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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52화 (52/102)
  • 52화

    죄, 죄송합니다. 제가 차마 이락 님께 갈 수가 없어 무령 님을 이용하였습니다.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데 무령이 하아, 하고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더니 앞에 있는 덩치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덩치가 칼을 휙 뽑아냈다.

    “너는 누구냐. 죽고 싶지 않으면 저리 비켜라.”

    무령이 휙 하고 부채를 휘둘렀다. 그러자 사내가 박장대소하며 비웃었다.

    “뭐 하냐, 지금? 춤이라도 추는,”

    순간 사내의 몸에서 팔이 뚝 떨어졌다. 사내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잘린 팔을 보다가 무령을 쳐다봤다. 또다시 부채를 휘두르자 이번엔 반대편 팔이 잘려 나간다. 동시에 눈앞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고 뒤에서 지켜보던 그의 부하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으아악! 내 팔! 내 팔!”

    사내가 비명을 지르자 부하들이 웅성거렸다.

    “형님. 괜찮소?”

    “괜찮아 보이냐 이 새끼들아! 뭣들 해! 어서 공격하지 않고!”

    하지만 명령이 떨어져도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악을 쓰던 남자가 비틀거리더니 옆으로 픽 쓰러진다. 여전히 팔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무령은 앞으로 나서며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번엔 어느 놈 팔을 베어 줄까 너? 아니면 너? 그래 네가 좋겠구나.”

    무령이 한 놈을 콕 찍어서 가리키니 그놈이 혼비백산하여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친다. 남은 놈들은 무령이 평범한 이가 아니란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그런 자들을 보며 무령은 서늘하게 웃었다.

    “셋을 셀 테니 이 모지리를 데리고 떠나라. 다시 한번 이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너희 사지를 다 끊어 놓을 테니 그런 줄 알고.”

    그제 다들 무기를 내던지고 쓰러진 남자를 챙겨 부리나케 도망을 친다. 그 모습을 보고 무령이 신이 난 듯 깔깔거리고 웃는다. 율은 바닥에 뒹구는 남자의 잘린 양팔을 보며 하얗게 질렸다가 뒤늦게 무령은 쳐다봤다. 무령이 웃음을 뚝 멈추고는 율의 앞으로 스으윽 다가왔다. 율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나다 멈췄다. 어쨌든 무령을 이용하였으니 사과는 하여야 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요?”

    “제가 곤란하게 되어 무령 님을 이용하였습니다….”

    무령이 대답 없이 빤히 쳐다봤고 율은 그가 화를 풀지 않으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그러면 안 됐는데 정말,”

    그러자 무령이 율의 고개를 들게 하여 얼굴을 마주 본다. 그러더니 쯧, 혀를 차고는 율의 뺨에 묻은 눈물을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준다. 사내가 그리 잘 울어서 어찌합니까. 예쁜 눈이 퉁퉁 부었네. 그러다 저고리가 벌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화적 떼가 도망간 곳을 살벌하게 노려본다. 내 저 새끼들을 쫓아가서 그냥 확!

    놔두면 정말 목숨을 끊어 놓을 기세라 율은 그의 팔을 붙들고는 말렸다.

    “두, 두십시오. 이미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율이 말리기에 한풀 누그러진 무령은 한숨을 내쉬고는 율의 저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을 단정하게 매 주는데 매듭이 신기하였다.

    “호국에서만 사용하는 매듭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잘 풀리질 않으니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겠지요.”

    “아….”

    “근데 어찌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예?”

    “보아하니 저놈들이 이락을 찾는 거 같은데, 이곳으로 데려온 걸 보니 아무래도 선비님 마음에 나보단 이락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나 봅니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락 님이 아무리 호랑이를 때려잡는 분이라도, 저렇게 많은 자를 당해 낼 재간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무령 님께 온 것입니다. 무령 님이라면… 해결을 해 주실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자 무령이 어깨를 다독이며 피식 웃는다.

    “아닙니다. 잘했습니다. 저놈들은 이락에게 데려갔다면 팔 하나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면 그놈 업보만 또 쌓일 테고, 계속하여 이곳에 눌러앉겠지요. 그럼 나만 열받는 거지요.”

    업보는 또 무슨 말이고 눌러앉는 건 또 무슨 말인가. 영문을 몰라 쳐다보니 무령이 율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된 거 우리 집에 가서 차나 한잔합시다. 율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거두었다.

    “그게…. 제가 빨래를 하다 와서… 얼른 가 봐야 합니다.”

    무령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락이 놈이 그런 것도 시킵니까?”

    “제, 제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락 님께 받은 은혜가 많아서요.”

    그래도 그렇지. 무령은 율의 손을 잡고는 조몰락거렸다. 이 여린 손으로 그런 궂은일을 시키다니. 그 정도 살았으면 자기 빨래 정도는 스스로 해 입을 줄 알아야지. 하여튼 그놈은 정신을 차리려면 멀었다니까. 율은 슬그머니 손을 빼내었다.

    “아, 아무튼 오늘 감사합니다.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약속합니다.”

    구미호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 말 참입니까?”

    “예?”

    “은혜를 갚겠다 약속한 것 말입니다. 참입니까?”

    “그, 그럼요….”

    “여우에게 약속하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예, 그럼요.”

    율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였고, 무령은 의미심장하게 웃다가 율의 팔을 붙들었다.

    “요즘 몸은 좀 어떻습니까? 지금쯤이면 구슬의 효력도 거의 사라졌을 텐데.”

    율은 입을 달싹였다. 이락이 대신 넣어 줬다고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곤란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 무령이 눈을 가늘게 늘이고는 율의 가슴과 복부 쪽을 유심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무엇 때문인지 하, 하고 기가 찬 듯 웃고는 이를 빠득 갈면서 ‘망할 무당 계집’이라고 욕을 내뱉는다.

    율은 뜨끔하였다. 혹시 이락과 자신이 그런 짓을 한 것을 알아챈 걸까. 괜히 찔려서 시선을 피하는데 무령이 율의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게 한다. 그의 금색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최면에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뭐래도 구슬 주인이 직접 기를 넣는 것이 효력이 좋습니다.”

    “그, 그렇지만….”

    “아니면 다른 이한테 받기라도 하신 겁니까?”

    율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닙니다!

    그러자 무령이 씩 웃더니 순식간에 율의 입술을 가볍게 훔쳐 문다. 율이 놀라 벗어나려고 하자 뒤통수를 잡더니 꾹 누른다. 스윽하고 무언가 목구멍 안으로 따듯한 것이 들어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입술이 떨어졌고 무령의 금안의 색이 조금 짙어진 게 느껴졌다.

    율은 당황하여 빨개진 얼굴로 말을 버벅거렸다.

    “아, 그, 제가 분명, 거절을, 그러니까, 저는,”

    “기를 넣어 주려 한 것뿐입니다. 의미를 두지 마십시오.”

    비슷한 이야기를 이락도 했었다. 아니, 육지인들은 원래 입맞춤이란 것을 이리 아무렇지도 않게 한단 말인가. 그것도 같은 수컷끼리. 율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무령이 데려다준다며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는다. 율은 얼른 그에게서 벗어나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허리가 꺾어지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서 왔던 길로 도망치듯 뛰어간다. 꽁무니가 빠지게 뛰어가는 율을 보며 무령은 큭 하고 웃다가 제 아랫입술을 혀로 슥 핥았다. 그러다 웃었다.

    “이락이 욕심을 낼 만하네.”

    ***

    율은 숨이 차도록 달리고 멈추기를 반복하며 한 번씩 화적 떼가 저를 쫓아오는 건 아닐까 확인하였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겨우 도착하여 저 멀리 집이 보이는데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율은 경계심을 갖고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뒤늦게 그를 알아보고 율은 반가운 마음에 ‘형님!’ 하고 부르며 뛰쳐나갔다. 왕구는 부리나케 달려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방울아. 너 어디 갔다 왔어? 네가 갑자기 없어져서 난리가 났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빨리 오셨습니까? 박씨는요? 구하신 겁니까?”

    왕구는 어…. 하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율을 끌고는 집으로 향하였다. 일단 가자. 큰형님이 너를 찾고 난리가 났다.

    “저를요? 왜…?”

    기녀와 그의 하인은 돌아간 걸까. 왕구에게 묻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했다. 그러다 율은 뒤늦게 빨래터에 놓아 둔 빨래가 떠올랐다. 세상에. 이락 님 옷이 다 거기 있는데. 잠시만요, 형님! 율은 부리나케 집이 아닌 빨래터 방향으로 뛰어갔다.

    “방울아! 어디가!”

    잠시 빨래터에 다녀오겠습니다! 소리를 지르고는 빨래터로 달려가 보니 바구니와 옷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휴, 다행이다. 이걸 잊어버렸으면 아마도 이락에게 어마어마하게 갈굼을 당했을 것이다. 마음을 쓸어내리며 빨래를 담고 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왕구인 줄 알고 율은 몸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형님, 제가 빨래를,”

    아…. 그런데 왕구가 아닌 이락이다. 그의 표정이 어딘가 굉장히 언짢아 보인다. 율은 들고 있던 빨래를 등 뒤로 감추었다.

    “제, 제가 빨래를 하기 싫어 도망간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새가 갑자기 날아와서….”

    노려보던 이락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율의 옷고름에 닿았다. 율은 계속하여 빨래하다 사라진 이유에 대해 변명을 늘어놨다. 물론, 화적 떼와 무령 이야기는 빼고.

    이락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고 율은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그가 저고리 고름을 허락도 없이 확 당겨 풀어 버린다. 놀라서 이락의 얼굴을 올려 본 순간 그가 눈빛을 서늘하게 번뜩이더니 홱 돌아섰다.

    “가자. 너 때문에 밥도 굶고 배고파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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