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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71화 (71/102)

71화

“언제까지 말을 안 할 셈이야?”

율은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보고 걸어갔다. 시장 구경이고 뭐고 흥이 깨진 지 오래고,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저녁에 연등놀이가 있으니 보고 가자는 이락의 권유에도 율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 만두하고 찐빵은 어쩔까? 버려?”

대답이 없자 이락이 그것을 풀숲에 홱 던진다. 율은 걸음을 멈추고 땅에 떨어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미 밖으로 굴러 나간 찐빵 하나를 주워 흙을 탁탁 털고 아무렇지도 않게 앞으로 걸어가니 뒤에서 이락이 기가 차서 웃는다.

걷다 보니 달이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며 사방이 더 어두워진다. 덜컥 겁이 났으나 그렇다고 이락에게 의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벅저벅, 발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저 멀리 불빛들이 일렁인다.

이락의 집에 평소보다 불이 밝게 켜졌다. 그의 수하들이 잔치를 벌이거나, 누군가 손님이 왔다는 뜻이다. 율은 확신에 찬 얼굴로 집을 향하여 내달렸다. 예상대로 집 앞에는 바다에서 온 수인들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꽤 많은 숫자에 놀란 것도 잠시, 안으로 들어간 율은 왕태와 이야기를 나누던 기진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뛰어갔다.

“기진 마마!”

돌아보는 기진의 눈빛이 전과 달라졌음을 느꼈다. 당당해졌고, 두려움이 사라졌다.

“율아. 어딜 갔다 이제 오느냐. 얼굴을 보지 못하고 가는 줄 알았다.”

“마을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마마께서 어찌 이곳까지….”

마당을 둘러보던 율은 놀라 입이 벌어졌다. 열흘마다 용궁에서 물건을 보낸다고 하였는데, 생각보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한쪽에 가득하게 쌓인 궤짝을 보니 단순히 물건 몇 개를 교환하는 정도가 아니구나, 깨닫게 됐다. 그러다 기진이 율을 지나쳐 사립문 쪽으로 간다.

“오셨습니까.”

정중하고 깍듯한 기진의 태도에 율은 이락의 실체에 대하여 더더욱 의문이 생겼다. 정말… 염라인가. 그런데 왜 저승을 다스리는 자가 이승에 머물고 있을까. 한편으로는 수수께끼처럼 풀리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이해됐다. 둘이 대화하는 걸 멀리서 지켜보는데 왕구가 곁으로 와서는 툭 장난을 건다.

“오늘 장 서는 날인데 어땠어? 볼 것이 많지?”

“예….”

“나도 가려고 했는데, 저들이 와서 못 갔지 뭐냐. 그런데 왜 이리 일찍 왔어? 해가 지면 더 재미난 걸 많이 하는데.”

율은 씁쓸하게 웃으며 품 안에 있던 봉투에서 흙에 떨어트렸던 찐빵을 제외하고 전부 왕구에게 주었다.

“드십시오…. 장에서 이락 님이 사 주셨습니다.”

“형님은. 기껏 애를 데려가 놓고 만두가 뭐냐, 만두가.”

율은 차마 그가 비단옷을, 그것도 분에 넘치게 여러 벌이나 사 줬다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였다. 포목점 주인이 그러질 않았나. 이락이 옷값에 이리 돈을 쓰는 걸 처음 봤다고. 혹여라도 왕구나 왕태가 알면 서운하다 하지 않을까, 내심 신경이 쓰였다.

“율아.”

다정한 목소리에 율이 돌아봤다.

이락과 이야기를 마친 기진이 다가오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건넨다.

“선이가 네게 보내는 서신이다.”

율은 그것을 받아 펼치었다. 어머니의 병환이 전보다 나아지고 있으며, 아버지 또한 술을 자제하려 노력 중이고, 자신은 학당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으니 염려치 말라는 내용이었다. 앞서 거울로 확인한 것들이긴 하나 직접 소식을 들으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처럼 기뻤다.

“모친의 병세가 많이 좋아졌다지? 다행이구나.”

율은 고개를 들어 기진을 바라봤다. 여전히 따뜻하고 인자한 미소가 왜 낯설게 느껴질까. 그동안 책과 이야기를 통하여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얼마나 많이 알아 왔던가. 눈앞에 있는 이 왕자님도 그들처럼 되어 가는 건 아닐까….

율은 조심스레 왕의 안부를 물었다.

“전하께서는… 어떠십니까? 차도가 있으신지요?”

“안타깝게도 전혀 없으시다.”

슬퍼 보이는 그의 표정은 진심일까. 율은 이제 그것마저도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기진이라면 지금의 왕보단 좋은 왕이 되지 않을까. 백성들을 어질게 살피고, 용궁을 전처럼 번성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왕 말이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어지럽다. 그런데 기진이 율의 손을 다정하게 붙든다. 율은 저도 모르게 이락을 쳐다봤다. 그는 뒤에서 왕태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어두운 밤인데도 눈빛에 살기가 느껴졌다.

율은 혹여 기진이 해코지를 당할까 걱정이 되어 황급히 손을 빼냈다.

“급히 뛰어오느라… 손에 땀이 나서…. 죄송합니다.”

기진이 여유롭게 웃다가 은근슬쩍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 궁금한 것이 있는데, 너에게 물어도 될까?”

“말씀하십시오….”

“혹 무연 누이가 이곳에 다녀가지 않았니.”

“예?”

율은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무연이 며칠 전 이곳에 다녀간 적이 있긴 하다. 짧은 시간 머물며 이락과 대화를 나누고 떠났는데, 왜 왔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남매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으나, 만약 기진이 왕위를 욕심낸다면 가장 경계해야 할 이는 무연 공주일 것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였다.

“그것은 내가 말해 주지.”

마침 뒤에서 이락이 다가왔다. 율은 이락과 기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 생각하여 피하려고 하는데 기진이 손목을 붙든다. 이락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다가 위로 올라와 율의 얼굴에 닿았다. 율은 당혹스러움에 볼이 빨개졌다.

“율아. 피하지 말고 있거라. 너도 어차피 알게 될 것이니.”

그러고 나서 기진은 이락에게 정중하게 청하였다.

“이락 님. 별주부는 저의 사람이니 진실을 알아도 상관없습니다.”

이락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그래, 궁금해하니 알려 주지. 너의 누이가 나에게 청혼을 하러 왔다. 이참에 나와 혼인하여 대신들의 환심과 명분도 얻을 생각이겠지. 네 아비가 쓰러진 걸 기회라 여기는 건 너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물론 거기에 있어서 너는 상당한 걸림돌이 될 테고 말이야.”

기진은 여유롭게 웃었다.

“그래서, 뭐라 하셨습니까.”

“나는 집안싸움에 낄 마음이 없다. 싸우든 죽이든 그건 너희끼리 알아서 해. 내가 얻을 건 용궁의 보물이고, 그것을 통해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게 목적이야. 그리고 참고로 말하지만, 네 누이는 내 취향이 아니다. 내 취향은….”

이락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율에게 넘어갔다가 기진에게로 돌아왔다.

“아무튼, 거기까진 알 것 없고. 그러니 나한테 와서 징징거리지 마라. 너도, 네 누이도.”

“압니다. 솔직히 말씀해 주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락은 난데없이 왕태를 부른다. 근처에 있던 왕태가 한달음에 방으로 들어가더니 천에 둘둘 싼 것을 가지고 나왔다. 그것을 이락이 받아 기진에게 건네었다. 기진이 그것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쥐방울의 본가에 가져다주고, 어미에게 달여서 먹이라 일러.”

여태 침착하던 기진의 표정에 동요가 인다. 율은 그것을 빼앗아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 생각에 차마 그러질 못하였고 그건 그것대로 비참하였다. 이락이 미우면서도 주는 걸 마다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내 집에 손님이 많은 걸 좋아하지 않으니, 용건이 끝났으면 그만 돌아가라.”

기진이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고, 데리고 온 병사들에게 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율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선두로 선 자들이 들고 있는 횃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율은 한참을 따라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이락의 집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용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우울함을 눈치챘는지 기진이 율을 부른다.

“어찌하여 안색이 좋지를 않아? 이곳에 있는 게 많이 힘든 게냐? 이락 님께서 네게 퍽 신경을 써 주시는 것 같던데….”

“오늘 돌아다녔더니… 많이 피곤하여 그럽니다.”

“아, 기다려 봐라.”

곧이어 기진이 소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율에게 건네었다.

“무엇입니까…?”

“네가 좋아하는 당과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주질 못했다. 어제 시장에 나갔다가 네 생각이 나서 샀어. 책방 주인이 안부를 전해 달라 하더구나. 네가 보이질 않으니 영 심심한 모양이야.”

용궁 이야기에 율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졌다.

“아까부터 내게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는데, 끝내 묻지를 않는구나.”

기진은 율의 복잡한 심경을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율은 당과를 쥔 채 머뭇거렸다. 물어본다면 솔직히 말해 줄까…. 볼수록 이락과 기진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자 그는 율의 어깨를 천천히 툭툭 두드렸다.

“네가 나의 사람이라고 했던 말은 진심이다. 이 일을 무사히 끝내고 돌아오면 너의 위치가 전과 달라져 있을 거야.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견뎌다오.”

“예….”

그가 웃으며 돌아선다. 멀어지는 기진의 뒷모습을 보다가 율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였다. 마당에 펼쳐 놓은 궤짝은 뚜껑이 열려 있었는데 산호부터 시작해 바다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것들이 가득하였다.

이락과 왕구와 왕태는 대화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율은 이때다 싶어 얼른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렸다.

[확인 작업은 모두 마쳤습니다. 이화 상단에서 내일 사람을 보낸다고 하였으니, 아침에 돌아오겠습니다.]

[일찍 와. 늦게까지 술 처먹지 말고.]

[아이고, 형님.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밖이 차츰 조용해졌고, 율은 방에 우두커니 앉아 기진이 주고 간 서신을 꺼내었다. 읽으면서 부모님과 선이를 떠올리고 있는데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잠하다.

[네 누이가 내게 청혼을 하러 왔다.]

왜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을까. 어머니께 삼을 보내 주었으니 이락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 했는데, 알량한 자존심이 그걸 허락지 않는구나. 율은 혼란스러움과 자책감에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기어코 눈물이 쏟아져 훌쩍이고 있는데 끼이이- 옆 방문이 다시 열렸다가 닫히고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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