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율은 주변을 둘러봤다. 꽤 오랜 시간을 걸어온 것도 모자라 배를 타고 가야 한다니…. 노를 젓는 사공의 모습을 보다가 손을 아래로 내려 갈라지는 물길을 손바닥으로 마찰하였다. 피부에 닿는 물의 감촉이 좋아서 웃음이 난다. 바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앞에 앉은 이락과 눈이 마주쳐 바로 표정을 수습하였다.
“지금 어디에 가는 것입니까….”
“이화 상단.”
예? 율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화 상단이라고 말은 들어 왔으나, 그곳에 직접 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구슬을 뺀다더니 왜 그리 가는 걸까. 거기에 구슬을 빼 줄 만한 이가 있는 걸까. 궁금하여 더 물으려고 하는데 배가 뭍에 도착한다.
사공이 다 왔다는 신호를 주었기에 둘은 배에서 내렸다. 이락을 따라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는데 곳곳에 붉은 천이 걸렸다. 알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상단에서 왔다는 이들의 의복에도 똑같은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이락이 멈춰 선다. 눈앞의 광경에 율은 할 말을 잃었다. 커다란 대문을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담벼락이 길게 이어졌다.
이락이 다가가자 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냉큼 뛰어와서는 인사를 건넨다. 오셨습니까, 나으리.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 왜 왔는지 묻지도 않는다. 문지기는 냉큼 길을 터 주었고, 둘은 안으로 들어섰다.
한산하던 밖과는 달리 안에는 꽤 많은 사람이 북적인다. 수레에 실린 물건을 옮기는 이, 패랭이 모자를 쓰고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이, 그리고 무장을 한 사병들…. 때마침 그들 사이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던 사내 하나가 이락을 발견하고는 급히 뛰어온다. 그의 손에는 세필 붓과 장부가 들려 있었다.
“아이고, 나으리. 어찌 기별도 없이 오셨습니까.”
“급한 일이 있어 따로 연통을 넣지 않았다. 대방은 안에 있는가.”
남자가 반가우면서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대방 어르신께선 이틀 전 행수 나리와 백부로 떠났습니다. 돌아오려면 사나흘은 걸릴 것입니다.”
이런. 이락의 얼굴에 낭패 어린 기색이 역력했다.
“급한 일이십니까? 저에게 말씀하시면 해결 방안을 알아보겠습니다.”
이락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 율을 쳐다봤다. 율은 대궐 같은 기와집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저 멀리 누군가 잡혀서 무사들에게 끌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머리에 검은 천을 뒤집어쓴 사내의 차림새가 참으로 요상하다.
“저자는 누구냐.”
“말도 마십시오. 시장에서 전생 체험인지 뭔지 한답시고 나대던 놈인데. 글쎄 양반들한테 저희 상단 이름을 팔아먹었지 뭡니까. 괘씸해서 잡아 오긴 하였는데, 행수께서 계시질 않으니 당분간은 광에 가둬 둘 작정입니다.”
전생 체험이란 말에 율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락이 보고도 모른 척하자 율이 이락의 소매를 붙들고는 흔든다.
“들으셨습니까, 이락 님. 며칠 전 시장에서 보셨지요?”
“그때 내 뭐라 하였어. 사기일 거라 했지.”
“상단의 이름을 팔았다고 했지, 사기를 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그거지.”
율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관심이 많았는데 이락이 단칼에 자르니 속이 상한다. 혹시 아는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장군이나, 학식이 아주 뛰어난 선비였을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보는데 이락이 쯧, 혀를 차더니 남자를 부른다.
“별채에 있을 테니 저자를 그리 데려와.”
“어찌하여 그러시는지….”
“여기 있는 쥐방울이 전생 체험인지 뭔지 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고 나면 더는 나를 조르지 않겠지.”
율의 안색이 환해졌고, 남자의 얼굴엔 의아함이 생겨났다. 같이 온 선비는 누구인데 이렇게까지 챙기나 궁금한 눈치였다. 율은 너무 기쁜 티를 내지 않으려 입술에 꾹 힘을 주고 참았다. 그렇게 이락을 따라 별채 쪽으로 가는데 커다란 매화나무가 곳곳에 있다.
“이곳 주인이 매화를 좋아하나 봅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나 매화를 보는 이락의 눈빛에 그리움이 담긴다.
“응. 많이 좋아했지.”
율은 더 물으려고 하다 관두었고, 둘은 별채에 딸린 방으로 들어갔다. 하인이 곧 차와 다과를 내왔다. 율은 별채에 있는 도자기와 장식품을 구경하다 한쪽에 걸린 초상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여인의 초상화였는데, 왠지 낯이 익었다.
“저 여인은… 누굽니까.”
“이곳의 주인.”
아아, 대방이 여인이었구나. 놀라움과 함께 뒤늦게 여인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이락의 집 창고를 정리하다 족자를 발견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저 여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락과는 무슨 사이길래….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기분이 묘하다….
혼자 추측을 이어가는 와중에 무사가 전생을 본다는 남자를 데리고 왔다. 남자는 입고 있는 옷에 무언가를 주렁주렁 매달았는데 거기엔 조개껍데기도 있었고, 열매를 말려 실에 꿴 것도 있었다. 저것들은 다 뭘까. 궁금하여 쳐다보는 와중에 무사가 남자의 복면을 벗긴다. 얼굴이 드러난 남자는 당황하여 눈을 끔뻑였다.
“놀래라. 치도곤을 당할 줄 알았는데… 여긴 어딥니까.”
율이 일어나며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저는 방율입니다, 방율. 유우울. 얼마 전 시장에서 전생 체험을 하는 것을 보고 무척 궁금하였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요.”
갑자기 인사를 하는 율을 보며 남자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 그랬습니까?”
분위기가 서먹해지자 이락이 나선다.
“네가 전생을 볼 수 있다지.”
“보는 것은 제가 아니라…. 당사자지요. 저는 볼 수 있도록 안내를 할 뿐입니다.”
이락이 눈짓으로 율을 가리켰다.
“이 아이에게 그것을 보여 줘.”
남자가 놀란 표정을 한다.
“여기서요?”
“잘하면 행수에게 말해 널 곱게 보내 줄 수도 있다.”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정말입니까? 약조하시는 거지요? 혹여 죽임이라도 당할까 두려웠는지 이락을 붙들고 몇 번이고 되묻는다. 이락은 남자가 잡은 자신의 옷깃을 탁, 뿌리치고는 어서 하기나 하라며 핀잔을 줬다.
남자가 율에게 다가왔고, 근처에 있는 침상으로 데려가 눕기를 청했다. 율이 신을 벗고 침상에 눕자마자 품에서 작은 종을 꺼낸다. 이락은 의자에 앉아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시작합니까? 눈을 감을까요?”
이락과 달리 율은 들뜨고 신이 난 얼굴이다. 양손을 배 위에 모으고 입술을 암팡지게 다문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그걸 본 이락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전생은 모르겠고, 귀여운 방율이나 감상하잔 생각으로 탁자에 턱을 괴었다.
“이제부터 제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십시오. 먼저 몸에 힘을 뺍니다. 그리고 숨을 천천히 마시고, 내쉬고, 마시고 내쉬고….”
율의 가슴이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눈이 감깁니다. 제가 말한 대로 상상하십시오. 당신은 넓은 들판에 홀로 서 있습니다. 그곳은 매우 아늑하고, 평화롭습니다. 어디든 좋으니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 나가십시오. 바람이 불고, 마음이 편해지며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집니다.”
“…….”
“제가 종을 세 번 울리면, 선비님은 과거로 돌아가게 됩니다.”
웅- 웅- 웅- 작은 종에서는 예상치 못한 소리가 났다. 소리뿐 아니라 울림이 꽤 컸는데 이락은 그것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무엇이 보입니까?”
이락은 호기심에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꽉 닫힌 눈꺼풀 안쪽에서 방율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인다.
“토끼가… 토끼가 보여요….”
“토끼가 무얼 하나요?”
“풀을… 먹어요…. 냠냠… 냠냠…. 귀여워요…. 털이 보송보송… 아… 토끼가 저를 핥아 줘요…. 자꾸 핥아 줘요….”
“왜 핥아 주나요?”
율이 무방비하게 헤에, 하고 웃는다.
“제가… 토끼예요…. 아기 토끼…. 엄마가 저를… 핥아 주고 있어요…. 많이 예뻐해 줘요…. 따뜻해요….”
이락은 저도 모르게 큭, 하고 웃음을 참았다. 나라를 구한 장군이니 뭐니 기대하더니, 결국 토끼였구나. 따지고 보면 너무나 잘 어울리지 않는가. 이락은 자신의 머리에 달린 망할 귀를 잘라서 방율에게 붙여 버릴 방법이 없을까,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이제 다른 곳으로 갑니다. 제가 종을 울리면 눈앞에 문이 나타납니다.”
남자가 종을 흔들었고, 웅- 하는 소리에 율의 미간이 꿈틀한다.
“보여요…. 문이… 문이 나타났어요….”
“셋을 세면 그 문을 열고 들어가세요. 하나, 둘, 셋.”
웅- 다시 종이 울리고 방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번엔 뭐가 보입니까?”
“땅….”
“땅?”
“나무에… 매달려 있어요….”
“왜 매달려 있나요?”
“제가… 도토리예요….”
이락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감추려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바람이 불고… 몸이 흔들려요….”
토끼에, 도토리…. 다음엔 뭐 잡초 이런 거려나. 아니다. 만두를 그리 좋아하니 전생에 만두 장수였을 수도 있겠군. 더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그만두게 하려는데 율이 뭐가 좋은지 헤에, 웃는다.
“시원해요…. 높은 데 있어서 뭐든 볼 수 있어요…. 숲이 다 보여요….”
좋아하는 걸 보니 차마 말릴 수 없어 이락은 도로 팔짱을 끼었다.
“이번엔 아주 멀리 가 볼 겁니다. 똑같이 문이 나타나면 열고 들어가세요. 하나, 둘, 셋.”
웅- 소리가 실내에 울렸고, 율은 좀처럼 반응이 없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괴로운 듯 신음을 내며 인상을 찌푸린다.
“뭐가 보이나요?”
“…….”
“선비님? 보이는 걸 말해 보세요.”
율의 호흡이 차츰 가빠졌다.
“불이… 났어요…. 집에… 불이…. 하아… 하아… 답답해요…. 나갈 수가 없어요…. 불길에 갇혔어요….”
“주위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나요?”
율은 대답 대신 감정이 격해지는 듯 가슴을 빠르게 들썩였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반응이다.
“자아, 진정하고 앞을 보세요. 누가 있나요?”
“남자….”
“남자요? 어떤 남자?”
“검은 옷을 입고… 긴 검을 들었어요.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요. 무서워요…. 남자가 걸을 때마다… 핏자국이… 생겨나요….”
“그자의 얼굴을 확인하세요.”
율은 울먹이고 있었다.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어요….”
“왜요?”
“사람이… 아닌 거 같아요…. 무서워요….”
무섭다는 말을 반복하며 율의 얼굴은 두려움에 질려 갔다. 이락의 낯빛 또한 변하였다. 숨을 몰아쉬면서 괴로워하는 방율의 모습은 그곳에 함께 있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저를 죽이려고 해요…. 칼을… 칼을… 제 목에….”
“뭐라고 하는지 들립니까?”
“듣고 싶지 않아요…. 도망치고 싶어요…. 살려 주세요….”
기어코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바람에 이락이 제지하려 나섰다. 그러자 남자가 손짓으로 말린다. 지금 멈추면 오히려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제대로 마쳐야 합니다. 이락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났고, 남자는 율을 달래었다.
“이것은 기억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남자의 목소리를 잘 들어 보세요.”
남자의 말에 율이 차츰 안정을 찾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네 아비가… 남긴 죗값을….”
순간 이락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받으러 왔다…. 그러니… 원망하지 마라….”
이락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고, 율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나갔다.
“억울하면 다시 태어나… 나를 찾아와…. 언제든… 기다릴 테니….”
“좋습니다. 이제 셋을 세면 고개를 들어 그자의 얼굴을 확인하십시오.”
하나, 둘, 셋. 남자가 종을 치켜드는 순간 이락이 탁, 그것을 잡았다. 남자가 놀란 얼굴로 쳐다봤고, 이락은 어금니를 꽉 문 채 누워 있는 율을 노려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만.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