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남자의 냉담한 시선에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며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잠깐의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던 그가 곧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침묵을 깼다.
“내가 잘못 생각했군.”
느긋하고 나른한 음성 사이로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중간마다 끼어들었다.
“여기서 밑바닥 기어 다니는 벌레 새끼들을 보면 너도 좀 배우는 게 생길 줄 알았는데, 세현아.”
“…….”
“배우기는커녕 남창 새끼랑 굴렀다는 소문이나 내고 다니고. 참, 어이가 없어서….”
남자가 드물게 헛웃음까지 흘렸다. 나는 감히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혜향촌은 좀 일렀던 것 같네. 아직 27살밖에 안 된 어린애한테 쥐여 주니까 별 잡소리가 다 들리잖아.”
내가 그렇게 싫다고 난리 쳐도 강제로 시켜 놓고 이제 와 후회하는 꼴이라니.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새어 나오는 비웃음을 속으로 억눌렀다.
입가를 매만지며 잠시간 생각에 빠져 있던 남자가 이내 옆에 서 있는 수행원에게 물었다.
“박석재가 맡은 가게가 뭐지?”
“강남에 위치한 술집 하나 있습니다.”
“나쁘지 않네. 그거 가질래?”
“저는…….”
고개를 저으려던 내게 남자가 눈짓으로 뒤에 쓰러진 이를 가리켰다. 목 끝까지 올라온 거부의 말이 턱 막혔다.
“어떡할래, 세현아.”
머뭇거리며 답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던 남자가 입꼬리 끝을 살짝 올려 웃었다.
“……예.”
한숨을 삼켜 내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혜향촌과 달리 순순히 물러서는 내 태도가 꽤 흡족한 듯,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미소를 지은 남자가 몸을 일으켜 내게 걸어왔다.
“그래, 잘 선택했어. 더러운 남창이랑 굴렀다는 소문보다 술 파는 게 낫잖아.”
말 잘 듣는 개를 대하듯 내 볼을 두어 번 두드린 그가 수행원에게 명령했다.
“저건 가져가서 내용물 따로 빼고 버려. 빚이 한 3억 남았던데, 뭐… 저렇게 망가졌으니 다시 팔기도 힘들 거고. 어쩔 수 없지.”
“알겠습니다.”
그 말에 순간적으로 눈가가 떨렸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에 서 있던 남자가 그것을 알아채고는 느릿하게 덧붙여 말했다.
“우리 세현이가 웬일로 말을 잘 들으니 선심 좀 쓸까. 빼기 전에 마취 정도는 해 줘.”
“네.”
등 뒤에서 사람이 거칠게 끌려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 으어, 사, 살…….”
뭉개진 발음으로 뱉어진 애원을 끝으로 모든 수행원이 방을 나갔다. 남은 것은 몸이 끌려간 방향 그대로 길게 새겨진 핏자국과 남자와 나뿐이었다.
조심스럽게 호흡하며 코앞에 보이는 은회색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길게 뻗은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눈동자는 아무리 오랫동안 마주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눈을 마주하다 숨이 막혀 오는 기분에 은근슬쩍 고개를 숙여 피했다.
“세현아.”
“예.”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부담스러워 상체를 뒤로 조금 물리자마자 곧장 허리가 붙잡혔다.
“삐졌어?”
등을 짓누르는 커다란 손을 떼어 내려다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안 돼. 시발, 말이 안 되잖아. 어딜 굴러도 남창이랑 굴러?”
“…그런 적 없습니다.”
“알아. 우리 착한 세현이가 그럴 리가 없지. 어디 모자란 병신 새끼들이나 남자랑 뒹구는 거야.”
“―윽!”
불시에 뒷머리가 거칠게 휘어잡혔다. 억지로 내 얼굴이 위로 향하게 한 남자가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기껏 여기까지 와서 비싼 돈 뿌려 가며 남창 사는 놈들도 다 똑같고.”
날카로운 고통에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이를 악물며 신음을 겨우 삼켜 냈다.
“내가 전부터 몇 번이고 얘기했잖아. 섹스가 하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 응? 내가 어련히 좋은 여자 소개해 줄 텐데.”
“…….”
끔찍한 말에 어깨가 절로 바싹 굳었다.
남자는 내가 성년이 되는 해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저 소리를 몇 번이고 했다.
또라이 새끼. 사람을 그 짓 하려고 부르는 것도 좆같았지만, 한다 해도 남자 성격상 자리를 피해 줄 리가 없었다. 차라리 평생 안 하고 말지. 그딴 식으로 더럽게 살고 싶진 않았다.
“필요 없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혀로 겨우 대답하자 남자가 흠, 하며 머리카락과 허리를 놔주었다. 다행히 아까보다는 기분이 나아 보였다.
“여기는 다른 놈 보낼 테니까 하루 내로 정리해.”
드디어 남자의 품에서 벗어난 것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더는 혜향촌에 들락거리지 않아도 된 것은 좋았지만, 문제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남자의 명령으로 일자리가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 나는 인수인계를 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그의 집에 며칠간 붙잡혀 지내야 했다.
늦은 밤, 남자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욕실에서 나와 곧장 게스트 룸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춰 섰다.
“……?”
아래층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밤 11시를 넘은 시각. 손님이 찾아오기에는 너무 늦은 때 아닌가. 대충 말리느라 아직 조금 젖어 있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조심히 계단을 내려갔다.
“…건 말도 안 됩니다, 이사님. 제가 그동안 거길 어떻게 키웠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는 이는 나도 잘 아는 상대였다. 차마 거실로 나가 보지 못하고 계단 벽에 몸을 붙인 채로 귀를 기울였다.
“글쎄. 관심 없어서 몰랐는데.”
“이사님!”
제 성질을 참지 못하고 버럭 내뱉은 외침에 남자가 방금과는 달리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러 대지? 지금이 몇 신지 눈깔 안 돌아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박석재.”
달각, 유리 테이블에 무언가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담배 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 가게를 너한테 줬던가?”
“예?”
“나를 대신해서 관리하라고 했을 뿐이지, 준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 그건….”
“가게를 갖고 싶으면 석재야, 그따위로 관리하면 안 되지.”
“…….”
“나랑 1억 걸고 내기할래? 나는 너 가게 갖자마자 6개월 만에 말아먹는다에 걸게. 넌 어디 걸래?”
“…….”
“대가리에 든 건 좆도 없으면서 무작정 탐만 내는 건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응?”
벽에 뒤통수를 기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남자는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족히 열흘은 예민했다. 심지어 지금은 내가 문제를 일으킨 지 이틀이 채 지나지 않은 터라 박석재의 행동은 불난 곳에 기름 들이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왜 답이 없어? 방금까지 잘만 꽥꽥거렸잖아.”
“……죄송합니다.”
거기까지 들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벽에서 몸을 뗐다. 일부러 인기척이 나도록 남은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 거실 입구로 들어섰다.
“이사님.”
눈앞에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인 채로 서 있는 박석재의 뒷모습과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흠칫 어깨를 떠는 박석재와 달리 남자는 별다른 반응 없이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나를 바라봤다.
쉽지 않을 거라 각오하고 둘 사이에 끼어든 거지만, 막상 차가운 공기를 피부로 느끼니 선뜻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눈치를 보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담배를 깊게 빨아 낸 남자가 연기를 훅 내뿜어 내며 말했다.
“응, 세현아. 말해.”
“음…….”
아, 모르겠다. 이래 놓고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 보자는 마음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 이사님. 제가 아까 와인…이라도 한잔하자고 말씀드렸는데. 혹시 기억하십니까?”
“와인?”
“예. 괜찮으시면…….”
힘겹게 뱉어 낸 거짓말에 남자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와인이라.”
내 의도를 눈치챈 남자가 놀리듯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초조함이 올라왔지만 여기서 더 보채 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이다. 입술을 깨물며 허락을 기다렸다.
“난 와인 싫어.”
“네?”
“양주 남은 게 있던 것 같은데.”
“…….”
당황하는 내게 남자가 어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양주라니. 갑자기 난이도가 확 높아졌지만 이제 와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별로인가 보네. 그럼 말고.”
“아닙니다. 마시고 싶습니다.”
참담한 심정을 밀어 두고 급히 대답하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했는데, 우리 세현이가 마시자면 마셔야지.”
…그것 참 고맙네. 뻔뻔한 남자가 짜증 났지만 큰 문제 없이 상황이 일단락돼서 다행인 건 사실이었다.
술 진열장으로 걸어가던 남자가 아, 하며 멈춰 서서 심드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만 가, 박석재.”
“이사님.”
“공들인 게 많다고 했으니 정리할 시간은 일주일 줘야겠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세현이는 하루 줬어.”
“…….”
박석재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붉게 달아올랐다.
“뭐 해? 꺼지라니까. 난 네 멍청한 낯짝 보면서 술 마시고 싶지 않다, 석재야.”
“…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울분을 삼켜 낸 박석재가 저를 보지도 않는 남자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녀석은 단 한 번도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멀어져 가는 박석재의 힘 있게 쥔 주먹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볼을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떠나는 놈을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무심코 고개를 남자 쪽으로 돌린 나는 예상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런 날 보고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남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른 건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날이 갈수록 애교만 늘어나네. 이러니 내가 걱정을 하지.”
진열장에서 술병을 꺼낸 남자가 주방으로 향하는 것을 알아채고 급히 뒤따랐다.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앉아 있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새하얀 아일랜드 식탁을 가리킨 남자가 잔을 꺼냈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기분 좋아 보이는 그 모습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제정신을 유지하고 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좀 힘들 것 같은데. 벌써부터 피로에 어깨가 절로 축 처졌다.
뻣뻣하게 굳어 있으니, 남자가 맞은편에 서서 가져온 잔과 얼음 통을 내려놨다.
“우리 세현이가 이번에는 어디까지 버틸지 참 기대돼.”
“그….”
“얼마나 술을 마시고 싶어서 몸이 달았으면 먼저 마시자고 졸랐겠어. 그렇지?”
“…….”
한쪽 잔에만 얼음을 한 개 넣은 남자가 양주를 따랐다. 얼음이 든 잔은 내게로 오고 술만 채워진 잔은 남자 본인이 가져간다. 잔을 건네받은 채로 잠시 망설이다 시무룩하게 물었다.
“…얼음 하나만 더 넣어 주시면 안 됩니까?”
고작 얼음 하나지만 지금 내겐 그 어떤 것보다 소중했다. 다행히 남자는 비웃으며 얼음을 하나 더 넣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