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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91화 (291/394)

291화

“역시 그때 그 아이가 네가 맞았구나.”

엘로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하는 말에 머쓱하게 웃었다.

“엘과 엘라하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르셨습니까?”

“우리도 다 아는 건 아니니까.”

내게 돌려받은 천사연의 책을 매만지며 엘로힘이 설명을 계속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지켜보고 너를 만나면서 알아낸 사실은 네 개입 능력과 그 힘으로 언젠가 천사연을 도와주게 된다는 것뿐이었단다. 그 이상은 확신하기 힘들었지.”

“그런가요.”

“한이결이 아닌 ‘권세현’의 모습은 우리도 네가 공간에 들어간 후에 처음 알게 됐으니까.”

내가 신전에서 지내면서 꾼 꿈은 엘로힘과 엘라하도 봤다.

하지만 꿈은 내가 겪은 과거를 내 시선 그대로 보여 주는 게 다였으니, 연선우나 유시혁은 얼굴이 보여도 내 얼굴은 나오지 않았다. 공간에서 권세현이 직접 등장하기 전까지는 엘로힘과 엘라하도 내 실제 모습은 몰랐던 것이다.

내가 따로 부탁한 천사연의 책과 공간에서 등장한 ‘권세현’의 모습. 그 두 가지 정보를 토대로 천사연이 SS급 게이트에서 만난 이가 미래에서 온 나였다는 것을 깨달았겠지.

입가를 매만지며 개입 능력을 썼을 때를 떠올려 보던 나는 다음 질문을 꺼냈다.

“왜 책 속에서는 개입 능력을 쓴 이후에 한이결의 능력이 사용되지 않았던 거죠?”

“네 능력은 중복 사용이 안 돼서 그런 것 같구나.”

“천사연이나 하태헌 씨가 가진 오른손 능력과는 다른 겁니까?”

그 둘이 본 능력을 사용하면서 오른손에 있는 능력도 추가로 사용하는 모습을 몇 번이고 봤었다. 그들과 내 차이점이라 하면…….

“전 개입과 바람 능력 두 가지 기운이 모두 심장에 있어서요?”

“네 경우가 워낙 특별해서 정확히는 모르겠다만, 지금으로선 그 가능성이 가장 크지.”

들고 있는 책을 빛무리와 함께 어딘가로 보낸 엘로힘이 나를 돌아봤다.

“네 개입 능력은 천사연의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다시 책 너머로 돌아왔을 때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었단다.”

“제 힘에 눌려서 한이결의 기운이 나오질 못한 거군요. 바람 능력을 쓰려고 했을 때 무언가가 막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 닥터라는 자와 싸울 때는 정신 지배를 끊어 낼 때만 사용했으니 그 이후로는 바람 능력이 정상적으로 써진 거다.”

엘로힘이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듯 눈을 깜빡이고는 말을 이었다.

“예전에 D45 구역으로 천사연과 하태헌을 도와주러 갔던 일 기억하니? 폭탄 테러가 벌어졌던 신생 게이트 말이다.”

“기억합니다.”

“그 상황과 약간은 비슷할지도 모르겠구나. 다만 D45 구역에서 개입을 썼을 때는 네 기운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단다.”

D45 구역에서는 개입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바람 능력을 충분히 쓸 수 있었다. 그때와 지금이 달라진 건 내 본래 기운의 크기 정도인가.

“우리의 도움을 받아 겨우 전투에 끼어들었던 터라 천사연과 하태헌을 제외한 이들에겐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으니 이번 일과는 차이가 있지.”

“…닥터와의 전투 이후로 개입 능력을 쓰는 데에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관련이 있는 걸까요.”

“아마 그럴 거다.”

엘로힘이 음울한 표정을 하고서 내 손을 잡아 왔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감촉과 달리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엔 염려가 가득했다.

“세현아. 이전에도 말했듯이 네가 가진 개입 능력은 웬만하면 쓰지 않는 편이 좋겠다. 쓸수록 기운도 커지는 것 같구나.”

“엘…….”

“칼리 측에서 네 능력을 알아채고 탐내는 것 또한 문제지만, 네 기운이 이 이상으로 더 커지는 것도 걱정스럽다.”

엘로힘의 심정이 어떤지 너무나도 이해가 됐다.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엘로힘이 똑같이 말했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꼭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으니까.”

나와 천사연을 포함한 모두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조심하겠습니다.”

쓰게 웃으며 대답하자 그도 마주 웃어 줬다.

“그럼 이제 대가에 관해서 얘기를 나눠 보자.”

“네.”

천사연의 과거를 본 대가라. 대가가 무엇인지 정하기 전에 과거부터 보고 왔으니 엘로힘이 무엇을 조건으로 걸어도 무조건 받아들여야 했다.

긴장한 채로 다음 말을 기다리는 내 모습이 제법 웃겼는지 눈꼬리를 접은 엘로힘이 힘이 들어간 미간을 손가락으로 콕 짚어 줬다.

“대가는 바로 너다, 세현아.”

“예?”

“널 주면 좋겠구나.”

나를 달라고? 어떻게 달라는 거지?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가? 아니면 여기저기 써먹을 일꾼을 뜻하는 건가?

혼란에 빠진 나를 잠시간 구경하던 엘로힘이 다시 한번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장난이란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하지만 균형이 안 맞아서.”

“…설마 했는데 정말 농담이었습니까?”

“미안하다.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대가는 그보단 가볍단다. 그렇게 굳지 마렴.”

엘로힘이 손을 들어 올리자 빛무리가 차올랐다. 곧이어 그곳에 나타난 건 온통 새하얀 책이었다.

“이건 아직 아무 기록도 새겨지지 않은 책이다. 여기에 특정 인물의 기록이 채워지면 색이 변하지.”

그가 건넨 책을 받아 들어 조심스럽게 펼쳐 봤다. 드러난 속지는 텅 비어 있었다.

“세현아, 네가 우리에게 줄 대가는 그 책을 채울 과거의 기억이다.”

“제 과거의 기억… 말입니까?”

“그래. 네 최초의 기억부터 한이결의 몸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기록을 다오. 그것이 대가다.”

천사연의 책과 동일한 대가였다. 엘로힘이 말한 대로 부족하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드릴 수 있는 거죠?”

내 질문에 엘로힘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구체 하나를 허공에 만들어 냈다.

“이곳에 네 기억을 담아서 가져갈 거란다. 우리가 가져간다고 해서 네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 겁낼 필요 없다.”

“당장 할 수 있나요?”

“너만 괜찮다면. 금방 끝날 거란다.”

“알겠습니다.”

황금빛 구체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봄날의 햇볕처럼 따스한 기운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

대가를 넘겨주는 일은 엘로힘의 말대로 금방 끝이 났다.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천사연의 과거를 보는 일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문제가 우리를 찾아왔다.

“경매 초대장이라.”

피이익, 픽!

여우가 어깨 위로 올라와 볼에 몸을 비비적거렸다. 그걸 내버려 둔 채로 나는 우서혁이 넘겨준 초대장을 이리저리 돌려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새까만 편지 봉투 속에 들어 있는 초대장에는 일주일 뒤에 열리는 경매에 레퀴엠 마스터를 초대한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다른 초대장은 똑같은 내용에 받는 이만 로헌 부마스터로 되어 있었다.

“레퀴엠과 로헌, 이렇게 딱 두 장 온 겁니까?”

“그렇습니다.”

“대놓고 함정이군요.”

함정이 확실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비공식 경매라 어느 누가 초대됐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평범한 사람들이 프라우스 신도단의 함정에 함께 걸려들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초대장을 무시하면 경매에 참여하러 온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민아린이 불안한 표정으로 한숨 지었다.

“다음 주 주말이라니, 시간이 엄청 촉박하네요.”

“음…….”

이 초대장은 오늘로부터 나흘 전에 길드로 날아왔다. 보낸 이는 찾지 못했다.

내 곁에서 팔짱을 낀 채로 초대장을 노려보던 하태헌이 입을 열었다.

“본래라면 저런 수상한 초대장은 길드에 도착 즉시 폐기된다. 그렇지 않고 내 손까지 올라왔다는 건…….”

“전달 과정에서 누군가가 정신계 능력을 썼다는 거군요.”

레퀴엠도 별반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우서혁이 태블릿PC 화면에 무언가를 띄워 내게 건네줬다.

“초대장에 적힌 장소인 데우스 미술관입니다. 다양한 미술 작품과 세련된 인테리어로 호평을 받는 곳입니다. 개관한 지 3년 정도 됐습니다.”

“건물이 엄청나게 크네요.”

난해한 모양의 장식물이 설치된 정원과 5층이 훌쩍 넘어 보이는 높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말이 미술관이지, 직접 가 보니 내부가 호텔 못지않게 화려하더군. 지하도 있는 거로 아는데 아마 경매는 거기서 진행하겠지.”

박건호가 심드렁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태도와 달리 데우스 미술관에 대해서 꽤 자세히 알고 있었다.

“가 보셨어요?”

“한 2년 전쯤에.”

“이런 곳을 길드 일로 갔을 리는 없고… 데이트라도 하셨나 봅니다.”

“…….”

천사연 과거에서 여러 차례 언급됐던 여자 문제가 떠올라 혹시나 해서 묻자 박건호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고는 누가 봐도 어색한 미소를 만면에 가득 채우고는 급히 부정했다.

“아니? 아닌데?”

저 반응을 보아하니 제대로 짚은 것 같다. 우서혁과 김우진이 박건호를 꼴좋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무튼 지금은 박건호 데이트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박건호 팀장님이 내부를 좀 알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경매장에 들어갈 수 있는 초대장은 두 장밖에 없었지만, 건물 자체는 미술관 관람객으로 입장이 가능했다.

“경매장에 참석할 팀과 위층에서 대기할 팀, 이렇게 두 팀으로 나누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경매장은 마스터와 하태헌 부마스터만 참석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뇨, 여기 자세히 보니까 초대장을 받은 이는 파트너를 한 명 데려갈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다만 한 파티에 세 명을 넘기면 안 된다고 합니다.”

‘한 파티’라. 이 말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거지?

두 파티로 나누면 경매장에 네 명이 들어갈 수 있지만, 결국 행동하는 건 두 명씩이라서 오히려 위험할 수 있었다.

“초대된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 경매장이면 굉장히 폐쇄적일 겁니다. 룸이 나뉘어 있거나 신분을 숨기는 등 여러 조건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우서혁의 말에 동의했다. 경매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모르는 이상, 네 명이 가서 두 명으로 나뉘는 것보단 세 명이 함께 움직이는 편이 훨씬 안전했다.

‘그걸 노리고 세 명을 넘기면 안 된다는 조건을 세운 건가?’

프라우스 신도단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남은 일주일간 정보를 얻어 낼 방법을 고민하는데, 뒤에서 새하얀 손이 불쑥 나타났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에도 경매장 내부는 없군.”

천사연이 내가 들고 있는 태블릿PC 화면에 뜬 사진을 휙휙 넘겨 보며 말했다. 낮은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목덜미에 느껴지는 체온에 억지로 잊고 있던 어젯밤의 일이 머릿속에 불쑥 떠올랐다. 그러자 진정할 틈도 없이 얼굴에 뜨거운 열이 확 번졌다. 동시에 손이 크게 흔들리며 태블릿PC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덜그럭!

태블릿PC가 부딪치는 소음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천사연마저도 놀란 눈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내 얼굴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거실 분위기에 식은땀이 절로 났다.

“흐음.”

한 걸음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던 엘로힘이 턱을 매만지며 묘한 미소를 지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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