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50)화 (50/394)

50화

  

로헌 길드 건물이 보였다. 기절했었던 이후로 세 번째 방문이었다.

“윽, 뭐야.”

정문으로 들어가려다 건물을 둘러싼 기자들을 보고 질겁했다. 뭔데 저렇게 많이 몰려 있지?

‘저 사이를 뚫고 지나가다간…….’

분명 기자들한테 붙잡힐 텐데. N42 구역에서 겪었던 끔찍한 인터뷰 경험을 떠올린 나는 두말할 것 없이 다른 입구를 찾았다.

다행히 건물이 큰 만큼 출입구는 여러 군데 있었다. 나는 지하 주차장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위층으로 향했다.

“듣자 하니 레이나 길드도 상황이 똑같다는군요.”

“레퀴엠은 정신계 능력자 배치해서 쫓아냈다는데……. 저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관계자용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중앙홀로 이동하자 곳곳에서 직원들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건물에 진을 친 기자들 때문에 꽤 불편한 모양이다.

나는 소란이 가득한 로헌 길드 1층을 천천히 돌아봤다. 확실히 레퀴엠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새삼 레퀴엠이 얼마나 빠르고 능숙하게 대처했는지 실감이 들었다.

열심히 두리번거리다 홀 입구 근처에 서 있는 하태헌을 발견했다. 하얀 셔츠차림의 하태헌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건물 밖에 있는 기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태헌은 기자들을 싫어했지. 소설에서 하태헌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기자들을 굉장히 혐오했고, 몇 번 마찰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웬만한 일이라면 길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무시하는 편인 하태헌마저 그럴 정도니, 평소에 기자들이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인사라도 해야 하나.’

게이트에 참여한다고 의사를 밝혔지만, 하태헌도 함께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멀뚱히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발소리를 죽여 하태헌에게로 다가갔다.

뭐, 대충 팬이라고 둘러대면서 반갑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그다음에 회의실이 어딘지 물어보면…….

“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숨죽이고 걸어가는데, 하태헌이 번뜩이는 시선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정면으로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그 자리 그대로 굳었다.

“음…….”

“…….”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는데.

뻘쭘하게 서서 하태헌을 바라봤다. 밀려오는 어색함으로 입 안이 절로 바싹바싹 말랐다.

잠시간 나를 응시하던 하태헌이 한숨을 내쉬며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디로 들어오셨습니까?”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멍청히 되물었다. 하태헌의 존댓말이 영 익숙지가 않았다.

“오신다고 하셔서 입구에 인력을 보내 놨습니다만.”

“아아.”

그제야 안내자가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기자들 사이에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나 보다. 나는 미안함을 담아 그에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입구가 너무 복잡해 보여서 지하 주차장 쪽으로 돌아서 들어왔습니다.”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하태헌의 구겨진 미간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음. 그냥 쪽팔림을 무릅쓰고 입구로 들어올 걸 그랬나.

“따라오십시오. 회의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하태헌이 홀 중앙에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도착한 넓은 엘리베이터에는 나와 하태헌만이 올라탔다.

“…….”

“…….”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괜히 헛기침하며 서늘한 하태헌의 옆모습을 힐끔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물론 서로 처음 만난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상황인 건 맞지만, 그 이상으로 불편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냥 슬쩍 물어볼까. 지금이라면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큼. 하태헌 씨.”

띠링- 17층입니다.

타이밍 뭐야. 하태헌이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내리시죠.”

“…….”

마치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그 태도에 나는 입을 다물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러지?’

모른 척하기에는 티가 너무 났다. 대체 뭐야. SS급 코트에 문제라도 생겼나.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회의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로헌 길드원들이 나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한이결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로헌 마스터 이주하입니다.”

상석에 앉아 있던 이주하가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웃었다. 계약을 위해 찾아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이결입니다.”

나도 질 수야 없지. 악수하며 뻔뻔하게 웃어 보이자 이주하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떨렸다.

“한이결 씨도 오셨으니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죠.”

빈자리에 앉자 뒤에서 대기 중이던 수행원이 내게 서류를 놔 주었다. 서류에는 게이트에 대한 정보와 참여하는 멤버 목록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모두 아시다시피 이번에 클리어할 게이트는 D17 구역입니다. A급으로 그렇게 어려운 게이트는 아닙니다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죠.”

회의를 이끌어 가는 이주하의 시원한 목소리에는 시선을 잡아끄는 당당함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 하태헌 부마스터가 총책임자로서 팀을 이끌 것입니다. 믿을 만한 분들과 한이결 씨도 함께하니, 큰 문제 없이 클리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요!”

“깔끔하게 클리어하고 오겠습니다!”

이주하의 말에 감동 받은 길드원들이 호기롭게 외쳤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부마스터라고?’

하태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나를 바라보고 있던 하태헌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또다. 또 원작의 흐름과 달라졌다.

당장이라도 하태헌의 멱살을 붙잡으며 따지고 싶었다. 그런 자리 싫어하면서, 왜 맡았느냐고.

이주하가 그를 부마스터 자리에 앉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틈만 나면 제안했고, 하태헌은 번번이 거절했다.

하태헌은 스스로의 능력을 믿었으며, 굳이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물론 시간이 흘러 천사연의 영향력이 커진 이후에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만…….

‘아니, 내가 3개월 일찍 SS급 코트도 얻게 해 줬잖아. 그런데 대체 왜?’

……이것도 내가 원작과 다르게 움직여서 그런 걸까.

“출발은 3일 후입니다. 시간에 맞춰 D17 구역 게이트 앞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때 뵙겠습니다.”

나는 복잡해지는 감정을 억누르며 게이트를 함께 클리어할 로헌 길드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사회생활용 미소가 달라붙어 있는 입이 점점 뻣뻣해졌지만, 최선을 다해 유지했다. 앞으로 하태헌과 함께 게이트를 클리어할 사람들인 만큼 잘 보이고 싶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마친 길드원들은 회의실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하태헌 씨.”

내 부름에 회의실 입구에 서 있던 하태헌이 뒤를 돌아봤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된다. 이주하가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저랑 얘기 좀 하시죠.”

하태헌의 미간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제가 그 정도 요구는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봐요.”

못마땅한 얼굴로 한마디 하려는 이주하를 하태헌이 막아섰다.

“먼저 가 계십시오.”

“하지만 태헌아.”

“괜찮습니다.”

이주하가 나를 매섭게 노려봤지만, 하태헌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물러섰다. 달칵. 문이 닫히자 넓은 회의실에 나와 하태헌만이 남았다.

어떤 식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의외로 하태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려는 말이 뭐지?”

하태헌은 평소 그대로 내게 반말을 사용했지만, 서늘한 눈빛은 여전했다.

물론 이전에도 그렇게 좋은 관계가 아니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거리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나는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음, 우선 부마스터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쓸었다.

“하태헌 씨 성격상 그런 자리는 별로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번거로울 뿐이라고 생각했지.”

그가 한 발짝 다가왔다. 날 내려다보는 표정에는 여전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생각이 바뀐 겁니까?”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받아들였다.”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다는 거군. 나는 침착하게 경우의 수를 따져 봤다. 원작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하태헌에게 영향을 끼칠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역시 게이트인가?’

게이트 불안정 현상으로 길드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거나. 아니면 위험성이 높아진 게이트를 더욱더 철저하게 관리하려고…….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예?”

“내가 부마스터 자리를 받아들여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제가요? 아뇨. 물론 축하드립니다만, 저는…….”

“레퀴엠 마스터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었지.”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눈앞에 서 있는 하태헌으로부터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피부로 와닿는 찌릿함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헌이 지금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말도.”

“잠깐만요. 그건…….”

“로헌의 빠른 성장을 위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다.”

혼란스러운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마스터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아니, 아닙니다. 그런 걸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굳이 그런 자리를 받지 않더라도 하태헌 씨는 충분히…….”

“쓸데없는 말이군.”

그가 불쾌한 표정으로 내 말을 끊어 냈다.

“네놈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 아니다. 지금으로써는 오히려 의심스럽군. 그때 내게 한 말이 과연 진심이었을지.”

“…….”

“할 말이 그게 끝이라면 먼저 가 보겠다. 3일 후에 보도록 하지.”

망설임 없이 깔끔하게 등을 돌리는 하태헌을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회의실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일그러지는 눈가를 손으로 가렸다.

“하아…….”

지친 숨을 내쉬었다. 하태헌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미 되돌리기엔 늦어 보였다.

「원인이 너라면, 그건 어떤 행동 때문이 아닌 네 존재 자체겠지.」

천사연의 말이 떠올랐다.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발밑이 온통 시꺼먼 무언가에 집어삼켜져 있는 것만 같았다.

「너 하나가 모든 것을 망쳤어.」

「네 존재 자체겠지.」

목소리가 마구잡이로 들려왔다. 과거로부터 끄집어내진 말이 한데 뒤엉켜 머릿속을 휘저었다. 나는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소독약 냄새가 어디선가 흘러 들어왔다.

「너 하나가 모든 것을…….」

“알아.”

나도 알아. 잘 알고 있어. 그 누구보다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차갑게 식은 두 손이 약하게 떨렸다. 그걸 보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나는 왜 이렇게…….’

똑같을까. 변함없이. 이제는 좀 달라지고 싶은데.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질척한 과거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