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0부 2일차 (4) 널 너무나 사랑해서, 난 납치를 했어.
* * *
막막하다. 뭐라고 해야할까...
시간을 좀 더 끌면 안될 것 같아 일단 무난하게 답해보는 나.
"아... 아름이 너가 왜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좋은데 아껴..."
꾸욱
"아아!! 아야야..."
내 볼에 얹어 놓았던 손으로 갑자기 입술을 꼬집는 아름이 때문에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선배, 멍청한 척 그만하세요."
오답. 그것도 많이 감점될만한 오답인가보다.
"저를 사랑하니까 아껴준다느니, 오히려 좋아서 그런쪽으로 나가기 망설여진다 같은 대답을 쥐어짜내신 거 같은데,
지금 그런 얘기가 아닌거 선배 본인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네?"
어지럽다. 그냥 어제처럼 자기 할 말만 하거나 오전처럼 빠따로 쳤으면 좋겠다.
" 지금 선배 상황이 '좋아하는 여자랑 진도 나가기가 힘들어 걱정입니다.' 가 아니에요.
선배가 다른 일 할때처럼 돈 드릴테니까 제가 그냥 원하는 대로만 맞춰달라는데 그것조차 그렇게 고민해야될 일이냐고 묻는거라고요."
'진짜 솔직하게 말해도 되려나?
가식적인거 싫어한다고 그랬으니까 괜찮을지도?
막말로 오늘 그 지랄을 하고 누워있는 침대인데 대답 좀 맘에 안든다고 다시 한바퀴 돌리겠어.
나중에 칼 안맞으려면 지금 한번 털어내고 싸게 혼나는게 나을거 같은데...?
오히려 바로 복종하는 것 보다 솔직한 걸 보고 좀 틈을 보일 수도 있고...'
조금 전까지 침대에서 웃던거 보면 그래도 지금 아름이가 다른 때보다는 기분 좋은 상태인 것 같아 조금, 아주 조금만 용기를 내본다.
"아름아. 그 사실은 말이야...
너처럼 예쁘고 나보다 잘난 여자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준 적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운 것도 있고...
사실 엊그제 혼자 학교 들어가다 정신을 잃어서 여기에 갇혀있는데,
그 안대? 같은걸 벗기니까 서있는 너를 본게 우리가 2년 만에 만난거잖아...?"
끄덕끄덕
아름이가 고개를 까딱까딱 하며 다음 말을 기다려준다.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돌리기 위한 뻔한 말도 아니라고 생각해주었나 보다.
"어제 얘기를 했지만 아름이 너에 대해 엄청 많이 알지는 못했고...
오늘은 솔직히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힘들었거든?
살면서 그렇게 맞아본 것도 처음이고, 머리에 비닐 씌여져서 정신 잃어, 물고문 당한 다음에 전기? 그거 애초에 전기고문은 맞나? 그 상상하기도 싫은 경험에 방금도 너랑 이거 하고 왔잖아..."
몸에 힘이 잘 안들어가 옆을 보고 누워있는 상태로
힘겹게 손을 가슴까지 올려 아름이에게 보여준다.
아까 내게 사과할 때처럼 미안한 표정을 짓는 아름이.
'다행이다... 씨발 존나 다행이다...
저한테는 좋았는데 선배는 싫었어요? 하고 또 뒤지게 맞을 수도 있다고 각오하고 질러봤는데
되게 잘 듣고 있는데? 진짜 지금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근데 그럴거면 진작에 좀 덜 수직적인 상태로 만났어야 하는거 아닌가?
아씨 모르겠네 미친년..
일단 이대로 간다.
솔직함 50%에 한아름 저 씨발년 죽이고 싶다는 부분은 빼고 다시...'
"근데 그런거나 묶여있는거 때문에 너가 싫어지고 가까이 가기 힘든게 아니라,
너무 무서워서 그래...
나보다 훨씬 엄청난, 어제 너 말대로 호랑이랑 강아지보다도 차이가 더 나는 우리 둘인데,
아름이 너가 조금만 마음에 안들면 나를 죽이는 거 아닐까 싶어서..
지금은 계속 사랑한다고 말해주지만,
잠깐 갖고 노는 장난감처럼 내가 잘못된 답을 하면 나한테 질려서 버리는 거 아닌가 싶어서..
나도 마음같아서는 나같은 아싸였던 애를 이렇게 과분한 여자가 좋아해준다는데...
솔직히 마음이 전혀 없는건 아니지만,
그만큼 나는 너가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
"흡... 훌쩍.."
미안한 표정으로 있던 아름이가 갑자기 훌쩍거린다.
당황스럽다.
앞부분에 살짝 찔러봤을 때 괜찮을 것 같아서 이어간건데 울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좆될 것 같아서 매우 쫄리는 상태이지만, 지금 진실된 이정훈씨를 연기하고 있기에 거의 안움직이는 손을 최대한 움직여 눈물을 살짝 쓸어준다.
"왜 울어 아름아...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어? 미안해, 진짜 미안해..."
"흡.. 아니.. 흑..! 에요.."
울음을 그치지 못한 상태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아름이. 잠시 얼굴을 베개에 묻는다.
조금 뒤 진정이 되었는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후... 선배 사랑해요... 너무 고마워요...♥"
알 수 없는 말로 시작하는 그녀.
"사실 선배를 잡아와서 여기에 둔다고 선배가 저를 갑자기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 안했어요...
마법처럼 갑자기 선배가 제게 빠지도록 할 방법도 없고 고문때문에 벌벌떨면서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선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진짜 제게 의지하는 선배가 갖고싶어서...
그건 다른 방법으로 하고 있지만......
어쨋든 그래서 이 며칠동안 선배한테 이것저것해도 선배가 저한테 품을 감정이 공포, 증오, 원망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도 선배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선배가 저를 미워해도 그 감정이 오롯이 저를 향했다는 사실이 좋아서 그대로 한거에요..."
꼬옥
아름이가 갑자기 나를 끌어안는다.
아까처럼 한쪽 팔로 나를 살짝 안고있는 것이 아닌, 최대한 가까이 붙으려는 듯 두팔에 꾹 힘을 준 채 나를 잡고 있다.
킁 킁
나를 꼭 안은 그녀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다시 떨어져 이전처럼 멀어졌다.
"후... 고마워요. 선배 냄새 맡으니까 확실히 진정이 되네요...♥
말했듯이 선배가 계속 으르렁거리거나 완전히 쫄아있거나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또 미안해요...
다른 형태로 만났다면 조금 더 천천히 진짜 사랑이란걸 해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선배랑 이런 고통과 부정적인 감정 없이도 둘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확실하게 하고싶어서, 잠깐의 사랑이 아니라 진짜 저밖에 모르는 선배로 만들고 싶어서 나쁜 계획을 세웠고
방금 선배의 말을 듣고도 선배를 못믿는,
선배의 말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약간의 솔직함에 연기가 섞인 것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제가 너무 나빠서...
남들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가 너무 안타까워서 그만 울어버렸어요...
그래도 나중에라도 꼭 용서해주세요.
선배 하나만 있으면 다 필요없을만큼 선배를 원해서 이러니까...♥"
어제오늘보다 매우 얌전한 톤으로 이야기하는 아름이지만 여전히 모르겠는 말 투성이다.
무엇보다 방금 내 혼신의 멘트가 연기가 섞인 것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나한테 고맙고 미안하다니.
왜 그렇게까지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일까...
"아름아.."
"네 선배..."
"그... 아까 그래서 마지막에 물어보려던 건데...
왜 나를 사랑해주는거야?
어제 내가 캠프에서 너한테 주제도 모르고 했던 말들 때문에 재밌었다? 귀여웠다? 해준 건 이해했는데...
학교 다닐 때도 너가 누군지 모르니까 처음에는 그런 애들이 있었다며?
내가 잘은 모르지만 너가 잘 안알려져있으면 가끔 밖에 다닐때도 그런 경우가 있지 않았어?
그, 왜 나를 좋아해주는지 물어봐도 될까...?"
던져버렸다.
아름이가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줄곧 궁금했던 것.
저정도로 좋아해주는 대상이 왜 나인가.
젠장 왜 하필 재수없게도 나인가 하는 것.
...
"음~ 모르겠어요...!"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아름이가 모르겠다고 답한다.
'아니 씨부럴년아 그걸 왜 모르는데~~~!!!!'
"음... 흐음... 진짜 생각해봐도 모르겠네요.
이유를 대려면 붙일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근데 반대로 확실히 이거다 싶은 건 또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원래 사랑이란게 어려운거긴 하니까요 헤헤...♥"
오우 또 정신이 아찔해진다.
저를 너무 사랑한 탓에 찌르고 지지고 때리고 묶으셨는데 왜 사랑하는지는 자기도 잘 모른답니다.
'하하하하하하 역시 이 세상은 미친 버그겜이 맞다 하하하'
아름이가 정신을 놔버리려는 내 얼굴을 잡으며 마저 얘기해준다.
"선배말대로 이전에 비슷했던 케이스도 있는데 걔들은 동갑이라 그랬을 수도 있고...
예전부터 언니가 갖고 싶었는데 그거때문에 연상이 끌리는 걸수도 있고요...♥
어제 말한 대로 그 몇 케이스 중에서도 선배가 극단적인 케이스기도 했단 말이죠...?
생긴 것도 완전 조각미남이나 아이돌 스타일은 아니어도 제 취향이긴 하고요...
처음 만났을 때 머리가 찡하고 가슴이 콩닥콩닥 했거든요?!
그상태로 2년이나 지나서 다시 보니까 그 이유를 진짜 더더욱 모르겠어요...
선배 목소리, 말투, 겁에 질린 표정, 비명, 멘탈나간 선배, 저한테 화난 선배, 첫키스할 때 서툰 혀, 냄새, 손, 젖은 몸, 서툴게 사랑하는 척 해주는 연기까지 전부 너무너무 좋아서...
진짜진짜 사랑해요..."
나를 분석하듯 끈적한 눈빛으로 훑어보다가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아... 선배...
저 지금 젖은 것 같아요...♥"
'??????'
"정말로 선배랑 사랑을 나누고 싶지만 곧 교수님도 오시고...
또 우리 처음은 선배가 진짜 마음 속에 저밖에 없을 때를 위해서 꾹 참고 있을게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내일까지 푹 쉬셔요."
토닥토닥
쪽.
등을 토닥이다가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일어나는 아름이.
내가 얼타서 대꾸를 못한 것도 있지만 여전히 마이페이스다.
옷 매무새를 고친 아름이가 나가려 하자 마침 흰색 가운의 실루엣이 흰 방 끝에서 카트를 밀고 이쪽으로 오는 듯 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