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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290화 (290/394)

290화

“엘라하?”

“이쪽을 너무 늦게 보는 거 아니야?”

엘로힘과 똑같은 외형의 엘라하가 언제나처럼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서 나를 타박했다.

“여긴 어떻게… 으앗!”

엘라하가 손을 휘젓자 내 몸을 띄우던 빛무리가 샥 사라졌다. 약 30cm 정도 공중에 떠 있던 나는 푹신한 소파 위로 떨어졌다.

반동으로 바닥에 떨어진 천사연의 책을 엘라하가 대신 주웠다.

“방금 그 빛은 뭡니까?”

“네 기력이 줄어드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막아 줄 내 힘.”

책을 옆 테이블에 올려 둔 엘라하가 팔짱을 꼈다. 사락, 부드러운 천이 쓸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네 영혼이 책을 보는 동안 육체 또한 영혼이 떠나간 타격을 견뎌 내야 하니 기력이 어마어마하게 소모돼. 그러니 내 힘으로 몸의 시간을 일시적으로 멈춰 둔 거다.”

몸의 시간이 멈춰 있었다니. 그래서 며칠 동안 책을 보고 일어난 건데도 찝찝하지 않은 건가?

“제가 책을 본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죠?”

“8일이 지났어. 정확히는 8일째 밤이지.”

나는 탁상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그럼 지금이 밤 9시인 거네.

“나흘보다 더 길어질 거라고 짐작은 했는데… 8일은 너무 기네요.”

“네가 책에 적힌 기록에 얼마나 몰입하느냐에 따라 보는 시간도 늘어나니 어쩔 수 없어.”

목덜미를 쓸어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흘이라고 설명했는데 정작 걸린 시간은 두 배라니… 다들 걱정했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곁에 앉아서 가만히 나를 보던 엘라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책을 보는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내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긴 했다만… 이렇게 마주하니 감회가 새롭긴 하네.”

“예?”

“성장했다고.”

갑자기?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자 엘라하가 말을 이었다.

“너를 기다리고 걱정해 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대견하다는 거야.”

“아.”

그제야 엘라하가 신전에서 지낼 때부터 내 무심한 성향을 신경 써 주던 일이 떠올랐다. 어린 왕자 책을 상기하며 머쓱하게 웃자 엘라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뒤는 엘한테 물어봐. 이 집 어딘가에 있으니까. 나는 다시 돌아가야 해.”

“벌써요?”

“원래 너 일어나면 가려고 했어.”

그가 순식간에 타원형의 통로를 만들어 냈다. 통로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나를 돌아본 엘라하가 작별 인사를 보냈다.

“마무리 잘해.”

“…….”

그 말을 끝으로 엘라하는 미련 없이 떠나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에 놓인 붉은 책을 바라봤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 노란 스탠드 조명 빛이 옅게 비추는 책의 겉표지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지금이 마지막이었어.’

끝을 보이는 세계처럼 천사연도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번 시간에도 실패한다면 세계뿐만 아니라…….

‘천사연.’

책에 기록된 과거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이걸 다 보고 나면 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계속 어긋나기만 했던 우리가 진심으로 서로를 마주 보게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직접 보게 된 천사연의 과거는 내 예상보다 훨씬 어둡고 처절했다. 지금까지 내게 보여 줬던 여유를 잃지 않던 모습은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만들어 낸 결과물일 뿐이었다.

천사연이 내게 받은 귀걸이를 한 번도 빼지 않은 이유를 이제는 안다. 네가 그토록 방어적이고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았던 이유도.

‘너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 줘야 하지? 어떤 위로도 네 마음에 닿긴 어려울 텐데.

가슴 속으로 지끈거리는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책을 바라보며 서 있던 그때였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서 익숙한 이가 방으로 들어섰다. 나를 찬찬히 살핀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엘로힘이 깨어났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군.”

책이 보여 주는 과거가 아닌 현실의 천사연이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멍해진 내 앞으로 그가 걸어왔다.

나를 정확히 응시해 오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엉켜 들었다. 목 끝까지 솟구친 수많은 위로를 겨우 삼켜 내며 입을 열었다.

“…천사연.”

아마 그는 위로를 바라지 않을 거다. 천사연은 혼자서 그 외롭고 아픈 길을 걸어왔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신념을 버린 적이 없었으니.

내가 해 줘야 할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천사연을 마주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나는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 천사연이 어쩌면 지금 가장 듣고 싶을지도 모르는 말을 꺼냈다.

“다녀왔어.”

조용히 내 얘기를 들은 천사연의 표정이 곧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너무 오래 걸렸지?”

그저 책을 보는 동안 흘러간 시간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아무 대답 없이 나를 잠시간 바라보던 천사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

“결국 다시 만났으니까.”

그래, 우린 결국 다시 만났다.

천사연이 버티지 못했거나 내가 이 세계로 넘어오지 못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인연이었다.

“…어릴 적에 낯선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천사연의 손이 내 볼을 가볍게 매만졌다.

“크리스마스였고, 나는 다친 채로 방에 혼자 누워 있었는데…….”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해 주듯 조곤조곤 속삭였다.

“분명 혼자였는데도 누군가 곁에 있어 주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 태어나서 처음 들었어. 힘내라는 응원을.”

-힘내, 천사연.

그 말에 온 얼굴에 피멍을 단 채로 잔뜩 웅크리고 있던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내가 아이에게 해 줬던 응원도 함께.

“그 이후로도 가끔 들렸지. 저택이 무너지던 그 순간이나 호텔에서 한이결을 만나고 돌려보냈을 때도.”

“…들렸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책 속에서 만난 천사연은 내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바라보고는 했다. 목소리가 들려서 그런 거였구나.

천사연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눈꼬리를 살짝 접었다.

“게이트에서 널 처음 만나고… 간혹 내게만 들리던 목소리의 주인과 같은 사람인지 궁금했지. 하지만 들을수록 다르더군. 엄연히 따지자면 내가 들은 건 한이결의 목소리였으니 다를 만해.”

“언제부터 눈치챈 거야?”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처음 생각이 든 건 이공간에서 네 과거를 봤을 때. 확신은 그 후에 네가 내 과거를 보겠다고 결정을 내린 그 순간이었지.”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거냐? 과거의 나도 잘 부탁한다고 했잖아.”

“내 나름의 힌트를 준 건데.”

“힌트는 무슨…….”

불만스러운 내 시선에도 여전히 기분 좋아 보이는 천사연은 이제 내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만졌다.

“천사연.”

“말해.”

“내가 예전에 꿈에서 했던 질문 기억해?”

자꾸만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거슬렸지만 천사연이 하루 이틀 이러는 게 아니었으니 무시하고 얘기를 계속했다.

“서로 이용하는 관계로 충분하냐고 물었었잖아. 지금도 대답이 같아?”

놀란 기색을 보인 천사연이 쉽사리 말을 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수많은 갈등과 감정이 천사연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이 걱정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천사연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한참 만에 나온 답은 거칠고 메말랐으며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충분하지 않아.”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내가 졌어.”

“…….”

“내가 졌어…….”

천사연과 나는 그 누구보다 닮았기에 졌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천사연은 언제나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전에 이용하는 관계로 충분하다고 대답한 건 나를 깊게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나름의 배려였겠지.

그래서 이번 대답이 더욱 반가웠다.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닌,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료가 된 것 같아서.

나는 후련한 마음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여 천사연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그거면 충분해.”

아테나 길드 병실에서 했던 ‘모두와 함께 계속 살아가고 싶다’라는 내 말에 천사연이 해 준 위로를 그대로 따라 했다.

네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을 담아서.

어딘가 넋이 나간 눈을 하고 나를 응시하던 천사연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 위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동시에 쪽,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지난번 하태헌과 비슷한 상황에 어깨가 절로 움찔 떨렸다. 놀란 나와 달리 코앞에서 시선을 맞춘 천사연은 보란 듯 짙게 미소 지었다.

“천…….”

아주 잠깐의 텀을 두고 천사연이 다시 입술을 부딪쳐 왔다.

어린애들 뽀뽀와도 같았던 방금과는 달리, 입술이 깊게 맞물리며 그 사이로 뜨거운 혀가 들어왔다. 낯선 감촉과 함께 머릿속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미친놈이…!’

내 얼굴을 붙잡고 있는 천사연의 손을 떼어 내려고 힘을 줬지만 역부족이었다.

급히 상체를 뒤로 물리자 천사연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오히려 내 허리를 휘감아 제 쪽으로 당기며 하체를 바싹 붙여 왔다.

바람 능력을 쓰려고 해도 천사연의 오른손 능력에 가로막혀 소용이 없었다. 덜컹, 우리 몸에 부딪힌 테이블이 크게 흔들렸다.

“으, 읏…….”

잔뜩 굳어 있는 내 혀를 뭉근하게 짓누른 천사연의 혀가 입천장을 쓸며 지나갔다. 간지럽고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치고 올라왔다. 귓가에 잔뜩 들려오는 질척한 소리 때문에 얼굴로 피가 몰렸다.

숨 쉴 틈도 없이 달라붙는 천사연의 어깨를 주먹으로 제법 강하게 내려쳤다. 그제야 천사연은 내 입술을 한 번 잘근 깨물고서 물러섰다.

“…이게 무슨 짓이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따지자 볼과 귀를 발긋하게 물들인 천사연이 긴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하고 싶어서.”

“뭐?”

남의 입 안에 혀를 쑤셔 넣어 놓고 한다는 소리가 하고 싶어서라고? 기가 막히고 짜증 나서 욕이라도 하려는데, 날 향한 천사연의 시선에 목구멍이 턱 막혔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얼굴은 왜 이렇게 붉은 건데?

왜 날 보면서… 행복하게 웃냐고.

“…….”

나는 책을 통해 천사연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최근의 모습까지 봤다. 하지만 과거 그 어느 순간에도 지금처럼 눈동자에 많은 감정을 담아낸 적이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거리낌 없이 말하던 하태헌과 아주 닮은 눈빛. 내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길. 그 모든 것에서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게 몰려왔다.

그 적나라한 감정을 도저히 마주할 수 없어서 도망치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가득 차오른 난감하고 혼란스러운 감정 사이로 강하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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