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12화 (312/394)

312화

“좋아요. 저도 잡혀 있는 분들이 걱정되던 참이었어요.”

내 예상대로 민아린은 합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괜찮을까요? 도시 안에는 마녀 수하들이 가득할 텐데.”

“그건 괜찮습니다.”

나는 민아린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환하게 웃으며 천사연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 자식… 아니, 이분이 보기와 달리 엄청나게 강합니다. 저희가 잘 지켜 드리겠습니다.”

“앗, 그래요?”

민아린이 굉장히 의외라는 듯이 천사연을 바라봤다.

천사연이 겉으로 보기에는 강한 느낌이 덜하긴 하지. 심지어 지금은 머리카락까지 길어서 싸움보다는 글을 읽고 쓰는 문학인이 더 어울렸다. 아니면 모델이라든가.

딱히 기분 나쁘지 않은 기색으로 입꼬리 끝을 살짝 올린 천사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누가 와도 이길 자신은 있다만 도시에 대놓고 들어가는 건 안 되겠군. 붙잡혀 있는 인질이 있는 데다 민간인도 많을 테니.”

“나도 같은 생각이야.”

아벨 측이 언제 어느 때에 정신 지배에 걸린 인질들을 내세워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평범한 도시 민간인으로 지내고 있을 관람객도 신경 쓰였다.

“혹시 몰래 잠입할 만한 방법 없을까요? 사람 발길이 잘 안 닿는 구역이라든가 그런 거요.”

“한 곳 정도 떠오르긴 하네요. 설마 바로 가시려고요?”

“네. 이왕이면 날 저물기 전에 도시 안으로 들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확한 시간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마 지금은 낮 3시 정도 됐을 거다. 7시쯤에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면 남은 시간은 많아 봤자 4시간밖에 없었다.

도시에 도착하기까지 두 시간 남짓 걸리니까 당장 출발해도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내 능력으로 날아가면 조금 더 일찍 도착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하태헌은 어디 있는 거지?’

민아린이 말한 선택받은 자 중에 하태헌은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나와 천사연처럼 정신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데다 하태헌의 성격상 순순히 잡혀 주지도 않을 거다.

만약 도시에서 다른 팀원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다음은 하태헌이 문제였다. 얼마나 넓은지 확인되지 않은 공간에서 하태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쪽은 어떻게 할 겁니까?”

“흠.”

한걸음 뒤에서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박건호가 내 질문에 입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렇다면 합류하도록 하지. 나도 어차피 도시를 지나가야 하니까.”

“목적지가 따로 있으신가 봅니다.”

“맞아.”

목적지가 따로 있다고? 그러고 보니 아까 설명에서 도시에서 도망치는 민아린을 구해 줬다고 했던가. 그럼 박건호은 동화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닌 건가?

가장 염려했던 박건호가 선뜻 같이 가겠다고 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버려 둬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네.

‘공간이 여태껏 보여 준 동화들… 대체 의미가 뭐지?’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되짚어 봐도 근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공간이었다.

아벨이 우리가 서로를 죽이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건 적나라하게 느껴졌지만, 닥터가 만들어 낸 공간처럼 이 모든 게 계획적으로 진행됐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막말로 정말 우리가 서로를 죽이는 걸 노렸으면 정신 지배를 걸어 둔 상태로 아무 공간 안에 집어넣으면 끝이었다. 이 정도로 복잡한 공간을 만들어 낸 진짜 목적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벨을 만나게 되면 의문이 풀릴까.

‘천사연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어.’

일단 지금은 도시부터 가야 한다. 뭐가 됐든 도시에 들어가야 상황을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을 거니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바로 출발합시다.”

***

예전처럼 서로 손을 잡고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 우리는 곧장 도시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동쪽으로 계속 나아가자 돌벽이 둘러진 도시가 나타났다. 그 근처 숲으로 내려온 다음에 덩굴이 무성하게 자라난 돌벽을 만져 봤다.

“이런 벽이면 어딘가에 사람 한 명 정도 지나갈 틈이 있을 것 같네요.”

“눈치가 빠르시군요.”

민아린이 무릎을 굽혀 바닥을 살폈다. 빽빽하게 자라난 덩굴을 치워 내자 사람 한 명 정도는 거뜬히 지나갈 만한 구멍이 드러났다.

“오, 개구멍.”

내 옆에서 그 구멍을 본 박건호가 휘파람을 불며 한마디 했다. 정말로 개구멍 그 자체였다.

“이 너머는 구석진 골목길이라 들어가도 사람한테 발각되진 않을 거예요.”

“좋네요.”

민아린을 도와서 커튼처럼 쳐져 있는 덩굴을 치워 내고 팀원에게 말했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천천히 뒤따라오세요.”

바람 능력이 있는 내가 들어가야 무슨 일이 생겨도 도망치기가 수월했다. 허리를 숙여서 구멍 안으로 들어가자 흙냄새와 함께 모래가 후드득 떨어졌다.

재빨리 구멍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몸에 묻은 흙을 털며 주변을 둘러봤다. 상점으로 보이는 건물 뒤편 골목이라 그런지 민아린의 말처럼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괜찮은데? 벽 바깥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팀원들에게 들어오라고 알려 주려고 등을 막 돌린 그때였다.

“멈춰.”

“……!”

낮은 목소리와 함께 서늘한 것이 목덜미에 닿아 왔다. 시선을 내리니 은색으로 빛나는 매끈한 검날이 보였다.

“그대로 양손을 들고 이쪽을 향해 돌아서라.”

“…….”

내게 검을 들이민 사람 말고도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처음부터 여기에 누군가 올 거라고 예상하고 대기하고 있었던 건가?

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켜 냈다.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기에는 상대방 목소리가 너무 익숙했다. 이거 큰일 난 것 같은데.

상대가 원하는 대로 양손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몸을 돌리자 회색 로브를 걸친 남자가 나와 눈을 맞춰 왔다. 로브 모자 아래로 드러난 붉은 머리카락과 고동색 눈동자를 보자 난감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김우진이 설마 여기에 있을 줄이야. 심지어 상황도 영 좋지 않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김우진이 오만한 태도로 내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커서 기분이 묘해졌다.

걸치고 있는 로브 사이로 갑옷 일부분이 드러났다. 내게 들이민 검의 생김새나 저 말투가… 아무래도 저번에 노예였던 김우진은 이번에 귀족이 됐나 보다.

“글쎄요. 저는 그저 평범한 행인입니다.”

최대한 무해해 보이도록 웃으며 변명하자 김우진의 눈동자에 깃든 경계심이 더욱더 짙어졌다.

왜 다들 내가 웃으면서 말하면 더 의심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 그래도 제법 착하게 웃는 편인 거 같은데.

“지나가는 개도 안 믿을 소리를 하는데.”

김우진이 미간을 찌푸리자 다른 남자가 열정적으로 외쳤다.

“너무나도 수상한 자입니다! 당장 잡아가서 심문해야 합니다, 셰드 님.”

셰드 님이라니. 김우진도 이름이 새로 생겼나. 그보다 날 잡아가라고 성토하는 저 남자, 생긴 게 좀 낯익었다. 신데렐라 동화에서 날 호위하던 기사단장이잖아?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김우진이 명령했다.

“가진 무기는 없어 보이지만 이놈도 선택받은 자 중 하나다. 조심해서 포박하도록.”

“예!”

“벽 너머에 있는 놈들도 내 목소리가 거기까지 들릴 테니 상황은 어느 정도 파악했겠지? 지금 모습을 드러내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역시 팀원들이 있는 것도 눈치챘네. 벽 너머에 있는 기운을 느낀 거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수상한 사람이 혼자 개구멍으로 들어오진 않을 테니 동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예전에 기사단장이었던 남자에게 붙잡혀 포박을 당하는 동안 천사연을 선두로 박건호와 우서혁, 민아린이 벽을 넘어왔다. 하지만 넷 다 나처럼 묶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김우진은 민아린을 발견하고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마리아?”

“으음, 안녕하세요. 셰드 님.”

“당신은 분명 도시 밖으로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여긴 어떻게 온 거지?”

“도우러 왔어요. 이분들과 함께요.”

“이 수상한 자들과 함께… 돌아왔다는 뜻인가?”

“네. 이분들은 마녀의 수하가 아니에요. 한 분은 저를 살려 주신 분이고… 다른 세 분도 마녀의 수하였으면 저를 진작 죽였을 겁니다. 절 믿으세요.”

민아린의 침착한 설명에 김우진이 별다른 반항 없이 잡힌 나를 힐끔 확인했다. 우리를 둘러보며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곧 몸을 돌리며 말했다.

“따라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잠시 천사연과 시선을 나눈 나는 우선 김우진을 쫓아가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이렇게나마 김우진을 만나게 돼서 운이 좋았다.

어두운 골목길을 통해서 도시 깊숙한 곳까지 우리를 끌고 간 김우진은 곧 낡은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병사로 보이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셰드 님은 이 도시를 관리하는 백작가의 유일한 자제분이세요.”

끌려가는 동안 민아린이 우리에게 소리 낮춰 알려 줬다. 백작가 자제? 정말 귀족이었잖아.

“마녀가 백작가를 점령하면서 다른 선택받은 자들과 함께 셰드 님도 감금됐다고 들었는데, 역시 소문이었나 보네요.”

“그렇군요.”

김우진이 등장하자 도시 지도를 보고 있던 병사들이 앞다퉈 보고를 해 왔다.

“셰드 님, 마녀의 수하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숫자가 갈수록 늘어납니다.”

“그건 나중에. 우선 이놈들한테 물어볼 게 있다.”

김우진이 사람들을 향해서 자연스럽게 명령하는 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에 찡한 감동이 밀려왔다. 김우진이 저렇게 어른스럽다니…….

천사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김우진을 향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박건호처럼 팀 하나 맡아도 잘하겠는데?’

정신 지배를 당한 상태라 해도 본인의 성격이 받쳐 주지 않았으면 저 정도 카리스마를 보이긴 어려웠을 거다.

A급에 실력도 있고 인성도 좋으니까 나중에 사람들을 잘 이끌 자질이 분명히 보였다.

“무슨 목적으로 도시에 들어온… 뭐야.”

“예?”

“왜 날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거지?”

김우진이 불쾌감을 담아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봤다. 아차. 급히 미소를 지우고 애써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저희는 동료를 찾으러 왔습니다. 이 도시의 마녀에게 잡혀 있다는 소식을 민… 마리아 님께 들어서요.”

“동료를 찾으러 왔다? 그 동료 이름이 뭐지?”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민아린과 박건호처럼 나머지 팀원들도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커서 현실 이름을 알려 줘 봤자 의미가 없었다.

“대답을 못 하는군. 역시 수상해.”

눈가를 좁힌 김우진이 나를 의심해 왔다. 그걸 본 나는 다시 한번 감동했다.

이토록 경계를 풀지 않다니… 굉장히 현명하잖아? 병사들이 김우진을 따르는 게 이해가 됐다. 아까처럼 흐뭇하게 웃자 김우진이 발끈하며 짜증스레 외쳤다.

“그러니까 왜 그딴 식으로 웃냐고!”

“아, 저도 모르게 그만.”

“…마리아를 제외한 이 네 명을 안쪽 방에 가둬라! 나중에 다시 심문할 거니까.”

“예!”

결국 우리는 병사들에게 양팔이 붙잡혀 건물 안쪽으로 질질 끌려갔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