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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56화 (56/102)
  • 56화

    눈이 안 떠진다. 의식은 분명 있는데 눈이 떠지질 않아.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율이 가장 먼저 발견한 건 한쪽에 세워둔 자신의 등껍질이었다.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아 누운 채로 멍하니 있던 율은 뒤늦게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다 허리를 붙들었다. 아이고.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른 뒤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온천에 가서 이락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갑자기 앞이 보이질 않더니 기억이 거기에서 끊겼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혹시 내가 꿈을 꾼 건가. 정말 온천에 간 건 맞을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양물이 속곳에 쓸리자 따끔따끔한 느낌이 든다.

    아… 율은 그제야 그것이 꿈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목이 너무 타들어 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겹게 밖으로 나오니 벌써 해가 중천이다. 대체 여기까지 어찌 온 걸까.

    주위를 둘러보던 율은 뒤뜰에서 나오던 이락과 눈이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랐다. 서둘러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다리가 꼬이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넘어가 마루에 철퍼덕 꼴사납게 넘어진다.

    너무 창피하여 그대로 기절한 척 누워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방금 나를 웃겨 주려고 그런 것이야?”

    율은 민망한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고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락의 얼굴은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평소보다 더 빛이 나고 환했다. 시선을 피하며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이락이 손을 잡아당겨 마루에 앉힌다. 얼결에 옆에 앉았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흰 천에 둘둘 만 것은 전에 먹었던 산삼이다. 이락은 그것의 뿌리 하나를 뜯어서는 율에게 내밀었다.

    “아, 해라.”

    율이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고 있으니 협박을 한다.

    “씹어서 넘겨 줄까?”

    율은 마지못해 입을 벌려 그것을 넣었다. 여전히 적응 안 되는 맛이다. 인상을 쓰니 이락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그것은 구슬만 한 크기의 사탕으로 붉은빛을 띠어 꽤 먹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눈이 사탕에 가 있으니 이락이 웃는다.

    “삼을 다 먹으면 주지.”

    말없이 삼만 씹자 이락이 곁으로 조금 더 붙어 앉는다.

    율은 도망갈 생각을 포기하고 땅바닥만 바라봤다.

    “네가 어제 기절해서 내가 업고 왔다.”

    아…. 꿈이 아니라, 진짜였구나.

    “온몸이 뻐근하다.”

    율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락의 말이 완전히 믿기지는 않는다. 어제는 너무 겁이 나서 살려 달라 매달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의문으로 남은 구석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와 그걸 따져 봤자 말로 이락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오히려 휘말려서 트집이나 잡히겠지. 율은 포기하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진심이냐?”

    “예?”

    “내가 속였다 생각하는 건 아니고?”

    율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흠칫했다. 그러자 이락이 율의 어깨에 머리를 조심스럽게 기대 온다. 슬쩍 피하려 하였으나 그러질 못했고 체격 차이 때문에 몸이 옆으로 기우는 거 같았으나 율은 저도 사내라 자존심이 있어 어떻게든 꿋꿋하게 허리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리 생각해도 할 수 없지. 애초에 난 널 속여서 관군에게 넘기려 한 전적이 있지 않아.”

    “…….”

    “하지만 어제는 정말 널 위한 선택이었다. 네가 사라지면 내 입장이 곤란해지기도 하고, 또.”

    이락이 말을 멈추었고 율은 그를 슬쩍 돌아봤다. 그의 보들보들한 두 귀가 얼굴을 간지럽힌다.

    “속상하기도 하고.”

    조금 전까지 의심하던 게 미안해질 정도로 이락의 얼굴은 정말 슬픈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괜한 의심을 했나. 그래, 여태 나를 놀린 적 많았지만 목숨을 구해 주고 도와준 적도 많지 않았던가. 괜한 의심을 한 것 같아 미안해지려던 율은 조금 의아해졌다.

    “한데… 제가 사라지는 것이 이락 님께 속상한 일입니까?”

    궁금하여서 한 질문인데 이락이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한다.

    “당연하지.”

    “왜요…?”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쿵,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것 같더니 당황스러울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였다. 혹시라도 그것이 들릴까 싶어 율은 조심스럽게 이락을 밀어냈다. 무… 무겁습니다. 이락이 저항 없이 자세를 바로 고쳐 앉으며 웃었다. 율은 얼굴이 화끈거려 괜히 땅바닥만 쳐다봤다.

    “그, 그런 말씀은 여인한테나 하십시오.”

    괜히 투덜거렸는데 이락이 웃는다.

    “왕구나 왕태처럼 좋다는 뜻이었다.”

    아…. 창피함에 율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그러자 이락이 옆에서 짓궂은 표정을 한다. 네 얼굴이 마치 잘 익은 홍시 같구나. 부끄러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이락이 도로 앉히더니 율의 허벅지를 베고는 그대로 드러눕는다. 당황한 율이 이락을 내려다봤다. 반듯한 그의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눈을 뜨고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심장이 또 쿵쿵대어 얼른 다른 곳을 봤다.

    “한숨 잘 테니 이따 깨워.”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너를 살려 줬는데, 다리 하나 빌리는 것도 이리 야박하게 굴어.”

    율은 더는 말하지 않았고 이락도 눈을 감은 채 조용하다. 율의 시선이 이락의 커다란 귀에 가서 닿았다. 솜털처럼 보송보송한 그것이 자꾸만 마음을 사로잡는다. 만지고 싶다는 욕망이 또 꿈틀거리고 올라오기에 잽싸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어둑어둑하다. 그러더니 잠시 뒤 마루 아래 놓여 있던 세숫대야에 무언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는구나.”

    잠든 줄 알았던 이락이 말하였다. 그러더니 잠시 후 솨- 하고 눈앞에서 비가 쏟아진다. 물속에서 보던 비와 물 밖에서 보는 비는 참으로 달랐다. 처마 아래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귓속까지 시원해지는 거 같았다.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율은 소리 없이 웃었다.

    ***

    율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이락이 외출한 틈에 왕구가 율을 한참 떨어진 곳으로 데려왔는데, 넓은 땅에 박이 얼마나 많이 열렸는지 두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박은 전의 것보다 훨씬 크기가 컸다.

    “언제 이렇게 큰 것입니까?”

    “나도 믿기지 않는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커져 있지 뭐냐. 이쯤 키웠으면 금덩이도 꽤 커졌겠지?”

    율은 할 말을 잃었다. 금이 어느 정도 들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그가 마음이 상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율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왕구는 박을 하나 따서 들고는 톱을 가져왔다.

    “방울아. 박을 좀 잡아다오.”

    율이 와서 박을 잡아 고정하자 왕구가 톱질을 시작한다. 슥슥삭삭슥슥삭삭 경쾌한 톱질에 맞춰서 박이 점점 갈라지고 왕구의 얼굴에는 희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일확천금을 곧 손에 쥔 사람처럼 그의 눈빛은 욕망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박을 거의 끝까지 가르자 성질 급한 왕구가 남은 부분은 손으로 쩍하고 벌려 쪼개었다. 어라? 그런데 박이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작은 종이 하나가 들어 있어 율은 그것을 펼쳐 봤다.

    “다음 기회에…?”

    왕구가 눈썹을 구겼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금이 없는 건 확실합니다.”

    왕구가 빈 박을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여기 금이 다 있을 순 없지 않냐. 두고 봐. 전처럼 셋 중에 하난 분명 금이 있을 테니까!”

    그는 호언장담하고 다음 박을 쪼갰다. 어라? 그런데 이번에도 금은 없고 같은 종이가 들어 있다. 흐음, 왕구는 이번에도 괜찮다며 웃음으로 넘어갔고, 또다시 톱질을 하였다. 그런데 세 번째 박에서도 똑같은 종이가 나온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그렇게 갈라진 박이 늘어날수록 왕구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고 초조함이 들어섰다.

    율은 그를 어떻게든 다독이려 했다.

    “박이… 이렇게 많으니… 아직은 두고 봐야지요….”

    “그… 그렇겠지?”

    왕구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남은 박을 톱질했다. 하지만 빈 박만 늘어났고, 금덩이는커녕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왕구의 얼굴이 점점 절망으로 물들었고, 율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나중에는 타들어 가는 마음에 톱 대신 아예 주먹으로 박을 내리쳤는데, 나오는 거라곤 그놈의 ‘다음 기회’ 뿐이었다. 이쯤 되니 왕구는 똥줄이 타들어 갔다. 사실 박씨가 생각보다 비싸 자신의 돈 말고도 공금에 손을 댔는데, 이것을 만약 이락이나 왕태가 알게 되면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왕구는 점점 울상이 되어 갔고 이제 남은 박은 몇 개 없었다. 율은 밭에 잔뜩 널브러진 박들을 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고 왕구는 마지막 박을 깬 다음에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방울아…. 네 말을 들을 것 그랬다….”

    “형님….”

    왕구는 더벅머리를 쥐어뜯었다.

    “큰형님이 알면 날 죽일 거다.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뚝뚝 흘리니 율은 그런 왕구가 딱하여 마음이 쓰였다. 율은 박에서 나온 종이들을 하나둘 모아서 안주머니에 챙긴 다음 왕구를 일으켜 세웠다.

    “혹시 남은 박씨가 있습니까?”

    “글쎄다. 남긴 남았는데, 한주먹이나 될까.”

    “그럼 그거라도 챙기십시오.”

    “무얼 하게?”

    “돈을 돌려받아야지요. 이것은 명백한 사기입니다.”

    “사기?”

    “팥빵을 샀는데 안에 팥이 없으면 그것이 어찌 팥빵입니까…. 상대방이 거짓으로 이득을 취했으니 사기지요….”

    “그… 그러냐?”

    “빨리 일어나십시오…. 이락 님께 들키기 전에 어서 다녀와야 합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왕구가 일어났고, 율은 그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간만에 도포를 갖춰 입고 갓을 썼다. 등껍질을 가져갈까 여러 번 고민하였으나 전처럼 괜한 고초를 겪을까 싶어 그것을 꼭꼭 숨겨 둔 뒤 봇짐만 챙겨 집을 나섰다. 이락이 볼일을 보고 밤에나 온다고 하였으니 그전에 반드시 일을 해결하고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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