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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43화 (43/102)
  • 43화

    가족들을 보고 나니 기진의 안부도 궁금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탁한 건데, 하루에 세 명밖에 볼 수가 없다니…. 아, 율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거짓말]

    율은 흠칫했다. 방에는 이락과 저만 있는데 이건 어디서 나는 소리람.

    [이락이 거짓말을 한다!]

    뒤늦게 그것이 경대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율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이, 이락 님 경, 경대가 방금 말을 했습니다!”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떠는데 이락이 경대 위에 손을 얹고서는 힘을 꽉 준다. 마치 입 닥치지 않으면 부숴 버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말도 하고, 원하는 것도 보여 주고, 때에 따라선 네 마음도 들여다볼 수 있지.”

    “제… 마음이요?”

    “그래. 너도 모르는 네 마음이 있을 거 아니냐.”

    율은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건 없습니다.

    “그래, 그럼. 네 마음은 됐고, 가족들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 이것을 쓰게 허락하마.”

    “진심… 입니까?”

    “대신,”

    “……?”

    “나를 그만 피해라.”

    “아…….”

    “네가 며칠째 나를 피하니 견딜 수가 없다.”

    율은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뭐지. 왜 또 심장이 발작하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덴 것처럼 뜨거워져 괜히 말을 버벅거렸다.

    “그, 그리 신경 쓰이셨습니까?”

    “당연하지 않아? 부려 먹어야 할 놈이 도망만 다니는데, 어찌 신경이 쓰이질 않고 배기겠어.”

    아, 그런 뜻이구나. 율은 머쓱하여 목을 긁적였다. 화가 났던 것도 사실이고, 처음에 그래서 피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꾸만 그날 일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이상해지고 기분도 이상해지고 몸도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것 때문에 더 이락을 볼 수가 없었다.

    율은 괜히 제 마음을 들킬까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약속했다. 이젠 나를 피하지 않기로?”

    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락이 옅게 웃는다. 그러다 율은 경대를 다시 쳐다봤다. 이락은 참으로 신기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구나. 저런 것들은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율은 그가 토끼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어디에서 왔고, 몇 살이며, 가족은 있는지 그런 것들.

    “내게 더 물을 것이 남아 있어?”

    이번에 율은 이락을 응시하였다. 궁금한 것은 많았다. 달포면 저는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전하의 병이 낫기는 하는 겁니까? 혹여, 기진 마마와 다른 계약을 맺으신 겁니까? 그러나 그는 어느 것 하나도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없습니다.”

    “거짓말.”

    “어차피 물어도… 제게 솔직히 말씀해 주실 생각은 없지 않습니까.”

    “응.”

    율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것 보십시오. 이락의 시선이 그런 율의 얼굴에 닿았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나중엔 손가락에 가서 닿는다. 빨갛게 된 왼쪽 중지를 발견하고는 이락은 미간을 찡그렸다.

    “왼손은 왜 그리됐어?”

    “빨래하다가… 방망이로 손을 두드렸습니다.”

    “빨랫감이 모자랐느냐?”

    그거야…. 율은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일을 잊으려 정신없이 방망이질하다가 손가락까지 두드렸다고 어찌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어디 보자며 손을 만지려 하기에 율은 뒤로 얼른 숨기었다.

    “괜, 괜찮습니다.”

    “뼈가 부러졌는지 봐야 할 것 아니야.”

    “멀쩡합니다….”

    “네가 의원이라도 돼?”

    이락이 고집을 피우기에 율은 왼손을 치켜들고 가운뎃손가락만 펴서 내보였다.

    “이것 보십시오. 멀쩡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락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그만해라.”

    “예?”

    “네가 손가락을 세우고 있으니, 묘하게 기분이 언짢다.”

    “어째서요…?”

    “내게 욕을 하는 것 같달까?”

    예에? 아니 이게 무슨 욕이라고…. 율은 대수롭지 않게 가운뎃손가락을 이락에게 흔들었다. 그러자 이락이 더 찡그린다. 하지 마. 진짜 기분 이상해지려고 하니까. 율은 하는 수 없이 손가락을 접었다. 그러다 이락에게 손이 붙들려 끌려갔다. 이락은 율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꾹꾹 누르고 아픈지를 묻는다. 조금 아프긴 하였으나 그것뿐이었다.

    “정말이네. 괜찮네.”

    “그것 보십시오….”

    슬그머니 손을 빼려고 하는데 이락이 쥐고 안 놓아준다. 율은 당황하여 팔에 힘을 줬다. 그러자 이락이 다시 잡아당기고 손바닥을 위로 오게 하여 또 주물러 댄다.

    “손금을 봐 줄까?”

    난데없이 무슨. 율은 고개를 저었다. 괜, 괜찮습니다. 저는 그런 걸 믿지 않습니다. 기어코 손을 빼내서는 뒤로 숨기니 이락이 턱을 치켜들고 뭔가 못마땅하게 쳐다본다. 율은 괜히 신경이 쓰여 시선을 피하였다.

    때마침 밖이 시끄럽더니 문이 벌컥 열리면서 왕구가 얼굴을 들이민다.

    “큰형님!”

    다급한 목소리에 율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손님이, 손님이 찾아왔는데, 그것이!”

    왕구는 말을 잇지 못하였고 문밖에서는 다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적이면서도 습한 목소리. 며칠 전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지만 율은 그것이 누구의 목소린지 알아챘다. 이락 역시 알았는지 얼굴이 굳어져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락과 함께 밖으로 나온 율은 눈앞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꽃으로 둘러싸인 비현실적으로 화려한 가마를 타고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무령이었다.

    구미호가 왜 여기까지….

    무령은 무사와 수하들을 여럿 거느리고 등장하였는데, 그 수가 꽤 많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임금이 행차한 줄 알았을 것이다. 이락은 아래로 내려가 손님을 맞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기둥에 기대서 무령을 짜증 섞인 표정으로 응시하였다.

    “귀한 몸이 여기까진 어인 일로 왔을까.”

    “사는 것이 궁금하여 한번 들렀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누추하구나. 내 집 뒷간만도 못하니 원.”

    그 말에 왕구와 왕태가 발끈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상대가 범상치 않다는 걸 알았는지 함부로 달려들지는 못하였다. 이락은 몸을 바로 세웠다. 무령이 이곳에 온 속내가 뻔히 보여 쫓아내려고 하는데 무령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율에게 먼저 다가가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선비님. 얼굴이 왜 이럽니까? 며칠 새 수척해졌네. 하, 속상해라.”

    율이 당황하여 말을 얼버무렸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보이는 그와 가마, 그리고 수하들의 모습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이락을 봤는데 그가 심기 불편함을 그대로 내비친다.

    “수작 부리지 말고 용건을 말해.”

    “경계하지 마라. 내가 찾아온 이유는 선비님 때문이니.”

    “저요?”

    “선비의 배 속에 넣은 구슬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효력도 떨어져 기를 넣어 줘야 합니다.”

    이락이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

    “거짓말 아니다. 그날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예전 일을 꺼내는 바람에 화가 나서 잠시 잊어버렸지 뭐냐.”

    예전일?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율이 궁금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무령이 슬프게 웃는다.

    “별것 아닙니다, 선비님. 이락이 제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연인을 심심풀이로 빼앗아 갔거든요. 그래서 제가 마음 앓이를 심하게 하였지 뭡니까.”

    율이 경악하는 표정으로 이락을 쳐다봤다. 이락 님, 그 정도로 쓰레기셨습니까? 그 눈빛을 본 이락의 미간이 구겨졌다. 왜 그러고 쳐다봐? 하지만 무령은 그치지 않고 율을 향해 조금 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어찌 뜻대로 된답니까. 이미 오래전 일이라 저는 앙금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락이 그 일로 저를 피하는 듯하여, 오래된 벗으로서 마음이 아플 뿐이지요.”

    무령은 이락을 보면서 산뜻하게 웃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더 이어갈까? 아니면 지금이라 내 할 일을 하고 떠날까?”

    노려보던 이락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물러나자 무령이 스르르 율에게로 갔다. 이리 오십시오. 선비님. 하고 손짓을 하였고 율은 자세를 낮춰 긴장된 얼굴로 마루에 앉았다. 기를 넣는 것은 어찌 하는 거지. 다시 구슬을 빼야 하나.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나.

    조금은 두렵고 복잡한 얼굴로 눈동자만 움직이는데 무령이 율의 턱을 가볍게 쥐고 눈을 맞추더니 슬쩍 웃는다. 그러더니 입술이 가까워진다. 어어, 이건 너무 가까운데. 이렇게 가까이 기를 넣어야 하나? 왕구도 이상했는지 입으로 어? 하고 소리를 낸다. 그리고 무령의 입술이 바로 닿기 직전 커다란 손이 무령의 얼굴을 탁 쥐어서 막아 버린다.

    “그만.”

    그러더니 뒤로 밀어 무령을 떼어 낸다. 무령이 조금 전 이락의 손이 닿았던 얼굴을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털어냈다.

    “어째서 막아?”

    “기를 넣으라고 했지, 누가 입을 맞추라고 했어?”

    “이래야 기가 들어간다. 아니 그러냐?”

    무령이 뒤에 있던 수하에게 물으니 수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렇습니다. 하, 씨발. 이락은 코웃음을 치며 욕을 내뱉고는 율을 쳐다봤다. 율은 귀와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그걸 본 이락은 서슬 퍼런 표정으로 무령을 쳐다보며 일갈했다.

    “너 가.”

    “왜.”

    “기를 넣든 다른 걸 넣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

    “네가 무슨 재주로?”

    “너보단 잘할 수 있으니 꺼져라.”

    “후회할 짓 하지 마라. 율이 너 때문에 위험해질 수도 있다.”

    무령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이락이 살벌하게 웃었다.

    “짜증 나게 말을 반복하게 만드는구나.”

    왕태야. 검을 가져와라. 이락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태가 망설일 것도 없이 장검을 꺼내 이락에게 던진다. 탁, 그것을 잡은 이락이 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이 빛을 받아 번뜩였다.

    “다섯을 셀 동안 나가지 않으면 네가 타고 온 가마를 상여로 만들어 주지.”

    뒀다간 정말 칼부림을 치를 기세다. 율은 왕구와 왕태를 향해 말리라고 눈짓으로 애원을 했다. 보다 못한 왕태가 말리려고 하는데 무령이 먼저 웃으며 양손을 들어 항복의 뜻을 표시한다.

    “좋아.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그가 가마에 올라타자 수하들이 가마를 든다. 부채를 든 무령은 율을 보고 화사하게 웃었다.

    “선비님.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나를 찾으시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에서 이 무령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면 된다오. 이락보단 내가 선비님께 도움이 될,”

    휙! 이락이 그대로 검을 던져 버린다. 곧바로 날아간 검은 무령의 몸과 가마의 한가운데를 꿰뚫고 들어갔다. 율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가마의 흔적은 순식간에 사라져 깔깔깔 웃는 무령의 웃음소리만 마당에 맴돌 뿐이었다.

    믿기지 않아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봤다. 왕구와 왕태 역시 눈앞에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돌리던 율은 이락과 눈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그는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화가 난 표정으로 무령이 사라진 자릴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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