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이락은 소월이 내민 밀서를 읽어 내려갔다. 밀서를 보내 온 이는 다름 아닌 병조 판서였다. 이락도 그를 알고 있었다. 그는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고 있었는데 딸은 삼간택에 탈락해 후궁으로 들어가 몇 년 뒤 아들을 낳았다.
거기에다 몇 해 전 중전이 후사도 없이 사망하게 되면서 모두 병조 판서의 딸이 중전의 자리에 오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궁궐 연못에 커다란 연꽃이 피었고, 그 연꽃 안에서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나면서 병조 판서의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여인을 보고 첫눈에 반한 왕은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려 했고 당연히 신하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그러다 그녀가 아비의 눈을 뜨게 하려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 낭자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세가 역전된다.
효를 근본으로 삼는 인간 세상에서 그녀의 존재는 백성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였고, 대신들도 더는 명분을 만들지 못하고 왕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눈엣가시 같던 중전이 최근 임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아이가 없을 때야 크게 방해될 게 없었지만, 만약 중전이 아들을 낳게 된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기다 최근엔 반대편 대신들이 보란 듯 중전의 편에 서지 않았나. 그래서 병조 판서를 중심으로 다른 대신들은 중전을 끌어내리고 병조 판서의 딸을 그 자리에 앉힐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연유는?”
“아시지 않습니까. 이화 상단의 행수와 친분이 깊으니 자금줄을 좀 대어 달라 부탁을 하려는 것이겠지요. 병판께서 사람을 몇 번이나 보냈는데, 퇴짜를 맞으셨답니다. 얼굴도 보여 주질 않으니 지금 똥줄이 타서 저를 보낸 게 아니겠습니까.”
“자금줄이라….”
이락이 생각하는 사이 소월이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춘다.
“그런데 아까 그 선비는 누굽니까.”
“그건 왜 물어.”
“객이라는데 어디에서 왔습니까.”
“알 것 없다.”
“스물도 안 되었지요? 얼굴이 많이 어려 보였습니다.”
“궁금한 것도 많구나.”
이락이 빈틈없이 쳐 내자 소월이 눈을 접어 웃는다.
“마음에 들어 그럽니다. 얼굴이 뽀얗고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사람 마음을 홀리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이락이 피식 웃었다.
“관심 꺼라. 네 짝은 아니다.”
“그럼 임자가 있습니까?”
“응.”
소월이 실망한 듯 입을 삐죽 내밀었고, 이락은 밀서를 다시 확인하였다. 만약 일을 도모하는 데 힘을 보태 준다면 궁궐에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내용이다. 이락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100년 전인가 그때도 이런 비슷한 인간이 하나 있었지. 결국은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였고. 세월이 흘러도 인간의 욕심이란 건 변하지 않는구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소월이 은밀하게 물어 온다. 그녀는 병조 판서의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방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그녀를 통해 병조 판서에게 전해지기도 하였다. 이락은 흐음, 하고 침음을 삼켰다. 중전을 끌어내린다? 물론 중전이 바뀐다고 하여도 달라질 건 없다. 이락의 삶에 미치는 영향 따위는 없을 테니까. 누가 되든 상관없지 않은가. 그저 내게 이익이 되면 그만일 뿐.
“고민해 보마.”
***
퍽퍽, 빨래를 두들기던 율은 잠시 넋을 놓고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말과 기생의 하인이 대문 밖에 서 있었다. 벌써 꽤 시간이 흐른 거 같은데 무얼 그리 할 이야기가 많다고…. 아니, 어쩌면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지. 이락은 처음 만났을 때도 훤한 대낮에 여인과 교접을 하고 있었지 않은가.
당시 그가 토끼란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날 바로 바다로 튀었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잠시 지난 기억을 더듬는데 갑자기 끼이- 하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들자 커다랗고 까만 새 한 마리가 하강하여 눈앞에 있던 젖은 빨래를 낚아챘다. 놀라서 그것을 붙들려고 하였으나 한발 늦었고 새는 유유히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당황한 율은 개울을 건너 그 새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그걸 돌려주시오!”
있는 힘껏 뛰어가며 소리를 질러도 새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숨이 찰 정도로 뛰다 보니 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율은 허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어디지? 둘러보니 바다로 돌아갈 때 지나쳤던 길이다.
세상에. 꽤 멀리까지 왔구나. 율은 절망하여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후우, 얼마나 힘차게 뛰었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땀을 닦아 내고 있는데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처음엔 이락의 수하인가 싶어 그들을 기다리다 보니 행색이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수인이 아닌 인간이 대부분이다. 혹여 마주치면 곤란한 일이 생길까 싶어 율은 자리를 피하려고 일어섰다.
그런데 그때 무언가 홱 하고 날아온다. 놀란 율은 얼음처럼 굳었다. 날아온 것은 단검이었는데 옆에 있던 나무에 단단하게 박혀 버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고개를 돌리자 멀리 있던 사내 중 하나가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잽싸게 도망가려 하였으나 목덜미를 붙들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 여기서 또 만나네?”
율은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귀에 붕대를 감고 있었으며 얼굴이 매우 험악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하지만 율은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누, 누구십니까? 놓아주십시오! 사람을 잘 못 보셨습니다!”
“나를 몰라? 하긴 나가떨어질 정도로 취했으니까, 기억을 못 하겠지.”
남자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율은 주막에서 취해 있는 것을 이락이 업고 온 날을 떠올렸다. 주막에서 이 남자를 만난 적이 있던가.
“어딨어?”
“뭘… 말입니까?”
“그날 너와 있던 토끼 놈 말이다.”
“…….”
“놈이 있는 곳만 불어. 그럼 네 목숨은 살려 줄 테니.”
“…….”
“아니면 네놈 양쪽 귀를 자르고 눈알을 파내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다.”
섬뜩한 경고에 율은 입술이 달달 떨려 왔다. 침을 꿀꺽 삼키고 뒤를 보니 남자의 패거리들이 모두 무기 하나씩을 들고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다. 최근에 화적 떼가 금산 주변까지 침범하여 넘어온다고 하더니, 혹시 이들이 왕구가 말한 화적 떼인가.
남자는 칼끝으로 율의 뺨을 툭, 건드렸다.
“아니면 지금 여기서 네놈 구멍 맛을 볼까?”
그러고선 뒤를 돌아 패거리들을 향하여 웃으며 묻는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이놈 정도면 구미가 당기지 않아? 다들 좋다고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다. 율은 겁에 질려 숨이 턱 막히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한다. 육지 속담에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하였지. 그래, 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이락도 속여서 용궁으로 데려가지 않았던가.
“어떠냐? 다들 좋다는데, 여기서 한번 즐기고 가?”
남자가 칼끝으로 율의 저고리 아래를 슥 끌어 올린다. 율은 흠칫하여 뒤로 한 발 물러섰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토… 토끼가 있는 곳을 압니다. 이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남자의 얼굴이 확 바뀐다. 그래?
“예…. 그러니 부디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당장 그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남자가 웃으며 율에게 살벌하게 경고했다.
“만약 수작질을 부리는 거면 관둬라. 그땐 정말 피를 보게 될 것이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기어코 눈물이 아래로 한 방울 툭 떨어진다. 그걸 보며 남자가 키득거리고 웃었다. 얘 봐라. 그것 협박 한번 했다고 질질 짜는구나. 혹시 오줌도 지린 거 아니냐? 놀리는 소리에 율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어서 안내해라. 토끼 놈에게로.”
율은 천천히 숲 사이로 들어갔다. 패거리 역시 율을 따라왔다. 자기들끼리 키득거리고 음탕한 농담을 지껄이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율은 입술을 바싹 깨물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을 꾹 말아쥐고는 계속하여 길을 걸어갔다. 한참을 걷고 또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고 율은 그곳에서 멈춰 섰다. 그러자 덩치 큰 남자가 다가와서는 주위를 둘러본다.
“뭐야. 왜 갑자기 멈춰.”
“제, 제가 모셔 오겠습니다….”
“뭐?”
“여기서 부르면 바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남자가 율의 등 뒤로 칼끝을 겨누었다.
“무슨 수작이냐. 여긴 집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잖아.”
“진짭니다…. 믿어 주십시오….”
남자가 험악한 표정을 하더니 칼을 겨눈 채로 턱짓을 했다.
“불러라. 그럼. 만약 바로 나타나지 않으면 네 놈 창자를 끊어 놓겠어.”
율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무령 님! 그 소리가 산속에 울려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또다시 무령 님! 하고 부르니 이번엔 나무에서 잠자코 있던 새들이 푸드득 날아오르고 작은 짐승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져 사라진다. 또다시 무령 님! 하고 불렀으나 아무도 나타나질 않는다. 남자는 인상을 와락 구기고서는 율의 상투를 비틀었다.
“깜찍하게도 날 속였구나.”
아악. 율은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곧 나타나실 겁니다!”
흥. 누가 더 속을 줄 알고. 남자가 율을 뒤쪽으로 홱 던졌다. 날아간 율이 화적 떼 사이로 떨어지자 그가 돌아보며 섬뜩하게 웃었다. 그놈을 끌고 가서 너희들 입맛대로 처리해라. 내가 보니 그놈 속살이 웬만한 계집보다 부드러울 것 같구나.
화적 떼 중 하나가 입맛을 다시며 율의 팔을 비틀고는 저고리를 확 젖혔다. 노, 놓으십시오! 율이 울면서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주변으로 뿌연 안개가 생겨난다. 화적 떼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이 안개 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부채를 든 무령이었는데, 그는 율을 보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선비님. 나를 부르기에 반갑게 마중을 나왔는데….”
그는 말을 멈추었고 뒤에 있는 패거리를 보며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어찌하여 인간만도 못한 것들을 데려왔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