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13. 신뢰 상태
나는 서류를 들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시선을 서류에 고정했지만, 내용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누워 있는데, 잠깐 방에 다녀온다며 나갔던 김우진이 돌아왔다. 뭘 해도 내 옆에 붙어서 하는 김우진의 행동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뭐야?”
“내 방에 있던 컵. 그리고 여분의 옷.”
“그걸 왜 가지고 와?”
“여기 두려고.”
그걸 왜 내 방에 둬……?
내가 황당해하든 말든, 김우진은 룰루랄라 방에 있던 물건들을 차곡차곡 옮기기 시작했다. 저 자식, 정말 잠잘 때만 위층으로 가려나 본데.
“넌 뭐 하는데?”
마음껏 물건을 옮긴 김우진이 그제야 내게 다가왔다. 어차피 말해 주려고 했던 터라 나는 아예 서류를 김우진에게 넘겨줬다.
“이거… 게이트 목록인가?”
“그래. 게이트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은 들었지?”
“응.”
“2개월간 클리어해야 할 게이트 목록 정리본인데… 그중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게이트는 나한테 용병으로 뛰어 달라고 요청한 길드야.”
“블런을 제외한 모든 길드가 두 개씩 요청했네.”
제이나는 A급 두 개, 로헌은 B급과 A급으로 요청을 보내왔다. 레퀴엠은 A급과 S급이고.
‘분명 천사연이 체크했겠지.’
얼마 전에 S급 게이트에서 그 고생을 시켜 놓고 또 요청하다니. 양심 없는 놈.
“연락이 닿지도 않는데 어떻게?”
“레퀴엠을 통해서 요청했어. 천사연이 나랑 친분이 있다고 뉴스에서 떠들어 댔잖아.”
“…….”
김우진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냥 무시하자.”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예 안 갈 수는 없고…… 적당한 게이트 하나 잡아야지.”
“왜 안 갈 수 없는데?”
김우진이 소파 아래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내게 시선을 맞춰 왔다. 솔직하게 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당한 핑계를 댔다.
“뭐, 일단은 정식으로 온 용병 고용이잖아. 돈 주겠지.”
“돈 필요해?”
“있으면 좋지.”
천사연이 넣어 준 1억이 있기야 하지만, 계속 레퀴엠 길드 방에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돈이야 모아 두면 쓸 곳이 생기는 법이니까.
‘천사연이 순순히 허락한 게 의외긴 한데.’
대표실을 나가려는 날 붙잡고 어느 게이트를 선택할지 기대된다며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던 천사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좋은 기회야.’
천사연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식 일정이었다. 로헌 길드 게이트를 맡아서 하태헌과 제대로 된 친분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용병 일로 돈도 받고, 게이트도 확인하고, 능력자들에게 눈도장도 찍고. 그야말로 호박이 덩굴째 들어오는 격이다.
“……얼마나 필요한데?”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고의 보상을 받아 낼 계획을 구상하던 나는 뒤늦게 들려온 김우진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딱히 금액을 정한 건 아니고……. 왜?”
“내가 벌게. 그러니까 게이트 요청은 무시하자. 가뜩이나 불안정하다고 난리인데, 위험하게 왜 들어가려고 해?”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자식이, 설마.
“돈을 어떻게 벌겠다는 건데. 너 능력 쓰려고 그러냐?”
김우진이 머뭇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다시는 그런 일 안 하겠다고 마음먹은 거 아니었어?”
“맞아. 안 하려고 했어.”
“근데 갑자기 왜.”
“돈 필요하다며.”
“그래. 내가 돈 필요하다는데 네가 왜 버냐고.”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어본 건데, 김우진은 상처받은 눈을 했다.
“쓰레기 같은 놈한테 협박당해도 거부할 만큼 싫어했잖아.”
“지금도 싫어.”
김우진이 내게 똑바로 시선을 맞추며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네가 원하면 할 수 있어.”
“김우진.”
내가 그딴 걸 왜 원하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그런 일로 번 돈 받아 봤자 하나도 안 기뻐.”
“그럼 어떻게 해야 게이트 요청 무시할 건데?”
“뭘 해도 들어갈 거니까 포기해.”
단호하게 말하자 김우진이 나를 제법 매섭게 노려봤다. 그렇다 한들 호박 덩굴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럼 나도 같이 가.”
“되겠냐고…….”
무슨 주인 일하러 갈 때 데려가 달라고 조르는 강아지도 아니고. 이러다가 끝도 없겠다 싶어서 나는 김우진에게 일거리 하나를 넘기기로 했다.
“김우진. 정 심심하면… 게이트 들어가 있는 동안 나 대신 뭐 좀 알아봐 주든가.”
“응?”
“얻고 싶은 정보가 있어. 원래는 직접 움직이려고 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천사연이 주는 정보는 온전히 신뢰하기가 힘들었다.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면 쓸 만한 정보꾼을 얻어 놔야 했다.
내 말에 잠시 고민하듯 시선을 내리깔던 김우진은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고 싶은 게 뭔데?”
그 말에 놀란 것은 오히려 나였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하냐고 짜증이나 낼 줄 알았는데.
“……가능하겠어?”
“그래.”
김우진이 두 손을 허벅지 위에 올리며 순종적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말해, 한이결.”
이런 김우진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당황하는 나를 향해 김우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게 뭐든. 네가 원하는 걸 손에 쥐여 줄게.”
***
길드 관리 본부에서 게이트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각 길드의 게이트 관리 일정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래서인지 게이트 관련해서 길드 안팎으로 시끄러웠다.
“이게 누구야. 우리 유명하신 A급 용병 한이결 군 아닌가.”
“…….”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던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얼굴을 구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박건호가 싱글싱글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이상한 호칭 붙여서 부르지 마시죠.”
가뜩이나 주변에 사람도 많은데. 물론 박건호는 내 타박에도 꿋꿋했다.
“왜? 맞는 말인데.”
“맞기는 뭐가 맞습니까?”
“간만에 얼굴 보는 건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닌가?”
“제가 좀 한결같은 사람이라서.”
무시하고 갈 길 가려는데 박건호가 졸졸 쫓아오며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만나 준다면서 연락 한번 없고.”
“연락은 무슨 연락처도 없습니다만.”
“지금 줄 테니 받아 가면 되겠군.”
“핸드폰 안 들고 왔습니다.”
사실 들고 나왔지만, 알게 뭔가 싶다.
천사연의 과거를 알아내기 위해 접근하려고 했던 박건호지만, 게이트가 터지고 상황이 뒤바뀌면서 내 계획도 틀어졌다.
괜히 쓸데없이 이것저것 건드려 봤자 득 될 것 없다. 일단 게이트부터 해결을 봐야 한이결의 과거건 천사연의 과거건 돌아볼 여유가 생길 터였다.
“남의 마음을 다 흔들어 놓고 이토록 쌀쌀맞다니…….”
“아, 좀.”
박건호가 슬픈 듯 훌쩍이니 옆을 지나가던 여직원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우리를 힐끔거렸다. 이 인간이 진짜.
내가 진심으로 짜증 내자 박건호가 우는 시늉을 멈추고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욕을 삼켜 내고 한숨을 쉬었다. 됐다. 이런 놈한테는 성질내 봤자 내 손해지.
“왜 이럽니까? 묘하게 기분도 좋아 보이시고.”
“들켰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여상스럽게 말했다.
“게이트가 불안정해지면서 등급이 한 단계씩 높아졌다는 소식을 방금 들은 참이라.”
“그게 대체 왜 좋습니까?”
“요즘 좀 지루했거든.”
으. 나는 박건호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이 사람이 왜 천사연이랑 오랫동안 붙어 지낼 수 있었던 건지 알 것 같다.
“팀장님도 게이트 일정 잡혔습니까?”
“Of course. S급으로 하나 잡았지.”
“S급이면 자칫 S+급이나 SS급 몬스터가 등장할 수도 있는데, 괜찮은 겁니까?”
“뭐. 꽤 여럿이 들어가기도 하고, 힐러도 있으니까. 좀 구르기야 하겠지만 죽진 않겠지.”
너무 태평한 생각 아니야? S+급만 되어도 공격력이 반절로 떨어질 텐데.
“마스터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다만……. 아마 위험하다 판단되면 S급을 두 명 배치하겠지.”
“그럼 나쁘지 않네요.”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박건호 뒤를 지나가는 낯익은 상대를 발견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무뚝뚝한 얼굴. 우서혁이었다.
“우서혁 씨.”
내 부름에 우서혁이 시선을 돌렸다. 나를 향해 가볍게 묵례하던 우서혁은 옆에 서 있는 박건호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지.
“외출하십니까?”
“네. 우서혁 씨는…….”
“저는 외부 일정을 끝내고 막 들어오던 참입니다.”
다가온 우서혁이 내 질문에 대답하며 박건호와 잠깐 눈을 마주했다. 그러나 우서혁과 박건호 사이에는 그 어떤 인사말도 오가지 않았다.
‘뭔데, 이 분위기.’
박건호도 평소와 달리 우서혁을 바라만 볼 뿐,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딱딱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한 우서혁과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박건호 사이에 낀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불편해졌다.
“게이트는 선택하셨습니까?”
“아, 예. 그렇지 않아도 로헌 길드로 가려던 참입니다.”
딱히 숨길 만한 건 아니라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제, 서류를 보며 고민하던 나는 결국 로헌의 A급 길드를 골랐다. 하태헌이 참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게이트였다.
게이트 이름 옆에 적힌 번호로 전화해서 참여 의사를 밝히자, 내일 있는 회의에 참석해 주길 바란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로헌이라면 A급 게이트겠군요.”
어떻게 알았지. 눈치가 귀신이네.
“맞습니다.”
“적당하군요. 무엇보다 한이결 씨는 길드 소속이 아니시니, 여러 길드와 게이트를 경험해 보시는 편이 좋습니다.”
머쓱하게 웃는 사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우서혁이 입을 열었다.
“저는 가 볼 곳이 있어서 이만. 나중에 뵙도록 하죠.”
“네.”
우서혁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만 인사한 후 자리를 떠나갔다. 멀어지는 우서혁의 등을 바라보며 박건호에게 조용히 물었다.
“혹시 두 분 사이 안 좋습니까?”
“뭐, 보시다시피.”
“의외네요. 팀장님이랑 사이 안 좋은 분도 있고.”
“흐음. 그건 칭찬인가?”
“욕은 아니긴 하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박건호는 꽤 괜찮은 성격이었다. 좀 지나친 재미주의자에 이상한 소문이 돌긴 하지만. 얘기 들어 보면 팀원들과 사이도 좋은 것 같던데.
“저런 꽉 막힌 타입은 별로라서 말이지. 옆에서 보고 있으면 답답하기도 하고.”
“우서혁 씨는 길드에 오래 계셨습니까?”
“글쎄. 한 3년쯤 됐나.”
무심한 표정을 보자니 정말로 관심이 없나 보다. 우서혁도 박건호를 본체만체했으니, 서로를 싫어하는 건가.
“근데 로헌 길드로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꽤 여유롭군.”
“아, 맞아.”
나는 천사연이나 우서혁처럼 손목시계 따위는 없기 때문에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슬아슬한데.
날아가는 게 빠를지, 택시 타는 게 빠를지 고민하는데 손에서 핸드폰이 쏙 빠져나갔다.
“뭡니까?”
“내가 할 소리인데. 핸드폰 안 들고 나왔다며?”
아차.
박건호가 나를 비웃으며 보란 듯 핸드폰에 번호를 저장했다. 핸드폰을 돌려받으며 선수 치듯 말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쓸데없는 연락 하면 차단할 겁니다.”
“알아 두도록 하지.”
기분 나쁘게 웃는 박건호를 뒤로하고 재빨리 길드를 빠져나왔다.
하필 박건호를 만나 가지고…… 나는 투덜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