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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34화 (34/102)
  • 34화

    아침에 일어나니 곁에서 자고 있던 왕구가 보이지 않는다. 잠을 설친 탓에 눈 밑이 시커메진 율은 기지개를 켠 뒤 이부자리를 정리하였다. 밖으로 나와 세수를 하고 집을 휙 둘러보니 다른 식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이락의 방을 봤다. 툇돌에 신은 있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락은 생각보다 아침잠이 많았다. 어제 일을 떠올리니 또다시 뺨이 화끈거린다. 율은 머리를 저어 밀려드는 생각을 털어냈다.

    대야에 소셋물을 받아 수건과 함께 이락의 방 앞에 두고는 비질을 한 다음 부엌으로 가 밥을 짓기 위해 불을 지폈다. 그러고 나서는 방으로 들어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가지고 온 옷과 서책을 봇짐에 넣고, 마른 천으로 등껍질을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닦았다. 껍질 위에는 이곳에 와서 생긴 흔적들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추억으로 남겠지.

    그러고 나서는 그것들을 가지고 마루로 나와 앉았다. 이제 이락이 일어나길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마루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솥에서 밥이 익는 냄새가 솔솔 풍겨 온다. 밥 냄새를 맡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불면의 밤을 보낸 탓인지 잠이 솔솔 쏟아진다. 잠시 기둥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볕도 좋고, 적당히 바람도 불고. 떠나기엔 딱 좋은 날씨라고 생각하였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이락이 방 앞에 서서 율을 쳐다보고 있었다. 율은 당황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락 님, 일어나셨습니까….”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어 땅바닥을 보며 인사를 하니 이락이 웃는다.

    “덕분에 잘 잤다.”

    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화가 난 줄 알았는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다. 그는 세수한 뒤 물을 바깥으로 뿌리고는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 냈다. 그러고 나서는 율을 쳐다봤다.

    “얼굴이 왜 그래? 못 잤어?”

    내가 누구 때문에 못 잤는데. 율은 눈을 위로 한번 치켜떴다가 잽싸게 아래로 깔았다. 어제 한 짓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이락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잠깐 들어와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율이 버티고 서서 난처한 표정을 했다.

    “여, 여기서 말씀하시면 안 됩니까?”

    “단둘이 할 얘기다.”

    “여기서… 하십시오….”

    “안 잡아먹어.”

    그렇게 말하니 더 무섭다. 율이 울상을 하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냥 여기서 얘기하셔도 됩니다. 저는 여기가 편합니다. 그러자 이락이 성큼성큼 걸어온다. 율은 일어나서 도망치려다 팔이 붙들려 질질 끌려갔다. 버티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힘으로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이락 님. 이락 님 잠시만요! 놓아주십시오. 팔 빠지겠습니다!”

    소리를 지르다 보니 어느덧 이락의 방에 들어와 있다. 탁, 문이 닫혔고 율은 저고리의 앞을 움켜쥐고는 문에 바싹 붙어 경계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이락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관두고는 문갑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내 율에게 내밀었다.

    “열어 봐라.”

    율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것의 뚜껑을 열었다. 한지에 싸인 것을 꺼내어 펼치니 이끼 위에 풀뿌리 같은 게 놓여 있다. 율은 눈을 끔뻑이며 그것을 쳐다봤다.

    “뭡니까…?”

    “가져가서 네 어미한테 달여 먹여.”

    이게 무엇인데….

    “수백 년 된 산삼이다.”

    산삼…? 율은 입을 쩍 벌렸다. 그것은 육지에서 매우 귀한 거라고 들었다. 거기다 수백 년 된 산삼은 구하기 어려울뿐더러 값을 매길 수도 없다고…. 믿기지 않아 그것과 이락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 어찌하여 이것을 제게….”

    “효험이 있을지는 장담을 못 한다. 행수 말로는 죽은 자도 벌떡 일으킨다고 하던데, 그건 장사치가 떠드는 이야기고. 너도나도 기를 쓰고 구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그러니 네 어미에게 달여서 먹여 봐라. 나도 효능이 궁금하니까.”

    율은 입을 벙긋대며 그것을 다시 집어넣고 밀었다.

    “이렇게 귀한 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왜.”

    “이락 님께 더는 신세를 지고 싶지 않습니다.”

    “신세야 갚으면 되는 거고.”

    율이 고개를 들어 이락을 쳐다봤다. 갚다니. 이제 헤어질 텐데, 무슨 수로 갚는단 말인가. 마다하려고 하는데 이락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간다. 율도 황급히 산삼을 챙겨 일어섰다. 이락이 마루로 내려가길래 졸졸 쫓아갔다.

    “그럼 이것을 용왕님께 드려도 됩니까…?”

    “넌 네 어미보다 용왕이 중하더냐.”

    “그런 것보단….”

    율은 말을 얼버무렸다. 만약 이락의 고환이 효험이 없다면 용궁에선 병사를 보내 이락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급한 대로 이거라도 먹여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너희 용왕은 그거 먹으면 죽는다.”

    “예?”

    “그 병이 왜 생긴 줄 아느냐?”

    “왜… 생긴 것입니까?”

    “너무 잘 처먹어서.”

    “…….”

    “그러니 행여 그걸 용왕한테 줄 생각일랑 하지도 말아라. 왕을 독살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독살…. 상상만 하였는데도 몸이 떨린다.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율은 상자를 보다가 이락의 소맷귀를 붙들었다. 이락이 돌아보길래 입술을 잘끈 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락이 시선이 율의 긴 속눈썹과 빨개진 귀와 목덜미를 훑다가 제 옷깃을 꼭 붙든 손에 가서 닿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됐으니, 용궁으로 갈 채비나 하자.”

    “저는 다 했습니다. 이락 님만 준비하시면 됩니다.”

    이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토끼로 또 변하여야 하는 건가. 정말 싫은데. 율은 슬그머니 웃었다. 이락이 토끼로 변한 모습은 꽤 귀여웠으나 그걸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죽기는 싫으니까.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이락의 미간이 좁혀진다.

    “뭘 생각하길래 웃어?”

    “아, 아닙니다.”

    율은 품 안의 이락을 바라봤다. 구명환을 먹은 이락은 오랜 여행으로 고단하였는지 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역시 다시 봐도 귀엽구나. 귀를 한번 만져 보려다 혼이 날 것 같아 관두고는 성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곳에 오니 숨통이 트인다. 열흘 만에 돌아오니 고향이 저를 반기는 기분이었다.

    이 비릿한 내음을 율은 육지에 있는 내내 그리워했었다. 그렇게 용궁으로 들어가니 마침 대전에 대신들이 모여 있다. 다들 율을 반기었는데 율은 그들의 관모 아래 금관자에 눈길이 갔다. 용궁에선 품계에 상관없이 옥관자를 하여야 했는데 어째서 관자가 금으로 바뀐 것일까.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락이 꿈틀하고 품에서 움직인다. 율은 그를 내려놨고, 이미 한 번 겪었던 내관들이 가림막을 들고 뛰어와서는 주변을 에워쌌다. 잠시 뒤 이락이 토끼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율은 냉큼 돌아서서 바깥쪽을 쳐다봤다. 내관들 또한 시선을 돌리고 있었으나 몇몇은 얼굴이 붉어져 어쩔 줄 몰랐다. 내관들이 물러나고 나서 이락이 옷고름을 느긋하게 매며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열흘만인가. 다들 잘 지냈나 모르겠네.”

    그때 장어 대신이 울컥하여 소리쳤다.

    “저, 저 방자한!”

    그러자 고래 대신이 장어 대신을 툭 치며 눈짓으로 말렸다. 그러고 나서는 안색을 싹 바꾸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토 선생. 그간 잘 지내셨소?”

    “나야 여기 있는 자라 덕분에 잘 지냈지. 댁들도 신수가 훤해졌군. 관자가 잘 어울리네.”

    다들 뻘쭘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였다. 율은 이락이 보낸 것들이 누구에게 갔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이락에게 적대적이던 그들의 태도 또한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들 역시 이락이 육지에서 꽤 힘이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때 술렁이던 장내로 기진이 내관들과 함께 등장하였다. 전과 달리 대신들이 기진을 향해 일제히 조아렸다. 율은 놀란 표정으로 봤고 이락의 눈빛은 흥미로움이 가득하였다. 가까이 다가온 기진이 율의 손을 잡았다.

    “별주부 고생 많았네. 무사히 돌아와 내 심히 기쁘구나.”

    “모두 마마의 은덕입니다.”

    말을 마친 뒤 율은 봇짐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뚜껑을 열고 그것을 기진에게 내밀었다. 대신들이 고개를 쭉 빼고는 그것을 구경하려고 했다. 저것이 토끼의 고환이란 말인가. 우리들의 것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신기하게도 나이 많은 대신들은 고환이 쭈글쭈글한 것에 대해선 의문을 품지 않았다.

    “별주부. 저게 토끼의 고환이 맞는가. 자네가 분명 확인을 하였는가.”

    대신들의 물음에 율은 당황했다. 직접 만져서 확인하긴 하였는데 방법까지 세세하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예…. 하였습니다.”

    그럼 믿어도 되겠구먼. 별주부의 성정에 거짓을 고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저게 진짜 고환이 맞는 거군. 신기하구나. 저걸 떼었다 붙였다 할 수가 있다니.

    가만히 듣고 있던 이락이 한마디 했다.

    “이걸 쪼개서 안에 들어 있는 걸 왕에게 먹여. 그리고 달포간 물 외엔 아무것도 주지 마라. 그러면 너희 왕은 깨어날 것이다.”

    율을 포함한 대신들 모두 화들짝 놀란다. 지금도 저리 병세가 악화했는데 달포 동안 아무것도 먹질 못하면 왕이 버틸 수 있을까.

    “이보게, 토 선생. 만약 그러다 전하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엔,”

    이락이 고래 대신의 말을 끊고 비웃었다.

    “뭐가 걱정이지. 잘못되면 다음 왕위를 이을 왕자가 있지 않은가.”

    대신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감히 왕이 살아 있는 와중에 그런 망발을 하다니.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졌고 기진의 눈빛 또한 어두워졌다. 이락은 웃으며 기진을 보다가 대신들을 한번 빙 둘러봤다.

    “싫으면 말아. 어차피 선택은 그대들의 몫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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