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저녁을 먹은 뒤 율은 소화도 시킬 겸 집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오늘따라 달이 유독 환하고 밝다. 잠시 손을 모으고 달님에게 기도한 뒤 집 쪽으로 총총총 걸어갔다. 이락은 일찍 잠이 들었는지 방에 불이 꺼져 있고 왕구와 왕태는 마당에서 커다란 궤짝을 여러 개 펴 놓고 씨름 중이었다.
“방울아. 몸은 이제 괜찮은 거냐?”
“예. 한숨 자고 나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다. 그럼 얼른 들어가서 더 쉬어라.”
예. 안녕히 주무십시오. 인사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등 뒤에서 왕구 왕태가 투닥거린다. 율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무엇을 하고 계신 겁니까?”
“오늘 들어온 물건들을 정리 중이다. 장부에 적어야 하는데 같은 것이 많아 헷갈리지 뭐냐.”
율은 왕태가 적고 있던 장부를 힐긋 봤다.
“혹시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왕구가 거절하려고 하니 왕태가 선뜻 반기어 나선다.
“그럴래? 이놈하고 나하고 둘이 이걸 하면 밤을 새울 것이다.”
“형님이 잘하면 그럴 일 없수.”
“지금 숫자 틀린 것이 내 탓이라는 거냐?”
그만 싸우십시오. 분위기가 험악해지길래 율은 둘을 떨어트려 놓고 사이에 가서 앉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글자가 삐뚤빼뚤 엉망진창에다 목록이 같은 것을 몇 번이나 다시 적어서 헷갈리게 만들어 놨다. 율은 일단 목록을 차례대로 적고 그 옆에다 작대기를 그어 수량을 표시하였다.
“이렇게 작대기 다섯 개가 모이면 한 묶음으로 치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두 개 있으면 열 개입니다.”
“아아, 이제 생각났다. 전에 형님이 똑같은 방법을 가르쳐 준 것 같다.”
율이 웃었다. 율은 그러고 나서 왕구에게 틀린 글자도 알려 줬다. 이것은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 다시 알려 주니 왕구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다. 어쩐지. 글자가 이상하다 했어. 형님이 알려 줄 때는 분명 이것이 아니었거든.
“두 분은… 이락 님께 글을 배우셨습니까?”
그 말에 왕태가 웃는다.
“그래. 어릴 때부터 배웠는데, 둘 다 몸 쓰는 데만 타고났지. 머리 쓰는 건 영 아니라 아직까지 헷갈린다.”
“그래도 형님보단 내가 낫지 않수.”
“도토리 키 재기다 이놈아.”
“도토리요?”
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궁금해하니 왕태가 도토리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참나무에 달리는 열매로 다람쥐가 아주 좋아하는데, 묵을 쒀서 먹어도 맛있다고. 묵이란 것을 율도 먹어 봤기에 눈을 반짝이며 흥미로워했다. 그것이 열매로 만든 것이었군요.
그러자 왕태는 신이 나서는 잠시 기다리라며 창고로 간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바구니에 여러 개의 열매를 담아 가지고 왔다.
“작년 가을 수확하고 남은 것들이 몇 개 있는데, 이것이 도토리다. 어때?”
율은 그가 준 도토리를 손으로 만져 보고는 웃었다.
“귀엽습니다. 꼭 모자를 쓴 사람의 얼굴 같습니다.”
“그래도 네가 더 귀엽다. 크크.”
율도 같이 웃었다.
이번엔 왕구가 다른 걸 준다. 도토리보다 컸고 자세히 보니 옆에 구멍이 뚫렸다.
“그건 밤이라고 하지. 쪄 먹어도 맛있고 구워 먹어도 맛있어.”
신기하여 자세히 살펴보는데 뚫린 구멍에서 애벌레가 꿈틀거리고 나오다가 다시 기어들어 간다. 귀여워. 율은 웃으며 밤을 조심스럽게 바구니에 다시 넣어 놨다. 이번엔 왕구가 또 다른 걸 건네준다. 이것도 봐라. 아무 생각 없이 받아서 든 율의 얼굴에서 순간 웃음기가 확 사라졌다.
“이, 이것은…!”
“먹어 볼래?”
으악, 하고 그것을 집어 던지니 날아간 것을 왕태가 탁 잡아챈다.
율은 얼어붙어서 입만 벙긋거렸다.
“방금… 그것은…!”
왕태가 손에 쥔 것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했다. 이것이 그리 끔찍하게 생겼나. 하긴, 모양만 보면 영 껄끄럽게 생기긴 하였지. 그러더니 그걸 입에 넣는다. 잠시 후 빠직 소리와 함께 왕태가 손에다 껍질을 뱉어 내더니 그 사이에서 미색의 덩어리를 골라 입에 쏙 집어넣는다.
[고환을 가르면 씨물이 나올 거다. 그걸 달여서 용왕에게 먹여라.]
율은 경악하여 입을 틀어막았다.
“뱉으십시오!”
왕태가 맛나게 아작아작 먹더니 남은 하나를 집어 율에게 건넨다.
율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싫습니다!”
“왜?”
“비위에… 맞지 않습니다.”
“아쉽구나. 직접 먹어 보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방, 방금 드신 것은, 누구의 것입니까? 형님 것입니까?”
“당연하지.”
율은 입을 쩍 벌렸다. 그럼 자기 고환을 직접 먹은 건가. 세상에 아무리 그것이 몸에 좋다고는 하지만….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왕태가 하나를 더 꺼낸다. 율은 허, 하고 소리를 냈다.
“그것은 또 누구의 것입니까?”
“이것도 내 것이지.”
그러더니 이번엔 손으로 으깬다. 빠직 소리와 함께 껍질이 깨지고 안에서 또다시 씨물 덩어리가 나왔다. 이번에도 먹으라고 권하길래 율은 고개를 있는 힘껏 저었다.
“저는 남의 고환을 먹고 싶진 않습니다!”
고환? 그 말에 왕태가 의아하게 쳐다보더니 왕구와 시선을 교환한다. 둘은 뒤늦게 율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푸하하하 배를 잡고 뒹굴었다. 그 반응에 율은 오히려 더 당황하였다.
“세상에 이렇게 순진할 수가. 아무리 비슷하다 해도 어찌 호두와 불알을 헷갈릴 수가 있느냐.”
“그것이… 무엇입니까?”
율은 깨진 껍질과 미색의 알맹이를 쳐다봤다. 호두… 호두…? 곰곰이 생각하니 서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 고뿔에 걸려 심한 기침을 할 때 호두 기름이 치료를 도와준다고 쓰여 있었지. 그러면….
“이것이 호두다, 호두! 나무에서 나는 열매지!”
왕태가 조금 전 으깬 호두를 들고선 박장대소한다.
율은 한 대 맞은 표정을 하고 고개를 홱 돌려 어두컴컴하게 불이 꺼진 이락의 방을 쳐다봤다.
“아….”
넋이 나가 입을 벌리고 있으니 왕구가 덩어리 하나를 집어 율의 입에 넣어 준다.
“어떠냐? 고소하지? 이 뒤에 커다란 호두나무가 있는데, 입에 맞으면 돌아갈 때 잔뜩 싸 주마.”
율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혼이 반쯤 나가 있었다. 그럼 그것이 고환이 아니었단 말인가. 어찌 그리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을 할 수가 있지. 그럼 용왕은 어찌 되시는 건가. 드셨을까. 드시면 낫기는 하는 걸까. 정말 용왕이 죽기를 바라는 걸까. 기진은 모든 걸 알고 있을까.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안색을 보고 왕구가 걱정했다.
“왜. 힘드냐? 들어가서 쉴래?”
율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락이 나온다.
“형님 주무신 게 아니었습니까?”
왕구의 물음에 이락이 툇돌에 놓인 신을 신으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피곤하여 온천에 다녀와야겠다.”
“지금요?”
“응.”
왕구가 후다닥 가더니 등불을 하나 켜서는 내온다. 이락은 주로 이른 새벽에 온천에 다녀왔는데 밤에 가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율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금 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왕태가 신이 나서 조금 전 일을 떠든다.
“형님, 방울이가 얼마나 순진하신 줄 아십니까.”
이락이 율을 쳐다보자 왕태가 설명을 이어갔다.
“글쎄, 호두를 보고 불알인 줄 알고 놀라지 뭡니까. 푸하하하.”
율은 입을 꾹 다물고 양 주먹을 말아쥐고는 눈빛으로 화르르 불태우며 이락을 쳐다봤다.
그러자 이락이 싱긋 웃는다.
“그럴 수 있다. 나도 가끔 헷갈리니.”
형님도 말입니까? 왕구와 왕태가 자지러지게 웃는데 율은 속으로 울분을 삭여야 했다. 때마침 이락이 등을 들고 대문을 나선다. 율은 평상에서 내려와 신을 신고는 그 뒤를 쪼르르 쫓아갔다.
“방울아, 어디를 가느냐?”
“이락 님을 모시고 온천에 다녀오겠습니다!”
작은 불빛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왕태가 웃었다.
“아무래도 큰형님이 쥐방울에게 장난을 치신 듯하다.”
“나도 눈치챘수. 저러니 애가 화병이 생기지.”
둘은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고 웃었다. 그러다 왕구가 무심코 한마디 내뱉었다.
“근데, 요즘 큰형님이 달라진 것 같지 않수?”
“왜?”
“세상 따분한 얼굴로 지내더니 부쩍 웃는 날이 많아졌어.”
“네가 느끼기에도 그러냐?”
“거기다 기방도 발길을 뚝 끊고.”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말없이 물건들만 정리하던 중 왕구가 다시 말을 꺼냈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우?”
“뭘.”
“쥐방울이 우리 식구로 사는 것 말이오.”
“헛된 꿈 꾸지 마라. 저 애도 가족이 있는데 여기서 어찌 살겠어.”
하긴. 왕구는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쥐방울은 바다에 가족이 있으니 그들이 그립겠지. 자신이 어릴 적 잃은 부모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것처럼. 잠시 옛 생각을 하던 왕구는 숫자의 표기를 잘못한 걸 깨닫고는 머리를 쿵 쥐어박았다.
“으이구, 이 등신.”
하고 나서 율이 알려 준 대로 다시 고쳤다.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밖을 보니 둘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