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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71)화 (171/394)

171화 

천사연의 과거를 정리해 보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다음 날부터 엘로힘과 엘라하는 서재에 꽂혀 있던 붉은 책을 모조리 꺼내 서재 바닥에 늘어놨다.

덕분에 나는 서재 출입이 당분간 금지됐다. 괜히 저번처럼 멋모르고 천사연의 책을 건드리면 앞으로 치를 대가에 대한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

피이이.

“하아….”

여우가 나뭇가지를 물고 신나게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만 좀 하자.”

벌써 17번째였다. 멀리 던져진 나뭇가지를 물고 오는 게 어디가 그렇게 재밌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피익! 피이이!

내 한탄을 알아들은 것처럼 여우가 꼬리를 바싹 세우고는 뭐라고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던지기나 하라는 것처럼 들려왔다.

“알겠다, 알겠어.”

반박할 말이 딱히 없어서 나뭇가지를 다시 던져 줬다. 그렇게 10번을 더 하고 나서야 여우는 만족했는지 내 발아래에 누워 작은 몸을 둥글게 말고는 하품을 했다.

열심히 놀았으니 이제 낮잠 시간이라는 건가? 하는 짓이 어린애랑 아주 똑 닮았네.

딱히 별다른 일도 없는 터라 나도 여우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기분 좋게 불어오는 미풍에 앞머리가 흩날리는 것을 느끼며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이결의 책을 본 지도 벌써 닷새가 지났다. 엘로힘의 말대로 이후에 완성될 천사연의 과거를 보려면 꿈을 더 꿔야 하는데, 검은 사탕을 먹어도 아직 네 번째 꿈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전에도 첫 번째 꿈과 두 번째 꿈 사이에 어느 정도 텀이 있긴 했지만, 이번만큼 길지는 않았다.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초조함이 들었다.

‘…모르겠다.’

엘로힘에게 물어도 꿈은 언제나 필요한 순간에 찾아온다는 이해하기 힘든 대답만 들려줬다. 그렇게 한참을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데,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있던 여우가 귀를 쫑긋 세우고는 고개를 들었다.

“심심해 보이네.”

파삭, 풀잎 스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이는 놀랍게도 엘라하였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엘라하.”

매일같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엘로힘과 달리 엘라하는 만날 일이 적어서 그런지 아직 좀 어색했다. 엘라하도 딱히 나와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여서 먼저 다가가기도 애매하고.

“아니면 나름 잘 놀고 있는데 내가 방해한 건가?”

나와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킨 채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여우를 본 엘라하가 놀리듯 하는 얘기에 머쓱하게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건 아닙니다. 자꾸 절 쫓아와서요. 이유를 모르겠네요.”

“당연히 너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쫓아다니는 거겠지.”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한 엘라하가 들고 있던 작은 종이봉투를 건넸다.

“가져가.”

“뭡니까?”

“배고플 때 먹어.”

봉투를 여니 고소한 향이 확 풍겼다. 갓 만든 따듯한 와플이 담겨 있었다.

“엘과 나는 오늘 계속 서재에 있어야 할 거야.”

“그 정도로 바쁜 겁니까?”

그 말에 미안함이 몰려왔다. 내 욕심이 괜한 두 사람에게 일거리를 안겨 준 것 같았다.

“양이 꽤 많으니까. 근데 상관없어. 어차피 한 번쯤은 필요한 작업이니까.”

엘라하는 오히려 신경 쓰지 말라는 것처럼 가볍게 대꾸했다.

“와플뿐만 아니라 식탁에도 먹을 거 준비해 놨으니까 알아서 먹어.”

“먹을 거요?”

“와플 좀 먹는 거로는 저녁까지 버티지 못할 테니까.”

“…….”

당연하다는 듯이 식사를 챙겨 주는 엘로힘과 엘라하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워졌다. 한이결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내 나이가 몇인데.

낯설어하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던 엘라하가 입을 열었다.

“너랑 우리랑 나이 차가 몇이나 나는지 알아?”

“예?”

“네 진짜 나이로 따져 봐도 우리보다 한참 어리다는 거야. 아주 까마득히 어리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식사 잘 챙겨.”

내 머릿속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그 말에 시선을 피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 렇기는 하죠….”

“엘이 나중에 확인한다고 했으니까 꼭 먹어라.”

……확인까지?

“네. 밥 안 거르고 먹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거.”

그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뭔가 했더니 저번에 추천해 준 책이었다.

“아직 다 못 읽었잖아.”

표지에 적힌 ‘어린 왕자’라는 글씨가 보였다. 읽다가 자꾸만 떠오르는 것들이 있어서 일부러 중간에 덮었던 책이라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무슨 이유로 못 본 건지 알겠는데, 그래도 한번 끝까지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그런가요….”

씁쓸함을 애써 외면하며 책도 받아 들었다. 묘한 눈빛으로 나와 시선을 맞춘 엘라하가 처음 책을 꺼내 줄 때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신기하네.”

“……?”

“왜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는 거지?”

갑작스러운 말에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제가 엘라하를 불쾌하게 여겨야 합니까?”

“그게 정상이지. 물론 나와 엘은 충분히 이해했을 거고.”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알아. 우리는 다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신기하다고 한 거야.”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엘라하가 말을 이었다.

“보통의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읽을 수 있는 이 힘을 부담스러워해. 과하게 의식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아.”

그제야 엘라하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너는 우리가 가진 힘을 알아도 딱히 달라진 게 없고 불편해하지도 않잖아.”

“그게 문제가 됩니까?”

입가를 매만지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차피 지금까지 봐 왔잖아요. 음, 대단한 것도 없는 저를 왜 보는지 이해가 안 되기는 하죠.”

“참, 이런 쪽으로 유난히 무딘 건 알고 있었지만….”

대놓고 한숨을 푹 내쉰 엘라하가 엘로힘이 하듯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왔다.

“원래부터 봐 왔으니까 기분 나쁘지 않다? 고작 그런 이유로?”

“엘라하.”

“널 만나기 전에는 그저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인간인 줄 알았어. 가진 것 없어도 남을 위하고 희생할 줄 아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

“하지만 이제 보니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 같네. 지독할 만큼 자신에게 관심이 없군.”

무심코 책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굳은 듯이 서 있는 나를 바라보던 엘라하가 찌푸린 내 미간을 손가락으로 툭 두드렸다.

“남이 네게 간섭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너는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권세현. 그걸 이제는 깨달을 때가 됐어.”

엘라하의 말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 어떤 답도 뱉을 수가 없었다.

***

쿠르릉, 천둥 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잔뜩 젖은 창문 너머로 빛이 번쩍거렸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끝도 없이 아래로 처졌고, 땅을 울리는 천둥은 불길한 징조를 몰고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하에 계십니다.”

숨도 고르지 못하고 급히 들어서자 계단 앞에서 대기 중이던 가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위치를 알려 줬다. 흐트러진 검은 넥타이를 재차 조이며 거친 숨을 억지로 삼켜 냈다.

불빛이 반절 꺼진 지하 복도는 섬뜩한 분위기가 흘렀다. 가장 안쪽 방까지 망설임 없이 걸어가 지체하지 않고 노크했다.

달칵.

나와 같은 정장을 입은 수행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줬다. 미약하게 떨려 오는 손에 애써 힘을 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흐릿하게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바닥에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긴장하며 그 옆을 지나갔다.

“…끄, 흐으…….”

발가벗겨진 채 온몸이 피떡이 된 이가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온통 붓고 시뻘겠지만, 낯익은 얼굴이라는 것은 금방 알아차렸다.

“어딜 봐?”

아주 잠깐 시선을 내렸을 뿐인데 천둥 같은 질책이 날아들었다. 실수했다. 차갑게 식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재빨리 정면을 향해 고개를 들자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옆에 서 있던 수행원이 라이터를 켜고 불을 붙여 줬다. 서늘한 은회색 눈동자가 희끗희끗한 연기 사이로 보였다. 퍼져 나가는 향을 보아 평범한 담배가 아니었다.

“늦었네?”

“죄송합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온 거였지만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며 나를 응시하던 남자가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아깝게 됐어. 좀 더 빨리 왔으면 재밌는 구경 했을 텐데.”

그가 입에 물고 있던 것을 손가락에 끼우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대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반사적으로 돌아가려는 눈동자를 억지로 남자에게 고정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여기는 참 오랜만에 와 보잖아.”

“예.”

끼익, 남자가 의자에 등을 기대자 낡은 의자에서 귀를 찌르는 쇳소리가 났다.

“이 가게를 받은 지 몇 년째지?”

“…3년 됐습니다.”

“그래, 그래. 3년.”

남자가 손을 까딱이는 것에 맞춰 문을 지키던 수행원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를 억지로 붙잡아 일으켰다.

“흐, 허억…….”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며 질질 끌려온 이는 남자의 시선에 발작하듯 온몸을 덜덜 떨어 댔다.

“억지로 가게 받아서 3년간 개고생한 건 알겠는데, 세현아.”

뼈가 도드라진 기다란 손가락이 들고 있던 것을 튕기듯 날렸다. 아직 불씨가 붙어 있어 새하얀 연기가 흐르는 것이 내 발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래도 아래 새끼들 관리는 해야지.”

“…….”

“좆같은 소문 도는 거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 둬?”

소문이라니. 그야… 지금 끌려온 이가 나랑 잤다거나, 날 발판 삼아 이곳을 벗어나겠다거나 하는 헛소리를 떠들고 다니는 것은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굳이 끼어들어서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얼마나 웃기고 허황된 꿈을 꾸든 어차피 현실이 될 수 없으니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내가 나서서 미리 입단속을 시킬 것을 그랬다.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아니면 뭐, 저 새끼 말이 사실이라도 돼?”

“이사님.”

“말해 봐. 저 냄새 나는 남창 새끼랑 굴렀어?”

“아닙니다.”

“근데 왜 그딴 표정을 지어, 세현아. 저 씨발 새끼랑 진짜 뒹굴기라도 한 것처럼.”

“…죄송합니다.”

노기를 띤 목소리에 급히 머리를 숙였다.

남자의 분노가 내게 향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남자 또한 다른 이를 건드는 것이 내게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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