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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59화 (59/102)
  • 59화

    이락은 율을 데리고 곧장 어딘가로 갔다. 문을 거세게 두드리자 잠시 뒤 노인 하나가 잠에서 막 깬 얼굴로 나온다. 이락을 본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그는 전에 금산에 몇 번 왔던 의원이었다. 이 밤중에 어쩐 일이십니까.

    “환자가 있으니 지금 살펴라.”

    이락은 주인의 허락도 떨어지기 전에 율을 안으로 데리고 가 눕혔다. 도포를 벗겨 내자 헝클어진 옷차림새가 그대로 드러난다. 저고리의 끈이 풀린 걸 본 이락의 눈빛이 다시 살벌해졌다. 율은 눈치를 살피며 얼른 저고리를 여미려 했는데 의원이 그 손을 붙들고는 몸 여기저기를 확인하더니 이락을 힐긋 본다.

    “맞으셨소?”

    은밀히 묻길래 율은 당황하였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의원은 이락을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바지와 소매를 걷어서 보고 갈비뼈도 꾹꾹 누른다. 통증이 있었으나 죽을 만큼 아픈 건 아니라 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참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물러났다.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은데….”

    그가 맥을 짚더니 으음? 하고 눈이 동그랗게 커져 고개를 갸웃한다. 다소 심각한 그의 표정에 율은 덜컥 겁이 났다. 이락이 그러지 않았나. 두 개의 기운이 안에서 충돌하면 사지가 찢길 수 있다고. 설마 아직도 그런 것일까?

    “어디가… 안 좋습니까?”

    걱정스럽게 물으니 의원이 주름진 얼굴로 웃는다.

    “안 좋긴. 전과 달리 맥이 너무 활발하여 의외라 그렇지.”

    아, 다행이다. 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락을 쳐다봤다. 여전히 무서운 표정이라 웃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당장 찢겨서 죽을 일은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그러자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락을 돌아본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도록 하십시오. 환자의 상태로 보아 금산까지 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으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시고요.”

    그가 방을 나간 뒤 율은 이락과 한방에 둘만 남게 됐다. 이락에게 말을 걸고 싶었으나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가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월관에 남겨 두고 온 왕구가 걱정됐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혹여 괜한 시비에 휘말려 봉변을 당하는 건 아닐까. 안절부절못하니 잠자코 있던 이락이 입을 뗀다.

    “왜. 어디 아파?”

    율이 멋쩍게 웃었다.

    “아, 아프긴요. 이락 님도 들었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보다 강골입니다. 어릴 적부터 하도 맞아서… 이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자랑이랍시고 한 말인데 분위기가 더 싸해져 율은 입을 다물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이락이 일어나서 바로 곁으로 다가왔고 율은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방황하였다.

    “거긴 왜 갔어?”

    “예…?”

    “갑자기 여인이라도 안고 싶어졌던 게냐?”

    “…….”

    “아니면 누굴 찾아갔거나.”

    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락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떨까. 그자가 분명 그랬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고. 그전에 제비들을 붙잡아 왕구의 돈을 돌려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왕구는 이락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속으로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며 눈치를 살피는데 이락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내게 말을 하기 싫은 모양이구나.”

    “그런 것이 아니라….”

    고민 끝에 율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다.

    “화, 화를 내지 않겠다 약속하십시오.”

    이락은 대답이 없었고, 율은 그걸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사실을 털어놨다. 박씨를 우연히 얻은 일을 시작으로 거기에서 금덩이가 나온 일. 그래서 왕구가 있는 돈을 모두 털어 박씨를 사들인 일. 하지만 박씨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결국 사기를 친 놈들을 잡으러 영월관에 갔다는 것까지. 듣고 있던 이락이 어이없어하며 웃었고 율의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왕구가 아직 거기 있다?”

    “예…. 그래서 말인데…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이락 님께서 가 보시면 안 될까요?”

    “…….”

    “가서 좀 도와주십시오…. 사기를 친 일당이 분명 그 안에 있는 거 같은데, 기방에선 왕구 형님은 들여보내 주질 않습니다. 이러다간 놓치고… 돈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네가 지금 왕구 걱정을 할 때냐?”

    냉랭한 목소리에 율은 조금 울컥하였다.

    “왕구 형님은, 이락 님의 소중한 동생이 아닙니까.”

    “그럼 넌. 넌 소중하지 않고?”

    율이 당황하여 눈이 커다래졌다.

    “저도… 이락 님께 소중합니까?”

    “뭐?”

    “지금 분명 그렇게,”

    “시끄럽다. 말이 헛나왔어.”

    “…….”

    “넌 사고만 치는 골칫덩어리야.”

    “예… 그렇죠….”

    이락은 더 반응이 없었고 율은 초조하여 손가락을 마주 잡고 꼼지락댔다. 제발 한 번만 다녀오면 안 되느냐고 눈빛으로 애원을 하는데 이락이 고개를 홱 돌려 버린다. 율은 고민 끝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손을 바닥에 짚는 순간 신음이 절로 나왔고 이락의 얼굴은 험상궂게 변했다.

    “뭐 해, 지금?”

    “저라도 다녀오겠습니다…. 걱정돼서 도무지 견디질 못하겠습니다.”

    “하, 오지랖은.”

    “오지랖이 아닙니다…. 왕구 형님이 겉으론 강해 보여도 아이처럼 순진하신 구석이 있습니다. 이락님도 그걸 아시지 않습니까. 사기를 당하여 화는 나시겠지만… 어찌 속은 사람 잘못이겠습니까. 사기를 친 놈들이 나쁜 것이지요….”

    “…….”

    “그러니 제발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율이 머뭇거리면서도 자기 할 말은 다 하자 이락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는데 쳐다보는 눈빛이 아주 살벌하다 못해 누구 하나를 죽이고도 남을 지경이다.

    “어, 어디 가십니까?”

    “데려오라며.”

    율은 반색하면서도 걱정이 되어 물었다.

    “분명 데리러 가시는 거 맞지요? 때려죽이러 가는 것은 아니지요?”

    그 말에 이락이 노려보더니 그대로 방을 나서 버린다. 혼자 남은 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의원과 무어라 말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뒤 정적이 찾아왔다. 율은 자리에 도로 드러누웠다. 얻어맞고 추행을 당하던 기억을 떠올리니 뒤늦게 몸이 떨려 온다. 팔을 감싸고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악몽 같은 기억을 지우고 다른 것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락 님은 왜 거기 계셨을까. 기녀들과 어울려 놀고 계셨을까. 하긴, 이락 님도 사내이니… 그럴 수 있지. 설마… 내가 좋은 시간을 방해하여… 화가 잔뜩 나신 걸까. 아아, 생각해보니 그게 맞는 것 같다.

    마음이 차츰 무겁게 가라앉는다. 아픈 것과는 별개로 서러움이 몰려오는 것 같아 율은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눈을 떴을 때 왕구가 무사히 돌아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방울아! 방울아! 왕구는 헤어진 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운 얼굴로 뛰어왔다. 그러다 율의 상태를 보더니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너, 너 왜 그러냐. 꼴이 왜 이렇게 됐어. 혹시 큰형님한테 맞았냐? 그런 거야?”

    하더니 왕구가 이락을 홱 째려본다. 그걸 본 이락이 헛웃음을 쳤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한테만 지랄이구나. 율은 그런 왕구의 팔을 붙들었다.

    “아닙니다. 어제 좀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 설마… 거기서 누구한테 쥐여 터졌냐? 누가 널 때렸어? 말해 봐라, 응? 큰형님. 형님은 뭘 하셨습니까. 아니, 왜 방울이가 다쳤다는 말은 안 하셨습니까. 어떤 놈이 그랬는지 보셨습니까? 아니다, 방울아. 네가 말해 봐라. 어떤 놈이냐? 말해 봐!”

    당장에라도 쫓아가 죽일 기세였기에 율은 서둘러 대화를 전환했다.

    “귓불에 커다란 점이 있는 자를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오늘 떠난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왕구가 메고 있던 봇짐을 턱 하니 마루에 내려놓는다. 묵직한 소리에 율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놈들을 찾으셨습니까?”

    기쁜 마음에 웃으며 왕구를 보는데 왕구가 미안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율의 손을 붙든다.

    “고맙다…. 다 네 덕분이야.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다치기나 하고…. 내가 면목이 없다.”

    어울리지 않게 눈이 벌게지기에 율은 당황하여 그를 다독였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덕분에 형님 돈을 찾았으니 됐지요. 참, 그놈들은 어찌 됐습니까. 잡았습니까.

    “큰형님과 함께 관아에 넘기고 돌아오는 길이다.”

    “진짜 다행입니다.”

    “이리 와라. 정말 고맙고 미안하니 한번 안아 보자.”

    왕구가 율을 안으려고 하는 순간 이락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더니 뒤로 던져 버린다. 왕구가 벌러덩 나자빠졌고 율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 이락을 올려다봤다. 그는 둘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번갈아 봤다.

    “둘 다 꼴값을 떠는구나.”

    홱 돌아서서 가는 이락의 뒷모습을 보며 율이 당황하여 입만 벙긋댔다. 왕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털며 이락을 돌아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형님, 왜 저러냐? 그놈들을 잡아 관아에 끌고 갈 때도 저리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율은 시무룩하여 대답했다.

    “저 때문입니다….”

    “네가? 왜?”

    “제가 좋은 시간을 방해하여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좋은 시간?”

    율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구가 부축하려 하기에 됐다고, 괜찮다고 마다하는데 기어코 업어 준다며 등을 내민다. 마지못해 업혀서 가는데 저 멀리 이락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멀리서도 열받은 게 느껴져 율은 어제 일을 꼭 사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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