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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98화 (98/102)
  • 98화

    [네 아비가 남긴 죗값을 받으러 온 것이니, 너무 원망하지 마라.]

    설마 전생에 말한 죗값을 이렇게 받으실 작정입니까.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사색이 되어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대신들이 웅성대고 용왕 또한 당황한 눈치다.

    “그러니까 지금, 자네가… 별주부와 혼인을 하겠단 소린가?”

    “그래.”

    “어째서.”

    “방율이 좋다.”

    뻔뻔한 대답에 용왕이 이젠 율을 쳐다봤다.

    “별주부가 말해 봐라. 이락이 혼인하고 싶다는 것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는가.”

    율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전하…. 저는, 저는 수컷입니다. 이락 님과 혼인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는… 읍!”

    심한 충격을 받은 탓일까. 율은 욕지기가 올라와 입을 틀어막고 뛰쳐나갔다. 잠시 뒤 편전 밖에서, 우욱, 하는 헛구역질 소리가 들리자 모여 있던 대신들이 속닥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벌써 회임을 한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리 저자가 능력이 좋아도 어찌 수컷을 잉태시키겠는가.”

    “우의정 나리. 저자의 양물을 보셨으면서 그러십니까.”

    “양물의 크기가 뭐가 중한가. 나도 소싯적에 그 정도는 됐어. 나이가 들어 쪼그라든 거지.”

    “그만들 하십시오. 망측하게 전하 앞에서 무슨 망발입니까.”

    “기가 차는군. 수컷끼리 그 짓을 한 것도 모자라, 혼인이라니. 에잇. 망측해라.”

    그러자 평소 말이 없던 해마 대신이 버럭 한다.

    “나랏일을 하는 분들이 그리 편견에 가득 차서 어찌합니까. 수컷끼리 할 수도 있지, 뭐 그게 흉이라고!”

    대신들이 아옹다옹하였고, 용왕은 이 상황이 골치가 아픈 듯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락은 그들을 내버려 둔 채 율을 데리러 밖으로 나갔다. 한데, 방율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혹시나 하여 밖으로 나가는 길을 따라가는데, 아니나 달라 꽁지가 빠지게 도포를 휘날리며 도망간다.

    “쥐방울!”

    하고 부르니 이젠 아예 뛰어간다. 하, 어이가 없어 그 뒤를 쫓아서 빠르게 달렸다. 뒷덜미를 잡아채자 율은 몸을 버둥거리며 반항하였다.

    “놓으십시오! 이락 님과는 말도 섞기 싫습니다! 애초에 저를 속여 이곳에 데려온 것도 모자라 혼인이라뇨! 정신이 나가신 겁니까? 아니면 노망이라도 나신 겁니까!”

    이락이 침묵하자 율은 눈물을 그렁하게 매달고 쏘아붙였다.

    “어머니께서 깨어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락 님 덕분에 기절하게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또 어떻고요! 가뜩이나 반푼이라 질책하는데, 수컷을 데려와 혼인하겠다 하면 얼씨구나, 하시겠습니다. 이락 님은 왜 항상 본인 생각만 합니까. 제 마음은 안중에도 없지요? 하긴 애초에 누굴 헤아리지,”

    불식간에 이락이 율에게 입을 맞췄다. 지나가던 궁인들이 화들짝 놀라 자리를 피하였고 율도 놀라서 이락을 밀쳐냈다. 뒤늦게 입술을 닦는데 목부터 귀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뭐, 뭡니까…?”

    “네 입을 막을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어.”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율의 화가 수그러든 것 같으니 이락이 슬슬 달래기 시작한다.

    “좋다. 네가 그리 싫어하니 가서 돌려놓도록 하지. 실언했다 고하면 되겠지?”

    율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율아. 나는 네 아비와 어미가 아닌, 너의 생각이 알고 싶다.”

    “…….”

    “나와 혼인을 하는 게 그리도 싫으냐? 육지에 가서 둘이 오순도순 사는 게 그리 싫어? 네가 원하면 언제든 바다로 와서 네 가족을 만나게 해 줄 것이다. 아니면 네 가족을 육지에서 살게 할 수도 있다.”

    “단지… 부모님 때문은 아닙니다….”

    “그럼.”

    “이락 님은 불사의 존재지요…. 저는 늙어 갈 테지만, 이락 님은 아닙니다. 결국, 혼자 남겨지실 겁니다…. 그것이 싫습니다….”

    “솔직해서 좋구나. 또?”

    “…….”

    “이참에 시원히 까놓고 말해 봐라. 다 이해해 줄 테니.”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나는 네 왕과 달리 아량이 넓다.”

    율이 입술을 잘근거리다 말문을 뗐다.

    “그러니까… 저는… 아직 새파랗게 젊고, 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막말로 이락 님은 만날 만큼 다 만나셨지만 저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불공평합니다….”

    태연하던 이락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러니까 네 말은, 다른 이와 만나 보고 싶다? 나는 닳을 대로 닳은 놈이라 싫고?”

    “아니…. 왜 그리 곡해하십니까. 제 말뜻은,”

    “됐다. 듣기 싫어.”

    “이해해 주신다더니….”

    이락은 이를 뿌득 갈며 참았고, 율은 눈치를 살피었다. 사실 마지막은 핑계에 가까웠다. 다른 이를 만날 마음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다른 문제다. 설득할 자신도 용기도 없다. 자랑스러운 자식은 아니어도 더는 못난 자식이 되고 싶진 않았다. 잔뜩 풀이 죽어 있으니 이락이 율의 어깨에 팔을 걸친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먼저 육지로 돌아가고, 너에게 나흘의 말미를 줄 테니, 곰곰이 생각한 후에 내게 답을 줘라. 그때까지 보채지도 화내지도 않으마. 어때?”

    침묵하던 율은 고개를 들어 이락을 바라봤다.

    “만약 거절하면… 이락 님을 더는 못 보는 것입니까?”

    “나를 안 봐도 괜찮겠어?”

    “아니요….”

    이락이 비로소 웃었다.

    “혼인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를 놓아줄 일은 없다. 내 곁에 묶어 둘 구실이 필요한 것뿐이야. 어찌 보면 나의 욕심이니, 부담은 갖지 마라.”

    속내를 털어놓은 이락은 율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네 부모에게 인사도 할 겸 오늘은 너희 집에 가서 잘까? 미리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잖느냐.”

    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에 아버지의 목덜미를 잡아 팽개치신 일은 잊으신 겁니까? 누이 말로는 이후로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귀가 큰 짐승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락의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오늘은 안 됩니다….”

    그러는 사이 저 멀리 편전에서 병사들이 기진을 포박하여 나온다. 그는 혼이 빠져 흐트러진 옷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끌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네 왕자는 100년 후에나 만날 수 있겠군.”

    “…….”

    “나를 원망해? 살려 준대 놓고 100년 동안 지하에 처박아 둬서?”

    “아닙니다….”

    미리 알려 주지 않아 당황한 건 사실이나 이락을 원망하진 않는다. 기진은 극형을 면치 못할 만큼 대역죄를 지었다. 이락의 목숨도 노렸다. 그런데도 그를 살렸으니 도리어 감사해야 할 일이다. 끌려가는 기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율은 편전으로 향하였다. 멋대로 뛰쳐나오는 불충을 저질렀기에 가서 용서를 빌려고 하는데 이락이 팔을 잡아 반대편으로 이끈다.

    “어, 어디 가십니까?”

    “궁 밖으로 구경이나 가자.”

    “전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둬라. 지금 저들도 혼란스러울 테니.”

    ***

    “오늘은 혼자가 아니네?”

    “예….”

    “얼굴은 왜 그런가. 여기 멍 자국인 거 같은데. 육지에 갔다가 다쳤어?”

    “넘어졌습니다….”

    “저런. 조심하지.”

    율과 대화를 나누던 책방 주인이 이락을 유심히 본다. 신기하네. 바다에서 토끼를 만나다니. 그러고 대수롭지 않게 늘 그랬던 것처럼 율에게 책방을 맡긴다.

    “잘 부탁하네. 어차피 올 손님도 없지만.”

    주인이 사라지고 나서 율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오래된 종이 냄새를 맡으며 기분을 달래고 있는데 이락이 뒷짐을 지고 제법 진지하게 책을 살펴본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라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거기다 자신의 소중한 공간에 이락이 있으니 기분이 더 이상하다.

    “책들이 다 낡고 오래됐구나.”

    “건너편에 규모가 제법 큰 책방이 있습니다. 다들 그리 가지요. 하지만 전 여기 자주 옵니다.”

    흐음. 안을 훑어보던 이락은 구석 창가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옆으로 오라고 바닥을 툭툭 치길래 율은 다가가 신기한 듯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뭘.”

    “여긴 제가 늘 앉는 곳입니다.”

    “그랬을 거 같았다.”

    “왜요?”

    “숨어서 울기 딱 좋은 장소가 아니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지난 일들이 머릿속에서 스치고 지나간다. 어머니가 아프고 아버지의 모진 말들을 견뎌 내며 남몰래 이곳에 와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 그때마다 생각했다. 누군가 내 곁에서 나를 좀 달래 주었으면, 위로해 주었으면, 대신 눈물을 닦아 주었으면….

    옛 기억에 울컥하자 손쓸 새도 없이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감추려고 급히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그랬더니 이락이 바싹 다가와 품에 꼭 껴안아 준다.

    그 다정함에 율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너는 울보다.”

    “압니다….”

    “그래서 네가 좋다. 잘 울어서.”

    “…….”

    “교접할 땐 더 예쁘게 울지. 알고 있느냐?”

    “그만하십시오…. 책으로 때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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