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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79화 (79/102)
  • 79화 (외전2)

    둥근 보름달이 먹구름 사이로 숨자 대궐 같은 푸른색 기와집 지붕 위에는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수가 놓인 검은 도포에 황금색 상투관, 한 손에 장죽을 든 남자는 저승의 염라대왕이었다. 그는 벌써 닷새째 이곳을 방문하였다. 잠시 뒤 그의 곁으로 다른 이가 나타났는데, 염라의 수족으로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장야였다.

    “어찌하여 또 오셨습니까. 천제께서 아시면 곤욕을 치르실 겁니다.”

    “내가 무얼 했다고 야단법석이냐. 이승으로 잠행을 나온 게 무슨 죄라고.”

    “기억이 돌아온 걸 숨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기억이 돌아왔지. 사자들이 지웠던 전생의 기억이 어째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떠올리자마자 이락이 찾은 건 자신의 가문을 몰락시킨 숙부였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죄를 많이 지었으니 인간이 아닌 미물로 태어나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결국 그를 찾아냈다. 그러나 이락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누구보다 더 호의호식하며 잘살고 있었다. 아흔아홉 칸의 기와집에 임금보다 더한 권력을 휘어잡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과연 벌을 받고 있다 할 수 있겠는가.

    “재미있지 않으냐? 전생에 그리 큰 죄를 지었는데도, 결국 이리 살고 있으니 말이다.”

    “지옥에서 죗값을 치렀고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인간은 변합니다. 저자는 마마의 혈육을 죽게 한 그자가 아닙니다.”

    이락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나도 안다. 하지만 아직도 그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라 나를 괴롭히는구나. 아예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자 장야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전 염라대왕의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현생에 지은 죄로만 사람을 보라 하셨지요. 비록 악업을 지었던 자라 하더라도 벌을 받고 다시 태어나면 달라질 수 있다 하셨습니다. 대왕마마께서는 그분의 아들이니 뜻을 이어가셔야 합니다.”

    이락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어린 자신이 저승으로 가 처음 만난 건 염라대왕이었다. 그가 왜 이락을 선택하였는지는 몰라도, 후계가 없었던 그는 이락을 제 아들처럼 키워 자리를 물려줬고 이락 역시 그를 아버지라 여겼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이락은 발길을 돌렸다.

    “가자. 더는 이곳에 오지 않으마.”

    장야는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걸음을 떼려던 찰나 지붕 아래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힐긋 돌아보던 이락의 눈에 횃불이 여러 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누군가를 끌고 와서는 안채 마당에 무릎을 꿇리었다. 이락이 거기에 관심을 두자 장야가 황급히 말린다.

    “대왕마마!”

    이락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였다. 곧이어 안채의 문이 열리며 거만한 인상의 양반이 나온다. 그는 뒷짐을 지고 마당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남녀를 내려다봤다.

    “이 개만도 못한 것들! 내가 너희를 먹여 주고 입혀 주었는데, 도망을 쳐? 주인을 배반한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르지는 않을 터! 내 오늘 여기서 너희를 때려죽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끌려온 남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살려 주십시오, 대감마님. 잘못했습니다! 저희를 벌하시는 것은 좋으나 제발 저희 여식만은 살려 주십시오! 그런데 남자와 달리 곁에 있는 여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흙바닥을 할퀴며 자신의 주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양반은 그런 여인을 보며 비웃었다.

    “네 마누라는 생각이 다른가 보구나. 저리 나를 노려보고 있지 않으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 노비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무얼 잘못했다고 이러십니까! 잘못은 대감마님께서 하셨지요! 고작 열 살밖에 안 된 제 딸아이를 밤마다 안채로 부르셔서 온갖 못된 짓은 다 해 놓고!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 컥!”

    뒤에 있던 사병 하나가 여자 노비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남자 노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어 앞으로 고꾸라지는 자신의 부인을 붙들었다. 몽둥이질이 시작되려 하였고 남자는 앞으로 기어가 양반의 발이라도 핥을 기세로 손을 싹싹 빌며 울부짖었다.

    “마님!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처도, 여식도 살려 주시면 제가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 주십시오!”

    “뭐든?”

    남자는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예,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희 식솔들 목숨은 제발… 흑….”

    그러자 양반이 옆의 수하에게 손짓한다. 수하가 차고 있던 검을 건네자 양반은 칼집에서 검을 빼 그것을 노비에게 던졌다. 양반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거라. 그럼 내 생각해 보마.”

    뒤에 있던 여인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안 된다고 하지 말라며 울부짖었다.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을 받아 들었다. 지붕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락의 눈빛은 순식간에 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장야가 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가셔야 합니다. 저들의 일에 나서지 마십시오!”

    “가서 천제께 알려라. 네가 늦을수록 내 손에 죽는 이가 늘어날 것이다.”

    그의 얼굴엔 증오와 광기만 남았다. 돌이킬 수 없게 됐구나…. 장야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절망하여 고개를 숙였고 바로 자취를 감췄다. 곧 이락의 오른손에 검붉은 빛을 띠는 활과 화살이 생겨났다. 이락은 화살을 활에 끼우고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끄드득. 줄이 당겨지는 소리와 함께 화살촉이 양반을 겨냥했다.

    양반의 코앞에서는 노비가 칼로 제 목을 겨눈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마… 마님… 약속을… 꼭….”

    탁, 당겨진 줄을 놓았고, 노비가 제 목을 치기 직전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양반의 어깨에 명중했다. 컥, 하고 양반이 어깨를 붙들고 주저앉자 모여 있던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한다. 사병 하나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따라오다 이락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침입자다! 지붕에 침입자가 있다!”

    사병이 몰려들어 양반을 에워싸고 모든 횃불이 지붕을 향해 비춰졌다. 이락은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활을 툭 던져 버리고는 지붕 끝에 걸터앉았다. 사병들이 활과 검을 꺼내 공격을 하려는 찰나 이락이 딱, 손가락을 튕겼다. 시간이 멈췄고, 그 속에서 양반만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뭣, 뭣들 하는 거냐! 저놈을 쏴라! 어서 쏴! 다들 병신처럼 왜 멀뚱히 보고만 있어!”

    이락은 가뿐하게 땅으로 내려왔고, 뒷짐을 지고는 양반에게 다가갔다. 양반은 자신의 무사가 들고 있던 검을 빼서 들고는 이락을 향해 겨눴다.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서는 행패를 부려! 귀신이면 물러가고, 사람이면 썩 꺼지거라!”

    어느새 이락의 손에 검이 들려 있었고, 그는 양반을 바라보며 소름 끼치게 웃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소, 숙부?”

    양반의 미간이 꿈틀하고 움직인다 숙부?

    “내가 죽어 가며 했던 말을 기억하시오? 다음 생에 기필코 찾아내 그대가 보는 앞에서 혈육을 도륙 내겠다, 하였지.”

    양반은 검은 든 채 부들부들 떨었다. 게 아무도 없느냐! 어서 이놈을 잡아라! 뒤늦게 소란을 듣고 하인 몇 명이 뛰어오자 이락이 소맷자락을 펄럭 휘둘렀다. 그러자 눈앞에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불타기 시작하였고, 저만치 떨어져 있던 하인들은 당황하여 주춤 물러섰다. 불은 빠른 속도로 옮겨 가며 기와집을 집어삼켰고 양반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었다.

    그는 별당 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뭣들하고 있어! 우리, 연우, 연우가! 연우가 위험하다. 연우를 구해라!”

    이락은 별당을 향해 뛰어가려는 양반의 목에 칼끝을 겨눴다. 양반은 칼을 쥔 채 어금니를 꽉 물고 부들부들 떨었다.

    “만약 내 아들이 잘못되면, 네놈을 죽여 버릴 것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칼을 휘둘렀고, 이락은 바람처럼 가볍게 피한 뒤 종이 자르듯 그의 한쪽 팔을 손쉽게 베어 버렸다. 잘린 그의 팔이 바닥에 나뒹굴었고 그는 고통에 괴성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으아아악. 내 팔! 팔이! 그러면서도 눈은 아들이 있다는 별당을 자꾸만 좇는다. 고통에 흰자위가 벌게지는 그를 보며 이락의 얼굴에는 희열이 들어찼다. 기어이 아들에게 가려는 그의 두 다리마저 잘라내자 피가 웅덩이를 이룬다. 양반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벌레처럼 기어서 이락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렸다.

    “크헉, 살… 살려 주시오. 나는 죽여도 되니, 내 아들은 살려 주시오! 하나뿐인 자식이오! 그러니 내 아들만은, 제발…. 제발…! 살려 주시오! 이렇게 빌겠소! 내가 잘못했소! 제발…. 흐윽….”

    처절하게 애원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이락은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내 모습을 보는 거 같아, 마음이 아프군.”

    혹여나 하는 기대로 양반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시뻘건 피가 발밑으로 스며들었고 이락은 자세를 낮추며 섬뜩하게 속삭였다.

    “그리 소중하다니, 네 아들놈부터 죽여야겠구나.”

    안 된다. 아니 된다! 내 아들은 아니 돼!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이냐! 내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뒤에서 외침이 들려왔고, 별당 앞까지 갔을 때는 얼마 남지 않은 하인들이 불을 끄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락은 스스럼없이 불길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화염에 휩싸인 가운데 열 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 하나가 소매로 코와 입을 막고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저벅, 저벅 걸을 때마다 칼에선 피가 뚝뚝 흐르고 발자국은 피로 물들었다. 인기척을 느낀 아이가 고개를 들다가 흠칫 놀란다.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아이는 겁에 질려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밖에선 여전히 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꺼라, 어서! 도련님을 구해야 한다! 물을! 물을 더 떠 와! 이락은 아이의 턱밑에 칼끝을 겨누고 고개를 들게 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아비를 닮지 않았으며 영롱하고 선한 눈빛 또한 아비를 닮지 않았다.

    아이는 두려움에 흐느끼면서도 입을 달싹였다.

    “제, 아버지는 어찌… 되셨습니까….”

    “의외군. 먼저 살려 달라 빌 줄 알았는데.”

    “죽이셨습니까…?”

    “네 아비가 남긴 죗값을 받으러 온 것이니, 너무 원망하지 마라.”

    아아, 아이의 입에서 피 끓는 절규가 쏟아져 나온다.

    왜 제 아버집니까…! 왜 하필이면 접니까…!

    “저승에 가서 아비를 만나거든 직접 물어봐.”

    이락이 아이의 목을 베기 위해 검을 치켜드는 순간 검이 손에서 벗어나 벽으로 날아가 꽂혔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하여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기를 쓰고 일어나 칼을 잡으려 했으나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이락 네 이놈!]

    때마침 하늘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졌고, 이락은 고개를 들어 위를 노려봤다.

    [네놈이 기어이 죄를 짓는구나!]

    하하, 죄라니요? 저는 제 원수를 갚은 것뿐입니다. 그러다 이락은 자신의 몸이 차츰 사라지는 것을 깨닫고는 이를 까득 물었다. 앞에 있는 아이 역시 하염없이 울면서 저를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락은 마지막으로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서늘하게 웃었다.

    “억울해? 복수하고 싶으냐? 그럼 다시 태어나 나를 찾아와라. 언제든 기다릴 테니.”

    그땐 기필코 너도 죽여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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