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잘 가라, 방울아.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종종 놀러 오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글썽이는 왕구를 보며 율도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형님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서 창고를 응시했다. 휘는 당분간 이곳에 남게 됐다. 그의 몸이 낫는 대로 돌려보내 준다고 약속했으니 믿는 수밖에 없었다.
“참, 방울아. 이거 가져가야지.”
왕구가 기어이 박으로 만든 등껍질을 안겨 준다. 율은 하는 수 없이 그것을 등에 짊어졌다. 왕태가 웃음을 참는 듯하였으나, 왕구의 성의가 있어 모른 척했다. 때마침 일어난 소월이 단장을 하고 나온다. 그녀는 버선발로 율에게 뛰어왔다.
“선비님 정말 가시는 겁니까? 많이 그리울 겁니다. 소월이를 잊지 마시옵소서.”
와락, 안기려 하자 이락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막아 뒤로 밀어낸다. 소월의 표정이 샐쭉해졌으나 이락은 율과 포옹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율은 남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이락과 함께 집을 나섰다. 얼마 전 이락에게 쫓겨나듯 바다로 돌아갈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있는데 이락이 율의 등껍질을 가만히 쳐다본다.
“처음엔 웃기더니, 볼수록 어울린다.”
“왕구 형님께서 정성껏 만들어 주신 겁니다. 가짜라 모습을 바꿀 순 없지만요.”
“잘됐구나. 이참에 용왕에게 새 걸로 하나 달라고 해. 너는 그 정도 자격이 충분하다.”
“아닙니다…. 더는 등껍질에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변하지 못한다고 해도 제가 자라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말은 그리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강에 다다르자 숨이 턱 막혀 온다. 과연 이 일이 제대로 성사될까. 불안감을 숨긴 채 구명환을 꺼내었다. 자신의 것을 이락에게 주고, 휘가 가지고 있던 것을 자신이 삼켰다. 오물오물 씹어 먹고 있는데 이락이 오만상을 찌푸린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더럽게 맛없어.”
“꼭꼭 씹어서 삼키십시오…. 그래야 약효가 빨리 돕니다….”
이락이 구명환을 꿀꺽 삼키자 율은 그를 어르고 달래 토끼로 변신시켰다. 토끼가 된 이락을 품에 안고 눈을 맞추자 웃음이 난다. 보드라운 털과 새카만 눈동자가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이락 님 너무, 귀엽습니다….”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한 대 칠 줄 알았는데, 이락이 보란 듯 뺨을 율의 손에 대고 문지른다. 그 느낌이 포근하여 가라앉았던 기분이 잠시나마 나아졌다. 이락을 안고 물속으로 들어간 율은 헤엄을 쳐 앞으로 나아갔다. 도중에 한 번씩 이락의 상태를 확인하며 가다 멈추기를 반복했고, 달이 사라지고 해가 뜰쯤엔 도성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율은 문지기에게 다가가 품에 있는 이락을 보여 줬다.
“어명을 받아 토끼를 데려왔습니다….”
문지기들이 문을 열어 주었고 용궁으로 곧장 향하였는데, 어쩐지 그곳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쿵 빠르게 뜀박질을 해 댔다. 오긴 하였는데, 이게 과연 통할까. 용왕이나 기진이 눈치채면 어쩌지. 손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차마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용궁 근처에서 서성이는데 이락이 얼굴을 삐죽 내민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으니 힘을 내라는 신호 같아 율은 용기를 얻었다. 궁으로 들어서자 때마침 대신들이 우르르 편전으로 향하고 있다. 율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그들을 쫓았다. 커다란 문이 열리자 대신들의 시선이 율에게 집중됐다. 옥좌에 앉은 왕이 보였고 그 아래 기진이 서 있었다. 다들 반가운 기색으로 율을 맞이했다.
“별주부, 이제 온 것인가. 그러잖아도 소식이 없어 궁금했네.”
“마침 조례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딱 맞춰 왔구먼.”
“무얼 꾸물대는 건가. 어서 전하께 토끼를 보여 주시게.”
앞으로 걸어 나가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나에게 둘의 목숨이 달려 있다. 기진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의 눈빛에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율은 침통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별주부, 방율…. 전하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내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율은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온몸에 가시가 날아와 박히는 것처럼 따가웠다. 숨이 가빠오고 머릿속은 하얗게 변하였다. 주군에게 대놓고 거짓말을 하려니 자꾸만 눈앞이 아득해진다.
“왜 혼자 왔느냐? 이락은?”
율은 품에서 조심스레 이락을 꺼내었다. 이락은 조금 전과는 달리 팔다리와 머리까지 축 늘어트린 채 미동조차 없었다.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모습에 대신들이 동요했다.
“저거, 그 토끼 아닌가.”
“맞네. 왜 저리 축 늘어졌어?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인가.”
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락을 바닥에 내려놨다. 이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숨도 쉬지 않았다. 율은 차마 왕을 쳐다보지 못하고 애먼 바닥만 내려다봤다.
“육지에서 뜻밖의 난이 벌어져… 토끼가 화를 당하였습니다…. 물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살아 있었는데, 거의 도착하였을 때는 숨을 쉬지 않아 소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려니 목소리가 갈라졌다.
머리 위로 용왕의 안타까운 신음이 들려왔다.
“저런. 그렇다면 죽었다는 말인가?”
“예…. 전에도 바다에 올 때마다 힘들어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불멸의 존재라고는 하나 치명상을 입은 데다, 바다와는 상성이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소신이 좀 더 신중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시옵소서….”
“쯧쯧, 그게 어디 네 탓이겠냐. 운이 거기까지인 것을.”
용왕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그 역시 수백 년을 살았으나 이번에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나. 이락이 죽는 것이 불가능하다 의심하지 않는 듯하였다. 왕의 표정이 바뀔 때마다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제발 믿고 이대로 돌려보내 주길….
“내 이참에 은혜를 갚으려 하였는데, 안타깝게 되었구나. 네가 대신하여 좋은 곳에 묻어 주고 오너라.”
“육지에 살던 분이니, 양지바른 곳에 묻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라.”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율은 땀으로 젖은 손을 말아 쥐었다. 살았다…. 힐긋 곁눈질로 기진을 보았는데, 반신반의한 눈치다. 아무래도 휘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 찜찜한 모양이었다. 율은 바닥에 놓인 이락을 들어 올렸다. 때마침 이락이 눈을 번쩍 뜬다. 율은 기함하여 얼른 그를 품에 쑤셔 넣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육지로 올라가 토끼를 묻어 주고 오겠습니다.”
황급히 인사를 하고 가려고 하는 순간 펑, 하면서 토끼가 이락으로 변한다. 율을 포함하여 지켜보던 이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졸지에 뒤엉켜 뒤로 넘어가려 하자 이락이 율의 허리를 받쳐 안는다.
“괜찮아?”
다정하게 묻는데 율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용왕 또한 놀라 내관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무슨 일이냐? 숨이 붙어 있질 않아?”
율은 새하얗게 질려 얼어붙었다. 뭐라고 하지. 이락이 아니라고 우길까. 이락이 죽어 버려서 비슷한 이를 데려왔다고 둘러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여기 있는 대부분이 이락을 실제로 봤지 않은가. 왜 하필 지금 변하여서는….
그런데 이락이 싱긋 웃으며 용왕을 돌아본다.
“오랜만이군.”
용왕은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정말 자넨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죽었다 살아나다니.”
“너도 죽었다 살아났잖아. 기분이 어때? 세상이 달라 보여?”
지켜보던 대신들이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저것이 감히 전하에게 말을 놓다니! 무엄하다!”
“아무리 전하의 목숨을 살렸다고는 하나, 저자의 방자한 언행을 두고 볼 순 없습니다. 엄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별주부도 수상합니다. 저리 살아서 팔딱거리는데 죽었다니요!”
율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졸라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만큼 절망적이었는데 기진의 표정도 저와 마찬가지로 흙빛이 되어 가는 중이다. 이락이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지금 변하여서는….
아…!
그러다 뒤늦게 진실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였다.
설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바다로 가지 않고 버틸까 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니 이락이 앞으로 나아간다.
“벌을 받을 건 내가 아니라 저기 있는 기진이다. 기진은 왕이 되고 싶어 아비의 목숨을 노렸다. 그것도 모자라 은인인 나를 해하고 증거를 없애려 했지.”
기진은 새파랗게 질려 눈물로 읍소했다.
“저, 저자의 말은 거짓입니다! 아바마마! 말도 안 됩니다. 제가 아바마마를 살신성인으로 보살핀 건 다른 이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별주부 말해 보아라!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정녕 내가 아바마마를 해하려 하였느냐!”
기진의 울부짖음에 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켜보던 용왕의 표정이 예상외로 덤덤하다.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언가. 저 아이의 목숨인가? 그렇다면 내어 주지.”
기진이 허망한 얼굴로 주저앉았고 이락은 미간을 찡그렸다.
“넌 여전히 인정머리가 없구나. 잘 생각해 봐라. 저 아이가 누구 때문에 저리됐는지.”
용왕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이락은 말을 이어 갔다.
“아주 오래전 난 너에게 불을 내줬다. 그런데 내가 저승에서 쫓겨날 때 선두에 서서 난리를 치더군. 어찌나 배은망덕하던지. 그걸 생각하면 사실 널 살려 주고 싶지 않았어.”
용왕은 발끈, 성질을 냈다.
“옛일을 뭐 하러 굳이! 그 대가로 난 소중한 딸을 자네에게 바쳤네!”
이락이 비웃었다.
“소중? 개가 웃을 일이군. 네가 자식을 소중하게 생각한 적이 있던가. 그리고 말은 바로 해라. 남들이 들으면 내가 데려다 몹쓸 짓을 한 줄 알 거 아니야. 네 딸에게 일을 가르치고 요직에 앉게 해 준 게 나다. 그 아이는 저승에서의 삶과 자기 일에 만족했어. 너 같은 아비 밑에 있어 봤자, 다른 아이들처럼 증오만 남았겠지.”
용왕도 뜨끔하였는지 부정하지 않았다.
“됐고. 자네가 원하는 걸 말하게.”
“두 가지 청이 있으니, 들어준다고 약조해.”
용왕이 고민하자 신하들이 소곤거렸다. 청이라니? 대체 뭘 빌려고 저러는 건가. 설마 우리 용궁을 차지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구명환이 없으면 숨도 쉬질 못하는데. 그럼 무역을 트자는 건가…? 그거면 우리도 좋지. 손해 볼 게 없지 않은가. 쉿. 가만. 전하께서 말씀하시려 하네.
“좋아. 내 모든 것을 걸고 약조하지.”
용왕의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락이 삐딱하게 기진을 바라봤다.
“네 아들 기진을 100년간 지하 감옥에 가둘 것. 그리고 이후에는 어떤 책임도 묻지 않을 것.”
장내가 술렁였고, 용왕의 얼굴이 구겨졌다.
“결국, 살려 주란 소리군.”
“의도가 어떻든, 저 아이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 나도 너에게 아량을 베풀어서 고환까지 내어 주지 않았느냐? 싫으면 처먹은 걸 토해 내든가.”
“저, 저 건방진. 말본새!”
“전하. 들어주지 마십시오. 대역죄인에게 지하 감옥이라뇨. 처형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이락이 싸늘한 시선으로 대신들을 훑었다.
“과연 너희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을까. 내가 준 비단과 사치품들이 너희 배 속으로 들어간 것을 모를 줄 알았어? 그리 싫으면 너희도 다 토해 놓거라.”
다들 입을 싹 다물었고 용왕은 한숨을 푹 내쉬며 그리하겠노라고 약조했다. 기진은 주저앉은 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그의 어깨가 처연하게 떨리는 것을 보면서 율은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한때는 자신이 존경하고 모시던 분이 아니던가….
“두 번째 청은 무엇인가.”
이락이 고민하는 듯하더니 율을 쳐다본다. 율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왜 무섭게 절 보십니까…. 아직 더 놀라게 해 줄 것이 남아 있습니까…. 이렇게 마음대로 하실 거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러셨습니까. 원망 어린 시선을 보내는데 이락이 소리 없이 웃는다.
“나는 방율과,”
이락이 말을 멈추고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그리 비꼬면서 잔소리하니 네가 내 부인이 된 것 같구나.]
왜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을까.
율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 돼!
그러나 이락이 한발 빨랐다.
“혼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