 같아서 이거랑 100원짜리 몇개..."
"아..."
그녀다운 이유.
아무튼 그렇게 게임이 시작하기 직전 서로 캐릭터를 고르고 있었지만 아까 다른 학생이 도전할 때와 달리 반응이 영 미지근한 학생무리들이다.
이번판은 볼 필요도 없겠네.
그냥 재미로 해보는 거겠지.
혹시 이길수도 있잖아 내기하쉴?
대부분 아름이의 패배가 뻔해서 그런것일테지, 나도 응원은 하지만 승리보다는 이걸 아름이가 즐기는데에 의미가 있지않나 생각하고 있으니까.
단순히 게임 동아리가 아니라 E스포츠 동아리라 그런지 경기가 들어갈때는 선수들은 이어폰과 방음 헤드폰을 낀 채로 동아리 부원의 해설을 통해 옆에 있는 큰 모니터로 확인하는 식이었다.
"자 어느덧 오늘 이벤트 매치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새내기 새터 기념 이벤트 매치 '고인물을 이겨라!' 나름 잘하는 선수들이 많이 나왔음에도 아직 5판 3선으로 동아리 대표인 박천건 선수를 꺾은 새내기는 없었거든요?"
"과연 이번에 참가한 한아름 학생이 최초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지 지켜보겠습니다."
"박천건 선수, 첫 게임부터 랜덤을 누르네요, 이건 완전히 실력차이를 보여주겠다 그런거죠?"
"네~ 그에 반해 한아름 선수는 상대적으로 숙련자용으로 평가되는 카O야를 골랐네요, 이거 흥미로운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
와...
지금 뭘본거지, 이거 실화냐?
"한아름 선수 초풍을 4번 연속 꽂으면서~ 1세트 가져갑니다!"
"상당히 일방적인 경기였죠."
"네, 랜덤 캐릭터를 고른 것을 감안해도 초반에 작은 기술들 외에는 모두 딜레이 캐치와 흘리기에 성공하면서 한아름 선수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거, 방심할 수 없겠는데요."
...
"와... 아름이 미쳤네..."
경기는 아름이의 일방적인 3대0 승리였다.
두번째 게임부터는 선배쪽도 원래 쓰던 캐릭터를 고른 모양이지만, 이 게임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격의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경기로 끝나버렸다.
"언니 보고 계셨어요?"
"어... 응... 와... 너 엄청 잘하는구나..."
"고등학생때 쪼금..."
지켜보고 있던 다른 새내기들, 선배들도 놀라서 경기가 끝났음에도 중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이랑 둘이 대화하는 중 처음 접수를 받던 선배와 경기에 참가했던 선배 사이에 고성이 오간다.
"아니 형, 형이 무조건 이길 수 있다며, 존나 잘한다며. 이게 뭐야 지금 우리 좆됐어."
"아니~ 내가 진건 진건데, 내가 열심히 안한 것도 아니고. 야 나 그래도 랭크로 상위 10프로 이내야, ㅆㅂ 실전에서 초풍을 4번씩 꽂는 사람이 새내기 중에 있을 줄 알았겠냐고."
"그건 그거고. 우리 그냥 평소처럼 고전게임 오락실 차리려고 한걸 형이 동비 모자란거 벌어오겠다고 기획서 쓰고 회의 열어가지고 진행시킨거잖아."
"그래 그거 참 말 잘했다. 회장이라는 놈이 동비 예산 집행 잘못해서 E 스포츠 동아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컴퓨터 하나 못사는게 말이나 되냐? 오죽 답답했으면 내가 이 짬밥 먹고 15학번이 고인물 타이틀 달아가면서 이지랄을 했겠냐?"
"그얘기가 지금 왜나와. 지금 총 참가비가 거의 30만원인데, 2배 지급 메꾸려면 쌩돈 30만원 더 나가야해."
"그래도 어쩌겠냐, 내 잘못이 크긴 한데, 동아리 임원들이랑 팀장들 다 동의 해서 이번에 진행한 거 잖아. 일단 룰이니까 지급은 하고 나중에 중계 외주나 추가 지원금 타서 해결해보자."
"아오... 미치겠네. 알았어..."
...
뭔가 저 동아리 나름대로 엄청 중요하고 야심찬 프로젝트 였던 것 같은데 성공 직전에 아름이가 망쳐버린 것 같아서 나까지 무안해졌다.
"아름아... 뭔가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데..."
"그쵸...?"
"응... 사실 우리가 신경 쓸 건 아니지만..."
"흐음..."
아름이는 잠시 고민하면서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언니도 게임 좋아하신다 그러셨죠?"
"응. 잘하지는 않지만."
"게임 중계하는거 어땠어요? 괜찮아보여요?"
"어.. 되게 잘하는 것 같던데...?"
"그럼 이 동아리로 할래요?"
"으응...?"
내가 애매하게 대답하니 아름이는 내 몸을 틀어 마주보게 한 뒤 다시 물었다.
"사람들도 별로 나쁘지 않아 보이고, 선배랑 저 둘다 좋아하는 분야에 아까 안내카드 보니까 대회 진행이나 중계도 맡고 있다던데 이런건 동아리 활동 아니면 둘이서는 못해볼 일이잖아요."
"그렇지...?"
"그럼 됐네요. 여기로 하죠."
"응."
답답한지 가슴을 치며 머리를 긁적이는 회장(?)에게 아름이와 함께 다가간다.
"아... 후배님, 그 죄송합니다. 솔직히 저희쪽 대표가 질거라고 생각을 안해서... 금액은 당연히 지급해드릴건데 이게 현금 지급은 절차가 조금 있어서..."
"돈은 안주셔도 돼요."
"예? 아니요, 저희가 룰로 약속을 하고 이벤트를 진행한건데 안받으면 저희가 더 욕먹습니다."
"돈보다도 이거 이기면 동반 1인까지 동아리 입부 프리패스 해주시기로 한거 맞죠?"
"예 맞습니다."
"그럼 저랑 여기 언니랑 두명 가입하고 지급해야되는 금액은 저희가 동비로 낸 셈 치죠 뭐."
"어..."
"왜요 안되나요?"
"아뇨, 안될건 없는데..."
"된거네요 그러면. 나중에 학기 시작하고 리쿠르팅 할 때 쯤 연락 주세요. 신청서에 제 연락처 있었을테니까. 저희는 갈게요."
"네..."
회장은 상황 이해가 덜 됐는지 멍한 표정으로 우리가 부스를 빠져나오는 걸 보고만 있었다.
대학 새내기한테 60만원이면 꽤 큰돈인데 그걸 너무 쉽게 포기하니 놀랄만도 하다.
"우리 너무 즉흥적으로 정한거 아니야?"
"그렇네요. 그래도 가끔 즉흥적으로 정한게 꽤 결과가 좋더라고요."
아름이가 즉흥적으로 정한게 있나?
엄청 계산적이고 꼼꼼한 스타일인데.
"계획 없이 결정했던 게 있어? 우리 부산 갔던 그런거?"
"그건 별로 큰 결정은 아니었잖아요. 음... K 공대 캠프에 가기로 했던 거랑, 캠프 마지막날에 선배를 제껄로 만들겠다는 그런 거? 되게 감정적으로 정했던건데 지금 잘됐잖아요 헤헤..."
"그렇네..."
아름이랑 손을 잡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간다.
기숙사까지 돌아가는 길에 해가 지며 붉게 물들이는 캠퍼스의 모습이 썩 보기 괜찮은 날이었다.
아름이가 즐거워하는데 사실 무슨 동아리를 가입하던 뭐가 문제겠는가.
게다가 나를 생각해서 서로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는 영역을 골라주었고.
옛날부터 게임 방송이나 중계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으니 잘됐다고 생각한다.
"아름아."
"네 언니."
"고마워."
"갑자기요?"
"아니 뭐. 갑자기 고마울 수도 있지."
"그런가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